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번역본을 찾아서, 노자의 <도덕경>/ 김시천 : 네이버 블로그
최고번역본을 찾아서, 노자의 <도덕경>/ 김시천
노바당
2009. 3. 2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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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번역비평: 최고번역본을 찾아서, 노자의『도덕경』
인문학의 향기 / 2006년 03월 04일 김시천 호서대
‘노자’ 혹은 ‘도덕경’ 번역비평을 위해 관련 번역서들을 책상 위에 모아 놓았다. 열권이 훨씬 넘는 분량이었다. 지난 십여 년간 학술적 토대가 있다고 판단이 된 것들만 모았는데도 상황이 이러하다.
일반적으로 널리 읽히는 ‘노자’, 백서본 ‘노자’, 초간본 ‘노자’, 게다가 왕필의 ‘노자’가 있고 하상공의 ‘노자’가 있으며 초횡의 ‘노자익’과 같은 것도 있다. 다석 유영모나 씨알 함석헌의 것이 있는가 하면, 서양철학자인 김형효의 것도 있다. 어느 누구라도 이같은 상황에서 ‘노자’ 번역서의 비평을 쓴다는 건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나 공자의 ‘논어’ 번역에 대해 쓰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노자’의 전범, 함석헌과 김용욕
‘노자’의 문장은 짧고 간결한 운문형식이다. 게다가 고유명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경구 형식이며, 일반적이고 축약적인 표현을 금과옥조로 여긴 사람들이 만들어낸 문헌이다. 달리 말하면, ‘노자’의 주석자나 번역자가 어떤 ‘맥락’을 갖고 들어가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문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상공의 ‘노자’와 왕필의 ‘노자’를 사상적으로 비교할 순 있어도, 하상공 ‘노자’ 번역과 왕필 ‘노자’ 번역을 비교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양자는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차선책으로 우리시대 ‘노자’ 읽기의 특징을 드러내는 몇 가지 번역서를 중심으로 ‘노자’ 번역을 비평하고자 한다. 달리 말하면, 천의 얼굴을 가진 ‘노자’ 가운데 우리시대의 ‘노자’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번역서들을 중심으로 살피겠다는 것이다.
‘노자’ 번역에서 현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가독성을 지닌 것으로 학문적 토대를 갖춘 번역서로는 무엇보다 김용옥의 ‘길과 얻음’(1989)을 꼽을 수 있다. 간결하고 함축적인 번역, 주석서에 대한 일관된 해석을 바탕으로 한 깔끔한 우리말 완역의 최초 사례다. 이 책은 특히 ‘노자’의 가장 핵심개념인 ‘道’와 ‘德’을 ‘길’과 ‘얻음’이라 번역함으로써 우리말화의 공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함석헌의 ‘노자’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은 것은 필자로선 무척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함석헌의 것이라 해야 맞다. 함석헌은 ‘노자’ 제1장의 첫 구절을 “길 길 할 수 있으면 늘 길 아니요”라고 번역함으로써 한자개념을 우리말로 풀어 ‘노자’를 이해하는 것도 가능함을 보여줬다. 물론 그에게 영향을 준 유영모의 것도 있으나, 유영모의 ‘노자’를 쉽게 읽을 수 있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게다가 함석헌과 김용옥은 ‘노자’를 기독교와 과학이라는 두 요소를 의식적으로 개입시키면서 번역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다만 함석헌의 번역이 화해적이라면 김용옥은 긴장적이라는 점에 큰 차이가 있다.
깔끔한 한글표현이 장점인 김용옥의 번역 ‘여섯째 가름’(6장)은 “골의 하느님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가믈한 암컷이라 한다. 가믈한 암컷의 아랫문은 바로 하늘과 땅의 뿌리라 한다”고 돼있는데, 함석헌은 이를 “골짜기 검은 아니 죽어 그 이름이 까만 암컷 까만 암컷의 문이 하늘 땅의 뿌리”라고 옮긴다. 이를 보면 김용옥의 ‘노자’는 함석헌의 해석을 계승하면서 나름의 시각에서 다듬은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다만 ‘골의 하느님’은 분명 문제 있는 번역어다. ‘노자’의 ‘神’과 현대우리말 ‘하느님’의 연상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노자’는 수많은 판본을 가진 문헌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서도 20세기 후반 마왕퇴와 곽점에서 ‘백서노자’와 ‘죽간노자’의 발굴은 노자연구에 새로운 자극과 가능성을 열었다. 90년대 이후 한국에서도 이러한 신출토 문헌의 판본과 그 연구 성과를 수용한 여러 ‘노자’ 번역이 시도됐는데, 그 가운데 돋보이는 건 최진석의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과 김홍경의 ‘노자: 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다.
