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은이),우태영 (옮긴이)
다른세상2011-09-30 원제 : The Fall (2005년)
-
[품절] The Fall : The Insanity of the Ego in Human History and the Dawning of a New Era (Paperback)
-
책소개'
지난 6000년 동안 인류는 일종의 집단적 정신병을 앓아 왔다'고 주장하는 책. 저자 스티브 테일러는 우선 현재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자아폭발' 이전과 이후의 시기로 구분한다. 그는 '자아폭발'을 '타락'이라고 지칭하며 '인류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진보한 것이 아니라 퇴보의 길을 걸어왔다.'고 말한다.
원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6000년의 기나긴 역사를 새롭게 재구성한 책으로, 각종 병리 현상의 근원과 우리가 복원해야 할 '정상적인 모습'을 논리정연하게 제시한다. 저자는 타락, 전쟁, 가부장제, 사회적 억압, 남녀 불평등, 성의 불평등, 인종 우월주의, 개인주의, 물질주의, 심리 불안, 자연 파괴 등 현재 일어난 인류의 문제를 '자아'의 발현에서 찾는다.
그리고 자칫 막연하거나 허황된 이야기로 들릴 수 있는 주장을 리안 아이슬러, 리처드 러글리, 콜린 윌슨, 팀 카서를 비롯한 저명한 문화인류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수십 년간 축적된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차분하게 증명한다. 그는 '자아폭발' 이전의 인류 사회가 이상적이었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자아폭발' 이전과 이후의 장단점을 고루 설명하는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준다.
====
목차
한국어판 서문
서문
들어가면서
1부 타락의 역사
1장 인류는 무엇이 잘못되었나
2장 타락 이전 시대
3장 타락의 시작
4장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
5장 자아폭발
2부 타락의 심리학
6장 새로운 정신의 출현
7장 정신적 불화로부터의 탈출
8장 전쟁
9장 가부장제
10장 불평등과 어린이 억압
11장 신과 종교의 탄생
12장 육체로부터의 분리
13장 시간의 자각
14장 자연의 종말
3부 타락 초월 시대
15장 제1차 물결 - 자아인식의 초월
16장 제2차 물결 - 새로운 공감인식과 대중운동
17장 인류 의식의 진화를 위하여
====
접기
책속에서
P. 19 만약 외계인이 있어서 지난 수천 년 동안의 인류 역사의 진행과정을 관찰해 왔다면 인류는 아주 망가진 과학실험의 산물이라는 결론을 내리기 십상일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다른 외계인이 놀라운 지적 능력과 독창성을 가진 완벽한 존재를 창조하는 실험을 할 장소로 지구를 선택했다는 가설을 제기할 것이다.
P. 45 이 책의 주제와 관련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보다 흥미 있는 사실은 수렵채취 사회에서 지난 수천 년간 인류 사회의 특징이 된 문제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는 것이다. 초기 인류에 대한 일반적인 가설, 즉 이들이 늘상 입에 게거품을 물고 공격적인 행동을 한다거나 몽둥이로 상대방의 머리통을 후려갈기는 “야만인들”이라는 신화는 전혀 정확하지 않다. 사실은 이와 크게 다르다. 접기
P. 95 우리가 이 장(章)에서 살펴본 역사의 한 기간을 바로 앞장과 비교한다면 인류 역사의 주요한 사건은 조화로부터 혼란으로, 평화에서 전쟁으로, 생에 대한 긍정에서 우울함으로, 온전한 정신 상태에서 광기로의 극적인 전환이라는, 갑작스럽고 대규모적인 퇴행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P. 160 “두뇌폭발”이라는 용어는 우리의 진화 과정에서 인간의 뇌가 극단적으로 빠르게 성장한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뇌는 지난 50만 년 동안에 3분의 1이 커졌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그와 평행되는 용어로 인류 정신 내부의 갑작스럽고 극적인 변화를 지칭하는 “자아폭발”을 소개하려 한다.
P. 234 그리고 프랑스의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은 ―그는 전쟁이 350년간 끊임없이 지속되던 시대에 살았다― 권태와 전쟁의 연관성을 인식하고, 전쟁에 대해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기 방에서 조용히 머무르는 법을 모른다는 것”이라고 썼다. 파스칼은 이어 “인간에게 유일하게 좋은 일은 그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에서 다른 데로 생각을 돌리는 것이다. …… 그것이 도박과 여성 사교계, 전쟁과 고위 관직이 매우 인기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접기
=====
추천글
타인을 영접하라 - 장석주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자아폭발’은 놀라운 책이다. 저자는 엄청나게 박식하며, 명쾌하고 정연한 논리를 펼치고 있다. 인류가 항상 정신적인 혼돈을 경험한 것은 아니며 그럴 필요가 없다는 저자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다. 이 책은 놀라운 업적이다. - 콜린 윌슨 (《현대 살인백과》의 저자)
인간에게 잔혹성과 폭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강력한 근거를 제공하는 중요한 책이다. - 리안 아이슬러 (《성배와 칼》의 저자)
테일러는 전쟁·가부장제·물질주의가 생겨나게 된 원인을 도발적으로 진단한다. 이 책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자연과 화합하며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 팀 카서 (《물질주의의 커다란 대가》의 저자)
학술적인 저작이면서 역사 정보를 가득 담고 있는 책. 인간 의식의 진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 위즈덤 매거진
===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중앙일보
- 중앙일보(조인스닷컴) 2011년 10월 01일 '200자 읽기'
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1년 10월 01일 새로나온 책
조선일보
- 조선일보 Books 북Zine 2011년 10월 01일자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1년 9월 30일
====
저자 및 역자소개
스티브 테일러 (Steve Taylor) (지은이)
영국의 리즈 베켓 대학교에서 부교수로 학생들에게 심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어릴 때 ‘자연스러운’ 깨달음을 경험하고 방황한 끝에, 영적 수행의 길을 걸으면서 동시에 수행과 영성의 본질을 이성적·학문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병행해 왔다. 그의 연구는 《자아초월 심리학 저널(The Journal of Transpersonal Psychology)》, 《인본주의 심리학 저널(The Journal of Humanistic Psychology)》을 포함한 여러 학술지에 실렸고, 《가디언》, BBC와 같은 유력 매체에 특별 보도되기도 했... 더보기
최근작 : <마음의 숲을 걷다>,<보통의 깨달음>,<조화로움> … 총 101종 (모두보기)
==
우태영 (옮긴이)
서울 출신.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러시아 외교아카데미 수료. 조선일보 사회부 문화부 국제부 등에서 근무. 번역한 책으로는 《자아폭발(Steve Taylor, the Fall)》, 《부의 도시 베네치아(Roger Crowley, CITY OF FORTUNE : How Venice Won and Lost a Naval Empire)》, 《인류의 건축유산(Andrew Ballantyne, Key Buildings from Prehistory to the Present)》 등이 있다.
