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좌부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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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소승 불교?[편집]
그러므로 올바른 명칭은 상좌 불교 또는 테라와다 불교라고 부르는 것이며 이 문서에서도 두 명칭 위주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테라와다불교 교단 측에서는 소승 불교라는 용어 대신 테라와다 불교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해달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3. 역사[편집]
3.1. 기원[편집]
석가모니의 입멸 후에도 하나의 상가로 유지되던 불교는 서방 교단과 동방 교단간의 계율 문제로 인해 제2차 결집이 일어났다. 초기 상가의 계율대로 생활하던 서방 교단측에서 느슨하게 변해버린 동방 교단을 문제삼았고 서방과 동방 교단의 장로들이 모인 결과 서방 교단의 방식이 옳다고 결론을 낸다. 그러나 이후에도 동방 교단에선 이 결정을 인정하지 않는 비구들이 존재했고 결국 이들은 별도로 갈라져 나갔다. 이렇게 불복하여 갈라져 나간 동방 교단이 대중부로 불리게 되고 기존의 서방 교단은 상좌부(Sthaviravada)로 불리게 된다. 이 때가 석가모니의 입멸후 100여년 후이다.
이후 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의 주도로 기원전 250년경에 제3차 결집이 일어나고 이때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대한 고승들의 일종의 해설서인 논장이 추가되며 경,율,론 삼장이 완성된다. 아소카 왕은 이 결집 이후 불교 포교사들을 사방으로 파견하는데[2] 그 중 아소카 왕의 아들인 마힌다 장로가 이 제3차 결집의 결과물을 가지고 스리랑카로 갔다. 이들은 '분별설부(Vibhajjavada)'[3]라 불렸으며, 이 스리랑카의 분별설부가 현재의 상좌부(Theravada, 테라와다)이다.[4] 이후 이슬람의 인도 침략으로 인도 대륙에선 1200년대부터는 어느 부파 할 것 없이 불교가 아예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스리랑카만이 상좌부(Sthaviravada)의 명맥을 이었다.[5] 현대에는 주로 동남아시아에 분포하기 때문에 동북아에 주로 분포하는 대승 불교를 북방 불교라고도 부르는 것처럼 테라와다 불교는 남방 불교라고도 불린다.
참고로 한자로는 이 Sthaviravada와 Theravada 둘 다 상좌부 불교라고 혼용해서 지칭하고 있다. Sthavira는 산스크리트어로 장로, 상좌를 뜻하고 Thera는 팔리어로 장로, 상좌를 뜻하기 때문에 중국에서 한자로 번역할 때 둘 다 상좌부로 번역된 것으로 보인다. 부파 불교 중에서 명맥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상 Theravada뿐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상좌부 불교라고 얘기하면 이 Theravada(테라와다)를 지칭한다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다.
테라와다(Theravada)의 테라(thera)는 장로(長老), 상좌(上座)란 뜻이고, 와다(vada)는 가르침이란 뜻이다. 따라서 테라와다를 직역하면 '장로/상좌들의 가르침'이다. 장로는 승단(sangha)에서 비구들(bhikkhu)을 지도하는 사람들이고, 상좌는 비구들 중에서 윗자리에 앉는 비구들을 말한다.
3.2. 전파와 분포[편집]
동남아시아는 원래부터 상좌부 불교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11세기 이전에는 대승 불교가 강세였다. 스리비자야, 크메르 제국 등의 국가들도 모두 대승 불교였다. 당시 미얀마와 태국 등지에 살았던 몬족, 피우족 등은 다른데보다 먼저 스리랑카와 교류를 해 일찍이 상좌부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미얀마와 태국 이 두 나라에 상좌부 불교가 확고히 자리잡은 것은 각각 버간 왕조, 수코타이 왕조 때 일이다. 크메르 제국은 이전에는 힌두교와 대승 불교가 주류였지만, 자야와르만 7세 시절부터 아들 타말린다(Tamalinda) 황자를 출가시켜 스리랑카로 파견하여 상좌부 전통을 학습하게 하고 팔리어 경전을 수입하여 본격적으로 도입하면서 상좌부 불교가 국가 종교로 정착하였다.
4. 특징[편집]
이 수행을 통해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면 아라한(나한)이 된다. "붓다(부처)"는 석가모니만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아 깨달음을 얻은 인물을 의미하는 경우는 아라한 등 다른 호칭을 사용한다. 깨달음을 얻은 인물을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은 대승 불교, 금강승 불교에서만 해당한다.
상좌부 불교의 장로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게, 다만 열심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켜가는 것에 자신의 모든 책임을 두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자신의 해석을 더하거나 하는 것을 일체 거부한다. 그리고 팔리어 경전에 기록된 부처님의 길로부터 벗어나지 않게 사는 것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한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당시에도 그러한 장로들의 태도가 보수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승 불교와 핵심적인 교리는 차이가 없지만, 수행법이나 사상면에서 차이가 있다. 또 세세한 계율과 그 해석에도 차이가 있다. 예컨대 육식을 금하지 않고 허용한다.
대승 불교와 비교하여 상좌부 불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 계율을 중시하고, 다른 종교 및 다른 문화의 형태를 혼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이게 항상 100%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한다.
