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입문
<노자>를 읽기 전에
노바당
2020. 6. 18.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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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 2000년, 『노자』20년
위 제목은 2001년 <노자 제대로 읽기>라는 책을 쓰게 된 연유와 그 이후 20년 간의 <노자> 공부에 대한 이야기와 타인의 <노자> 해석에 대한 비판 글을 모은 책의 제목으로 구상한 것이다. 여기에 거의 50년 간의 취미 생활로 <노자>를 읽어 온 간단한 역사를 써보려 한다.
1970년 대 초, 대학 때 처음 <노자>를 읽은 후 "나는 도가다"라 생각했다. 당시에는 함석헌 선생이 <씨알의 소리>에 <노자> 강의를 연재하셔서 도움이 됐고, 마침 서울 용산 원효로 3가 같은 동네에 살아서 가끔 목욕탕에서 마주쳐 인사를 드리기도 했다. 물론 개인적인 교류는 없었다.
나는 대학 입학 때까지 큰 비극과 좌절을 합해 3번 겪었다.
1980년
1986년
1989년
1993년
1996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4년
2007년
2010년
1. <노자>는 읽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가? - 톨스토이의 서재
한 권의 책을 50년 가까이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책을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일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그렇지 않다.
<노자>는 일반인이 읽어야 할 책이 아니다.
1980년 대 초반 쯤 KBS 방송국에서 "세계문학순례"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한 적이 있다. 톨스토이의 고향집 "야스나야 폴라냐"에 있는 서재의 책상 책꽂이에 <노자 도덕경>이 꽂혀 있는 걸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당시에는 톨스토이와 <노자>를 연결시킬 만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2. 노자라는 사람과 <노자>라는 책 -老子其人其書
3. <노자>는 누구를 대상으로 쓴 책인가?, 누구를 위해 쓴 책인가? - 육아 책
책은 그 책을 보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 상식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육아 책은 아기의 엄마가 보는 책이지만 아기를 잘 돌보기 위한 책이다. <노자> 역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노자>는 최고의 정치적 실력자를 대상으로 한 책이지만 하층민을 위해 쓴 책이다. 이점은 <노자>에 ‘천자’, ‘왕’, ‘공’, ‘후’, ‘인주’, ‘만승지주’, ‘사직주’라는 말이 나오는 횟수 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왕’은 원래는 천하의 공주共主인 주나라 천자를 이르는 말이지만 전국시대에 주왕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강대국인 진, 제, 초나라 제후들이 ‘왕’을 참칭하게 되었다. 이 후 고대 중국은 봉건제에서 중앙집권적 군현제로 향하게 되었고 결국 진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진왕 정은 천하통일 후 ‘왕’이라는 명칭을 ‘황제’라 바꾸었고 자동적으로 제후들은 ‘왕’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나는 <노자>의 대상이 누군가 하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읽는 것이 <노자>를 오해하는 원인 중 하나라 생각한다. <노자>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 지혜가 있지만 강자에게만 해당되는 특수한 측면이 있다. 이런 특수한 측면을 보편적인 지혜로 생각하고 약자가 자기 삶의 지침으로 삼는다면 심각한 부작용을 불러 올 수 있다.
4. 노자는 무엇을 말하는가? - 도와 천도, 자연무위, 유약
5. 중국 고대 사상의 일반적 특징 – 천하, 제자백가, 음양론
6. 도가 사상의 특징과 <노자>의 특징 - <노자>와 <장자>는 다르다
7. <노자>를 한문으로 읽기 위한 지식 – 상용한자 1800자
8. 도가와 도교는 다르다 – “死生一也”와 “長生不死”
9. “道可道非常道”만 <노자>가 아니다. - “民不畏死,
10. <노자>에 대한 오해 – “將欲弱之, 必固强之”
11. <노자>에 대한 비판 – 자연으로 돌아가자?, 아니다.
12. <노자>는 현대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 플라톤과 기독교/ 서양과 동양
1편; 도가도비상도 1
사진; <노자 제대로 읽기> 2001, 씨앗을 뿌리는 사람
참고:
1. 이글은 원래 친구들과의 카카오톡 대화에 쓴 것이라 경우에 따라 반말투와 경어체가 섞여 있습니다.
2. 개인적 내용은 대부분 제외하였으나, 문맥에 따라 노출된 경우가 있습니다.
3. <노자>를 읽어보고자 하는 분들은 시중의 <노자> 번역서 한 권, 가능하면 학자가 해설한 것과 비교해 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4. 중복되는 내용과 제 다른 글의 내용, 또<노자>와 무관한 내용도 있습니다.
5. 사진은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사진; 중국 노산 태청궁, '도법자연'
지난 봄에 서울 약대 73 동기들인 기희, 창배, 수장이와 중국 청도에 4박 5일 다녀왔습니다,
그 한 달쯤 전에 같이 술 한잔하다 갑자기 결정한 일입니다. 나는 정말 즐겁고 좋았는데 친구들은 어쨌는지? 다들 좋아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기왕 오늘 여기에 글 쓴 김에... 청도에서 하다 못한 <노자> 제1장 첫 구절,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얘기 좀 더... 먼저 통행본의 대표인 <왕필 노자주>의 1장 전문을 우선 봅시다.
사진; <노자 왕필주> 1장
1.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2.無名, 萬物之始; 有名, 萬物之母.
3.故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
4.此兩者同出, 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대체로 <노자>를 철학적으로 읽는 사람들은 <노자> 1장이 노자 사상을 총괄하는 장으로 여깁니다. 이점은 책의 첫 부분이 보통 책의 내용을 개괄하는 서문 격에 해당하고, 뭔가 모르지만 어려운 듯한 개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도, 상도, 무, 유, 무명, 유명, 무욕, 유욕, 묘, 요, 현 등등
“道可道, 非常道.” 도가도비상도
이 간단한 여섯 글자가 지난 2000년 이상 동안 <노자>를 읽은 사람들 골을 아프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이 그 어렵다는 <노자> 1장의 첫 구절이고, 뭔가 모를 고매한 사상을 표현한 거로 미리 단정 짓고 접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 구절은 <노자>의 첫 구절이 아닙니다. 그리고 <노자>는 크게 보아 실용적 정치사상이자, 사회사상입니다. <노자> 책에는 노자(저는 일개인이 아니라 생각함)의 문제의식(천하혼란의 해결)과 주장(해결책; 자연무위, 유약, 처하), 그리고 주장의 근거(철학, 사상)를 담고 있습니다.
‘도가도, 비상도’라는 구절은 그 주장에 대한 근거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道可道, 非常道.”
여기에 우리들이 모를 한자는 없습니다. 요즘 초등학생도 다 아는, 단 여섯 글자... 그러나 그 해석은 너무도 다양하고 기괴한 것도 많습니다. 여섯 글자 중 ‘길 道’ 자가 석 자나 됩니다. 그런데 이 3군데의 ‘道’ 자는 그 의미가 다 다릅니다.
이 구절은 대체로 이렇게 해석합니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말해진 도)은 항상 된 도가 아니다.’
옳은 의미의 번역입니다. 그러나 원문보다 더 모호하게 번역된 것입니다. 그러나 원문의 3개의 ‘道’ 자를 3개의 우리 말 ‘도’ 자로 표현한 것은 오해의 소지가 너무 많습니다.
특히 가운데 ‘도’ 자는 그냥 ‘말하다’라는 동사(verb)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도를 말로 표현하면. 그것은 항상된 도가 아니다.”
영어로 번역해 보면 더 쉽습니다.
If the dao can be spoken of, it is not the constant Dao.(道可道, 非常道; 왕필본 번역)
The Dao can be spoken of, but it is not the constant Dao.(道可道也, 非常道也; 백서본 번역)
영어로 된 두 문장의 의미는 조건문 형식과 서술문 형식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거의 같습니다. 그러나 위의 번역 문장 중의 명사 표시가 오해가 적은 표현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위 문장은 처음 ‘도’ 자는 일반명사로 소문자, 마지막 ‘도’ 자는 대문자, 즉 노자의 고유명사라는 구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래에 예로 든 번역은 ‘도’(dao; 한자병음 표기, 서양에서는 주로 tao라고 씁니다) 자가 둘 다 대문자라 두 개의 ‘도’ 자가 같은 의미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첫 번째 ‘도’ 자는 일반인의 도, 당시 상황(전국시대 bce 403 ~ bce 221)에서는 여러 학파에서 주장하는 진리 체계, 또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도’ 자가 노자의 도, <노자> 책에서 파악하고 체득해야할 그 무엇( x )입니다. 그 무엇을 일단 ‘길(way)’이라는 의미의 부호(x = 道)로 표시한 것입니다.
아래 영문은 미국 다트머스대학의 중국학자인 로버트 헨릭스(Robert Henricks)의 1장 '도가도, 비상도“ 번역입니다. 이 분의 노자 해설 책 여러 권이 본토인 중국에서 번역 출판되었을 정도로 인정받는 전문가입니다.
사진; 헨릭스 <곽점 노자>
사진; <간백노자연구> 북경대 형문 번역
“As for the Way, the Way that can be spoken of is not the constant Way.”
‘As for the Way’는 이 분이 주제 이해를 돕기 위해 추가한 구절입니다. 그 다음의 ‘the Way’라고 대문자로 번역한 것을 저는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이 ‘the Way’와 ‘the constant Way’를 동일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 道’ 자가 동사로 쓰인 용례는 선진시대(진시황제 이전)에 많습니다. 일례로 bce 500년(공자시대) 이전의 詩經(민요집, 국풍은 대체로 연애시)에 ‘장유자’라는 시가 있습니다.
‘墙有茨(장유자)’
1. 墙有茨,不可埽也。中冓之言,不可道也。所可道也,言之丑也。
장유자 불가소야 중구지언 불가도야 소가도야 언지추야
2. 墙有茨,不可襄也。中冓之言,不可详也。所可详也,言之长也。
3. 墙有茨,不可束也。中冓之言,不可读也。所可读也,言之辱也。
1. 교합 중의 말은 입밖에 낼 수가 없는 것, 설사 입에 올린다하자, 말만 구질구질해질 뿐,
여기서도 ‘道可道’와 같이 ‘可道’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가可’는 영어의 can과 같은 조동사, 道는 ‘말하다’라는 본동사입니다.
<장자/ 知北遊>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道不可言, 言而非也.’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노자의 첫 구절을 인간의 언어에 관계된 철학적 선언으로 읽는 분들은 이후의 노자의 사상을 대체로 그런 방식으로 읽습니다. 그러나...<노자>는 천하혼란의 해결방법을 최강의 권력자(예를 들어, 진왕 영정이나 승상 이사와 같은 최고 실력자)에게 제시한 정치적 실용서입니다. 왕에게 고상한 철학을 가르치기 위한 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왕이 알아듣기 쉽게 쓰여 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도가도, 비상도’의 의미는 단순합니다. 저는 노자가 왕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제시하는 치법治法(도)은 말만 앞세우는 일반적 주장과는 다릅니다.”
<노자> 72장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요즘 81장으로 구성된 <노자> 책에서는 당연히 1장보다 한참 뒤, 아니 거의 끄트머리에 나오기 때문에 여기까지 읽는 사람도 드물고, 또 앞의 내용들을 대체로 심원한 사상으로 이해, 즉 철학적으로 이해해 왔기 때문에 이런 부분들을 경시하기 쉽습니다.
여기에 <노자> 72장, 74장, 75장의 첫 구절을 옮깁니다. 당연히 노자가 현행본 규모로 성립한 당시 사람들은 현재의 1장보다 이런 구절들을 먼저 읽었을 것입니다.(<마왕퇴 백서 노자>, <북대 한간 노자>)
<노자> 72장; 民不畏威, 則大威至.
백성들이 권위를 무시하는 지경이 되면, 큰 위협이 닥치게 됩니다.
<노자> 74장; 民不畏死, 奈何以死懼之?
백성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까지 되면, 죽음으로 그들을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노자> 75장;民之饑, 以其上食稅之多.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것은 윗 사람들이 세금을 너무 많이 받아먹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천하天下(전 인류사회)’라는 규모를 운영하는 최고의 강자에 대한 조언이자, 경고입니다. 노자의 독서 대상은 “최고의 리더” 입니다. 저는 이점을 무시하면 노자를 오해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전에는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해 많은 부작용을 겪었습니다.
<노자>는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어느 사회 조직이건 간에 최강의 리더를 대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자>의 목적은 그 사회의 피지배자인 약자를 위한 것입니다.
이건 모순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육아育兒책은 아기 어머니가 읽는 책이지만, 아기를 위한 책입니다. 아기를 잘 위하면 어머니에게도 좋은 결과가 됩니다. 아기를 위하지 않는 어머니는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 위하는 방식(道)는 여러 가지일 것이고, 노자는 말을 앞세우지 않는 자기의 방식이 그중 부작용이 덜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노자>를 이런 식으로 읽습니다. 노자에 철학적 부분도, 신비적 해석이 가능한 부분도, 모호한 표현도 있으나 노자의 목적을 안다면 모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노자> 70장; 吾言甚易知, 甚易行.
제 말은 알기도 쉽고, 행하기도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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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 노자 공부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광준이! 노자는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가? 라는 질문이라 생각하고 답변을 해 보겠네.
나는 위에서도 썼지만 노자의 대상(강자)이 아니네. 그러나 살다보니 최소 한 가족의 장이 되었고, 내 말과 행동에 따라 주위사람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게 된다는 정도는 자각하게 되었네.
그리고 회사도 몇 년 다녀보았지만 나는 조직사회에서 성공하고자하는 욕구가 부족한(물러나는) 스타일이야. 그런 면에서 권력욕이 적으면서도 조직사회에 속해 살아온 너나 창배는 훌륭하다고 생각해...
노자는 세계를 보는 하나의 방식이자, 사고방식이야. 나는 노자의 조언이 자애로운 부모의 방식이자, 약자를 우선하는, 사회에 대한 부작용이 덜한 강자의 태도와 지도 방식이라고 생각해.
너와 나를 포함해 우리 때 사람들은 노자를 저도 모르게 대부분 이해하고 있다고 봐.
그리고 노자를 읽는다고 하면 좀 있어 보이는 부수적 효과가 있어...
노자를 몰라도 세상을 잘, 좋게 살아갈 수 있지... 광준이 너처럼. 나는 예전 대학 때부터의 취미(취미의 특징은 무소용)라 지금도 노자나 중국선진사상을 읽고 있는 거지. 바둑이나 당구같은 취미... 노자 오래 읽었다고 훌륭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느냐는 것은 다른 문제지... 우리 집사람 만나면 함 물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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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보다는 무지가 자신감을 더 일으킨다." 찰스 다윈(<인간의 유래>)
"실력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실제보다 자신을 더 낫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들은 과도한 착각을 겪는다."(<보이지 않는 고릴라> p 133)
YouTube “selective attention test” (1분 21초, 조회 11,500,856)
1.흰 옷 입은 학생들이 농구공을 패스한 횟수는?
아래 글을 보기 전에 동영상에서 확인!!!
2. 횟수는?
3. 15회, 맞습니다.
4. 그런데 고릴라를 봤습니까?
5. 못 본 사람이 50% 정도입니다. 못 본 사람들은 오히려 집중력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6. 못 본 사람 중 고릴라가 지나갔다면 “내가 봇 봤을 리가 없다.”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2편; 어떤 책이 <노자>인가?
어떤 책이 <노자>인가?
어쩌다 가보는 등산모임에서 보면 효신이, 수장이, 만규 들이 <노자>에 대해 상당히 깊은 이해가 있다고 느낍니다.
우리가 시중에서 사보는 <노자> 책의 원문(한문)은 약간 씩 다릅니다. 어떤 것이 노자의 원문일까요?
사진; <왕필집교석> 북경대 교수, 루우열
정확한 원문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보는 <노자> 원문은 삼국지 시대 조조가 세운 위魏나라 시대의 대천재 왕필王弼(ce 226ㅡ249)이 20세 이전에 쓴 <노자왕필주>에서 해설 부분을 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현 왕필본의 원문은 왕필이 보았던 그대로가 아닙니다. 이점은 원문과 왕필의 주에 인용된 원문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인 송宋나라 이전에는 모든 책을 손으로 필사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까지는 필사 오류와 의도적인 원문 개조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송나라 이후에는 인쇄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인쇄본은 수백 년이 지난 청淸나라 때 것입니다.
왕필본 이외에도 노자의 판본은 여러 가지고, 글자 수, 사용된 한자 등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후 중국에서는 갑골문, 돈황 석굴, 진시황제 병마용갱 등 어마어마한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 졌습니다.
사진; <마왕퇴의 귀부인>
그러던 중...
1973년 호남성 장사長沙에서 한나라 초기(bce 168 매장) 무덤에서 비단에 쓴 엄청난 양의 책들(帛書)이 발굴 되었습니다. 여기에 2종류의 <노자>가 있습니다.
<마왕퇴 백서 노자 甲>
<마왕퇴 백서 노자 乙>
<노자>를 읽는 사람들에게는 경천동지할 사건이었습니다. 무려 2200년 이상 이전의 <노자>의 실물을 본다는 것... 가슴 떨리는 일입니다.
사진; <마왕퇴노자> 을본 부분
사진은 그 중 상태가 좋은 부분이고 부실한 발굴로 인해 상당한 손상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필사시기가 다른 2가지 <노자>가 동시에 발굴되어 맞춰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는 현행본 <노자>의 정확성을 증명해 주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현행본 <노자>는 81장(9 곱하기 9)으로 분장되어 있고, 도경道經이라 불리는 상편, 덕경德經이라고 불리는 하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자를 <도덕경>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이름이 좋지 않다고 봅니다.
<마왕퇴 노자>는 분장 없이 쭉 이어져 씌어 있고, 상하편의 구별은 되어 있으나, 지금의 덕경(38장~81장)이 상편, 도경(1장~37장)이 하편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은 <덕도경>으로 불러야 합니다. 제가 노자를 한 번도 <도덕경>이라고 부르지 않은 것을 눈치 챈 분도 계실 겁니다.
그래서 로버트 헨릭스 교수의 영어판 <노자>(<마왕퇴 노자> 번역, 해설)의 제목이 ‘TE-TAO CHING(德道經)’입니다.
사진; <LAO-TZU, TE-TAO CHING>
1993년 전국시대의 초楚나라 무덤에서 또 엄청난 양과 내용의 책들이 발굴되었습니다. 여기서도 <노자> 책이 나왔습니다.
전국시대는 진시황제가 통일(bce 221)하기 전이므로 위에서 말한 <마왕퇴 노자>보다 적어도 수십 년, 많게는 일, 이백년 앞서는 <노자>가 나온 것입니다. 이 책은 곽점이라는 지역에서 발굴되었고, 대나무(竹簡) 위에 쓴 것이라 대개 이렇게 부릅니다.
<郭店楚簡老子> (곽점 초간 노자)
사진; <곽점초묘죽간>1998 문물출판사
<노자>에는 상식적으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적인 말, 무서운 말들이 많습니다. 특히 유교적 가치(仁義禮智聖)에 대한 비판은 알게 모르게 거기에 젖어 온 사람의 간담을 서늘케, 아니 분노를 일으키게 합니다.
우리는 仁義禮智信을 오상五常이라 하지만, 전국시대에는 ‘信’ 대신 ‘성聖’을 넣어 오행五行이라 했습니다. 노자는 인의예지성 다섯 가지를 모두 비판합니다.
<노자> 5장; 天地不仁... 聖人不仁
천지는 인자하지 않습니다... 성인은 인자하지 않습니다.
<노자> 18장; 大道廢, 有仁義.
큰 도가 사라져서 인이니, 의니 하는 것들이 생긴 것입니다.
<노자> 19장; 絶聖棄智... 絶仁棄義...
성스러움과 지식을 버리고... 인과 의도 버리고...
<노자> 38장;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
예라는 것은 진실한 믿음이 엷어서 천하혼란의 시작이 됩니다.
노자는 성리학이 국교화된 조선시대에 금서였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조선 후기의 노론 후손들이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리학에서는 좋은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곽점 노자>는 현행본 <노자>의 1/3 분량(1700 여자)입니다. 그런데...
사진; <곽점초묘죽간> 현행본 19장 부분
여기에는 현행본 <노자> 19장의 ‘絶聖棄智...絶仁棄義’가 이렇게 돼 있습니다.
絶智棄辨... 絶僞棄慮
지식과 분변함을 버리고... 거짓과 잔꾀를 버리면...
현재 발견된 가장 오래된 <노자> 책(bce 300년 경)에 이렇게 되어 있다면 우리가 보는 <노자>의 19장은 후에 누가 반유가적으로 변조한 것이 됩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후대에 책 내용의 변조가 가능하다면 그 이전에도 변조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곽점 초묘(초나라 무덤)에서는 많은 책이 발굴되었습니다. <노자>는 소량, 대부분 유가의 책입니다. 그리고 이런 예를 제외하더라도 <노자>에는 반유가적 분위기가 충만합니다.
사진; 칠이배
곽점 초묘에서는 부장품도 많이 나왔습니다. 위의 칠이배漆耳杯(양쪽 손잡이 달린 옻칠 술잔)의 하면에 ‘東宮之師’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세자의 스승이라는 말입니다. 왕자에게 ‘절인기의’를 가르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동궁지사에 대한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곽점 노자>에는 <노자>의 중요한 여성적이고, 음적(음흉하다는 의미가 아닌, 긍정적인) 가치에 대한 구절들이 거의 없습니다. 저는 이런 부분이 없으면 심하게 말해서 <노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자> 36장; 柔弱勝剛强.
부드럽고 약한 태도가 굳고 강한 것보다 나은 것입니다.
‘유약승강강’은 강자(힘 있는 사람)의 사상입니다.
저는 <곽점 노자>가 형성과정 중의 노자라고 생각합니다. <마왕퇴 노자>부터 <노자>이고, 현재 우리가 보는 <노자> 책을 노자라고 여깁니다.
2009년... <노자>에 관해 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2009년 중국 북경대학에, 성공한 졸업생이 해외에 유출된 대량의 유물을 구입하여 기증했습니다. 대부분 책(죽간)이었는데 거기에도 <노자> 책이 있었습니다. 시대는 한나라 무제武帝 후기 정도(bce 100년 경?) 이것을 <북경대학장서한죽서노자>, 간단히 말하면 <北大漢簡老子> 라고 부릅니다. <북대노자>는 99%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현행본과 개별 한자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동일한 내용입니다.
사진; 북경대학노자 2013년 12월 정리 출간.
저는 취미로 <노자>에 관한 이런 저런 책들을 대체로 찾아 보지만, 노자 사상을 이해하는 데는 잘 고른 책 몇 권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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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저주(the curse of knowledge)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잘 아는 내용을 남들도 웬만큼은 안다고 생각하여 설명 수준을 상대의 이해력보다 높여 잡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평소에 관심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끼리의 소통이 더욱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남들의 수준을 안다? 어려운 일입니다.
경계!
3편; 도법자연 1
사진; <열자/ 설부>
도가서인 <열자>에 있는 글이야... 있을수록 조심하자는 말일 수도 있고, 세상 일 한치 앞을 모른다는 말일 수도...
사진; 청도 노산 태청궁은 도교 사원. '도법자연, 천인합일'
다 알겠지만 <노자>, <장자>, <열자>를 도가 삼서道家三書라 하지. 도가(philosophical Taoism)는 종교가 아니야. 도교(religious Taoism)는 종교지...도가와 도교는 달라.. 도교는 중국 전래의 민간신앙이 주고, 후에 종교의 이론적 배경을 위해 노장 사상이 첨가된 것이라고 봐...
나는 내가 도가(taoist)라 생각하고 살아...태극 문양은 음양사상을 나타내고, 천인합일天人合一은 세계와 나의 동원성과 공통성을, 도법자연道法自然(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따른다)은 만물의 자발성과 개성을 중시하는 질서만이 오래 사회를 유지할 수 있고, 개인의 행복을 가져온다는 말이라 생각해...
그런데, 따로 <노자> 책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은 <노자>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을까?
그래서 <EBS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참고서를 한 권 사 봤지... 이게 시험에도 나오는 일반적인 노자, 장자 이해겠지... 그런데... 전혀 아니올시다 야...
사진; <EBS 윤리와 사상>
1. 도가는 노자에 의해 시작되고 장자에 의해 더욱 발전함 ㅡ 노장사상(ebs)
노자와 장자는 그 사상의 기본 배경(자연/ 스스로 그러함)이 같지만, 관심 영역이 다르지... 노자는 사회, 특히 정치적 최고 실력자에 대한 책, 장자는 평민 지식인의 정신적 자유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지. 특히 장자는 본인의 저술로 판단되는 내편, 후학의 전승이나 창작으로 판단되는 外 雜편의 사상이 확 다르지...
공자보다 선배로 생각되는 노자는 <노자> 책의 저자가 아니라 전설로 봐야한다고 생각해. 나는 <장자 내편>, <노자>, <장자 외 잡편>의 순서로 보지...
‘도가’라든지 ‘노장’이라는 말은 한나라 때 제자백가를 분류할 필요 때문에 생긴 말이야... 그래도 다 서력기원 이전의 일이지...노지에 나오는 ‘自然’이라는 한자는 요즘 쓰는 자연이라는 말과 전혀 의미가 다른 것이야. 현대어의 자연은 영어 ‘nature’를 일본인이 번역 한 거지... 물론 노자에서 빌린 거야... 노자 뿐 아니라 중국 고전에 나오는 ‘自然’은 그 훈대로 ‘스스로 그러하다’ 라고 읽어야 해. ‘nature’와 같은 명사가 아니라는 말이지...
‘天地自然.’이라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구... 이 말은 ‘천지는 자연(nature)이다’라는 말이 아니고,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다.’ 라는 말이야. 자연은 외적 작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 동력에 의해 저절로 질서를 찾는다는 말에 가깝다고 생각해... 물론 자연으로 번역한 ‘천지’와 ‘natur’e는 그 함의에 차이가 있겠지만...
공자시대(bce 500년 경)나, 그 이전에도 도가적 사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도 가능하다(주로 史官). 그런 사람들에게 제자가 있는 경우 당대에나, 후대에 그 말을 서책으로 전하기도 했을 것이다. 후에 이중에서 도가사상적 통일성이 있는 부분들을 모으고 주제 별로 분류, 편집하여 현재 우리가 보는 노자와 가까운 책이 되었다.
나는 이게 노자 책에 대해서는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해...처음 듣는 말일지 모르지만, 나는 <장자 내편>의 작자, 즉 장자 본인은 일부분은 모르겠으나, 현행본 <노자>와 가까운 <노자> 책(<마왕퇴 노자> 정도)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해... 이런 생각은 중국, 한국 학자들 보다 서양(미국, 유럽) 학자들의 보편적 노자 인식이야!
저는 노자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도법자연’(25장, 道法自然/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따른다)이라고 생각합니다.
도가에서는 당연히 ‘도道’를 중요시하지만, 그 ‘도’ 역시 제한되는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도라고 하면서 만물의 자발성을 손상시킨다면 그것은 노자의 도가 아닙니다.<노자>는 강자의 사상입니다. 또 노자의 사상을 ‘무위자연無爲自然’ 이라고 요약합니다. 저는 ‘자연무위’라는 역순의 표현이 좋다고 봅니다. 무위는 노자의 자연 사상에서 자동적으로 도출되는 태도와 행동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다들 짐작하다시피 ‘무위’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무위는 ‘위무위爲無爲’의 준말로 ‘무위를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위무위’의 앞의 ‘위爲’ 자는 행한다는 가치중립적 표현, 뒤의 ‘위’ 자는 ‘유위有爲’의 줄임말로 강자의 작위적이고, 강제적인 목적의식적 행위 방식을 말합니다. 권력자의 유위의 결과는 대체로 이렇습니다.
<노자> 72장
民不畏威, 則大威至. 無押其所居, 無厭其所生.
백성들이 (권력자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크게 두려워할 일(반란?)이 생기게 됩니다.
백성들의 사는 곳을 핍박하지 말고, 그들의 삶을 지겹게 여기지 않게 해야 합니다.
노자는 자연 사상에서 비롯한 무위를 말하지만, 전국시대(현재도 마찬가지)의 학정과 重稅로 인해 고통 받는 백성을 위해, 왕에게 뭘 한다고 설치지 말고 차라리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백성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노자의 道라는 것은 실재하는가? 모릅니다. 저는 노자의 도는 만물의 통일성(동포同胞)에 대한 통찰의 표현이며, 가설(hypothesis)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 철학은 지식 그 자체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선진 사상은 세상 혼란의 원인과 치법治法을 떠난 순수 철학이라는 것이 드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인간관계, 인간 간의 권력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천하 태평(天下太平 티엔시아 타이핑)
이것이 <노자>의 대주제입니다. <노자>는 큰 규모의 사상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저는 제도(institution)라고 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이거 이용해 치부하는 관료들입니다. 요 며칠 사이, 전에 읽었던 버틀런드 러셀의 <서양의 지혜>를 읽고 있습니다. '가정맹우호'의 고사는 러셀의 책 <권력; Power> 에도 인용되어 있습니다.
孔子过泰山侧,有妇人哭于墓者而哀。夫子式而听之,使子路问之曰:“子之哭也,壹似重有忧者。”而曰:“然!昔者吾舅死于虎,吾夫又死焉,今吾子又死焉。”夫子曰:“何为不去也?”曰:“无苛政。”夫子曰:“小子识之,苛政猛于虎也!” <礼记·檀弓下>
공자가 泰山 옆을 지날 때 어떤 부인이 묘에서 곡하며 심히 슬퍼하는 것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공자는 제자인 子路를 시켜 이렇게 묻게 했다. “부인의 곡소리를 들으니 아무래도 여러 번 슬픈 일을 당한 것 같습니다.”
부인이 대답하길: “그렇습니다. 전에 시아버지가 호랑이한테 죽었는데, 제 남편도 그랬고, 이번엔 제 자식마저 호랑이에게 당했습니다.”
공자가 묻기를: “그러면 어째서 이 무서운 고장을 떠나지 못하는 거요?”
부인이 대답하길: “그래도 여긴 가혹한 정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명심하라. 가혹한 정치는 백성들에게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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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한 사람이라도 듣는 사람이 있으면 말을 하고, 한 사람이라도 보면 글을 쓰는 법이지...
내가 만든 말인가?
몇 년 전 단 한사람(한양대 컴퓨터 김인성 교수) 보라고 A4용지 10포인트로 45장의 글을 쓴 생각이 나네...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노자 사이비에게서 빠져나오게 되어 고맙다는 말을 들었지...("이경숙 노자 비판")
세상에 너무 많은 사이비가 있고, 그걸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수백, 수천 배...
세월호 관련 구원파 같은 거, 정통 종교라는데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너무도 많지... 신념은 힘을 주지... 그런데 가짜 신념은 대체로 더 큰 힘을 준다네...
왜냐하면 거기에 합리적 의심이라는 건 전혀 없으니까... 나는 의심이 배신이 되는 사회에 속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회의 없는 신념은 광기가 아닐까?
4편; 왕필, 숭본이식말
나라에 큰 문제가 생기면 누구의 책임일까?
<노자>에 성인聖人이라는 말이 30회 정도 나옵니다. <노자> 전체의 글자 수가 5000자 정도 이므로 노자의 대상이 누구인지 이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성인은 공자처럼 깨달음이 있는 훌륭한 스승이나, 교주와 같은 종교적 의미가 아닙니다.
<노자>에서의 성인은 이상적인 최고의 정치적 실력자(ideal political leader)를 말합니다. 이점은 <노자>에 후왕侯王, 만승지주萬乘之主(만대의 전차를 보유한 대국 군주)라는 표현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영화 스파이더맨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Great power always comes with great responsibility.
거대한 힘(권력)에는 크나큰 책임이 요구된다.
이 말은 원래 볼테르가 한 말이라고 합니다. 스파이더맨이 했건, 볼테르가 했건 옳은 말은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보다 더 확실히 최고 권력자의 책임을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불과 24살에 죽은 왕필王弼(ce 226~249)의 <노자> 주注는 역사상 수천가지의 <노자> 해설 중 최고로 평가됩니다.
사진; <노자 왕필주> 1장
‘道可道非常道...’라는 큰 글씨 옆에 작은 글씨로 두 줄로 쓰여 있는 부분이 왕필의 해설입니다.
왕필의 해설은 대체로 <노자>의 철학적 측면을 강조했습니다. 이점은 삼국지 시대의 혼란기, 즉 정치적 관여(편 잘못 먹고 말 잘못하면 찍소리도 못하고 사망가능성)를 포기한 죽림칠현의 시대 였기 때문이기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노자 원래의 권력 비판적 구절에 대한 왕필의 해설은 너무도 명료하게 핵심을 찌릅니다.
<노자> 75장 본문
民之輕死, 以其上求生之厚.
백성들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윗 사람들이 너무 지나치게 잘 살려 하기 때문입니다.
<노자> 75장 왕필주
言民之所以僻, 治之所以亂, 皆由上, 不由其下也. 民從上也.
백성들이 살기 어렵고, 정치가 어지러워지는 원인은 모두 최고 권력자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백성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백성들은 윗 사람을 따른다.
‘후미질 벽僻’ 자는 가난하고, 권력에 시달려 생불여사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저는 이 해설이 현금의 상황에도 해당된다고 봅니다.
왕필은 <노자> 전체를 한 구절로 표현합니다. 왕필 말대로라면 이 구절 만 잘 이해하면 <노자>를 다 아는 겁니다.
老子之書, 其幾乎可一言而蔽之. 臆! 崇本以息末而已矣.(<노자미지예략>)
<노자> 책은 거의 한마디로 말할 수 있다. "숭본이식말' 일 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훌륭한 대한국인들은 우리가 중국 옆에 붙어 있고 한자를 어릴 때부터 쫌 배웠다 해서 우리는 한문을 자 알수 있지만, 서양인들이 어떻게 한문을 이해하겠냐는 생각들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의 좋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서양(미국, 유럽)의 중국학 수준은 본토보다 높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중국말이나 중국어, 고전 한문에도 우리보다 능숙합니다.
‘숭본이식말’, 숭崇은 높인다, 존중한다는 말입니다. 본말本末은 나무의 뿌리, 가지를 말하는데 원래 모두 한 나무의 부분들입니다. 그 중 어느 부분이 더 중요한가, 근본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말은 비유입니다. 뿌리도 중요하고 가지도 중요하지만 대체로 뿌리가 살아있어야 나무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서양철학에서는 대체로 진가(진짜냐? 가짜냐?)를 따집니다.
‘숨쉴 식息’ 자의 의미는 여러 가지입니다. 원래 한자는 한 글자가 여러 가지 뜻이 있고, 심지어 반대의 뜻인 경우도 많습니다. 이건 <노자> 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똑같은 한자가 문맥상 긍정적인 의미인가, 부정적인 의미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진; 임채우, 김학목 왕필주 번역
문제는 이 문장에서의 ‘숨쉴 식息’ 자의 해석입니다. 위에 소개한 두 권의 왕필주 번역서는 모두 식 자를 "그치게 하다, 멈추다"로 번역합니다. 그러면 ‘숭본이식말’은 이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본을 높여서 말을 종식시킨다.’
제가 노자는 아니지만 너무도 일면적인 학자들의 노자 이해입니다. 나는 내가 <노자>를 다 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노자>를 알면 세상을 다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노자> 읽는 것은 바둑, 당구와 같은 제 취미입니다. 그러나 취미도 오래 되다 보면 약간은 보이는 것이 생깁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노자> 책이 존재하는 이유는 ‘도道’ 때문이 아닙니다. 도라는 것은 노자(<노자> 책을 노자라 여기고)의 궁극적 관심, 즉 어떻게 하면 사회를 안정시켜 백성(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가 하는 데에 대한 이론적(철학적) 배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본은 道를, 말은 세계(天下/ 인간 사회)를 말합니다.
왕필 왈: <노자>라는 책은 한마디로 말해서 " 숭본이식말崇本以息末"이라 할 수 있다.
崇本以息末: 본(뿌리)을 높임으로써 말(가지)을 ( 息 )할 수 있다.
위의 괄호 속의 '숨쉴 식息'자의 번역을 위 두 왕필주 번역서 모두 '그치다, 멈추다' 라 했네. 그러면, 본을 높이는 것은 말을 종식시키기 위한 바가 되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숨쉴 식' 자는 終息시키다(stop)라는 뜻도 있고, 利息, <장자/ 추수>의 '消息盈虛(줄고 늘고, 차고 비고)'에서와 같이 늘리다, 키우다(grow)의 뜻도 있네. 나는 ‘숭본이식말’은 성인(이상적 치자)이 도를 체득함으로써(숭본), 사회적 문제 해결과 백성의 안정를 가져올 수 있다(식말)는 의미라고 봐... 말을 위해 본이 있다는 거지...
물론 왕필의 사회문제 의식은 우리와 다르겠지... 당시에는 유교가 후한 말과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쇠퇴하여 껍데기 만 남은 상태였지. 왕필은 노자 해설서를 썼지만, 근본적으로는 유교(말)를 살리려고 노자의 사상(본)을 그 기초로 삼은 유학자라고도 볼 수 있지...
한마디로 "학이시습지, 불역열호..."가지고는 먹히지 않는 세상이 된 것이지...
'숭본이식말'이라는 간단한 말이 완전히 거꾸로 해석 가능하다는 게 한문의 어려움인 것 같애.
왕필주의 息 자를 "키우다(grow)"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오히려 많고 일반적이네... 그렇다면 왕필주를 번역한 두 사람은 왜 자기가 息 자를 '줄이다, 종식시키다'라는 반대의 뜻으로 번역했는지를 설명했어야한다고 생각해...
나는 息 자를 '키우다, 늘리다'로 보는 해석이 <노자> 전체의 맥락에서도 옳다고 생각해...
‘본을 높힘으로써 말을 키운다.’
왕필의 말대로 "숭본이식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면 <노자> 전체를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안 된다고 봅니다. <노자>를 이해하려면 당연히 <노자>를 읽어야 합니다. 좋은 번역서와 해설서를 참고하면서...
왕필의 '숭본이식말'에 대한 보충...
물론 <노자 왕필주>에서 식말의 말을 어떤 부분적인 부정적 사태(예를 들어 전쟁. 학정, 重稅 등)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면 식 자를 '그치다(stop)라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노자> 전체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비관계는 기본적이기 때문에 末을 종식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왕필의 <노자>에 대한 총괄적 언명인 "숭본이식말" 역시 전체적 수준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만물, 백성을 살리고 키워야 하니까...
본本 ㅡㅡㅡㅡㅡ 말末
도道 ㅡㅡㅡㅡㅡ 만물萬物
성인聖人 ㅡㅡㅡ 백성百姓
(王) (民)
그리고 왕필주에는 '숭본이擧말(말을 높힘), 수모존자守母存子'(어미를 지킴으로써 자식을 보존한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모자' 역시 위 표와 같이 대비되는 것입니다.
모母 ㅡㅡㅡㅡㅡ 자子
여기서 말한 왕필의 해석은 <노자>에 대한 참고일 뿐입니다.
