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카이의 종예종지원에 관한 연구
한국일본교육학연구
2008, vol.13, no.1, pp. 151-164 (14 pages)
발행기관 : 한국일본교육학회
연구분야 : 사회과학 > 교육학
박균섭 1
1성균관대학교
초록
일본 진언종(眞言宗)의 개조 구카이(空海, 774~835)는 일본 천태종(天台宗)의 개조 사이쵸(最澄, 767~822)와 함께, 헤이안불교의 좌표를 뚜렷하게 제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구카이가 804년에 견당사를 따라 당의 장안에 들어가 공부한 후, 806년에 귀국하면서 들여온 것은 진언밀교(眞言密敎)를 포함한 종합적인 문화체계였다.
구카이는 「삼교지귀(三教指帰)」와 「비밀만다라십주심론(秘密曼荼羅十住心論)」을 저술하여 유교, 도교, 불교에 대한 비교사상론을 보여주는 한편, 열 가지 마음의 존재 양상(十住心)을 단계적으로 풀이하면서 진언밀교의 교의가 최고의 단계이자 구극의 진실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구카이는 학교교육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교토에 사립학교 종예종지원(綜芸種智院)을 설립하였다(828. 12. 15). 당시의 교육은, 귀족의 자제를 대상으로 하는 등 일부에게만 문호를 개방했으나, 종예종지원은 서민의 자제에게도 문호를 개방한 획기적인 학교였다. 종예종지원은 학교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유교, 불교, 도교 등 모든 사상과 학예를 망라하는 종합적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그러나 종예종지원은 구카이가 입적한 후 10년 정도 지속되다가 폐교되었다(845).
현재는 교토의 종지원대학(種智院大学)이 종예종지원의 교육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진언종의 개조 구카이의 학교교육에 관한 구상과 실천에도 드러난 바와 같이, 진언밀교는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그 안에서 큰 지혜와 구극의 진실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문제는 그 세속적 가치가 침략과 전쟁의 프로젝트로 구축되었을 때, 진언밀교 역시 큰 지혜나 구극의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일본의 영광과 번영을 기원하는 주술체계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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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海(弘法大師:774~835)は、平安時代初期の僧侶として、日本真言宗の開祖である。日本天台宗の開祖である最澄(伝教大師:767~822)とともに、奈良仏教から平安仏教へと日本仏教が転換していく流れに位置している。空海は、儒教、道教、仏教の比較思想論でもある「三教指帰」を通して、あらゆる思想を網羅した理解の地平を力說した。そして「秘密曼荼羅十住心論」を通して、真言密教の基盤を磐石化するとともに、その存続のために尽力した。空海は、遣唐使の留学僧として唐の長安に入って(804年)、惠果の下で佛敎を勉强した後、日本に真言密教をもたらした(806年)。その時、空海が請来したのは眞言密教を含めた總合的な文化体系であった。828年12月15日には、京都の東寺の東鄰に私立の學校である綜芸種智院を開設した。その時の教育は、貴族の子弟を対象にするなど、一部の人々にしか門戸を開いていなかったが、綜芸種智院は庶民にも教育の門戸を開いた画期的な学校であった。綜芸種智院の名前に表されるように、この學校は儒教、仏教、道教などあらゆる思想と学芸を網羅する総合的な教育機関でもある。現在は、京都の種智院大学が綜芸種智院の敎育精神を受け継いでいる。空海は、江戶時代にも明治時代にも、外来の不純な思想(眞言密敎)を日本に持ち込んだとして、そして廃仏毀釈という反佛敎運動によって、批判されたこともある。しかし、空海は、1930年代の後半に入ってから、外来の思想(眞言密敎)を日本流に紹介し、日本文化の形成に寄與した人物として評価されるようになった。中國と日本の戦争が開始しており、国民が団結して戦争に臨む必要があったのであり、そのために空海が日本の偉大な人物として再評価されたのである。
키워드
구카이, 사이쵸, 진언밀교, 비교사상론, 종예종지원
空海, 最澄, 真言密教, 比較思想論, 綜芸種智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