- 대승 불교에서와 달리 스님들이 직접 농사를 짓거나 음식을 만들어 먹지 않기 때문에 사찰 음식이라는 개념이 없다. 승려들은 계율에 따라 음식을 별도로 만들어 먹지 않고 탁발 또는 공양청으로 재가자들로부터 얻어먹는다. 요리를 직접 해먹게 되면 본인이 좋아하는 음식과 맛을 추구하고 집착하게 되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고 음식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육식을 허용하는 이유도 사람들이 주는 대로 먹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음식을 저장하거나 해먹는 것은 계율에서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한다.
세부적인 교리를 보면 상좌부 불교와 대승 불교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고 볼 수도 있으며, 티벳이나 일본의 금강승(밀교)과 비교하면 차이가 더 커진다. 대승 불교와 대조해 보면, 상좌부 불교는 적어도 다음 9가지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
- 1. 깨달은 자는 다시 태어나는가?
- 상좌부 불교: 깨달은 자인 아라한과 부처님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궁극의 깨달음을 이룬 자는 다시 태어남이 없다.
- 대승 불교: 깨달은 자는 자유로이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선사들은 깨닫고 나서 자유로이 다시 태어남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으며, 티벳불교는 더 나아가 일부 법맥의 깨달은 스승은 다시 태어나 깨달음의 맥을 잇는다는 주장을 한다.
- 2. 깨달음과 열반(팔리어로 닙바나, 산스크리트어로 니르바나)은 무엇인가?
- 상좌부 불교: 성위4과(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가 깨달음이고, 각 과는 위빠사나의 16단계 지혜를 통해 닙바나(열반)를 체험해야만 일어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제대로 깨달음은 아라한과뿐이다. 석존(석가모니 부처님)께선 자신이 아라한과를 얻기 전까지는 '깨달았다.'고 하지 않으셨음을 초전법륜에서 5비구에게 강조하셨다.
- 3. 부처와 보살(팔리어로 보디삳따, 산스크리트어로 보디삳바)은 무엇인가?
- 상좌부 불교: 아라한도 깨달은 이이고 부처님도 깨달은 이이지만 두 존재는 다른 점이 있다. 이 세상에 아라한은 많을 수 있지만, 새로이 불법을 펴는 정등각자(正等覺者) 부처님은 우주에서 오직 한 시대에 한 분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인류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공겁(空劫) 시대도 있다. 보디삳따[보살]는 이러한 부처님이 아라한과를 얻기 전에 바라밀을 닦는 수행자일 때의 이름이다. 따라서 보디삳따는 반야심경에서처럼 깨달음의 설법을 하지 않는다. 또한 4아승기 십만 대겁 동안 바라밀을 닦아야 하므로 부처님에게 깨달음의 설법을 듣고 한 생에 깨닫는 일도 없다. 보다삳따는 공겁을 지나 스스로 닙바나를 체험하고 아라한과의 깨달음을 스스로 이루어 부처가 되어 잊혀진 불법을 새로이 펴야 한다. 따라서 보디삳따가 설법하거나 부처님께 깨달음의 법을 듣는다고 하는 경전은 다 위경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다.#
- 4. 핵심교리가 4성제 8정도인가? 3법인, 4법인인가?
- 상좌부 불교: 석존께서 친히 하신 말씀에 따라 4성제 8정도가 있는 것이 불교다. 8정도에는 스님이라면 계율이 포함된다. 스님은 아플 때가 아니면 오후에는 음료수 외 음식을 먹지 않고, 대처(帶妻)를 하지 않는 등 구체적인 계율을 지키는 것이 불교다. 4성제와 8정도를 부차적인 것으로 보거나 다른 교리를 핵심교리라고 내세워, 스님들이 계율을 지키지 않는 종교는 불교가 아니다.
- 대승 불교: 대승 반야심경의 '무고집멸도'를 4성제의 부정이라고 알고 있으나, 대승에서 무/공은 상주불멸하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이지 현상으로서의 존재의 부정이 아니다. 사성제와 팔정도는 대승 불교에서도 인정되는 가장 기본적인 불교 교리다.[10]
- 5. 공즉시색(空卽是色)인가?
- 상좌부 불교: 아니다. 공(空)(무아無我)인 것은 물질, 마음, 마음부수, 닙바나로 실제로 있는 것 네 가지 전부이다. 그러므로 공은 물질에 한정되지 않는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은 논리적으로 맞으나 공즉시색(空卽是色)은 논리적 오류다.
- 대승 불교: 그렇다고 본다. 모든 물질(색)은 물론 법도 그 성질은 공하다고 본다. 중관학파의 윤회즉열반이란 표현도 이에 기초하는 것으로, 윤회도 실체가 없기에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참조 참고로 위의 상좌부 불교 주장은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오류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색'과 '색의 공'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뜻이지 공이 색에 한정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다음 구절인 "수상행식 역부여시(수상행식도 역시 이와 같다)"를 보면 더욱 의미가 명확해진다. 오온 중 나머지 수,상,행,식도 색과 마찬가지로 "수즉시공 공즉시수", "상즉시공 공즉시상", "행즉시공 공즉시행", "식즉시공 공즉시식"인 것이다. 이처럼 반야심경에서는 오온과 오온의 공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주제를 설하고 있으며, 이는 곧 "오온은 공(空)=무자성(無自性)=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다"는 법무아(法無我)를 뜻한다.
- 6. 6식(六識)은 동시생멸인가?