최근작 : <이탈리아를 만나면 세상은 이야기가 된다> … 총 5종 (모두보기)
===
출판사 제공 책소개
타락, 전쟁, 가부장제, 사회적 억압, 남녀 불평등, 성의 불평등,
인종 우월주의, 개인주의, 물질주의, 심리 불안, 자연 파괴……
지난 6000년 동안 인류는 일종의 집단적 정신병을 앓아 왔다.
지금이 바로 인류 의식의 진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는 왜 전쟁을 일으켜 서로를 죽이고, 소수가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여 절대다수의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며,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고, 자연을 훼손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을까? 어째서 우리는 항상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근심·걱정·불안이 끊이지 않고, 끝없이 성공과 권력과 명성을 쫓으면서도 만족감과 성취감 대신 불만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이러한 모든 광기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자아폭발”이다!
※ 책을 발간하면서
역사와 문명, 자아와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책
《자아폭발》의 표지에 사용된 이미지는 고야의 <잠자는 이성은 괴물을 깨운다(The sleep of reason pruduces monsters)>라는 제목의 판화이다.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이 이미지는 “과도하게 발달된 자아 인식”, 즉 “자아폭발”로 인해 우리의 삶이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스티브 테일러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현재 일어난 인류의 문제를 “자아”의 발현에서 찾은 것이다. 테일러는 자칫 막연하거나 허황된 이야기로 들릴 수 있는 주장을 리안 아이슬러, 리처드 러글리, 콜린 윌슨, 팀 카서를 비롯한 저명한 문화인류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수십 년간 축적된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차분하게 증명한다. 그는 “자아폭발” 이전의 인류 사회가 이상적이었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자아폭발” 이전과 이후의 장단점을 고루 설명하는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준다.
이 책은 우리가 무심하게 넘겼던 부분을 되짚어보며, 얼마나 우리가 얼마나 큰 폭력과 공포, 불안에 노출된 삶을 살아왔는지 깨닫게 한다. 이러한 깨달음이 사회적·개인적 병리 현상들과 같이 우리가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한순간에 되찾아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각이 있음으로써 우리의 삶을 보다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세상에도 점진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테일러의 말처럼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 내용 소개
인류 역사의 대전환 - “자아폭발”
바퀴·쟁기·달력·수로체계·건축기술 등의 기술적인 진보와 혁신적인 사고를 가진 이들은 수메르와 이집트문명을 비롯한 수많은 “문명”을 발전시켰다. 과학과 지성의 발달로 인류는 미신과 금기의 공포에서 해방되었고,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비약적 발전과 함께 문명이 가져다준 여러 혜택을 누리며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역사”의 발전과 진보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의 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황폐와 폭력, 억압의 모습에 경악을 금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현재 인류는 전쟁, 억압과 불평등, 환경 훼손 등의 사회적 병리 현상이나 성과 육체에 대한 수치심, 행복과 성공에 대한 강박관념, 우울증, 정서장애 등의 개인적 병리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인류가 겪고 있는 외부적·내부적 불화와 고통이 과연 “정상적”인 것일까? 이러한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면 무엇이 “정상적”이고 “이상적”인 것일까? 이러한 상태가 유지된다면 과연 인류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스티브 테일러는 우선 현재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자아폭발” 이전과 이후의 시기로 구분한다. 그는 “자아폭발”을 “타락”이라고 지칭하며 “인류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진보한 것이 아니라 퇴보의 길을 걸어왔다.”고 말한다.
생존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테일러는 수십 년간 축적된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자아폭발” 이전, 즉 선사시대의 인류는 우리보다 훨씬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했으며 즐거움과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고대 인류의 삶은 “자아폭발” 이후 폭력과 억압으로 점철된 삶으로 바뀌었지만, 그들의 흔적은 아프리카 원주민과 아메리카 인디언, 오스트리아 애버리진을 비롯한 원주민 집단들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 원주민 집단은 결코 “미개한” 존재가 아니다.
아메리카와 남태평양의 원주민은 이미 “모든 사람은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라는 무계급사회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사회는 루소의 《사회계약론》, 프랑스대혁명, 미국 헌법 기초에 깔린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생각한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킨 모델이 되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자연 환경과의 조화?각 집단 간에 조화를 이루는 정신을 충만하게 가지고 있어, 정서적으로 안정된 삶을 영위한다. 그들은 “과도하게 발달된 자아”가 없기 때문에 우리처럼 막연한 불안감과 강박관념에 시달리지 않으며, 시간을 끄는 기다림조차 평온하게 받아들인다.
원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6000년의 기나긴 역사를 새롭게 재구성한 《자아폭발》은 각종 병리 현상의 근원과 우리가 복원해야 할 “정상적인 모습”을 논리정연하게 제시한다. 7년에 걸쳐 이루어진 스티브 테일러의 정교한 작업은, 문화인류학·역사학·고고학·철학·심리학·생물학 등등 각종 분야를 넘나들며 우리에게 충격과 경이를 선사한다.
인간성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현 시점에서 이 책은 우리 삶의 방식을 변화시킬 것이다! 접기
====
북플 bookple
평점분포 8.9
====
10년 전에 품절 된 책을 추천해주심 어떡해요ㅠㅠ
궁금합니다. 재 입고 해주세요!!!ㅠㅠㅠ
xoxoRadun 2020-02-07 공감 (6) 댓글 (0)
==
삼분의 이까지가 아주 좋다. 인류가 어떻게 망가져버렸는지 통찰하도록 도움을 준다.