20151026전재
作者:林江仙
链接:http://www.zhihu.com/question/21747267/answer/28447730
来源:知乎
在《老子指略》中,王弼特别指出:
老子之书,其几乎可一言而蔽之。噫!崇本息末而已矣。
可见王弼以“崇本息末”归为老子五千言的主旨,特别强调“崇本息末”的重要性。而在前文中,王弼还提出:
因而不为,损而不施;崇本以息末,守母以存子;贱夫巧术,为在未有;无责于人,必求诸己;此大其要也。
这里的“崇本息末”看似是在说人的价值取向和行为选择,倡导无为之道,带有政治哲学色彩,但反观王弼在《老子注》关于“崇本以息末,守母以存子”的解释,“崇本息末”的含义应不仅限于人生观和政治观层面,而是和宇宙论有着不可忽略的联系。值得注意的是,王弼对《老子》“天下有始,以为天下母。既得其母,以知其子;既知其子,复守其母。”之句注解道:
母,本也。子,末也。得本以知末,不舍本以逐末也。
在这里,本与母相通,都具有“天下始”的含义。老子的论述中双向说明了得母可以知子和知子可以守母,但王弼并没有重复说明知子可以守母,而是强调不能舍本逐末。这相对老子的观点而言赋予了“母”更为绝对的地位,对“守母”也有着更为强烈的倾向。
王弼还在《老子注》第五十七章两次提到崇本息末,第一次说“以道治国,崇本以息末;以正治国,立辟以攻末。”第二次是对老子的“我无为而民自化,我好静而民自正,我无事而民自富,我无欲而民自朴。”的解释“此四者,崇本以息末也。”这两次所提到的本末是针对政术而言的,“本”指“以道治国”,“末”指“以正治国”,与本体论意义上的本末相比含义有所不同,但二者的含义又相互通融。 “本”在本体论语境中代指“无”,在政治哲学语境中则代表“无为之道”。“无为之道”实质上是主体对本体的借鉴和回归。本体“无”无形无名,不能被感知,也没有任何局限;同样地,“无为”虽然看似是对自然的妥协,但也避免了“有为”带来的混乱和恶果。此即“随其所鉴而正名焉,顺其所好而执意焉。故使有纷纭愦错之论,殊趣辨析之争,盖由斯矣。”
王弼在政治哲学意义上的“崇本”和“贵无”与其对宇宙终极本体的讨论有着紧密联系,他推崇“无为”的方法是“终以尽始,本始以尽终;开而弗达,导而弗牵。寻而后既其意,推而后尽其理。善发事始以首其论,明夫会归以终其文。”也就是说不被除绝对本体以外的任何事物迷惑,抛开既有的价值取向,发源宇宙本体,找到具体事物的归宿,但不以任何具体事物的规律来评判本体或其他具体事物。王弼的“崇本息末”在政术方面是价值判断和行为选择的崇本息末的统一,“无为之治”的真正实施必然是建立在承认宇宙本体,确立宇宙本体统筹万物之地位的基础之上的。
此外,王弼在解《老子·五十八章》“是以圣人方而不割,廉而不刿,直而不肆,光而不燿。”时再次提到了“崇本息末”,指出这些“皆崇本以息末,不攻而使复之也。”意为“不使万物有所作为,而使其复归根本。”这里“崇本息末”的含义与五十七章的含义相同,都针对政术强调回归本体,无需多解。可以说,“崇本息末”作为基于本体论的“无为”,在道家政治哲学体系中成功替代了老子“无为之治”的作用。
不可忽略的是,王弼还在《老子·三十八章》的注文中特别提到了“崇本举末”,看似与“崇本息末”矛盾,而且是先于“崇本息末”出现。在原文中,王弼写道:
载之以道,统之以母,故显之而无所尚,彰之而无所竞。用夫无名,故名以笃焉;用夫无形,故形以成焉。守母以存其子,崇本以举其末,则形名俱有而邪不生,大美配天而华不作。故母不可远,本不可失。仁义,母之所以生,非可以为母。姓器,匠之所以成,非可以为匠也。舍其母而用其子,弃其本而适其末,名则有所分,形则有所止。虽极其大,必有不周;虽盛其美,必有患忧。功在为之,岂足处也。
老子原本讨论的是“德”,并在最后特别提到:“前识者,道之华而愚之始。是以大丈夫处其厚,不居其薄;处其实,不居其华。故去彼取此。”其中“彼“指“前识”,“此”则指“道”。王弼则强调尽德须以无为用,他提出的“崇本举末”实质上就是“以无为用”的途径。“崇本举末”中的“本”依然指“道”,“末”则是指包括形、名在内的现象世界。在这里,王弼对老子的思想做了进一步的延伸,将“道”的比较对象从“前识”转移到形名。
值得注意的是,老子对“前识”是持否定态度的,主张选择遵循大道而摒弃既有的成见,但王弼并没有完全否定形名,而是主张“守母存子”,即既遵循大道,又保留形名的作用,不使形名违背大道。王弼在注文中还提到:“本在无为,母在无名。弃本舍母,而适其子,功虽大焉,必有不济;名虽美焉,伪亦必生。”以此可看出,王弼提出“崇本举末”的是为了以“无为”来抵消“有为”的局限性,规避“有为”带来的不良结果,这一点与“崇本息末”的目的相似。不同的是二者的语境,三十八章注中“崇本举末”针对的对象是包括形名在内的认知和观念,五十七章注中“崇本息末”针对的对象则是“以正治国”,前者强调观念,后者重行为。在王弼看来,形、名是不可或缺的,是人认识世界的必要工具;而“以正治国”则完全可以被“以无事取天下”代替,仁德、刑罚这些有为的政治策略完全可以被“无为而治”取代。错误的形、名认知所引发的虚伪和忧患可以通过“崇本举末”、纠正认知来剔除,但不当的治国方式则会造成“奇物滋起,盗贼多有”的混乱局面。
总的来说,王弼对认识层面和实践层面的价值选择的对待是有区别的。他在认识层面的价值选择更为谨慎,既重视宇宙本体,崇尚无为,又反对全面推翻既有知识体系,消灭形名,选择了一条“守母存子”,通过溯源本体来树立正确形名观,改造既有知识体系的中间路线。而在实践层面的价值选择上,王弼较为坚决,他直接提出“息末”,反对一切不符合“道”、有所偏倚的有为政治,主张直接选择不偏不倚、没有局限的无为政治。再反观《老子指略》,其中的“崇本息末”与“守母存子”也并不矛盾。无为政治所息之末是包括仁义、刑罚、俭啬、示勇在内的一切“矫情”政策,而息末的目的恰恰在于“存子”。摒弃有为不代表放弃国家和臣民,反而能使君王和臣民规避“有为”带来的祸患,共同享受无为之治下天人和谐的环境。
总之,“崇本息末”和“崇本举末”不存在矛盾,二者兼容于王弼的哲学体系中。综合来看,“崇本举末”主要针对“以无为用”而言;而“崇本息末”则囊括了明性、解物和治国的各个方面,是“以无为本”和“以无为用”的统一。尤其是就宇宙论而言,王弼推崇的是“崇本息末”,即“以无为本”,以“太始之原”推衍自然之性,不以某些具体事物的属性来反推宇宙本体或判断其它事物的属性,不以名定物。因此,在本体论体系中,王弼的主要观点是“崇本息末”。
王弼的本体论是一个主张“体用一原”的,与他的认识论和实践哲学紧密联系的哲学体系,王弼本体论的优势乃在于“以无为用”。“崇本以息末,守母以存子”的全新观念塑造了简洁、宏观、重思辨的思维方法,一改两汉经学和民间道家繁琐、教条、神秘的弊病,实现了天人合一和具体与抽象的统一,既对万物的本质作出了简明合理的解释,又将人们从名教的束缚中解放了出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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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동 : 노바당 선생 이걸 아시겠지요?
백거이의 시 중에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했는데 이 말은 내가 노자에게서 들었네. 만약 노자가 참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오천 자의 글은 왜 남겼는고' 라 했네 그려
노바당: 영동이... 내가 노자룰 처음 접한 건 40년 전, 어떤 사연 때문에 노자를 제대로 읽어보겠다고 작정한 한 때는 1989년이었네...
내 방법은 좀 무식한 것이었지. 나에게는 학문적 배경도, 개인적 스승(이런 걸 물어볼 수 있는)도 없었네... 그 방법은 내가 접할 수 있는 모든 책을 다 찾아 읽는 것이었고, 또 그렇게 실천하기를 10년 정도 했다네... 그러다보니 노자에 대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질문과 가능한 해답을 대체로 구성할 수 있게 되었지... 물론 내 생각이지만...
그러다보니 백거이의 말을 들어본 건 아주 예전이고, 나는 그가 노자를 잘 몰랐다고, 혹은 유가로서 당시의 도교의 행태에 비판적인 생각을 노자에 빗대었다고 생각하네... 좀 건방지게 들리겠지만... 나는 그런 데에 대한 권위를 쉽게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지...
노자가 말하는 도는 말할 수 없는 것도 있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있지... 내가 아까 한 얘기가 道라는 글자에도 해당되는 거지... 그리고...노자는 역설로 가득한 책이지... 언어는 세계를 그대로 표상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이 아닌가? 그래도 억지로라도 세상사를 표현해 보고자 하는 노력이 역설적 표현이라고 생각하네...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말도 말이다. 이것이 역설 아닌가? 말도 차원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이 독서 목록(노자 관계 보유 서적)은 2009년에 누가 <노자> 공부하는데 무슨 책들을 읽었냐고 묻길래 당시 작성한 것이네... 이걸 다 읽은 것도 아니고, 다 호오를 판단할 수도 없지만 하여튼 <노자>에 대해 가능한 해답을 얻어 보려 노력했다는 거지...
http://blog.naver.com/jaseng54/90044184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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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거이(772~846)는 당나라 때 대시인입니다. 그러나 <노자>에 대해서나, 도가에 대해서나 오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言者不智智者默,此语我聞諸老君。
若道老君是智者,如何自著五千言。
말하는 사람은 모르고 아는 사람은 침묵한다. 나는 이 말을 노자에게서 들었다.
그런데 노자가 정말 뭘 안다면, 어찌 스스로 <노자> 책을 지었겠는가?
이 시는 <노자> 56장에 나오는 ‘知者不言, 言者不知’(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모르는 것이다.)를 빗대어 <노자>를 풍자한 것입니다. 그러나 노자의 말은 역설적입니다.(78장; 正言若反, 바른 말은 반대되는 것 같다.) <노자>에서 ‘不言’과 ‘吾言’을 같이 말한다고 해서 모순이 아닙니다.
<노자> 70장
吾言甚易知, 甚易行; 天下莫能知, 莫能行. 言有宗, 事有君. 夫唯無知, 是以不我知.
내 말은 알기도 쉽고 행하기도 쉽지만, 누구도 알려 하지 않고 행하지도 않는다.
말에는 핵심이 있고, 일에는 우선이 있다.
이를 모르기 때문에 모두 나를 모르는 것이다.
백거이는 관직 은퇴 후 ‘양졸(養拙)’이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양졸’은 문자 그대로는 ‘어리석음을 기른다’는 뜻입니다. 실제로는 ‘벼슬에서 은퇴한다’는 말의 겸사로 주로 씁니다.
<養拙>
鐵柔不爲劍 木曲不爲轅 쇠가 무르면 칼을 못 만들고, 굽은 나무는 똑바른 끌채로 쓰지 못하지
今我亦如此 愚蒙不及門 지금 나 또한 이와 같이 어리석어 관문에 쓰이질 못 하네
甘心謝名利 滅跡歸邱園 즐겨 명리를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 조용히 살려네
坐臥茅姿中 但對琴與尊 띠집에 앉았다 누웠다 하며 거문고와 술잔만 가까이 하리
身去韁鏁累 耳辭朝市喧 몸을 쇠사슬에서 풀어내고 세상사 시끄러운 소리 물리치니
逍遙無所爲 時窺五千言 할 일없이 소요하며 때로 <노자>를 읽겠네
無憂樂性場 寡欲淸心源 걱정 없이 내 본래 성질을 즐기니 욕심 적어지고 마음속이 맑아지네
始知不才者 可以探道根 이제야 알았네, 어리석은 나도 도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젊어서 관직에서 잘 나갈 때는 유가로서 <노자>를 폄하하고, 관직을 은퇴하여 전원에 살 때는 <노자>를 찾는다? 유가의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노자>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졸’에서도 백거이는 관직에 대한 미련과 유가의 전형적인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쇠인가, 검인가?, 사람은 삐뚜른 나무인가, 똑바른 수레 끌채인가?
<노자>는 정치적 사상인가? 아니면 자유로운 전원생활과 修道에 대한 권장인가?
'양졸'에서 백거이는 <노자>와 <장자(내편)>를 뒤섞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장은 그 사상적 기초는 같아도 지향하는 바는 전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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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an's character is his fate. ㅡ Heraclitus
서양(그리스) 고대 철학자 중 노자의 사유방식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변화를 중시한 헤라클레이토스입니다. 다만 노자는 물(水; 음적 가치)을 강조하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불(fire; 투쟁)을 강조했습니다.
이점은 <노자>의 독서 대상이 더 이상의 자의적이고 강제적인 권력 사용이 제한되어야 할 강자(최고의 정치적 실력자)라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나는 강자强者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노자>, <장자>를 좋아하여 읽고, 강자에 해당되는 사상을 그렇지 못한 내가 흉내 내다 수많은 부작용을 일으켰습니다. 그나마 지금은 흉내를 포기하고 그냥 취미로 읽고 있습니다. 그래도 수십 년을 읽다보니 몸에 배서 지금도 이런 글로 시건방을 떨고 있습니다.
제가 나열한 책(독서 목록)을 다 읽어야 <노자>를 이해할 수 있다? 당연히 아닙니다. 저는 <노자>에 대해서는 독학이었기 때문에 내 나름의 독단에 빠지기 쉬운 상태였고(지금도 위험), 또, 한 번 뭘 붙잡으면 대체로 끝장을 보자는 성격이라 그런 무지한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저는 제가 <노자>에 대한 정답은 모르지만, 명백한 오답은 가려낼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5편; 노자기인기서
老子其人其書(노자기인기서)
노자라는 사람과 노자라는 책이라는 뜻입니다. 이 문제는 사실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노자는 춘추시대(bce 760-bce 470 or 403) 공자보다 약간 선배고 <노자> 또는 <도덕경>이라는 책을 쓴 사람이고, 도가의 창시자. 후에 도교의 신(太上老君)으로 추앙되었다. 도교의 삼청三淸 중의 하나로 종로 삼청공원도 유래가 거기에 있다.”
“장자는 노자의 무위자연 사상을 이어받아 발전시켰다.”
이런 정도가 저번 날 올린 <ebs 대입 윤리와 사상> 책에 나온 내용이고, 시험을 본다면 이 정도면 대략 통과.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사진; <ebs 대입 윤리와 사상>
1. <노자> 책을 지은 노자라는 사람이 있었는가?
모릅니다. 책이 있으면 책을 지은 사람이 있다. 이것은 저작권을 따지는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노자> 책은 길게는 공자와 동시대인 약 2500년 전에 노자라는 사람이 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보는 그보다 400년 정도 후인 한나라 초기(bce 100년 경)의 역사서 사마천의 <사기> ‘노자한비열전’에 기록된 노자의 전기에 의한 것입니다.
말이 400년이지, 지금 조선 중기 때 사람에 대한 기록도 확실히 알기 어려운데... 2000년 전의 기록은? 대체로 노자에 대한 전설 몇 가지를 채집한 것입니다.
그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노자가 주나라의 국립도서관장직을 은퇴하고 서쪽 관문을 지나다 관령 윤희의 부탁으로 <노자> 5000자를 단숨에 지었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런 증거는 없고, 그렇지 않다는 증거는 많기 때문입니다. 이점은 위에서 말한 <곽점초간노자>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공자와 동시대의 노자가 지은 현행본 <노자>와 비슷한 분량의 <노자>가 성립해 있었고, bce 300년 경 필사된 것으로 여겨지는 <곽점 노자>는 적초본(selection, 진고응 등)이라는 학자들도 있지만, 현행본 <노자>의 1/3 분량의 <곽점 노자>를 보면 그 구절 간에 시간적 차이와 한자사용상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노자는 일인, 일시의 저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진: <곽점초간노자연구> 섭중경
저는 전국시대 말(약 bce 300-bce 221)에 성립된 <마왕퇴백서노자>부터 <노자>라고 봅니다. 이 책과 현행본 <노자>는 내용상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책 전체를 저술한 노자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같은 사상을 가진 다른 시대의 여러 사람(이 사람들을 노자라 할 수 있습니다)이 남긴 책과 당대의 경구警句, 격언 등을 모아 지금과 같은 분량의 책을 보충, 일관성있게 편집한 사람을 노자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현재 실존하는 <노자> 책이 노자입니다.
2. 우리의 관심은 <노자> 책의 내용입니다.
<노자>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게 지금의 나에게나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이게 중요합니다.
<노자> 70장
吾言甚易知, 甚易行; 天下莫能知, 莫能行.
제 말은 정말 쉽고, 행하기도 쉽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알려 하지도 않고, 행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노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노자가 자기 말이 쉽다고 했다고 해서 책 몇 번 읽어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노자>는 최소 2,000년 이상 된 고대한자로 되어 있고, 당시의 상식과 일반적 세계관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낯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대비되는 쌍에 대한 사고방식입니다. 그런, 차이에 대한 당시의 기본적 이해방식을 음양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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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 學問之道는 無他라 求其放心而已矣니라 (학문지도 무타 구기방심이이의) :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놓아버린 마음을 찾을 뿐이다. (맹자)
홍효신 : 마음을 비우는 공부도 있는데 어찌 놓아버린 마음을 다시 찾는가?
노바당: 별 문제 안 됩니다. 유, 도, 불에서 말하는 심心의 의미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유가의 마음은 도덕심, 윤리심이자, 생각하는(心思之) 것입니다. 도, 불의 마음은 대체로 인간의 의지, 욕심을 말합니다.
같은 글자라도 의미는 천양지차일 수 있습니다. 이점이 한문의 어려움입니다. 서양언어는 단어의 정의를 위주로 이해하고, 한문은 맥락에 따라 이해합니다. 맥락을 무시하고 한문읽는 것을 斷章取義, 望文生義(글자만 들여다보고 지 맘대로 뜻을 만든다) 라 합니다.
고전한문의 하늘 천天 자의 경우...
1. 종교적 의미의 천(상, 주시대, 일반 민중신앙)
2. 윤리적 의미의 천(주나라, 대체로 유가)
3. 자연적 의미의 천(대체로 도가)
으로 대충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구분이 없이 한문을 읽으면? 좀 곤란해집니다.
<노자>에 나오는 많은 한자의 경우 이런 구별을 하지 않고 읽기 때문에 온갖 이설과 괴설이 난무합니다. 道, 有, 無, 强, 弱, 柔, 心, 天, 爲, 利, 등 모두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고 심지어 반대의 뜻으로 쓰인 경우가 있습니다.
<노자>에는 마음 心자가 9번 나옵니다.
1. 3장 使民心不亂;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마라.
2. 3장 虛其心; 그(백성) 마음을 비우고
3. 8장 心善淵; 마음은 깊게 잘 쓰고
4. 12장 令人心發狂; 사람들의 마음을 미치게 하고
5. 20장 我愚人之心也哉; 나는 어리석은 자의 마음이로다
6. 49장 聖人常無心, 以百姓心爲心.; 성인은 항상 고정된 마음이 없어서 백성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는다.
7. 49장 歙歙爲天下渾其心.; 천하를 위해 그 마음을 흐리게 한다.
8. 55장 心使氣曰强. 마음이 기를 누르는 것을 억지라고 한다.
노자의 심에는 불교에서와 같이 개인적이고, 종교적인 의미가 별로 없습니다. 그냥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마음이라는 중성적 의미입니다.
그런데... <노자> 55장의 심心 자는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여기서의 마음은 자의적이고 조작하는, 말하자면 머리를 잘 굴린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생각이 자연스런 기氣의 발휘를 억누르는 것을 억지(강제)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심과 기의 우선성은 도가와 유가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노자>에서 알 知, 이름 名, 말씀 言, 하고자할 欲, 뜻 志 등은 대체로 강자의 목적 지향적 마음상태에서 나오는 부정적 의미입니다. 노자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목적을 버려야한다고 말합니다.(爲無爲).
사마천의 <사기>에 유가, 도가와 관련하여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 <논어>에 나옵니다.
"道不同, 不相爲謨." 도가 다르면 같이 일을 도모할 수 없다.
儒道지간의 사상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으나, 그 핵심은 완전히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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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孟子曰 今有無名之指 屈而不信 非疾痛害事也 如有能信之者 則不遠秦楚之路 爲指之不若人也 指不若人 則知惡之 心不若人 則不知惡 此之謂不知類也 <告子章句上>
무명지가 구부러져 펴지지 않으면 아프거나 일에 크게 지장을 주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싫어해서 아무리 먼 곳이더라도 명의를 찾아가 고치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마음은 사람들과 다른데도 알지 못한다. 이는 비교하는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사소한 손가락은 심각하게 타인과 비교하면서 빨리 고치려 하는데, 한평생 나를 좌우하는 가장 막중한 마음은 남과 비교하여 고치려 하지 않음을 맹자는 비유를 통하여 지적하고 있다.
노바당: 손가락 이상은 객관적 표준이 있기 때문에 그에 따라 고치면 됩니다.
그런데 마음(心)이란 무엇인가? 잘못된 마음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 이것은 사람마다, 학파마다 다릅니다. 위 글에 ‘굴이불신屈而不信’은 구부러져서 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믿을 信’ 자를 ‘펼 伸’ 자 대신 쓴 것입니다.
한문도 역시 글자보다 말이 우선이기 때문에 한자도 발음이 우선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한자의 수가 적어서 같은 발음의 글자를 쓴 경우가 많습니다(가차자).
맹자의 心(마음)은 도덕심, 윤리심(인의예지)이고, 후에 天理(하늘의 이치)로 까지 발전되었습니다.(송명이학, 주자학, 성리학, 도학) 그런데 우리가 도덕적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적인 면과 기본적 욕구를 부정(存天理去人欲)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후의 도덕주의자들은 권력을 잡으면 以理殺人, 以禮殺人의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자기 마음 속에서 天理를 파악한 사람은 자연히 내가 옳다는 신념이 생기고, 나에게 좋은 것은 남에게도 좋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도 원한다고 여기게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자기 확신을 남에게도 전파, 강요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推己及人)
유가인 순자는 노자를 비판했습니다.
老子有見於詘(屈), 無見於信(伸). <순자/ 해폐>
노자는 굽히는데는 일가견이 있으나, 펴는데는 견해가 없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노자> 전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입니다. 노자에 펴는데 견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노자는 더 이상 펴는 것을 경계하고 자제해야할 최고의 권력자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점이 제가 노자를 강자의 사상이라는 관점에서 봐야한다고 강조하는 이유이기도합니다.
유가는 대체로 관료(공무원) 철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노자는 그 사회의 최고실력자에 대한 비판과 조언(君人南面之術, 帝王之學)입니다.
어떤 책이든 그 책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노자>는 천하의 태평과 백성생활의 안정을 목적으로 합니다.
유가는 책(6경, 13경)을 중시합니다. 그리고 그 책을 해석하는 스승을 모십니다. 그래서 항상 공맹과 그를 해석한 주자를 들이대는 것입니다. 맹자는 성선(사람의 본성은 착한 것이다)을 주장했고, 그 제자들은 그 말이 옳습니다 하고 따릅니다. 고자告子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본성에는 선,악이 없다."
본성이 무엇이냐?, 이건 정의하기도 어려운 문제고, 끝내 해결이 되지도 않을 형이상학적 문제입니다. 맹자의 사상은 본성이 선하다는 전제로 전개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이 한마디 질문으로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아빠! 사람이 본래 착하다는 증거는 어디 있어?"
6편; 도법자연 2
사진; 중국 청도 노산 태청궁 입구 건너편에 있는 벽의 '道法自然'
鲁迅先生说:“不读《老子》一书,就不知中国文化,不知人生真谛。”
노신 선생이 말하길, "<노자>를 읽지 않으면 중국문화도, 인생의 진면목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노자>를 읽지 않으면 한국문화의 얼마간, 그리고 인생의 진면목 역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노자> 읽는 것이 손해가는 일은 아닐 겁니다.
<노자>는 한자 5000여 자로 짧기도 하고, 700여 자의 대부분 쉬운 한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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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곽점초간노자> 죽간
<곽점초간노자>는 1993년 중국 호남성 형문시 곽점촌의 약 2300년 전에 매장된 전국시대 楚나라 묘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오른 쪽 가는 것이 하나의 죽간입니다. 왼쪽 세 개는 이것을 3등분하여 확대한 것. 그 옆의 작은 글자는 요즘 쓰는 한자로 고쳐 쓴 것입니다. 이 부분은 현행본 25장의 마지막 부분 다음에 5장의 중단 부분이 연결 된 곳입니다.
이 죽간들을 여러 개 차례로 합쳐 상하 2줄 또는 3줄로 엮어서 만든 게 바로 책冊입니다. 글자에는 한 줄만 표현... 이 책이 무덤 속에 2000년 이상 있다 보면 대나무는 남는데 엮은 실은 삭아 없어집니다. 그리고 발굴시 순서가 바뀌어서 원 순서가 헷갈리지만 내용과 형식을 살펴 복원합니다.
물론 없어진 부분도 생깁니다. 도굴범들은 금은보화 등에만 관심을 두어, 당연히 이런 책의 가치를 모르고 불쏘시개로 쓴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전에 누가 <노자>를 한마디로 말해 달라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묻지는 않았겠지만...
‘도법자연道法自然’, <노자>에 나오는 이 말이 그중 가능한 대답입니다.
사진; <곽점노자> ‘道法自然’ 부분
위 사진은 <곽점초간노자> 책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맨 위 글자가 '길 도道' 자 입니다. '머리 수首' 자에 책받침 변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책받침? 원래는 착받침(辵 or 辶) 입니다. 우리 어릴 때 쓰던 책받침 덕에 어감 상 이름이 바뀐 듯...
'도' 자의 오른 쪽 아래 두 줄의 작은 횡선(=)은 글자와는 상관없는 重文부호입니다. 요즘 같은 글자가 두 번 연속 나오면 쓰는 따옴표 같은 용도... 그러니까 여기서는 이 중문부호가 '도법자연'의 '도' 자.
당시에는 ‘갈 行’ 자 사이에 ‘사람 人’ 자가 있는 글자를 쓰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길에 걸어간다는 동일한 의미...
사진; <곽점노자> '도' 자의 이체자
2번째 글자는 '법 法' 자입니다. 아래 변이 '물 水' 자 입니다. 동사로는 '따른다, 본받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동사... 예전에는 법을 어긴 사람을 푸대에 넣어 강물에 던져버렸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아직 법法 자에 ‘물 水’ 자와 ‘갈 去’ 자가 남아있다고도 하는데 그냥 이야기일 수도... 하여튼 이 글자는 '法' 자입니다.
노자 사상의 기본이 되는 가장 중요한 말은 아래의 ‘자연自然’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의 자연은 ‘대자연’이라할 때의 자연이 아닙니다.
우리가 현재 쓰는 자연이라는 말은 영어 ‘natur’e를 19세기에 일본인이 번역한 것입니다. 물론 <노자>에서 빌려 온 것이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이점을 모르면 노자를 "자연으로 돌아가자(return to nature)"는 류의 사상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위의 사진에 나오는 '연' 자에는 아래 '불 화火' 변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글자는 '고기 육肉' 변에 '개 견犬' 자입니다. 개고기라는 뜻입니다. 아니? <노자>에 뭔 개고기?
그런 게 아니고 그 글자의 음을 빌어 쓴 것이고 의미는 '그러하다'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러할 연然'이라고 합니다. 글자 모양대로라면 개고기를 구워먹는다는 뜻이겠지만... 이런 걸 한자 사용상 가차자假借字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한자의 갯수가 많지 않아 다른 의미의 한자라도 음이 같거나 비슷하면 빌려다 표기한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 <노자>에서 가장 중요한 세 글자를 고르라면 '도道'와 '자自'와 ‘생生’... 두 글자를 고르라면 '자自'와 ‘생生’... 한 글자 만 고르라면 ‘스스로 자自’ 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저는 노자 사상의 모든 기초가 이 한 글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道法自然”,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자' 자는 '저절로' 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둘은 다른 뜻이 아니라 자발성을 강조하거나, 외부의 강제나 방해가 없을 때를 강조할 경우에 따라 씁니다.
'자自' 자는 원래는 코를 상형화한 글자입니다. 요즘 쓰는 ‘코 비鼻’ 자는 이 글자를 ‘스스로’라는 의미로 많이 쓰다 보니 나중에 새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없을 ‘무無’ 자도 원래는 춤춘다는 의미의 글자였습니다. (사람이 두팔에 주렁주렁 뭘 달고 춤추는 모양) 이 글자를 ‘없을 무’자로 쓰게 되자 ‘무舞’ 자 만을 ‘춤추다’라는 의미로 쓰는 겁니다.
‘없을 무無’ 자를 쓰기 전에는 ‘망할 망亡’ 자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사진; <곽점노자> 갑본 1조, 현행본 19장 부분
위의 세 줄로 된 죽간 사진의 가운데 줄에 보면 ‘망우亡又’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무유無有’라는 뜻입니다. ‘우又’ 자는 있을 ‘유有로’도 쓰였습니다. 모두 가차자입니다.
<노자> 25장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그러므로 도가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왕 역시 큰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큰 것이 넷 있는데 왕이 그 중 하나에 속하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습니다.
지금도 제왕적 대통령(imperial presidency)이 지배하는 사회지만, 고대에는 왕의 권력이 막강했습니다. 이런 권력을 어떻게 제한하여 사회 안정을 이끌 수 있는가가 당시 제자백가 공통의 과제였습니다. 노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경/ 소아/ 북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賓, 莫非王臣
세상 천지에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그 어디에 이르러도 왕의 신하 아닌 자가 없다.
<노자>는 이런 최고 권력자에 대한 경고이자 조언입니다. <노자>에서 왕보다 천지가, 천지보다 도가 큰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도가의 대원칙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벗어나면? 사망 아니면 멸망입니다.
<노자> 30장; 物壯則老, 是謂不道, 不道早已.
만물은 자기과시와 사치가 심해지면 망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에 어긋나는 것으로 도에 어긋나면 오래 갈 수 없습니다.
<노자> 36장; 柔弱勝剛强
부드럽고 약한 태도가 강하고 굳은 태도보다 좋은 방법입니다.
여기서 유약함은 힘(권력)의 강약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행위의 태도의 문제입니다. 이점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돕는(6장; 輔萬物之自然) 정치 행위가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이며, '유약'입니다.
<노자> 57장; 故聖人云,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
그러므로 성인은 “내가 무위하면 백성들이 저절로 변화한다...”고 말합니다.
<노자>에서 성인은 최고 권력을 가진 이상적 정치적 지도자입니다.
<노자>는 왕과 그 측근 실력자를 대상으로 한 책이지만, 백성(민중)을 위한 책입니다.
7편; 도가도비상도 2
<노자> 1장 ‘도가도, 비상도’ 부분 약간에 대한 나름의 해설이 뭔가 내 소박한 생각하고는 다른 듯... 그래서 내가 느낀 그대로 한 번 더 부가할 예정입니다.
노자가 이런 부분은 말로(논리적) 설명하기 어렵다 했는데(14장; 不可致詰)... 그래서 <노자>의 구절을 노자의 방식, 즉 비유, 역설, 그리고 부정적 서술(홍운탁월식)이라는 점에서 이해하고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無名, 萬物之始; 有名, 萬物之母.’의 부분을 보통 ‘무명은 만물의 시초고, 유명은 만물의 어머니다.’라고 번역합니다.
‘無名, 萬物之始; 有名, 萬物之母.’에서 ‘始’(시작, 원래), ‘母’(자식을 낳고, 기른다)의 뜻은 다 압니다. 문제는 ‘始’는 여기서의 뜻이 뭐냐?, ‘母’는 여기서의 뜻이 뭐냐? 하는 것입니다.
萬物之始와 萬物之母라고 분별을 했으니 뭔가 차이가 있을 텐데... ‘始, 母’는 당연히 만물과 관계가 있습니다. <노자>에서 道가 중요시되는 것은, 실제로는 만물의 중요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물의 시?, 만물의 모? 뭐가 다를까? 왜 하나는 이름이 없고, 하나는 이름이 있을까?
노자에서 도의 비유는 谷神(골짜기의 신령함), 玄牝(검은 암컷), 根(뿌리), 母(어머니), 樸(통나무), 一(하나, 전체) 등입니다. 앞에 것들은 모두 성적(암컷) 비유입니다.
‘始’ 자는 ‘처음, 원래(본디)’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둘은 약간 의미가 다릅니다. ‘처음’은 동일한 차원의 경우, ‘원래’라는 것은 그보다 앞선 차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수업 시작은 수업 중. 원래는 수업을 하지는 않지만 수업준비가 된 상태...
저는 ‘始’ 자를 암컷의 임신 상태로 생각하고, ‘母’는 출산 후의 상태로 연상합니다. 제가 상당한 <노자> 해설 책을 봤으나 이런 해석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이해하는데는 이 비유가 나름대로 괜찮은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아이들을 낳고 키우지만, 여기서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키우는 역할이 우선된 것입니다.
우선 문자적으로... ‘始’ 자는 회의자(뜻을 합침)로 ‘女’ 와 ‘台(대 or 이)’의 합자입니다. 후한 허신의 <설문해자>에는 "女之初(여자의 처음)"라 되어 있습니다. 여자의 처음이 뭐냐? 월경(초경)?, 임신(초임)?, 출산(초산)? 이런 과정을 거쳐야 아이가 여자로 인정되는 것 아닐까?
나는 ‘始’를 이 중에서 임신 중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출산 후 아이를 키우는 ‘母’가 되니까... 그렇게 생각할 만한 근거도 있습니다.
<說文>; ‘始, 女之初’; 朱曰: “... 形生之始爲胎.”, “생명(形生)의 ‘시’는 임신 중인 상태(아이밸 胎)다.” 여기서 ‘朱’는 <설문통운정성>이라는 <설문해자> 해설 책을 지은 청나라 주준성(朱駿聲)입니다.
<爾雅>; ‘胎, 始也.’, “임신 상태가 ‘始’다.” <이아>는 유교 13경에 들어가는 일종의 사전입니다.
사진; 나무
<노자>를 이해하는 데 말로 따지는 것 보다 이미지로 그려 보는 게 나을 때가 많습니다. 노자의 道의 비유인 根(뿌리)를 봅시다. 지하부인 뿌리는 평상조건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지와 잎은 겨울에 져도 뿌리는 남습니다. 왕필이 <노자>를 한마디로 ‘숭본이식말崇本以息末’이라 한 이유입니다. 本은 뿌리, 말은 가지, 잎...
이렇게 말하면 뿌리도 유형, 유명이 아니냐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건 비유입니다. 비유는 같은 차원의 것이 아니고 아는 것으로 모르는 것을, 저차원적인 것으로 좀 더 높은 차원을 말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라 읊고 있는데, 문맥을 무시하고 '애는 엄마가 낳지, 아버지가 어떻게 낳느냐'고 따지면 할 말 없습니다. 비유란 의미 전달의 부득이한 수단 중 하나입니다.
無名, 萬物之始; 有名, 萬物之母.
만물이 임신 중(태아일 때)에는 보이지 않으니 무형, 무명...
만물의 출산 후에는 당연히 유형, 그리고 이름을 지어주니 유명...
뭐 이런 겁니다.
글을 쓸 때 원래는 빈 종이... 펜으로 종이에 까만 것 묻히는 것은 시작. 둘 다 한자로는 始.
황하의 수원은 그 밑 보이지 않는 지하수, 시작은 저 멀리 청해성 곤륜산맥 아래 성숙해(星宿海, 별이 잠자는 바다)...
따져 볼 문제는 있습니다.
‘모’나 ‘일’이나 모두 ‘도’의 비유로 쓰이는데... 왜 ‘만물지모’(유형)는 ‘만물지시’(무형)보다 하급이냐? ‘一’은 ‘도’의 비유인데 어떻게 ‘도가 일을 낳느냐?’(道生一)
이건 비유고, 언어는 논리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어를 맥락적으로 보면 모순적인 말이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도’는 ‘一’이기도, ‘一’이 아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비유는 제 평소 노자 이해와 관계가 있습니다. 저는 <노자>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 보다, 노자의 방식대로 요즘 시대에 적절한 비유, 역설, 홍탁烘托식 서술로 그려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도가도, 비상도’는 이제는 넘어가고 다음 ‘名可名, 非常名’으로... ‘도가도, 비상도’의 3개의 도 자의 의미가 다 다르다는 건 아셨을 겁니다. 여기서의 ‘명’ 자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짐작...
대체로 ‘명가명, 비상명’은 ‘도가도, 비상도’의 부연 설명으로 이해합니다.
(도라는) 이름을 지을 수 있다면(여기서 2번 째 이름 名 자도 동사입니다), 그 지어진 이름은 항상된 이름(노자의 도)가 아니다.
이 정도 이해하면 무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 방법도 있으니 차후에...
한마디로 “노자의 도는 말로 표현하거나, 이름지을 수 없다”는 겁니다. 여기에 <노자>의 역설이 있는 겁니다.
여기서 이 구절을 여러 판본에서 비교해 봅시다.
<통행본 노자>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곽점초간노자> bce 300년 경: 이 구절 없음
<마왕퇴한묘노자>
甲본 道可道也, 非恒道也; 名可名也, 非恒名也.(약 bce 200년 이전)
乙본 道可道也, [非恒道也; 名可名也, 非]恒名也. [ ]는 손상 부분(약 bce 200년 이후)
<북대한간노자>
道可道, 非恒道殹(예); 名可命, 非恒名也. (약 bce 100년 경)
1. <곽점노자>에는 후대에 극히 중시된 이 구절이 없다. 그 의미는? 당시에 이 구절이 없었다. 또는 있었지만 발췌하지 않았다.
2. <마왕퇴노자>에는 ‘도가도야’(도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라고 서술형으로 돼 있다. 통행본은 ‘어조사 也’ 자가 없어서 조건문(도를 말로 표현한다면)으로 이해하고 있다. 의미가 동일?
3. <북대노자>는 ‘도가도야’의 ‘어조사 也’ 자가 없고, ‘비상도殹(예)’라고 어조사가 다르다. ‘殹’ 자를 사용한 경우는 <북대노자>에서 이곳이 유일. 의미는 동.
문제는 통행본 등의 ‘名可名’이 ‘名可命’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名’ 자를 동사로 쓸 때는 <북대노자 전체>에 ‘命’ 자로 쓴 것. 또는 다른 의미가 있는가? <마왕퇴노자>에서는 현행본 14장의 ‘名曰夷’가 ‘命曰夷’로 돼 있다. 여기도 동사인 경우.
사진; <북대노자> 노자하경 '道可道, 非恒道殹'
4. 통행본의 ‘常’ 자가 漢文帝(한나라 실질적 3대, 劉恒) 이후의 판본인 <복대노자>에서 이름인 ‘恒’ 자를 피휘하지 않았다. 언제 피휘? 피휘의 적극성 문제.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중간의 세미콜론은 두개(또는 여러 개)의 대비되는 문장이 나올 때 씁니다. 문제는 ‘名可名, 非常名’이라는 문장이 ‘道可道, 非常道’를 단순히 보충하는 문장이냐? 또는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갖느냐 하는 점입니다. 보통은 위에서 말한대로 보충의 의미로 이해. 이런 식...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말로 표현된 도는 항상된 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름(말과 이름을 동일시)을 짓는다고 해서 항상된 이름(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常名’이 긍정적인 의미냐? 부정적인 의미냐? 대체로 ‘상명’을 ‘도’의 이름(억지로 지은 부호지만)으로 보고 긍정적인 거로 생각합니다. 저는 다릅니다. 저는 ‘名可名, 非常名’이 단독으로도 의미있는 것으로 봅니다. 이렇게...
‘이름을 짓는다고 해서 그 이름이 항상된 이름은 아니다.’
저는 ‘常名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 이것이 도가의 명에 대한 태도이기 때문이기도 하고(장자/ 소요유: 名者, 實之賓也, 이름은 실제의 손님이다), <노자> 역시 항상 ‘道常無名(32장), 道隱無名(41장)’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는 ‘상명’? 아닙니다.
‘道라는 이름’(道之名)? 아닙니다. 수학에서 미지수를 x 라는 부호로 쓰는 것처럼, 단지 부호일 뿐입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그 거, 가설적인 그 무엇을 부호로 나타낸 겁니다.
그래도 한자가 표의어라서 단순한 부호로만 쓸 수는 없고, 고른 글자가 뭔가 비스름한 의미가 있는 글자를 부호로 쓰는 게 이해에 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아는, 그래서 오해의 소지도 있지만 길 道 자가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Coca Cola를 우리는 코카콜라로 음역합니다. 표음문자인 한글로는 비교적 원음과 비슷합니다. 한자로는 ‘可口可樂’(병음 ke kou ke le, 한글표기 커커우커러)... 문제는 한정된 한자 발음 때문에 소리도 달라지지만 보는 사람이 그 글자에서 자동적으로 의미를 찾게 되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왕 음사하는 데 좋은 의미의 글자를 쓰는 것입니다. “먹을 만하고 즐길 만하다” 라고...
