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9

[인터뷰] 白壽 맞은 한국 유기농의 아버지, 元敬善 풀무원 원장 : 월간조선

[인터뷰] 白壽 맞은 한국 유기농의 아버지, 元敬善 풀무원 원장 : 월간조선



白壽 맞은 한국 유기농의 아버지, 元敬善 풀무원 원장
“사람의 죄는 소유와 욕심에서 나와… 이걸 없애자는 게 공동체”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gomsi@chosun.com

⊙ 1955년 부천 소사에 풀무원 공동체 건설… 전쟁고아와 부랑자들과 성경 읽고 농사훈련
⊙ 일본 고다니 준이치 선생에게 유기농업을 알게 돼… 1976년 양주로 옮기면서 유기농업 시작
⊙ 1990년 국제기아대책기구 한국지부 설립해 구호활동 펼쳐

사진제공 : 원혜영 의원실

충북 괴산의 평화원 농장에서 큰아들 원혜영 민주통합당 의원과 함께한 원경선 원장.


6월 초순, 승용차로 43번 국도를 타고 38선 휴게소에서 한탄강을 가로지르니 해발 877m의 지장산(地藏山)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기 포천 관인면 중리에 위치한 지장산은 남한 최북단의 고산이다. 한국 유기농의 아버지라 불리는 원경선(元敬善) 풀무원 원장이 말년을 보내고 있는 곳이다. 원 원장은 충북 괴산 풀무원 농장에서 생활하다 2년 전 넷째딸 원혜덕씨 부부가 운영하고 있는 경기도 포천 중리 농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원경선의 소원은 간단했다. 우리나라 모든 국민이 우리 땅을 소중히 여기고, 무공해 농사를 비롯해 미래의 환경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중학교 1학년 도덕 교과서에는 원 원장을 ‘미래와 환경을 생각하는 할아버지’로 소개하고 있다.

유기농 식품회사 풀무원의 모태가 된 풀무원 농장 설립자인 그의 평생 직업은 농부였다. 그냥 농부가 아니라 ‘생명 농부’라고 부르는 것은 국내에서 ‘유기농’을 처음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농사법을 한평생 고수해 온 원 원장은 지난 4월 17일 아흔아홉 살 생일인 백수(白壽)를 맞았다. 이번 19대 총선에서 당선된 민주통합당 원혜영(元惠榮) 의원 등 2남5녀와 며느리, 손자, 증손자를 합쳐 37명의 자손을 두고 있다.


냉면 한 그릇 후딱 해치운 白壽 노인

원 원장의 건강비결은 현미와 유기 농산물을 섭취하는 것이다. 1975년부터 현미식을 시작한 원 원장은 요즘도 세 끼 식사를 유기농 현미 잡곡밥과 채식 위주의 반찬으로 한다. 어릴 때 영양실조로 간디스토마를 심하게 앓아 머리가 어지러웠으나, 유기농 현미밥을 먹으면서 이런 증상이 사라졌다고 한다.

2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졌던 원 원장은 워낙 강인해 재활치료를 받고 난 뒤에는 지팡이를 짚고 마당도 산책하고, 자동차로 한두 시간 드라이브를 즐긴다고 했다.

혜덕(57)씨는 “작년까지만 해도 매 주일에 포천에서 서울 제기동에 있는 교회에 다닐 정도로 건강했으나, 올해 초부터 기력이 떨어져 대외활동을 삼가고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맞으며 지내신다”고 했다.

원 원장은 구한말 서예가 김태희(金泰熙) 선생이 성경구절을 인용해 쓴 ‘愛第一也(애제일야·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는 족자 아래에서 편한 자세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점심시간, 원 원장이 혜덕씨의 부축을 받아 식탁에 앉았다. 풀무원 공동체에 들어와 혜덕씨와 결혼한 사위 김준권(金準權·65)씨도 원 원장 맞은편에 앉았다. 김씨는 3년 전부터 한국의 첫 유기농단체인 정농회(正農會) 회장을 맡고 있다.

혜덕씨는 “아버지가 이북 분이라서 풀무원 남승우(南承祐) 사장이 보내 주는 냉면을 무척이나 좋아하신다”면서 “밭에서 나는 열매가 없어 고명 거리가 없어 어쩌나…” 하며 노랑 피망을 길쭉하게 썰고 삶은 계란을 절반으로 잘라 냉면요리를 완성했다.

혜덕씨가 “아버지, 기도하셔야지”라고 하자, 원 원장이 “오늘 좋은 모임을 갖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음식 주시오니 감사합니다. 아멘” 하고 기도했다.