겐지의깊은잠 2018-06-30 공감 (2) 댓글 (0)
==
재입고 부탁합니다. 인류사의 진실을 알고싶네요
taeo0320 2021-03-28 공감 (0) 댓글 (0)
===
마이리뷰
===
실낙원: 문명의 역사심리학
“약 500년 전에는 따뜻한 날보다는 추운 날이 훨씬 더 많았다. 1500~1850년까지의 소빙하기에는 유럽과 북아메리카 동부에 걸쳐 지속적으로 대단히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이 시기 소빙하기는 태양흑점의 감소 때문이다. 태양흑점이 감소하면 태양에서 지구로 오는 복사에너지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17세기 후반에 걸쳐(기본적으로 1645-1715년까지) 흑점의 활동이 대단히 분명하게 그리고 예기치 못하게 사라졌다.” (랜디 체르베니)
기후학에서 1645-1715년 사이의 기간을 마운더 극소기라 부른다. 흑점활동에 따른 기온의 냉각이 중요한 이유는 농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17세기 소빙하기 이전 흑점주기로는 1400-1510년의 슈뢰퍼 극소기, 1280-1340년의 볼프 극소기가 있다.
볼프 극소기 직전에 중세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12세기 르네상스가 있었다. 이 시기가 끝난 것은 보통 흑사병 때문이라 본다. 그러나 랜디 체르베니는 흑사병의 유행보다 볼프 극소기로 들어선 것이 12세기 르네상스의 종식의 더 큰 원인이라 생각한다.
슈뢰퍼 극소기 역시 중요한 시기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겹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본질적으로 경제의 장기순환에서 하강기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낮은 이윤율에 시달린 자본이 생산적인 투자로 돌려지지 않고 과시적인 소비에 돌려졌으며 그 소비가 르네상스의 자금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종교개혁과 30년 전쟁 같은 전란의 시기였다.
마운더 극소기에 “지구의 기온은 오늘날에 비해 1.5도 정도 더 낮았다. 혹독하게 추었고 서구문명에서 전쟁과 혁명이 많이 일어났던 시기와 맞물린’다. (랜디 체르베니)
당시는 대항해시대이기도 햇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폭력의 일반화 혹은 폭력의 세계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 이전 시대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이상사회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 군사기술과 무기가 더 발달하고 군사력이 훨씬 강력해졌으며 또 그렇게 강화된 군사력을 더욱 빈번하게 사용하였다. 맥닐이 말하는 ‘군사혁명’이 일어난 유럽의 근대는 전쟁의 시대였고 그 폭력은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세계 여러 문명의 조우는 불행하게도 평화적이기보다는 대개 폭력적이었다. 유럽의 팽창 자체가 우선 무력 사용이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다른 대륙의 이질적인 문명권 안으로 뚫고 들어가기 위새서 무엇보다도 강한 무력을 갖추어야 한다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아에 거주했던 포르투갈 인의 보고에 의하면 1502년 바스코 다 가마가 캘리컷에 도착했을 때부터 벌서 가공할 폭력성을 드러냈다. 그는 무슬림 선단을 격침한 다음 800명의 귀와 코 손을 잘라서 캘리컷의 지배자에게 보내면서 카레라이스를 해먹으라고 말햇다고 한다. 그의 선단의 한 선장은 무슬림 상인을 채찍질하여 그가 실신하자 입에 오물을 넣고 돼지고기 조각으로 입을 막음으로써 종교적인 모욕을 가했다. 유럽인과 아시아 인 사이의 거의 첫번째 접촉부터 유럽 인들은 너무나도 폭력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앞세워 그들이 찾아간 해외 지역의 현지인을 지배 정복하거나 약탈과 해적 행위를 통해 직접 부를 취하기도 했으며 교역 행위를 할 때에도 무력 위협을 통해 유리한 위치를 점하였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여러 학자들은 전산업화 시대에 유럽 인들이 전 세계에 수출한 것은 다름 아닌 폭력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주경철)
유럽인들은 왜 그렇게 폭력적이엇을까? 지금의 유럽인들을 생각하면 떠오르기 힘든 이미지이다. 랜디 체르베니는 소빙하기가 그 일부를 설명할 수있다고 말한다. “소빙하기(1550-1850) 기간은 오늘날 보다 상당히 추웠다. 이런 혹독한 환경에 걸맞게 당시 유럽 문명은 문화적으로 대단히 요란하고 열광적이어서 식민지 확장, 혁명, 전쟁으로 얼룩져 있었다.” (랜디 체르베니)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근대란 폭력이 만들었다는 말이다.
이책의 저자는 문명 역시 그러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문명을 만든 폭력 역시 유럽의 폭력처럼 기후가 원인이었다고 말한다.
“기원전 4000년경에 빙하시대가 끝난 이후 가장 중요한 환경 및 기후변화 중 하나가가 일어났다. 제임스 드메오는 건초화가 진행되어 그가 ‘사하라시아’라 부르는 지역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이름이 시사하듯 사라하시아는 북아프리카에서 중동을 거쳐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건조한 땅으로 이루어진 고아대한 지대이다. 기원전 4000년경까지 사하라시아는 삼림에 가까운 초원이었으며 호수와 강, 인간과 동물로 가득차 있었다. 기원전 4000년 이전까지 사하라시아가 비옥했던 것은 아마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뒤 빙하가 물러나고 녹아내려 해수면이 상승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결국 빙하는 더 줄어들고 녹아서 사라져 버려 더 이상 수분도 남지 않았다. 해수면도 내려갔고 근동과 중앙아시아에서부터 마르기 시작했다. 식물은 사라지고 기근과 가뭄이 심해졌다. 농업은 불가능했다. 물이 없으므로 사냥을 나가도 짐승을 잡을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없었다. 이러한 환경 변화는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정신이라는 양면에서 엄청나게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 같다.” 그리고 그 변화를 저자는 타락이라고, 성서는 에덴에서의 추방이라 말한다.
