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3

알라딘: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 김영민 논어 에세이

알라딘: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 김영민 논어 에세이 
김영민 (지은이)사회평론2019-11-25













































Sales Point : 5,211

8.8 100자평(21)리뷰(19)

276쪽
편집장의 선택
"'추석이란 무엇인가' 김영민 교수 신작!"
먼저 책 속의 문장을 함께 읽어보자. “텍스트 정밀 독해를 배우고 싶은 사람은 정식화된 절차를 외우는 대신, 상대적으로 더 훈련된 감수성을 지닌 독해자를 만나 그와 더불어 상당 기간 동안 함께 텍스트를 읽어나가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감수성을 열고 단련해야 한다.” 우리는 함께 텍스트를 읽어나갈 상대로 적임자를 찾은 것 같다. 김영민 교수다.

이 책은 그가 구상 중인 ‘논어 프로젝트’의 프롤로그 격이다. 그는 앞으로 10년간 우리의 손을 붙잡고 ‘논어 번역 비평’, ‘논어 해설’, ‘논어 새 번역’으로 논어를 샅샅이 안내할 예정이다. 이 책은 그 첫걸음으로, 논어의 주제를 소개하는 에세이다. 물론 김영민 교수의 트레이드 마크인 사회적 감정에 대한 촌철살인과 시니컬한 위트는 이번에도 존재감이 뚜렷하다. 그와 함께하는 10년이 지난 후, 논어라는 텍스트를 정밀하게 “독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된 우리를 기대한다.

- 인문 MD 김경영 (201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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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추석이란 무엇인가”를 삐딱하게 되묻고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담담히 설파하던 칼럼계의 아이돌, 무심한 듯 세심한 에세이스트, 요즘 가장 핫한 지식인 김영민 교수(서울대 정치외교학부)가 돌아왔다.

“반짝반짝 ‘아침’의 멀쩡한 정신으로 생각의 근육을 써서 ‘죽음’이라는 인간의 조건에 대하여 고민”해보라며 첫 산문집을 펴낸 지 1년 만이다. 새 책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논어’ 이야기다. “실패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 실패를 향해 나아간” 공자라는 이름의 한 사람, 그리고 여럿이 어울려 사는 세상사 속 ‘사람됨’과 ‘사람살이’에 대한 고민이 담긴 『논어』라는 텍스트를 사유한 흔적이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삶과 세계라는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것”의 가치와 저력을 특유의 멋스러운 유머, 번뜩이는 지혜로 일깨우는 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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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매니페스토: 생각의 시체를 묻으러 왔다

1. 침묵의 함성을 들어라
왜 구태여 침묵했는가
자유주의 송편
모순과 함께 걸었다
떠나는 이유에 대해 침묵해야 할 때가 있다
“마르크스‘도’ 읽어야지”

2. 실패를 예감하며 실패로 전진하기
신의 가호에 회의를 품게 된 시대 ─ 仁
미워하라, 정확하게 ─ 正
삶이라는 유일무이의 이벤트 ─ 欲
해도 안 되는 줄 이미 알았던 사람 ─ 禮
우유부단함은 중용이 아니다 ─ 權
실연의 기술 ─ 習
완성을 향한 열망 ─ 敬
알다, 모르다, 모른다는 것을 알다 ─ 知

3. 회전하는 세계의 고요한 중심점에서
자성,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고통 ─ 省
“빡센 삶, 각오는 돼 있어?” ─ 孝
하지 않는 것이 하는 것이다 ─ 無爲
부러우면 지는 거, 아니 지배당하는 거다 ─ 威
너의 존재는 거짓이 아니다 ─ 事
지구의 영정 사진 찍기 ─ 再現
돌직구와 뒷담화의 공동체 ─ 敎學

4. 성급한 혐오와 애호를 넘어
새 술은 헌 부대에
계보란 무엇인가
‘유교’란 무엇인가

*에필로그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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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5“사상사의 역설은 어떤 생각이 과거에 죽었다는 사실을 냉정히 인정함을 통해 비로소 무엇인가 그 무덤에서 부활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 죽은 생각이 텍스트에서 부활하는 모습을 보려면 콘텍스트를 찾아야 한다. 즉 과거에 이미 죽은 생각은 『논어』라는 텍스트에 묻혀 있고, 그 텍스트의 위상을 알려면 『논어』의 언명이 존재했던 과... 더보기
P. 83널리 알려진 바대로 인(仁)은 『논어』에서 자주 쓰이는, 『논어』의 세계를 대표할 만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렇지만 공자가 인이라는 개념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조방(趙?)과 같은 학자가 지적했듯이, 인이라는 용어는 전국시대의 문헌에는 흔히 나타나지만, 그 이전 서주시대 문헌에서는 발견하기 쉽지 않다. 즉 인은 기원전 5세기께... 더보기
P. 105진정 감탄스러운 것은 나이 일흔에도 여전히 공자는 욕망의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보니 욕망이 사라진다고 말하거나, 오랜 수양 끝에 욕망을 없애는 데 성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은 욕망을 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고,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질주해도 여전히 궤도 위에 있는 기차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더보기
P. 213공자에 따르면, 주나라 초기 문화는 죽은 조상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었고, 혈통보다는 덕성을 중시했고, 과도한 비용을 들이지 않고 예를 수행하는 것을 강조했고, 허례허식보다는 진심어린 태도를 구현하고자 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찬란했던 문화로 돌아가야 한다. (…) 허나 자신의 거친 피부를 그대로 보고하는 것이 졸... 더보기
P. 243“저명한 사회과학자 시다 스코치폴은 ‘새 와인은 새 통보다는 이미 있는 통에 담는 것이 좋다’고 말한 바 있다. (…) 사람에 따라 그리고 시대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주석을 읽다 보면, 같은 대상도 관점에 따라 얼마나 달리 보일 수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동시에 우리 자신의 관점이 당대의 편견이나 선입견으로부터 그다지 자유롭지 못...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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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영민 (지은이)


본지 편집위원. 작가이자 사상사 연구자. 현재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구서로 『중국정치사상사』, 산문집으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공부란 무엇인가』,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인생의 허무를 보다』가 있다.

