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25

관상 기도에 대하여 < 신학 오디세이아 < 신학과 영성 < 기사본문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관상 기도에 대하여 < 신학 오디세이아 < 신학과 영성 < 기사본문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관상 기도에 대하여

기자명 박정은
입력 2013.02.12 

[신학 오디세이아]

토마스 머튼의 책 <명상의 씨>를 처음 읽은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였는데, 그때 나는 정말 한 줄도 이해할 수 없었다. 명상이란 그저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수사님들만 하는 걸로 알았다. 당시 나에게 하느님 나라는 내가 가르치는 주일학교 어린이들과 주고받는 웃음이었고, 저녁 무렵 창밖으로 들려오는 새 소리였고, 모든 사물을 아름답게 비추는 햇살이었기에, 명상이란 거창한 말은 내게 조금도 의미 있게 다가오지 않았었다.

어느 5월의 저녁이었다. 교사회의에서 내가 느끼는 하느님과 그 나라에 대해 기도했었는데 그때 지도 수녀님이 "소피아는 나중에 영성작가가 되면 좋겠어"라고 하셨다. 영성작가! 그 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그때는 그게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묻지도 못했다. 그 당시로는 너무 엄청난 말, 가령 “수녀원에 가야 해”라든가 “평생 기도만 해야 해”라는 말이 나올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박홍기



관상기도, 세상의 아픔과 결코 괴리될 수 없는 것

결국, 나는 수녀원에 들어갔고, 영성서적을 혼자 읽고 공부도 했는데, 사실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닥치는 대로 읽어 댔었다. 그때 다시 <명상의 씨>를 만났다. 이번에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그러나 당시 나를 매료시켰던 것은 토마스 머튼이라는 사람과 그의 삶이었다. 세상에서의 삶을 접고 수도원에 들어가서도 세상의 움직임과 고통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이 영성가가 수도원의 규칙을 깨고 침대 매트리스 밑에 뉴욕 타임즈를 숨겨 놓고 읽었다는 이야기가 마음 깊은 곳을 울렸다. 진정한 명상이란, 진정한 관상기도란, 세상의 아픔과 결코 괴리될 수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배웠다. 세상을 떠나 수도 생활을 하기에 세상은 너무 아름답다고 느꼈던, 그래서 늘 세속적인 수녀일 수밖에 없었던 나는 관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관상이란 무엇일까? 깊은 내면의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라는 일반적인 이 정의에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면 침묵은 무엇인지 또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관상을 뜻하는 영어 ‘Contemplation’은 12세기 불어 ‘contemplatio’에서 온 말로, ‘무엇을 깊이 주목하여 바라보다’, ‘깊이 생각하다’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한자로는 ‘볼 관(觀)’ 자에 ‘서로 상(相)’ 자를 쓰는데, 여기서 相자는 木(나무 목)과 目(눈 목) 두 요소로 구성되어 묘목이 자라는 것을 관찰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눈여겨 잘 본다’는 뜻이다. 그런데, 웹스터사전을 보면 관상에는 그 관찰에 따른 행위라는 부분이 있다. 그러니까 관상은 무엇보다 잘 보는 마음가짐과 그 행위라고 하겠다.