사진; '道'는 원래 '인도할 導'의 본자<한자원류자전>
<노자>에서 ‘道’ 자가 나오더라도, 그냥 미지의 무엇 또는 x 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도덕경>이라는 제목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도덕(morality)나 윤리를 연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오히려 기존의 도덕에 대한 비판입니다. 그 또한 새로운 도덕을 말하는 것, 즉 반도덕이 아니라 초도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라는 이름은 생각하지 않고 <노자>를 읽으면 됩니다. 그러다보면 그 후 자연적으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자>에 나오는 ‘母’ 자
1장; 無名, 萬物之始; 有名, 萬物之母.
20장; 我獨異於人而貴食母.
25장;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료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52장;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旣得其母, 以知其子, 旣知其子, 復守其母, 沒身不殆,
59장; 莫知其極, 可以有國, 有國之母, 可以長久, 是謂深根固柢, 長生久視之道
1장의 ‘母’ 자는 도의 비유인 나머지 장의 ‘母’ 자와 의미의 폭의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노자는 어차피 가설적인 道를 "이름이 없다"(무명) 라고 누누히 강조하는가?
1. 도------만물
성인-----백성
<노자>에서는 위와 같이 대비됩니다. ‘도는 이름이 없다’는 말은 성인(왕)의 말, 즉 정치적 명령(政令)과 자기 과시(말 = 권력)를 견제, 제한하기 위한 이론적 기초입니다.(23장; 希言自然, 말없음이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여기서의 言은 왕의 정치적 명령)
2. 도를 하나의 物(物有形, 故有名)로 오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입니다. 도는 天地 萬物보다 상위 차원인 그 무엇입니다.
3. 이름이 없는 도는 <노자>에 나오는 도라는 말의 일부에 해당됩니다. 주로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도, 또는 노자의 통찰(깨달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노자>에는 말할 수 있는 도가 오히려 많습니다. 당연합니다. 노자는 인간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실제적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주로 자연의 길이라 할 수 있는 도(天道), 또 인간 사회의 지혜라는 의미의 도는 모두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진; <노자 왕필주> 루우열
여기서 이제까지 이야기한 <노자> 1장 상단에 대한 천재 왕필의 주석을 한번 봅시다.
<노자> 1장
1.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2. 無名, 萬物之始;. 有名, 萬物之母.
1. 可道之道.可名之名.指事造形.非其常也.故不可道.不可名也.
말할 수 있는 도와 지어진 이름은 사건과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이름 지을 수 없다.
2. 凡有皆始于无.故未形无名时.则为万物之始.及其有形有名时.则长之育之亭之毒之.为其母也.
무릇 유는 무에서 나온다.(40장) 그러므로 아직 형체가 없고 이름도 없을 때가 만물의 ‘시’가 되고, 형체가 생기고 이름이 지어질 때가 바로 (도가) 키우고 길러주고, 이뤄주고 성숙시키므로(51장) ‘모’가 되는 것이다.
왕필 역시 여기서의 '母'는 아이를 기르는 역할로 이해합니다.
왕필은 주를 달 때 다른 장의 구절을 서로 엮어 인용하여 이해를 돕습니다. 이런 방식을 ‘以老解老’(노자로 노자를 풀이한다)라 합니다.
왕필본의 원문에는 ‘無名, 萬物之始’가 ‘無名, 天地之始’로 돼 있습니다. <마왕퇴노자>가 발굴되기 전에도 이 문장의 원문은 왕필주에 인용된 萬物이 옳다고 주장한 학자들이 있었으나, 증거가 없었습니다. <마왕퇴노자>와 <북대노자> 모두 ‘萬物’이라고 돼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노자 왕필주>에 많습니다. 주로 주에 인용된 글자가 맞습니다.
8편; 노자의 도와 유무 1
요즘 전에 <노자>에 관해 이곳 저곳에 끄적거려 논 거를 한번 모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
거기에 별 거 아니지만 <노자>에 대한 해답이라기보다, <노자>에 대한 가능한 질문이 대체로 있지 않을까?
"Perfection is the enemy of good." 이라는 영어 격언인지, 속담인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완벽하게 하려다, 너무 완전함을 추구하다 되려 망친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노자>에도 유사한 말이 있습니다.
大成若缺, 大巧若拙. 대성약결, 대교약졸
크게 이루어 진 것은 모자른 것 같고, 큰 교묘함은 졸렬한 것 같다.
"Conviction is the enemy of good."
제 카카오 프로필에 있는 이 말은 "자기의 앎(깨달음)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문제다. 라는 의미로 제가 변조한 것입니다.
칼 포퍼의 책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에 '진화론적 지식에 대하여'라는 장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군요. 동감합니다.
<노자> 45장; 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크게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듯 보이지만, 그 쓰임이 낡지 않는다.
크게 찬 것은 빈 듯이 보이지만, 그 쓰임이 다하지 않는다.
크게 곧은 것은 굽은 것 같고,
크게 교묘한 것은 치졸한 것 같고,
큰 논변은 더듬는 것 같다.
은세윤 : 나는 conviction is the enermy of good. 이라는 말에 정말 공감해.
그리고 ‘대방무우’라는말도 있지? 거기서 따서 우리 아들 호를 ‘무우’라고 지어줬어.
노바당: 좋아! 無隅, 간체자 无隅 , wu2 yu4, 우위
‘없을 無’ 자는 본래는 ‘춤추다’라는 의미였어. 전국 시대 쯤 ‘無’ 자를 없다, 또는 아니다 라는 부정사로 많이 쓰게 되자, 전에는 ‘無’자와 통용되던 ‘舞’ 자를 춤춘다는 뜻으로 쓰는 거지... 저번에 말한 꽃 화 (華-->花) 자와 비슷한 경우지... 그럼 그 전에는 ‘없다’는 의미로 무슨 자를 썼을까?
‘망할 亡’ 자를 주로 썼지. 이 글자 역시 ‘없다’는 의미를 ‘無’ 자에게 뺏겨 요즘은 ‘망하다, 도망가다’의 의미로만 쓰이지. 이것은 말이 글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생각돼...
현재 발견된 <노자> 중 가장 이른 판본인 <곽점초간노자>(bce 2,300년 경, 예수나기 300년 전) 에 ‘없을 無’ 자가 대부분 ‘亡’ 자로 되어 있지. 대부분이라고 말한 것은 ‘없을 無’ 자를 쓴 경우도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노자>는 그 부분들 간에 시대적, 저자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는 거야. <노자>는 一人, 一時의 저작이 아니라는 근거가 되는 거지.
<곽점초간노자>에는 亡 자가 亡名(無名), 亡爲(無爲) 를 포함하면 27번 쓰였고, 無 자는 無爲(亡爲와 완전히 같은 의미) 1회를 포함해서 단 6회 쓰였지. <곽점초간노자>는 현행본 <노자>의 1/3 정도 분량(1,700 자 정도)이고, 현행본과 비교하여 나머지 부분이 분실된 것이 아니라 당시에 초사된 전체 분량이야. 물론 당시에도 나머지 부분의 노자 문장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단편적으로 성립하여 유행했을 가능성이 있기는 해...
<곽점초간노자> 을본에도 "大方亡隅" 라는 구절이 있어. 아래 사진의 글씨는 전국시대 초나라 한자체지.
사진; <곽점 노자> 대방망우
아래 사진은 현대 활자체로 쓴 거야...살펴 보면 ‘대방무우, 대기만성, 대성약결, 대교약졸’과 같은 역설적 문장은 <노자>에서 일찍 성립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겠지...
사진; 현행본 <노자> 41장;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모퉁이 隅’ 자가 ‘禺’ 라고 쓰여 있잖아? 당시에는 한자의 숫자가 많지 않았고, 한자 역시 상형자로 출발했지만 그 발음의 요소가 대단히 중요하지. 언어란 게 원래 구어가 중요한 거잖아. 한자를 발음 기호로 사용하는 경우가 예전(선진 시대)에는 더욱 많았던 거지.
한자의 사용법에 假借字라는게 있지. 상형자니, 형성자니 하는 건 조자법(한자 만들기)에 해당하는 거고... 모퉁이 隅 자를 禺 로 대신한 게 바로 발음이 같거나, 비슷하여 빌려 쓴(가차)거지...
한자가 대체로 상형자라 하지만 그렇지 않지. 形聲자(모양 + 발음)가 대부분이지(현재는 거의 90% 이상). 2000년 전에도 70~80%가 넘었다고 해.
<노자> 41장;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큰 사각은 각이 없으며,
큰 그릇은 이루어 진 것 같지 않고,
큰 소리는 소리가 없고,
-최진석 번역(<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서강대 교수
정말 큰 사각형에는 모서리가 없고
정말 큰 그릇은 완성되지 않으며
정말 큰 음은 소리가 없고
-도올 번역(<노자, 길과 얻음>)
‘대기만성’의 ‘늦을 晩’ 자도 부정사! 그래서 도올 선생의 책 <절차탁마 대기만성>
이라는 책이 있지...
최진석 교수 책 번역을 인용하다 보니 생각나는 게 있어... 한번 들어 봐...
노자의 ‘道’라는 말에 대한 거야.
사진; <노자금주금역>, <노장신론>
나는 주로 도올 선생의 강의와 책, 대만대 교수인 진고응 선생의 책인 <노자금주금역>을 기초로 <노자> 공부를 했지.
<장자>에 대해서는 홍콩 중문대학 교수 유소감의 <장자 철학>(최진석 번역)을 여러 번 봤어. 유소감은 그 후 <노자고금>(2006)이라는 방대한 책을 냈는데 좋은 책이라고 봐. 아직 번역은 안 돼 있고.
사진; <노자고금> 상,하권 1500페이지
유소감은 ‘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지.
"노자의 도는 만물의 총근원이자, 총근거이다."
나는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해.
그런데 최진석은 "도는 만물의 근원일 수 없고, 만물의 근거(존재 형식이나 운행원리)일 뿐 이다."라는 거지...
아래 글은 최진석의 책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에서 인용한거야.
사진; 최진석의 유소감 비판
나는 이런 설명이 현대 서양의 포스트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은 크게 잘못 된 생각이라고 봐. 이건 <노자>에 나오는 有無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지...
도올 선생이나 진고응 선생 모두, 그리고 최진석 교수도 <노자>에 나오는 유와 무를 모두 철학적 개념으로 보는 데 나는 차이가 있어. 나는 <노자>를 철학 저서로 보지 않고 정치적 실용서로 보기 때문(실용서도 철학적, 사상적 배경이 있를 수 있고 그 부분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유, 무’ 자는 서술어로 보고, 일부 만 명사로 보지. 한마디로 명사로서의 유는 有形의 준말, 무는 無形의 준말로 보거나, 虛(빔)와 實(참)의 다른 표현으로 본다는 말이야. 그래야 <노자> 전체 이해도 쉬워 진다고 생각해.
‘유, 무’의 문제는 내가 항상 얘기하지만 "<노자>의 대상이 누구인가? <노자>는 최강의 정치적 실력자를 대상으로 한 책이다" 라는 주장과도 관계되지. 한마디로 <노자>는 천하에서 대국의 왕, 예를 들어 통일 이전의 진시황제 정도의 실력자가 보는 책이고, 그런 관점에서 봐야 오해도 적어진다고 봐. 그리고 진시황제 같은 세습 군주가 일반적 지식인일 수는 있겠지만(태자 교육) 철학자이기도, 책을 철학적으로 읽기도 어렵겠지.
나는 최진석 교수가 <노자>를 노자로 읽는 것이 아니라, 데리다니 들뢰즈니 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의 시각으로 읽는다고 봐. 이점은 최진석의 <노자> 번역서인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2001/ 얼마나 건방진 책 제목인가?)이래 변치 않았어. 올해 나온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부제; 최진석의 노장 철학 독법>에서도 확인돼.
그러나 그런 시각으로 <노자>를 읽으면 <노자>의 단순한 구절의 해석에도 구차하게, 현란한 철학적 설명을 하게 되지. 예를 들어 볼께...
<노자> 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여기서 하나가 뭐냐, 둘은 뭐냐는 걸 일단 제쳐 놓으면 도가 만물을 낳는다(道生萬物)는 거 아냐? 나는 여기서 하나, 둘, 셋이라는 단계보다 이게 중요한 거라고 봐. 그런데 최진석은 ‘도가 만물을 낳는다’. 다시 말해 도에서 만물이 나온다는 명백한 말, 다시 말해 "도는 만물의 근원이다" 라는 이해를 왜 부정할까? 이게 바로 <노자>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해독解讀의 해독害毒이라고 봐.
"도는 만물의 근원이다"라는 말은 <노자>에서 ‘어미 母’ 자가 자주 쓰이는 것으로도, ‘玄牝’(가물한 암컷)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지... 그러면 노자는 왜 도를 만물의 근원이라 했을까?
나는 노자가 도와 만물, 성인과 백성의 공통성, 단일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고 봐. 기원의 공통성은 ‘모든 인간과 미물까지도 한 군데서 나온 것이다’라는 주장이지. 물론 이건 확신이 아니라 노자의 가설, 즉 ‘도라는 개념은 가설이다’라고 보면 별 문제가 없어. 우리가 단일 민족(?)이라는 단군 자손설보다 통이 크고, 사실에 가까운 가설이지.(진화론으로 봐도)
그뿐 아니라 최진석은 아래 문장도 고상하지만, 이상하게, 어렵게, 철학적으로 해독해...
<노자> 40장;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천하(온 세상)의 만물은 유에서 나왔고, 유는 무에서 나왔다.
나는 여기의 무는 도의 별칭(전통적 해석)이고 무형의 준말이라고 생각해. 이건 <노자>에서 너무도 명백하고, 그렇게 단순히 봐도 <노자>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야. 그런데 대부분 철학적으로 읽는 분들은 ‘有’ 자, ‘無’ 자를 가지고 책을 써.
그러나 <노자>를 보는 내 관점은 기본적으로 ‘진시황제는 철학자가 아니다.’라는 거지.
도는 무형이고, 만물은 유형이야. 도는 무형이라 이름 지을 수 없고, 만물은 형체가 있어서 이름 지을 수 있는 거지.
우리는 추상명사니 뭔 명사니 해서 형체가 없는 이름도 있다는 걸 상식으로 알지만, 중국 고대에서는 그렇지 않아. 한 마디로 만물은 형체가 있어서 이름이 있다(萬物有形, 故有名)는 거지... 이건 당시 추상명사에 대한 개념 정립이 안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管子/ 心術>; 物固有形, 形固有名.
만물은 반드시 형체가 있고, 형체가 있는 것은 이름이 있다.
사진; <관자> 소나무, 1035페이지
그래서 만물과 차원이 다른 도는 당연히 無形이라 無名인거지... 이건 그냥 노자의 엄청난 통찰이라기보다 단순한 논리라고 볼 수도 있지.
<노자>32장; 道常無名,
<노자>1장;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노자>14장;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위의 14장은 도가 볼 수도, 들을 수도, 잡을 수도 없다는 거잖아. 당연하지 도는 무형이니까... 그래서 말로는 따질 수 없고 통째로 봐야 한다는 거지.
이렇게 따질 사람이 있을 것 같기도 해... ‘소리는 들리기는 하지만 형체는 없잖아?’라고. 노자는 도가 그냥 그렇다는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노자는 도를 철학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관찰(?)한, 또는 깨달은 만물의 공통성을 그 기원의 단일성(도=일)에서 보증할 수 있다는 거지(가설이지만).
노자는 ‘만물(왕이고 거지고 간에)은 하나다.’ 라고 말하는 거지. 왜? 같은 어머니에게서 나왔으니까... 단순한 거야... 왕이나 백성이나 같은 데서 나온 거니까 왕보고 욕심(전제 왕조 시대에는 이게 가장 큰 문제) 좀 자제해서 백성도 좀 같이 먹고 살자는 거지.
그걸 무슨, 같은 근원을 인정하면 결국 파시즘적 동일성을 강조하는 것 같은 파격적 해석을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 서양에서는 자신들의 근대 체계(주로 이성중심주의)의 반성이라는 면에서는 가치가 있지만, 중국 고대 사상의 해석에서는? 별로 해당되지 않는 다고 봐. 게다가 이런 관점으로만 <노자>를 읽는다면? 심하게 얘기해서 그건 <노자>가 아니라고 생각해.
여기서 <노자>에 나오는 ‘有, 無’에 대해 다시 한 번 말해 볼께. <노자>를 처음 읽는 분들이 모두 겁내는 ‘유무’.
<노자> 1장
1.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2. 無名, 萬物之始; 有名, 萬物之母.
3. 故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
여기서의 ‘유무’를 ‘유’와 ‘무’로 분리해서 해독하는 사람들이 많아. 진고응 선생도, 최진석 교수도. <노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이런 분들은 대체로 <노자>를 철학적으로 해석하지. 나는 그렇게 해석할 필요가 없고,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 게 노자사상을 이해하는 데 더 좋지 않을 까 생각해. 그럴 근거도 있고.
위 1장 본문에 ‘無名, 萬物之始’(만물의 시초에는 이름이 없다)라 구두점(쉼표)이 돼 있지만, 철학자들은 ‘無, 名萬物之始’(무는 만물의 시초의 이름이다)라고 읽는다는 거야. 나는 위의 구독점이 옳다고 봐. 아래 구절인 ‘故常無欲, 以觀其妙’도 마찬가지지. 위에서 무와 명을 분리해서 읽는 사람들은 여기서도 ‘무’와 ‘욕’을 분리해서 읽지. ‘故常無, 欲以觀其妙’로.그러나 나는 여기서의 ‘유, 무’ 는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단순한 긍정, 부정이라는 거지... 이건 마왕퇴 <노자>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 100%는 아니지만...
마왕퇴 <노자>甲, 乙본 모두 ‘故常無欲也以觀其妙’로 돼 있어. 원래 한문에서는 구두점이 없잖아(있는 경우도 많음). 그래서 어조사 也 자가 쉼표, 마침표 역할을 하는 거야. 그래서 <마왕퇴 노자>는 현행본 <노자>보다 글자 수가 200자 이상 많아. 당연히 여기서의 ‘어조사 야’ 자를 본다면 ‘무욕’을 ‘무’와 ‘욕’으로 분리해서 읽을 수는 없는 거지. 유추하자면 위 구절의 ‘유명’, ‘무명’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지.
그렇다면 <노자> 1장의 ‘유, 무’는 거창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지지. 그리고 또 사마천의 <사기/ 日者列傳>을 보면 <노자>를 인용하는 데가 있어. 이렇게...
此老子之所謂“無名者萬物之始”也.
‘놈 者’ 자가 쉼표 역할을 하는 거지. 이건 최소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 사마천이 이 구절을 '무명'으로 斷句해서 이해했다는 증거야.
최진석 교수는 ‘도는 만물의 근원일 수 없다’고 엄청 설명을 해 대지만. 그래봐야 별 건 없고. 포스트모더니즘적 단어들을 이리 저리 엮은 수준이지만.
교직(꼬임), 대대 범주, 이중성, 잡종, 개별성, 구체성... 등 이런 류. 이런 말들은 모두 만물의 근원인 ‘도’라는 건 제쳐놓고 만물의 단계에 대해서만 말하는 거야.
그러니까 <노자> 1장의 ‘유, 무’는 별 문제가 아니야. <노자> 1장을 <노자> 전체의 사상을 대변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아. 사람들이 1장을 노자사상의 총괄이라고 보는 제일 큰 이유는 단순히 1장이라서 그런 거고, 좀 어려운 듯해서 이기도 하지. 그러나 예전에는 1장이 <노자>의 처음이 아니었지.(<마왕퇴 노자>, <북대 노자>)
<노자> 2장;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盈, 音聲相和, 前後相隨.
여기에 유무상생이라는 말이 있어. "유와 무는 서로를 낳는다"라는 말이지... 나머지 ‘난이, 전후, 장단, 고하, 음성, 전후’ 등도 표현은 좀 다르지만 다 같은 내용이야. 여기서는 상대적인(중국에서는 對待라고 함) 유와 무가 가치적 층차 없이 상대에 의존하여 존재가 성립한다는 거지. 한마디로 유가 없으면 무도 없고, 무가 없으면 유도 없다는 거야.(상호 의존)
이 부분은 내가 쓴 ‘음양론’ 참고.
<노자> 40장;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그런데 <노자> 40장에서는 ‘무가 유를 낳고, 유가 만물을 낳는다’라니? 여기서의 유와 무는 서로 엄연히 차원이 다르잖아? 부모와 자식이 인간이라는 면(큰 측면)에서 같지만, 층차가 있는 것(작은 측면) 처럼. 부모와 자식은 촌수가 다르잖아.
최진석의 <노자> 해석은, 2장의 ‘有無相生’에서의 유무와 40장 ‘有生於無’에서의 유무를 동일 차원으로 만드느라 포스트모더니즘 운운 하며 뭔가 있는 척 하는 거야. 과도한 비판인지 나도 비판 받아야겠지만, 있는 걸 있는 그대로 해석해야하지 않을까?
2장의 ‘유무상생’은 이렇게 도표화 할 수 있지
유<--->무
相生
40장의 ‘유생어무’는 이렇게 도표화 할 수 있고...
무---->유
生
최진석의 오해는 위 양방향 화살표를 아래에까지 억지로 적용하는 데서, 아니면 아래 화살표 방향에 대해서는 억지 해석을 하거나 무시하는 데서 생겨.
다음 그림을 봐...
무------>유 (무<-->유)
도 천지(=만물)
무형 유형
무명 유명
최진석 교수는 만물의 세계의, 즉 유형의 세계의 존재 원칙, 운행 원칙(天道)만을 도라고 보는 것이지. 그렇지 않아. <노자>에서의 도의 의미는 여러 가지야... 무형의 도도 있고(서양 철학의 실체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음, 그냥 가설적 존재라 이해해도 무방), 유형인 천지만물의 운행 원리도 도라고 하는 거지. 특히 이걸 天道(자연의 길)라 따로 부르기도 하잖아. 나는 이걸 음양론이라 부르지.
도 ⊃ 천도
이런 걸 도올 선생이나 진고응 선생은 오해하지 않아. 그러나 최진석은?
나는 최진석이 일반인의 <노자> 이해를 해친다고 봐...
위 그림 설명 보충.
2장 ‘유무상생’의 유무는 천지 만물 단계의 추상적인 유, 무(존재, 비존재)를 가리키거나, 有(有形, 有名, 즉 만물의)에서의 虛(무)와 實(유)를 가리키는 거야... 물론 <노자>에 있어서 천지 만물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 안에서의 논리만으로는 천하 안정을 가져오지 못해. 그래서 노자는 되돌릴 反(=返), 돌아 올 復 자를 강조하는 거라고 봐.
리더(강자, 한 사회조직에서의 최고의 권력자)는 유형의 세계(유무상생의 사고방식이나 행동도 어렵긴 하지만)에 살더라도, 항상 보다 큰 틀(무형, 무명인 도의 세계, 만물의 무형, 무명인, 근원적 공통성 정도?)을 고려해야 한다는 거지.
사진; <노자주역급평개> 등 진고응 교수 저서
진고응 교수는 1970년대에 국립대만대학교 교수로 있었으며 중화민국(당시 대만 국호)의 독재에 반대하여 해직되었습니다. 그 후 미국으로 추방되어 버클리 대학교(UCB)에서 연구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 북경대학교에 객좌교수로 초빙되었을 때 “중화민국을 비방하지 않는다. 공산당을 선전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강의만 한다.”는 조건으로 수락하여 10여 년 간 노장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 말에는 대만 입국 금지가 해제되었고 원 직위로 복귀되어 현재 대만대학교에 철학과 교수로 있습니다.
진고응 선생의 <노자>의 '道' 자 의미 분류
老子哲學系統的形成和開展 노자철학계통적형성화개전
一 ‘道’的各種意義 ‘도’적 각종 의의
1) 實存意義的‘道’ 실존의의적 ‘도’
甲, ‘道’體的描述 갑, ‘도’체적 묘술
乙, 宇宙的生成 을, 우주적 생성
2) 規律性的‘道’‘' 규율성적 ‘도’
甲, 對立轉化的規律 갑, 대립전화적 규율
乙, 循環運動的規律 을, 순환운동적 규율
3) 生活準則的‘道’ 생활준칙적 ‘도’
오늘은 저번 날 얘기 했던 노자의 ‘道’에 대해 좀 추가... 노자의 道에 대해서는 내가 책(<노자 제대로 읽기>)에 써 놓은 게 있지. 진교수의 분류와 비슷하지. 배운 거니까.
1. 만물을 낳고 기르는 노자가 파악한 그 무엇
2. 자연의 원리
3. 인간 사회에 대한 노자의 지혜
1번이 바로 유소감이 만물의 총근원이라고 하는 부분이고, 노자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 것이지...
<노자> 1장; ‘道可道非常道’(말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늘 그러한 노자의 도가 아니다.)
여기서 두번 째 道 자는 '말하다'라는 동사야. ‘가할 可’ 자가 조동사니, ‘道’ 자는 동사. 그래서 <노자> 32장에 道常無名(도는 항상 이름지을 수 없다). <장자/제물론>에서 夫大道不稱(말할 칭), <장자/ 지북유>에서 ‘道不可言, 言而非也’라고 하는 것이지. 그래서 이것은 無形, 無名인거지.
물론 노자의 도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말할 수 있어. 홍탁(烘雲托月), 그래서 나는 노자에 그렇게 많은 부정사가 있다고 생각해. 첫 번째 道 자는 다른 학파, 다른 종파에서 말하는 진리 체계, 마지막 常道의 도가 노자의 도라고 볼 수 있지.
두 번째. '자연의 원리'라 말한 것은 <노자>에서 '道'라고도, '天道', 또는 '天之道' 라고 부르는 것이야. 이것은 위에서 말한 有形, 有名의 세계, 즉 우리가 사는 천지 만물 세계의 존재와 변화 원리를 말하는 거겠지. 나는 이걸 음양론이라 부르지. 유소감은 이걸 만물의 총근거라 하는 것이야. 최진석은 이것만을 '노자의 도'라고 하는 것이고.
세 번째. '인간 사회에 대한 노자의 지혜(人之道)'라는 건 실제로 우리가 <노자>를 처음 읽을 때 감명을 받거나, 그 역설적인 언어에 충격을 받는 부분이지. 영어의 maxim(격언, 금언)이라는 거. 예를 조금 들어 보면...
5장; 天地不仁.(하늘과 땅은 편애하지 않는다)
8장; 上善若水.(가장 잘 하는 것은 물이 하는 것과 같다)
9장; 功遂身退, 天之道.(공을 이루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길이다)
13장; 寵辱若驚.(총애를 받으나, 욕됨을 당하나 다 놀란 듯 하라)
18장; 大道廢, 有仁義.(대도가 없어지자, 인이니 의니 하는 것들이 생겼다)
24장; 企者不立, 跨者不行.(발꿈치를 들고 있는 자는 오래 서지 못하고, 가랑이를 벌리고 걷는 자는 멀리 가지 못한다)
30장; 以道佐人主者, 不以兵强天下.(도로써 왕을 보좌하는 사람은 무력으로 천하를 강제하지 않는다)
이런 구절들은 <노자>에 엄청 많지..사람마다 느끼는 바는 조금씩, 아니 많이 다르더라도...
그리고 <노자>를 전문적으로 읽거나 철학적으로 읽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노자의 몇 가지 말 만 들어도 깊은 충격과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 올 수도 있겠지.
나 역시 처음에는 이런 부분적인 구절들에 감탄을 하고 <노자>를 전체적으로 읽게 되었을 거야. 그런데 <노자>의 이런 역설적이고 모호한 표현에 못 견디는 사람들도 많아. 뭔가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
그러나 세상, 특히 인간사는 너무도 복잡하고 확신할 만한 것은 별로 없지.
"인간은 경솔한 신념의 동물이며 반드시 뭔가를 믿어야만 한다. 신념에 대한 좋은 토대가 없을 때에는 나쁜 것이라도 일단 믿고 만족해 할 것이다. " - 버틀런드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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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본 <노자> 40장의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이 <곽점 노자> 갑본에는 ‘天下之勿生於又, 生於亡.’(天下之物生於有, 生於無.)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운데 ‘有’ 자 하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문장의 ‘有, 無’의 해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심각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현행본 <노자> 40장: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마왕퇴 노자> 을본; ‘天下之物生於有=生於無.’(天下之物生於有, 有生於無)
<북대 노자> 상경; ‘天下之物生於有=生於無.’(天下之物生於有, 有生於無)
<곽점 노자> 갑본; ‘天下之勿生於又生於亡.’(天下之物生於有, 生於無.)
<곽점초간노자>에는 '유생어무'가 '생어무'로 되어 있으나 <마왕퇴백서노자>에 이미 '유생어무'로 되어 있습니다. <곽점초간노자>가 원전과 가까울 수 있으나, 이 경우 필사할 때 부주의하여 '유' 자 아래에서 重文부호(=)가 빠졌을 수 있습니다.
<곽점초간노자> 갑본의 통행본 <노자> 37장에 해당되는 부분에 명백히 중문부호가 빠진 경우('智=足'은 '智=足='이 되어야 함)가 있고, 오자, 탈자 등 필사 오류도 여러 곳입니다.
40장; 生於又(=有)生於亡(=無) 37장; 족(足) 아래 중문부호가 빠져있음.
<마왕퇴 노자>와 <북대 노자>의 경우 중문부호가 있습니다.
대체로 <곽점 노자>의 '천하만물생어유, 생어무'가 원래의 노자 사상이고, 그 이후 언젠가에 <마왕퇴 노자>처럼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로 개조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개조가 일어날 수 있다면 당연히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곽점 노자> 필사 단계에서도 그 역의 개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노자를 철학서로 읽는 분들이 주로 유(有)와 무(無)를 노자의 고유 용어로 보고, 유무의 대대(對待)를 강조하여 <곽점 노자>의 구절이 옳다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유’와 ‘무’가 동일 차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노자> 40장에서는 명사로서의 ‘유’와 ‘무’의 의미를 동일한 차원에서 볼 수 없습니다. 40장에서의 유는 유형(有形)으로서의 천지, 무는 무형(無形)인 도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노자>에는 ‘유무상생’(有無相生: 2장)의 유무가 있고, ‘유생어무’(有生於無: 40장)의 유무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유무의 의미 수준이 다른 것은 간단히 알 수 있습니다.
유무의 순서를 바꾸어서 말이 되는가 알아보면 됩니다. ‘유무상생’을 ‘무유상생’으로 바꾸어도 말이 됩니다. 그러나 ‘유생어무’를 ‘무생어유’로 바꾸어 보면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식(子)이 자기 어머니(母)를 낳을 수는 없습니다.
상대되는 쌍은 서로 의존한다는 음양대대의 사유 방식이 중국 사상의 기본이지만, 그것은 천지 만물의 단계에서입니다. 노자에게는 그 이상의,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도’가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북대 노자>의 ‘天下之物生於有=生於無.’ 부분입니다. 중문부호(=)가 있습니다.
사진; 좌 죽간 하단 '유' 자 우측 하단 중문부호
9편; 노자와 해체론?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등등 프랑스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동양학자(중국학)들이 노자를 해체론으로 해석하는 게 유행이었지... 지금은 유행도 지나간 듯하지만...
사진; <노자에서 데리다까지>
얼마 전 EBS에선가 노자 강의를 하던 최진석 교수의 <노자> 해석이 대표적이야. 근간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을 보니 그 생각이 전혀 변치 않았더군. 하긴 이 책은 전에 쓴 논문 등을 모은 거...
처음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김형효 교수가 주도... <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 <사유하는 도덕경>을 쓴 이분도 나중에 보니 불교방송에서 <노자> 강의...
앞글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노자>에 대한 해체론적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보지. 그 해체론이란 게 아무리 고상한 서양 철학 용어를 쓰더라도 <노자>의 일부인 음양 이론의 서양 언어 번역 정도라고 보이기 때문이야.
우리나라의 한학자 또는 중국 철학자들은 그 숫자가 얼마 되지도 않지만 유가를 연구하는 학자 빼고는 대학에서 직장을 구하기가 힘들지. 그래서 신진학자들이 여기에 합류하기도 힘들고 해서 점차 그 수준이 하락 일로... 원래 수준이 높지도 않았지만...
게다가 전부 지들끼리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라 비판이라는 것은 눈꼽만치도 없어. 좋은 게 좋다는 식이지... 상호 비판 없는 철학이 가능한 지 의문이야...
‘해체론’하니 철학자라는 강신주가 생각나네...
요즘 강신주는 소장(?) 동양철학자로서 대세라고 해... 한 10년 사이에 책 30권 저술, TV, 신문, 강연 등 종횡무진...
나는 강신주의 <노자>, <장자>에 대한 책을 한 다섯 권 봤지... 노장에 대해서는 전부 다 본 셈이야... 다 순 엉터리야... 내가 잘못 판단한 거라면 수십 년에 걸친 내 나름의 노력이 허탕이라 나에겐 상당히 심각한 문제야.
‘순 엉터리인데 사회에서 그렇게 먹힐 수 있을까?’하는 사람들은 아직 이 사회의 수준에 대한 기대가 있는 분들이야... 그러나 그렇지 않아. 저질들 끼리 저희들이 서로 서로 보증을 서며 사회를 속이는 것이지... 돈도 걸려 있고...
나는 이런 애들 부러워 할 정도의 인간은 넘어... 그래도 참견하는 것은 거기다 책값 버리고 시간 들여 엉터리 배우는 분들이 안타깝기 때문이야.
아래 책은 올해 7월에 나온 강신주의 노장 책이야... 10년 쯤 전에 출판한 책 2권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과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을 99.9% 동일하게 합본한 책. 그래도 내가 다시 구입해 본 이유는 강신주의 생각에 변화가 있었을까 확인 차... 변화가 있다면 내가 예전 것 가지고 비판해 봐야 무소용이니까... 100% 예전과 동일하다는 걸 확인했지.
사진;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2014
이 책은 647페이지에, 책값 29,000원... 강신주에게 빠진 사람(아무 거나 다 사본다)들이 많다고 판단한 출판사 기획으로 재탄생. 이 책 읽기 어렵지... 분량도 그렇고,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그런데 강신주의 해석과 결론은 쉬워... 그러나 아무리 강신주가 아무리 여러번 주장해도 그게 <노자>, <장자>는 아니야...
내가 이 글을 좀 과격하고 예민하게 쓰는 것 같애... 그러나 노장 해석에 대한 강신주의 자만심에 비하면 약과야... 내겐 강신주의 글에서 사실 여부를 떠나, 오만함을 넘어 어떤 사이비 종교적 확신까지 느껴져... "나만 안다!"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 강신주, p 16
“마찬가지로 『노자』를 직접 읽어보았다는 것과 『노자』의 사상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제 필자에게 남은 숙제는 이런 경험을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이 책을 쓰는 이유다.
이처럼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노자』라는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필자가 보았던 모든 것을 들려주기 위해서, 나아가 『노자』를 아직도 희망의 철학으로 맹신하고 있는 사람들의 꿈을 깨우기 위해서 의도된 것이다.“
예전에 내가 ‘한국철학사상연구회’라는 데에 강신주의 <노자>, <장자>에 대한 해석을 비판한 글을 투고한 적이 있어. 그런데... 글 삭제에 강퇴 당했어. 인신공격을 했다나... 나는 이렇게 썼거든.
“강신주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엉터리다.”
그리고 그 비판의 근거를 수십 페이지에 걸쳐 써 놓았지... 그런데 그 내용과는 무관하게 인신공격이라고 강퇴, 글 삭제! 참 대단한 철학연구회지. 나는 지금도 그 글이 과격할지는 모르나 글 삭제 당할 정도의 인신공격은 없다고 봐... 이 글은 평가를 위해 전혀 고치지 않고 놔두었지...
하긴 위의 강신주 글을 보고 다음과 같이 썼더니 인신공격의 예라고 밑줄까지 쳐서 나에게 메시지로 보냈더라구... 그런데 "의심해 보자"는 게 인신공격이야?
강신주는 본인이 “<노자>를 직접 읽어 보았다.”, “직접 <노자>라는 고봉을 올라가 보았다.”고 자부하는 데, 저 혼자 높은 산에 준비도 없이 오르다가 길을 잘 못 들어 엉뚱한 산에 올라 간 게 아닌지 의심해 봐야합니다.
내 글은 전에 본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씩(일부 만 발췌) 보고 평가 부탁 해. 그 자체로도 가치 있는 장자의 이야기니까... <장자>외편 중 ‘山木’에 있는 “조릉우화” 라고 보통 불리는 에피소드..
그러고 보니 강신주 역시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에 경도된 인물이지...
다음 명단은 강신주의 <노자> 해석에 동원된 인물들인데, 무슨 <노자> 해석에 <노자>를 말하지도 않은 이리 많은 서양 철학자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해체론 계열의 철학자들이 등장하는가? <노자> 전문가는 아예 전무야(비판을 위해 이름만 몇 명 출현).
"가라타니 고진, 니시타 기타로, 데리다, 들뢰즈, 라깡, 라이프니츠, 렘프레히트, 루소, 마르크스, 바디우, 빌헬름 라이히, 소쉬르, 스피노자,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알렉스 캘리니코스, 알튀세, 칸트, 코페르니쿠스, 프톨레마이오스, 플라톤, 하이데거, 헤겔, 흄"
누구나 어떤 것을 볼 때 그 자체로 볼 수는 없고 자기의 기존의 이론이나 선입관으로 필터링을 하게 되지... 그렇다고 해서 어떤 것, 그 자체의 내용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해도 된다는 것은 아닐 거야.
자! 누가 <노자>, <장자> 책을 읽었던 이제까지의 모든 사람들이 오해했고, 내가 처음 노자, 장자의 뜻을 알았다고 한다면? 거의 미친놈이라 생각되지 않아? 우선 그렇게 알아먹기 어렵게 쓴 노자, 장자가 미친놈들이고... 저만 노장을 안다는 강신주의 막된 주장에도 혹하는 무지한 사람들이 많다는 게 세상 사이비가 설치는 이유 중 하나일거야. 사이비 종교, 이단 종교(뭐가 이단인지는 차치하고)가 많은 것도 마찬가지지...
한자의 뜻은 당연히 여러 가지야. 그러나 어떤 글에서의 한자의 뜻은 대체로 고정된 거지... 왜냐? 거기엔 전체적 맥락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야. 그걸 한 문장이나 한 구절만을 취해 제 맘대로 해석하는 걸 ‘斷章取義’라 하잖아? 또 그걸 가지고 그럴 듯하게 스토리를 꾸며대는 걸 ‘望文生義’라 하지... ‘望文生義’. 옛 부터 이런 인간들이 많았기 때문에 한문을 읽을 때 이런 걸 가장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야.
강신주는 극단적으로 나쁜 경우야. 나는 강신주에 대해 개인적으로 아는 것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 만나보면 좋은 사람일 수도 있지. 그러나 자기의 이해(오해)를 확신(여기도 이게 문제네)하여 남에게 전파하는 것은 죄악일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나도 항상 이렇게 경계해... 그래.. 비판하는 너는 누구며, 뭐가 그리 대단하냐? 그래서 항상 누가 썼던 간에 세상의 모든 노자, 장자를 읽고자 하는 거지...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아니...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야... 왜냐? 예를 들어, 진고응 선생의 <노자금주금역>에는 100권 이상의 노자를 참고했다고 했지... 그걸 읽은 나는 그 중 나은 걸 몇 권 만 골라 읽으면 되지 모든 걸 다 읽을 필요는 없겠지...
사진; 강신주 연세대 박사학위 논문
사진; 심사위원, 동양학 교수들
나는 글을 쓰기 전에 강신주의 책 뿐 아니라, 강신주의 <장자>에 대한 ‘박사학위논문’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전부 복사하여 여러 번 봤어... 결과, 그 학위를 평가한 교수들도 전부 나쁜 사람들이라는 거... 나는 그런 수준, 그런 발상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다는 걸,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가능하다는 걸 짐작은 했지만, 해도 너무 했다구... 여기서니까 이렇게 말하지만 딴 데서 말하면 나보고 웃기는 놈이라 할꺼야... 나도 알아...