- 상좌 불교: 니까야에 적힌 석가모니 부처님 설법에 기초해 말룬꺄뿓따경(Malunkyaputta Sutta)과 바아히야경(Bāhiya Sutta)에서 석존께선, 볼 때 보는 것만 있고, 들을 때 듣는 것만 있다고 하셨다.[11]
- 대승 불교: 동시생멸을 주장하는 대승 불교 지도자도 있다.
- 7. 오온(五蘊)은 차례로 일어나는가?
- 상좌부 불교: 초기불교에서는 오온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해서 말할 필요조차 없다(《초기불교입문》(초기불전연구원): 72).
- 대승불교: 티벳밀교의 한 종파에서는 오온이 순차적으로 일어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한국에선 대체적으로 오온이 동시발생이라고 보는듯하다.
- 8. 6식(六識)인가? 8식(八識)인가? 10식(十識)인가?
- 상좌부 불교: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은 6식(六識) 안에 있다. 논서에선 결생식, 재생연결식, 바왕가(잠재의식)등이 언급되는데, 눈과 연결되어 안식(眼識), 귀와 연결되어 이식(耳識)이듯이, 다 특수한 조건하에서의 의식(意識)을 말하는 것인데,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논란이 있다.
- 대승 불교: 6식설 외에도 유식설에서 말나식과 아뢰야식을 더해 8식(八識)설도 인정한다.# 구유식파의 9식설 등도 있으나 신유식파의 8식설이 정론으로 통한다.
- 9. 위빠사나, 사마타 vs. 비빠샤나, 샤마타
- 상좌부 불교: 팔리어 사마타(samatha)에서 sama는 고요함, 평정, 평화의 의미고 tha는 '지키다, 머물다, 어떤 상태로 남겨지다'는 뜻에서 나왔다. 팔리어의 사마타는 표상(니미따nimitta)[12]를 대상으로 하여 표상에 집중하여 삼매를 계발하는 수행이다[13]. 팔리어 위빠사나 (vipassanā)는 있는 그대로 본다, 즉 현상을 현상 자체로서 본다, 혹은 관념으로 조립한 전체상과 부분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있는 그대로 해체하여 본다는 의미이다[14](행선과 좌선 참조관념 해체#). 구체적으로 팔리어의 위빳사나는 나타나는 몸과 마음의 현상의 생멸을 나타나는 그대로 알아차려 무상・고・무아를 아는 등 16단계 지혜를 차례로 밟아나가 닙바나를 체험하는 수행이다[15].
- 대승 불교: 북방 대승에서 산스크리트어 샤마타는 지(止, 멈춤)나 적정(寂靜)으로 번역되고, 산스크리트어 비빠샤나는 관(觀) 또는 비발사나(毘鉢舍那)등으로 번역된다. 이러한 비빠샤나와 샤마타 수행은 북방 대승의 선종에선 하근기로 폄하되어왔으나, 실제로는 대승 불교에서도 선종 등장 이전까지는 이 지관 수행법이 표준 수행법이었고, 정혜쌍수와 더불어 선종에서도 관심법의 기초로 내려왔으며#, 이를 잘 보여주는 책이 바로 선종영가집이다. 또한 지관(샤마타 비빠샤나 수행) 수행법을 다루는 중국의 천태지의의 저서 <마하지관>과 이를 요약한 <천태소지관>은 선종의 수련서 <좌선의>의 기반이 되었다. 한국의 초의선사도 지관법을 수련한 승려 중 대표적 인물이다. # 헌데 왜 선종에선 많은 승려들이 이를 폄하해왔는가 하면, 선종이 이러한 지관 수행법에 대한 대안으로서 새로운 수행법을 제시한 역사적 맥락이 있기 때문이며, 한국 선종의 경우 그 중에서도 간화선 중심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에 대한 근대적 연구가 진전되고 남방불교, 티벳불교 등의 전통들이 유입되면서 한국 불교계도 특정 수행법만을 절대화하지 않는 추세이기는 하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승려들이 탁발로만 생활을 한다고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는 탁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사찰 근처에 깟삐야꿋띠[16]를 마련해 음식을 조리하고 깟삐야부미[17]를 두어 음식을 저장한다. 이는 원래는 금지하던 것이었으나 현실적으로 완전 탁발로는 승단 운영이 불가능하니 생겨났다. 석가모니도 기근이 들자 승려들이 직접 음식을 해먹는 것을 허락했다. 이러한 것들은 정법[18]이라 하여, 석가모니 당대부터 현실에 맞게 예외조항을 둔 것이다. 계율 역시 석가모니 당대에부터 시대와 상황에 맞게 계속 변해 왔다(참조). 그러나 승려가 직접 해먹는 것은 기근이라는 불가피한 상황 때문이고 기본적으로는 사찰에 존재하는 정주와 정지를 쓴다하더라도 재가자들이 와서 요리를 한 뒤 승려들에게 공양하는 방식이라서 승려들이 직접 요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주는대로 먹는 것은 동일하며 이것이 계율 위반은 아니다. 한국처럼 현대화된 국가에서는 탁발로 매일 생활한다는건 더더욱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한국테라와다불교 교단에서도 탁발은 일주일에 하루 정도 날을 정해 시행하고 평소에는 재가자가 선원내에서 조리하여 공양하는 식으로 한다.[19] [20]
또다른 특징은 최근까지 오랫동안 비구니가 없었다는 것이다. 원래는 있었으나 대승 불교와는 달리 전승되던 중에 비구니계가 오래전에 유실되어 더 이상 비구니를 낼 수 없게 되었다. '다사 실 마타'(스리랑카), '띨라신'(미얀마), '매치'(태국)라고 하는 평신도 여자 수행자가 있어서 이들을 보고 '비구니'라고 착각할 수 있지만 이들은 비구니는 아니다.