“타락 이전에 대한 기억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졌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각색되어 민담이나 신화가 되었다. 에덴동산에는 이란의 파이라대자처럼 강과 아름다운 생명나무가 있었다. 아담과 이브는 거기서 벌거벗고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화합하여 살았다. 그런데 뱀이 이브를 유혹하여 선악과 열매를 먹도록 하였다.” 저자는 이란의 낙원 신화와 성경의 신화는 동일한 사건을 가리킨다고 본다. “두 이야기 모두 따듯한 고향이 사막으로 변하여 추방되지 않을 수 없었던 사하라시아인들의 경험에 대해 언급하는 것같다.” 그리고 낙원에서의 추방된 인간의 정신은 타락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타락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폭력이다.
“전쟁은 인류 이외의 다른 동물의 왕국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릴라나 침팬지 같이 어느 정도의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는 영장류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이 인간처럼 호전적이지는 않다. 그것들은 타고난 행동양식이나 서식지가 침해받을 경우에만 낮은 수준의 호전적 행동을 나타낸다.” 그러나 방어적인 동물의 공격성과 달리 “인간의 공격은 악의적이다” 저자는 인간의 악의적인 공격성을 타락의 결과라 말한다. “전쟁은 단지 기원전 4000년경에 시작된 듯하다.”
저자는 고고학과 인류학의 연구결과를 종합하면서 기원전 4000년 전 이전 그리고 수렵채집인들에겐 전쟁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기원전 4000년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분수령을 타락, 즉 자아폭발 때문이라 말한다. 건조화란 환경재앙때문에 사하라시아인의 정신을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그들의 환경이 변화하면서 집단들은 새로운 난관들에 직면하게 되자 틀림없ㅎ이 새로운 종류의 지능과 실용적이고 창의적인 문제 해결능력이 필요해졌다. 그들이 생존해 나라기 위해서는 심사숙고하고 미리 생각하고 해결책을 신속히 발견하고 새로운 실용적 조직적 능력들을 발달시켜야만 했다. 예를 들어 땅이 매우 건조해지면 산출물을 늘리기 위해 새로운 사냥법이나 농경법을 찾아내고 새로운 물 공급원을 찾아내거나 이전에 쓰던 수로를 더 길게 만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하라시아인들은 더 많이 생각하고 자성능력을 발전시키고 추론하고 머깃속에서 자신들에게 ‘말하기’ 시작하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 대한 더 강한 인식을 발전시킴으로서 이를 할 수 있었다. 우리가 본 대로 자성이란 내 머릿속의 ‘나’가 자기 자신에게 수다를 떠는 것이다. 당신이 창의적이길 원하고 심사숙고하고 싶고 미리 계획을 세우고 싶다면 당신은 생각할 ‘나’를 가져야만 한다. 이러한 종류의 생각은 필연적으로 환경과의 분리와 ‘개인적이고 예리하고 공간적으로 결정되는 의식’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두번째 환경이 변하기 시작하여 곡물수확이 줄어들고 사냥하려는 동물들도 죽어 없어지고 물도 마르는 등 인간집단의 생활이 매우 곤궁해지면서 이기심이라는 새로운 정신을 고무시켰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전체 공동체의 관점보다는 그들 자신의 필요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고 자신들의 필요를 공동체의 필요보다 먼저 생각하기 시작해야만 했다. 공유는 더 이상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렵채집인들은 자원이 부족해도 다른 집단에 더 공격적이거나 경쟁적으로 대하는 등의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다른 장소로 이동하거나 다른 집단들과 합친다. 그러나 사하라시아인들은 농업으로 살았다. 경작지가 부족할 때에 단지 새로운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고 해결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니며 자원이 너무나도 희귀해져서 같은 집단 구성우너들조차 먹일 수 없게 된 집단들은 새로운 구성원을 받으들일 것같지 않았다. 한 집단이 자원에 대한 접근을 확보하려면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힘을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어려운 새환경이 개인과 공동체의 분리, 마음과 몸의 분리, 개인과 자연의 분리를 촉진했다. 그리고 자성과 합리성의 더 큰 능력이 필요해졌다. 몇세대의 사하라시아인들이 새롭게 예민해진 자아인식을 가지고 살게 되자 그것은 그들의 일부로 고착되어 모든 개인들이 어른으로서 자연적으로 발달시키는 정상적인 정신상태가 되었다.”
이 결과를 저자는 자아폭발이라 부른다. 저자는 자아폭발은 “우리에게 발명, 창조성, 합리성이라는 새로운 능력을 선사했다. 자아폭발을 뒤따른 시대가 지적으로 놀라운 진전을 이룩한 시대엿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시기적으로 청동기 시대와 일치하는 이 시대에 “글쓰기, 수학, 그리고 천문학이 발견되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지식폭발이 일어났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마음이 갑자기 새로운 차원을 드러낸 것 같았다. 금속 가공술의 개선, 건축기술, 바퀴, 쟁기, 달력, 수로체계 등의 모든 기술혁신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사하라시아인들에 의해 불과 수세기만에 이루어졌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문명은 사하라시아인들로 인해 가능했다.
물론 사하라시아인들이 처음 문명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최초의 문명이라 불리는 메소포타미아문명은 그들 이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사하라시아인들 이전의 문명은 “흔히 높은 기술수준과 강력하게 중앙집권화된 권위를 포함한 사회조직, 사회적 계급분화 그리고 전쟁” 같은 특징이 없엇다. 사하라시아인들 이후의 문명은 새로운 문명이라 보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자아폭발의 선물은 정신적 불화란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 얻은 것이었다. “정신적 고통 단지 타락과 함께 존재했다. 타락은 인간의 생활양식만 바꾼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삶을 체험하는 방식과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에도 급격한 변화를 초래했다. ‘인생은 고통’이라는 붓다의 말씀은 타락 이전 세상에서는 분명 틀린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 이후의 세상에서 그것은 모든 말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진실이엇고 모든 인간이 자신들의 존재의 핵심에서는 친숙해진 언급이었다. 인생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부담으로 갑작스럽게 바뀌었다.”