아흔아홉 노인의 목소리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맑고 청량했다. 혜덕씨가 “요즘 아버지 기도가 짧아져서 너무 좋아”라고 깔깔 웃으며, “오빠(원혜영 의원)도 아버지가 기도하실 때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다며 기회만 되면 기도를 부탁한다”고 했다. 원 원장은 유기농 배추로 담근 잘 익은 배추김치를 곁들여 냉면 한 그릇을 후딱 해치웠다.

교사 5년 생활을 빼곤 줄곳 아버지 곁을 지켰던 혜덕씨는 “여태껏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이타적인 삶을 살아오신 것이 건강한 삶의 밑바탕이 된 것 같다”면서 기자에게 원경선 원장의 100년 삶을 들려주었다.


1원50전의 행운



지난 4월 1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백수연이 열렸을 때, 한국의 글로벌500 수상자들의 모임인 ‘글로벌 500 한국인회’가 증정한 액자. ‘선생님이 계셨기에 우리는 오늘도 안심하고 밥상 앞에 앉습니다’라고 적었다.
원경선의 100년 삶은 땅, 생명, 이웃이라는 말로 압축된다. 1914년 출생한 원경선은 평남 중화군의 빈농(貧農) 아들이었다. 아버지(원낙범·元洛範)는 술로 세월을 보내고, 어머니(김승수·金承水)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밭일을 했으나 가난을 면할 수는 없었다. 보통학교를 가까스로 마쳤다. 그나마 도(道) 장학금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그가 열일곱이 되던 해 소 두 마리 값에 해당하는 40원의 빚만 남기고 돌아가셨다. 그러던 어느날, 군청에서 “농촌 자력갱생 운동의 수혜자로 선정됐으니 영농자금을 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신청한 적도 없는 자금이었다. 알고 보니 보통학교 6학년 때 장학금 10원 가운데 아껴 쓰고 남은 돈 1원50전을 학교에 돌려준 일이 있었는데, 그 일에 감동한 일본인 교장의 추천 덕분이었다.

원경선은 11살 때 황해도 수안으로 이사 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주일날에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보통학교 4학년 때 천황의 교시가 담긴 ‘교육칙어(敎育勅語)’를 암송할 때 고개를 숙이지 않아 담임선생님에게 크게 혼이 나기도 했다.

연 6%, 24년 상환이라는 파격적인 자금으로 3만3057m²(1만평) 정도의 땅도 사고 집도 마련했다. 그러나 신앙이 독실했던 원경선은 ‘주일날’ 농장 시찰을 나오겠다는 일본인 관료와 갈등을 빚게 되자, 두말 없이 땅문서를 돌려주고 농장을 포기한다.

‘차라리 공부나 더 하자’는 생각이 절로 났다. 그길로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향했다. 그때가 1935년,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다. 농사로 단련된 탄탄한 몸에 한창 나이였다. 그는 친구 안성겸을 찾아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목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 후 뜻이 맞지 않아 대책없이 친구집을 나왔다. 원경선의 모친은 청소부, 두부장수로 나섰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바울 같은 전도사가 되기로 했다. 그가 속한 교단은 퀘이커와 비슷한 평신도 독립 교회를 주장하는 형제단(브레들린·Brethren)이었으므로 목사가 없었다. 전도사가 되려면 신학교에 진학해야 했으나,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었던 만큼 우선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따야 했다.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牧夫와 新女性의 결혼



넷째딸 원혜덕씨 부부와 함께 냉면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원경선 원장.


새벽 2시 반에 일어나 우유 배달을 하고, 낮에는 목장에서 막일을, 밤에는 공부를 했다. 잠은 3시간을 넘지 못했다. 어차피 정신력에 의지해 가는 길이어서 몸은 억지로라도 따라와 주었다. 다만, 생전 처음 하는 영어 공부는 혼자 힘으로 해 낼 수가 없어 학원을 다녔다. 결국 이 도전은 전차에 치여 죽을 고비를 넘기며 석달 만에 좌절됐다.

서울서 사귄 선배 최병록에게 사진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북한산 출장 촬영을 나갔다가 자칭 동경유학생이라는 젊은이들에게 강도를 당할 뻔하기도 했다. 석달 후, 도하 신문 지면에는 ‘정릉리 백골사건’이란 기사가 실렸다. 원경선이 갔던 북한산 그 장소에서 사진관 주인이 돌무덤에 덮인 채 시신으로 발견됐던 것이다. 렌즈만 사라진 사진기도 함께 나왔다. 당시 카메라 렌즈는 소 두 마리 정도 값의 고가품이었다. 원경선은 그길로 경찰서를 찾아 범인의 인상착의를 말했고, 경찰은 범인들을 검거할 수 있었다.