강신주의 해석이 뭐가 잘못 된 건지 몇 마디로 말할 수는 없어... 그래서 글이 길어지는 거지... 나는 평소에도 <노자>, <장자>를 읽기 때문에 <장자> 해석에서 "累" 자라는 한자 한 글자의 해석 만 봐도 강신주의 문제를 알지만, 다들 그런 건 아니니까...
이건 해석의 폭의 문제가 아니야. 암만 포스트모더니즘적 상대성이니 해도 명백히 옳고 그른 것도 있는 거야.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체주의, 이런 거 따로 공부한 적 없어... 그러나 그걸 이용한 <노자>, <장자> 해석이 옳을 가능성이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있지.
말이나 글이라는 게 대충 좋은 단어 몇 개 섞어서 아무렇게나 해도, 권위가 인정되면 그럴 듯하게 들리는 거 아니겠어? 듣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서 더 하겠지만... 그래도 강신주는 아니야!!!
여기서는 <장자> 얘기만 해 보자구...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장자/ 산목>에 나오는 ‘조릉우화’의 다음 한 구절의 번역에 있지... 이 구절은 강신주에게 엄청 중요해. 왜냐? 자기의 모든 주장의 근거를 이 문장에 두고 있으니까...
희!물고상루,이류상소야!(噫!物固相累,二類相召也!)
강신주의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에서의 번역:
아! 사물들은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연루되어 있고, 하나의 종류가 다른 종류를 부르는구나! (<p37)
강신주의 <장자 & 노자; 도에 딴지걸기>에서의 번역:
아! 사물은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고, 한 종류가 다른 종류를 부르는구나!
한 마디로 ‘조릉우화’의 전체적 맥락에 따른 ‘累’ 자 단 한 글자의 해석이 문제야...
강신주는 "관련되다"라고 해석하지만, 나는 "해치다'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러면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되는 거지...
강신주의 ‘조릉우화’ 해석에 대해 쓴 내 비판 글에서 몇 군데 인용해 볼게...
아래의 글은 2006년 김영사에서 출판한 <장자 & 노자: 도에 딴지걸기>에서 인용한 <장자/ 외편 /산목(山木)> 에 나오는, <장자>를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읽어 본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에피소드(우화)에 대한 강신주의 번역입니다.
이 글은 강신주가 “장자의 철학적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려준다.”며 책의 첫 부분에 번역, 인용한 도론(導論) 격의 글입니다. 이 글에 대한 강신주의 이해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면 사실상 나머지 부분은 읽어 볼 필요도 없습니다. 강신주의 <장자>에 대한 모든 논의가 이 우화의 이해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자>외편 중 ‘山木’에 있는 “조릉우화” 라고 보통 불리는 에피소드...
강신주의 번역(<장자 & 노자: 도에 딴지 걸기> p18~19)
장주(莊周, 장자의 본명)가 ①조릉(雕陵)의 울타리 안에서 노닐고 있을 때, 날개폭이 일곱 자이고 눈 크기가 한 치나 되는 이상한 까치가 남쪽에서 날아 온 것을 보았다. 그 까치는 장주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 밤나무 숲에 앉았다. 장주가 말하였다.
“이 새는 무슨 새인가? 그렇게 ②큰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날아가지 못하고, 그렇게 큰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를) 보지 못하는구나.”
장주는 자신의 치마를 걷어 올린 채 걸음을 재촉하고는 석궁을 들어 그 새를 겨냥하였다. 그때 그는 매미를 한 마리 보았다. 매미는 방금 시원한 그늘을 발견해서 ③그 자신(기신)을 잊고 있었다. 나뭇잎 뒤에 숨어 있던 사마귀 한 마리가 (자신이 얻을) 이익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 드러났다는 사실을 잊고 매미를 낚아챘다. (장주가 잡기 위해 석궁을 겨냥하고 있던) 이상한 까치도 (자신이 얻을) 이익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잊고 사마귀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장주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말하였다.
④ “아! 사물은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고, 한 종류가 다른 종류를 부르는구나!”
아니나 다를까, 장주가 석궁을 던지고 숲에서 달려 나왔을 때, 사냥터지기가 그에게 욕을 하면서 달려왔다.
장주가 집으로 돌아와서 ⑤석 달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인저(藺且)가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요사이 왜 밖으로 나오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장주가 대답하였다.
“지금까지 나는 밖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지켰지 나 자신을 잊고 있었다. ⑥나는 흐린 물로 비추어 보았을 뿐 맑은 연못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였다. 게다가 나는 이미 ⑦‘다른 풍속에 들어가서는 그곳에서 통용되는 규칙을 따르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얼마 전 내가 조릉에서 놀고 있을 때, 나는 나 자신을 잊었다. 이상한 까치가 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갈 때 나는 밤나무 숲을 헤매면서 내 생명을 잊었고, 밤나무 숲의 사냥터지기는 나를 죄를 지은 사람으로 여겼다. 이것이 내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이유다.”
위 <장자> 번역은 일부러 강신주 것을 인용한 겁니다. 강신주 유리하게...
진고응의 <장자금주금역(莊子今注今譯) /2009 /북경 중화서국>의 원문을 옮깁니다.
莊周游於①雕陵之樊,覩一異鵲自南方來者, 翼廣七尺,目大運寸,感周之顙,而集於栗林.
莊周曰:「此何鳥哉!②翼殷不逝,目大不覩?」蹇裳躩步,執彈而留之. 覩一蟬,方得美蔭而③忘其身. 螳螂執翳而搏之,見得而忘形;異鵲從而利之,見利而忘其真.
莊周怵然曰:「噫!④物固相累,二類相召也!」捐彈而反走,虞人逐而誶之.
莊周反入,⑤三日不庭. 藺且從而問之:「夫子何為頃間甚不庭乎?」
莊周曰:「吾守形而忘身,⑥觀於濁水而迷於清淵.」且吾聞諸夫子曰:⑦『入其俗,從其令.』
今吾游於雕陵而忘吾身,異鵲感吾顙,游於栗林而忘真, 栗林虞人以吾為戮,吾所以不庭也.
噫!物固相累,二類相召也!」희! 물고상루, 이류상소야!
강신주 번역: “아! 사물은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고, 한 종류가 다른 종류를 부르는구나!”
박일봉 번역: “아, 모든 물(物)은 본래 난처한 관계로 맺어져 있고, 비슷한 사(事)는 잇달아 일어나는구나!” <장자> 육문사
안동림 번역: 아, [모든] 사물이란 본래 서로 해를 끼치고 이(利)와 해(害)는 서로를 불러들이고 있는 거구나!” <장자> 현암사
진고응 현대 중국어 번역: 唉! 物類互相累害, 這是由於兩者互相召引貪圖所致! <莊子今注今譯> 中華書局
“그래! 사물들은 서로 해를 끼치는데, 이것은 둘이 서로 탐욕을 부려서 불러들이기 때문이다!(노바당 직역)
버튼 왓슨(Burton Watson) 영역: Ah! - things do nothing but make trouble for each other - one creature calling down disaster on another!<Chuang tzu; Basic Writings> Columbia university press
문제는 ‘누(累)’ 자에 대한 해석입니다.
위의 다섯 가지 번역을 비교해 보면 강신주 만 ‘누’ 자를 ‘관련되다’라고 가치중립적인 낱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관련’이라는 말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신주는 번역문에서 차후의 자기의 논리 전개에 적합하게 이 말이 긍정적 의미인 듯한 냄새를 피우고 있습니다.
이런 애매한 번역에서부터 강신주는 <장자>가 ‘타자와의 소통의 철학’이라는 자기의 결론을 뒷받침할 교묘한 준비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누(累)’ 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누를 끼치다’라는 말에서 보듯이 보통 ‘해(害)’ 자와 유사한 의미이고, 그렇게 해석해야 '조릉우화'의 전체적인 뜻과도 맞습니다.
박일봉의 <장자>는 일본에서 출판된 <전석한문대계/ 장자>의 번역인데, 어투로 보아 일본 번역의 중역(重譯)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의 해설에서 ‘장자는, 물(物)은 끊임없이 서로 손상하는 관계에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라고 부정적 관계임을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누(累)’ 자는 대체로 ‘포개다 (예: 누적)’, ‘연결되다 (예: 연루)’의 의미와 ‘해를 끼치다’라는 세 가지 정도의 의미로 씁니다. ‘물고상루(物固相累)’의 경우 사마귀가 매미를, 새가 사마귀를 잡아먹는 경우이므로, 서로 관련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일방적으로 상대에게 해를 끼치는 먹이 연쇄(food chain)의 관계입니다. 장자는 눈앞의 이익에 대한 탐욕이 사물의 먹고 먹히는 이런 위험한 관계의 실상을 가려 제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강신주는 이 한편의 에피소드에서 장자가 “사람이 어떻게 하면 다양한 사회 상황에서 갈등과 대립 없이 삶을 영위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p19)”고 하는데 말은 그럴 듯하지만, 정말 어이없는 해석입니다. 장자가 여기서 매미와 사마귀, 사마귀와 새, 새와 장자, 장자와 밤숲을 지키는 사람의 ‘갈등과 대립’을 해소해야 한다고 말한다는 것입니까?
다시 강신주의 말을 들어보자구...
강신주의 해설 2(<장자 & 노자: 도에 딴지걸기> p22)
“그렇다면 우선 장자의 사상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우리는 조릉에서 장자가 터득한 깨달음으로부터 벌써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사냥터에서 그가 얻은 철학적 통찰을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우리의 삶은 타자와 밀접하게 관련될 수밖에 없다. 둘째, 타자와 적절히 관계를 맺는 일은 맑은 연못처럼 마음이 맑아야만 가능하다.
첫 번째 깨달음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삶의 유한성(有限性)에 대한 통찰이다. 유한에 대한 자각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외부에 타자가 존재한다는 자각과 같은 것이다.
반면에 두 번째 깨달음이 뜻하는 것은 타자와의 소통은 마음을 통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장자 철학의 핵심은 바로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서 맑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핵심 전언을 모든 우화에 똑같이 적용했다."
강신주의 글은 이게 <조릉우화>에 대한 해설 만 아니라면 그런대로 들어 줄 만 하지.... 좋은 낱말이 많이 나오니까... "깨달음, 철학적 통찰, 맑은 마음, 삶의 유한성, 타자와의 소통" 등등... 그러나 이건 <장자>가 아니야.
다시 내 글...
“강신주는 ‘물고상루(物固相累)’를 ‘사물은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라고 번역한 후, ‘우리의 삶은 타자와 밀접하게 관련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장자에 대한 모든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려면 먼저 이 문장에 대한 일반적이고 정통적 이해, 즉 ‘사물은 본래 서로 먹고 먹히는, 즉 해를 끼치는 관계다’라는 해석에 대한 반론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이런 반론이 없이 자기주장만을 하는 것은 학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칼 세이건(Carl Sagan)의 말대로 특별한 주장에는 특별하고 확고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강신주는 이 짧은 이야기에서 장자 철학의 핵심이 ‘타자와의 소통’이라고 하는 데, 위에서도 말했지만 장자가 이 이야기에서 매미와 사마귀, 사마귀와 새, 새와 장자, 장자와 밤 숲을 지키는 사람 사이의 소통을 말했다는 것입니까? 아무리 소통이 좋은 것이라 해도 이런 관계는 소통될 수 없고, 같은 생태계에 포함될 수는 있으나 같은 공동체를 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강신주는 ‘장자 철학의 핵심은 바로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서 맑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핵심 전언을 모든 우화에 똑같이 적용했다.’고 하는 데, 장자 철학의 핵심을 한마디로 단정 짓거나, 그 핵심을 ‘모든 우화에 적용했다’는 말은 대담하지만, 경솔하고 위험한 생각입니다.
<장자>는 장자 본인의 사상과 제자, 후학들의 사상이 종합되어 있고, 그 부분들 간에는 상충되는 사상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의 핵심’은 한마디로 말할 수 없고, ‘모든 우화’가 한 가지 사상을 표현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장자가, 인간의 자아중심의 좁은 마음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차원에서 세계의 실상을 파악하고 정신의 자유를 얻는 경지를 추구했다고 봅니다. 물론 이런 경지 역시 도가 공통의 ‘스스로 그러함(自然)’이라는 기초 위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장자는 ‘조릉 우화’에서, 본인으로 비유한 평민 지식인들이 밤나무 숲을 지키는 사람으로 비유된 왕(권력)이 제공하는 벼슬과 재물에 미혹되어 부림을 당하다가 왕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처단되는 당시의 사회에서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길을 말한 것입니다.,"
내가 강신주의 <노자>, <장자> 해석에 대해 쓴 글은 이보다 10배는 될거야... 다 읽은 사람이 거의 없을 거야... 그러나 이런 기록이라도 남기는 게 <노자>와 <장자>를 좋아하는 내가 할 일, 아니 취미 활동이라고 생각해. 별로 힘드는 일도 아니고...
참고:
1.강신주의 장자는 <장자>가 아니다. 1편, 2편(주석)
2.강신주의 <노자> 해석을 비판함
http://blog.naver.com/jaseng54
10편; 길 '도' 자의 유래
오늘은 “길 道” 자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 한번 얘기해 볼께...
사진; <한자원류자전>
이 사전은 그냥 한자 사전이 아니고 <漢字源流字典>이야. 주로 갑골문, 금문, 전국문자, 소전체 등에서 한자의 고대의 뜻을 밝히는 거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한자 사전하고는 좀 다르지. 그래도 큰 사전에는 고대의 뜻도 많이 실려 있지만 우리 같은 일반인이 소장하기는 어려워... 예를 들어 단국대에서 출간한 <漢韓大辭典>은 16권인 데 1,600,000원 이야. 사실 그렇게 큰 사전이 필요가 없지만 그 공력을 생각해서 꼭 한질 사려고 해... 세계적으로는 일본의 <大漢和辭典>, 중국의 <漢語大詞典>이 유명하지...
사진; <한한대사전> 단국대
자전과 사전(辭典, 중국에서는 詞典이라고도 씀)은 좀 달라... 자전은 개별 한자만 실려 있고, 사전은 복합자가 실려 있는 경우도 있지. 그런데 요즘은 인터넷에 거의 대부분의 한자 정보가 공개되어 있어서 찾아보면 돼. 특히 중국의 바이두(baidu.com)에는 상당한 한자 정보가 있거든...
그리고 고대 한자의 경우 갑골문, 금문, 전국문자 등을 연구하는 단체에서 개설한 사이트가 많아서 찾아보기 쉽게 돼 있어... “道” 자를 한번 찾아 볼께... “象形字典”(http://www.vividict.com)이라는 사이트가 있어... 아래 그림은 여기서 한글로 ‘도’ 자를 입력하고 한자변환을 해서 찾은 결과야.
사진; 상형자전, '道' 검색 결과
한자의 글자체의 변화와 의미의 변화를 시기적으로 설명해 놓았지...이런 사이트는 여러 군데라 찾은 내용을 비교해 볼 수도 있지. 한 군데를 다 믿을 수는 없으니까...
앞 편에서 강신주의 철학박사학위 얘기를 하니, 대만 문화대학에서 갑골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상명대 김경일 교수가 생각나네...
사진; <나는 동양사상을 믿지 않는다> 2012, 김경일
김경일은 전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으로 유명세를 치르고 비난을 받기도 했지... 나는 그 때 이 책을 읽어 보지는 않았어...
그런데 재작년에 김경일이 <나는 동양사상을 믿지 않는다>라는 책을 냈어. 한번 읽어 봤지... 아이구!!! 이런 엉터리가... 그래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를 구해 읽어 봤지. 성리학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좋은 글인데... 이상하다.
사진; 거북 배껍질 卜辭
갑골문은 商나라(殷나라) 중후기의 거북점, 우골점 친 결과를 귀갑(주로 거북 배껍데기)과 우골(주로 소 어깨뼈)에 칼로 새겨 놓은 것이지. 한자의 원류라 볼 수 있지... 그런데... 3000년 이전의 갑골문 연구로 박사학위 받았다고 그 이후에 형성된 동양사상 모든 분야의 전문가는 아닐 거야. 그런데 꼭 이런 인간들이 한자 좀 안다고 엄청난 동양사상의 전문가 행세를 해 댄다니까...
김경일은 <나는 동양사상을 믿지 않는다>라는 책에 ‘道’라는 글자에 대해 그려 놓기도 하고, 장황히 설명을 해 놨는데, 나는 도저히 납득이 안 갈 뿐 아니라, 어이가 없어. 김경일은 ‘道’라는 글자의 고대에서의 의미를 알면 <노자>를 다 안다는 식이야...
아래는 김경일의 책 <나는 동양사상을 믿지 않는다>에서 인용. 책 제목하고는... 누가 동양사상을 믿는다고... 자기가 보니 동양사상에 별거 없다는 의미겠지. 이건 책표지에 써 놓은 글에서도 알 수 있어. 한 마디로 <노자>같은 건 다 쓰레기라는 거지.
“동양사상의 출발점을 들여다본 순간 위대했던 문헌들이 어느새 낙서로 변했다.”
사진; 김경일이 그린 '道' 자와 해설
김경일 인용 사진의 글과 <한자원류자전>의 '도' 자 해설을 비교해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을 거야..
김경일은 갑골문 시대의 정인(貞人, 왕 대신 점치고 해석, 기록을 담당하는 귀족)에 미쳐서 정인들이 초기 한자를 만들었고, 노자도 상나라의 정인을 흉내 낸 것일 뿐이라는 거지... 다시 말해 정인은 상나라의 무당, 귀족, 점쟁이, 권력가, 한자 제작자라는 거야. 노자는 '도' 자를 만든 정인의 사유를 정리한 것 뿐이고...
김경일은 “貞人을 모르고 노자를 알 수 없다”면서 이렇게 말해...
"노자적 사유의 특성은, 중국 고대문자가 만들어지던 과정을 더듬어 볼 때 제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감지했다. 노자에 의해 맨 처음 드러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노자적 사유는 사실 상나라 때 정인들, 혹은 상나라 이전 시대의 정인들의 머릿속에서 일상으로 반복되던 그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김경일은 자기가 갑골문 전문가라 정인과 그들의 사유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당연히 정인을 흉내 낸 <노자>는 자기가 제일 잘 알고, 알고보니 별 거 아니다 라는 논리야... 그러나 그렇게는 안 돼...
사진; <한자원류자전>의 ‘道’
먼저 ‘道’ 자에 대한<한자원류자전>의 해설 번역, 여기서 [자형]을 보면 '道' 자는 금문에서 처음 발견된다는 것을 알수 있지. 자형 3가지 중 처음 것, '金' 옆의 글자가 김경일이 그려 놓은 ‘道’ 자와 같은 것이지. 여기서 금은 金文(청동기 명문)이라는 뜻이야.
“[구조]
회의자(개별 상형자의 의미를 모음)다. 금문은 ‘갈 行(街道=길)’ 자와 또 ‘又(手=손)’ 자, ‘머리 首’에 따른다. ‘손으로 머리 앞의 길로 인도한다’는 뜻.
석고문(대전체)에는 ‘손 手’ 자가 ‘마디 寸’(손의 뜻)으로 바뀌었다.
전문(소전체)에서는 ‘손 手’ 자를 생략하고 길(行)의 반쪽만을 그리고 한쪽 발(止)을 추가하여 머리 앞쪽으로 인도하는 뜻을 나타냈다.
예서체 변화 후 해서에서는 道 와 도(좌 首, 우 寸) 2가지 체로 썼다.
이것은 ‘인도할 導’의 본자다."
한마디로 ‘道’ 자의 원 뜻은 ‘인도하다’라는 것이지.
현재의 ‘길 道’ 자는 ‘머리 首’와 ‘辵(쉬엄쉬엄갈 착= 行 반쪽 + 발 止)받침’(책받침이라고도 하나 종이 아래 까는 학용품과 오해한 것)만 남은 것.
그런데 김경일은? 획기적 글자 분석을 하지...
“상나라 귀족들은 도라는 이미지, 즉 해골을 들고 길을 개척해 나가는 주술행위” 어쩌고...
또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부족원로 중에서 지혜가 많거나 특정지역에 대한 카리스마 등이 있었던 사람의 해골을 들고 한 걸음씩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는 주술행위를 반복했다.”
사진; <나는 동양사상을 믿지 않는다> p32
그럴 수도 있어. 그러나 이런 획기적 주장을 하려면 먼저 기존에 확립된 설이 오류라는 증거부터 대야 하는 것이 맞잖아?
무엇보다 ‘道’라는 글자는 상나라 귀족과 무관해... 이제까지 100년 이상에 걸쳐 발굴된 수 만편의 갑골문에 한번도 나오지 않았어... 물론 갑골문에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당시에 이 글자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 그러나 이 글자를 상나라 귀족, 또는 정인이 만들었다는 증명은 김경일이 해야 하는 것이지...
그 다음에 그에 해당하는 논리를 전개해야 하는 것이고...
사진; <상형자전> '道'자는 갑골문에 없다.(缺)
참고; 중국 화동사범대학 고문자학 사이트('道' 자는 금문에서 처음 발견된다)
http://www.wenzi.cn/guwenzizixingjiansuo/guwenzizixing.asp
게다가 김경일은 '머리 首' 자를 ‘머리칼을 남긴 해골의 모습’이라고 단정해... 하지만, ' 首' 자는 그냥 머리를 나타낼 수도, 사람을 나타낼 수도 있는 거지... 이건 김경일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어. 그러나 제 필요에 따라 엿장사 맘대로 그 뜻을 취사하는 것이야... 머리칼을 남긴 해골 어쩌고 하면서... 근데 해골에도 머리카락이 있나?
사진; 王疾首?
김경일의 갑골문 해석이야. 여기서는 그냥 ‘살아있는 사람의 머리’라고 해석했지.
<한자원류자전>에는...
사진; <한자원류자전> ‘首’, 본의는 머리(頭)
갑골문에도 ‘首’ 자가 있고, 상형자야. 그런데... ‘道’ 자와 같은 복잡한 회의자는 갑골문에 드물지... 당연하지... 세상이 덜 복잡했으니까... 게다가 갑골문은 칼로 새긴 글씨야... 위 사진에서 보듯이 ‘道’ 자의 복잡한 금문형 곡선 글자를 칼로 새길 수 있겠어? 딱딱한 귀갑, 우골에?
나는 원래 ‘道’ 자는 ‘인도하다’라는 뜻이 맞다고 생각해. 그 후에 이 글자가 ‘길(way)’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게 되자, ‘導’ 자를 ‘인도하다’라는 의미로만 쓰게 된 것이지...
<논어/위정>에서 보이듯이 ‘길 道’ 자를 ‘인도하다’라고 쓴 흔적이 남아 있지.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공자가 말하길: 정치적으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이 회피하려만 하고 수치를 모르게 된다.
金文은 미신적(주술적) 商나라가 망한 후 인문주의의 周나라에서 주로 제후에게 하사한 청동기(이게 권력의 상징이며, 보증)에 새긴 글자(銘文)지... 진흙 주형에 쓰기 때문에 복잡한, 그리고 화려한 글씨체가 가능한 것이야.
김경일은 이런 후대의 문자를 슬쩍 상나라 귀족, 정인과 연결시켜 자기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고...
대한민국에서는 거의 유일한 갑골문 대학자(?)인 김경일을 비판할 사람이 없어. 그러니 무슨 소리를 해도 무관... 자기 머리에 떠오르면 ‘옳은 생각이다’ 하는 게 버릇이 된 것이지...
요즘 <노자> 전문가들은 노자라는 개인이 있었는지, 그 책의 성립 시기는 언제인지에 대해 과거와는 다른 견해가 많아. 나 역시 현행본 <노자> 책 전부를 쓴 노자라는 개인은 없고, <노자> 책을 노자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또 책의 부분적 문장들은 산재한 시기가 있었으나 현재 분량의 <노자>가 성립된 것은 bce 300년 이후, 전국 말기(진나라의 부흥, 통일 시대)라고 봐...
그런데도 김경일은 특정한 노자를 자기가 창조하여, 노자가 공자와 동시대라는 전통적 견해에 따라도 500~700년 이상 전(내 의견으로는 거의 1000년)의 정인과 연결시킨다? 한마디로 단순하고 무모한 것이지...
상나라(bce 1600년 경~bce 1046년)와 전국시대(bce 403년~bce 221년)는 그 중간에 주나라의 거대한 인문 문명(이것이 중국 본류 문화가 된 것이지. 공자: 吾從周; 나는 주나라의 문화를 따르겠다)이 수백 년 끼어 있는 것인 데... 노자는 그마져도 극복하고자 하는 사상이지...
그런데도 김경일은 <노자>에다 주술적 상나라 문화를 연결시킨다? <노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리는 없고 전통 문화적 영향이라는 게 있으니 한 10% 정도나 연관이 있을까?
노자사상은 ‘道’ 라는 한 글자의 원초적 의미(貞人 어쩌고 하는 김경일의 주장도 다 엉터리지만)로 다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김경일은 갑골문은 좀 아는지 몰라도 한문 전체의 시대적 흐름과 선진 사상에 대해서는 일자무식보다도 나쁘지... 남들에게 해독도 끼치고...
게다가 이런 인간들은 잘난 척들은 엄청해... 하긴 교수들이란 게 별 게 아니라도 애들한테는 하느님이니... 버릇이 더럽게 들기 쉽지...
나는 김경일에게서 ‘기원의 우상’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 봤어... <나는 동양사상을 믿지 않는다>에서 인용해 볼께...
“문화의 뿌리 찾기에 대해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흐(Marc Bloch)는 자칫 ‘기원의 우상((Idol of Origin)’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자기 생각에 빠지는 실수가 따를 수 있다는 조언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중국 고대문화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사회과학원의 리쉬에친은 이런 방법을 동양의 문헌과 문화가 만들어낸 회의의 소용돌이로부터 걸어 나올 수 있는 방법으로 보기도 한다.” p210
나는 김경일 말을 잘 믿지 않게 됐으니... 그래서 맞는 말인지 마르크 블로흐를 한번 찾아 봤더니 ‘기원의 우상’은 김경일이 ‘자기 생각에 빠지는 실수’ 어쩌고 하는 그런 게 아니고 이런 말이야.
Bloch here and elsewhere attacks the “idol” of origins arguing that historical phenomena ought to be explained in terms of their own time, rather than of earlier periods.
블로흐는 어디서나 기원의 ’우상‘이라는 것을 비판하면서, 역사적 현상을 과거의 언어가 아닌 당대의 언어로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경일은 고문자학의 대가인 중국 청화대 교수 이학근(李學勤)을 빌어, 어떤 사상의 뿌리, 즉 김경일의 경우는 갑골문에 나오는 글자를 알면 그 사상 내용도 알 수 있다는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지만, 그럴 경우가 있는 것이지 일반화 할 수는 없어... 블로흐도 그 걸 경계하는 것이고...
일본의 한자학 대가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교수의 책 <한자의 세계>에 이런 말이 있어...
“문자구조의 기원적 의미가 그대로 그 당시의 실태를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실정에 맞지 않을 위험이 있다. 주술은 기술의 배후에 존재하면서 기술과 공존하였으며, 이 두 가지는 분명히 구별되면서도 상호보완적이었다.” p468
한 마디로 갑골문이 후대의 사상은 차치하고, 그 당시의 실상도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는 거지... 한데 김경일도 어떤 때는 이런 걸 잘 알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에서는 “언어란 변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런데 언어는 변하는 데 사상은 안 변하나? 사실은 이런 생각이 진실에 가까울 꺼야...
"같은 글자라도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책을 읽을 때 今으로 古를 단정하고, 古로 今을 규정하는 것 모두 경계해야 한다."
결론;
1. ‘도’ 자는 갑골문에 나오지 않는다.
2. 금문에 나오는 ‘도’ 자의 원래의 뜻은 ‘인도하다’ 라는 것이다. <노자>의 ‘길 道’와는 의미가 다르다.
3. ‘도’ 자가 갑골문에서 발견된다 해도 그 의미로 노자사상을 단정할 수 없다.
4. 김경일은 동양사상에 대해 일단 갑골문을 무시하고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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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동양사상을 믿지 않는다>를 쓴 김경일의 <노자>의 ‘도(道)’에 대한 해석을 봤을 때, 나는 10년 쯤 전에 시라카와 시즈카의 책을 본 기억이 나지 않았다. 김경일의 ‘도’에 대한 해석은 완전히 시라카와의 의견이지만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1. ‘道’ 자는 “상나라 귀족들이 도라는 이미지, 즉 해골을 들고 길을 개척해 나가는 주술행위”를 나타낸 것이다. (단, 김경일은 ‘자기 부족 원로의 해골’, 시라카와는 ‘이민족의 해골’)
2. ‘도’는 ‘도’ 자가 처음 만들어진 상나라 때의 정인들의 사고를 반영(시라카와: 은나라의 사상을 계승; <주술의 세계> p126)한다.
3. 노자의 ‘道’와 시라카와의 ‘道’ 자 해석을 연결시킨 것은 김경일의 독창성이지만 전혀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노자>를 모른다는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시라카와의 ‘도’ = 인도하다[길안내], <노자>에서의 ‘도’ = 길, 진리,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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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명한 갑골문 학자인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의 책인 <주술의 사상> 29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 책의 일본판 원서는 1992년에 나왔다.
“우메하라: 선생님의 책을 읽고 있으면 모든 글자가 신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선생님이 ‘도(道)’에 대해 해석해 놓으신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민족의 머리를 가지고 걷는 모습이라고 하셨는데, 진짜 머리를 들고 걸었단 말입니까?
시라카와: 글자의 구조가 그렇다는 거지요. 사실은 머리를 들고 나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어요. 지금은 ‘도(導)’라는 글자가 따로 있어서 길 안내를 뜻하는데, 원래는 ‘도’가 그와 같은 주술적 의미를 지녔어요. 다만 자기가 지배하는 영역에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어요. 자기들이 지배하는 영역 바깥으로 나갈 때에 ”거기에는 이민족의 신이 있다. 우리가 섬기는 영과 다른 영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영을 퇴치하면서 나아가야만 했다는 말이지요.”
시라카와 시즈카의 <한자의 세계>에도 ‘도(道)’ 자에 대한 설명이 있지만 이 해석이 옳다 해도 이것은 한자의 초기 형성 단계에서만 부합하는 의미일 뿐이다. 시라카와는 노자가 장자 이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 자가 생긴 금문의 시대부터는 적어도 500년 이상이 지난 것이고, 지적 사회에서는 은나라의 주술적 세계관이 주나라의 인문적 세계관으로 대부분 교체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위 인용 글에서 시라카와는 ‘도’의 원초적 의미가 이민족에 대한 반응, 즉 자기가 지배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주술적 대응이라고 한다. 그러나 <노자>의 ‘도’는 대부분 자기가 지배하는, 또는 앞으로 지배 가능한 영역(天下)에서의 질서 원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시라카와가 갑골문, 금문의 대가라고는 하나 <노자>의 전문가는 아닐 수 있다. <주술의 세계> 129페이지에 <노자> 4장의 일부분을 해석하고 있는 데 어이가 없다.
“편집부: <노자>에는 신비적인 것이 별로 없습니다.
시라카와: 그림자는 남아 있어요. 예를 들어 ‘나는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하고 상제上帝보다 먼저 존재했던 것 같다’라는 구절은, ‘나는 도대체 어떤 바탕을 가진 사람일까, 제帝보다 앞서 내가 있었던 것처럼 생각된다’라는 뜻이에요.
편집부: 정말로 자기가 ‘제’ 이전에 있다고 말한 것입니까?
우메하라: 제는 어떤 의미입니까?
시라카와: ‘제’는 사물을 만든 조물주에요. 노자는 사물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자기가 있었다는, 형태가 갖추어지기 전에 우리의 존재가 있었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상징적 표현이겠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것에도 지배를 받지 않는, 규정되지 않은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요. 의미만 놓고 본다면 말이지.”
이에 대한 언급은 길지만 시라카와의 말은 틀렸다고 명확히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상제보다 앞 선 것은 ‘도’이기 때문이다.
<왕필본 노자>: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25장 왕필 주; 不知其誰之子)
<마왕퇴 백서 노자 갑, 을본>: 吾不知其誰之子也, 象帝之先.
<북대 한간 노자>: 吾不智其誰子, 象帝之先.
시라카와는 우리가 가장 많이 보는 <왕필본 노자>의 원문을 보고 ‘제보다 앞선 것이 나(吾)’라고 하는 것은 <노자> 전체를 무시하는 해석이다. 노자가 제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물주로서의 제가 있다면 당연히 만물의 하나인 ‘나’도 상제보다 나중이 된다.
<왕필본 노자>의 원문이 ‘吾不知誰之子’로 돼 있지만 이것은 왕필 이후에 필사하거나 출판할 때 ‘吾不知其誰之子’에서 ‘그 기(其)’ 자가 잘못 탈락된 것이다. 위에 표시된 대로 <노자> 25장의 왕필 주를 보면 증명이 된다. 이런 경우는 <왕필본 노자>에 상당히 많다.
그리고 그 이전의 판본인 <마왕퇴 백서 노자>나 <북대 한간 노자> 모두 ‘그 其’ 자가 들어 있다. 이 ‘기(其)’ 자가 자기(吾)을 의미한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吾不知其誰之子’에서의 ‘其’ 자는 ‘道’를 가리킨다. 어떻게 아는가? 이 문구가 나오는 <노자> 4장 전체가 ‘도’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원문에 왕필주에 따라 ‘其’ 자를 추가하였다)
4장
道沖而用之,或不盈。
淵兮, 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紛,和其光,同其塵。
湛兮, 似或存。
吾不知其誰之子,象帝之先。
도는 비어있지만 그 쓰임이 다하는 법이 없다.
깊어서 만물의 종주와 같다.
그것들(萬物)의 날카로움을 누그러뜨리고, 분란을 풀어주며, 빛남을 부드럽게 하고, 티끌을 고르게 한다.
그윽한 것이 마치 존재하는 것 같다.
나는 그게(道)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지만 상제보다도 앞서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제(帝)’는 중국 고대의 최고신, ‘상(象)’은 ‘~인 것 같다, ~으로 보인다’는 뜻으로 푼다. ‘상(象)’은 동사다. ‘제(帝)’는 원래 상(商)나라의 부족신이었으나, 상나라가 천하를 지배하게 되자 최고신이 된 것이다.
‘상(象)’자는 보통 ’코끼리 상, 모양 상‘이라고 훈을 단다. ‘상(象)’자는 코끼리의 뼈다귀 화석 모양이다. ‘象’자를 왼쪽으로 90도 돌려 보면 코끼리의 뼈 화석이 보인다. 이것에서 살아있는 코끼리의 모습을 짐작한 데서 ‘모양 상’이라는 뜻이 생긴 것이다. 여기서는 ‘상(象)’자가 동사로 품사 활용되어 ‘같을 사(似), 같을 여(如), 같을 약(若)‘자의 뜻으로 쓴 것이다.
노자는 단정 짓지 않는 표현방식을 쓴다.(或, 似, 若, 如, 象) 노자는 ‘도(道)’가 가장 우선이라는 것을 ‘나는 그게(道) 누구의 자식인지 모른다’라고 모호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도’가 당시 사람들이 말하는 ‘최고신(帝)’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그런 것 같다’는 정도로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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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王力古漢語字典>
<한자원류자전>은 갑골문, 금문, 고문, 소전체 위주 해석... <王力古漢語字典>은 대체로 그 후... 그래서 중국 고전을 읽을 때는 주로 왕력의 자전을 이용하지...
북경대학교수였던 王力(1986년 사망), 이 분이 무서운 분이야. 중국 고문자학계의 거두라 할 수 있지.
사진; <古代漢語> 王力
<노자> 22장에 이런 말이 있지...
曲則全, 枉則直, ...
굽히면 온전해지고, 구부리면 똑바로 펴진다, ...
나는 전부터 이 구절에 의문이 있었어. 두 구절의 번역이 약간 뉘앙스는 다르지만 그 말이 그 말 아니냐구? 내가 본 <노자> 해설 책 모두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이런 정도는 별 생각을 안 하는 거야...
원래 ‘曲’ 자는 "굽다" 라는 뜻과 "세세하다" 는 뜻이 있잖아... ‘一曲之士’라는 말이 세세한데 매여 전체를 보지 못하는 지식인, 뭐 그런 뜻... 또 <예기/ 曲禮> 라는 말이 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라는 말이고...
나는 여기의 ‘曲’ 자는 ‘세세함, 또는 부분적’이라고 해석해야 된다고 봐... 그래야 부분과 전체라는 대비도 되고... 왕력 교수 얘기를 하니 생각이 났어. <고대한어>의 “曲” 자 해설에 <노자> 22장의 이 구절을 예로 들었더라구...
“(三) 局部, 一部分. 跟‘全’相對. (국부, 일부분, '온전 全'과 상대되는 말)
<老子> 二十二章: ‘曲則全, 枉則直.’ (세세하면 전체적이 되고, 굽으면 펴진다.)
<荀子/ 解蔽>: ‘凡人之患, 蔽於一曲, 而闇於大理.’ (무릇 사람들의 문제는 한부분에 갇혀 큰 이치에 어두운데 있다.”
참고; 각국의 “道” 자 활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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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편; 노자의 도와 유무 2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은, 설명하려고 애쓰지 말아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 게일린 플레쳐
오늘은 다시 <노자> 1장 첫 부분... 복습 겸 다른 해석(철학적) 소개...
<노자> 1장
1.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2. 無名, 萬物之始; 有名, 萬物之母.
3. 故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
4. 此兩者同出, 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기독교 성경책은 번역이 좀 다르더라도 기본적으로 장, 절을 구별하여 번호를 매겨 놓아 인용하고 찾아보는 데 편리합니다. <노자>나 다른 동양고전도 그런 방식이 필요할 듯합니다. 단, 그게 어려운 이유는 그 원문이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자>의 경우는 통행본(왕필본, 하상공본 등)이 있고, 20세기 이후 돈황본, 마왕퇴백서본 2종, 곽점죽간본, 북경대학본 등 여러 가지 판본이 발굴되어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각국의 <노자> 전문가들이 모여 표준적 판본(원문과 문장부호, 장절 번호)을 일단 잠정적이나마 정할 필요가 있읍니다.
이것은 편의성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다른 원문으로 서로 다른 얘기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노자>를 철학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은 2, 3번 구절을 대체로 아래와 같이 斷句합니다.
<노자> 1장
1.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2. 無, 名萬物之始; 有, 名萬物之母.
3. 故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徼.
4. 此兩者同出, 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무’와 ‘유’를 노자의 고유한 철학적 개념으로 보고 <노자>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직역할 수 있습니다.
2. 무는 만물의 시원의 이름이고, 유는 만물의 어머니의 이름이다.
3. 그러므로 항상 무로써 그 묘함을 보려하고, 유로써 그 요를 보려한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대체로 송나라 이후(왕안석, 사마광)의 일입니다. 그 전에 왕필 역시 여기서는 무명, 유명으로 단구하면서도 무와 유를 철학적 개념으로 써서 자기의 사상을 전개합니다.(以無爲本, 貴無論, 崇本以息末, 본=무)
<노자> 14장의 왕필주입니다.
欲言无邪.而物由以成.欲言有邪.而不见其形.
‘무’라고 말하려니 만물이 거기서 다 나오고, ‘유’라고 말하려하니 그 형체를 볼 수 없다.
‘도’에 대한 표현입니다. 한마디로 ‘도’는 ‘무’이기도 하고 ‘유’이기도 하다는 것 입니다. <노자>를 학문적으로 읽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의견입니다. 도라는 것은 유와 무 모두다. 즉, 무이기도 하고, 유이기도 하다.
내 생각은 다릅니다. <노자>에서 유, 무는 대부분 서술어(긍정, 부정/ 존재, 비존재)이고, 부분적으로 명사로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명사로 쓰인 경우는...
1. 무형과 유형의 준말이다.