최근작 : <서울리뷰오브북스 13호>,<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서울리뷰오브북스 9호> … 총 26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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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칼럼계의 아이돌 서울대 김영민 교수
클라스가 다른 인문 에세이스트로 돌아오다

“고전 텍스트 읽음을 통해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과 세계는 텍스트이다.”

# 인문의 품격과 에세이의 감성을 아우르는 김영민의 신작

“위트를 타고 삶의 미시와 거시 사이를 활강하는 글쓰기”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생각거리를 차원 높은 사유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요즘 가장 핫한 지식인, 서울대 김영민 교수(정치외교학과)의 새 책이 나왔다.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부제가 말해주듯이 ‘논어’에 대한 에세이다. 2017년에서 2019년에 걸쳐 《한겨레》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엮었다. “추석이란 무엇인가”를 삐딱하게 되묻고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무심히 설파하며, 우아한 마이너 감성을 지닌 힙한 아재 캐릭터로 젊은 세대의 팬심을 사로잡은 그다. 이번에 존재의 정체성을 향해 던지는 돌직구는 ‘논어’를 향한다.

“『논어』를 왜 읽는가? 고전을 왜 읽는가? 실로 고전 텍스트를 읽는다고 해서 노화를 막거나, 우울증을 해결하거나, 요로결석을 치유하거나, 서구 문명의 병폐를 극복하거나, 21세기 한국 정치의 대답을 찾거나, 환경 문제를 해결하거나, 현대인의 소외를 극복하거나, 자본주의의 병폐를 치유할 길은 없다. 고전 텍스트를 읽음을 통해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과 세계는 텍스트이다.” - 17쪽
- “매니페스토: 생각의 시체를 묻으러 왔다” 중에서

도입부에서 선언하듯이, 저자는 ‘불후의 고전’을 ‘살아 있는 지혜’로 포장해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하는 세태를 경계한다. 그의 희망은 소박하다. 고전을 매개로 하여 텍스트를 공들여 읽는 사람이 되어보자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가 몸담은 삶과 세계라는 텍스트일 터, 2천 년 넘는 세월 동안 살아남은 ‘논어’에 수많은 이들이 주석을 달고 지금까지도 해설을 덧붙이는 이유이자 김영민만의 시선이 주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동아시아 정치사상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로서, 고전 ‘논어’라는 헌 부대에 지금 ‘세상’이라는 새 술을 붓고, 자신만의 주특기인 본질적인 질문 던지기와 자유롭고 독창적인 글쓰기를 버무려 전혀 새로운 장르를 발효해냈다. “유쾌하면서도 심각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식”을 늘 고민한다고 저자는 말한 바 있다. 인문 에세이란 무엇인가에 제대로 답하겠다는 듯 거침없고 아름다운 이 책에 취하는 즐거움은 이제 독자의 몫이다.


# 침묵의 함성을 들어라
: 삶과 세계를 정밀하게 독해하려면

공자는 “나는 말하지 않고자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김영민은 『논어』 텍스트 전체가 “발화한 것, 침묵한 것, 침묵하겠다고 발화한 것”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고 본다. 침묵을 매질로 삼은 메시지는 그에 걸맞게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독해자를 요구한다. 따라서 이러한 분류를 염두에 두고 의도된 침묵마저 읽어낼 자세로 『논어』를 탐사해 나가자고 제안한다.
공자는 노나라 사구(형벌이나 도난 등의 사안을 맡은 벼슬) 직책을 맡고 있다가 느닷없이 직장을 관두고 떠나버린 일이 있다. 그는 왜 쓰고 있던 면류관도 벗지 않은 채 보란 듯이 예를 어기며 부랴부랴 떠났고, 왜 구태여 침묵했을까?

“공자가 자신이 떠나는 진짜 이유에 대해 침묵했으므로, 사람들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댔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공자가 고기 때문에 떠났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공자가 내심 너무너무 고기가 먹고 싶었는데 자신에게 고기를 주지 않자 그만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탓이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공자가 고기에 대해 중독에 가까운 무조건적인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런 추론도 합리적이리라. 그러나 공자는 고기에 관하여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 55쪽

이어지는 글에서 저자는 공자가 고기라면 무조건 먹으려 드는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었음을 옛 문헌들을 뒤져가며 예의 진지하게 증명한다.(55~57쪽) 그리고 독자는 그 독특한 유머와 리듬에 빠져 하릴없이 키득거리다가 어느새 다음 문장에 도달한다.

“만약 공자가 특정한 도덕률에 고집스럽게 매달리는 협애한 도덕가였다면, 그는 그저 특정 도덕 기준을 들어 자신의 조국을 가차 없이 매도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기에는 공자는 노나라라는 정치공동체에 무관한 인물이 아니었다. 만약 공자가 자신의 출신 지역이나 집단에 대해 무비판적인 충성을 일삼는 사람이었다면, 무조건적으로 조국의 편을 들어 어떤 흠이라도 눈감아 주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니 고기가 이르지 않은 상황을 계기로 공자가 떠나버린 일은 그가 조국을 사랑하되 그 조국을 비판해야 하는 딜레마에 마주하여 그 나름의 해결책을 자신의 행동에 담고자 섬세하게 선택한 사려 깊은 행위였다.” - 59쪽
- “떠나는 이유에 대해 침묵해야 할 때가 있다” 중에서

불필요한 과장(overstatement)을 비판하고, 침묵 및 삼가 말하기(understatement)를 옹호한 공자를 통해, 단순한 침묵이나 생략으로 보이는 것들이 갖는 전복적인 성격을 간파하기. 이렇듯 김영민의 논어 에세이는 위트와 아이러니로 직조한 글쓰기로 해당 텍스트를 넘어 보다 넓은 콘텍스트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어떤’ 텍스트를 읽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읽었느냐가,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 실패를 예감하며 실패로 전진하기
: 이토록 고단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김영민은 공자의 제자들이나 『논어』의 편집자가 유려한 예식의 집전자로서의 공자만큼이나 현실에서 실패한 선생의 모습을 사랑한 데 주목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허나 결함이 있더라도 자신의 결함을 인지할 수 있을 때는 아직 희망이 있다. 화해하기 어려운 모순적 열망이 공존한 사람 공자를 통해 어쩌면 우리는 이 생에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을 읽어낼 수 있진 않을까. 그가 자주 이야기한 가치들, 그 역사적 맥락, 그리고 급변하는 시대를 메타 시선으로 통찰하여 실마리를 풀어내볼 수 있지 않을까.