본래 불교의 계율은 부처에게 계를 전해 받은 자가 적합한 형식을 갖추어 다시 후대에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법하게 계를 전수받은 자가 사라지거나, 적법한 형식을 갖출 수가 없게 된다면, 어떤 사람이 설령 계의 내용을 모두 안다고 해도 남에게 계를 줄 수가 없다. 그런데 상좌부 비구니 계맥이 전부 끊어져 버렸기 때문에 전세계 불교에 상좌부 전통에 따라 계속 이어진 비구니계가 전해지는 곳은 없다.[21]
현대에 들어 대승으로부터 비구니 계맥을 받음으로서 비구니 상가를 복구하려는 노력이 있지만 대부분 인정받지 못했으나[22], 스리랑카에서는 1996년에 한국 조계종의 도움을 받아 스리랑카 교단이 비구니가 되고 싶어하는 여자 10명에게 수계를 하게 하고 교단에서 정식으로 인정하여 비구니 상가가 정착했다.# 1998년에는 대만의 불교계로부터도 수계한 듯하고, 2000년대 후반 기준으로 스리랑카에만 비구니 500여 명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스리랑카에서 비구니 상가가 복구된 이후 태국에서도 스리랑카에서 비구니계를 받아와 비구니 상가를 복구하려는 노력이 있다. 1998년에 스리랑카에서 계를 받아온 최초의 비구니가 생긴 이래, 2019년 현재 태국엔 스리랑카에서 계를 받아온 비구니 285명과 태국 내에서 자체적으로 수계한 사미니 8백여 명이 존재한다. 그러나 태국은 여성수계금지법까지 만들며 여전히 태국내 비구니 수계를 막기 때문에 완전한 복구에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아잔 브람이 이끄는 호주의 테라와다 교단(Buddhist Society of Western Austraila)에도 정식 비구니 상가가 존재한다.#
그러나 상좌부 비구니 승단 복구는 엄격한 율장의 눈으로 보면 사실 이미 불가능해진 지 오래이다. 상좌부 율장에 따라 어떤 여자가 비구니로 수계하려면, 먼저 적법하게 수계한 장로 비구니 5명이 입회해야 한다. 그런데 비구니 계맥이 끊어진 지 오래라 이제 와서 복구하다고 하는 판에, 어디서 적법하게 수계한 장로 비구니를 구한단 말인가? 또한 상좌부 율장에서는 비구니 수계자는 비구니 승단만이 아니라 비구 승단으로부터도 이중으로 계를 받도록 규정했기 때문에, 반드시 비구 승가가 협조해주어야만 한다. 따라서 엄격한 상좌부 율장의 기준으로 보면, 대승 비구니 계맥은 상좌부 율장의 유효성을 결여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무효이고, 이것을 받아 상좌부 비구니 승단을 복구하겠다는 것 역시 심각한 월권행위이다.
또한 동아시아 대승불교는 법장부의 사분율을 받아들여 승려들이 계체를 얻는다고 여긴다. 설령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계맥이 유효하다고 인정해도, 분별설부의 율장을 사용하는 현대 상좌부 불교의 관점에서는 그냥 받아들일 수가 없다. 심지어 같은 대승불교권인 티베트 불교는 상좌부나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계맥을 모두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티베트 불교가 근본설일체유부의 율장을 사용하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 내부로 사분율을 사용하는 동아시아 대승불교 비구니 계맥을 받은 비구니가 생기는 것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다. 태국 불교계가 비구니 승단 복구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분명히 율장적인 근거가 있다.
대승비불설 문서만 보면 상좌부 불교와 대승 불교가 서로 갈등이 많고 멀리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생각보다 교류가 많다. (성지순례, 스리랑카 진신사리) 그러나 상좌부의 승려들은 대승 불교 승려들과 함께 포살할 수 없다거나, 대승의 의견에 동의하면 범계한 것으로 보는 등 선을 명확하게 긋는다. 또한 한국 승려들이 상좌부 불교계로 유학 갔을 때 몇몇 상좌부 승려들이 대승 불교 승려들의 법랍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은근히 경계하거나 무시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1973년 한국 조계종에서 조선시대 숭유억불로 인한 계맥 유효성 문제를 완전히 봉합하고자 태국 승려를 초빙해 합동수계식을 열어 당시 20여명 정도의 한국 승려가 계를 받았다.[23] 하지만 수계식 이후 '대승이 어찌 소승으로부터 계를 받겠는가!'하는 반발이 나와서 없던 일로 하고 지금처럼 합동수계식을 하기로 했다.