철학적 재구성의 성과, 최진석과 김홍경
최진석의 것은 한 시대가 공유하는 ‘철학적 문제의식’ 속에서 ‘노자’ 번역을 시도한다. 해석상 가장 난해한 첫 구절을 그는 새롭게 발굴된 ‘성자명출’의 “오직 인도만이 가도가 된다”는 구절을 통해 ‘可道’의 찬반 논쟁의 맥락에서 나온 것임을 밝혀준다. 또한 ‘노자’에서 크게 부각된 ‘유무’의 문제는 유가와 다른 노자의 본질주의적 입장을 반영한 구절로서 ‘有無相生’은 “유와 무는 서로 살게 해 주고”(2장)으로 번역한다. 최신의 연구성과를 반영했다는 점에서 최진석의 ‘노자’는 또 다른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김홍경의 ‘노자’ 또한 읽는 재미가 아주 쏠쏠한 책이다. 게다가 중국은 물론 서구학자들의 ‘노자’ 번역과 해석까지 샅샅이 연구해 반영했다. 그에 따르면 ‘노자’는 秦나라에서 편집된 문헌이며, 일종의 제왕학 서적으로서 신비주의나 형이상학, 정기양생론이 아닌 삶의 기술에 관한 어느 현자의 노래라는 문헌학적 주장까지 갖춘 도발적인 번역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로부터 번역상의 이견이 많았던 ‘上德不德, 是以有德’을 “뛰어난 덕은 덕에 마음을 두지 않으니 이 때문에 덕이 있고”와 같이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번역을 구사하는 장점이 있다. 그의 번역은 그렇게 상식적 이해를 소중히 여기는 미덕이 있다. 가령, 42장의 ‘萬物負陰而抱陽’을 “만물은 음지를 등지고 양지를 껴안아”라고 한 건 난해한 음양론적 해석을 상식적 의미로 바꾸어 놓은 전형적인 번역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식성을 ‘노자’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노자’의 우리말 번역서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좋은 善本인가를 따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필자는 여기서 두 가지 기준, 즉 한글번역이란 측면과 학술적 토대라는 두 입장에서 각각 두 가지를 선정해 간단히 살펴봤다. 물론 여기엔 필자의 개인적 선호가 상당히 작용했고, 다른 필자라면 다른 판단이 나올 수도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덧붙이고 싶은 건 최근 쏟아져 나오는 주석서 번역에 대해서다. 예컨대 왕필의 ‘노자’는 두 가지, 하상공의 ‘노자’도 두 가지, 백서본 ‘노자’와 초간본 ‘노자’도 이미 번역됐다. 이 가운데 이석명의 ‘노자도덕경하상공장구’는 판본상의 문제, 치밀한 연구에 바탕했기에 돋보인다. 우리가 흔히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어준다(상대적이다)”는 뜻으로 읽는 2장의 ‘難易之相成’이 하상공에 따르면 “어려움을 보면 쉬움을 행한다”는 뜻이다. 즉 상대적 세계관을 표현한 언명이 아니라 행위적 지침으로 읽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석명의 ‘노자’는 ‘노자’의 이해가 시대마다 달랐고, ‘노자’의 번역이 다양할 수 있으며, 과거에도 그랬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에 좋은 사례다.
과거의 ‘노자’ 번역은 도가 연구자에 의한 것이 아닌 한학자에 의한 것, 개인적 관심이나 취향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80년대 이후에는 전문가가 심화된 연구에 바탕해 번역한 성과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동일 주석서의 경우도 2종 이상의 번역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통사회에서 ‘노자’가 다양한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다양한 읽을거리를 제공했던 것처럼, 지금의 우리도 다양한 관심에서 다양한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노자’를 마주하는 상황에 다다른 듯하다. 즐거운 일이다.
김시천 / 호서대·동양철학
필자는 숭실대에서 ‘노자의 양생론적 해석과 의리론적 해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철학에서 이야기로―우리 시대의 노장 읽기’ 등의 저서가 있다.
[노바당]; 참고 자료
통행본(<노자 왕필 주>)의 <노자> 1장 원문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고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차양자동출이이명 동위지현
玄之又玄 衆妙之門 현지우현 중묘지문
함석헌
길 길할 수 있으면 늘 길 아니요
이름 이름할 수 있으면 늘 이름 아니라
이름 없음이 하늘 땅의 비롯이요(없음을 이름하야 하늘 땅의 비롯이라 하고)
이름 있음이 모든 것의 어미다.(있음을 이름하야 모든 것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하고저함 없이 써 그 아득함을 보고(늘 없음은 써 그 아득을 보고저 하고)
늘 하고저함 있어 써 그 끝을 보나니(늘 있음은 써 그 갈래길을 보고저 한다)
이 둘은 같이 나와 이름은 다르나 같이 일러 까맣다
까맘의 또 까맘이
뭇 아득의 오래니라.
김용옥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우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만 본다.
그런데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앞으로 나와 이름만 달리했을 뿐이다.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믈타고 한다.
가믈고 또 가믈토다!
모든 묘함이 이 문에서 나오지 않는가!
최진석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이 세계의 시작을 가리키고
유는 모든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킨다.
언제나 무를 가지고는 세계의 오묘한 영역을 나타내려 하고,
언제나 유를 가지고는 구체적으로 보이는 영역을 나타내려 한다.
이 둘은 같이 나와 있지만 이름을 달리하는데, 같이 있다는 그것을 현묘하다고 한다.
현묘하고도 현묘하구나.
이것이 바로 온갖 것들이 들락거리는 문이로다.
<마왕퇴 백서 노자> 하편 첫 부분/ 갑본, 을본 상호보충 원문
道可道也非恒道也 名可名也非恒名也 도가도야비항도야 명가명야비항명야
無名萬物之始也 有名萬物之母也 무명만물지시야 유명만물지모야
故常無欲也以觀其妙 常有欲也以觀其所曒 고상무욕야이관기묘 상유욕야이관기소교
兩者同出 異名同謂 양자동출 이명동위
玄之又玄 衆妙之門 현지우현 중묘지문
김홍경 (백서 <노자> 번역>
도가 말해질 수 있다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불려질 수 있다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만물의 처음이고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없을 때 그 미묘함을 보고
항상 욕심이 있을 때 그 밝게 드러난 모습을 본다.
두 가지는 한곳에서 나와서 이름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것은 같으니
현묘하고 또 현묘해서
모든 미묘함의 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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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