원경선의 아내가 된 지명희(池明熹·2009년 작고)는 배화여고보를 졸업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딸이었다. 게다가 무역회사에서 타이피스트로 일하던 신여성이었다. 서울 돈의동 동신교회에서 우유 배달원 원경선을 처음으로 보고 그 성실함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 딸의 마음에 있는 청년을 그 어머니가 찾아가 ‘중매’를 섰다. 지명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새벽 우유 배달을 끝내고 배달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자전거를 타고 교회에 왔어. 늘 눈여겨보았지. 차림도 그렇고… 그랬지만, 사람이 성실해 뵈고, 곧은 생활자세, 신앙심 그런 거 때문에 내가 먼저 맘에 두었어. 그걸 알고 친정어머니가 나섰지.”

원경선은 “여학교를 나와 타이피스트까지 하면 좋은 신랑감들이 줄을 설 텐데 왜 나같이 돈 없고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사람을 택했소?”라고 물었고, 지명희는 “굳은 신앙심으로 바르게만 산다면 평생을 같이할 생각”이라고 했다. 1938년 두 사람은 동신교회에서 김태희 선생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요리 먹이고, 기생 채워 주고”

원경선 부부는 결혼 이듬해인 1939년 살길을 찾아 북경으로 떠났다. 아내의 뛰어난 타자 솜씨를 밑천으로 삼아 작은 등사 인쇄소를 차렸다. 두 사람의 성씨를 따 상호를 지원인서사(池元印書社)라고 했다. 금세 직원이 20명이 넘어설 정도로 사업은 번창했다.

북경 살림 7년 만에 광복을 맞았다. 조국은 광복을 맞았지만 원경선의 안정된 생활엔 금이 갔다. 이듬해 아내와 아이 둘을 데리고 귀국했다. 그해 5월 귀국선을 타기까지 벌어 놓은 돈을 야금야금 빼먹어 빈털터리 신세가 됐다. 원경선은 “아수라장인 귀국선을 타고 인천항으로 오는 8일이 중국 생활 7년보다 지루했다”고 했다.

귀국한 원경선은 원점에서 다시 시작했다. 그때부터 6·25 때까지가 돈이란 것을 꽤 풍요롭게 만져 보았던 때라고 한다. 귀국하자 미군을 상대로 한 ‘동구공영’이란 회사에 취직해 토목 청부업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북경에서 닦은 영어가 도움이 됐다. 원경선의 표현대로, 돈이 벌리니까 더 벌어 보려고 미군들한테 ‘요리 먹이고 기생 채워 주고’ 했다. 일단 뇌물이 들어가면 목재나 시멘트 같은 자재가 뒷구멍으로 술술 나왔다고 한다.

1949년 어느날, 원경선은 건축 청부업을 정리하고 경기도 부천으로 이주했다. 농사를 짓기 위해 친구를 통해 13만2231m²(4만평)의 토지도 마련해 두었었다. 그러나 당시 구입한 토지가 과거 일본인 소유의 적산토지로 분류돼 강제몰수를 당하고 만다. 그는 “토지대금을 치르고 정당하게 구입한 것”이라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하고 말았다.

남은 방법은 정부 소유가 된 땅을 불하받는 방법밖에 없었다. 타락과 부정이 싫어 땅으로 돌아온 그에게 ‘급행료’로 뇌물을 요구하는 손길이 뻗쳐 왔다. 그는 거절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마음을 알아준 세무사의 도움으로 구입한 땅의 절반을 불하받는 방식으로 되찾을 수 있었다.


1955년 풀무원 공동체 만들어



1938년 기독동신회서울교회에서 올린 결혼식. 주례는 당대의 명필인 김태희 선생이 섰다. 뒤편에 김태희 선생이 쓴 성경구절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愛第一也)’가 걸려 있다.
원경선은 부천에 처음으로 가족공동체를 꾸리고 포도를 심었다. 그러나 첫 해 농사를 짓고 이듬해 6·25 전쟁이 터져 버렸다. 전쟁은 원경선의 인생에 또 한 번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기독교인인 데다 땅도 적지 않은 지주계급이라 마을 사람들은 피란을 재촉했다. 그는 공동체의 노인들과 아이들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부천에 남았다.

한번은 인민군에게 무작정 끌려가 부천 소사읍사무소에 갇혔다. 그들은 원경선에게 공산당에 가입할 것을 강요했고, 그는 “종교인이라 당원 자격이 없다”고 버텼다. 그들은 막무가내로 원경선을 두들겨 패고 따귀를 때렸다. 그때 고막이 파열되는 바람에 지금도 왼쪽귀를 듣지 못하게 됐다. 1·4후퇴 때는 졸지에 마흔의 나이에 국민방위군에 징집돼 제주도 훈련소로 갔다. 부패한 군인들이 쌀과 옷을 빼돌리는 바람에 제주도 생활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1952년 5월, 천신만고 끝에 귀가했다. 천행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여섯 살짜리 둘째 아이가 디프테리아로 약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포성이 막 멈춘 1955년의 한반도에는 탄피처럼 여기저기 전쟁고아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는 고아원에서 나온 고아들, 넝마주이들을 데려다 거친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가르쳤다. ‘함께 일하고 함께 먹자’는 원칙을 세웠다.