40장;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천하의 만물은 유형(천지)에서 나오고, 유형은 무형(도)에서 나온다.
‘有生於無’는 가능하지만, ‘無生於有’는 불가능합니다.(무는 유의 근원)
2. 있음과 없음이라는 천지만물 단계의 보편적 상대론이다.
2장; 有無相生. 유와 무는 서로를 낳는다.
이 경우는 유와 무를 바꾸어도 같은 의미입니다. ‘有無相生’ = ‘無有相生’
3-a. 유형(천지만물 단계의 구체적 사물)의 虛와 實(빔과 참)을 의미한다.
11장; 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물건(실)의 이로움은 그 허를 쓰는 데에 있다.
이 단계는 유가 없이는 무도 없습니다. 이 11장 부분은 건축을 하는 한철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모던 건축의 대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도 <노자> 11장을 잘 인용했습니다. 건축은 실로서 허(공간)를 잘 만드는 기술이라 생각합니다.
사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Fallingwater" house
3-b. 여기서 '유'는 천하의 구체적 사건(정치, 경제 등)을 말한다.(무와의 대비가 아니다)
14장;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예부터의 도를 잡아 지금의 유(사건)를 다스린다.
1번과 2, 3-a, b번은 유와 무의 의미의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제 해석은 오히려 <노자>에 대한 일반적 이해입니다. 왜냐하면 <노자>의 대상은 기본적으로 왕(최고의 권력자)이고, 이들은 철학으로 <노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실용서로 읽기 때문입니다.
철학적 부분은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주장의 근거와 권위로서 제시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철학적 부분을 연구하여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고, 노자 사상을 확장할 수는 있지만, 그게 <노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진; "공간(허)는 예술(건축)의 숨(생명)이다"
천지 만물 단계(有形)의 ‘유, 무’의 예를 봅시다.
<노자> 11장
1. 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2. 埏殖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3.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4.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여 있다. 바퀴(수레)의 쓰임은 그 비어있음에 있다. 그릇, 방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물건(실)이 이로운 것은 그 허(빈 공간)을 잘 쓰는 데 있는 것이다.
11장 왕필주
毂所以能统三十辐者无也.以其无能受物之故.故能以寡统众也.木埴壁所以成三者.而皆以无为用也.言无者有之所以为利.皆頼无以为用也.
바퀴통이 30개의 바퀴살을 통제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무가 만물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은 것으로 많은 것들을 통제할 수 있다. (가운데 있는 왕이 무위하면 주변 정치세력이 저절로 귀순한다는, 왕과 제후의 관계를 비유한 정치적 해석이고 약간 오류, 왜냐? 여기서 바퀴통의 무는 바퀴살이 아니라 축이 꽂히는 곳. 그래야 수레가 굴러 가니까...)
‘허’보다 '실‘에 더 신경과 비용을 쓰는 것을 ’사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검약‘, 이것도 노자의 주제의 하나입니다.(59장; 治人事天莫若嗇, 67장; 我有三寶, 持而保之,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
<노자>에서 1장과 관계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도’에 대해 말하는(비유, 역설, 부정적 서술) 구절들을 봅시다. 이거만 지나가면 <노자>는 별 거 아닙니다.
4장
1. 道沖而用之, 或不盈.
2. 淵兮, 似萬物之宗,
3.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4. 湛兮, 似或存.
5.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1. 도는 비어 있어서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다.
2. 깊은 것은 마치 만물의 제일 큰 어른과 같다.
3.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얽힘을 풀며, 빛을 조화롭게 하고, 티끌을 고르게 한다.
4. 맑아서 마치 있는 것 같다.
5. 나는 그것이 누구의 자식인지 모른다. 마치 최고신보다도 앞서는 것 같다.
<노자>에는 단정 짓는 표현이 별로 없습니다. 자기의 통찰을' 그런 것 같다'고 모호하게 말합니다.(或, 似, 象, 若, 如) 여기서 ‘沖’ 자는 ‘그릇 빌 충盅’ 자의 가차자입니다. 한 마디로 만물의 始, 母, 宗로서의 도는 무형이라는 것입니다.
중국 고대 商나라에서도 인격신과 비슷한 上帝(=天)가 있었습니다. 왕을 이 상제의 자식이라 여기고 그 이름을 天子라고 한 것입니다. 권력의 정통성과 권력제한 방식을 종교에 두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상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되면서 종교적 의미의 天(하늘)이 인문 문화의 영향으로 도덕적 天(하늘은 덕 있는 자에게 복을 내린다)이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4장에 나오는 ‘象帝之先’이라는 말은 상제보다 도가 선재한다는 것입니다. ‘모양 象’ 자를 써서 단정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자가 上帝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일반적 종교관에 맞춘 표현일 뿐입니다.
<노자>에서의 天은 대부분 자연적 의미입니다. 하늘은 인간에게 무관심하다.(5장; 天地不仁/ 천지는 무정하다. 79장; 天道無親/ 천도는 친한 게 없다) 때가 되면 비가 오고, 계절이 바뀌는 것이지 인간이 농사지으라고 계절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애인과 헤어졌다고 하늘에서 비가 오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하늘은 착한 놈에게 상주고, 악독한 놈에게 벌주는 것이 아니다.
하늘은 그냥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천지, 즉 자연)은 크고 인간은 거기서 나온 것이다.(5장;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그리고 인간은 그 일부이기 때문에 거기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하늘의 변화의 원리(이것을 天道라 한다)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그 중 오래갈 수 있는 방법(7장; 長生, 長久)이다.
<노자> 6장
1. 谷神不死, 是謂玄牝.
2. 玄牝之門, 是謂天地之根.
3. 綿綿若存, 用之不勤.
1.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가믈한 암컷이라 한다.
2. 가믈한 암컷의 문을 천지의 뿌리라 한다.
3. 이어지고 이어져서 마치 실재하는 것 같고,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다.
곡신, 현빈, 母, 根, 樸(통나무), 一, 모두 도의 비유입니다. 비유는 말로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나타내는 다른 방식입니다. <노자>에서는 특히 여성적 비유가 많습니다. 이점도 노자의 대상과 관계됩니다.
생명이 있는 만물은 모두 죽습니다. 정의상으로도 그래야 생명이니까... 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사실이라기보다 도는 만물을 생산하고, 그래서 만물보다 우선하고, 차원이 높다는 가설적 표현입니다. 그래서 천지만물의 뿌리(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도는 무형이라 우리가 생각하는, 쓰면 닳는, 일반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도를 아무리 써도 도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노자> 14장
1.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2.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3. 其上不皦,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4. 是謂無狀之狀, 無物之狀, 是謂恍惚,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5.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1. 도는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고, 잡으려 해도 안 잡힌다. 그래서 이, 희, 미라 한다.
2. 이 세 가지는 말로 따질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섞여 있어서 하나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함께 섞어서 하나로 여긴다)
3. 그 위는 밝지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않다. 이어지고 이어져 이름이 없고 무엇이 없는 데로 돌아간다.
4. 이것을 형상 없는 형상이라 하고, 무엇이 없는 모양이라 한다. 이것을 홀하고 황하다 하며, 맞이하려 해도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쫓아가도 그 뒤를 볼 수가 없다.
5. 예로부터의 도를 잡아, 지금의 있음을 다스린다. 이로서 옛 원래의 상태를 알 수 있으니 이를 도의 실마리라 한다.
이 장이 ‘만물의 근원인 도’에 대한 묘사입니다.
한마디로 ‘도는 물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노자는 도를 직접 묘사할 수 없으니 도가 아닌 것을 자세히 묘사하고 도는 그것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힙니다. 이걸 反顯法이라고도 합니다.
사진; 카카오 프로필(움푹 들어간 점은 몇 개?)
만물은 태양 아래서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둡습니다. 인간은 진화적으로 천지(지구)의 이런 조건에 적응돼 있기 때문에 ‘노자의 도’와 같은 고차원적인 발상(있기는 한데 형체는 없다)에 익숙치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것을 물화하고 거기에 인격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친근하기도 하고 쉽게 이해 가능하니까...
이건 기독교의 신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 인격성은 차치하고 예수 봤다는 신자들이 많으니... 불가능합니다. 뭔가 열렬히 보고 싶어서 보인 듯 한 걸(눈감고 원하면 뭔가 떠 오름) 예수로 해석하는 겁니다.
“No one has ever seen God.” 신약 <요한복음>의 말입니다. 이건 ‘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도를 파악하면 현금의 사건과 상태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겁니다.
‘執古之道’ 여기서의 '옛 古' 자는 원래는 '이제 今' 자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마왕퇴 노자>에서는 '今지도', <북대노자>에서는 '古지도'로 돼 있습니다.
이 문제는 <노자> 이해에는 큰 상관이 없으나 당시 정치적으로는 대단히 큰 문제였습니다. 왜냐? 유가와 법가의 투쟁과 관계됩니다.
유가는 옛날의 성인과 그 말씀이 하늘이고, 변할 수 없는 천리(하늘의 이치)입니다. 법가는 다릅니다. 시대가 달라지면 당연히 사람의 삶의 조건도 달라지니 일을 처리하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아무래도 법가의 생각이 옳은 듯... 그러니 예전에는 글자 하나에도 파가 갈리고, 생사도 갈릴 수 있는 것입니다.
<노자> 21장
1. 孔德之容, 惟道是從.
2. 道之爲物, 惟恍惟惚. 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物. 窈兮冥兮,其中有精, 冥兮窈兮, 其中有信.
3. 自古及今, 其名不去, 以閱衆甫. 吾何以知衆甫之狀哉? 以此.
1. 큰 덕의 모습은 도를 따른다.
2. 도라는 것은 황하고 홀하다. 그 가운데에 어둡고 잘 보이진 않지만 무언가 진짜가 있고, 믿을 수 있다.
3. 옛날부터 지금까지 존재하는 도로서 뭇 시작을 알 수 있다.(줄여서 의역)
덕은 도가 세계에 드러난 것입니다. 천지 만물이 도를 따르면 덕이 있는 것입니다.(德, 得也) '그 사람 덕이 있다' 할 때의 의미가 아니라, 한마디로 만물이 도를 얻으면(體得) 덕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물에 있어서 도와 덕은 같은 것입니다.
이 장도 역시 도는 일상적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진실이라는 강조...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여기 21장의 '道之爲物', 직역하면 '도의 사물됨'과 25장의 '有物混成', 직역하면 '혼성된 사물'을 예로 들어 ‘도가 사물이 아니라 무형, 무명이라는 주장’이 반박될 수 있다고 합니다. 억지 주장입니다.
여기서의 ‘물’이라는 말은 영어의 ‘thing’과 같은 표현으로 '그런 것', '어떤 것'이라는 표현 방식에 불과합니다. '것'이 사물이 아닙니다. 그냥 언어상의 표현 방식... 사랑이라는 것, 슬픈 감정 같은 그 어떤 것이 사물이 아닌 건 다 아는 사실... 여기서도 그렇습니다.
'自古及今, 其名不去'
‘옛부터 지금까지’ 별 문제 없습니다. 그런데 <마왕퇴노자>에서는 14장과 같이 今이 먼저, 自今及古... 이상하게 여기서는 <북대노자>도 自今及古... 이점도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또 이렇게 따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도는 이름이 없다’(32장; 道常無名)면서 여기서의 '그 이름(其名)'은 뭐냐? 이건 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냐? 고 묻습니다. 그 이름이 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인 '도' 라는 글자는 그냥 부호입니다. 내가 말하고자하는 '그 거, 그 어떤 거' 라는 뜻... 이 걸 불교에서는 방편方便이라 합니다.
사진; <곽점 노자> 현행본 25장.
<노자> 25장
1. 有物混成, 先天地生.
2. 寂兮廖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3.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4.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5.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
6.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1. 도는 천지보다도, 上帝(5장)보다도 선행한다.
2. 비교할 게 없고, 어디나 있다. 천하 만물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3. 억지로 이름은 道 또는 大 라 부른다.
4. 큰 것(도)은 운동하고, 운동하면 극에 다다르고, 극에 다다르면 되돌아 온다.
5. 온 우주에는 도, 하늘, 땅, 그리고 왕을 포함한 4가지 큰 것이 있다.
6. 사람은 땅을, 땅은 하늘을 , 하늘은 도를, 도는 '스스로 그러함'에 따른다.
<노자> 25장은 노자의 철학적 의미(도는 무명, 만물의 총근원, 총근거. 도법자연)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장이라고 생각합니다.
bce 300년 경(이 연대는 매장 연대, 책의 필사 시기는 더 이를 수 있음, 당연히 저작 시기는 그보다 더 이르고...)의 <곽점노자>에도 도에 대한 철학적(형이상학적) 구절로는 유일하게 실려 있습니다.
‘스스로 그러함’은 도, 하늘, 땅, 왕과 같은 4대에 포함되지 않는다. 왜냐? ‘스스로 그러함’은 우주 모든 존재와 생성의 바탕이 되는 근본적 동력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은 충분히 그럴 듯하게 설명할 수는 있으나, 어차피 형이상학적(현실적, 경험적 증거 없이 그 자체의 논리를 머리 속으로 구성)인 문제라 그렇다면 그런 거고, 아니라 해도 어쩔 수 없는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이런 구절이 정치적 실용서라 힐 수 있는 <노자>에 있는가?
1. 주장(자연무위, 유약)의 근거다.(받아들이기 나름)
2. 주장에 권위를 부여한다.(뭔가 있어 보여야 관심을 가진다)
3. 이렇게 세상을 이해하는 것(세계관)이 건전하다.
저는 3번에 역점을 둡니다. 노자는 인간 세계의 질서(46장; 天下有道) 형성에 만물(백성)의 자주성과 자발성을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4. 왕의 자의적이고 강제적 권력 행사를 제한하려는 목적이 있다.
왕이 따라야 할 더 큰 것이 있다는 경고... ‘地’, ‘天’, ‘道’, 그리고 '萬物(백성, 民)之自然' 그렇게 하지 않으면?
<노자> 72장, 74장, 75장 과 같은 사태 발생.
<노자>72장; 民不畏威, 則大威至,
백성들이 권위를 인정치 않게 되면 큰 위협이 발생하게 된다. 大威는 크게는 叛亂을 말한다고 봅니다.
5. 천도(자연의 길)는 순환한다.
그러므로 왕의 강함도 시간이 가면 쇠퇴할 수밖에 없다. 도를 따르는 것이 그것을 지연시키는 방법이다. (7장; 長久, 長生)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은 <노자> 40장; '反者, 道之動'과 같은 의미입니다. 또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道曰動, 動曰極, 極曰反.’ 여기서의 '가로 曰' 자는 즉則이라는 뜻입니다. 후대에는 ‘物極必反’(返) 이라는 용어로 정리.
<노자> 40장의 '反者, 道之動'의 뒷 부분인, '弱者, 道之用'이 바로 위와 같은 이치에 따라 왕이 취해야 할 태도와 행동 방식입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柔弱' 이것이 <노자>의 대주제 중 하나!!! <노자>의 대상이 누구냐는 것을 고려 않으면 <노자>에 이 말이 왜 그렇게 여러 번 나오는 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王(人)法自然.(25장)-->王(聖人)
輔萬物之自然, 而不敢爲.(49장)
왕은 반드시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우선해야 하고, 보조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망한다.
저는 이게 노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자> 34장
1. 大道氾兮, 其可左右.
2. 萬物恃之而生而不始, 功成不名有.
3. 衣養萬物而不爲主, 常無欲, 可名於小; 萬物歸焉而不爲主, 可名爲大.
4. 以其終不自爲大, 故能成其大.
1. 큰 도는 범람하는 물과 같아서 어디에나 있다.
2. 만물은 이에 의지해 생겨나지만 도는 자기가 시원이라 하지 않고, 공이 이루어져도 그 명예를 취하지 않는다.
3. 만물을 길러주면서도 주인이라 하지 않고, 욕심이 없으니 작다 할 수 있고, 만물이 그로 돌아가도 주인이라 하지 않으니 크다 할 수 있다.
4. 끝내 자신을 크다 하지 않으므로 그 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넘칠 氾’ 자는‘ 汎’ 자를 쓰기도 합니다. '大道氾兮, 其可左右.'는 25장의 ‘周行’과 같은 의미,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無所不在 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형, 무명’인 도는 자기(7장; 無私, 49장; 聖人無常心)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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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제 프로필 사진을 보면 동그라미가 돌출된 것, 움푹 들어간 것이 구별될 것입니다. 그리고 움푹 들어간 것의 갯수를 세어 보십시오.
5개. 맞습니다. 이번엔 스마트폰을 180도 돌려놓고 움푹 들어간 것의 갯수를 세어 보십시오. 놀라는 분도 계실 겁니다.
"Too see is to believe.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보았다고 다 믿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감각 중 그중 확실하다는 시각도 우리를 속입니다. 뇌의 작용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 뇌로 보는 것입니다. 뇌는 내 의지대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뇌 자체의 논리에 따릅니다.
저는 지나친 확신이라는 것은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가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림을 180도 돌려보면 왜 움푹 들어간 것의 갯수가 달라질까요?
지구에서 대낮에는 항상 해가 하늘(上)에 떠있기 때문입니다. 해가 위에 있으면 사물의 윗 부분은 밝고, 그림자 지는 아랫 부분은 어둡습니다.
이것은 수만 년의 경험을 통해 뇌가 자동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우리가 평면에 그려진 사물을 보더라도 뇌가 무의식적으로 입체화하고, 상하 구별을 합니다.
<노자> 21장
道之爲物.... 其上不曒, 其下不眛.(교는 밝을 교)
‘도’라는 것은... 그 위가 밝지 않고, 그 아래가 어둡지 않다.
한마디로 ‘도’는 사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는 사물을 생성하고, 기르는 사물보다 높은 수준의 그 무엇(x)이라, 이름 지을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추상명사라는 개념에 익숙치 않아서 대체로 이름은 사물을 가리키는 것, 아니 사물 그 자체라고 까지 생각했습니다. 왕이나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쓰지 못하게 한 전통(피휘避諱)도 이런 의식의 반영입니다.
누구일까요?
오바마 입니다. 한번 뒤집어 보십시오.
우리는 사람의 얼굴을 거꾸로 보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된 얼굴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뇌의 오랜 진화적 적응의 결과입니다.
12편; 노자는 강자의 사상 1
<노자>의 주제는? 간단히 말하면...
대상: 강자 (대국의 왕, 조직 최고의 권력자의 리더십)
목적: 천하 태평 (민중의 자발적 질서와 생활 안정)
1. 지나친 사치와 자기 과시는 패망의 길이다.(자연무위, 유약) -> 강자(리더)를 대상으로 한 경고와 조언
2. 음양론적 사고방식(보편적 인식론, 건전한 세계관) -> 인간 일반이 대상
내가 <노자>는 '강자의 사상'이라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즉 대상을 너무 한정한다고 세윤이는 좀 뭐라 합니다. 말하지는 않지만 ‘강자가 아닌 너는 왜 <노자>를 열심히 읽느냐?’는 의문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제 말씀은 <노자>에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지혜가 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제 대답입니다.
“나는 <노자>의 대상을 일단 한정하는 것이 <노자>를 오해하지 않는 기본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항상 강조하는 것이겠지... <노자>에도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 지혜가 있지만, <노자>를 읽을 대상은 일반인에 대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해... 물론 <노자>의 대상과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쓰였는 가는 다른 차원의 문제지...
우선, <노자>는 큰 규모(천하, 대국)의 사상이야... <노자>의 특색인 부분, 즉 ‘부쟁, 자연무위, 유약, 허정, 처하’ 등의 관념은 강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지... 나는 약자가 섣불리, 또는 적극적으로 흉내 내면 곧장 망하거나 권모, 처세술이 되는 것이라고 봐...약자는 먼저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를 찾아(이게 어려운 거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실력을 길러야지...
물론 <노자>는 그럴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 약자(民)를 위한 것이고...
<장자/ 소요유>에 이런 말이 있잖아...
適莽蒼者, 三飡而反, 腹猶果然., 適百里者, 宿舂糧., 適千里者, 三月聚糧.
교외에 구경 갔다 오는 데는 한 끼만 먹어도 배가 아직 부르고, 백리를 가려면 밤새 양식을 준비하면 된다. 그러나 천리를 가려면 양식을 석 달은 모아야 한다.
<노자>의 대상이라는 문제는 전에도 말했지만 <노자> 36장의 해석에도 관계되지... <노자>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이 장은 해석하기가 약간 곤혹스러운 점이 있지... 글을 표면적으로, <노자>의 대상을 생각하지 않고 보면 명백히 음모술, 권모술이니까...”
아래 글은 전에 보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사진; <장자철학>, <장자철학급기연변>
유소감(홍콩 중문대학 교수)의 <장자철학>(1990)은 <장자>를 읽는 분이면 반드시 한번 거쳐야 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북경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을 <장자철학급기연변(莊子哲學及其演變)>이라는 제목으로 1988년 출판한 것을 서강대학교 교수인 최진석이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영역되었을 정도로 평가받는 책입니다.
앞 편에서 얘기한 강신주의 <장자> 관계 연세대 박사학위 논문과 비교해 보면 그 양과 질의 격차에 놀라게 됩니다.
저는 출판 당시 이 책을 읽어 보았지만, 책 중에 언급된 <노자>에 대해서는 유소감의 이해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유소감의 이런 이해는 우리나라에서 2000년에 출판된 <노자철학>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노자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약(弱)으로써 강(强)을 이기고 패함을 돌려서 승리를 구하는 도로서, 그의 무위는 모순의 자연적인 전화(轉化)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장자철학>) p382
“일반인들이 ‘이반구정(以反求正)’하고 ‘이약승강(以弱勝强)’하는 방법을 뜻하기도 한다.” (<노자철학>) p176
사진; <노자고금>
그런데 몇 년 전 <노자고금(老子古今)>(2006, 중국사회과학출판사)을 읽어보니, 유소감이 당시의 <노자> 이해, 즉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철학’이라는 해석이 완전히 착오였다고 반성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노자고금>은 상하권 합쳐 1500페이지가 넘습니다. <노자>는 보통 5000자라고 합니다(老子五千文). 판본마다 글자 수가 약간 차이가 있어서 정확한 글자 수라는 것은 없습니다. <노자> 전문은 이 책을 기준으로 보면 5페이지 정도 분량입니다. 그런데 해설 책이 1500페이지(하편은 부록)라니,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대단한 작업입니다.
早年, 筆者曾以爲老子哲學代表弱者戰勝强者的利益需要(1988). 經過近十幾年來的認眞硏究, 發現早年擺老子哲學理解爲弱者的代表是完全錯誤的. 老子是“知其雄,守其雌”而不是“知其‘雌’”,守其雄. 所謂“柔弱勝剛强”不是無力對抗强者的權宜之計, 而是爲了“輔萬物之自然”, 是因爲聖人相信“弗爲而已, 則無不治矣”. (<老子古今>) 상권 p604,
나는 예전에 노자철학이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있는 대표적 방법이라고 생각했다.(1988년, <장자철학급기연변>) 그러나 10년 이상 연구한 결과 노자가 약자를 대표하는 철학이라는 것이 완전히 착오라는 것을 알았다.
노자는 "수컷을 알고 암컷을 지키면(知其‘雄’”,守其雌)"를 말하지 "암컷을 알고 수컷을 지키면(知其‘雌’”,守其雄)"을 말하지 않는다.
소위 '유약함이 견강함보다 낫다(柔弱勝剛强)"이라는 것이 무력한 자가 강자에게 대항하는 권모술수가 아니라,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돕는(輔萬物之自然)" 것이다. 그래서 성인이 "단지 무위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다."
위의 유소감의 자기반성이 나의 주장, 즉 ‘노자는 강자의 철학’이라는 관점이 옳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노자>의, 강자에 해당되는 지혜가 일반인에게도 대부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노자>의 특색인 강자를 상대로 한 조언이나 경고를 분별하지 않으면 상당한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노자>를 치국서(君人南面之術), 수신서(修道), 권모서(병법)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보면 어떤 시각도 다 옳고, <노자>에서 그 근거를 다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자>를 전체적으로 보고, <노자>의 대상을 고려한다면 <노자>는 정치사상, 즉 치국에 관계된 책입니다.
나는 “『노자』는 누구를 대상으로 쓰여 진 것인가?” 라는 질문이『노자』를 해석하는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표면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점을 전제로 이해해야 『노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권모술수’나 ‘음모술’이라고 하는 통행본『노자』36장을 전체적인 맥락 아래 어떠한 방식으로 해석할 것인가 판단할 수 있습니다.
<노자> 36장
1. 將欲歙之, 必固張之; 將欲弱之, 必固强之; 將欲廢之, 必固興之; 將欲奪之, 必固與之. 是謂微明.
2. 柔弱勝剛强.
3. 魚不可脫於淵, 國之利器, 不可以示人.
1번은 같은 형식의 네 가지 구절이니, 그 중 쉬운 구절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將欲弱之, 必固强之.’ 장욕약지, 필고강지.
당연히 이렇게 해석됩니다.
(상대를) 약하게 하려거든,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주어라.
사진: 모택동의 문화혁명 '혁명무죄, 조반유리'
<老子: 弱者之道>라는 중국 <노자> 해설 책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병법적 관점에서 <노자>를 해석합니다. 모택동도 노자를 병법으로 응용했다고도 합니다.(毛泽东说《道德经》是一部兵书) <노자> 전체와 관계없이, 또 36장의 나머지 구절과 관계없이 이 구절을 이해하면 옳은 해석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게 <노자> 전체와 그 대상을 고려하지 않은 부분적 이해로 보는 겁니다.
1. ‘欲’ 자의 해석
a. ‘하고자 할 욕’(의도, 의지/ intend, desire)
b. ‘되려고 할 욕’(상태의 변화/ what is going to)
'(상대를) 약하게 하려거든,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주어라.'라는 해석은 위의 a, 즉 ‘欲’ 자의 일반적인 해석인 '하고자할 욕'을 따른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b를 택하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장차 약하게 되려고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강성해 지기 마련이다."
<노자>는 강자를 대상으로 그 강성함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을 경계한다면 이 해석이 옳다고 봐야합니다. <노자> 전체를 음모술이 아니라고 본다면 더욱 그렀습니다.
2. ‘物極必反’의 이치로 해석: 사물은 극성함에 이르면 필연적으로 그 반대편으로 돌아간다.
“物極必反물극필반”, 여기서의 ‘反’ 자는 ‘돌이킬 返’ 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일반적 지혜입니다.
그러나 노자는 권력자의 ‘陽極’의 상태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이것(한계에 가까운 기세)을 노자는 ‘剛强’이라 하는 것입니다.
‘물극필반’은 강자에 대한 경고도 되지만, 약자에게도 해당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약자의 경우는 어려운 상태에서 잘 견디고 버티다 보면 상태의 호전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배가 너무 불러서 죽는 경우는 별로 없어도, 배가 너무 고파서 죽는 경우는 많습니다.
3. 강자를 대상으로 한다면 "(상대를) 약하게 하려거든,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주어라."란 해석도 가능합니다. 이건 약간 종교적 냄새가 나는 제 의견입니다.
내가 얘기하는 정도의 강자는 음모를 쓰지 않더라도, 즉 힘으로 눌러도 상대를 굴복시킬 수 있는 정도의 힘을 자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데 그런 강자인 내가 "누구를 약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난다면 먼저 상대를 강하게 해주어 봐라. 그러면 쌍방에 바람직한 심적 변화가 있을 수 있다. 그게 결과적으로 부작용이 덜한 방식이다."라는 겁니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어라’를 좋게 해석하는 겁니다.
그런데 약자가 강자를 더 강하게 해주면? 말하나 마나입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From this a general rule is drawn which never or rarely fails: that he who is the cause of another becoming powerful is ruined; because that predominancy has been brought about either by astuteness or else by force, and both are distrusted by him who has been raised to power.
이런 사실로 부터 절대, 또는 거의 실패하지 않을 일반 법칙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상대편을 강하게 만드는 자는 패망한다.
왜냐하면 강한 세력은 권모술수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모두 그런 강대한 세력을 가진 자에게 의심받기 때문입니다.
이런 걸 떠나 <노자>에는 천하, 대국, 성인(이상적 정치 실력자)이라는 말의 횟수 만 봐도 그 대상을 알 수 있습니다. (天下 63회, 大國 6회, 聖人 31회) 천하를 말하는 건 지금으로 보면 말끝마다 ‘전 지구’, ‘전 인류’를 들먹이는 것입니다.
<노자>는 전국시대(주나라 봉건 제도가 무너지고 대국 간의 천하 통일 전쟁과 중앙집권적 전제정치 시작)에 가장 강성한 대국의 왕과 그 측근 최실력자에게 쓴 책입니다. 물론 제자백가서가 대부분 군주에게 하는 조언이지만 <노자>는 그 중에서도 대국 군주를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진시황과 이사가 그 가장 적합한 대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소설을 쓴다면? 저는 현행본과 같은 분량의 <노자> 성립을 전국시대 중후반기로 보기 때문에...
순자의 제자 두 명인 한비자, 이사에 더해 한명을 더 추가하여, 동문수학하던 이 무명인 도가취향의 친구가 부분적으로 유전되는 <노자>의 단편을 모으고, 추가, 편집하여 오늘날 보는 <노자>를 정립했다.
그리고 <여씨춘추>가 저작되던 시기에 전국칠웅, 특히 강대국인 秦, 齊, 楚에 전했으나 별 무소용. 이것에 가장 가까운 것이 오늘날 보는 <마왕퇴 한묘 백서 노자>라고 써 볼듯 합니다.
내가 <노자>의 대상을 강자라고 강조하는 개인적 이유도 있습니다. 내 경험 때문에... 나도 일찍 <노자>를 읽고 잘못 이해하여 소극적 삶의 태도로 살은 게 아닌가 하는 반성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흉내 비슷하게 내느라 없으면서도 있는 척, 또 마치 내가 마음이나마 부자인 것처럼 행세하고 산 게 아닌가 하는 반성도 되고...
아까 <노자> 36장 얘기 계속...
2. 柔弱勝剛强.
여기서, ‘유약’의 ‘약’은 ‘將欲弱之’의 ‘弱’과는 의미가 다른 겁니다. ‘장욕약지’의 ‘약’은 힘의 강약, ‘유약’의 ‘약’은 강자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유약승강강’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강자의 태도로는 유약한 것(음적 태도, 소극)이 剛强(양적 태도, 적극)보다 낫다. 내가 강자가 아닌데도 이런 태도를 가지려던 건 오해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가정이나 일정 사회조직에서는 일시적으로라도 강자일 수 있고, 강자가 잘 못 했을 때의 문제는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사진> 문제의 대통령, 조지 부시
<노자>는 강자를 대상으로한 ‘자연(스스로 그러함)->유약->무위’의 사상입니다.
다음은 <노자>에 나오는 '유약승강강'에 관계된 구절.
30장; 果而勿强, 物壯則老, 是謂不道, 不道早已.
결과가 좋아도 강함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사물이 강장해지면 쇠퇴하고 이것은 도가 아니다. 도가 아니면 일찍 망한다.
36장; 柔弱勝剛强.
부드럽고 약한 태도가 견강한 태도보다 좋은 것이다.
40장; 反者, 道之動, 弱者, 道之用.
되돌아감이 도의 운동이고, 유약함이 도의 쓰임이다.
42장; 强梁者, 不得其死, 吾將以爲敎父.
강하고 뻣뻣하면 제명에 죽지 못한다. 나는 이걸 가르침의 으뜸으로 삼는다.
55장; 心使氣曰强, 物壯則老, 謂之不道, 不道早已.
생각이 기를 누르는 것을 억지라 한다.
76장; 强大處下, 柔弱處上.
강대한 태도는 아래고, 유약한 태도가 윗 길이다.
78장; 弱之勝强, 柔之勝剛.
유약한 태도가 견강한 태도보다 좋은 것이다.
<노자 제대로 읽기>의 한 구절
“『노자』는 힘 있는 사람(강자)의 사상이다. 그러나 천하(전체로서의 사회)는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유기체적 조직이므로, 최고 권력자 한 사람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정치 행위는 오히려 천하에 악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권력자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목표 지향적이고, 강제적인 정치 행위를 노자는 ‘위(爲)’라고 하고, 도(道)에 근거한 정치 행위를 ‘무위(無爲)’라고 하는 것이다.”
중국 진시황제 통일 이전인 先秦시대에 ‘王’은 원래 周나라 왕, 단 한 명(余一人)입니다. 나머지는 제후... 전국시대가 되면서 종주국인 주나라는 쇠퇴... 제후국 중 대국이 여럿 생겨(秦, 齊, 楚) 왕을 참칭僭稱하면서 용어 혼란... 저는 <노자>가 이 시기의 혼란상이 시대 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명목상의 천하 종주국이 있으나, 몇 개의 대국이 서로 싸우고 소국들을 합병하는 천하 통일로 가는 상황... 과거 봉건제가 붕괴되고 중앙집권적 영토국가와 군현제가 성립돼 가는 과정에서 그 승리자인 진시황제는 그 위치는 <노자>의 대상이었으나, 통치방식은 정확히 그 반대 길을 갔습니다.
사진; 서안, 진2세 호해묘, 秦殤(진상, 진나라는 일찍 망했다.)
내가 <노자>는 진시황제 정도가 보는 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 시대라면 누구가 대상일까? 물론 그런 정도의 권력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사회 조직 - 가정이든, 회사든, 정부든 간에 진시황제 이상의 폭정을 휘두르는 리더는 많습니다. 세계 최고의 민주국가라는 미국에서도 제왕적 대통령(imperial president)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이런 인간들이 노자의 경고를 심각하게 들을 리는 없고, 오히려 그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자기 반항의 이유를 <노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그냥 놔두면 좋아 질까? 노자는 놔두면 좋아진다는것 같은데... 아닙니다. 강자의 태도와 정치행위에 가장 큰 영향을 받습니다. 강자는 자연 세계에도 있고, 인간 세계에도 있지만, 리더, 강자의 시간은 제도적 보장으로 인해 인간 사회에서 길고 규모가 크며, 그 나쁜 충격은 오래 갑니다.
그래도 인간세는 과거보다 좋아 졌습니다. 왜?
반항자들 덕분입니다. 잘못된 리더에 대한 목숨을 건 반항, 이게 인간세를 그나마 좋게 만든 동력이라고 봅니다. 그런 판단에 <노자>가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진; 문제의 대통령, 이명박
혹, 마키아벨리의 <군주론(The Prince)>과 <노자>를 비교하기도 하는 데 차이를 말하면 모르겠지만, 유사성을 말한다면 그 둘 다 모르는 겁니다.
'君主'라 번역한 'prince'(이것도 번역이지만)는 <노자>에서 말하는 王이 아닙니다. 대국의 합병 대상인 소국의 군주입니다. 전국(the Warring State)시대에 소국은 그 생존이 무엇보다(도덕과 양심, 신의 뜻, 뭐 그런 거 등등) 우선입니다.
<군주론>은 소국인 도시국가 피렌체의 군주를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이 책의 서양에서의 가치는 교황청의 강요된 카톨릭 윤리보다 도시국가의 생존이 더 중요하다, 즉 종교보다 현실이 더 중요하다는 함축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황청은 <군주론>을 금서로 지정했습니다. 그런 종교적 문제가 없는 우리에게는 <군주론>이 그렇게 큰 의미가 있을 까 의문입니다.
사진; 니콜로 마키아벨리
Oxford dictionary 에 'prince'에 대해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군주론>에서의 의미는? 저 그레이스 켈리가 시집간 모나코(인구; 2014년, 3만 7000명)의 레이니에公 정도를 말합니다. 하긴 그레이스 켈리도 모나코 왕비라고 추켜 주어 불리긴 한 듯 합니다.
A male monarch of a small state, actually, nominally, or originally subject to a king or emperor:
‘he was the prince of a small kingdom that was now part of Pakistan’
왕이나 황제에게 실질적으로, 명목상으로, 또는 원초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소국의 남자 군주:
‘그는 현재는 파카스탄의 일부인 소국의 군주였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어록 몇 가지... 약소국의 위급한 상황에서의 현실적 냉정함이 느껴집니다.
Politics have no relation to morals.
정치는 도덕과 무관하다.
There is no avoiding war; it can only be postponed to the advantage of others.
전쟁은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전쟁은 상대가 유리해 질 때까지만 연기될 수 있다.
It is better to be feared than loved, if you cannot be both.
사랑과 공포, 둘 다 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공포를 택해야 한다.
Hatred is gained as much by good works as by evil.
증오는, 아무리 잘 해줘도 악하게 했을 때만큼이나 생길 수 있다.
If an injury has to be done to a man it should be so severe that his vengeance need not be feared.
누구에게 상처를 주어야한다면 복수를 할 마음 조차 생길 우려가 없을 정도로 가혹하게 해야 한다.
The first method for estimating the intelligence of a ruler is to look at the men he has around him.
통치자의 현명함을 평가하는 첫 째 방법은 주위 인물을 살펴보는 것이다.
혹, <군주론>을 읽고 싶다면 차라리 <한비자>, <손자병법>을 읽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하긴 <군주론>은 100페이지 정도의 소책자이니 한번 읽어봐도 괜찮습니다. 거기에는 수십 명의 인물과 많은 지명이 등장합니다. 그에 비해 <노자>에는 고유명사가 없습니다. 이점은 두 책이 지향하는 바와 규모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노자>는 5천 여자 밖에 안 되지만...
<노자>에서의 '유약'과 '처하'는 강자(대국)의 태도입니다.
사진; <두브로브니크는 그 날도 눈부셨다>
유럽의 도시국가 얘기를 하니 여행가, 저술가인 도올서원 권삼윤 선생이 생각나네... 술, 담배 전혀 안 하고, 전 세계 여행하고, 기행문 책 쓰시던 분이 간암으로 사망... 요즘 시대까지 버티셨으면 경제적으로도 좋았을 텐데...
사진; 비오는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유럽 도시들을 보면 중국과 비교하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노자>가 대비되는 것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당시 유럽은 봉건제 도시국가.(세력의 대소는 있겠으나 왕이 수백 명, 城의 발달). 중국 고대는 일찍부터 중앙집권적 전제국가...
마키아벨리 <군주론>; 약자의 생존 전략
<노자>; 최강자의 통치 철학
생명, 생존보다 더한 가치는 거의 없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약자(소국)가 생존을 위해서는 계략이든, 음모든, 잔혹함이든 간에 거의 무슨 일이든 허용된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점이 사람들이 ‘마키아벨리즘’, 즉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또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라고 마키아벨리가 보편적 주장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책의 대상이 중요합니다. 마키아벨리는 약소국 군주에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수단으로도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을 가진 강자의 지배 원칙은 그와 달라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강자 자신도 오래 갈 수 있습니다.(<노자> 7장; 長生, 長久) 저는 ‘목적을 위해서는 목적을 버려야 한다.’는 게 노자의 역설적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노자> 3장, 63장; 爲無爲, 무위를 爲하라)
강자가 제일 두려워 하는 것은? 본인의 죽음, 외국과의 전쟁, 신하의 하극상, 백성의 반란 등. <노자>는 이것을 줄일 수 있는 태도(유약)와 행동 원칙(무위)을 제시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마키아벨리 : 노자 = 소도시국가 피렌체 : 천하(Tian xia)
마키아벨리와 노자는 누가 옳다는 게 아니라, 그 상황과 스케일이 다른 겁니다.
노자는 대국과 소국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노자> 61장
1.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牝常以靜勝牡, 以靜爲下.
2. 故大國以下小國, 則取小國; 小國以下大國, 則取於大國, 故或下以取, 或下而取.
3. 大國不過欲兼畜人, 小國不過欲入事人.
4. 夫兩者各得其所欲, 大者宜爲下.
1. 대국은 강의 하류가 되어야 한다. 하류는 천하가 교류하는 곳이고, 천하를 받아들이는 암컷이다. 암컷은 항상 고요함으로 수컷을 이기는데 고요함으로 아래가 되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대국은 소국의 아래가 되어 소국을 취할 수 있고, 소국은 대국의 아래가 되어 대국에 취해질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래가 되어 취할 수도 있고, 아래에 있으므로 취해지는 것이다.