공자는 결코 폭력을 배제하지 않았다. 인(仁)한 사람은 단순히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필요 이상의 폭력은 행사하지 않지만, 필요하다면 전쟁마저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 지하철의 쩍벌남에 대해서 공자라면 어떻게 했을까? ??논어??에서 딱 한 번 공자가 직접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원양이라는 이가 길가에 무식하게 틀어놓은 유행가처럼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자, 공자는 그에게 “사람들에게 해만 끼치는 놈이다”라고 일갈하며, 지팡이로 그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마치 정확한 미움을 실험하는 것처럼. - 96쪽
- “미워하라, 정확하게 - 正” 중에서

공자가 살던 시대는 만성적인 전쟁의 시대.
전국시대에 이르면 진나라 통일 전까지 적어도 590회의 전쟁이 일어났다는데, 공자가 그때까지 살았던들 그 추세를 되돌릴 수 있었을까. (…) 공자나 그의 제자들은 무력에 의존해 천하통일을 추구하기보다는, 차라리 지속적으로 실패하기를 선택한다. 작가 사뮈엘 베케트가 말했듯, 그들은 승리하기보다는 다시 더 낫게 실패하기를 선택한다. 새를 맞히지 못할지언정 자는 새를 쏘지 않는 이의 위엄, 자청해서 실패를 선택하는 이의 위엄, 기어이 성취를 포기하는 데서 오는 위엄이 그들에게는 있다. - 117쪽
- “해도 안 되는 줄 이미 알았던 사람 - 禮” 중에서

중용은 단순히 산술적 중간을 의미하거나 극단적 행동을 회피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견 과한 행동처럼 보여도, 상황에 적절하기만 하다면 중용일 수가 있다. 중용이란 예상하기 어려운 역동적인 상황 속에서도 적절성을 찾아내는, 그러기 위해서 기존 규범이나 예상으로부터 적절히 이탈할 수 있는 차원을 포함한다. (…) ‘음식 맛없게 만들기’ 매뉴얼을 따라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높은 수준의 맛없음’을 구현하기 어렵듯이, 예의 매뉴얼을 따라 기계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이상 사회가 자동으로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는 변치 않는 규범에 대한 고집보다는 임기응변이나 융통성이 필요할 때가 있다. - 124쪽
- “우유부단함은 중용이 아니다 - 權” 중에서

공자가 극기복례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극복 대상이 된 3인칭의 자아뿐 아니라, 대상화된 자신을 바라보는 1인칭의 자아가 동시에 있다. 메타 시선을 장착한 사람은 대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발언을 삼가는 사람, 자신이 알 수 없는 큰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 공자의 제자 증자는 죽음이 다가오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나는 (삶의 고단한 책임을) 면하게 됨을 알겠도다.” “나는 이제 삶의 책임과 걱정을 면한다”고 기뻐 날뛰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제 삶의 책임과 걱정을 면함을 ‘안다’”고 말한다. 즉 삶의 긴장, 구속, 고단함을 면한다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그 사실 자체를 메타 시선으로 바라보아 ‘안다’는 선언이다. - 156쪽
- “알다, 모르다, 모른다는 것을 알다 - 知” 중에서


# 회전하는 세계의 고요한 중심점에서
: 서로 다른 인간끼리 어울려 살기 위하여

정치학, 철학,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정치사상사를 공부한 김영민은, 인간은 어떻게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 옳은지 질문을 던지는 게 정치철학이고, 과거의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 어떤 답을 해왔는지를 파악하는 게 정치사상사라고 설명한 바 있다. 『논어』가 지금 여기 우리 공동체에 던지는 질문들에 대한 저자의 근심이 이 책에 스며 있는 이유이다.

공자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집안에서 자기 부모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잘 섬길 것인가 혹은 자기 자식을 구체적으로 얼마나 효성스러운 사람으로 키울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는, 앞서 말한 삶의 책임을 누가 어떻게 나누어 질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 일상의 삶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위생, 교육, 복지, 육아, 노인 돌봄 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당사자, 가족, 사회, 국가 가운데 누가 어떻게 무엇을 얼마나 나누어 맡아야 하는가. 이는 공자의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인류가 고민해온 문제이며 매 시대 조건은 끊임없이 바뀌기 때문에, 이 문제는 시대마다 새로운 답을 요구한다. - 182쪽
- “빡센 삶, 각오는 돼 있어? - 孝” 중에서

재현의 관점에서 진정으로 뛰어난 정치 행위는, 관련된 민의를 모사하는 것보다는 그 열망을 정책에 얼마나 입체적으로 잘 구현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뛰어난 대의 정치인은 민의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사람들이 미처 정의하지 못하고 구체화되지 못한 일까지 탐구하고 정책으로 번역해낸다. (…) ??논어?? 속 공자는 신의 뜻을 재현하는 데 골몰하던 제사장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당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들에게 이제 재현해야 할 대상은 신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상상했던 주나라 건국 시기의 문명이었다. 동시에 공자는 그 고대 문명을 되살려 공동체에 구현할 수 있는 정치적 권력은 자기에게 결국 주어지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전진한다. - 223쪽
- “지구의 영정 사진 찍기 - 再現” 중에서