농장의 이름은 녹슬고 쓸모없는 인간을 풀무질로 달구고 담금질해 쓸모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터전이 되자는 의미에서 ‘풀무원’이라고 붙였다. 충남 홍성에 풀무농업학교(현 풀무학교)가 있어, 원경선은 그 학교 주옥로 교장에게 “우리 공동체 이름에 안성맞춤인데, 그 이름을 쓰게 해 달라”고 부탁해 허락을 받았다.



자본주의의 위력 느껴



부천 공동체 시절 원경선 원장(왼쪽 두번째)의 가족사진. 뒷줄 오른쪽 끝이 원혜영 의원.
풀무원의 문은 늘 열려 있었다.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나, 누구든 받아들였다. 이른바 사회 부적응자, 인생 낙오자들, 구체적으로는 삼시 세끼를 해결하는 일이 다급한 사람들이 주로 풀무원을 찾아들었다.

풀무원 식구들은 서로 동병상련할 수 있는 처지였으나, 삶의 궤적이 제각기 달라 풀무원 농장에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공동체에 들어온 지 얼마되지 않은 청년이 숫돌에 낫을 갈다 누군가 장난삼아 물을 끼얹는 바람에 갈던 낫에 손을 크게 다쳤다. 피범벅이 됐지만 응급처치만 하고 ‘금방 낫겠지’ 했다.

그러나 청년의 상처는 파상풍으로 번져 생명이 위독했다. 수술비는 당시 젖소 2마리에 상당하는 금액이었다. 원경선의 머리에는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둘째 아이를 생각하며 ‘만약 내 아이였다면, 젖소 한 마리 값이 아깝다고 망설였을까’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길로 청년을 들쳐 업고 병원으로 향했다.

원경선은 풀무원 공동체에서 자본주의, 개인주의의 위력도 실감했다. 한 부인네가 자식 둘을 데리고 공동체로 들어왔다. 그 부인에게는 양계장을 맡겼다. 그런데 원경선은 양계장에서 나오는 수익을 따로 챙기도록 했다. 하루빨리 독립해 나가라는 배려였다.

그 부인은 죽기 살기로 일해 병아리 1000마리 대부분을 온전한 닭으로 키워 냈다. 당시만 해도 병아리 폐사율은 10%를 훨씬 넘었었다. 그 부인이 병아리를 보듬다시피 해 가며 정성을 들인 결과였다.

그러나 풀무원 공동체는 사유재산을 아주 예외로만 인정했고, 모든 것을 공동체 소유로 했다. 그러다 보니 사소한 먹거리 하나를 두고도 아귀다툼이 벌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자기 자식에게 고기 한 점 더 먹이겠다는 싸움 끝에 보따리를 싸 들고 공동체를 떠나는 경우도 생겨났다.

원경선은 공동체의 교육은 고등학교까지 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취직을 위한 대학교육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서다. 그렇지만 공동체 식구들도 대학수준의 교양이 필요하다고 판단, 매년 겨울 단기대학 형식의 강의를 개설했다. 농한기에는 공동체 식구들이 무료한 철이기 때문이다.


‘글쎄 철학자’ 咸錫憲



1984년 양주 풀무원 농장을 방문한 함석헌 선생(오른쪽에서 세 번째).
원경선이 12살 손위의 함석헌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36년경, 스물두 살 무렵이었다. 무교회 운동을 벌이던 선생의 주장에 원경선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아 YMCA에서 있었던 선생의 목요강좌에 자주 들렀다.

선생은 나중에 무교회주의도 버리고 보다 더 자유로운 ‘퀘이커교도’를 선택했다. 원경선은 공동체를 출범시킨 뒤 땅에서 바른 생활을 일구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선생의 사상을 그대로 따라갈 처지는 아니었지만, 자유로운 신앙생활에는 크게 공감했다.

또 선생과 원경선은 농사라는 공통점이 있어 더욱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선생은 1957년 천안에 ‘씨알농장’을 세우고 직접 농사를 지으며 사상의 깊이를 더했다. 그런 선생은 농사이야기를 하기 위해 원경선이 운영하던 공동체를 찾아 부천과 양주를 자주 들렀고, 원경선도 천안으로 선생을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경선은 “선생이 현대사에 끼친 사상·실천적 영향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면서도 “그러나 농사에 관해서는 선생은 나보다 한참 아래였던 것 같다. 농사는 도리어 나한테 배워야 할 형편이었다”고 회고했다.