우리가 자아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좌뇌의 인식이다. 콜린 윌슨은 자아의식을 좌뇌인식이라 부른다. “좌뇌인식은 거울 속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듯이 스스로를 생각하는 능력이다.” 좌뇌와 달리 “우뇌는 비자아중심적 세계관이 특징이며 좌뇌처럼 세계를 해석하고 통제하려는 충동이 없다. 문제는 뇌의 두 반구가 상호배타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우뇌 특징이 더 강하면 좌뇌 특징은 더 약해진다.” 타락 이전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우뇌지향적이었다.” 우뇌지향적이었던 타락 이전 사람들이 느꼈던 세계는 타락 이후 사람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뇌졸증으로 좌뇌가 파괴되었던 질 테일러는 우뇌로 살아야 햇던 동안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 삶과 나를 단단히 묶어놓았던 끊임없는 노의 수다가 잦아들자 그 자리에 평온한 행복감이 밀려와 나를 포근하게 감쌌다” 몸과 외계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마치 우주와 하나가 된 듯했다. 좌뇌의 분석적 판단 능력이 상실된 상태에서 평온과 안락, 축복과 행복, 충만의 감정이 나를 휘감았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서둘러 밀어붙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햇다. 그저 한가롭게 해변을 거닐거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빈둥거리듯, 좌뇌의 ‘행하는’ 의식을 우뇌의 ‘존재하는’ 의식으로 바꾸었다. 아주 사소하고 늘 고립되어 있다고 느꼈던 내가 이제 거대한 존재가 되어 주위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을 것같았다. 내가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여기 이 순간 뿐이었고 그것은 아름다웠다. 단일하고 견고한 실체였던 나의 자아상이 완전히 바뀌어 스스로가 유동체임을 알게 되었다. 나의 우뇌는 영원한 우주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즐거워했다. 나는 더 이상 고립된 외톨이가 아니었다. 내 영혼은 우주만큼이나 거대했고 드넓은 바다에서 흥겹게 장난치며 놀았다. 내 눈은 더 이상 사물을 구별하여 지각하지 못했다. 에너지가 서로 뒤섞여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나는 나를 에너지 흐름 속에 있는 존재로 인식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엿다. “내게 사람들은 에너지가 집중적으로 몰려있는 덩어리 같았다.” “우뇌가 나를 지배하면서 타인의 감정에 더 많이 공감하게 되었다.” “여러분의 에너지가 주위의 에너지와 섞여들면서 늘어나고 스스로를 우주만큼이나 거대한 존재로 느끼게 된다. 여러분이 누구이고 어디에 사는지 일깨워주던 머릿속의 작은 목소리는 침묵한다. 여러분을 예전의 감정적 자아와 연결해주던 기억이 사라지고 지금 이 순간의 풍성함만이 여러분의 인식을 사로잡는다. 모든 것이 순수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질 테일러)
그 에너지를 호피족은 마사우, 라코타족은 와칸탄카로 포니족은 티라와, 폴리네시아에서는 마나라 불렀다. 와칸탄카는 “모든 사물을 움직이는 힘이다. 포니족의 한 사람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티라와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티라와는 모든 것 내부에 있는 힘으로 생각하며 어둠 위에서 움직여서 밤이 새벽을 낳게 한다. 그것은 갖 태어난 새벽의 숨결이다.” 영어로는 spirit 즉 영혼이라 부를 수 있는 이것들은 힌두교에선 브라만이라고 도교에선 道라고 부른다. 브라만은, 도는 모든 것에, 생명이 있든 없든 우주의 모든 것에 있다. 타락 이전의 사람들은 자연을 영혼의 현시라고 보았고 그들 자신들도 영혼의 현시라고 “보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과의 연대감 및 연관성을 느끼며 자연과 정체성을 공유한다고 느낀다. 이는 우리가 보통 경험하듯 자연계에 대하여 타자성을 느끼는 것과는 상반된다.”
그러나 자아폭발은 ‘나’와 세계와의 연결을 끊었다. 자아폭발의 문제는 “예민하게 발달된 우리의 자아인식이 우리가 머릿속에 갇혀있다는 인식, 우리가 두개골 안에 있는 하나의 ‘나’이며 우주의 나머지 및 다른 모든 인간들은 다른 편에 있다는 인식을 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근본적으로 ‘고독’을 인식한다.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이 자연이나 다른 살아 있는 것들과 연대감을 갖는 것은 그들이 절대 혼자임을 체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항상 세상과 연관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 고독에 대한 인식은 불완전함에 대한 인식을 동반한다. ‘자아분리’는 우리가 단절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이 전체 우주의 일부인 반면 우리는 전체로부터 깨져나와 고립된 조각들이다. 그 결과 우리는 근본적으로 어떤 불충족 인식, 우리 자신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인식,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인식을 갖는다. 그것은 정신적 추방이며 유배이다. 그것은 우리의 집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좌뇌인식은 고독만 선물한 것이 아니라 권태도 선물했다.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굉장히 ‘사실적인’ 장소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살아 있다. 바위, 강, 산과 같이 ‘생명없는, 무생물적’ 사물도 살아 잇다. 그들에게는 창조의 경이와 환상이 모든 나뭇잎과 돌, 모든 가시와 싹에 어른거린다. 그러나 우리 타락한 사람들에게는 세계는 따분하고 지루한 장소이다. 하도 지루하여 실제로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정도이다. 우리는 다만 과제들과 집중을 방해하는 것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수다에 집중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우리는 바위나 강, 나무들에 내재하는 생명, 그것들이 (애보리진의 용어로는) ‘꿈꾸고 있다’는 인ㅅ힉을 상실했다. 마치 3차원적 인식이 아닌 2차원적으로만 볼 수 있는 것같다.” 타락 이전 사람들에겐 명백한 현실이었던 브라만, 또는 도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대신 우리가 얻은 것은 뇌의 수다이다. 뇌의 끊임없는 수다는 우리에게 분석력, 추리력, 예측력을 주었다. 그러나 그 수다는 비싼 대가를 치루고 얻은 것이다.