# 성급한 혐오와 애호를 넘어
: 죽어야 사는 것들에 대한 시의적절한 질문들

공자는 “경천동지할 혜안을 가진 고독한 천재가 아니라 자신이 마주한 당대의 문제와 고투한 지성인”이었고, “국가가 설정한 위계적인 구획을 넘어, 친족 네트워크를 넘어, 타인과 비전을 함께 나눈 공동체의 카리스마 넘치는 스승”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무심한 듯 사려 깊게, 불확실성 속에서도 풍요로운 만남을 꿈꾸는 선생 김영민에게서도 이러한 모습이 엿보인다면 저자는 손사래를 칠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떠들썩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책은 말한다. “공자는 족보 같은 걸 만들어가며 친족을 대규모로 관리하라고 주장한 적도 없고, 조상신 덕 보라고 한 적도 없”으며, “자신의 친아들보다는 제자를 더 사랑했다”고. “유교”라는 말이 “현대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을 도맷값으로 넘기는 데” 남용되는 세태에 대해 “보다 복합적이고 역사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저자가 구상하는 논어 프로젝트를 담담히 기대해 본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이 이와 같은 생각을 온전히 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논어 에세이는 내가 구상하고 있는 논어 프로젝트의 일부에 불과하다. 논어 프로젝트는 총 네 가지 저작으로 이루어진다. 1. 『논어』의 주제를 소개하는 ‘논어 에세이’, 2. 기존 『논어』 번역본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논어 번역 비평’, 3. 『논어』 각 구절의 의미를 자세히 탐구하는 ‘논어 해설’(총 10권), 4. ‘논어 번역 비평’과 ‘논어 해설’에 기초하여 대안적인 논어 번역을 제시하는 ‘논어 새 번역’. 따라서 이 논어 에세이는 논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라 그 이야기로 안내하는 초대장이다. - 272쪽 접기


북플 bookple
이 책의 마니아가 남긴 글
친구가 남긴 글
내가 남긴 글

이번 년도에 읽은 책 중에 100자평도 남기지 않은 책들이 꽤 많았다. 책이 좋아서 정성 들여 리뷰를 남겨야 겠다고 결심한 책도 있는데, 부담감에 오히려 한 글자도 감상을 안 썼다.요즘 글을 쓰지 않으니 더 말이 안 나오고 머리에 생각도 없어지는 것 같다. 유튜브 '겨울서점'의 애청자로서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읽기였다. 요즘 피곤해서 시각과 청각을... 더보기
파이버 2021-07-30 공감 (30) 댓글 (4)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쓴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김영민 교수의 책이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재미있게 읽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입했는데, 읽으려고 보니 표지에 '(그냥) 에세이'가 아니라 '논어 에세이'라고 쓰여 있어서 잠시 낭패감을 느꼈다(21세기에 <논어>라니! 이걸 읽어 말아?)... 더보기
키치 2020-04-09 공감 (11) 댓글 (0)



전작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읽으면서 김영민 님의 기지와 풍자에 탄복을 하였었다. 비록 내 부류는 아니라서 감동이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논어 에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어서 택하게 되었다. 모두가 다 알지만 누구도 제대로 알기 힘든 '논어'를 가지고 어떻게 버무려내는지 궁금하였다. 읽기 시작하였을때의 긴장감... 더보기
양철나무꾼 2020-02-06 공감 (3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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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 김영민 논어 에세이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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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읽으면서 김영민 님의 기지와 풍자에 탄복을 하였었다.

비록 내 부류는 아니라서 감동이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논어 에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어서 택하게 되었다.

모두가 다 알지만 누구도 제대로 알기 힘든 '논어'를 가지고 어떻게 버무려내는지 궁금하였다.

읽기 시작하였을때의 긴장감을 끝부분까지 이어갈 수 있을만큼 재미있었지만,

에필로그에서 이 구절을 보는 순간,

맥이 쫌 빠지는 느낌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1.『논어』의 주제를 소개하는 '논어 에세이'

2. 기존『논어』번역본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논어 번역 비평'

3.『논어』각 구절의 의미를 자세히 탐구하는 '논어해설'(총 10권)

4. '논어 번역 비평'과 '논어 해설'에 기초하여 대안적인 논어 번역을 제시하는 '논어 새 번역'(272쪽)

 

나는 이 중에서 1편 논어 에세이 만을 읽었을 뿐이고.

다른건 차치하고 '논어해설'만도 총 10권에 이른다고 하니,

과연 다 읽어볼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과거에 강신주가 쓴 책도 10권인가 12권을 기획했었는데, 책으로 나온 건 달랑 2권뿐이었고,

공원국의 춘추전국이야기는 11권까지인가 완간되었으나  나는 읽다가 중간에 흐지부지 되었었다.

 

이 책은 그중에 '논어 에세이'로 논어의 주제를 소개하고 있다고 하는데,

단순히 논어의 주제라기보다는,

저자 김영민 님이 논어를 어떤 주제와 방향으로 읽어나가고 있는지, 에 대한 맛보기 정도로 봐야 할 것 같다.

그 예로, 내가 읽었던 수많은 논어 관련 책들과는 맥락을 달리하고 있는데,

그는 이것을 자신들이 발견하고 싶은 것을 『논어』에 마음껏 투사하기때문이라고 한다.

공자를 한껏 우러를 수 있는 신의 경지에 놓는 것이 아닌,

우리와 같은 인간의 경지에 놓는다.

『논어』와 공자의 그것들을 답습할게 아니라, 콘텍스트가 담고 있는 텍스트를 읽어내라고,

그리고 텍스트를 읽음을 통해서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삶과 세계는 텍스트라고 덧붙인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인'을 이 책에선 다르게 얘기하고 있는데,

인을 얘기하며, 공자는 결코 폭력을 배제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한 사람은 단순히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 이상의 폭력을 행사하지 않지만, 필요하다면 전쟁마저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95쪽)

 

이 구절만을 읽었을땐 주장이 좀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요즘 고룡을 읽다보니,

그 자리에 살생을 대입시켜보니 이해가 될 듯도 하다.

 

암튼 이 책이 좋았던 것은,

논어를 내 인생관과 비슷하게 해석하고 있어서 였다.