여름이 한창이던 8월 초 정도로 기억된다. 천안으로 선생을 찾아갔는데 선생은 포도밭에서 알이 영 부실한 포도를 들고는 고민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선생님?” 하고 원경선이 다가가자 선생은 “포도가 하나같이 알이 차질 않네”라고 말을 받았다.

찬찬히 살펴보니 포도송이가 나올 무렵 곁에 있는 포도순을 따 줘야 하는데 시기를 놓쳐 포도가 제대로 영글지 못한 것이었다. 원경선이 “올해 농사는 포기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며 농 섞인 말을 던지자 선생의 얼굴이 굳어졌다.

원경선은 함 선생을 ‘글쎄 철학자’라고 했다. 함 선생은 명쾌한 대답을 하는 때가 많지 않고, 대개는 “글쎄”로 대답한다는 것이다. 함 선생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언젠가 “나더러 또 글쎄라고 대답한다고 하겠지만…” 하고 말시작 소리를 하는 걸 들었다고 한다.

원경선은 함 선생의 ‘글쎄’의 의미가 만사에 양면이 있다는 것을 존중하는 것이어서 함 선생이 그만큼 생각이 넓고 크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함 선생은 농사와 자유로운 신앙을 병행했다는 점에서 원경선과 통하는 면이 많았다. 그러나 원경선은 함 선생이 농사를 통해 바른 일꾼을 길러 내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여러 모로 격려해 준 스승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한밤에 만난 고다니 준이치



1986년 정농회 창립 20주년 집회에서 양주 풀무원 농장을 찾은 고다니 준이치 선생(왼쪽)이 강연하고, 원경선 원장이 통역하고 있다.
1974년 원경선은 미국을 다녀오는 길에 일본 미에현(三重縣) 아오야마(靑山)에 있는 애농학교를 찾아갔다. 1946년 일본의 유기농을 정착시키고 애농회(愛農會)를 조직한 고다니 준이치(小谷純一)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애농회는 일본 전역의 경작지가 심각한 병충해에 노출되었을 때 이 유기농 단지들만 무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 유기농은 화학비료나 농약이 아니라 땅의 본성을 살려 그 힘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해 짓는 농사는 사람과 환경을 죽이는 죽음의 농사, 남에게 파는 농작물에 농약을 치고 화학비료를 뿌린다면 ‘간접살인’이나 마찬가지라는 게 고다니 준이치의 주장이었다.

원경선은 일본 애농회에서 낸 유기농 관련 책을 읽고 농약, 화학비료, 제초제의 폐해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 실체를 정확히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원경선은 유기농업에 관한 어떤 지식도 없었다. 새마을운동으로 증산(增産)만이 농업의 최고 덕목이던 시절이었다. 농촌진흥원 같은 기관의 지도에 따라, 통일벼 계통의 다수확 품종이 권장되고 있을 때였다. 밭은 밭대로 농약과 화학비료의 즉각적이고도 환상적인 효능에 사로잡힌 농민들에 의해 약 범벅이 되어 갔다.

많을 때는 60~70명에 이르는 대식구를 거느리고 있었던 풀무원 농장도 시절에 맞게, 그리고 현실이 절실해서 다수확을 제일의 과제로 삼고 있었다. 농약, 화학비료, 제초제를 멀리할 아무런 이유도 알고 있지 못했다는 말이다.

고다니 준이치는 연락 없이 불쑥 찾아온 그를 따뜻하게 맞아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토대 농학부를 졸업한 고다니 선생은 전후 직접 농사를 지으며 애농회를 조직해 농촌살리기 운동을 벌이다 유기농을 접하고 유기농 전도사가 됐던 것이다.

고다니는 유기농에 대한 효능을 자신의 경험으로 들려주었다. 전쟁통에 부인과 함께 결핵을 앓아 76kg 나가던 몸무게가 36kg까지로 줄었다고 했다. 그런데 유기농과 현미식을 하고부터 결핵도 낫고 몸무게도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 말에 원경선도 현미식을 결심하고 곧바로 실천에 들어갔다.

원경선은 고다니를 부천으로 초대했다. 그가 한밤의 회동을 끝내고 돌아온 그 이듬해 고다니가 부천에 왔다. 고다니는 이렇게 외쳤다.

“일본은 패전 후 그저 식량증산을 위해 무분별하게 농약을 치고 화학비료를 사용해 왔습니다. 비록 생산량 증가에는 성공했지만, 이러한 농법은 결국 모두가 자멸하는 길일 뿐입니다. 제발 우리의 전철을 밟지 말아 주십시오.”

