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는 부자들에게만 할 설법이다 l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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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one l 2017-02-06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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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무소유의 행복
장혜민 지음 / 산호와진주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무소유라는 말이 법정의 책으로 인해 일반화되었다. 그럼 무소유가 무슨 뜻인가? 이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는 이 세상에 있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에서는
당연한 논리다. 무소유는 거지로 살라는 말도 아니고 부자가 되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부의 양의 떠나 부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소유 정신을 지금 누구에게 설법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법정 같은 중이 아니다. 중은 애초에
출가를 했기 때문에 무소유를 실천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이 설법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미 소유를 포기한
사람들이니 무소유 정신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유제산을 인정하는 속세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이 정신이
필요하다. 그럼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 중에서도 또 누구에게 필요한 설법일까?
재산의 소유가 많은 사람인가, 적은 사람인가? 원래 무소유는 부의 양에 상관없이 도달해야 할 상태지만
그렇다고 아예 돈이 없는 거지나 노숙자에게 할 수는 없다. 한번도 돈을 많이 가져보지 못한 사람은 무소유를
말할 수 없다. 불교의 깨달음, 무소유의 부처가 된다는 것은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는 자격이
없는 것이다. 무소유의 부처가 되려면 일단 충분한 정도의 소유를 해 본 뒤에만 가능하다. 권력도 소유해보고,
돈도 이건희처럼 소유해 보고 명예도 전지현만큼 소유해 누려본 자만이 이 모든 소유가 진정한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깨달음이 저절로 일어나서 무소유상태에 이를 수 있다.
한번도 소유를 해본 적이 없는 자가 법정이 무소유를 말한다고, 아 이제부터 나두 무소유를 해야지, 라고 결심한다고
무소유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본인이 직접 위에서 말한 모든 소유를 소유해 보고 직접 체험하고 직접 깨달아야
그 깨달음으로부터 무소유 상태가 될 수 있다. 거지는 무소유할 수 없다. 뭣도 없는 주제에 무슨 무소유냐?
지금까지 전생을 포함해서 이건희만큼 소유해 본적이 없는 사람은 부지런히 소유를 욕망해야 한다. 이게 먼저다.
무소유는 머리로만 실현되지 않는다. 직접 욕망을 엄첨 실현한 자가 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1조, 아니면 천억이라도
소유를 해보지 않는 사람은 무소유를 말해서도 안되고 무소유상태가 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속세를 떠난 중이 무소유를 말한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중산층으로 사는 사람이 무소유정신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
한국에서 무소유정신을 받아들여야 할 할 사람들은 재산 최소 100억 이상 가진 자들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법정은 이미 죽었지만, 그가 무소유정신을 설법하려면 전경련에 가서
했어야지 거지로 사는 인간들 모아놓고 하는가? 재벌들, 돈에 눈이 멀어 불법 편법으로 상속하는 재벌들이
무소유를 배울 상태에 있다. 무소유는 이건희 이재용이 배울 정신이다. 소위 재벌이라 불리는 족벌들을 상대로
무소유정신을 설법해야 한다.
만약에 설법대상을 이렇게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청중이 착각을 해서 재벌도 아닌 사람이 무소유정신을 실천하자고
헛수고를 하게 된다. 그러면 진작 소유를 욕망하는 재벌은 더욱 좋다고 해쳐먹을 것이다. 한 국가 안에서 돈의 양은
정해져 있는데 재벌이 다 가져가면 서민은 정말 말 그대로 무소유가 될 것이다. 누구 좋으라고 무소유를 외치는가?
설법을 하려면 석가가 그랫듯이 설법대상을 분명히 정해서 하라. 분명히 불교식 깨달음 안에서 말하면 무소유정신은
한국의 부자들에게 설법하라. 아무나에게 하지 말라. 독자들도 이를 잘 분별하여 무소유정신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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