그렇다. 인간은 허약하므로 무언가 부여잡고 삶을 지탱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혼신을 다해 사랑하고 원망할 대상을 찾는다. 죽거나, 미치거나,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나 "하늘이 무엇을 말하던가?"(天何言哉.) 신이 침묵할 때 인간이 할 일은 무엇인가? 공자에 따르면,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 들지도 말고, 신과 거래하려 들지도 말고, 스스로 신이 되려고 들지도 말고, 완전히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도 말고, 신을 무시하지도 말고, 신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도 말고, 신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인간에게 허여된 일을 하다가 죽는 것이다.(147쪽)

위 상자 글 안, '공자에 따르면' 이하 글들은 天何言哉의 해석이라고 보기 어렵겠지만,

김영민 님의 논어를 읽는 방법 정도로 보면 좋을 듯 같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이 책은 논어적 사고에 익숙한 나에게 경기를 일으킬 만한 책이었다.

논어를 배제한다고 하면 말이 안되겠고,

논어와 공자를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준,

정서적 환기를 시켜준 책이었다.

 

그동안 다른 사람의 논어 해설집을 읽을때면,

이 번역이 맞나 틀렸나,

이 해설이 적절한가 그렇지 않은가,

그럴듯 한가 그렇지 않은가, 를 놓고 혼자 고개를 갸우뚱해가며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었다.

(왜냐 나의 사고방식은 고루하고, 나의 지식은 미미하여 판단해낼 재간이 없으므로)

그런데 이 책은 논어의 번역이나 해석을 가지고 고개를 갸우뚱할 필요가 없었다.

세상에는 이런 번역과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창의력과 기지에 감탄하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잘 읽었다.

나머지 번역 비평과 해설, 새로운 번역본이 나온다면 기꺼이 읽어볼 의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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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와 친하지 않아 동양고전은 늘 내게 넘사벽이었는데, 김영민교수에 대한 연이은 팬심으로 사서 읽다보니 어느새 논어구절을 스르륵 읽게 되었다. 이렇듯 세련된 논어라니!!
프로니 2019-12-06 공감 (1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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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의 첫 책으로 읽기 잘했다. 이후의 논어 시리즈도 기대된다
Blue 2020-01-03 공감 (1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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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깔대며 웃다가 지식도 넓혀지고 마지막엔 가슴이 따뜻해 지는 글들이네요.
김영민 교수님은 사랑입니다. ♡
bestruth 2019-12-06 공감 (1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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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하다가 동료들과 맥주 한잔을 하면서 나누는 학담이 어째서 그렇게 즐거울까. 아마도 한 분야를 궁구하던 사람이 자신의 언어로 풀어내는, 사유의 깊음과 언어의 가벼움이 공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논어의 깊음을 아름답고도 가벼운 문장으로 읽게 되길 기대한다.
유현 2019-12-09 공감 (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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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어려웠는데 이 책을 읽으니 소통의 방법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이 오는 것 같아요.
김희수 2019-12-08 공감 (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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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를 만나면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중국 선불교의 큰 스승인 임제(臨濟) 선사의 말이다. 듣기에 따라 살벌하게 느껴지는 말이지만, 해탈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이라도 말이다. 불교는 해탈을 목표로 한다. 해탈이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속박이나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고통이 집착에서 생긴다고 한다. 욕망에 대한 집착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집착을 벗어버리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곧 극락이다. 해탈에 벗어나서 깨달은 사람은 ‘자유를 얻은 자’인 것이다. 깨달음과 자유를 위한 살생은 말 그대로 죽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극복하라는 뜻이다. 경전에 있는 기존의 지식의 틀에 의존하게 되면 새로운 생각을 하는 데 방해를 받는다. 그래서 임제는 부처, 스승, 경전을 최고의 가치로 삼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다. 임제가 보기에 공경의 대상이 되는 부처, 스승, 경전은 모두 사람을 결박하는 것이다.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수행과 고전 공부가 비슷한 과정일 리는 없다. 그러나 기존의 지식에 벗어나 새로움을 얻으라는 건 오늘날 고전에 접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도 유효한 얘기일 것이다. 진정한 깨달음과 자유의 경지인 해탈을 추구하는 수행자가 경전을 공부하면서 “경전에 있는 지식은 옳다”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을 진정한 자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없다. 수행자가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일이고, 고정된 지식의 틀에서 갇혀 있을 때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고전의 가치에 매료되어 그것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독서 모임에 참석하면 고전을 많이 읽었을 정도로 똑똑하나 고전의 틀에 갇힌 사람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이미 알려진 고전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을 미리 공부해오거나 그 내용을 A4 용지에 가득 채워서 정리해온다. 분명 부탁한 적이 없는데도 고전을 해설한 내용(일반인이 읽기 힘든 학술논문의 내용을 인용한 경우도 있다)으로 채워진 인쇄물을 나눠주기도 한다. 독서 토론을 하다가 인쇄물에 없는 고전에 대한 독창적 해석이라든가 고전을 비판하는 입장이 나오면 고전을 열심히 공부한 사람들이 태클을 건다. “당신의 주장은 금시초문인데요.” “제가 아는 내용과는 완전 다르군요.” 그 사람은 에둘러서 ‘다르다’고 말하지만, 고전에 대한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해석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것을 ‘틀렸다’라고 생각한다. 또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고전을 읽고 해석한 사람들의 생각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서 나오는 아마추어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속으로 상대방을 깔보는 사람은 양반이다. 고전을 너무 많이 공부해서 고전과 한 몸이 되어버린 사람은 독창적인 해석을 받아들이지 못해 그걸 가루가 될 때까지 지적하고 비난한다. 대놓고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면박을 준다. 저기요, 당신이 고전을 직접 쓴 작가예요? 흥분한 당신의 모습을 보면 작가에 빙의한 줄 알겠어요.