고다니는 원경선에게 1972년에 발간된 로마클럽 보고서,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를 조목조목 설명해 주었다. 그 보고서는 로마클럽의 석학들이 인구, 식량생산, 공업화, 환경오염, 재생 불가능한 자연자원의 소비가 모두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인류의 곤경’을 예언한 충격적인 분석서다.

원경선은 그 내용 중에서 당장 자신이 실천 가능한 영역을 찾아 냈다. 닭이나 소, 돼지가 사람 하나에게 필요한 열량을 낼 만한 고기를 ‘생산’하려면 사람 넷에게 필요한 열량을 낼 만한 곡물을 먹어야 한다는 분석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풀무원 농장의 양계는 그때 그만두었다. 대신, 주곡인 쌀 생산의 중요성과 생태와 환경에 순응하는 유기농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유기농 단체, 정농회를 만들다

원경선은 부천에서 6·25전쟁으로 오갈 데 없는 사람을 거두자는 ‘가난구제’라는 목적으로 공동체를 운영했다. 그러나 1976년 양주로 옮기면서 부천의 바르게 사는 삶보다 ‘나누는 삶’에 힘을 쏟았다. 원경선은 “사람의 죄는 소유와 욕심에서 온다”며 “이걸 없애고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자는 게 공동체”라고 역설했다. 그는 농장을 꾸려 나가기 위해 만든 한삶회란 재단에 자기 재산부터 털어 넣었다.

그는 유기농을 안 날부터 유기농이 무엇이고 왜 해야 하는지 계몽해 따르도록 하는 전도사를 자청했다. 원경선의 그런 지칠 줄 모르는 권유로 자기 땅에서 유기농 실험을 해 보기로 작정하는 농부들이 하나둘씩 늘어 갔다.

마침내 한국 최초의 유기농 생산자 단체인 정농회가 1976년 1월 부천 풀무원 농장에서 조촐하게 결성됐다. 초대 회장은 오재길씨가 맡았다. “이런 농사는 간접 살인이다”라는 원경선의 극적인 이 한마디가 농부들을 정농회로 끌어들였다. 정농회가 한국의 대표적인 유기농 운동 단체로 성장하기까지 원경선은 전국의 농촌을 누비며 농민들을 만났다.

당시 농촌사회는 가톨릭농민회나 기독농민회 등 농민 권리 찾기 단체들을 두고 “우리도 사회참여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원경선은 “권리 찾기 데모는 그쪽에 맡겨 두고 우리는 생명운동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정리했다.

정농회를 만들고 석달 뒤인 1976년 4월 풀무원 농장은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옥정리, 그때까지만 해도 후미진 산골로 이사했다. 정농회를 결성하는 과정에서 그린벨트로 묶여 있던 부천을 떠나 좀 더 큰 규모로 바른 농사를 지어 보자는 희망을 키운 결과였다. 원경선은 농사일에 투신했다. 국내 최초로 화학비료와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이 시작됐다.

“제초제 대신에 내 손으로 김매고, 농약을 안 쓰니까 내 손으로 벌레 잡고, 화학비료를 안 쓰니까 내 손으로 퇴비를 만들었습니다. 새벽에 농장에 나오면 어두워질 때까지 허리 한 번 제대로 펼 수 없었죠. 가난하고 일손까지 부족한 우리 농촌에서 결코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자고 했으므로 나부터 나서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유기농은 가시 박힌 장미다발을 껴안는 것”



1992년 겨울, 양주 풀무원 농장에서 공동체 식구들이 집중 성서교육을 받고 나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양주에서는 양계와 양돈을 포기하고 모두 채소와 벼농사에 집중했다. 그러나 첫해는 참혹했다. 모진 병충해가 약 안 친 채소밭을 걸레로 만들고, 벼 이삭을 반 넘어 훑고 지나가 쭉정이만 남겼다. 농약을 뿌리지 않아 채소에는 벌레가 들끓었고, 벌레를 일일이 손으로 잡아 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이듬해도 그보다 덜하지 않았다. 서울 변두리의 살 만한 집이 몇백만 원 하던 시절에 1000만원어치쯤 손실을 보았다. 풀무원 농장의 형편이 그토록 딱하게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유기농이 뭐 하자는 짓이냐고 빈정대는 사람들도 있었고, 아예 정농회를 탈퇴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때마다 원경선은 고다니 선생의 말을 떠올렸다. “유기농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인데 쉽지는 않습니다. 아름다운 장미다발을 껴안는 것이어서 장미를 껴안을 때마다 가시가 온몸을 찌르게 됩니다. 그 아픔을 모두 견뎌 내야 비로소 장미를 껴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래도 원경선은 계속했다. “오로지 사람을 살리자고 이런 농사를 시작했는데 땅이 나를 망하게 할 턱은 없다”는 생각만이 의지였다. 삼 년째부터 땅이 조심스레 화답하기 시작했다. 흙 1g에 5000만~1억 마리의 미생물이 살고 있고, 이들을 살리는 것이 유기농의 관건이라는 것도 터득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면 미생물이 죽지만, 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는다고 미생물이 되살아나지는 않는다. 미생물도 생명체라 영양분을 먹어야 산다. 먹이는 다름 아닌 퇴비 같은 유기질 비료였다. 원경선은 해낸 것이다. 3년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은 것이다.


