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절친, 기세춘의 정신 : 조현이만난사람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신영복 절친, 기세춘의 정신
등록 :2019-02-12 18:09
조현 기자 사진
조현 기자
노인은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특히 재야 동양학자이자 민주화운동가 기세춘(84) 선생이 그렇다. 그는 전봉준·이승만·박정희·김대중·신동엽·문익환·신영복 등 ‘인물 근현대사’를 관통했다. 3·1운동 백돌을 앞두고 그를 찾은 이유다. 지난 8일 대전정부종합청사 인근 아파트로 그를 찾았다. 그는 치매 초기인 두살 연상의 부인과 단둘이 살고있다. 거처는 현대식 아파트지만, 그는 어느때와 다름없이 한복차림의 선비풍이다. 거실엔 그가 번역 작업중인 3천쪽 분량의 <다산 주역> 등 고서뿐 아니라 신문 스크랩이 빼곡하게 쌓여있다. 공맹의 시대만이 아니라 현실을 사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숙소 겸 서재 벽면에 ‘學而時習’(학이시습)이란 글이 붙어있다. <논어> 첫구절로 신영복(1941~2016) 선생이 써준 글씨다. 신영복은 그와 뗄레야뗄수 없는 관계다. 기세춘은 서울시청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1963년 동학혁명연구회를 발족시켜 초대회장을 맡았다.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것에만 미쳐 우리것은 저열한 것으로 치부되자 동학에서 자주적 근대화의 길을 발견하기 위해 전봉준의 법정 심문기록인 ‘공초’를 독회하며 공부했다. 그런데 동학연구회 학술위원장을 맡았던 신영복이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체포돼 1심과 2심에서 사형,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무려 22년을 복역했다. 기세춘은 밖에 있었지만, 그의 마음도 감옥에 있었다. 그런데도 신영복의 그의 저서에서 “기세춘형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또 신영복이 감옥에서 한문학과 서예를 배웠던 노촌 이구영이 자신이 설립한 이문학회에서 자기 뒤를 이으라는 요청에 신영복은 “나보다는 제대로 배운 기세춘 형이 맡아야한다”며 기세춘이 강연을 잇도록 했다. 또한 신영복은 가석방으로 출소한 뒤 ‘다시 기세춘과 얽히지마라’는 주위의 강권을 물리치고, <중국역대시가선집> 4권의 방대한 저서를 기세춘과 공동으로 번역해 세상에 내놨다. 신영복과 기세춘을 이어준 것은 사상이나 이념이었을까. 기세춘은 “그게 아니라 선비정신”이라고 한다.
기세춘은 고봉 기대승의 15대손이다. 고봉은 아버지벌인 퇴계 이황과 조선 성리학의 최고 논쟁인 사단칠정논쟁을 8년간 이끌었던 유학자였다. 기세춘의 큰할아버지는 구한말 호남의병대장이던 기삼연이다. 그의 조부인 기삼연의 동생 기동우는 전남 장성에서 전북 정읍 북면으로 이주해 서당 훈장을 했다. 그 때 정읍 이평면에선 전봉준이 서당 훈장을 했고, 강일순도 그 일대에서 서당 훈장을 했다고 한다. 그 때 정읍은 고부군 소속이었는데, 고부군수가 탐관오리 조병갑이었다. 당시는 서당이 정보 소통 창구여서 그곳에서 혁명의 기운이 모아졌다고 한다.
기세춘도 어려서부터 서당학동이었고, 10세에 사서삼경의 최후의 경전인 <주역>을 뗐다. 그러나 이땅의 현대사는 그를 유학도로서 외길을 걷게 두지않았다. 일제시대 많은 지식인들처럼 그의 부친도 좌익활동을 했다. 의병장 조상과 부친의 영향으로 그는 전주사범고 재학 때부터 친일파와 손잡은 이승만을 타도하자는 의혈동지회를 결성할 정도로 일찍부터 ‘저항’의 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첫 교사부임지가 박정희와 김재규의 고향인 경북 선산이어서 그들의 인척들과 인연을 맺었다. 그로 인해 육영수로부터 ‘성심여고에 다니는 딸(박근혜)의 결벽증을 어찌해야하느냐’는 자문을 받기도 했다. 그가 서울교육청을 거쳐 종로도서관에서 근무할때는 민주당 부대변인이던 김대중에게 당시 ‘금서’들을 몰래 대출해주는 창구 구실을 했다. 또 전주사범 선배이자 <껍데기는 가라>의 시인 신동엽이 편집주간으로 있던 <교육평론>잡지에 취재부장으로 일하며 ‘일제의 아류 교육’을 비판하기도 했고, 사월혁명연구회를 창립해 혁명정신을 이어가는데 앞장섰다.
인물만이 아니라 접한 종교도 다양했다. 유학도로 출발했지만,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할머니를 위해 부친이 마을에 세운 교회에 다녔고, 젊은시절엔 한때 입산에 산사에서 지내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종교 사상 이념을 거쳐오면서 그는 “모든 종교와 경전과 인문학이 말하는 것은 하나”라고 한다. ‘서로 사이 좋게 살자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누구도 소외시키지않은 공동체성이 최고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는 뼈속부터 저항가의 기질을 타고났다. 그러나 아픈 개인사와 역사들이 공동체성을 일깨워준 것 아니냐고 말한다. ‘현대사에서 좌건 우건 어느 누구도 아프지 않은 사람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승만의 친위대에 의해 두들겨맞은 좌익 부친의 아픔만 본것이 아니다. 한의사였던 외삼촌은 그 좌익들의 즉결처분으로 죽었다. 또 그의 큰누나는 위안부가 되지않으려 간도로 피신했다가 해방뒤 귀국하던 중 폭격으로 남편을 잃고, 순천에서 경찰을 만나 개가했으니 그도 여순사건으로 잃는 연속적인 비운을 맞았다.
그가 공자식 혈연주의보다 좀더 폭넓은 사랑과 비폭력을 주창한 묵자를 들고나온 것도 이 아픈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묵자에게서 마르크스의 평등과 예수의 사랑을 동시에 보았다고 했다. 문익환 목사는 감옥에서 기세춘과 옥중서신을 주고받아 <예수와 묵자>를 공저로 펴냈다.
그는 우리의 가장 큰 병을 주체의식의 결여로 본다. 조선의 사대모화사상과 일제때의 친일과 해방후의 친미는 자기 것을 망각한채 온통 자기 정신을 빼앗겨버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제에 해방되고서도 군대만 다녀오면 온통 군대 얘기 밖에 안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조선 국민이 제정신을 차려 찬란하고 위대한 옛 조선의 영광을 찾으려면 100년이 더 걸릴 것이라고 했다. ‘우리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기에 결국 조선인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는 “외래사상 하나에 정신이 팔리고 명분에만 휩싸여 다양한 가치와 창의성을 짓밟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신동엽이 가라던 껍데기는 실은 친일파나 우익만이 아니라 오직 명분에만 사로잡혀 다양성을 짓밟은 짓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남과 북이 만날 수 있는 것도 ‘만물이 더불어 살아가야할 운명공동체라는 자각인 천인합일을 주장하는 선비정신’이라고 했다. 그 ‘오래된 미래’인 선비 정신으로, 서로를 아프게 한 폭력과 분열 이전으로 되돌아가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