5. 논란[편집]
그러나 상좌부 역시 석가모니 부처님 입멸 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현지 문화의 영향이나 내부적으로 많은 계파가 등장하고 논쟁하며, 새로운 문헌이 등장했다. 또한 대승 불교와 마찬가지로 후대에 첨삭/증보개정을 거친 문헌들이 존재한다. # 앞 링크에 나오듯 현존 니까야는 기원후 4~5세기 스리랑카에서 붓다고사와 마하위라파(대사파)가 자기 부파의 입지를 늘리고 타 부파와 대승 불교, 힌두교 등을 억제하려는 목적으로 재편집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며[24] 해외에선 실제 북방 전통 문헌 중 일부는 가장 이른 시기의 팔리어 필사본보다 연대가 훨씬 올라간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이미 국제 불교학계에서 아함경[25]과 니까야는 석가모니의 친설 그대로는 아니라고 밝혀졌고 #, 남방 부파의 역사적 문헌들도 그 신빙성을 의심받는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상좌부 불교에서 니까야에 대한 해석의 표준으로 인정받는 붓다고사[26]가 쓴 주석서인 <청정도론>(위숫다막가)인데, 하와이대 명예교수 칼루파하나는 저서 <불교철학의 역사>에서 붓다고사가 후대 인도불교의 사상을 석가모니의 친설인 양 끼워 넣었음을 밝혀 큰 논란이 되었다.[27][28]
또한 상좌부 불교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여 초기 승단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한 것이 아니다. 테라와다 불교 현지의 수행법도 사마타와 위빠사나 중 위빠사나에 치우쳐 석가모니 당대의 수행법과 거리가 멀어졌고(##), 동남아 민간신앙이나 대승 불교의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다. #[29]
그러나 이러한 지적들은 어디까지나 '니까야가 부처님 당대의 말씀 100% 그대로다'라는 과도한 주장에 대한 지적일 뿐이며[30] 니까야와 상좌부 불교가 동아시아의 대승 불교에 비하면 오리지널에 훨씬 가깝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특히나 지금껏 한국에서 써오던 대승 경전들은 수천년간 (오리지널 소스) → 산스크리트어 → 한문 → 한국어로의 최소 3중역을 거친 경전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훨씬 많은 변질과 누락 또는 삽입이 생겼을 수 밖에 없으며 수많은 계파가 생겼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구마라집이나 현장에 의한 산스크리트어 → 한문 번역 과정에서도 많은 변질이 일어났다. 거기다 산스크리트어 원전도 없는 아예 중국에서 새로 만들어진 경전들도 있다. 그 외에도 기존 중국의 문화들과 사상들이 스며들어 많은 변질이 일어났다##. 한국이나 일본의 주류 종파인 선종도 이러한 결과로 사실상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 대승에서 존재하는 수많은 불보살들과 신들은 힌두교의 유산이며 한국 무속 신들조차 불보살로 대체되어 들어오거나 산신각이니 용왕각이니 하는 식으로 무속신을 모시는 곳이 사찰들 내에 공식적으로 존재한다.# 대승 불교도 원래는 인도에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대승 불교는 상좌부와의 비교를 떠나 대승 불교로서도 원래의 대승 불교에서 멀어져있는 게 사실이다. 심지어 '대승 옷을 입은 힌두교'라고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밀교 수준은 아니지만 상좌부 불교에서도 빠릿따(paritta, 호신주護身呪)라 하여 위험이나 악령으로부터 몸을 지키고 고통을 해소하는 호신주를 사용한다.[31] 이것이 나중에 대승 불교에서 다라니, 진언으로 발전한다.
때로는 한국 대승 불교의 부패를 비판하면서 상좌부 불교의 계율 중심 생활을 언급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한국 대승 불교 승려들이라고 다 파계승이 아니듯이 동남아의 상좌부 불교에도 파계승이나 영업 행위가 없는 게 아니며 상좌부 불교 국가들 현지의 승려의 높은 사회적 지위로 인한 폐해는 오히려 한국보다 심하다. 당장 동남아의 상좌부 불교 사원에도 동북아 사찰의 민간 신앙처럼 정령 신앙이 결합하거나[32] 기복신앙을 장려하거나 # 승려가 자금세탁 혐의로 조사받고 # 심지어 사찰 안에서 동물학대와 불법 동물밀매를 하고 # 살인, 성매매, 불법 금융거래에 연루되어 승려들이 대거 체포되는 등 # 문제가 심각하다.
숭유억불을 표방했던 조선이나 중국의 유교 왕조 국가들과 달리, 동남아 상좌부 불교의 경우 개종 이후부터 국교 지위를 쭉 누려왔고, 20세기에 공산화를 겪었던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지배적인 위치에서 끌어 내려진 적도 없다.[33]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시절에도 영국이나 프랑스가 불교계를 오히려 이용하면 이용했지 전면적인 식민지 개종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터라 식민지 시절을 겪으면서도 불교계의 사회적 영향력은 유지됐다.[34] 이렇게 자국 내에서의 높은 사회적 비중과 위치 때문에 세속 권력, 재력과 결탁하여 일어나는 종교계의 권력형 범죄, 부패는 동남아 쪽이 훨씬 더 심하면 심했지 대승 불교권에 비해 좋다고 할 수 없다.