3. 대국은 사람들을 같이 거느리려 할 뿐이고, 소국은 사람 밑에 들어가 섬기려 할 뿐이다.
4. 무릇 양자가 모두 원하는 바를 얻으려면, 대국이 마땅히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
'取' 자의 해석; 여기서 '취할 취' 자는 '탈취하다'라는 의미보다 '귀순하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노자>에서 대국이 소국을 취한다는 것은 자기 영토에 편입하는 것이 아니라 대국의 영향권 하에 둔다는 뜻입니다.
<노자> 80장; 小國寡民
나라의 사이즈를 줄이고. 인구도 적게 하라.
<노자>라는 책은 1인, 일시에 지어진 책이 아니기 때문에 앞, 뒤가 안 맞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小國寡民'이라는 주장과 천하를 다스리려는 大國의 왕을 대상으로 한 책이라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소국과민’은 현재의 대국이 영토와 인구를 더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을 줄이라는 요구입니다.
大者宜爲下
강자는 자기를 낮추어야 합니다.(虛靜, 柔弱, 處下)
7장; 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성인은 자기를 뒤로 함으로써 앞이 되고, 자기를 밖으로 함으로써 거기에 남는 것이다.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8장;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가장 잘 하는 것은 물이 하는 것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싸우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39장; 侯王無以貴高, 將恐蹶. 故貴以賤爲本, 高以下爲基.
제후와 왕이 하나를 얻음이 없이 귀하고 높은 자리에 있으면, 반드시 떨어진다. 그러므로 귀한 것은 천한 것을 뿌리로 삼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을 바탕으로 한다.
66장;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 故能爲百谷王.
강과 바다가 온갖 계곡의 왕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자기를 잘 낮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갖 계곡의 왕이 된다.
67장; 我有三寶, 持而保之.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
나에게는 세가지 보물이 있다. 첫 째 자애로움, 둘 째 검소함, 셋 째 천하에 먼저 나서지 않는 것이다.
68장; 善用人者爲之下, 是謂不爭之德, 是謂用人之力, 是謂配天, 古之極.
사람을 잘 부리는 사람은 그 사람의 아래가 된다. 이것을 싸우지 않는 덕이라 하고, 사람을 쓰는 힘이라 한다. 이것을 하늘에 들어맞는 다고 하는 것이다. 예부터의 지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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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道德經四帝注>: 唐玄宗,宋徽宗,明太祖,順治帝
●有人将《道德经》称为修道书,有人将它称为权谋书,有人称它治国书;
●它是一本怎样的书?听听皇帝们如何说!
●历史上唯一一部由不同时空的四位皇帝像做学问一样注解的经典;
●中兴之帝李隆基,亡国之君赵佶,开国皇帝朱元璋,胸有大志颇感无奈的福临。四位皇帝跨越不同的时空,走到一起,因为有了《道德经》,让现代的人们共同分享他们的所思所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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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경대 교수 王博: 《道德经》是怎样一部书
作为传统中国最重要的几部经典之一,《道德经》(又称《老子》)在中国几乎是家喻户晓,长期影响了人们的思想和生活。
从这部书问世的春秋战国之交起,一直到现在约两千五百多年的历史中,它有过数以千计的注释者。除了最著名的河上公、王弼之外,竟然也可以发现好几位皇帝的名字:梁武帝、唐玄宗、宋徽宗、明太祖、清世宗等;
양무제, 당현종, 송휘종, 명태조, 청세조 등이 <노자> 주를 달았다.
由于唐朝的皇帝自认是该书作者老子的后裔,它还有过被当作“红宝书”收藏并阅读的时代;
이씨의 당나라 때는 노자(李耳)를 조상으로 삼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홍보서'로서 <노자>를 읽었다.
这部书也有着不同的面孔,既是哲学的宝典,又是宗教的圣典;철학서?, 종교 경전?
它是被翻译成外国文字种类最多的中文书籍;甚至在二十世纪的出土文献中,它现身的次数也是最多的,从敦煌卷子、马王堆帛书到郭店竹简,都可以看到它的影子。这究竟是一部怎样的书呢,其主旨和精神何在?
<노자>의 주제와 정신은 무엇인가?
- 君人南面之术 <노자>는 왕의 통치술이다.
- 柔弱的意义
- 清冷的智慧
- 天道的敬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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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红宝书
-《毛主席语录》是二十世纪六十年代初编辑出版、文化大革命期间风靡全国乃至世界的毛泽东主席名言警句选编本。发行量达50亿册,因为最流行的版本用红色封面包装,又是红色领袖的经典言论,所以文化大革命中被人们普遍敬称为“红宝书”,经历过文化大革命的人们对此记忆犹深。
- 红宝书是文革中对毛泽东著作的称呼。但在特定情况下,红宝书特指《毛主席语录》及“三合一”等袖珍、简易的毛泽东著作选编本。2000年以来,一些出版商也会将所出版的书籍冠以“红宝书”的名称以示权威性。
13편; 노자는 강자의 사상 2
<참고 자료> 프레시안 기사
권력의 함정
미국 스탠포드대 연구에서 대학생들에게 토론을 시켜놓고 그 중에 한 명을 ①리더로 지목했다.
리더에게는 누가 토론을 잘하고 못 했나 판정하는 권한을 주었다. 자유롭게 먹을 거 먹으며 토론하라고 과자를 접시에 담아 두었는데 가장 많이 먹은 사람은 역시 판결권을 가진 리더였다.
실컷 먹고 부스러기도 마구 흘리고, 트림도 하며 ②거들먹을거리고, 리더가 되기 전과 비교해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현상을 보였다.
연구진은 권력을 주면 ③3가지 변화가 발생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 자기가 하고 싶었던 것에 집중한다.
2) 아래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둔감해진다.
3) 자신과 측근들은 규율을 지키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지도자가 권력을 쥐면 빠지는 심리적 함정들이다. 지도자는 ④지혜와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니 그걸 가진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면 된다. 그게 어려우면 ⑤민심을 살피고 좇으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그리 현명한 건 아니라는 엄정한 ⑥주제파악이 이뤄져야 시작할 수 있다.
①; <노자>는 ‘강자의 사상’이다. 강자를 일반화하면 어떤 사회조직이든 간에 최상위 리더라 말할 수 있다. 이 실험은 일시적인 작은 권력도 인간을 무의식적으로 변질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갑질:
갑을관계에서의 ‘갑’에 어떤 행동을 뜻하는 접미사인 ‘질’을 붙여 만든 말로,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권리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 행위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인터넷에선 갑의 무한 권력을 꼬집는 ‘슈퍼 갑’, ‘울트라 갑’이라는 말이 떠돌고 있다. 갑처럼 군림하려 하는 사람을 일러 ‘갑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네이버, 트렌드 지식사전)
②; 변질의 특징은 자기 과시다. 자기를 원래의 자기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행동에 대한 반성이 없어져서 거침없는 행동이 늘어난다.
③; 세 가지 변화 모두 자기는 예외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로 느끼는 데서 발생한다. “나는 다 안다.”
④; <노자>
⑤; 권력은 반대를 참지 못한다. 리더는 왜 존재하는가?
⑥; 너 자신을 알라.
사진: <소유냐 삶이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모든 위대한 휴머니즘적 종교의 본질적 가르침은 자기 자신의 자기도취의 극복이 사람의 목표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하며, 결국 이런 과정을 거치지 못한 ‘거대한 힘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고 말한다.”
나는 프롬의 말을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리더십의 근본은 자기 자신의 자기도취의 극복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못한, 거대한 힘을 가진 평범한 리더가 가장 위험하다.”
사진; 평범한(?) 인간의 절대권력과 그 측근 실력자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아니, 조그마한 권력이라도 권력은 무의식적으로 부패하게 되어 있다. 나는 <노자>가 그 부패에 대한 인디케이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왕이 아닌 나와 우리는 뭐하러 <노자>를 읽는가?
1. 실제적 왕(국가 또는 일반적 사회 조직에서의 최고 실력자, imperial president)의 행위에 대한 판단 기준을 제공한다.
2. 나도 왕 행세할 수 있는 상황(조직의 長)에 가끔이나마 처할 수 있다.
3. 남자는 별 거 아닌 게 약자, 특히 여자들에게 왕 행세하는 경우가 많다.
4.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내 생각으로는 건전성이 있다)
5. <노자>의 부분적인 구절에서도 인간사의 역설적 지혜를 찾아 볼 수 있다.
나는 우리가 <노자>를 전혀 읽은 적이 없어도 <노자>의 지혜라 할 수 있는 점을 무의식적으로라도 대체로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와 일상적 사고에 노자의 흔적이 약하게 나마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쓰는 이음절어에 <노자>에 나오는 한자로 구성된 말이 많습니다.
한자는 원래 단음절어라 한 글자로 의미를 표현했으나, 같은 음 때문에 헷갈리고 또 세상이 복잡해지는 데 따라 단음절 단어를 계속 만들 수 없어서 이음절어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아래 낱말들이 모두 <노자>에 연원을 두는 것은 아니겠으나 대부분은 <노자>에서 취한 것입니다.
3. 心亂
11. 利用
12. 發狂
13. 寄託
14. 恍惚, 希(稀)貴
15. 微妙, 混濁, 素樸
16. 復歸
18. 智慧(노자에서는 부정적 의미)
19. 所屬
23. 自然, (노자에서는 '스스로 그러함)
25. 獨立
26. 超然, 根本, 終日
27. 關鍵, 籌策
32. 有名(이름이 있다->유명하다 famous)
37. 鎭靜
39. 基本, 神靈
40. 反動
49. 注目
50. 出生, 厚生, 攝生
51. 尊貴
52. 光明
73. 勇敢
<노자>에서는 대체로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한자가 오히려 부정적 의미인 경우가 많습니다.
‘無爲’라는 말의 ‘爲’는 <노자>에서 권력자의 자의적이고 목표지향적인 강제적 행위를 말하지만, 일상적 표현인, '무위로 돌아갔다', '무위도식' 과 같은 말은 문자 그대로의 뜻 그대로입니다. <노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노자>에서의 맥락적 의미가 아니라, 축자적으로 비판합니다.
<노자>의 부분적인 구절에서도 인간사의 역설적 지혜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장; 道可道, 非常道.
2장; 有無相生.
3장; 爲無爲則無不治.
4장; 道沖而用之, 或不盈.
5장;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6장; 谷神不死.
7장; 天長地久. .
8장; 上善若水.
9장; 功遂身退, 天之道.
10장;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11장; 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12장; 聖人之治也, 爲腹不爲目,
13장; 寵辱若驚, 貴大患若身.
14장;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15장; 保此道者, 不欲盈. .
16장;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17장; 太上, 下知有之;
18장; 大道廢, 有仁義;
19장; 見素抱樸, 少私寡欲.
20장; 絶學無憂.
21장; 孔德之容, 惟道是從.
22장; 曲則全, 枉則直,
23장; 希言自然
24장; 企者不立, 跨者不行.
25장;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26장; 輕則失本, 躁則失君.
27장; 善人者, 不善人之師, 不善人者, 善人之資.
28장; 大制不割.
29장; 聖人去甚, 去奢, 去泰.
30장; 以道佐人主者, 不以兵强天下, 其事好還.
31장; 戰勝. 以喪禮處之.
32장; 知止, 可以不殆.
33장; 知人者智, 自知者明.
34장; 大道氾兮, 其可左右. .
35장; 執大象, 天下往, 往而不害, 安平太.
36장; 柔弱勝剛强.
37장; 道常無爲而無不爲.
나는 이런 부분적인 구절만을 취해서 읽어도 대부분의 노자적 지혜를 알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읽다보면 그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가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현행본 <노자> 상편을 道經(1장~37장), 하편을 德經(38장~81장)이라 하지만 상편이 도에 중점을 두고, 하편은 덕에 중점이 있다는 게 아닙니다. 각 편의 처음에 나오는 명사(상편은 道, 하편은 上德; 上은 형용사)를 택한 것입니다.
<북대한간노자>는 하편을 ‘老子上經’, 상편을 ‘老子下經’이라 했습니다.(죽간 뒤 면에 책 이름 있음) 여러 번 말하지만<도덕경>이라는 이름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사진; <북대노자> 上經 시작 부분, 두번 째 죽간 뒷면에 제목.
38장; 上德不德, 是以有德;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39장; 貴以賤爲本, 高以下爲基.
40장; .反者, 道之動; 弱者, 道之用.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41장; 大方無隅, 大器晩成,
42장; 强梁者, 不得其死,
43장;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44장;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45장;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46장; 知足之足, 常足矣.
47장; 聖人不行而知, 不見而名, 不爲而成.
48장; 無爲而無不爲.
49장; 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50장; 人之生, 動之死地, 亦十有三. 夫何故, 以其生生之厚.
51장;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52장; 見小曰明, 守柔曰强.
53장; 大道甚夷, 而民好徑.
54장; 善建者不拔, 善抱者不脫,
55장; 益生曰祥, 心使氣曰强.
56장; 知者不言, 言者不知.
57장; 以正治國, 以奇用兵, 以無事取天下.
58장;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59장; 治人事天莫若嗇, 夫唯嗇.
60장; 治大國, 若烹小鮮.
61장; 大者宜爲下.
62장; 人之不善, 何棄之有?
63장; 圖難於其易, 爲大於其細.
64장; 千里之行, 始於足下.
65장; 以智治國, 國之賊, 不以智治國, 國之福.
66장;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 故能爲百谷王
67장; 我有三寶, 持而保之,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
68장; 善用人者爲之下.
69장; 禍莫大於輕敵, 輕敵幾喪吾寶,
70장; 吾言甚易知, 甚易行; 天下莫能知, 莫能行.
71장; 知不知, 上; 不知知, 病.
72장; 民不畏威, 則大威至.
73장; 天網恢恢, 疏而不失.
74장; 民不畏死, 奈何以死懼之?
75장; 夫唯無以生爲者, 是賢於貴生.
76장; 强大處下, 柔弱處上.
77장; 天之道, 其猶張弓與.
78장; 正言若反.
79장; 天道無親, 常與善人.
80장; 小國寡民.
81장; 天之道, 利而不害; 聖人之道, 爲而不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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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소유냐 삶이냐>
엊그제 에리히 프롬의 글을 인용하다보니 <소유냐 존재냐> 책에 인용된 <노자>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그게 무슨 말인지, 노자의 어느 구절을 인용한 것인지 몰랐습니다. 한글 번역책은 참고가 안 됩니다. 노자를 영문으로는 보통 ‘Lao Tzu’, ‘Lao Tze’라고 씁니다. 현재는 ‘Lao Zi’(한글표기; 라오쯔)라고 한어병음 표기를 많이 씁니다
영어 원문: The Way to do is to be. LAO TSE
한글 번역: 도(道)는 존재(存在)이다. (<소유냐 삶이냐> 홍성사)
나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길(도)는 (소유가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프론의 책 제목과 관련해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런대로 괜찮긴 한데... 누구의, <노자> 어느 부분의 번역일까? 그런대로 <노자>를 아는 제가 보기에는 해당되는 구절이 없습니다.
“The Way to do is to be.” 구글 검색. 이리 저리 찾다 보니 이 번역자는 ‘위터 바인너’(Witter Bynner). 하바드대 나온 작가 겸 시인입니다. <노자> 번역 책 제목은 <The Way of Life>(1944), 그래서 책의 원문에서 찾아보니 ‘The Way to do is to be.’는 <노자> 47장의 제일 아래 문장의 번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거기에 내가 이해한 정도, 즉 "(우리가) 해야 할 길(도)는 (소유가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라 번역할 건덕지가 전혀 없습니다. 뭐야?
<노자> 47장
1. 不出戶, 知天下; 不窺牖, 見天道.
2. 其出彌遠, 其知彌少.
3. 是以聖人不行而知, 不見而名, 不爲而成.
도올 <길과 얻음>
1.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하늘 아래를 보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하늘의 길을 본다.
2. 나갈수록 멀어지고, 알 수록 적어진다.
3.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다니지 않아도 알고, 드러내지 아니하여도 드러나고, 하지 아니하여도 이루어진다.
Robert G. Henricks <Lao Tzu; TE-TAO CHING> 1989
미국 다트머스대 중국사상 교수
1. No need to leave your door to know the whole world;
No need to peer through your windows to know the Way of Heaven.
2. The farther you go, the less you know.
3. Therefore the Sage knows without going,
Names without seeing,
And completes without doing a thing.
깊은 뜻을 떠나서 이렇게 쉬운 한문과 번역인데 ‘바인너’는 <노자> 47장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Witter Bynner <The Way of Life> 1944
1. There is no need to run outside For better seeing,
Nor to peer from a window.
Rather abide At the center of your being;
2. For the more you leave it, the less you learn.
3. Search your heart and see
If he is wise who takes each turn: The way to do is to be.
1, 2번 문장은 그런대로 원문과 유사합니다. 그런데 3번 문장은 제 능력으로는 이해 불가합니다. 그래서 이리 저리 연구해 봤습니다. 'take turn'은 '차례를 찾다' 정도의 뜻인데 뭐가 뭔지 이해 불가.
그래서 미국에서 공부하는 딸에게 카카오톡으로 물어 봤습니다.
먼저 3번 문장을 프롬의 책 <소유냐 존재야>와 <노자>47장 전체와 무관하게 해석해 보십시오.
3. Search your heart and see
If he is wise who takes each turn: The way to do is to be.
프롬의 책에는 'The Way to do is to be.'라고 인용돼 있는데 원문에는 'The way to do is to be.'라고 ‘way’가 소문자. 그 의미의 차이는 큽니다. 대문자는 고유명사인 노자의 ‘도’, 소문자는 ‘길, 또는 방법’. 잘못 인용한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딸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여기서는 아래와 같이 이해하는 게 좋은 듯하다고 합니다.
"Let it be 에서 나오는 것처럼 to be 라고 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도 의미하거든요. (무엇을) 하는 방법은 그냥 가만히 두는 것이다."
이게 좋은 해석 같습니다. <노자>의 '不爲而行'(하지 않고도 이룬다)와도 그럭저럭 매치가 되고... ‘The way to do is to be.’ 를 도치로 보아 ‘To be is the way to do.’라고 보면...
‘그냥 놓아두는 것이 (무엇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좋은 방법이다’.
그럴 듯합니다. 그런데... 3번의 나머지 문장은 무슨 뜻? 어떻게, 무슨 의미로 연결?
3. Search your heart and see
If he is wise who takes each turn: The way to do is to be.
저는 이렇게 이해했는데 시원찮습니다.
“네 마음을 잘 들여다봐라. 그리고 누가 제 차례(몫)를 잘 찾을 정도로 현명하다면 그냥 놔 두는 것이 해야 할 (좋은) 방법이다.”
이런 건 아닌 거 같습니다. 딸도 아니라는 듯이 학교가서 미국 친구한테 물어봐 준다고 했습니다.
딸 왈:
친구한테 물어봤는데요~ turn이 기회 opportunity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그러니까 "모든 기회를 취하는 사람이 과연 현명한 사람인지를 생각해봐라"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 "하지 말고 가만히 두어라" 이런 의미래요
지나친 의역인 것 같아요
ok. 저는 거꾸로 이해했습니다. 어쩐지...
Search your heart and see
If he is wise who takes each turn: The way to do is to be.
네 마음을 잘 들여다봐라. 그리고 모든 기회를 취하는 사람이 과연 현명한 사람인지를 생각해봐라.(현명한 게 아니다) 하지 말고 가만히 두어라.
저는 “어디서는 가만있으면 손해볼까봐 나서고, 기회만 있으면 억지로 잡으려 애쓰지 말고 그냥 자연스럽게 놓아 두어라. 그러면 진정한 기회가 생긴다.”라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대로 좋은 말이고, 노자의 대의에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또 문제는?
<To have or to be?>
The Way to do is to be.
LAO-TSE(노자)
People should not consider so much what they are to do, as what they are.
MEISTER ECKHART
The less you are and the less you express of your life—the more you have and the greater is your alienated life.
KARL MARX
‘The way to do is to be.라는 이 번역 문장이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에 인용할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프롬은 ‘to be’를 ‘존재(삶)’으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왜냐? 책 주제도, 제목도 그렇고 같이 인용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기독교 신비주의자), ‘칼 맑스’의 글도 대체로 그런 의미라서 그렇습니다.
또 way 소문자를 Way 대문자로 바꿔 인용했다는 것도 약간 미스입니다.
하여튼 ‘위터 바인너’의 번역은 의역을 넘어 재창조입니다. <노자>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권할 수 없는 책이라는 의견입니다.
그런데 저는 <노자> 47장 초반에 나오는 노자의 인식론( 不出戶, 知天下; 不窺牖, 見天道.)을 보편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이 구절을 강자(왕)가 모든 것을 직접 다 알려하고, 직접 다 챙기는 것을 경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점은 <노자>의 통찰이 전적으로 신비주의적 깨달음(명상 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 관찰, 역사상의 지혜, 격언 등 모두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참고: <노자> 각종 영역
http://terebess.hu/english/tao/_index.html
<The Tao Te Ching > by Lao Tzu
老子 : <道德經>
Laozi : <Daode jing>
The Daode jing(따오떠징) is a short book of about 5,000 Chinese characters. It has 81 short chapters(81장). It has two parts: Part One is the Dao jing (道經), which is chapters 1–37; Part Two is the De jing (德經), which is chapters 38–81.
The earliest is the Guodian manuscript,(<곽점 초간 노자>) c. 300 BCE. It is quite incomplete, but serves as a great supplemental source.
The next to oldest are the Mawangdui A(<마왕퇴 백서 노자 갑>) and Mawangdui B manuscripts(<마왕퇴 백서 노자 을>), c. 250 BCE. These too, because of their many imperfections, serve as great supplemental sources.
Future manuscripts are much easier to read because they include the correct characters in many cases. Among these are the 河上公 Heshang Gong(하상공), c. 180-157 BCE(연대 미상, 동한 말로 추정), and 王弼 Wang Bi(왕필) manuscripts, 226-249 CE, which are great main sources for translating the poems. They provide the framework; the earlier ones add to its richness.
The latest is the 傅奕 Fu Yi manuscript(부혁본), c. 555-639 CE. (부혁본 이후에도 많은 판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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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g-Tsit Chan <The Way of Lao Tzu> 1963
One may know the world without going out of doors. One may see the Way of Heaven without looking through the windows. The further one goes, the less one knows.
Therefore the sage knows without going about, Understands without seeing, And accomplishes without any action.
Lin Yutang <The Wisdom of Laotse; Pursuit of Knowledge> 1948
Without stepping outside one's doors, One can know what is happening in the world,
Without looking out of one's windows, One can see the Tao of heaven.
The farther one pursues knowledge, The less one knows.
Therefore the Sage knows without running about, Understands without seeing, Accomplishes without doing.
D.C. Lau <Tao Te Ching> 1963
Without stirring abroad One can know the whole world;
Without looking out the window One can see the way of heaven.
The further one goes The less one knows.
Therefore the sage knows without having to stir, Identifies without having to see, Accomplishes without having to act.
陳鼓應 <老子今注今譯> 2005
不出門戶,能够推之天下的事理; 不望窓外,能够了解自然的法則.
越向外奔逐,大道的認識也越少.
所以聖人不出行却能感知,不察看却能明曉,無爲而能成功.
최진석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문을 나서지 않고도 세상을 알고, 창문을 통하지 않고도 천도를 본다.
나간 것이 점점 멀수록 아는 것은 점점 줄어든다.
이런 이치로 성인은 행하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명철해 지며, 하지 않고도 이룬다.
14편; 유, 도의 근본적 차이
유가와 도가는 공통적인 면이 많지만, 그 핵심과 사고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곽점 초간 노자> 발굴 이후 유,도의 상통을 주장하는 학자가 많지만, 그 근본적인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문헌의 구절 상의 異同 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한무제(재위 BCE 141년~BCE 87년)가 동중서의 ‘파출백가, 독존유술’(罷黜百家, 獨存儒術)의 건의를 받아들인 이후 역대로 대체로 유가 사상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실제로는 법가 사상을 받아들였습니다.(外儒內法) 대국이 법없이 운영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전제국가인 중국에서 법이 항상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고 권력에는 예외였습니다. 그 큰 이유 중 하나는 유가가 중시하는 예(禮) 때문입니다. 예는 권력의 해석에 따라 융통성이 거의 무제한입니다.
유가 경전인 <禮記>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대부는 제후 아래 등급인 세습 귀족입니다.
‘禮不下庶人, 刑不上大夫.’ 예불하서인, 형불상대부
예는 백성에게 소용없고, 형법은 귀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유교적 가치를 내세우는 우리나라의 보수 귀족들은 법의 보편적 적용과 하층민에 대한 복지를 주장하는 민주, 진보를 증오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역사적 전통(조선 후기 노론)에 따라 하층민 차별과 예외적 법적용은 경전에 씌어 있는 말씀에 따르는 거니까 전혀 문제가 없는 데 진보는 평등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유교의 禮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매너, 에테켓 또는 간단한 의례가 아닙니다. 법보다 더 무서운 공동체에서의 추방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쟤는 예를 모른다”고 어른이 말하면?
집단에서 따돌리는 것입니다. 과거에 그런 경우를 당하면? 거의 유랑민이 되었다가 잘 하면 산적, 잘못되면 굶어 죽는 것입니다.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어야 예가 있는 거고. 그래서 ‘以禮殺人’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엿장사 맘대로의 무지한 권력이 예를 등에 업을 때, 이 禮라는 것은 정말 무서운 것이 됩니다.
“刑不上大夫”.
경전에 씌어 있는 말이니 틀릴 수가 없고, 내가 실질적인 귀족이니 잘못을 해도 처벌을 받을 수 없다. 대부에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권력층에게는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그러니 병역부정, 뇌물, 탈세, 성추행 등이고 뭐고 다 해도, 또 다 걸려도 벌은 안 받으려는 것입니다. 진리인 유가의 경전에 그렇게 돼 있으니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
사진; <우파의 탄생>
그래서 노장은 유가를 통박합니다. 경전에 아무리 좋은 소리가 쓰여 있고, 경전을 잘 외워도 그 말들은 결국은 권력과 자기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庄子·胠箧》
彼窃钩者诛,窃国者为诸侯;诸侯之门而仁义存焉。피절구자주, 절국자제후; 제후지문인의존언.
허리띠 버클을 훔친 좀도둑은 사형,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 제후의 궁궐에는 仁義를 말하는 자(유가)가 득실거린다.
‘인의’는 ‘예’의 근거입니다.
<사진> <계림수필> “紙經不如天經”
도올 선생의 <계림수필>을 펴보니 처음에 위 사진이 있습니다.
“紙經不如天經”
종이에 쓰인 경전은 자연이란 경전 만 못하다.
유가와 도가는 뭘로 구별하는가?
유가와 도가의 사고방식과 논리의 차이는?
도가: 推天道以明人事 추천도이명인사
유가: 推己及人 추기급인
<주역>은 유가?, 도가?
우리가 아는 유학은 공맹의 유학이 아니라, 대부분 주자의 성리학입니다.
魏晋以前,道家是中国哲学的主流;
삼국지 시대인 위, 진나라 이전에는 도가가 중국철학의 주류였다.
隋唐时期,佛教差不多完成中国化的改造,发展到鼎盛时期,佛教哲学构成了中国哲学的主流;
수, 당나라 시대에는 불교가 어느 정도 중국식으로 개조, 완성되었고, 발전, 융성하여 불교철학이 중국철학의 주류가 됐다.
宋明以后,儒佛道走上融合之路,并形成宋明理学这一成功的融合形态。宋明理学的价值观念以儒家为主,是儒学新形态。
송, 명나라 이후에는 유,불,도가 융합하여 송명리학이 형성, 그 가치관념은 신형태의 유가가 주.
所以,宋明以后的中国哲学以儒家为主。但这个儒家显然不是纯粹的儒家,而是融儒道佛及诸子百家思想资料于一体的新儒家。
그래서 송명이후에는 유가가 주였으나, 이 유가는 공맹의 순수한 유가가 아니라, 유,불,도를 포함한 제자백가 사상이 일체화된 신유가(neo-confucionism)이다.
도가: 推天道以明人事; 천도(자연의 원리)를 미루어 보아 인간사를 밝힌다.
유가: 推己及人; 나를 미루어 보아 남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기본적인 발상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그런데... 이게 뭐가 문제인가?
도가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할 말이 많으니 일단 그렇다 치고... 유가의 사고방식을 봅시다.
나를 살펴 남에게 영향을 준다? 좋은 말입니다. 문제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 사람들은 다 같은가? 하는 점입니다.
유가는 “인간들이 모두 나와 같다. 단지 나는 뭘 알고 너는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을 통해 성인의 말씀(불변의 진리)을 배워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지면 된다. 그러면 너도 성인이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보편성은 인간이라는 생명 자체에 있는 것이지, 그 마음의 보편성은? 일부 있을 수 있겠으나, 다 다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게 좋은 것이 남에게는 싫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万物皆备于我矣。反身而诚,乐莫大焉;强恕而行,求仁莫近焉。--《孟子·尽心上》
만물은 나에게 모두 갖추어져 있다. 나를 되돌아보아 진실되면 즐거움이 더할 수 없는 것이다. 힘써 서(恕)를 행하면 인(仁)이 바로 옆에 있게 된다.
맹자의 자신감은 따를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만물의 이치와 인간사의 질서 원리를 다 알 수 있다? 그 통찰에 대한 자신감과 즐거움이 그것이 진리임을 보증한다?
무리한 생각입니다.
마음은 고정된 것도 아니고, 설사 그렇다 해도 자기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이 전혀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보편성은 있더라도.... 예를 들어, 침팬지와 인간의 유전자의 차이는 불과 1%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99%의 공통성을 인정하더라도 나머지 1%가 엄청난 차이를 만드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이 서로 1%만 다르더라도, 99%의 마음이 같더라도 나는 너가 아닐 겁니다.
우리 옛날 아버지들의 태도가 대체로 그랬습니다. 잘 모르면서도 다 아는 듯... 너 좋으라고 하는 거니 시키는 대로 해라. 그 분들도 유학의 잘못된 훈도의 피해자들입니다.
나는 전에도 말했지만 유학, 특히 성리학에서는 좋은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맹자의 心(마음)은 도덕심, 윤리심(인의예지)이고, 후에 天理(하늘의 이치)로 까지 발전되었습니다.(송명이학, 주자학, 성리학, 도학 = 存天理, 去人欲) 그런데 우리가 설사 기본적인 도덕적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적인 면과 욕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자기 마음속에서 天理를 파악한 사람은 자연히 내가 옳다는 신념이 생기고, 나에게 좋은 것은 남에게도 좋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도 원한다고 여기게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자기 확신을 남에게도 전파, 강요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다음은 조선 시대의 노론의 영수였던 성리학자 송시열의 말입니다.
송시열은 <논어>, <맹자>보다 <논어>, <맹자>에 대한 주자의 해석인 <사서집주(四書集註)>를 더 중시했습니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에서 인용합니다.
[송시열] “하늘이 공자에 이어 주자를 내셨으니 참으로 만세(萬世)의 도통(道統)이다. 주자 이후로는 일리(一理)도 밝혀지지 않은 것이 없고 일서(一書)도 명확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윤휴가 감히 자신의 견해를 내세워 가슴 속의 억지를 늘어놓으니, 윤휴는 진실로 사문난적이다.”
이번에는 반(反)주자학자 윤휴의 말입니다.
[윤휴] “천하의 많은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르겠는가? 이제 주자는 그만 덮어두고 진리만을 연구해야 한다. 주자가 다시 살아온다면 나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가 살아온다면 내 학설이 승리할 것이다.”
나는 주자가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주자는 송시열과 같은 주자학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주자도 공자의 <논어>로 돌아가자는 윤휴의 태도를 옳다고 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자의 <사서집주>도 당시의 시대의식의 표현이며, 시대가 달라지면 주자의 해석도 달라질 것입니다.
나는 내가 도가라 생각하지만 누가 노자, 장자 욕을 해도 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학 어쩌고 하는 사람들에게 공자도 아닌 송시열 욕을 해보면? 생명을 부지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나는 네 마음을 다 안다.” 무서운 말입니다.
《孟子。尽心上》。孟子曰:“尽其心者,知其性也。知其性,则知天矣。存其心,养其性,所以事天也。殀寿不贰,修身以俟之,所以立命也。”
맹자의 ‘盡其心者,知其性也。知其性,則知天矣’。라는 구절 만 보십시다.
내 마음을 다하면 자기의 본성을 알 수 있고, 자기의 본성을 알면 하늘(하느님?, 자연?)을 알 수 있다.
문장 아래 부분에 ‘事天’(하늘을 섬기다)이라는 말이 있는 걸로 보면 ‘天命’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약간 종교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통 크고 멋진 말이지만, 다들 "나는 하늘을 안다"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생각들이 다 다르다면? 싸움 나는 겁니다.
그래서 유가는 그 판단의 표준을 어른, 경전이라는 책에 두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른이 대부분 송시열 같은 놈들이고, 성인의 말씀을 담은 책이라는 건 시대착오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애매한 문장은 결국 해석자의 권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거나, 견강부회가 되는 겁니다.
그런 권위가 부재하면? 지들 끼리 또 싸움이 나는 겁니다. 전체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조선 역사가 증명합니다.
사진; 孔子問禮于老子(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
공자의 말을 들어 보십시다. 소위 황금률이라는 것.
子贡问曰:“有一言而可以终身行之者乎?”
子曰:“其恕乎!己所不欲,勿施于人。” —— 《论语·卫灵公》
Do not do to others what you would not like to do.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
“夫仁者,己欲立而立人,己欲达而达人。" ——《论语·雍也》
Now the humane man , wishing himself to be established, sees that others are established , and, wishing himself to be successful, sees that others are successful.
인한 사람은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을 먼저 세우고, 자기가 성공하고 싶으면 남을 먼저 성공하게 한다.
엄청 좋은 말입니다. 이 정도를 공자 말대로만 실천한다면 성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남도 원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도 원하지 않는다는 걸 전제하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거나 해를 끼치기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대부분 해를 끼칩니다.
내가 너무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것 입니까?
<장자/ 至樂>
且女獨不聞邪? 昔者海鳥止於魯郊, 魯侯御而觴之于廟, 奏九韶以爲樂, 具太牢以膳. 鳥乃眩視憂悲, 不敢食一臠, 不敢飮一杯, 三日而死. 此以己養養鳥也, 非以鳥養養鳥也.
너는 이런 얘기를 못 들어 보았니? 예전에 상서로운 바다새가 노나라의 들에서 놀고 있는 걸 노나라 군주가 잡아 태묘에 모셔놓고 좋은 술이랑 음악과 소, 양, 돼지로 잔치를 벌여 대접했지. 그러자 그 새는 놀라 눈을 어지러운 듯이 뜨고 슬퍼하더니 물 한 방울, 고기 한 점 먹지 않다가 사흘 만에 죽어 버렸어. 왜냐? 노 군주는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게 아니라,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길렀기 때문이야.
彼唯人言之惡聞
그 새는 사람 말 듣기를 싫어한 것 뿐이다.
故先聖不一其能, 不同其事. 名止於實, 義設於適, 是之謂條達而福持.
그러므로 성인은 사람의 능력을 다 같다고 여기지도, 사람의 일이 다 똑같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명은 실에서 그치고, 올바름은 각각에 맞아야 한다. 이것을 제 몫을 알아 복을 유지한다고 하는 것이다.
<노자> 49장
聖人常無心, 以百姓心爲心. 善者吾善之, 不善者吾亦善之, 德善; 信者吾信之, 不信者吾亦信之, 德信.
성인은 항상 무심하다. 그래서 백성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는다. 잘 하는 사람은 잘 대하고, 잘못하는 사람도 잘 대해 준다. 그래서 좋은 게 쌓이는 것이다. 믿음성 있는 사람은 나도 믿고, 믿음성이 없는 사람도 믿는다. 그래서 믿음이 쌓이는 것이다.
거의 종교적 어투지만, 진정한 강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聖人常無心’은 <마왕퇴백서본>의 문장입니다. <왕필본>은 ‘聖人無常心’(성인에게는 고정된 마음이 없다)으로 되어 있으나, 거의 같은 의미입니다.
上帝(=天, 종교)-->天命(유가, 윤리)-->天道(도가,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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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로랑 베그
7장: p 163 도덕과 이성은 관습과 전통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기중심성을 차츰 벗어남으로써 도덕적 갈등 상황에서 공정한 관점을 취할 수 있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면 심리적 자기중심성을 탈피하기 위한 지적 능력도 필요하다.
개인의 도덕적 발전이 인지능력, 언어능력의 증강으로 환원될 수는 없지만, 개인이 선호하는 도덕적 추론과 지능지수 및 언어능력, 논리력 사이에는 실제로 상당한 관계가 있다. 타인의 시각과 욕망을 이해할 수 있느냐는 도덕적 발전의 결정적 전제조건이다.
여기에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타인의 의도를 추정하는 능력도 보조를 같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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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랜디(James Randy):
No amount of belief makes something a fact.
어마어마한 믿음도 어떤 것을 사실로 만들지는 못한다.
사진;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로버트 엠 퍼시그(Robert M. Pirsig):
"Religious mysticism is intellectual garbage. It’s a vestige of the old superstitious Dark Ages when nobody knew anything... It is one of those delusions that isn’t called insane only because there are so many people involved."
종교적 신비주의는 지성의 쓰레기다. 이것은 아무도 뭘 잘 알지 못하던 미신적 암흑시대의 흔적이다... 이것은 단지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고 해서 광증(狂症)이라고 불리지 않을 뿐인, 그런 여러 망상 중의 하나다.
“When one person suffers from a delusion, it is called insanity. When many people suffer from a delusion it is called a Religion.”
한 사람이 어떤 망상에 시달릴 때는 광증이라 부른다. 많은 사람이 같은 망상에 시달릴 때,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15편; 음양론
‘음양’이라는 말. 음양은 ‘상대되는 쌍(짝)’을 나타내는 중국식 표현입니다. 이 서로 관련된 쌍의 양쪽 중 하나는 음, 하나는 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음양’이라는 말은 단독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고, ‘음양오행’이라고 같이 쓰는 경우가 있지만 ‘음양’과 ‘오행’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저는 오행을 의사과학(pseudo-science)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한의학에 오행 이론이 적용되었을 때 효과가 있었다고 해서 오행 이론이 입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 역작용은 그 효과보다 훨씬 더 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행’ 역시 중국 사상의 일부분이고, 특히 한의학의 기초입니다. 때문에 선진 사상과 그 이후의 실용과학인 한의학의 이론체계를 알려면 일정 정도 공부해야 합니다.
<노자>에는 ‘음양’이라는 말은 나오지만 이론적으로 따지는 내용은 아닙니다. <노자>에는 상대되는 개념이 엄청나게 많이 등장합니다. 이 개념들이 나오는 문장들을 살펴보면 음양에 대한 이론을 세울 수 있습니다.
<노자> 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도에서 하나가 생기고, 하나에서 둘이 생기고, 둘에서 셋이 생기고, 셋에서 만물을 생겨난다.
만물은 음을 등에 지고 양을 껴안고 있으며, 기를 휘저어 조화를 이룬다.
<노자>에 나오는 天地, 大小, 多少, 美惡, 善不善, 有無, 難易, 長短, 高下, 音聲, 前後, 寵辱, 善妖, 曒昧, 曲全, 枉直, 蔽新, 吉凶, 强弱, 剛柔, 損益, 虛失, 巧拙, 主客, 進退, 正反, 奇正, 禍福, 牝牡, 雌雄, 得亡, 開閉, 奪與, 廢興, 辯訥, 靜躁 등 80여 회의 상대되는 개념 쌍을 모두 음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개념 쌍의 대부분은 지금도 하나의 낱말(이음절어)로 쓰입니다. (대소=크기, 다소= 수량, 장단=길이, 고하=높이 등)
저는 음양 이론은 고대 중국으로부터 현재 동아시아인(한, 중, 일)에게는 정도 차는 있겠으나, 무의식적인, 기본적인 사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회가 서구화될수록 서양의 2분법적 사고로 대체되거나, 중첩되어 상황에 따라 적용되는 약간 혼란기라 생각합니다.