:타락하지 않은 우리 조상들은 정신적 행동이나 집중적 노력에 매우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정보처리에 특히 주위의 현상세계를 인지하는데에 사용할 정신적 에너지가 아주 많았다. 그러나 자아폭발과 함께 이 균형은 극적으로 이동했다. 자아는 매우 강하고 능동적이어서 훨씬 많은 의식 에너지를 사용했다. 동시에 사람들의 생활도 매우 어려워졌기 때문에 더 많은 에너지와 주의를 집중적인 노력에 투입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그들에게는 제3의 기능 즉 정보처리 특히 주위의 현상세계를 인지하는데에 들어갈 의식에너지가 줄어들었다.” 저자는 이를 “둔감화기제’라 부르며 정신 에너지의 재분배의 한방식이라 부른다.
둔감화기제는 우리 자신 밖의 것을 배경으로 처리해 잊혀지게 한다. 그렇게 절약한 에너지를 분석하고 추리하고 예측하는 좌뇌의 수다를 듣는데 써버린다.
불교에선 번뇌라 부르는 이 수다는 마음의 폭군이며 불교식으로 말하면 우리를 무지하게 만든다. "무지는 교양이 없다든가 머리가 나쁘다는 듯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 스스로의 의식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어떤 사고가 소용돌이 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뇌의 일부를 혹사하며 생각을 많이 할수록 신체와 마음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알기 어려워지고, 무지해진다. 상대의 표정과 목소리 변화를 확실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늘 같은 얼굴이군, 지루해...'라며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머릿속에는 쓸데없는 개념과 망상만 쌓이게 되고, 현실과 의식의 실제 흐름에 무지하게 된다. 무지라는 번뇌는 마음을 실제적인 현실에서 뇌 속의 생각으로 도피시키는 것이다. '이 일을 실패하면 어쩌지?'라든가 '실패해서 저 사람에게 무시당하면 어쩌지?'하는 잡념이 연쇄적으로 재빠르게 일어나며 마음속에 들끓게 되고 마음의 메인 메모리는 헛된 잡념으로 가득찬다. 1초동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도 0.1초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나머지 0.9초는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나 과거의 잡음이 남긴 메아리에 휘둘린다면 어떻게 될까? 10초 중 9초는 현실감이 사라지고 한 시간에 54분은 멍청히 있게 된다. 현실 그 자체에 직결되지 않는 망상에 탐닉한 결과, 현실감이 사라지고 행복감도 사라진다. 나이가 먹을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과거로부터 엄청나게 축적되어온 생각이라는 잡음이 현실의 오감을 통해 느끼는 정보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고병 즉 '생각병'이다." (코이케 류노스케)
칙센트미하이는 뇌의 수다를 정신적 엔트로피라 부른다. “고독에 대한 인식의 결과로서 우리의 마음은 걱정에 사로잡힌다. 수다 떠는 자아는 우울한 사람과 같아서 모든 것에 대해 불평을 토로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곤경을 이야기한다.”
그 곤경의 으뜸은 죽음이다. “자아의식을 발전시키고 자신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그들 자신의 잠재적 부재도 알게 되었다. 우리와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 간의 한가지 중요한 차이는 그들이 죽음에 대해 덜 두려워하는 것같다는 점이다. 그들의 특별한 개인성이 그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자연이나 공동체 또는 그들이 속한 종족의 존재와 완전히 분리할 수 없었다. 때문에 개인으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 중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자아폭발은 우주로부터, 자연으로부터, 공동체로부터 우리를 분리시켰다. 그 분리로부터 태어난 첫번째 결과가 폭력이다.
사하라시아인의 대표적 종족인 인도유럽인과 셈족은 어느 시대의 기준으로 보나 극단적으로 폭력적이었다. 셈족의 경우를 보자. “유월절 축제는 예리코 공격에서 시작된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성전을 준비하는 행사였다. 예리코의 성벽은 기적적으로 허물어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소건 양이건 나귀건 모조리 칼로 쳐 없애버렸다.’ 야훼는 전쟁의 신이었다.” (카렌 암스트롱)
남녀노소, 가축까지 돌 하나 남기지 않고 즐겁게 ‘신의 축복’을 받으며 살인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남의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다. “자아폭발은 인간들 사이에 공감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것이 전쟁의 중요한 원인이다. 공격성은, 보통의 경우에조차도, 단지 공감능력이 줄어들었을 때에만 발생한다. 당신이 만약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낄까에 마음을 쓴다면 다른 사람을 해치려 할 수 없다.”
물론 전쟁은 단순히 타인에 대한 무감각만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저자는 전쟁이 둔감화기제 때문에 생긴 권태와 비현실감을 해소하려는 방법으로 발전했을 것이라 말한다. “전쟁은 권태와 무목적성의 공포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오락 내지는 운동으로 그리고 인간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으로도 중요해졌다.” 파스칼은 “권태와 전쟁의 연관성을 인식하고 ‘인간에게 유일하게 좋은 일은 그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에서 다른 데로 생각을 돌리는 것이다. 그것이 도박과 사교계, 전쟁과 고위관직이 매우 인기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1차대전에 유럽인들이 열광했던 이유라고 에른스트 융거는 주장했다.
