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환, 「쇼펜하우어와 원불교의 대화 : 숭산 박길진의 <실재의 연구>(1941)를 중심으로」,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90집, 2021.12.31.
"숭산 박길진의 사상은 1941년 일본 동양대학 졸업을 기점으로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가 아버지이자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밑에서 개벽학을 훈도받은 시기라면, 후기는 배제고보와 동양대학에서 개화학을 연마한 시기이다. 그러나 숭산은 개화학을 하면서도 개벽학의 관점을 놓치지 않았고, 개벽학을 하면서도 개화학을 배척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숭산은 어렸을 때부터 ‘사상적 균형’이 잘 잡힌 사상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 균형의 결실이 1941년에 동양대학 철학과 졸업논문으로 제출한 「실재의 연구: 쇼펜하우어를 중심으로」이다. 이 논문은 개벽학의 입장에서 개화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비교철학이자 비판철학이다.
「실재의 연구」에는 크게 세 가지 사상사적 의미가 있다. 첫째는 한국인으로서 쇼펜하우어 철학을 본격적으로 논한 선구적인 연구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인이 쇼펜하우어에 관한 논문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실재의 연구」는 “한국인의 쇼펜하우어 연구사”라는 측면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둘째는 동서비교철학사의 관점에서 원불교와 서양철학의 대화를 시도한 최초의 논문이다. 이러한 시도는 숭산이 동양대학에서 동서철학을 두루 섭렵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셋째는 이후의 숭산사상의 원형을 담고 있는 원석과 같다. 1967년에 나온 「일원상 연구」도 「실재의 연구」에 기초하고 있으며, 여기에 교육론, 도덕론, 종교론 등이 발전적으로 가미되어 거대한 숭산사상을 이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실재의 연구」가 지니는 사상사적 가치는, 숭산사상 연구나 원불교학 연구사는 물론이고 한국근대지성사에 있어서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