좌상 그림; 복희는 남신이고 여와는 여신입니다. 사람의 머리에 뱀의 몸을 하고 있으며 몸이 서로 무한대로 꼬여 있어서 분리 불가능함을 나타냅니다.
해와 달은 밝음과 어두움, 남성성과 여성성 등 모든 대비되는 쌍을 나타냅니다.
우상 그림; 태극은 도와 음양이라는 차원들을 동시에 표현한 것입니다.
하단 그림; F. 카프라의 그림은 순환 운동(도)이 음극과 양극 사이의 직선운동(낮은 차원)으로 투영된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저는 음양론이 그래도 세계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그 중 건전한 길이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도)가 음과 양으로 논의가 가능해 집니다.
이러한 태극의 그림으로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 알아봅시다. 태극(太極, the Ultimate Limit) 그림은 <노자>나 <주역>에 나오는 음양 사상을 상징화한 것입니다.
1. 대비되는 쌍의 바깥쪽의 원은 전체성(wholeness)을 나타냅니다.(對立 統一) 또 원은 유한(하나의 세계)과 무한(순환)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전체는 하나(일; 一)입니다. 이것이 사물의 가장 큰 한계입니다. 사람들의 가장 큰 한계는 자연(천지; 天地)이고, 전체로서의 사회(천하; 天下)입니다.
그리고 각 개인에게는 몸의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를 지나치는 것은 파괴며 죽음입니다. 그래서 노자는 한계를 넓히고, 한계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것이 노자가 말하는 유(柔)와 약(弱)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2. 전체를 이루는 음과 양은 상대없이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태극에서 음과 양은 좌우로 나누어져 검은색과 흰색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가치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음양이 좌우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상하로 나누어져 있는 것보다 가치의 동일성이라는 면에서 낫다고 생각합니다.(相互依存, 相反相成)
그러나 음양론은 대비되는 쌍의 어느 것도 다 옳다는 상대주의가 아닙니다. 당연히 여기에도 상황에 따른 호오(好惡)와 시비(是非)가 있습니다. 다만 좋고 나쁜 것과 옳고 그릇 것이 고정되고 절대화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노자>에서는 여성적이고 음적 가치(陰)가 우위에 있으나, 이것은 남성적이고 양적인 가치(陽)가 우세할 수밖에 없는 권력의 사용(위; 爲)에 대한 우려 때문입니다. 노버트 위너(Nobert Wiener)는 "모든 의도적 행위에는 네거티브 피드백(negative feedback)이 요구된다."고 말합니다.
<순자>의 ‘천론(天論/ 자연에 대한 논의)’ 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老子有見於詘(屈), 無見於信(伸). 노자유견어굴, 무견어신.
노자는 굽히는(네거티브한) 면에 대해서는 훌륭한 견해가 있지만,
펴는(포지티브한) 면에서는 견해가 부족하다.
노자의 사상을 어디에나 적용되는 보편적 사상이라고 본다면 순자의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순자는 <노자>의 대상이 누구인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노자>는 더 이상의 권력 사용이 억제되어야 할 최고 권력자를 대상으로 한 책입니다.
<순자>는 방대하여 모두 읽기 어렵더라도, 우선 '천론(天論; 자연에 대한 논의)'과 '해폐(解蔽; 가려진 것을 해부함)' 편은 읽어보면 좋을 것입니다.
다음은 <순자/ 천론>의 시작 부분입니다. 자연법칙에 대한 현대적 의견과 유사합니다.
天行有常, 不爲堯存, 不爲桀亡. 應之以治則吉, 應之以亂則凶.
彊本而節用, 則天不能貧. 養備而動時, 則天不能病. 修道而不貳, 則天不能禍.
하늘의 움직임은 일정함이 있다. 그것은 성군 요 임금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폭군 걸 임금 때문에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다스리는 데 쓰면 길하고, 어지러움에 쓰면 흉해지는 것이다.
근본을 튼튼히 하고 아껴 쓰면 하늘도 가난하게 할 수 없고, 기르고 준비하고 때에 맞춰 움직이면 하늘도 병들게 할 수 없다. 도를 닦고 어긋나지 않으면 하늘도 화를 내릴 수 없다.
'천행유상'의 '천(하늘)'은 전국시대 말(2200 - 2300년 전)에 천지의 법칙성을 이해하게 된 데에 자신감을 얻은 '자연'이라는 뜻입니다. 후반부에 나오는 '천'은 당시 일반인의 종교적 의식에 남아 있는 하늘입니다.
순자는 예(禮)에 따른 인간 행위에 의해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는 면에서 유가(儒家)지만, 당시의 도가나 음양가(陰陽家)의 자연관을 흡수하였습니다. 순자는 "하늘은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문제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가는 다릅니다. 사람은 하늘(=자연)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은 유가와 도가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크게 보아 유가는 사람들의 도덕적 질서(三綱五常) 를 세우는 것이 목적이고, 도가는 사람들의 생존과 사회 유지 원리를 자연에서 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推天道以明人事) 이것이 도가에게는 더 큰 도덕입니다. 그래도 나는 공맹, 주자의 유학보다 차라리 순자의 유학이 동양의 전통이 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검은색과 흰색의 두툼한 부분은 상대 쪽을 향하여 움직이는 모습을 나타냅니다.(운동성과 순환) 음과 양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대립되는 것으로 서로 바뀌며 순환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불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자연 상태에서 음과 양은 동적 균형(dynamic balance)를 이루고자 합니다.(相互轉化)
4. 검은 색과 흰색의 두툼한 부분에는 각각 조그마한 흰 원과 검은 원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음과 양이 자체 내에 대립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相互包含)
완전한 음이나 완전한 양은 실제 세계에는 없는 것입니다.(연속성) 이것을 '양중유음, 음중유양(陽中有陰, 陰中有陽; 양중에는 반드시 음이 있고, 음중에는 반드시 양이 있다)'이라 표현합니다. 한 마디로 세상(현실)에는 순수, 완전, 절대, 영원이 없습니다.
사진; 노벨상 수상 물리학자, 닐스보어 紋章
CONTRARIA SUNT COMPLEMENTA 상대적(모순적)인 것은 상보적이다.
태극의 그림은 음양론을 이상적으로 조화롭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실제 세계는 언제나 음과 양의 불균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지적 활동과 의욕은 대체로 이러한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노자가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함)'과 '무위(無爲; 함이 없음을 함)를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의 이런 성향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음양에 대한 이러한 논의와 표현이, 실제의 다차원적이고 순환적 실상을 가능한 한 사람들 간에 전달이 가능한 형식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노력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진고응<주역; 유가의 사상인가, 도가의 사상인가>
<주역(周易)>과 음양론
<주역>은 음양론에 대한 최고의 언어적이고 기호적인 표현입니다. <주역>은 고대로 부터의 점서(占書)로 생각되는 경(經)과 후대의 해설인 10편의 전(傳)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10편을 ‘십익’(十翼; 열개의 날개)이라 부릅니다. ‘십익’ 중 '계사전(繫辭傳)'은 <주역>의 철학적 의미를 해설한 것입니다. '계사전'은 다음과 같이 웅장하게 시작됩니다.
天尊地卑, 乾坤定矣. 卑高以陳, 貴賤位矣. 動靜有常, 剛柔斷矣.
方以類聚, 物以群分, 吉凶生矣. 在天成象, 在地成形, 變化見矣.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니 건곤이 정해진 것이다.
낮고 높은 것이 펼쳐져 있으니 귀하고 천한 것이 제자리에 있다.
움직임과 고요함에 항상됨이 있으니 굳고 부드러움이 나뉘는 것이다.
성향이 같은 종류가 모이고 만물이 서로 무리지어 나뉘므로 길흉이 생긴다.
하늘에서는 모습을 이루고, 땅에서는 형체를 이루니 뭇 변화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특징적인 것은 자연(천지; 天地)에 대해서 가치 판단의 단어(존비; 尊卑)를 쓰고 있고, 귀하고 천한 것이 고정되어 있다(貴賤位矣; 귀천위의)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점이 유가와 도가를 구분 짓는 특징이며, <주역>이 유가의 성경(聖經)이 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귀하고 천함”에 대한 도가의 말을 들어봅시다.
<장자>'秋水(가을 물)' 편에 황하(黃河)의 신, 하백(河伯)과 북해(北海)의 신, 약(若)의 대화가 나옵니. 대화 중 졸지에 '우물 안의 개구리(井中之蛙)가 된 하백은 정신이 버쩍 들어 '귀함과 천함, 크고 작은 것을 어떻게 아는가?'하고 가르쳐달라고 하자 북해약이 대답합니다.
以道觀之, 物無貴賤; 以物觀之, 自貴而相賤; 以俗觀之, 貴賤不在己.
도라는 차원에서 보면 사물에는 귀천이 없다.
그러나 사물의 입장에서는 자기를 귀하다 하고 상대는 천하다 하는 것이다.
세속 사회에서는 귀천이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종법적(宗法的) 혈연 사회에서는 ‘귀천’이 나면서부터 정해져 있고, 개인의 노력으로 얻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장자는 이 불가능한 귀함을 얻으려면 최고 권력자의 치질을 빨아야 할 정도로 자기를 죽이고 아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나는 음양론적 사고방식이 처음에는 자연에 대한 관심과 관찰에서 생겨났다고 봅니다. 자연(천지)에 대한 관심이 전무(全無)한 공자와 맹자의 유학에 음양론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전국시대 중기 이후 도가(道家)와 음양가(陰陽家)의 영향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때 이후에 정치상의 실천이라는 실제적 목적으로 제자백가(諸子百家) 사상의 종합과 절충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주역>이 현재의 모습과 비슷하게 성립된 것은 전국시대 말부터 한(漢) 나라 초기라고 생각합니다.
공자로 대표되는 유가는 예(禮)를 기초로 한 혈연적 종법 질서를 확고히 유지함으로써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합니다. 나는 <주역> '계사전'의 '건곤정의'와 '귀천위의'의 부분은 새로운 한(漢)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왕과 귀족층(제후; 諸侯)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전의 종교적 배경(예; 禮, 제사; 祭祀)에 철학적 배경을 추가한 것으로, 대립하는 음(陰)과 양(陽)의 상호전환(相互轉還)이라는 대원칙을 위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리차드 니스벳 <생각의 지도>
<EBS 다큐멘터리, 동과 서>
“철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중국 고대의 변증법 사상은 매우 풍부하고 성숙하긴 했지만
, 그것은 인생을 다룬 변증법이지 정확한 개념을 다룬 변증법은 아니다. 사회의 안정, 인간 사이의 조화를 강조했기 때문에 그것들은 상호보완적 변증법이었으며, 부정(否定)의 변증법은 아니다.
그것의 중점은 대립하는 두 항의 보충, 상호침투와 운동의 추이로 사물 또는 시스템의 역동적 평형과 상대적 안정성을 획득하려는 것을 제시하는 데 있는 것이지 개념이나 사물의 투쟁이나 성패, 또는 서로 용납할 수 없음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중국고대사상사> 이택후 p584
16편; 노자의 ‘도’에 대한 최진석 교수의 관점을 비판함
이 글은 ‘노자의 도와 유무’ 1, 2편과 ‘음양론’ 편과 관계됩니다.
노자의 ‘도’에 대한 최진석 교수의 관점을 비판함
최진석은 현재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북경대학에서 <장자>에 대한 논문(당나라 때의 도사 성현영의 <장자> 해석에 대한 논문 <成玄英的‘莊子疏’ 硏究>)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서강대 석사논문도 <장자>에 대한 것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최진석은 <노자>를 전공한 것이 아닙니다. 200601 교정) 근래에는 대학 외에서도 여러 군데의 강의와 신문 기고를 했고, 특히 2014년에는 EBS에서 TV <노자> 강의를 해서 대중에게도 비교적 친숙합니다.
공영방송에서 강의할 정도의 권위를 확보하면 말이 어느 정도 유창하기만 하다면, <노자>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노자>에 대해 어떤 얘기를 해도 대체로 납득시킬 수 있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대충 아무렇게나 해도 그 말하는 사람의 권위가 인정되면 그럴 듯하게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말라”고 얘기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큰 산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거꾸로 말해도 그런대로 맞는 말일겁니다.
“작은 돌뿌리에 걸려 넘어져도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큰 산에 잘못 걸리면 깔려 죽는다.”
최진석은 서강대 철학과 박사과정 시절에 현 홍콩 중문대학 교수인 유소감의 <장자철학급기연변莊子哲學及其演變>(북경대학 박사학위 논문)을 번역했습니다.(<장자연구, 1990>) 그 후 북경대학으로 옮겨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당시 북경대학 교수이던 진고응의 <노장신론老莊新論>을 같은 제목으로 1997년에 번역 출판했습니다. 두 책 모두 대단히 성실하고 읽기 쉽게 번역되어 있어서 제 취미인 노장 공부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가 된 최진석은 2001년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이라는 <노자> 번역, 해설서를 출판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좋은 책이지만, 저는 “노자의 ‘도’”에 대한 최진석의 이해에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자기의 해석을 노자와 동일시하는 책 제목부터 문제입니다. 책 제목이야 출판사에서 권해 정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다 칠 수도 있지만, 실제로 내용에서도 ‘노자의 원음’이니 ‘노자의 원래 의미’니 하면서 확고한 자기주장을 하는 데 상당히 위험하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그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표현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최진석은 2014년에 노장 관계 논문집인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최진석의 노장 철학 독법>을, 2015년 3월에 좀 더 대중적인 <노자> 해설서인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을 출판했습니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노자의 ‘도’”에 대한 최진석의 이해는 불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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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교수의 <노자> 관계 책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2001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2014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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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도’는 만물의 근원이 아니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의 “노자의 철학이 응축되어 있는 ‘도道’”라는 항목 하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p 26
“리우샤오간劉笑敢은 ‘도는 세계의 기원일 뿐 아니라 만물의 근거이다. 이것은 노장老莊이 말하는 도에 우주론적 의미뿐 아니라 본체론적 의미가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라 한다. 일반적으로 <도덕경>에 있는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을 우주 본원으로서의 ‘도道’의 작용 즉 우주 발생의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도법자연道法自然’을 ‘도’에 법칙의 의미가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구절로 이해하여 ‘도’에는 실체와 법칙의 의미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본다.
이 ‘도’의 성질에 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누구는 정신적인 것이라 하고 또 누구는 물질적인 것이라 하며,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물질적 원소라 하기도 하고, 우주의 운동 과정을 지배하는 법칙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해석이든지 간에 모두 모종의 근원적인 존재로서 ‘도’가 실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한다. 그런데 나는 의견이 다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소한 노장이 말하는 ‘도’는 근원적인 어떤 존재가 아니라 세계가 존재하고 있는 형식을 표시하는 일종의 ‘가장 기본적인 보편 원칙 내지는 보편 원리’이다.” (강조; 노바당)
<老子古今> 상, 하 1500페이지
홍콩 중문대학 교수인 유소감(리우샤오간)은 <노자고금老子古今>(200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노자고금> p 44
老子哲學中最重要的兩個槪念--‘自然’與‘道’
‘自然’是老子哲學之中心價値, 是‘道’推崇 ․ 體現的最高價値原則; 而‘道’則是宇宙 ․ 世界 ․ 社會和人生之總根源和總根據的象徵符號.
노자철학의 가장 중요한 두가지 개념은 ‘스스로 그러함(自然)’과 ‘도’이다.
‘스스로 그러함’은 노자철학의 중심가치고, ‘도’가 따르고 체현해야할 최고의 가치원칙이다. ‘도’는 우주, 세계, 사회와 인생의 총근원이자, 총근거를 상징하는 부호이다.
‘도는 만물의 근원이기도 하다’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저의 의견은 유소감과 같고 최진석과 다릅니다. 최진석의 주장이 명료하게 되어 있는 부분을 몇 군데 인용합니다. 최진석은 이 주장을 책마다 유사한 말로 수십 번 반복하기 때문에 책을 읽다 보면 저절로 외우게 됩니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p 27
“내가 보기에 노자에서 우주 발생 내지는 존재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범주는 ‘유’와 ‘무’이고, ‘도’는 이 두 범주로 대표되는 대대待對 범주들이 상호관련 속에서 존재하고, 이 대대 범주들이 서로 교직되어 우주가 구성되고 존재한다는 원리를 나타내는 범주이다.”
(노바당: 이 글에서 ‘우주발생’을 말한 것은 최진석의 큰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발생’을 말하면 자동으로 ‘근원’을 상정하게 됩니다. ‘대대對待’를 ‘待對’라고 쓴 것도 실수입니다. ‘對待’는 ‘대립하는 것[對]은 서로 의존한다[待]’는 의미입니다. ‘待對’는 ‘대답[對]을 기다린다[待]’라는 말입니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p 32
“노자가 보기에 세계는 ‘유’와 ‘무’를 대표로 하는 대대 범주가 마치 새끼줄 모양처럼 서로 꼬여(繩繩) 이루어진다. 세계가 이렇게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세계는 그렇게 이루어진다는 원리를 ‘도’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유’와 ‘무’는 한 새끼줄 안에 공존한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p 34
“노자는 짝이 되는 두 범주들이 서로 교차적으로 짜여서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보고, 세계가 이렇게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 내지는 세계를 이루는 그러한 원칙을 ‘도道’라고 이름하였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p 40 (<노자> 2장의 ‘유무상생’ 해설 부분)
“노자는 이 세계를 반대되는 것들이 꼬여서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즉 이 세계는 대립쌍(有/無, 高/低, 長/短, 上/下)이 서로 꼬여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이 이 우주의 존재 원칙(恒)이자 법칙이고, 이런 존재 형식 내지는 원칙에 도라는 기호를 붙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계는 반대되는 것들이 서로 꼬여서 이루어져 있는데, 반대되는 것들이 서로 꼬여서 이 세계를 이룬다는 이런 원칙을 ‘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 도는 이 세계의 발생 근원도 아니며 실체도 아니다.”
유소감의 ‘도는 만물의 총근원이다’라는 말은 천지만물은 모두 ‘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도는 만물의 총근거이다’라는 말은 천지만물의 존재와 변화의 원리를 ‘도’라고 한다는 의미입니다. ‘만물의 총근거’라는 것을 <노자>에서 따로 ‘천도天道’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크게 보아 최진석은, 유소감의 말 중 ‘도’는 만물의 총근거일 뿐이고, 만물의 총근원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최진석은 <노자>에 ‘만물은 도에서 나온 것이다’라는 의미의 구절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노자>에 상당히 여러 번 나오는 ‘날 생生’ 자라는 하나의 쉬운 한자에 대해 다른 해석자들과 다른, 그것도 전부 자기의 ‘도’에 대한 정의에 따른 현학적 해설을 하게 됩니다. 저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봅니다.
저는 최진석과 같은 이해방식은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2001) 저술 당시에 국내 동양학계에 포스트모더니즘, 해체론적 <노자> 해석이 유행했던 영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행이 지나가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15년 정도 지났습니다.
2015년 3월 출간한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을 읽어보니 “노자의 ‘도’”에 대한 최진석의 이해 방식은 전혀 변화가 없고, 아직도 <노자> 해석에 거의 공식으로 쓰입니다. 최진석은 <노자>에 쌍으로 된 개념이 나오거나(<노자>에는 ‘음양’, ‘유무’, ‘강약’ 등 80개 이상의 개념쌍이 있음), 노자 특유의 모호한 표현이 나오면 여지없이 이 공식을 대입해 설명합니다. <생각의 힘, 노자 인문학>의 <노자> 해석 부분은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의 축약입니다.
<노자>는 철학적으로 읽어야한다?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2015)의 서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p 7
“①노자의 ‘도’를 여전히 실체나 본체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②‘유무상생’에 귀결하는 관념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두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비주체적 이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철학적으로 읽지않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하면 그렇게 되기 쉽다. 다시 간단히 말해본다.
③도를 실체나 본체로 인정하면 반드시 ‘본질’을 긍정하게 된다. 본질을 긍정하면 가치론, 기준, 구분, 목적, 언어, 확장, 상승 등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④철학적 구조상 당연한 일이다. 노자의 <도덕경>안에는 가치론, 기준, 구분, 목적, 언어, 확장, 상승 등을 ⑤부정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들을 부정하면서 본질이니 실체니 본체니 하는 것들을 긍정할 수는 없다. 그것들을 부정하는 한, 세계를 비본질성의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⑥철학책을 철학적 시선으로 보지 않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노바당:
① 노자의 ‘도’를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고 말하면 그것을 서양철학의 실체, 본체라고 말하는 것인가?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도’는 가설적인 것으로 무형, 무명으로 존재한다. 만물은 유형, 유명으로 존재한다.
나는 위 서문에서 최진석이 ‘도를 실체나 본체로 이해하는 사람들’의 대표로 홍콩 중문대학 교수 유소감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본다. 유소감은 최진석이 번역한 <장자철학>의 “도(道) - 세계의 근본”이라는 장에서 ‘도는 실체다’, ‘도는 본체다’라는 말을 여러 번 쓴다. 그래서 최진석은 유소감이 ‘도’를 서양철학의, ‘현상’과 대비되는 ‘본체’로 인식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존재론’이라고 번역하는 영어의 ‘온토로지ontology’를 중국에서는 ‘본체론’이라고도 한다. 중국책에서 특별히 서양철학을 언급하는 곳이 아닌 구절에 나오는 실체나 본체라는 말은 중국어의 일상적 의미나, 중국철학에서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 경우 ‘실체實體’나, ‘본체本體’는 주로 사물의 표면적 모습이 아니라 사물의 본래 모습을 말하기 때문이다.
맨 위에서 최진석이 유소감의 <장자철학>에서 인용한 부분(<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p 26)의 중국어 원문을 인용한다.
<莊子哲學及其演變> p 110
道旣是世界的起源, 又是萬物的依据, 這說明在老莊那里, 道旣有宇宙論意義, 又有本體論意義.
최진석 번역: 도는 세계의 기원일 뿐 아니라 만물의 근거이다. 이것은 노장老莊이 말하는 도에 우주론적 의미뿐 아니라 본체론적 의미가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최진석은 원문의 ‘本體論’을 우리 말로 ‘본체론’이라고 그대로 번역하고 있는데 명백한 오역이다. ‘존재론’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이것은 중국어의 ‘約束(구속, 제약;restiction)’을 우리 말로 ‘약속(promise)’라고 번역한 것보다 더 심한 오역이다. 최진석은 자기가 오역해 놓고 오히려 사람들이 ‘노자의 도’를 서양철학의 ‘실체’니 ‘본체’니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유소감 본인은 이런 오해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장자철학>에서 확실히 밝히고 있다.
<장자철학> p 67
“서양 철학에서는 세계의 근본과 만물의 관계가 항상 본질과 현상의 관계였고 서양 철학자의 대부분이 실체는 실재하나 나타나지 않고 현상은 나타나나 실재하지 않는다고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플라톤은 탁자의 관념이 실재한다고 인식하였지만 탁자의 관념은 현실 속에 나타나지 않고, 현실 속의 탁자는 단지 탁자라는 관념의 불완전한 모사나 그림자일 뿐이다. 또 예를 들면 헤겔은 ‘절대 관념’이 실재하고 자연계(自然界)는 ‘절대 관념’이 외화(外化)되어 나온 현상에 불과하다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도(道)와 만물의 관계에는 진실과 허구라는 이런 구별이 없다. 도(道)와 물(物)은 본말(本末), 원류(源流)의 관계이고 본(本)과 원(源)은 진정으로 실재하는 것이지만 말(末)과 류(流)도 실재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본 ․ 말(本 ․ 末)은 중국 철학에서의 특이한 개념이고 실체와 현상은 서양 철학의 고유한 관념이기 때문에 두 가지가 서로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강조; 노바당)
최진석 번역서
유소감 <장자철학> 1990년 번역
진고응 <노장신론> 1997년 번역
20세기 초에는 모르겠으나 현대에 중국선진사상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노자의 도’를 서양철학의 ‘실체’나 ‘본체’로 오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유소감이 말하는 정도는 중국사상사 책 대부분에서 나오는 상식이기 때문이다. 최진석의 비판은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에 가깝다.
② 도는 ‘자연의 존재형식이자 운행원칙’일 뿐이라며 ‘유무상생’이라는 한 마디로 <노자> 전체를 이해한다고 뭐랄 수는 없다. 그러나 ‘도는 만물의 근원이기도 하다’는 관점을 완전히 오류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다. <노자>에서 도의 의미는 여러 가지이기 때문이다.
최진석은 사람들이 자기가 “도를 ‘유무상생’에 귀결하는 관념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비판한다고 하는 데 그런 것이 아니다. 최진석이 “노자의 ‘도’를 모두 ‘유무상생’에 귀결하는 관념으로만 이해하는 방식”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주장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비판이 아니라 폄하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태도인가?
③ 실체, 본체, 본질 등의 말들은 그 의미의 폭이 넓을 것이다. 그런 용어를 자기는 별 의식없이 쓰면서 남을 비판할 때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면 안 된다. 최진석은 “본질은 없다”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p 549
“노자가 인정하는 앎은 주체가 가지고 있는 체계를 통해서 외부 대상에 대한 지식을 넓혀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질적 의미를 체득해 나가는 것이다. 이런 능력을 노자는 명明이라고 표현한다.”
나는 자연의 ‘본질’은 변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사물마다 본질이 있고, 관계도 본질을 전제로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의 본질이 변화이므로 당연히 사물의 본질도 변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최진석의 서양철학식 본질의 정의와는 다를 것이다.
④ 본질의 의미를 서양철학적 의미의 실체나 본체와 연결시킨다면, 즉 본질은 불변이라고 가정하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양사상(중국선진사상)에는 유 ․ 도를 막론하고 그런 불변, 절대, 완전한 본질은 없다.
⑤ ‘가치론, 기준, 구분, 목적, 언어, 확장, 상승’이 무엇이 문제인가? 인간 사회가 있는 곳에 이런 것들이 없을 수 없다. <노자> 역시 이런 것들을 말한다.(2장, 17장, 34장; 功成, 9장; 功遂) 다만 가치와 기준을 고정화, 절대화하는 것, 구분을 분리화(차이를 차별화)하는 것, 목적지향적 행위를 경계하는 것이다. 또한 언어, 확장, 상승의 한계를 지적하고, 지나침을 우려하는 것이지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⑥ 최진석은 <노자>를 철학서로 읽는다. 그렇게 읽는 것은 자기 맘이지만 <노자>는 원래 철학서도, 철학자를 대상으로 한 책도 아니다. <노자>의 철학적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노자의 주장(도, 자연무위, 유약 등)의 근거나, 주장의 권위를 위해 마련된 것이지 그것이 노자의 주목적은 아니다. 이 부분 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노자>가 아니다.
<노자>는 당시의 일반적 지식인인 대국의 왕(political leader)과 측근 실력자를 대상으로 한 책이다. 그리고 <노자>는 백성을 위한 책이지만 백성들이 읽으라는 책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육아育兒 책은 아기 엄마가 읽는 책이지만, 아기를 위한 책이다. 아기를 잘 위하면 어머니에게도 좋은 결과가 된다. 육아 책은 육아에 대해 초보인 아기 엄마를 대상으로 한 것이고, 대상의 수준에 맞춰서 씌어 졌을 것이다. <노자> 역시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다.(70장; 吾言甚易知, 甚易行. 내 말은 알기도 쉽고 행하기도 쉽다.)
이데올로기를 외부에서 주입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구성한 신념의 체계라고 한다면 나 역시 이데올로기적으로 <노자>를 읽는다. 최진석도 ‘이론 적재적 관찰’(theory laden observation)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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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멘터리 '동과 서'; 동양인과 서양인은 왜 사고방식이 다를까>
"한국, 중국, 일본에 사는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은 '원숭이와 바나나'를 하나로 묶었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먹기 때문. 그러나 놀랍게도 미국, 영국에 사는 서양인들은 같은 동물이라는 이유로 '원숭이와 팬더'를 선택했다.
동양인들은 '개체간의 관계'를 중심에 두고 생각한 반면, 서양인들은 '개체의 속성'을 분석하고 분류하는 방식으로 대답한 것이다."
노바당: 동양인의 관계적 사고방식은 옳고, 서양인의 본질적 사고방식은 틀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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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도’는 만물의 근원이기도 하다.
최진석 교수의 철학적 <노자> 이해는 <노자> 2장의 ‘有無相生(유와 무는 서로를 살게 해준다; 최진석 번역)’이라는 한 마디로 끝납니다. 간단해서 좋은 것 같지만 과연 그럴까? 여기서 한 번 더 ‘노자의 도’에 대한 최진석의 말을 인용합니다. 최진석은 이것만을 ‘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p 32
“노자에 따르면 두 대립면인 유와 무가 같은 차원에서 서로 꼬여 있다는 바로 이런 도식이 이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존재 형식이자 운행 원칙이다.”
저는 최진석 교수의 <노자> 이해는 틀렸다기보다 <노자>의 일부를 전체로 확대한 것이고, 그 일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노자>의 중요하고 고유한 특색을 소홀히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5장; 道法自然, 36장; 柔弱勝剛强, 61장; 大者宜爲下 등)
최진석 교수는 <노자>에서 상당히 여러 군데에 나오는 “도가 만물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 구절은 무시해버리거나 애매하고 어려운 해석을 합니다.
예를 들어, 근간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에 <노자> 25장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맨 앞 구절인 ‘有物混成, 先天地生.’(어떤 것이 혼돈스러운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천지보다 앞서 살고 있다; 최진석 번역)에 대한 해설에서 ‘유물혼성’이라는 앞 구절은 ‘세계의 모든 현상은 대립면의 상호의존관계’라는 등 과도한 해석을 하면서도, 자기의 <노자> 이해 방식에 방해가 되는 뒷 구절, 즉 ‘어떤 것(=도)은 천지보다 앞서 살고 있다’고 자기가 번역한 ‘선천지생’에 대한 해설은 생략하고 있습니다.
‘도는 천지만물의 근원일 수 없고, 천지만물의 존재형식이자 운행원리’일 뿐이라는 최진석의 주장대로 라도 이 구절은 그 도(형식과 원리)가 천지만물보다 앞서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나는 도가 만물보다 선재적이라고 해서 꼭 만물의 근원이라 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노자>에는 ‘도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걸 다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에는 “도가 만물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장이나 구절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최진석은 도가 천지만물보다 높은 차원의 어떤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노자> 25장의 후반부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道法自然(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따른다)’ 이라는 구절을 포함하는 이 부분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노자> 사상의 핵심적 기초라고 생각합니다.
<도법자연/ 노자> 백해, 왕영걸 2010년
아래에서 <노자>에 나오는 도가 만물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구절들을 봅시다. 번역은 모두 최진석의 책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에서 인용합니다. 최진석 교수의 한문 구독점이 일반적인 경우와 차이가 있는 부분은 도올 김용옥의 책(<노자, 길과 얻음>)의 번역도 같이 인용합니다. 장 표시는 통행본의 대표격인 <왕필본 노자>에 따릅니다.
<노자> 1장;
최진석: 無, 名萬物之始, 有, 名萬物之母.
무는 이 세계의 시작을 가리키고 유는 모든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킨다.
도올: 無名, 萬物之始; 有名, 萬物之母.
이름이 없는 것을 하늘과 땅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온갖 것의 어미라 한다.
노바당: 최진석과 도올의 번역 모두 왕필본의 ‘天地之始’에 따른 것입니다. 마왕퇴본에는 ‘萬物之始’로 되어 있습니다. 최진석은 ‘無’와 ‘有’에서 단구하여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 ‘無’와 ‘有’를 <노자> 2장의 ‘有無相生’의 ‘유’, ‘무’와 같은 뜻이며, 노자의 고유한 철학적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저는 이점이 최진석의 결정적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이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노자의 도와 유무 1편, 참고)
2장;
최진석: 萬物作焉而弗始, 生而弗有
만물이 잘 자라는 것을 보고 그것을 자신이 시작했다고 하지 않고, 잘 살게 해 주고도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하지 않고
도올: 萬物作焉而不辭, 生而弗有
온갖 것은 지어지면서도 잔소리 아니하고 낳으면서도 가지려아니하고
노바당: <마왕퇴 노자>에는 ‘弗始’로 왕필본에는 ‘不辭’로 돼 있습니다. ‘弗始’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두 분의 경우 ‘날 生’ 자의 해석이 완전히 다릅니다. 최진석은 ‘살게 해 주다’로, 도올은 ‘낳다’로 해석합니다. 이점은 최진석이 <노자>에 나오는 모든 도는 만물의 근원일 수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도는 만물의 근원’이기도 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물론 최진석이 도의 의미라고 말하는 ‘천지만물의 존재방식이나 운행원리’ 역시 일반적으로 ‘道’ 또는 ‘天道’라고 부릅니다. 최진석은 이것만을 ‘노자의 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4장; 淵兮, 似萬物之宗, 湛兮, 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최진석: 깊기도 하구나! 마치 만물의 근원같다. 신비롭기도 하구나! 마치 진짜로 있는 것 같다. 나는 그것이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겠다. 하느님보다도 먼저 있었던 듯하다.
노바당: 최진석의 번역은 좋습니다.
최진석은 여기의 ‘같을 似’ 자와 ‘모양 象’ 자를 번역만 보고는 짐작할 수 없는 특이한 해석을 합니다. 번역의 글만을 읽어보면 노자는 도를 ‘만물의 근원’이며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노자 특유의 단정 짓지 않는 표현 방식을 썼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이해가 옳다고 봅니다. 그러나 최진석은 그 반대라고 합니다. 최진석의 글을 인용합니다.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p 121
“‘사似’라는 글자는 ‘무엇무엇 같다’, ‘무엇무엇처럼 보인다’라는 뜻을 가지지만, 그 안에는 ‘무엇무엇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무엇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구절을 정확히 해석해 보면, ‘만물의 근원처럼 보이지만, 사실 근원이 아니다’, ‘진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러하지 않다’는 뜻이 됩니다.
‘무엇무엇처럼 보인다’는 똑같은 의미를 가진 ‘상象’이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나오지요. ‘상제보다도 먼저 있었다’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여기서는 ‘사’ 자를 쓰지 않고 ‘상’ 자를 써서 ‘무엇무엇처럼 보인다’는 의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상’ 자는 ‘사’ 자와는 달리 ‘무엇무엇처럼 보이는데 사실도 그러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래서 도가 ‘상제’보다 앞서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상제보다 앞선다.”
‘같을 似’ 자에 대한 최진석의 해석은 부분적으로는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似’ 자는 ‘비슷하다, 유사하다’(최진석의 말대로 비슷한 것은 같은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반대되는 것은 아닙니다.)라는 뜻도 있지만, ‘마치 ~ 인 것 같다(중국어로 好像, 擬似. 고대에도 마찬가지)’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지만 확고하게 단정할 수는 없다(表示不確定)’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노자는 ‘도가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겠다(吾不知誰之子)’고 말합니다. 이것도 ‘도를 낳은 것은 없다, 도가 최우선이다’라는 의미의 단정짓지 않는 표현입니다.
최진석 왈: “도는 ... 사실 상제보다 앞선다.”
노자가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까? 최진석이 ‘하느님’이라고 번역한 ‘帝’는 ‘上帝’로 일반인이 믿는 상나라 때부터의 최고 인격신을 말합니다. 노자가 ‘상제’를 말했다고 해서 그런 게 실제로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상제를 믿는 사람들은 천지만물의 근원이 상제라고 합니다. 노자는 설사 그런 상제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도는 그것에 선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최진석은 ‘도는 만물의 존재형식이자 운행원리’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형식이나 원리라는 것은 추상적인 것인데 상제보다 앞선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象帝之先’의 ‘상’ 자는 위에서 ‘사’ 자를 두 번 썼으니 같은 의미의 다른 글자를 써서 기계적 반복(死版)을 피한 표현상의 기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는 두 글자가 완전히 동일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최진석이 자주 참고하는 <설문해자>에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설문해자>: 似, 象也. ‘사’는 ‘상’과 같은 의미다.
그리고 최진석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노자의 ’도‘를 실체, 근원, 본체 등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최진석의 그런 이해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진석은 <노자> 해설 책에서 실체니 본체니 본질이니 하는 말을 수십 번 하는데 그런 말들이 <노자>에 대한 오해(?)를 푸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의문입니다. 최진석은 이런 말들에 대한 비판으로 ‘노자의 도는 만물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 하지만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실체니 본질이니 하는 말은 접어두고 최진석이 부정하는 ‘노자의 도는 만물의 근원이기도 하다’는 것만을 증명하려 합니다.
6장;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최진석: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러 미묘한 모성이라 한다. 암컷의 갈라진 틈, 이를 일러 천지의 근원이라 한다. 면면히 이어져 오면서 겨우 있는 것 같지만, 그 작용은 무궁무진하도다.
노바당: 도가 천지만물의 근원일 수 없다는 최진석도 여기서는 어쩔 수 없이 ‘천지의 근원’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곡신’과 ‘현빈’은 도의 비유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도는 천지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경우 최진석은 책에 뭐라고 해명을 했을까?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을 펴보니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이 없습니다.
최진석이 ‘천지의 근원’이라고 번역한 ‘천지근’은 <마왕퇴 노자>에는 ‘천지지근天地之根’이라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1장의 맨 끝에 나오는 ‘중묘지문衆妙之門’은 최진석이 “온갖 것들이 들락거리는 문”이라고 번역했는데, 6장에서 ‘현빈지문玄牝之門’은 ‘암컷의 갈라진 틈’, ‘천지(지)근’은 ‘천지의 근원’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문’이나 ‘근’이나 모두 여성 생식기의 비유입니다. ‘중묘’나 ‘천지’나 모두 만물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6장의 ‘문’이나 ‘근’도 최진석은 1장과 같이 성행위가 연상되는 ‘들락거리는 문’이라는 뜻으로 번역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1장과 6장의 ‘문’은 출산 기관으로서의 여성 생식기를 말합니다. 출산은 자식이 나오는 일방향적 과정입니다.
최진석이 아무리 두 대립면의 상호관계를 좋아한다 해도 “온갖 것들이 들락거리는 문”이라고 번역한 1장의 ‘중묘지문衆妙之門’은 ‘뭇 묘한 것들(만물)이 나오는 문’이라고, 6장의 ‘천지근天地根’은 ‘천지가 나오는 뿌리(근원)’라는 뜻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곡신谷神’이나 ‘현빈玄牝’ 모두 ‘천지의 근원(天地根의 최진석 번역)으로서의 도’의 비유입니다. 이러한 도는 ‘면면약존, 용지불근綿綿若存, 用之不勤’입니다. 최진석은 ‘면면히 이어져오면서 겨우 있는 것 같지만, 그 작용은 무궁무진하도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겨우 있는 것 같지만’이라는 표현은 있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 최진석은 여기서는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면면히 이어져 오면서 그 작용은 무궁무진’한 데 그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최진석이 여기서 ‘면면약존, 용지불근’을 애매하게 번역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한 4장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최진석이 앞에서 말한 4장의 ‘사혹존 似或存’이 ‘진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러하지 않다’, 즉 ‘없다’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6장에서 ‘약존若存’을 ‘있다’고 확실히 표현하기는 어려워 진 것입니다. 그래서 ‘겨우 있는 것 같지만’이라는 두리뭉실한 번역을 한 것입니다.
6장의 ‘약존若存’이나 4장의 ‘사혹존似或存’ 모두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도’의 존재를 긍정하지만 단정 짓지는 않는 노자의 특유한 표현일 뿐입니다.
‘날 생(生)’ 자의 해석이 이렇게 어렵다니
10장; 生之, 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이 구절은 <마왕퇴 노자>에도 실려 있는데 최진석은 51장에 같은 문장이 나온다는 이유로 삭제했습니다. 아래의 51장에 번역을 싣습니다.
51장; 道生之, 德畜之, 長之育之, 亭之毒之, 養之覆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최진석: 도는 낳고 덕은 기른다. 기르고 양육하며 안정시키고 성숙시키며 돌보고 덮어준다. 무엇을 낳고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고 무엇을 하고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으며 무엇을 길러 주고도 그것을 주재하려 들지 않는다. 이것을 현덕이라고 한다.
노바당: 여기서의 ‘生’ 자는 아래 25장의 ‘先天地生’의 ‘생’ 자와 의미가 다릅니다. 25장에서 함께 다룹니다.