여기에 상좌부 불교 내에서도 계율 해석 문제 등으로 인한 이견이나, 기성 불교계의 침체와 엇갈리는 신흥 불교단체인 담마까야 재단[35]의 약진 등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여러 종파로 갈라져 있으며, 이들간에는 대승 불교나 밀교를 대하듯 서로간에 포살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빈번하다.[36] 그리고 스리랑카에선 출가 승려들 사이에도 카스트에 따른 차별이 존재하는 등[37] 자신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른다고 주장하는 동남아 불교계의 주장과는 모순점이 있다. 이것은 불교라는 종교를 떠나 후진국인 동남아 국가들 자체의 뒤쳐진 사회적, 시스템적 발전 정도 때문인데 앞으로 이를 어떻게 해결할지가 테라와다 승단의 과제라 하겠다.
때문에 국내에 상좌부 불교가 새롭게 들어옴으로서 기존 조계종이 변화하고 각성할 수 있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고 기대하는 많은 학자들도 이런 동남아내 정치적, 사회문화적 상황들로 인해 부패된 것들과 동남아 토속신앙과 결부되어 변질된 것들[38]에서 오는 요소 등은 한국의 상좌부 불교에서는 잘 걸러서 그런 것까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6. 부정관 수행[편집]
한자로는 不淨觀, 팔리어로는 Paṭikkūlamanasikāra라고 하며 자만심을 버리기 위해 시체를 보며 명상하는 것을 말한다.
석가모니와 제자들이 시다림(尸陀林)에서 고행한 것이 기원이라고도 하며, 묘지 등에 가서 시신이 썩어가는 것을 하나 하나 관찰하면서 육체의 부정함과 허망함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대승 불교에서는 백골관이라는 말을 주로 쓰는데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39] 그러나 지금도 상좌부 불교, 특히 태국 불교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수행법으로 여기며, 이 때문에 태국의 의과대학 인체해부수업에 스님들이 꽤 많이 견학 온다.[40] 따지고 보면 태국의 매체 심의 기준이 폭력성에만 유독 관대한 것, 담배갑 경고 그림의 수준이 원조인 캐나다를 아득히 초월하는 데에도 이 불교 수행법 탓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7. 대한민국의 상좌부 불교 전파[편집]
한국에 상좌부 불교가 전파된 시기는 의외로 오래되었다. 고려 후기 등장한 여러 군소종파들을 통틀어 십이종이라 부르는데, 이 십이종 중에 상좌부 불교와 관련된 교종 종파인 소승종(小乘宗)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 여말선초기의 한국 선종의 고승 나옹 혜근 스님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준 인도 승려 지공선현(指空禪賢)대사도 북전 불교와 더불어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를 학습했던 승려였다.
그러나 이때는 남방 불교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고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존재감이 드러나는 것은 현대에 들어와서이며, 1980년대 중후반에 거해 스님이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의 위빠사나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면서 위빠사나 수행 열풍이 불었다. 당시 한국의 주류 불교계에서는 간화선만을 중시하고 위빠사나와 테라와다 불교는 소승의 가르침이라 하여 이를 폄하하고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불교사에 대해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추고 있던 학자들 중 테라와다 불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몇몇 승려들에 의해 위빠사나 수행과 테라와다 불교에 대한 공부가 시작되었으며, 재가자 단체를 중심으로 팔리어 경전 읽기나 위빠사나 수행이 시작되었다.
위빠사나라는 특정 수행 방식만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테라와다 불교 자체가 퍼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였다. 조계종의 간화선 중심주의가 안팎으로 비판받는 정도가 강해지고 승려들의 도박/음주 사건이 언론을 타면서 기존 한국 불교계에 자성과 비판의 여론이 번져나갔다. 이 과정에서 이재열 법사와 유마선원(현 법림선원), 전재성 박사와 한국빠알리성전협회를 중심으로 팔리어 불경을 국내에 번역/보급하고 팔리어 대장경인 니까야 중 하나인 <앙굿따라니까야>를 세계 최초 완역해 펴내는 등의 노력으로 대중적으로 테라와다 불교를 접하는 신도들이 늘어났다. 각묵 스님과 대림 스님의 초기불전연구원을 통해서도 니까야와 아비담마 서적들이 번역되었으며, 2013년 조계종의 교육원에서 강원의 교과목 7개 분야 중 한 분야로 초기불교가 들어가 니까야 강독과 《아비담마 길라잡이》등이 교재로 채택되었다.
현재 한국에 있는 테라와다 불교는 크게 볼 때 한국에 포교를 목적으로 건너온 동남아 도래승에 의한 선원들과 테라와다 불교권 국가로 직접 출가한 한국인 구법승에 의한 선원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미얀마나 태국, 스리랑카 등지에서 승려들이 한국내 자국민들을 대상으로 또는 포교를 목적으로 건너와서 활동하는 절이나 선원들이다. 후자는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로 직접 출가해서 활동하다가 국내로 돌아온 한국인 승려들이 활동하는 절이나 선원들이다. 1980년대부터 테라와다 불교권 국가들로 직접 출가하는 한국인들이 늘기 시작했으며 이후 귀국한 승려들에 의해 산발적으로 선원이나 수행처들이 존재하긴 했으나, 2009년에 빤냐와로 스님[41]을 중심으로 '사단법인 한국테라와다불교'가 만들어지며 공식적으로 국내 테라와다 교단이 출범했다.[42]
니까야 한국어 번역판은 자잘한 판본들이 있으나 대표적으로는 크게 두가지로,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나오는 판(전재성 역)과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나오는 판(각묵스님, 대림스님 역)이 대표적이다.