그 사람은 독서 모임이 자신이 생각한 것과 아주 다르다면서 다음 모임에 불참할 거라고 선언한다. 그래, 잘 가라. 멀리 안 나간다. 고전을 읽는 데 걸림돌이 되는 사람이 다시는 모임에 나온다고 하지 않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서론이 너무 길어졌다. 아무튼 딱딱하게 굳은 머리를 내리치는 죽비와 같은 임제의 말은 고전에 대한 과거의 해석이 아닌 현재의 해석을 강조하는 말로 이해해도 어색하지 않다. 즉 어제 누군가가 고전을 읽으면서 했던 생각을 모방하거나 흉내 내지 말고, ‘지금’ 우리가 고전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뜻이다. ‘논어 에세이’라는 부제가 달린 김영민 교수의 신작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생각의 시체’에 불과한 고전에 너무 사랑에 빠지면 ‘지적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가 될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준다. 이 책에서 김 교수는 텍스트(text)를 ‘생각의 무덤’이라고 비유한다. 《논어》는 죽어서 글이 된 공자(孔子)의 생각들이 안치된 무덤이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은 죽은 공자를 기리는 공자의 제자들이 아닌데도 《논어》 텍스트를 곧이곧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중국 명대의 학자 왕양명(王陽明)이 말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따르는 건 아니다. 그들이 《논어》를 읽으면서 주로 하는 일은 제자 앞에서 가르치려는 공자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그들은 《논어》에 있는 구절 몇 개를 인용하면서 그 구절을 약처럼 곱씹으면 사회의 모든 병폐를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고전을 읽으면 모든 사회 문제(특히, 민주주의의 병폐)가 해결될 것이며 고전이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길을 터줄 것이라고. 김 교수는 《논어》를 포함한 고전을 만병통치약처럼 여기는 세태를 경계한다. 고전을 만병통치약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독자는 고전에 갇혀버려 옴짝달싹도 못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런 독자는 고전의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해석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게 된다.












이미 알려진 《논어》 독법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김 교수의 매니페스토(manifesto)는 앞서 언급한 임제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공자를 만나면 공자를 죽여라. 공자의 제자들을 만나면 그들도 죽여라.” 여기서 말하는 ‘공자’는 《논어》를, ‘공자의 제자들’은 《논어》를 신줏단지 모시듯이 읽는 독자들을 뜻한다. 공자와 《논어》는 복잡다단한 문제에 마주친 우리에게 희망적인 해법을 명확하게 제시해주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그렇다면 고전에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독자들이 공자를 죽일 방법은 있을까. 걱정하시 마시라. 방법이 있다. 김 교수는 《논어》에 드러나지 않는 공자의 속 깊은 생각들과 공자의 사상에 영향을 준 역사적 조건과 각종 담론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우리가 고전을 제대로 읽으려면 텍스트가 아닌 ‘콘텍스트(context)’를 잘 봐야 한다. 콘텍스트의 의미는 무척 다양한데, 나는 콘텍스트를 ‘텍스트 뒤에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김 교수는 콘텍스트를 ‘텍스트의 무덤’이라고 말한다). 즉 고전을 읽을 때 우리 눈에 보이는 문자 그대로 따라 읽지 말고, 문자 속에 숨어 있는 맥락을 봐야 한다.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되, 콘텍스트가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



공자를 죽여야 한다고 해서 공자와 《논어》를 ‘고리타분한 사상’으로 알려진 유교와 연결 지어 비판하자는 게 아니다. 김 교수는 유교가 ‘폐쇄적인 학문’, ‘전통을 답습하는 공자의 사상’, ‘동아시아 특유의 보수적인 종교’로 너무 쉽게 오해받는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논어》가 우리나라의 발전을 막은 폐단의 근원으로 간주하면서 읽는 것도 경계한다. 《논어》를 지나치게 숭배하는 것도 문제고, 너무 기피하는 것도 문제다. 《논어》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가 달라도 너무 다르지만, 이러한 태도를 낳게 한 원인은 피차일반이다. 둘 다 《논어》를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잘못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 교수는 공자가 ‘정확하게 미워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미워하는 일이란 말 그대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비판하는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정확하게 미워하고 비판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고전을 정확하게 비판하면서 읽는 일 또한 쉽지 않다. 따라서 고전을 제대로 좋아하고, 정확하게 비판하려면 고전 텍스트를 공들여 읽고 스스로 생각하는 독자가 되어야 한다.



이 논어 에세이는 김 교수가 구상하고 있는 ‘논어 프로젝트’의 시작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초대장이다. 그의 프로젝트에 흥미 있는 독자라면 이 초대장을 잊지 말고 잘 간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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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0-01-06 공감(39) 댓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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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何言哉



전작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읽으면서 김영민 님의 기지와 풍자에 탄복을 하였었다.

비록 내 부류는 아니라서 감동이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논어 에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어서 택하게 되었다.

모두가 다 알지만 누구도 제대로 알기 힘든 '논어'를 가지고 어떻게 버무려내는지 궁금하였다.

읽기 시작하였을때의 긴장감을 끝부분까지 이어갈 수 있을만큼 재미있었지만,

에필로그에서 이 구절을 보는 순간,

맥이 쫌 빠지는 느낌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1.『논어』의 주제를 소개하는 '논어 에세이'

2. 기존『논어』번역본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논어 번역 비평'

3.『논어』각 구절의 의미를 자세히 탐구하는 '논어해설'(총 10권)

4. '논어 번역 비평'과 '논어 해설'에 기초하여 대안적인 논어 번역을 제시하는 '논어 새 번역'(272쪽)



나는 이 중에서 1편 논어 에세이 만을 읽었을 뿐이고.

다른건 차치하고 '논어해설'만도 총 10권에 이른다고 하니,

과연 다 읽어볼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과거에 강신주가 쓴 책도 10권인가 12권을 기획했었는데, 책으로 나온 건 달랑 2권뿐이었고,

공원국의 춘추전국이야기는 11권까지인가 완간되었으나 나는 읽다가 중간에 흐지부지 되었었다.



이 책은 그중에 '논어 에세이'로 논어의 주제를 소개하고 있다고 하는데,

단순히 논어의 주제라기보다는,

저자 김영민 님이 논어를 어떤 주제와 방향으로 읽어나가고 있는지, 에 대한 맛보기 정도로 봐야 할 것 같다.