“학교에 다녀야 할 청년이 젊은 군인의 고귀한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책가방 대신에 무기를 든다. 청년은 비가 내리고 화염이 진동하는 황혼의 전선에서 육중한 화약상자를 두 손에 들고 말없이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순간 그 청년이 고독하게 짊어진 책임의식은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을 그 청년은 청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인 타오르는 꿈으로 극복한다. 바로 여기서 이름없이 사라져간 용사들에 대한 조용한 미사가 진행된다. 이러한 영웅적인 믿음의 화음이 울려 퍼질 때 인간은 자신을 희생한 인간들에 의해서 구현된 고귀한 형제애를 맛보게 된다. 그리고 화혐의 지옥에서도 영혼은 숨쉬기 시작하며 청년은 내면의 날개를 달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날아오른다.” (융거 1929, 박찬국 2001에서 재인용)
반동적 근대주의자라 평가되는 융거는 전장의 경험을 ‘모험정신’이라 요약한다. 총탄과 폭탄이 뇌우처럼 쏟아지는 전장에 뛰어든 인간이 목숨을 건 대가로 얻는 것은 “강력한 내적인 고양”의 경험이라 융거는 말한다. “융거의 반동적 근대주의는 파시즘의 미학과 통한다. 파시즘의 미학은 자기 희생을 통한 죽음,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행동에서 최고의 삶의 고양이 일어난다고 보는 죽음의 미학이다.” (박찬국) 융거가 말하는 전장의 경험은 ‘서부전선 이상없다’가 말하는 전장과는 판이하다. 그러나 노리로르와 같은 역사사는 융거의 분석에 동의한다. “그들은 건너편 참호의 적을 증오하지 않았다. 혹독한 생을 이어가지 위해서 사람들은 보다 훌륭하고 보다 고결하며 보다 정신조국에 대한 신앙에 의지했다. 사람들은 나중에 진정한 국민은 저 멀리 참호 속에 있었다고 말하고는 했다. 틀림없이 영국과 프랑스의병사들도 비슷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보다 아름다운 생활, 새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조국, ‘영웅이 사는 나라’에 돌아가는 꿈이었다. 전쟁터의 정신을 고향에 이식해 생을 변혁하는 일은 불가능한가? 모든 에고이즘이 제거된 생활은 불가능한가? 이 전쟁에는 그 빡에 더 많은 것이 있었다. 희생과 영웅적 용기, 살벌하고 가공할 전쟁 속에서 의무를 수행하려는 의지, 이런 것들이 많은 독일 청년들이 전쟁터에서 구현하고자 한 정신이었다.” (노이로르 1956)
“융거는 전쟁을 억압되엇던 야성적인 생명력의 폭발적인 분출이라고 해석했다. 전쟁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 광적인 도취와 고통, 그리고 냉혹함, 피와 용기와 동지애와 적개심과 같이 평소에 억눌려 있던 야성적인 감정과 힘이 거리낌 없이 발산된다. 그리고 전쟁은 새로운 인간을 길러내는 훈련장으로 해석했다.” (박찬국) 융거는 자신의 해석을 니체의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란 개념에 근거해 제시한다.
“The Will to Power names what constitutes the basic character of all beings. ‘Will to power is the ultimate factum to which we come.’ As the name of the basic character of all beings, the expression ‘will to power’ provides an answer to the question ‘What is being?’ All Being is for Nietzsche a Becoming. Such Becoming, however, has the character of action and the activity of willing. But in its essence will is will to power.” (Heidegger)
Power란 무엇을 있게 하는 힘을 말한다. 힘으로서 자신을 파악하는 존재자, 자신을 being이 아닌 becoming으로 이해하는 존재자는 타락 이전 사람들에겐 낯설수 밖에 없다. Being이 아닌 becomng이란 선언은 존재의 불완전성을 의미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 제2부에서는 세계를 빈틈없이 지배하는 권력으로서, 인간적 자유의 유희 속에도현존하는 것의 이름이 명확히 진술된다. 기초적인 사상은 이제 권력의 의지라는 교설이다. 변화한 인간, 즉 어린이가 된 인간은 창조아이다. 이 자는 본래적, 본체적인 인간이다. 창조적으로 유희하는 자, 가치들을 정립하는 자, 자기에 대하여 하나의 목표를 세워 하나의 새로운 투기를 감행하는 어떤 큰 의지를 의욕하는 자를 말한다. 창조자에게는 받아들여서 단지 그것에 순응하기만 하면 되는 그런 이미 완성된 의미의 세계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사물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대처한다. 그는 모든 척도와 저울을 새로이 정한다. ‘너희들이 세계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우선 너희들에 의해 창조되어야 한다.” (오이겐 핑크)
창조자로서의 인간이란 존재의 본질적인 불완전성을 폭로한다. 그것은 자아분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존재자이다. 그 인간이 창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그의 창조물은 부와 권력이라 불렸다.
“모든 타락한 사람과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가장 놀라운 차이 중 하나는 물질적 재화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은 재산이나 땅을 갖거나 소지품을 모으려는 욕망이 없다. 수렵체집인 집단에선 사적소유는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간주된다. 세계의 타락 신화들 일부는 분명히 ‘소유에 대한 애정’이 타락의 부정적인 결과 중 하나임을 웅변한다. 애버리진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소유에 대한 애착’이라는 유럽인들의 질병에 매우 당황했다. 인디언들은 땅의 한 부분을 판다는 관념을 어리석은 농담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유럽인들이 땅을 형편없이 낮은 가격에 살 수 있었다. 세네카족의 족장이 말한 대로 ‘사람이 바다와 그가 숨 쉬는 공기를 팔 수 없듯이 땅도 팔 수 없다.’
우리가 물질주의는 우리 내면의 정신적 불화를 넘어설, 또는 환화할 행복의 원천을 찾으려는 욕망에서 분출한다.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은 정신적 불화로 고통받지 않으므로 물질주의적이지 않다. 재산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준다. 우리는 세상을 근본적으로 위협적인 장소로 체험하며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는 살아있는 존재로서 우리의 위치가 허약하고 임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재산이 우리에게 일종의 영속성과 보호받는다는 인식을 주는 것이다. 강한 분리 인식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결핍인식을 남겼다.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내면의 구멍을 메우려는 강한 욕구를 가진다. 돈과 물질적 재화를 축적하는 것이 이일의 한 방편이 되리라.”
“우리가 정신적 불화를 넘어서는 또 하나의 방법은 당신이 ‘자아기반 행복’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중요한 사람이 됨’으로써 성공하고 유명해짐으로써 다른 사람의 존경과 찬사를 받음으로써 행복을 발견할 수있다고 믿는다. 전쟁, 가부장제, 그리고 사휴ㅚ적 계급분화는 모두 이 욕구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은 ‘중요한 인물’이 되려는 욕구가 없는 것같다. 이는 그들 사회에 사회적 계급 분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분명하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위에 대한 욕망은 이것보다 훨씬 더 나가서 미친듯이 권력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하여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아마도 그들은 날 때부터 자아인식이 보통 사람들보다 강한 탓에 그들 내면의 정신적 불화의 수준도 높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고전적인 예가 소위 영웅이다. “호메로스는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더 강렬한 삶을 산다고 말하는 것같다. 만일 영웅의 명예로운 행위가 서사시에서 기억된다면 그는 죽음의 망각을 극복하고 소멸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유일한 불멸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명성은 생명보다 소중하며 시는 명성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경쟁하는 전사들을 보여준다. 이 영광의 탐구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나선다. 영웅은 명예와 지위의 문제에 시달리는 자기중심적인 인간이며 시끄럽게 자신의 공적을 떠벌리고 자신의 존엄을 높이기 위해 전체의 이익을 언제든지 희생한다.” (카렌 암스트롱)
“알렉산더 대왕, 나폴레옹, 히틀러 같은 정복자들은 전세계를 정복하여 불멸의 신과 같은 지위를 얻으려 했다. 루퍼트 머독과 같은 현대 정치인이나 사업가들은 권력에 대하여 이와 같은 종류의 극단적인 욕구를 갖고 있다.”