일개 블로거가 그런 의견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블로거의 빠알리어 원문에 대한 이해가 일천하여 영어 번역을 전거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것일 뿐이다. 링크로 제공된 두 가지의 비교에도 이미 원문에 대한 몰이해가 드러나 있다. 빠알리 원문을 읽고 스스로 판단해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43]
한국 불교계가 세계 각 나라의 불교계와 교류를 늘리면서 2012년도 즈음만 해도 현지의 몇몇 선원의 수행법이 곧 테라와다 불교 수행 전체로 이해되던 것이#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테라와다 불교계 전반에 대해 더 잘 알려지고[44] 테라와다 불교권의 고승들 또한 한국을 몇 차례 찾아왔다. 특히 2016년 각산스님은 한국불교 최초로 세계명상대전(WMC2016)를 주최하여 태국 불교의 전설로 불리는 고승 아잔 간하[45], 아잔 브람[46]이 참가하여 혜국스님 등 한국 선승들과 '초기불교와 간화선 수행'을 지도하고 무차토론을 가지며 상좌부 불교가 한국에 더욱 새롭게 정리되는 계기가 되었다.
7.1. 대한민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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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부 불교
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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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부 불교(上座部佛敎) 또는 테라바다 또는 테라와다(Theravada)[1]는 부처의 계율을 원칙대로 고수하는 불교를 말한다.[2][3] 대중부 불교와 함께 인도 불교의 2대 부문(部門)의 하나이다.
테라바다(Theravada)라는 말은 "장로(長老)들의 길"이란 뜻으로 상좌부(上座部)라고 한역되었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고타마 붓다가 사용한 언어인 팔리어(빠알리어)로 된 경전을 근간으로 하는데, 이는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대승 경전과 대비된다. 이 팔리어 경전(아함경과 78% 일치하는 니까야)은 기원전 1세기경 스리랑카에서 최초로 쓰인 것으로 서력 기원후에 형체를 갖추어가기 시작한 대승권의 산스크리트어 경전이나 다른 경전보다도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이 더 정확하게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4]
불교 전통 연표[편집]
연표: 불교 전통의 성립과 발전 (기원전 450년경부터 기원후 1300년경까지) | |||||||||||||||||||
450 BCE | 250 BCE | 100 CE | 500 CE | 700 CE | 800 CE | 1200 C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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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파불교 | 대승불교 | 밀교·금강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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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부 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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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베트 불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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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종 · 정토종 · 일련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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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 BCE | 250 BCE | 100 CE | 500 CE | 700 CE | 800 CE | 1200 C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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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편집]
불멸 후 100년의 근본분열로 교단은 두 부파로 나뉘었는데 그 중 보수파인 상좌의 사람들에 의한 일파가 상좌부이다.
북방불교의 자료들에 의하면 불멸(佛滅) 후 100년 아쇼카왕 치세 때, 마하데바(Mahadeva: 大天)라고 하는 진보파 비구가 교의에 관한 5개조의 신설(新說)을 제창하고 그 승인을 교단에 구했을 때에, 또는 남방불교의 자료인 실론의 《도사(島史)》나 《대왕통사(大王統史)》에 따르면, 와지족의 비구가 계율에 대한 십사(十事)의 신설(十事非法)을 주창했기 때문에(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후자가 승인되고 있다) 불교교단이 신설에 찬성하는 진보파의 대중부(大衆部)와 이에 반대하는 보수파의 상좌부(上座部)로 양분되었다. 이것이 근본분열(根本分裂)이며, 이를 계기로 부파불교의 시대로 들어간다.[5] 인도의 아쇼카 왕 때인 기원전 3세기에 상좌부의 주도로 빠알리어로 행한 제3차 결집 직후, 아쇼카 왕의 아들 마힌다 장로를 통해 제3차 결집의 결과물을 가지고 상좌부는 스리랑카에 정착하였다. 스리랑카의 상좌부는 스스로를 "분별설부(Vibhajjavada)"[6]라 불렀으며 암송되어 오던 제3차 결집의 빠알리어 대장경을 기원전 1세기에 싱할리문자로 기록하였다. 현재의 테라와다는 이 분별설부의 삼장을 계승하였다. 주로 동남아시아에 분포하여서 남방 불교라고도 불린다.
이후 북방에서는 상좌부가 불멸 후 300년 초에 본상좌부(本上座部)와 설일체유부(說一體有部)로 나뉘고 본상좌부는 히말라야 지방으로 옮겨 설산부(雪山部)라고 불리었으며, 캐시미르 지방을 본거(本據)로 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후의 분파에 의한 8부의 성립은 모두 설일체유부의 것으로 된 것이며, 따라서 유부는 상좌부계(上座部系) 중에서도 여러 부파 중 최대의 것이 되었고, 후에 일어난 대승불교의 소승불교에 대한 비판 · 논란(論難)은 거의 모두 이 유부에게 돌려지는 상태였다. 그래서 북방에서는 상좌부불교라고 하면 당연히 설일체유부가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기원후 2세기 중반에 카니시카왕 대에 설일체유부를 중심으로 산스크리트어로 기록한 제 4차 결집이 있었다. 북방의 아함경은 주로 이 제 4차 결집의 산스크리트어 기록을 한역한 것으로 보여진다.