관상, 실재를 바라보는 길고 느린, 그리고 사랑스러운 시선


▲ 산타크루즈의 어떤 골목길 ⓒ박정은일상생활에서 내가 관상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 정의는 예수회원 월터 벌가르트(Walter Burghardt)의 정의다. 그는 관상을 ‘실재를 바라보는 길고 사랑스런 시선(A Long, Loving Look at the Real)’이라고 하였다. 첫 번째로 ‘긴 시선’을 한번 생각해 보자.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모든 것이 참 빠르다. 그러다 보니, 긴 시선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 어떤 정보나 글도, 인터넷 공간에서는 쉽게 지나쳐 버린다. 순간의 이미지가 많은 것을 좌우한다. 긴 시선이란 마치 잘 준비된 만남처럼, 오랜 기다림 후의 해후처럼, 오래오래 천천히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원 수업을 하면서, 진지하고 조용한 수업을 살짝 빠져나와 화장실에 다녀온 적이 있다. 친구들에게 방해되지 않으려고 발끝을 들고 가능한 빨리 소리 내지 않고 자리에 앉으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빨리 가서 앉고 싶었지만,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하기 위해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천천히 슬로우 모션으로 걸어야 했다. 그러니까 조용하려면, 우선 걸음을 천천히 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바쁘면 모든 것이 빨라진다. 그러면, 사물과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잘리고 부서진다. 그러니까 긴 시선이란 고요한 응시, 천천한 마음의 움직임, 그리고 한결같은 관계들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둘째, 사랑의 응시를 생각해 보자. 내가 혹은 나의 내면이 고요해 지면,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있는 그대로 참 아름답다. 발렌타인데이 카드를 사려고 카드 가게를 기웃거리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이 아름답고, 시들어 죽어가는 나뭇잎들이 아름답고, 꼬질꼬질한 동네 꼬맹이가 아름답다. 살면서 우리가 만난 사랑의 응시는 얼마나 될까? 나는 어릴 때 몸이 자주 아팠다. 몸이 아파 괴로울 때마다 무릎을 꿇으신 채 내 머리맡을 지키며 간호해 주시며 내게 보내시던 아버지의 시선도 떠오르고, 길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의 정겨운 시선도 마음에 떠오른다. 성서에서도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보시니 참 좋더라’ 하셨다. 사랑의 응시는 아마도 거기로부터 시작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응시는 무엇에 대한 응시인가? 앞서, 관상은 실재에 관한 아주 길고 사랑스런 응시라고 했다. 어떤 착각이나 환상이 아니라 우리 앞에 펼쳐지는, 우리 안에 놓인 실재를 그렇게 응시하라는 것이다. 이 말은 분명히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아름답고 긴 시선으로 응시하라는 것인데, 그렇다고 또 있는 그대로의 현실만을 보라는 것은 아니다. 그 너머로 존재하는 의미, 희망, 그리고 비전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즉 실재를 본다는 것은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바라봄’을 말한다.


▲ 영화 <천국의 빛깔>가끔, 관상은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는 그런 절대 침묵을 연상하는 것 같은데, 사실 관상을 산다는 것은 그 반대이다. 사랑으로 보는 데 눈물이 없을 수 있을까? 가난한 자의 아픔을 보는데 슬픔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무능한 나를 보는데 좌절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관상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관상이 결국 기쁨인 것은 내 안에 주어진 실재에는 나의 한계 또한 고스란히 담기는데, 그런 나의 찌질한 실재에 보내는 하느님의 그 길고 느린, 그리고 자비로운 응시를 만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가장 아름답게 관상하는 영혼을 그린 영화는 이란의 마지드 마지디 감독이 만든 <천국의 빛깔 (The Color of Paradise)>인 것 같다. 아름다운 이란 북부의 자연이 특히 돋보였던 이 영화의 주인공 소년 무하마드는 맹인이다. 그러나 그는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또 행동한다. 어느 날, 이 소년은 작은 새가 둥지에서 떨어진 것을 ‘느낀다’. 그는 고양이를 따라가 떨어진 새를 주워 나무 위 둥지에 다시 올려 놓아준다. 그는 또 바람이 불면 고향의 들판이 얼마나 아름답게 흔들리는지, 하늘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지, 자신이 사랑하는 여동생들의 얼굴이 어떻게 반짝이든지 너무나 잘 ‘바라본다’.

캄보디아의 아이들을 느리고 깊은 시선으로 '관상'했던 조카

지난여름 조카와 캄보디아 여행을 다녀왔다. 나는 앙코르와트 사원이 중요 목표였고 내 조카는 젊은이답게 같이 가자는 나의 말에 순순히 콜을 했었다. 압도적이고 아름다운 사원도 사원이지만 거기서 본 캄보디아 어린이들의 가난이 무척 마음이 아팠었다. 그러나 어린이들의 가난을 그냥 본 나와 달리, 조카는 그들을 느리고 사랑스런 시선으로 바라본 듯 하다. 여행 후 조카는 “어린이들이 너무 사랑스러웠고 자꾸 떠오른다”며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년간 르완다의 양호 선생님으로 떠났다. “아이들 너무 예쁘지?” 하고 물으니, “그럼요” 하고 답한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인다. “이모, 여기는 지난 내전으로 한 마을이 다 엄마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엄마란 말 하면 안된대...” 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었어도 체험이 마음을 울리는 깊이는 다른 듯 하다. 내 사랑스런 조카는 캄보디아에서 ‘관상’을 했고, 그 관상의 연장으로 아프리카 르완다에 사는 꼬마 친구들을 또 천천히 그리고 사랑스런 응시로 만나고 있는 것이리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