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빛나는 흑역사
“정다빈씨는 왜 이렇게 끈기가 없어요?”
스물여덟, 적지 않은 나이에 첫 직장을 구하던 제가 수많은 면접 자리에서 답해야 했던 질문입니다. 어쩌면 모욕적일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놀랍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상 질문에 침착하게 답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번번이 “그러게, 나는 왜 이렇게 끈기가 없을까?”라고 스스로 되물어야 했습니다. 그만큼 20대 내내 제가 몰두했던 일이 자주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20대 전반기 5년은 예술학교에서, 이후 3년은 로스쿨에서 보냈습니다. 로스쿨을 졸업한 후에도 진로에 대한 고민은 그치질 않아 결국 소위 언론고시에 뛰어든 끝에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기자 생활도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곧 지금 일하고 있는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로 직장을 옮겼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제 만으로도 서른이 됩니다. 큐레이터, 변호사, 기자, 연구원. 돌아보면 20대 내내 참 다양한 꿈 안에 머물렀던 셈입니다. 때로는 제게는 절실했던 선택 하나하나에 대해 해명해야 하는 것이 속상하기도 했습니다. 매 순간 치열하게 고민하며 충실하게 살아왔는데도 무엇 하나 이룬 것 없이 다시 시작점에 서야 하는 절망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특히 합격과 불합격이 명확하게 나뉘는 변호사시험에서 맛본 실패는 쉽게 극복하기 어려운 패배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돌아보면 첫 변호사시험에서 불합격했던 바로 그 순간이 제게는 전환점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더는 변호사 시험에 응시하지 않겠다는 제 결정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3년이 지난 지금, 저는 아직 제 결정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물론 후회하지 않는다고 괴롭지도 않은 것은 아닙니다. 가끔씩은 불현듯 찾아오는 번민으로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내기도 합니다. 또한 같은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던 동기들이 대체할 수 없는 전문성을 가꾸며 평탄한 어른의 삶으로 저만치 앞서 나가고 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로움은 있을지언정 후회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을 위해, 가치 있게 쓰이고 있다는 믿음’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아보면 저는 항상 ‘가치’를 좇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술, 법, 언론은 제게 ‘더 나은 세상, 배제 없는 세상’이라는 가치를 이루는 여러 갈래의 길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토대로 인권, 평화, 생태환경을 위해 연대하고 연구하는 기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작은 기관인 만큼 정말 다양한 일을 해내야 하지만, 스스로가 믿는 가치를 위해 분주하게 일하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물론 여전히 저는 끊임없이 흔들리며 걷고 있습니다. 매일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며 살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아니고, 어떤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며, 연애는 매번 지리멸렬한 결말을 맺고야 맙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스스로 “나는 왜 이렇게 끈기가 없을까?” 물으며 자책하지 않습니다. 무수한 실패의 역사, 곧 우리의 ‘흑역사’가 우리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더 명징하게 알게 하는 빛나는 시간임을 이제는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각자 좇는 가치는 다를 것입니다. 제게는 ‘더 나은 세상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목표가 있습니다. 이때 모순과 역설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끊임없이 낮은 곳을 향함으로써 가장 높은 영광을 보여준 신앙전통은 큰 힘이 됩니다. 번민의 밤은 쉽게 그치지 않지만, 영원한 가치를 향하는 일상은 오늘도 저를 기쁨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2020년 6월 28일자 서울대교구 청년주보에도 동시 기고되었습니다.)
정다빈 멜라니아
대학에서는 예술경영과 영상이론을, 대학원에서는 법을 공부했습니다. 가톨릭신문 기자를 거쳐 지금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장래 희망은 ‘좋은 할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 존엄성이 어떠한 논리로도 훼손되지 않는 세상, 모든 인간의 다름이 그대로 인정받는 공동체, 그리고 서로를 향한 존중 위에 싹트는 평화를 위해 오늘도 일하고 읽고 쓰려 합니다.
다빈쌤, 더 좋은 세상에 이바지 하고 싶다는 말이 정말 좋네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이 많이 되는 요즘인데, 선생님 글이 마음을 뛰게 만드네요. 열심히 해야겠다는 위로도 되고, 나는 잘하고 있는건가 두려움도 느껴지고 복잡한 두근거림이네요. 저도 나중에 저를 돌아봤을 때, 지금 이 순간이 성장에 큰 자양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속에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 올해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지금까지는요 ㅎㅎㅎ 다시 같이 가고 싶네요. ^^
태훈아, 따뜻한 공감 어린 댓글 정말 고마워! 많은 변화를 앞둔 여름이겠지만, 지난겨울 내가 만나고 느낀 태훈은 분명 어떤 길이든, 어떤 모습으로든 가장 태훈답게 다정하고 풍부한 모습으로 걸어가리라 믿어. 다가오는 시간에는 더 행복하고 두근거리는 일들 많이 있길! 또 밥이나 특히 술 먹고 싶을 때는 언제든 인권연대로 오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