그 예로, 내가 읽었던 수많은 논어 관련 책들과는 맥락을 달리하고 있는데,

그는 이것을 자신들이 발견하고 싶은 것을 『논어』에 마음껏 투사하기때문이라고 한다.

공자를 한껏 우러를 수 있는 신의 경지에 놓는 것이 아닌,

우리와 같은 인간의 경지에 놓는다.

『논어』와 공자의 그것들을 답습할게 아니라, 콘텍스트가 담고 있는 텍스트를 읽어내라고,

그리고 텍스트를 읽음을 통해서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삶과 세계는 텍스트라고 덧붙인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인'을 이 책에선 다르게 얘기하고 있는데,

인을 얘기하며, 공자는 결코 폭력을 배제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한 사람은 단순히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 이상의 폭력을 행사하지 않지만, 필요하다면 전쟁마저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95쪽)



이 구절만을 읽었을땐 주장이 좀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요즘 고룡을 읽다보니,

그 자리에 살생을 대입시켜보니 이해가 될 듯도 하다.



암튼 이 책이 좋았던 것은,

논어를 내 인생관과 비슷하게 해석하고 있어서 였다.


그렇다. 인간은 허약하므로 무언가 부여잡고 삶을 지탱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혼신을 다해 사랑하고 원망할 대상을 찾는다. 죽거나, 미치거나,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나 "하늘이 무엇을 말하던가?"(天何言哉.) 신이 침묵할 때 인간이 할 일은 무엇인가? 공자에 따르면,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 들지도 말고, 신과 거래하려 들지도 말고, 스스로 신이 되려고 들지도 말고, 완전히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도 말고, 신을 무시하지도 말고, 신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도 말고, 신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인간에게 허여된 일을 하다가 죽는 것이다.(147쪽)

위 상자 글 안, '공자에 따르면' 이하 글들은 天何言哉의 해석이라고 보기 어렵겠지만,

김영민 님의 논어를 읽는 방법 정도로 보면 좋을 듯 같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이 책은 논어적 사고에 익숙한 나에게 경기를 일으킬 만한 책이었다.

논어를 배제한다고 하면 말이 안되겠고,

논어와 공자를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준,

정서적 환기를 시켜준 책이었다.



그동안 다른 사람의 논어 해설집을 읽을때면,

이 번역이 맞나 틀렸나,

이 해설이 적절한가 그렇지 않은가,

그럴듯 한가 그렇지 않은가, 를 놓고 혼자 고개를 갸우뚱해가며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었다.

(왜냐 나의 사고방식은 고루하고, 나의 지식은 미미하여 판단해낼 재간이 없으므로)

그런데 이 책은 논어의 번역이나 해석을 가지고 고개를 갸우뚱할 필요가 없었다.

세상에는 이런 번역과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창의력과 기지에 감탄하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잘 읽었다.

나머지 번역 비평과 해설, 새로운 번역본이 나온다면 기꺼이 읽어볼 의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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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20-02-06 공감(3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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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간신히, 그리고 간절히 희망할 수 있는 것



왜 우리는 책을 읽고 글을 쓸까?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자신만의 세계관과 가치를 만들고 확장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글을 제대로 읽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김영민 서울대 교수는, 우리가 대표적인 고전인 <<논어>>를 읽으면서 앞서 말한 사람이 되는 것을 간신히 희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자신의 생각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직접 정성스럽게 <<논어>>를 읽은 후 그 뜻을 자신만의 견해로 해석했다.

나는 김영민 교수가 언급한 인간상을 '우리가 간신히, 그리고 간절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책을 읽을 때 글을 제대로 읽고 그 뜻을 깊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최소한의 목표로 두는 동시에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부터 김 교수가 정성스럽게 읽고 해석한 <<논어>>의 내용을 살펴보자.




"고전의 메시지에 빨리 도달하려고 서두르는 동안 콘텍스트가 주는 다채로운 경지는 모두 놓치게 되고, 경주 끝에 얻은 만병통치약은 사이비 건강보조식품으로 판명된다. 콘텍스트가 주는 경관을 주시하며 생각의 무덤 사이를 헤매다 보면 인간의 근본 문제와 고투했던 과거의 흔적이 역사적 맥락이라는 매개를 거쳐 서먹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오래전 죽었던 생각이 부활하는 사상사적 모멘트moment이다.

고전 텍스트를 읽음을 통해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과 세계는 텍스트이다." - 16~17p




"『 논어』에 따르면, 제대로 된 사람은 나쁜 사람을 미워할 뿐 아니라, 나쁜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기 마련이다. 공자는 어설픈 평화주의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저 사람처럼 모나게 살지 마라" 하고 말하지 않는다. "저 사람처럼 모나게 살지 마라"에서 "저 사람"을 맡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공자이다. 공자에 따르면, 비타협적으로 살 때라야 비로소 악한 일에 가담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확히 좋아하고 미워해야 한다. 공자는 말한다. 오직 인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미워할 수 있다고." - 94~95p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려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려면, 무능을 넘어 배우는 일 자체에 대해 배우려면, 메타meta 시선이 필요하다. 공자가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극복 대상이 된 3인칭의 자아뿐 아니라, 대상화된 자신을 바라보는 1인칭의 자아가 동시에 있다. 메타 시선을 장착한 사람은 대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발언을 삼가는 사람, 자신이 알 수 없는 큰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메타 시선이 있는 이는 무지를 그저 선언하기보다, 질문한다. 『 논어』 속의 공자는 제자들 질문에 답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질문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말한다. "누가 공자보고 예를 안다고 했나? 매사에 묻기만 하는데." 그러자, 공자는 말한다. "그렇게 묻는 것이 예이다."