25장; 有物混成, 先天地生.
최진석: 어떤 것이 혼돈스러운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천지보다 앞서 살고 있다.
노바당: 여기서 ‘어떤 것’은 당연히 ‘도’를 가리킵니다. 도는 천지만물보다 선재한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여기서의 ‘날 생’ 자는 ‘낳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최진석은 ‘도가 천지만물의 근원이기도 하다’는 점을 극단적으로 부정합니다. 그래서 <노자>에서 ‘날 생’ 자가 ‘발생시키다, 낳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예가 많지 않다(있기는 하다는 말인 듯)고 하면서도, 뒤에서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p 217
“노자의 철학 체계에서 ‘생’ 자는 ‘산다, 살고 있다’ 내지는 ‘생육한다’ 등의 의미이다. 만일 ‘발생시키다’ 혹은 ‘낳다’는 의미로 새긴다면 제2장의 ‘유무상생有無相生’과 제40장의 ‘유생어무有生於無’는 전혀 모순적인 체계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혀 모순이 되지 않습니다. 최진석은 ‘선천지생’의 ‘날 생’자의 의미가 ‘존재하다’
(최진석 표현으로는 ‘살고 있다’)라는 것을 이용하여 마치 <노자> 전체의 ‘생’ 자가 그런 의미라고 확대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최진석은 ‘도는 만물의 근원이기도 하다’는 점을 부정하기 위해서 ‘낳다’라는 평범한 의미를, 또 2장과 40장의 ‘유’와 ‘무’는 의미의 차원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해하기 쉬운 간단한 구절도 엄청난 현학적 해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위의 10장과 51장에 ‘生而不有’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자를 몇 글자라도 아는 사람이면 다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낳았지만 소유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숨겨진 주어는 ‘도’입니다. 도는 만물을 낳았지만 만물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통치자도 이 같은 도를 닮아 백성을 소유물로 보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문장을 최진석은 저같이 일반적으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도가 만물의 근원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51장의 최진석 번역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道生之, ...... 生而不有
“도는 낳고, ... 무엇을 낳고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고”
번역은 좋습니다. 그러나 도가 낳은 그 무엇은 당연히 천지만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는 만물의 근원’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텐데 최진석은 어떻게 설명할까?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p 388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낳는다’가 무형질에서 유형질로의 전환이나 어머니가 자식을 낳듯이 낳는다는 의미가 아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내용은 앞에서 여러 차례 얘기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냥 넘어간다.”
그러고 보니 ‘生而不有’라는 구절은 위에서 인용한 2장에도 나옵니다. 최진석은 여기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잘 살게 해 주고도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하지 않고”
똑 같은 문장을 한군데서는 ‘낳다’라고, 다른 데서는 ‘살게 해주다’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51장에서는 앞에서 여러 번 뭔가 설명했다고 그냥 넘어간다는데, ‘生而不有’가 처음 나온 2장에는 아예 이에 대한 해설이 없습니다. <곽점 노자>와 <마왕퇴 노자>의 2장에 해당되는 부분에는 ‘생이불유’의 구절이 없습니다. 그래도 본인이 구성한 원문에 통행본 <노자>에 따라 이 구절을 삽입했다면 당연히 그에 대한 해설을 했어야 합니다.
최진석이 앞에서 얘기했다는 부분이 바로 25장의 해설입니다. 그런데 25장의 ‘생’ 자는 ‘낳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최진석은 51장의 해설에서 번역은 ‘낳다’라고 했으면서도 그 말의 의미가 ‘어머니가 자식을 낳듯이(비유) 도가 만물을 낳는다’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참 어려운 분입니다. 책에 뻔히 씌어 있는 글은 뻔하게 읽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마왕퇴 노자> 영역본 <곽점 노자> 영역본
참고로, 미국 다트머스대학의 중국학 교수인 로버트 헨릭스(R. Henricks)의 ‘生而弗有’에 대한 번역을 소개합니다. 이 분은 <노자> 영어 번역, 해설 책 여러 권이 본토인 중국에서 번역 출판될 정도의 인정을 받는 <노자> 전문가입니다.
<LAO-TZU, TE-TAO CHING> (<마왕퇴백서노자> 번역서)
It(the Tao=도) gives birth to them(the ten thousand things=만물) but doesn't try to own them.
give birth to = (아이를) 낳다(bear)
own = 소유하다 (have)
25장 하단부;
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최진석: 도는 크고, 하늘은 크고, 땅은 크고, 왕도 또한 크다. 이 세상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왕이 그 가운데 한자리를 차지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그렇다면 ‘道’는 유형, 유명인 천, 지, 왕과 같이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도는 존재한다는 면에서는 비교 대상이 되지만 구체적인 사물이 아닙니다. 도는 무형, 무명입니다.
그리고 ‘지경 역域’ 자를 최진석은 ‘이 세상’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최진석은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자연’, ‘천지’, ‘이 세상’을 같은 의미로 쓰기 때문입니다. 최진석은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역’이라는 말은 천지보다 더 큰 ‘도’를 포함하는, 천지보다 더 큰 규모의 범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천지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증명하지 못합니다. 도라는 개념은 크게는 인류 사회의 평화를 위한(<노자> 35장; 天下 ... 平太) 노자의 통찰이며 가설(hypothesis)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통찰로 구성한 세계관이 실제의 세계에 적용되었을 때 건전하게 작동 하는가 만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점이 4장 부분에서 말한 것 처럼 <노자>에 단정 짓지 않는, 모호하다고 할 수 있는 표현방식(~인 것 같다; 若, 如, 或, 似, 象)이 그렇게 많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증명할 수 없는 자기의 통찰인 생명의 자발적 질서 형성(self-organizing order, 37장; 萬物將自化 ... 天下將自定)을 기초로 한 유기체적 세계관(organismic world-view)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신중하고 합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은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도’가 실재하는지 검증 가능한가의 여부가 아니라, <노자>에 그런 의미가 담긴 구절이 있는가의 여부만을 논의하는 것입니다.
<노자>는 도를 연구하기 위한 철학서가 아니라, 현실의 최고 권력자인 왕에 대한 구체적인 조언과 경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왕이 그보다 큰 도, 천, 지를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최고의 권력자(리더)의 모든 행위가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64장; 萬物之自然)’을 보장하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보다, 땅보다, 하늘보다 더 큰 도마저도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제한(道法自然)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도를 따르는 왕의 제한적 정치 행위를 <노자>에서 ‘무위’라 하는 것입니다.
40장; 反者, 道之動, 弱者, 道之用.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최진석: 반대로 향하는 것이 도의 운동 경향이고 유약한 것이 도가 작용하는 모습이다. 만물은 유에서 살고, 유는 무에서 산다.
도올: 그 반대로 되돌아 가는 것이 길의 늘 그러한 움직임이다. 약한 것은 길의 늘 그러한 쓰임이다. 하늘 아래 만가지 것들이 있음에서 생겨났는데, 있음은 없음에서 생겨났도다.
노바당: 노자 사상 전체를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노자의 ‘도’가 만물의 근원이 아니라는 최진석의 주장을 비판하려는 것이므로 후반부의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라는 구절에 대해서만 얘기합니다. <노자>는 대부분 상용한자에 속하는 쉬운 한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문장도 쉽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천하의 만물은 유에서 생겨났고, 유는 무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최진석은 그렇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물은 유에서 살고, 유는 무에서 산다.’라는 약간 이상한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합니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p 325
“‘만물은 유에서 살고, 유는 무에서 산다’(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에서 생生 자를 ‘발생시키다’ 혹은 ‘낳다’로 해석하면 바로 모순이 도출된다. 즉 천하의 만물 자체가 유인데 어떻게 유에서 천하만물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유’는 ‘유형’으로서의 ‘천지’, ‘무’는 ‘무형’으로 천지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도’를 가리킨다고 보면 아무런 모순도 생길 수 없습니다. 천지도 ‘유’고, 만물도 ‘유’인 것은 맞습니다. 천지는 만물을 한꺼번에 일러 말하는 것(天地者, 萬物之總名也; 곽상)이고 천과 지 역시 만물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천지가 만물을 낳기도 합니다. 만물인 부모가 만물인 자식을 낳는 것(父母生我. <诗·小雅·正月>)은 최진석도 인정할 것입니다. 부모도 ‘유’고, 자식도 ‘유’입니다.
최진석이 이런 정도의 의미를 무슨 모순이니 하며 이상한 해석을 하는 것은 ‘도는 천지만물의 존재형식이자 운행원리’일 뿐이라는 자기의 주장을 고수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최진석의 큰 문제 중 하나는 한문을 읽을 때 ‘문자형상의 동일성이 의미의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기본적 상식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자> 2장의 ‘유무’와 40장의 ‘유무’는 그 의미 수준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간단히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 통장에 100만원이 있다고 칩시다.
부자 친구 왈: 요번에 건물 하나 사려는 데 너 돈 좀 있냐?(有?)
나: 없어!(無!)
가난한 친구 왈: 집에 쌀이 떨어졌어. 너 돈 좀 있냐?(有?)
나: 있어!(有!)
<노자> 2장의 ‘유무상생’의 ‘유무’는 위의 표현에 나오는 정도의 상대론적인 의미입니다. 여기서의 ‘유무’는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무상생’과 ‘난이상성, 장단상형, 고하상영, 음성상화, 전후상수’라는 말이 동급으로 병렬되어 있는 것입니다. ‘길고 짧은 것(長短)은 대봐야 안다’는 것 입니다.
2장의 ‘유무’가 40장의 ‘유생어무’의 ‘유무’와는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을 ‘有, 無’라고 글자가 똑같이 생겼다고 동일한 의미로 생각하는 것이 최진석의 문제의 시작입니다.
<노자> 2장과 40장의 ‘유무’의 의미 수준이 다른 것은 간단히 알 수 있습니다.
유무의 순서를 바꾸어서 말이 되는가 알아보면 됩니다. ‘유무상생’을 ‘무유상생’으로 바꾸어도 똑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나 ‘유생어무’를 ‘무생어유’로 바꾸어 보면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식(子)이 자기 어머니(母)를 낳을 수는 없습니다.
상대되는 쌍은 서로 의존한다는 음양대대의 사유 방식이 중국 사상의 기본이지만, 그것은 천지 만물의 단계(유)에서입니다. 노자에게는 그 이상의,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도’(무)가 있습니다. 최진석이 ‘도’의 유일한 의미라고 주장하는 ‘유무상생’의 ‘유무’는 ‘유생어무’의 ‘유’(유형 = 천지)에서의 ‘유무’일 뿐입니다.
無---生--->有 (유<--相生-->무)
도 천지
무형 유형
무명 유명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노바당: 천하의 만물은 유(유형 = 만물의 총칭으로서의 천지)에서 생겨난 것이고, 유는 무(무형 =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도)에서 생겨난 것이다.
위 구절은 이런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기원’, ‘근원’ 그리고 ‘단일성’, ‘보편성’ 같은 말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노자> 해석을 하는 최진석을 빼고는 거의 모두 이렇게 해석합니다.
여기서 ‘유생어무’와 관련하여 다시 <노자> 25장의 ‘유물혼성, 선천지생’과 같이 ‘날 生’ 자에 대한 최진석의 논리를 검토해 보겠습니다. 먼저 최진석의 25장 해설을 좀 길게 인용합니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p 216
“노자 사상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넘어야할 중요한 산 가운데 하나가 노자 철학 체계 안에서의 ‘생’ 자의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생’ 자를 ‘발생시키다’ 혹은 ‘낳다’로 해석하는데, 사실 <도덕경> 안에서 그런 의미로 사용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낳다’ 혹은 ‘발생시키다’는 의미를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노자와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문자는 ‘생生’이 아니라 ‘산産’이라는 글자를 사용하고 있다.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다.
<문자文子, 도원道原>
有形産於無形, 故無形者, 有形之始也. ... 有名産於無名, 無名者, 有名之母也.
‘형체가 있는 것들은 형체가 없는 것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형체가 없는 것은 형체가 있는 것의 출발점이 된다. ... 이름이 있는 것은 이름이 없는 것에서 생겨난다. 이름이 없는 것은 이름이 있는 것의 어머니다.’
‘발생하다’, ‘생겨나다’, 그리고 ‘낳다’ 등의 의미를 문자文子는 생 生 자가 이미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굳이 산産 자로 표현하였다.” (강조; 최진석)
노바당: <문자>는 과거에는 위서로 취급되었으나 서한시기의 중산왕 묘에서 죽간 <문자> 일부가 발굴됨에 따라 전국말, 한초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가를 중심으로 유가, 법가를 종합한 일종의 <노자> 해설서라 할 수 있습니다.
최진석은 “노자 사상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넘어야할 중요한 산 가운데 하나가 노자 철학 체계 안에서의 ‘생’ 자의 의미이다”라고 단호히 말합니다. <노자>에서 ‘날 생’ 자의 의미가 극히 중요하다는 최진석의 말에 동의합니다. 만약 ‘생’ 자에 대한 최진석의 이해가 오류라면 최진석은 노자 사상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니, 노장 사상의 기초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최진석은 <노자>와 가까운 시기의 <문자>에 ‘낳다’라는 의미로 ‘생’ 자 대신 ‘산’ 자가 씌여있으니 <노자>에서의 ‘생’ 자의 의미는 ‘낳다’가 아니라는 것인데 그런 논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한자는 경우에 따라 이것도 저것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최진석이 인용한 <문자, 도원> 내에서도 증명됩니다.
<문자, 도원>
無形者, 一之謂也. 一者,無心合于天下也. 布德不慨,用之不勤,視之不見,聽之不聞,無形而有形生焉,無聲而五音鳴焉,無味而五味形焉,無色而五色成焉,故有生于無,實生于虛.
무형은 하나를 이르는 것이다. 하나는 무심으로 천하에 합하고, 덕을 베풀어도 흔쾌해 하지 않고, 사용해도 다하지 않고, 보려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해도 들리지 않는다. 무형이면서도 유형이 생겨 나오고, 무성이면서도 오음이 울려 나오고, 무미면서도 오미가 형성되고, 무색이면서도 오색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유는 무에서 생기고, 실은 허에서 생긴다. (강조; 노바당)
위 두 가지 <문자> 인용문을 읽어보면 최진석의 여러 가지 문제가 바로 보입니다.
최진석이 인용한 ‘유형산어무형有形産於無形’이나 제가 인용한 ‘무형이유형생언無形而有形生焉’이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문자는 ‘낳다’라는 의미로 경우에 따라 ‘산産’ 자를 쓰기도 하고, ‘생生’ 자를 쓰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최진석의 번역대로 문자는 당연히 40장의 ‘생’ 자를 ‘낳다’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최진석의 포스트모더니즘식 목적론적 해석이 뻔히 약점이 보이는 위와 같은 자기 파괴적 증명과 논리를 구사하게 만든 것입니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인용한 부분이 <노자> 40장에 나오는 ‘유생어무’의 해설이기 때문입니다.(故有生于無,實生于虛) 문자는 무를 무형으로, 유를 유형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자 역시 저 처럼 ‘도는 만물의 근원이기도 하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40장의 무 = 무형 = 하나(一) = 도) <문자> ‘도원’ 편의 ‘道原’이라는 말 자체가 ‘근원으로서의 도’라는 말입니다.
또 <노자> 1장에서 최진석이 ‘무’, ‘유’ 아래에서 단구하여 자기 <노자> 이해의 최고의 기초로 삼고 있는 부분을, 최진석의 말대로라면 “노자와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문자” 역시 저와 같이 ‘무명’, ‘유명’으로 단구하고 있습니다.(無名者, 有名之母也)
<노자> 1장의 ‘유무’, 2장의 ‘유무’, 40장의 ‘유무’는 모두 그 의미가 다릅니다. 최진석은 이 ‘유무’를 모두 같은 의미로, 그것도 엄청난 철학적 의미가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진석이 주장하는 ‘도는 천지만물의 존재형식이자 운행원리’일 뿐이고, 그 원리는 ‘대립면(유무)의 상호관계, 공존, 꼬임, 긴장’이니 하는 것은 ‘음양’이라는 한마디면 다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음양론陰陽論’은 <노자> 사상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노자>의 고유한 특징적 부분은 아닙니다. (노바당의 ‘음양론’ 참고)
태극도(무극도, 陰陽魚圖)는 새끼줄(로프)의 이미지
宋초 도사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최진석: ‘유’와 ‘무’는 한 새끼줄 안에 공존한다.
포스트모더니즘 <노자>해석의 문제점
최진석의 <노자> 해석은 정신문화연구원 김형효 교수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김형효는 <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 1999>와 <사유하는 도덕경, 2004>에서 <노자>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체적 해석을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김형효와 최진석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노자에서 데리다까지, 2001년> p 269 김형효 - ‘데리다를 통해 본 노장의 사유문법’
“노장老莊 사상의 사유문법은 데리다가 말한 문자학文字學(le grammatologie)의 문법과 다른 것이 아니다.”
“노자의 도는 유무의 양 계열의 교차배열법이며 동시에 이중 긍정과 이중 부정의 변화 반복법과 같다.”
최진석과 김상환은 공동 논문 ‘노장과 해체론’에서 ‘노장과 데리다를 읽고 내린 다소 과장된 결론’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노자에서 데리다까지> p 323 김상환 ․ 최진석 - ‘노장과 해체론’
“노장은 동양의 해체론이고, 해체론은 서양의 노장이다.”
김형효와 최진석은 데리다와 노장을 거의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노장과 데리다는 ‘태극도’와 두 사람이 노자의 ‘도’에 대한 비유로 쓰는 ‘새끼줄의 이미지’가 다른 것 이상으로 다릅니다. 노장의 ‘도’는 김형효와 최진석이 부정하는 이 세계의 ‘근원과 연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형효는 이렇게 말합니다.
<노자에서 데리다까지> p 284
“노자의 도는 ‘종국적으로 뿌리 없는 나무’에 비유될 수 있겠다.”
‘뿌리 없는 나무’는 김형효가 데리다의 표현을 인용한 것입니다. 데리다나 김형효, 최진석은 모두 가지(末)의 세계(천지, 만물)에 대해서만 ‘보충대리의 논리’니, ‘우주의 문법’이니, ‘만물의 존재 형식과 운행 원리’니 하면서 엄청난 철학인 양 어려운 용어를 써서 논의하지만, ‘음양론’을 조금만 이해하면 간단히 알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자의 나무는 뿌리(本, 根)가 있습니다. 뿌리는 바로 ‘근원으로서의 도’의 비유이고, 천지만물의 비유인 가지(末)와는 차원이 다릅니다(16장; 夫物云云, 各復歸其根. 만물은 왕성하게 자라지만 모두 제 뿌리로 돌아간다). 다만 뿌리는 가지와 달리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14장; 視之不見,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다)에 무형(무)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가지는 유형(유)입니다. 그러나 노자의 뿌리는 가지와 일체一體이고,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현상(phenomena)과 분리된 본체(noumena)가 아닙니다.
<노자>에는 ‘거피취차去彼取此’라는 구절이 여러 번 나옵니다. 최진석의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이라는 책 제목도 이 구절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런데 최진석은 ‘이것’을 ‘이 세상’ 또는 ‘천지’로, ‘저것’은 ‘이 세상 = 현상 세계’의 관념적 실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노자>를 포함한 중국선진사상에는 플라톤적 의미의 실체를 상정한 경우가 없습니다. <노자>에서 ‘이것’은 ‘도를 따르는 행위(25장;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를, ‘저것’은 ‘도를 벗어난 행위(30장, 55장; 不道, 53장; 非道)’를 의미합니다. 노자는 ‘이 세상(천지)’보다 더 큰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도’를 상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기적 유전자>를 쓴 진화론자인 옥스포드 대학 교수 리차드 도킨스(R. Dawkins)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형이상학적 헛소리’라고 비판하며 그 요점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적 진리를 부정하면서도 과학 용어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과학자의 비판이 무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악마의 사도> p 102 리차드 도킨스 - ‘벌거벗겨진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무엇이든 괜찮다는, 절대적 진리는 없으며, 쓰여진 것은 다른 모든 것들과 똑같은 지위를 가지며, 어떤 관점도 특권을 지니지 않는다.”
이런 극단적 상대주의(relativism)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요점이라면 포스트모더니즘적 <노자> 해석 역시 다른 <노자> 해석에 대해 어떤 특권도 없으며, 옳은 해석이라고 주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과 중국철학의 관계에 대한 중국의 철학자 이택후(李澤厚)의 언급을 인용합니다. 저는 이택후가 말하는 ‘중국의 전통 철학, 광의의 형이상학’에 <노자>가 당연히, 그것도 큰 비중으로 포함된다고 봅니다.
<중국철학이 등장할 때가 되었는가?> p 137 리쩌허우
“중국의 전통 철학은 포스트모던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중국 전통에는 본질주의가 없고, 이원二元 분리가 없고, 본체론(존재론)이 없고, 포스트모던이 반대하는 온갖 협의의 형이상학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광의의 형이상학이 있기 때문에 포스트모던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지요.”
<곽점초간노자> 갑본, 을본, 병본
1993년 전국시대의 초楚나라 무덤에서 엄청난 양과 내용의 책들이 발굴되었습니다. 대부분 유가의 책이지만 <노자> 책도 나왔습니다. 전국시대는 진시황제가 통일(bce 221)하기 전이므로 <마왕퇴 노자>보다 적어도 수십 년, 많게는 백년 이상 앞서는 <노자>가 나온 것입니다. 이 책은 호북성 곽점이라는 지역에서 발굴되었고, 대나무(竹簡) 위에 쓴 것이라 대개 <곽점초간노자郭店楚簡老子>라 부릅니다.
<곽점초간노자>는 현행본 <노자>의 1/3 정도 분량(1,700 자 정도)이고, 통행본과 비교하여 나머지 2/3 부분이 분실된 것이 아니라 당시에 필사된 전체 분량입니다. 저는 <곽점초간노자>를 초사본이 아니라, 형성 과정 중의 <노자>로 봅니다.
<노자> 40장의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가 <곽점 노자> 갑본에는 ‘天下之勿生於又, 生於亡’(天下之物生於有, 生於無)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운데 ‘有’ 자 하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문장의 ‘유, 무’의 해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곽점 노자>에는 ‘유생어무’가 ‘생어무’로 되어 있으나, <마왕퇴백서노자>에 이미 ‘유생어무’로 되어 있습니다. <곽점초간노자>가 원전과 가까울 수 있으나, 이 경우 필사할 때 부주의하여 ‘유’ 자 아래에서 중문重文 부호(=, 똑같은 글자가 연이어 나올 때 그 글자 대신 쓰는 부호)가 빠졌을 수 있습니다. 최진석이 아래에 인용한 위계붕 역시 저와 생각이 같습니다. 저는 탈락(필사 후에 지워진 것)이 아니라 필사 오류라고 봅니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p 326
“죽간본에서는 무엇보다 만물을 유에서도 살고 무에서도 산다고 표현함으로써, 이 세계가 유와 무의 상호 공존하는 관계 속에 존재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중국 사천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위계붕은 유有 다음에 글자가 중복될 때 표시하는 약호 ‘=’이 탈락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죽간본의 구절도 같게(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최진석은 이렇게 말합니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p 327
“이것은 진짜로는 있지도 않은 약호 ‘=’을 탈락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에 불과한데, 이는 이 부분을 수직 하강적 발생론으로 보려는 목적 아래 기도된 억지로 밖에 받아들일 수 없다.
이와 달리 같은 글자가 중첩되는 다른 여러 곳에는 분명히 약호 ‘=’이 모두 새겨져 있다. (예; 죽간 갑본 24간, 27간) 위계붕이 노자 철학에 대한 자신의 수직 하강적 이해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짙은 혐의가 생긴다.”
그렇지 않습니다. 최진석의 말이 틀린 것입니다. <곽점초간노자> 갑본의 통행본 <노자> 37장에 해당되는 부분(죽간 14간)에 명백히 중문부호가 빠진 경우('智 =足'은 '智 = 足 ='이 되어야 함)가 있고, <곽점 노자>에는 오자, 탈자 등 필사 오류도 여러 곳입니다. 최진석은 그런 사실에 무지하면서 오히려 위계붕이 자기 학설을 위해 조작을 불사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40장; 生於又(有)生於亡(無) 37장; 족(足) 아래 중문부호(=)가 빠져있음.
<곽점 노자>의 ‘천하지물생어유, 생어무’가 원래의 노자 사상이고, 그 이후 언젠가에 <마왕퇴 노자>처럼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로 개조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개조가 일어날 수 있었다면 당연히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곽점 노자> 필사 단계에서도 그 역의 개조나 필사 오류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최진석 교수처럼 <노자>를 철학서로 읽는 분들이 주로 ‘유有’와 ‘무無’를 노자의 고유 용어로 보고, ‘유무’의 대대對待를 강조하여 <곽점 노자>의 구절이 옳다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유’와 ‘무’가 동일 차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의 ‘유무’는 차원이 다릅니다. 만약 ‘유’와 ‘무’의 차원이 같다면 ‘천하지물, 생어有, 생어無’라고 되어 있는 문장은 2장의 ‘有無상생’과 같이 ‘천하지물, 생어有無’라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최진석: 도는 일을 내고, 일은 이를 살리며, 이는 삼을 기르고. 삼은 만물을 이룬다. 만물은 음을 진 채 양을 품고 있는 데, 두 기가 서로 만나 조화를 이룬 것이다.
도올: 길은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는데 셋은 만가지 것을 낳는다. 만가지 것은 어둠을 등에 지고 밝음을 가슴에 안고 있다. 텅빈 가운데 기를 휘젖어 조화를 이룬다.
노바당: 최진석은 ‘날 생生’ 자의 의미를 <노자> 전체에서 ‘낳다’라는 의미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42장의 ‘생’ 자 번역에 ‘내다, 살리다, 기르다, 이루다’라는 각종 어휘를 동원합니다. 똑 같은 한자를 여러 가지 우리말로 표현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같거나 비슷해야 합니다. ‘내다’라는 말은 다른 세 가지와 현격하게 의미의 차이가 있습니다. ‘내다’는 오히려 ‘낳다’와 의미가 통합니다. 이걸 최진석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p 338
“‘도는 일을 내고, 일은 이를 살리며, 이는 삼을 기르고. 삼은 만물을 이룬다’(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라는 첫 구절은 <도덕경> 안에서 가장 해석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래서 다양한 다른 관점들이 있어 왔다. 지금까지의 다양한 관점들이 내용은 조금씩 다르더라도 하나의 입장으로 일치한다. 즉 도에서 일이 나오고, 일에서 이가 나오며, 이에서 삼이 나오고, 삼에서 만물이 나온다는 수직 하강적 발생론인 것이다.”
그러면서 최진석은 “<도덕경>에서 ‘도’는 ‘일’로 표현되는데, 어떻게 도가 일을 다른 것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가?”하고 “<도덕경> 자체 안에서 모순”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노자>에서 ‘일一’이 ‘도’를 상징하는 경우 대체로 그 의미는 도가 상대적인 만물(物有死生)과는 차원이 다른 큰 것(道無始終), 분별할 수 없는 것(14장; 混而爲一), 유일한 것(25장;獨立而不改)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도 문자 형상의 동일성과 의미의 동일성 문제가 있습니다.
‘도는 하나를 낳았다(하나는 도에서 생겨났다)’에서의 ‘하나’는 우리의 삶의 유일한(一) 터전인 이 세계(천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천지에서 음양(二)의 화합으로 만물이 생겨난 것입니다(32장; 天地相合, 以降甘露). 이 문장 전체는 일, 이, 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다(확실하게 알 수도 없지만) 여러 과정을 거쳐 ‘도가 만물을 낳는다(道生萬物, 만물은 도에서 생겨난 것이다)’는 것입니다. 만물은 ‘도’라는 동일한 근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공통성이 있다는 것입니다(天下一家, 萬物同胞).
이 구절은 정치적 함의가 큰 말입니다.
그런데 최진석은 노장 관계 논문집인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에서 ‘도생일道生一’은 ‘우주발생론’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최진석은 ‘도는 만물의 근원이 아니다’라는 자기주장의 일관성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p 30
“따라서 이 구절(道生一)은 우주발생론뿐만 아니라 세계 존재 양식까지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자 철학에서 우주발생론은 그래도 음양론과 더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노자>는 형식 논리가 아닙니다. 저는 42장의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을 아래와 같이 비유로 생각합니다.
<漢書/ 沟洫志>
河水重濁. 號爲一石水, 而六斗泥.
황하의 물은 무겁고 탁하다. 물 한 섬에 진흙이 여섯 말이나 된다.
황하 우주론
“흙 반, 물 반이 섞여 있는(有物混成; 25장) 황하(만물의 근원으로서의 ‘道’)의 물을 한 그릇 떠 놓고(道生一; 42장) 한참을 그냥 두면 저절로(自然; 25장) 입자가 큰 흙(濁; 15장)은 무거우므로(重; 26장) 가라앉아 아랫부분(地, 陰)이 되고, 입자가 아주 작은 흙(淸)은 가벼우므로(輕) 떠서 윗부분(天, 陽)이 된다(一生二).
가라앉은 흙에도 적지만 물이 섞여 있고, 윗부분의 물에도 적지만 흙이 섞여 있다. 이 섞여 있는 흙과 물로 질을 만들고(二生三), 이 질로 갖가지 그릇을 만든다(三生萬物).”
黃河母親像; 중국 감숙성 란주
중국인들 왈: 우리(만물)는 모두 어머니 황하(도)의 자손이다.
52장;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旣得其母, 以知其子, 旣知其子, 復守其母, 沒身不殆.
최진석: 이 세계에는 시작이 있는데 그것이 이 세계의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한다. 만일 이 세계의 진상에 대한 통찰을 얻으면 그것을 통해 현상 세계를 알 수 있다. 현상 세계를 알고 나서 다시 세계의 진상을 지키는 데로 돌아간다면,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도올: 하늘 아래 시작이 있었다. 그러니 그 시작으로 하늘 아래의 어미를 삼으라! 이미 그 어미를 얻었을진대, 그 아들도 알아야 한다. 이미 그 아들을 얻었을진대, 다시 그 어미도 지킬줄 알아야 한다. 그리하면 몸이 없어질 때까지 위태로움이 없을 것이다.
노바당: <노자>에는 ‘유有’, ‘무無’, ‘일一’, ‘강强’, ‘약弱’ 등, 동일한 한자가 다른 의미로 씌어 진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반대의 뜻으로 쓴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노자>를 읽을 때 의미의 차원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고, 어떤 구절이 긍정적 의미인가, 부정적 의미인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도 생깁니다.
52장에서의 ‘시始’와 ‘모母’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의 ‘시’는 1장 ‘무명, 만물지시’의 ‘시’ 자와 의미가 같지만, ‘모’ 자는 1장 ‘유명, 만물지모’에서의 의미와 다릅니다. ‘유명, 만물지모’의 어머니는 자식을 기르는 역할의 비유이고, 52장에서의 어머니는 자식을 낳는 역할의 비유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1장에서의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시’와 동일한 의미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천하유시天下有始’라는 말은 ‘천하에는 근원이 있다’는 말입니다. 한문의 ‘이위以爲’는 ‘~으로 여기다, ~으로 생각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시’를 ‘모’로 여기라고 했을까? 도와 만물의 관계를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로 대비하여 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냥 ‘시始’ 자와 그 상대어인 ‘마칠 종終’ 자를 쓰면 노자가 의도하는 도와 만물의 ‘본말’ 관계를 강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노자>를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노자> 64장에서는 ‘시종’이라고 같이 씁니다.(愼終如始, 則無敗事; 끝을 시작과 같이 신중하게 하면 망하지 않는다) 당연히 여기서의 ‘시’는 시작이라는 일상적 의미입니다.
그런데 최진석은 이 장에서만 유별나게 ‘모자母子’를 ‘현상’이니 ‘진상’이니 하는 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서양철학의 ‘현상’과 ‘본체’를 연상시키는 말이 아닙니까? <노자>에서 ‘모자’는 ‘본말本末’(뿌리와 가지)의 관계이지, ‘현상’과 ‘진상’의 관계가 아닙니다.
<왕필 노자도덕경주> 루우열 교석
<노자 왕필주>를 쓴 왕필(226~249)은 <노자> 전체를 한 마디로 표현합니다. 왕필 말대로라면 이 구절 만 잘 이해하면 <노자>를 다 아는 것이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노자미지예략>
老子之書, 其幾乎可一言而蔽之. 臆! 崇本以息末而已矣.
“ <노자> 책은 거의 한마디로 말할 수 있다. ‘숭본이식말’일 뿐이다.”
‘숭본이식말’: ‘숭崇’은 높인다, 존중한다는 말입니다. ‘본말本末’은 나무의 뿌리, 가지를 말하는데 원래 모두 한 나무의 부분들입니다. 그 중 어느 부분이 더 중요한가, 근본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말은 비유입니다. 뿌리도 중요하고 가지도 중요하지만 대체로 뿌리가 살아있어야 나무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뿌리=본(本)=무형=무=일(一)=도 ‘날 生’ 자의 갑골문(풀 草 + 흙 土)
가지=말(末)=유형=유=다(多)=만물 뿌리(根, 本)는 보이지 않는다(無形 = 無)
‘숨쉴 식息’ 자의 의미는 여러 가지입니다. ‘숭본이식말’의 ‘식’ 자에는 ‘그치다, 멈추다(stop)’, 또는 반대로 ‘늘리다, 키우다(grow)’라는 의미가 다 있지만, 여기서는 ‘키우다’라는 의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노자> 책이 존재하는 이유는 ‘도道’ 때문이 아닙니다. 도라는 것은 노자의 궁극적 관심, 즉 어떻게 하면 사회를 안정시켜 백성(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가 하는 데에 대한 이론적(철학적) 배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본은 ‘도’를, 말은 이 세계(天下 = 인간 사회)를 말합니다.
저는 ‘숭본이식말’은 성인(이상적 통치자)이 도를 체득함으로써(숭본), 사회적 문제 해결과 백성의 안정를 가져올 수 있다(식말)는 의미라고 봅니다. 말을 위해서는 말만 가지고 해결할 수 없고, 본으로 되돌아 가야한다(反; 40장, 復, 歸; 16장)는 것입니다. 왕필의 <노자>에 대한 총괄적 언명인 "숭본이식말" 역시 전체적 수준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성인의 책임은 만물, 백성을 살리고 키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자>에서 ‘도’를 중요시하는 것은, 실제로는 만물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본本 ㅡㅡㅡㅡㅡ 말末
도道 ㅡㅡㅡㅡ 만물萬物
성인聖人 ㅡㅡ 백성百姓
(王) (民)
그리고 <노자 왕필주>에는 ‘숭본이거말崇本以擧末(말을 높힘)’, '수모이존자守母以存子’(어미를 지킴으로써 자식을 보존한다)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모자’ 역시 위 표와 같이 대비되는 것입니다.
모母 ㅡㅡㅡㅡㅡ 자子
‘本末’이라는 틀을 가지고 <노자>를 전체적으로 이해한 왕필의 해석도 그 시대적 한계가 있고 결국은 <노자>에 대한 참고일 뿐이지만, <노자>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왕필의 해석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진석은 1장, 2장, 40장에 나오는 모든 ‘有, 無’를 동일한 의미로 보기 때문에, ‘유무’에도 ‘본말’이 있다(40장의 ‘유무’는 차원이 다르다)는 왕필을 비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자> 40장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에 대한 왕필의 해설을 인용합니다.
天下之物, 皆以有爲生. 有之所始, 以無爲本. 將欲全有, 必反於無也.
“천하 만물은 모두 유에서 생겨난다. 유는 무를 근본으로 하여 시작된 것이다. 유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로 돌아가야 한다.”
왕필 역시 <노자>에서 근원으로서의 ‘도’(무)를 중시하는 것은 ‘천하 만물’(유)를 위해서라는 것(全有 = 息末)을 밝히고 있습니다.
<노자>를 철학서로 읽는 최진석은 당연히 <노자>에 나오는 당시의 정치적 권력자의 현실 정치에 대한 경고와 조언에 중요성을 두지 않습니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은 <노자> 전체에 대한 번역과 해설이므로 <노자>의 모든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노자사상을 쉽게 설명하고 일목요연하게 알려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2015>에는 이런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이 경시되어 있습니다.
<노자>의 철학적 부분(최진석의 말로는 “노장사상의 존재적 기반”)은 이런 현실적 문제의 해결방안에 대한 노자의 근거 제시이며 중요합니다. 그러나 <노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노자의 경고와 해결 방안으로서의 주장일 수 있습니다. 왕필 역시 <노자>를 대체로 철학적으로 해석하지만(玄學), 노자 원래의 권력 비판적 구절에 대한 왕필의 해설은 너무도 명료하게 핵심을 찌릅니다. <노자> 75장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노자> 75장
民之輕死, 以其上求生之厚.
“백성들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윗사람 들이 너무 지나치게 잘 살려 하기 때문이다.”
<노자> 75장의 윗구절에 대한 왕필주
言民之所以僻, 治之所以亂, 皆由上, 不由其下也. 民從上也.
“백성들이 사악해지고 , 정치가 혼란한 원인은 모두 최고 권력자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백성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백성들은 윗사람을 따르기 때문이다.”
‘후미질 벽僻’ 자는 백성들이 권력에 시달려 가난하고, 생불여사가 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도둑질까지 하게 된 상황을 말합니다. 저는 왕필의 해설이 현금의 상황에도 해당된다고 봅니다. 최진석이 <노자>의 정치 ․ 사회적 부분을 경시하는 것은 <노자>를 ‘인문학적 사고’라는 개인의 정신적 차원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p 7 서문
“오래된 현대 철학자 노자를 통해 인문적 힘을 배양할 수 있길 기대한다. 이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생각의 틀을 깨는 정신적 자유를 회복하고, 진정한 덕성 ․ 진정한 행복을 가까운 일상 속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노자>를 이런 관점으로 보는 것은 최진석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노자>가 일반인의 정신적 자유니, 덕성이니, 행복이니 하는 주제를 말하는 것이라고 대중에게 전파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런 해석은 <노자>가 아니라, 오히려 <장자> 내편의 사상과 가깝습니다.
노자는 ‘천도天道(자연의 길)’와, ‘천도’에 배치되지 않는 인간사(천하天下)의 지혜라는 의미의 ‘인도人道’를 포함하고 관통하며, 그것들의 근원과 근거가 되는 그 무엇까지도 ‘도道’라고 이름 한 것입니다. 노자 사상은 사회의 어느 위치에 있는 사람이 들어 봐도 그럴 듯하고, 어떤 상황에도 적용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노자가 개인(人)과 사회(天下) 그리고 자연(天地)을 관통하는 ‘길(道)’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최진석과 같이 이중에서 개인이라는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그리고 <노자>에서 ‘치국治國’이라는 현실 정치적 ․ 사회적 차원을 무시하는 것은 <노자>가 아닙니다. 또한 <노자>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고려하지 않으면 <노자>를 오해하게 되고, 개인에게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참고: <노자>는 강자의 사상 1, 2편)
1. <노자>는 ‘천하天下’를 위한 큰 규모의 사상입니다.
2. 노자가 말하는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도’는 정치적 ․ 종교적 함의가 큰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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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 me a cultural relativist at thirty thousand feet and I’ll show you a hypocrite. Airplanes built according to scientific principles work. They stay aloft, and they get you to a chosen destination. Airplanes built to tribal or mythological specifications, such as the dummy planes of the cargo cults in jungle clearings or the beeswaxed wings of Icarus, don’t.”
― Richard Dawkins, River Out Of Eden: A Darwinian View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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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편; 왜 ‘만물의 근원’이라는 문제가 중요한가?
중국 청도 노산의 도교사원 태청궁: 도가와 도교는 다르다.
‘천인합일天人合一’은 천지만물(왕과 백성 포함)의 동원성과 공통성을 말합니다.
‘도법자연道法自然’(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따른다)은 만물의 자발성과 개성을 중시하는 질서만이 사회를 부작용없이 오래 유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태극도’는 유한 속에서 무한을 가능하게 하는 음양의 상호의존, 상호전화, 상호내함을 상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