설일체유부[편집]
원래 본상좌부(本上座部: 설산부)와 설일체유부는 입장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본상좌부에서는 경과 율을 중시한 데 대하여 유부에서는 논(論)을 중시하였다. 논은 교법에 대한 연구로서의 아비달마이며, 유부가 전거(典據)로 삼은 것은 기원전 2세기 카티야야니푸트라(Katyayanputra: 迦多衍尼子)가 저술한 《발지론(發智論)》이었다.
그 후 6종의 논이 만들어져 합하여 《6족발지(六足發智)》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행하여졌으며, 기원 2세기 쿠샨 왕조의 카니시카왕의 보호 아래 연구 성과에 대한 집대성(集大成)이 이루어져서,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200권의 대저(大著)로 발전하여 유부의 교의가 완성되었다. 비바사(毘婆沙)란 분석 또는 주석이라는 뜻으로, 《발지론》을 축어적(逐語的)으로 해석하면서 다른 여러 부파의 교설을 백과전서(百科全書)처럼 인용하고 이를 유부의 입장에서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대비바사론》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이의 강요서(綱要書)가 만들어지고, 특히 4세기에 세친(世親)이 저술한 《구사론(俱舍論)》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중시되었다. 세친은 유부(有部)에서 최후로 분파하여 경전만을 의지(依支)하는 경량부(經量部)에 속하며, 《구사론》을 통해 유부의 교리를 비판적으로 해설하였다. 예를 들면, 《구사론》 〈수면품〉에서 세친은 삼세실유설을 경량부적 입장, 즉 과미무체설의 입장에서 반박하고 있다.
북방에서는 본상좌부 불교에서 분파한 유부는 교리적인 연구면에서 크게 진전하여 학문불교적인 색채가 농후했으며, 북방에서 불교의 전통적인 사상을 이어받아 학문적인 논장으로 변형 확장시킨 부파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남방불교의 테라와다[편집]
북방의 상좌부에서 설일체유부가 분파되기 전에, 기원전 3세기의 상좌부 주도로 빠알리어로 이루어진 제 3차 결집에서 포교를 결정함에 따라, 마힌다 장로를 통해 스리랑카(실론 섬)로 전해진 상좌부(테라와다)는 빠알리어로 이루어진 제 3차 결집의 경과 율을 잘 간직하고, 위빳사나 수행 중심의 불교로 이어졌다. 남방의 테라와다는 설일체유부와 다른 칠론을 발전시켰고, 빠띠삼비다막가[무애해도]의 위빳사나 수행 전통을 이어가, 수행 중심의 아비담마 이론을 집대성한 위수디막가[청정도론]를 기원후 425년 전후에 완성했다[7]. 스리랑카의 테라와다는 동남아시아로 확장되어 현재 태국에서는 계행이, 미얀마에서는 아비담마와 위빳사나 수행이, 스리랑카에선 경전 연구가 특히 뛰어나다고 한다. 상좌부 불교[테라와다]는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 지역에 널리 퍼졌으므로 남방불교, 남전불교라고 불리게 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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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편집]
- ↑ 알파벳으로 Theravada로 표시하는 글자에서 v발음은 영어의 v가 아니라 우리말의 순경음ㅂ(ᄫ)으로, 남방불교 지역에서는 '우/오'로 발음된다. 즉 우리말로 보다 정확한 표기는 '테라ᄫᅡ다'이며 실제 발음은 '테라와다'이다. vipassana의 실제 발음이 '위빳사나'인 것과 같다. 우리말에서도 15세기 말을 일부 간직하는 경상도말에서는 아직도 "덥어라[더ᄫㅓ라]" "고맙아[고마ᄫᅡ]"하는 것을 현대의 서울말에선 "더워라," "고마와"라고 하는 것과 같다.
- ↑ 윤대헌. ‘불교성지’ 미얀마…2500년 佛밝힌 ‘신비탐험’. 스포츠경향. 기사입력 2006년 6월 7일. 최종수정 2008년 12월 25일.
- ↑ 김도연. 2500년전 ‘부처의 길’… 한발한발 따라 걷다. 문화일보. 기사입력 2012년 5월 22일. 최종수정 2012년 5월 22일.
- ↑ 보리수선원
- ↑ 종교·철학 > 세계의 종교 > 불 교 > 불교의 분파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세계의 종교/불 교/불교의 분파 > 소승20부,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 여기서 '분별(vibhajja)'이란 개념적으로 분석한다는 말이 아니라 해체하여 본다는 뜻이다. 관념적으로 조립된 전체상과 부분상으로서가 아니라, 관념으로 조립하여 구성하기 이전에 이미 해체(vibhajja)되어 실제로 나타나 있는 그대로를, 즉 관념으로 조립하는 시간 지체나 왜곡없이 현재 일어난 것을, 현재 일어난 그 자리에서 바로 알아차림이 vibhajja다. "상좌부 불교를 일본학자들은 분별상좌부라고 옮겼는데 분별이란 말이 상대를 폄하하는 말인 듯해서 잘 사용하지 않는다".(초기불교입문(초기불전연구원): 40-43).
- ↑ 청정도론1(초기불전연구원): 40쪽
참고 문헌[편집]
-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종교·철학 > 세계의 종교 > 불 교 > 불교의 분파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세계의 종교/불 교/불교의 분파 > 상좌부불교"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