정교한 질문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훈련된 행위이며, 대상을 메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메타 시선을 유지하는 일은 많은 심리적, 육체적 에너지를 요구하는 고단한 일이기도 하다." - 152~153, 155p




"공자가 국가가 지배하기에 상대적으로 용이한 소규모 가족 단위를 중시했다는 이유로 공자를 국가주의의 선구자쯤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 논어』 속 공자는 대개 국가의 과도한 활동을 제한하는 편이었다. 『 논어』에서는 과도한 세금 징수나 국가의 무력 수행 등에 반대하는 공자의 언명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비국가 영역이 많은 사회적 기능을 떠맡는다는 점에서, 공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국가는 '작은 국가'임에 틀림없다. 공자의 이상 국가는 구성원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덕을, 바람직한 성정을 기를 수 있는 공동체이지, 법이 삶의 국면마다 개입하는 '거대한' 조직이 아니다." - 181~182p




김영민 교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 논어』를 읽고 해석했다. 이를 통해 김 교수는 본인이 말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을 성취했다. 이제 우리의 차례다. 꼭 『 논어』를 읽어야만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장 자신이 좋아하는 책부터 제대로 읽기 시작해 보자. 이로써 자신만의 세계관과 가치를 세우고 공고화하기 위해 글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 되는 것을 간신히, 그리고 간절히 희망하는 동시에 이를 이루고자 노력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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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io99 2020-01-04 공감(2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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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앎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앎‘이라고 할까요? 공자는 ‘논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앎이다.˝

인간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관심분야나 처한 환경에 따라서 모르는 것은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죠. 문제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른다면 절망하기에 충분합니다.

조지 버나드 쇼‘ 는 ˝모르는 것보다 더욱 절망적인 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가짜 뉴스의 폐해를 이미 100여년 전에 간파한거죠.

공자가 말하는 ‘앎‘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 나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김영민 교수는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이른바 ‘메타 시선‘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소름이 돋는 순간이죠.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의 사람이 오늘날에까지 통용되는 언명을 주창했을 줄이야‘

하지만 매사에 ‘메타시선‘을 유지하는 것은 공자의 제자조차도 번다한 일이었죠. 우리같은 일반인들에게는 굉장히 힘든 일일텐데요. 잘못하면 노이로제에 걸릴지도 모릅니다.

이에 우리의 김영민 교수는 가장 화끈한 해법을 제시하는데요. 그 비결은 주기적으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음. 무슨 말이냐고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 인간의 언어를 쓰지 않고 짐승의 말을 쓰는 겁니다. 상대의 요구나 지시, 간섭에 일체의 언어를 쓰지 않고 그냥 ‘으르렁‘,‘왈왈‘,‘캬오~‘로 반응하는거죠. 날카로웠던 신경이 절로 이완되고 누적된 피곤함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겁니다.

˝인간의 성찰적 삶에는 메타시선이 필요하며 더불어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렇게 깊은 울림을 주면서 뇌리에 박히게 글로 전할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합니다.

#공자 #김영민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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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강 2019-12-22 공감(19) 댓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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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그럼에도, 논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쓴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김영민 교수의 책이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재미있게 읽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입했는데, 읽으려고 보니 표지에 '(그냥) 에세이'가 아니라 '논어 에세이'라고 쓰여 있어서 잠시 낭패감을 느꼈다(21세기에 <논어>라니! 이걸 읽어 말아?). 1분 정도 고민하고 결국 읽기로 한 건, 저자에 대한 신뢰 때문인데(김영민 교수가 쓴 책이 웃기지 않을 리 없어!), 결론적으로 이는 매우 옳은 판단이었다. 책이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저자도 <논어> 읽기가 현대인들에게 무슨 의미인지, 어떤 효용을 지니는지 많이 고민한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자 또한 <논어>가 아무리 대단한 고전이라고 해도 그 안에 담긴 내용을 현대인들이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음을 인정한다. ("<논어>에 담긴 생각은 이미 죽었다." 11쪽) 다만 <논어>가 어떠한 시대적 배경에서 탄생했고, 어떤 계층 또는 사람들에 의해 필수 고전으로 인정받고 연구되어 왔으며, 그러한 목적 또는 의도는 무엇인지 등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알아볼 필요는 있다고 말한다. 즉, <논어> 읽기를 통해 텍스트를 이용해 콘텍스트를 읽는, 텍스트 정밀 독해 기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책에는 <논어>에 나오는 주요 문장들에 관한 해석을 비롯해 공자와 그의 제자들, 공자가 살았던 시대의 특징, 공자를 바라보는 동서양의 시각 차이, 공자 이후 유학의 변화 등 <논어>와 공자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공자 하면 완전무결한 성인(聖人)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실상 공자는 성인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출세와 권력에 대한 집착도 상당했고, 제자들에 대한 차별과 비난도 서슴지 않았으며, 남에게 당하면 참지 않고 똑같이 갚아줬다. 공자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누군가 공자에게 "덕으로써 원한을 갚으면 어떨까요?"라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되물었다. "그럼 덕은 무엇으로 갚으려고?" (93쪽)




흠결이 없지 않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의 제자들이 공자를 따랐던 이유는 뭘까. 저자는 그러한 흠결이야말로 공자라는 인물의 매력이라고 본다. 사람들은 완전무결한 사람보다 약간의 흠결이 있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일이 잘 풀리는 사람을 보면 열등감을 가지고, 일이 잘 안 풀리는 사람을 보면 측은지심을 가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공자가 살았던 시대의 젊은이들도 날고 기는 사람들보다는 나름 똑똑하고 성격도 괜찮은데 왠지 모르게 출세를 못하는 공자의 처지에 더 공감하고 열광했다. 조선 시대 때 중앙 권력에서 배제된 지방 사림들이 유학을 숭상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김영민 교수가 쓴 책이 웃기지 않을 리 없'다는 예상대로 책 곳곳에 유머와 위트가 녹아 있어서 어렵다, 지겹다는 생각 없이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정치학 전공자로서 학부 때 동양의 정치사상을 깊이 공부하지 않은 것이 늘 가슴 한편에 아쉬움과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러한 감정이 다소 덜어졌다. 이 책을 시작으로 총 4부에 걸쳐 논어 프로젝트가 진행될 예정이라고 한다. 앞으로 나올 세 권의 책도 모두 구입해 읽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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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2020-04-09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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