유기농산물 가게 차린 큰아들 혜영

1980년대 전후로 매스컴이 유기농의 성공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서울 강남의 부인들이 풀무원의 유기농 소식을 듣고 양주까지 비포장 도로를 달려 채소를 사러 오는 일이 생겼다. ‘유기농’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때여서 그저 ‘무공해’라고들 했다.

1979년부터는 좀 넉넉히 심은 덕에 농장 식구들이 먹고도 남아 조금씩 팔 수 있었다. 원경선의 장남인 원혜영은 서울대 입학 후 학생운동을 하는 바람에 취직을 할 수 없게 되자, 아버지가 키운 무공해 농산물을 팔기 위해 1981년 서울 압구정동에 농산물 직판장을 열었다. 이것이 풀무원의 시작이다.

원 의원은 몇 년 후 고교(경복고) 동창인 남승우 풀무원홀딩스 총괄사장의 투자를 받아 회사를 키우다가 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1993년 경영권을 남 사장에게 넘겼다. 원 원장은 풀무원 창립 이래 지금까지 고문을 맡고 있으며, 이 기업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풀무원은 30여년이 흐른 지난해 1조5000억원 규모의 대표적인 식품기업으로 성장했다. 원경선은 유기농에 바탕한 생명정신을 풀무원에 전해 준 기업의 정신적인 창업자인 셈이다.

원경선은 “풀무원식품이 없었다면 한삶회 공동체의 자립도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공동체가 어려운 마당에 유기농까지 겸했으니 판로가 확보되지 않았다면, 풀무원 농장은 문을 닫았을 것이라고 했다. 현재 풀무원식품에서 250여 농가의 농산물을 소화해 주고 있다.

유기농에 대해 정부는 무관심했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들어 유기농에 대한 입장은 크게 바뀌었다. 김성훈(金成勳) 농림부 장관은 농림부 내에 친환경농업과를 만들고 정농회를 비롯한 유기농 단체들을 지원했다. 입각 전 정농회와 경실련이 합쳐 만든 정농생협의 이사를 맡은 게 인연이 됐다.


유기농업 실천으로 1995년 ‘글로벌 500상’ 수상



1995년 남아공에서 열린 글로벌 500인 시상식에서 원경선 원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넬슨 만델라 대통령(가운데).
원경선은 1990년 국제기아대책기구 한국지부를 설립했다. 1992년 11월 에티오피아 방문을 시작으로 중국 산둥성(山東省) 린쥐(臨駒)현 ‘예수가정’의 의료기구 지원, 1994년 북한 제3병원 의료기구·식량 지원 등의 사업을 펼쳤다.

원경선은 1992년 브라질에서 열린 리우환경회의에 유재현(兪在賢) 박사(현 녹색미래 상임대표)와 함께 참석했다. 원경선은 리우회의에서 한국 유기농의 성과와 현황을 소개했다. 원경선은 리우 환경회의를 계기로 유기농이 단지 몸에 좋은 음식이 아니라 환경과 연관지었을 때는 ‘생명환경’을 개척하는 지름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한다.

경실련 산하기구로 시작한 환경개발센터(현 환경정의시민연대) 초대 이사장을 맡기도 했던 원경선은 1995년 유엔환경계획(UNEP)이 주는 ‘글로벌 500상’을 수상했다. 유기농업 실천으로 생명환경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시상식장에서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인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원경선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원경선은 평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세포는 다른 세포를 위해서 일한다. 그러나 암세포는 자기만을 위해 먹고 자란다. 그러므로 이기주의는 암적 존재다. ‘일용할 양식’을 빼고 나머지를 나누면서 욕심을 버리면 전쟁은 없다.”

원경선의 ‘공동체 실험’은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맞으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양주의 풀무원 공동체가 해체된 것이다. 풀무원식품의 성장을 보면서 큰 기술이 필요치 않은 식품가공에 도전장을 던졌던 것이 화근이었다. 정부 지원을 받아 현미식혜에 도전했던 원경선은 IMF 외환위기 사태가 터지자 생산한 식혜 전량을 폐기했다.