영웅이라 불리던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아의식이, 즉 자아분리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 공감능력의 결핍이 심하다는 점이다. “남편감으로 어떤 사람이 좋으냐는 질문에 대해 여성들은 문화와 관계없이 무엇보다도 친철함과 공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동시에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도 상당히 중시한다. 그러나 친절함과 공감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과 충돌한다. 여성들이 이 두개의 서로 엇갈리는 가치를 어떻게 관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현실적인 문제다. 여성에게 화려한 삶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삶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대니얼 네틀)
전쟁과 자아폭발의 다른 결과인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과 공감의 결여를 한데 묶으면 우리는 지난 6000년의 인류역사를 형성한 대부분의 사회병리현상의 근본적 원천을 확보한 셈이 된다.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면 모든 타락한 사회들이 자본주의 사회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이른바 자본주의 체제는 경제학자나 정치인들에 의해 사회에 강요된 것이 아니라 타락한 정신의 한 부분인 부와 지위에 대한 욕망의 필연적 결과였다. 공산주의는 타락 이전 시대에 속한다. 공산주의는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비정상적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사유재산, 경쟁, 권력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섹스나 음식을 포기하고 하는 것처럼 부질없는 짓이다.”
이외에 이책에서 저자는 가부장제의 기원, 환경파괴의 심리학, (신을 섬기는) 종교의 기원, 축의 시대에 대한 타락의 관점에서의 재해석, 인류의 멸망을 피할 가능성 등에 대해 타락이란 관점에서 일관된 설명을 제시한다. 그러나 리뷰가 너무 길어진 관계로 여기선 이것으로 줄이고 다른 리뷰에서 기회가 되면 다시 다루기로 한다.
Lulu 2012-01-25 공감(5) 댓글(0)
===
문화의 진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
400쪽이 넘는 조금 두꺼운 책인데 종이 질이 두꺼워서 매우 두꺼워 보인다. 실제로 활자가 좀 작아서 읽는데 시간이 조금 걸린다. 저자는 오늘날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는, 아니면 수천년간 최근까지 당연하게 여겨졌던 가부장제, 일부일처제, 성에 대한 터부화, 전쟁, 계급착취 등을 인간의 본성도 아니며, 진화의 결과도 아니며, 잉여생산물의 등장에 의한 것도 아니며, 6000년전 중동지역과 중앙아시아에서 발생한 사막화의 결과 대다수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심리적 변화를 겪게 된 사건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수렵채민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더 이상 자연으로부터 얻을 게 없게 되자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며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고학적 자료들에 의하면 위 지역의 사막화 이전에는 지구상 그 어느 곳에도 전쟁무기나 계급의 존재를 알리는 거대한 무덤 등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수렵채집 생활을 하고 있는 일부 원주민들의 경우에도 저자의 주장처럼 6000년전의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자아라는 개념이 없다. 풍요로운 자연의 혜택으로 인해 자신과 자연이 하나이기 때문에 자신을 주장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고,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자아가 발달될 필요가 생겼다. 이러한 자아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인해 결국 위에 언급한 그런 문제들이 생기게 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연의 일부인 자신이 죽어 원래 하나였던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여긴 사람들에게 유일신이나 내세는 필요하지 않았다. 중동지역에 근원을 두고 있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이 내세를 주장하는 이유 역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에 비교되는 인도의 종교와의 차이점도 소개하고 있다. 제레미 다이아몬드도 에드워드 윌슨도 함께 비판하고 있다.
- 접기
dr4mind 2014-08-08 공감(1) 댓글(0)
==
인류학적으로 본 인간 타락의 기원
원제가 타락The Fall이다. 인간은 언제부터 타락하기 시작했는지 인류학적 관점에서 탐구한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을 요약해 보면 이렇다. 기원 전 인간은 성서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가 살았던 낙원처럼 불안이나 정신적 스트레스가 없었다고 한다. 수렵채취시절 소유 개념이 없었으므로 축적에 대한 욕구도 없었다. 모든 불안의 근원은 인간이 정착하면서 농사를 짓기시작하면서로 본다. 정착 사회의 긍정적 요소가 물론 있지만 기본적으로 정착 공동체는 소유와 탐욕의 개념을 탄생시켰고 과학과 기술 발달은 우주와 개인의 단절감을 주어서 근원적 고독감을 갖게 되었다. 타락의 시작이고 불행의 시작이다. 유일신 종교 역시 이런 배경에 힘 입어 태어났고 육체에 대한 자유로움도 박탈당했다고 본다.
소유 개념이야 연구가 많이 이루어져왔지만 근원적 고독감에 관한 부분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문명이 덜 침투한 토착인들이나 인디언들은 아직도 우주와 모든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고독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가끔 영화에서 보면 인디언들이 모두를 형제라 부르는 게 일리있는 장면이다. 역사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물질계는 풍요로워지고 개인의 개념 등장으로 정신이 피폐해지고 있다고 하는데 만물에 영혼이 있다는 믿음을 갖는다면 좀 덜 외로울까, 하는 생각이 막.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 저자가 탐구한 타락 이전의 낙원에서 사는 사람들은 까마득한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사용한 자료들은 기원 후 철학자들의 말이나 주장이 많다. 그럼 기원 후는 타락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니 타락의 정도가 다를 뿐 언제나 인간은 타락 상태가 아닌가? 흠.
- 접기
넙치 2011-10-13 공감(0) 댓글(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