막대한 투자비는 빚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삶회의 재무책임을 맡은 사람이 어음사기에 말려 큰 돈을 잃고 말았다. 결국 농장은 정부 지원금 등의 부채상환용으로 경매에 부쳐져 처분됐다. 넷째딸 혜덕씨는 “풀무원 공동체도 그때부터 해산에 들어가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면서도 “사업으로 치면 큰 실패였지만, 당신이 일궈 온 반백 년의 공동체 농사는 지금도 농촌 곳곳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원혜영 의원은 2010년 발간한 《아버지, 참 좋았다》에서 “《농부철학자, 피에르 라비》란 책을 읽으면서 아버지를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평생을 농부로 살고자 한 것, 생명을 살리는 농사를 짓는 것, 그것을 교육하고 세상에 전파하는 것, 기아를 예측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길을 찾는 것, 공동체가 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길이라는 믿음을 갖고 실천한 것에서 아버지와 피에르 라비는 너무나도 흡사하다”고 했다.

원혜덕씨는 “아버지는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다, 옳은 게 좋은 것이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다”며 “오빠가 경찰에 쫓기고 있을 때, 서울대 김진세(金鎭世) 교수가 부천 집에 찾아와 ‘데모를 하면 여러가지 불이익을 받게 된다’고 하자, 아버지는 ‘어떤 불이익을 당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데모를 하는 게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를 따져야 하는 것 아니냐. 잘못하는 일도 아닌데 손해 보니까 하지 말라는 말을 아비가 어떻게 자식한테 하느냐’고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원경선은 자식들도 ‘유기농’으로 키웠다. 자식들의 본성을 살려 스스로의 길을 가게 한 것이다. 넷째딸 혜덕씨가 대학입학 예비고사에서 경기지역 여자수석을 했을 때, 원경선은 “그 정도면 서울에 있는 교대를 가는 것도 좋겠구나”라고 했으나, 혜덕씨는 “외딴섬 오지에서 교편을 잡기 위해 지방대학으로 간다”며 인천교대에 진학했다.

혜덕씨는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니 언니나 여동생은 매일 아침 교복을 갈아입을 곳을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며 “오빠가 언니에게 ‘강원도 가서 감자만 캐 먹더라도 우리끼리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는데, 어머니가 그 얘기를 전해 듣고 가슴 아파하셨다”고 했다.

그는 “덕분에 우리 식구들은 오빠나 여동생이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서 “공동체 생활이란 게 이상은 좋지만 얼마나 엉터리인지 너무 실감나게 겪었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혜덕씨는 “그 많은 공동체 식구들의 밥과 빨래를 해 대시면서 아버지의 말에 오로지 ‘예’라는 말밖에 하지 않으신 어머니였다”며 “어머니는 ‘세상 사람들이 다 내 자식이고, 이 사람들을 돌보는 게 내 달란트(talent)’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고 했다.


<元敬善의 詩>

원경선 원장은 대안교육의 상징으로 꼽히는 경남 거창고 고 전영창(全永昌) 교장과 인연으로 고 장기려(張起呂) 박사 등과 함께 이 학교를 키웠고, 졸업생 8000여 명에게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풀무원식품은 2004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평단리에 23만1404m²(7만평) 규모의 유기농 농장을 건설하면서 원경선 원장을 위해 공동체 공간을 마련했다고 한다. 농장 바로 옆에 1만9834m²(6000평) 정도 규모의 공동체 공간을 원경선 원장은 ‘평화원’이라고 불렀다.

향후 평화원은 후대에도 남을 것이고, 건축가 승효상(承孝相)이 설계한 원경선 원장의 집은‘원경선기념관’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한다. 딸 혜덕씨는 “아버지의 기념관은 여느 기념관과는 다를 것”이라며 “아버지의 공동체 삶의 정신을 후대에 전하는 방향으로 꾸며질 것”이라고 했다.

중리농장 서재에는 원 원장의 오랜 벗인 고 이열(李烈)의 시 한 편이 액자에 담겨 있다. 이열은 1979년 지은 ‘원경선의 시’에서 그를 두고 ‘하늘의 시를 땅에 쓰는 사람’이라고 했다.

<원경선의 시는 하늘이 내려준/양주 4만평의 땅에서 빛난다/산줄기에서 벗어난/밋밋한 들판에/원경선은/침묵의 시를 쓴다/사람이/사유욕을 버리면/오히려 부요해지는 신비가/그의 시에 사무친다/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사는/아름다운 전설이 그의 시에/메아리친다/원경선의 시엔 태초의 숨결이/넘친다/원경선은 하늘의 시를 땅에 쓴다/하늘이 내려준 양주 4만평의 땅에/그리스도의 시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