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gok Lee
9 October 2021 ·
이 글은 오늘 새벽에 페북에 올렸다가 삭제한 글인데, 다시 올린다.
삭제할 때 들었던 생각은 이 글이 길어서가 아니라, 지금은 이런 글이 지금의 우리 정세와 상황에 맞지 않을 수 있고, 오히려 과제를 흐리는 쪽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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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10여년은 우리가 털고 가야할 과제들을 대단히 거친 방식(중도의 길은 거칠고 험하다), 비이성적으로 편갈라 싸우는 우려스러운 외형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지난 시기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의 그늘에서 자라난 암적 요소들을 제거하는 과정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그 방아쇠는 어떤 사건으로 시작한다.
이번에는 ‘대장동’이 그 방아쇠다. 반드시 제대로 털고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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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다시 올리는 이유는 새로운 정치와 문명을 이루어가는 주류의 철학이 뒷받침될 때라야 그 동안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난국을 수습할 수 있는 “자유와 다원성에 바탕을 둔 국민적 통합‘과 ’인류적 위기를 넘어서는 문명 전환‘의 길을 열어갈 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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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에 썼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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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본질(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박석 옮김)>
분절Ⅰ→무분절→분절Ⅱ에 대한 견해다.
깨달음의 세계나 추상적인 관념으로 이야기할 때는 무분절이나 분절Ⅱ를 이야기하다가도 막상 현실 문제에 부딪치면 분절Ⅰ로 돌아가는 경우를 많이 경험한다.
지금 우리는 분절Ⅰ의 격렬한 쟁투 속에 있다.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을 들어낸다.
한 편에서는 ‘사랑’과 ‘관용’을 이야기하다가도 어떤 현실과 만나면 ‘증오’와 ‘타도’의 잇빨을 들어낸다.
이제 우리가 추상적 관념이나 그런 관념 안에서의 깨달음이 아니라, 현실 문제를 대할 때 ‘역지사지’하고 ‘구동존이’하는 태도를 몸에 익히는 것으로 진전되어야 한다.
내가 일관되게 제안하는 ‘합작’이나 ‘연합’은 분절Ⅱ의 세계로 나온 주체들 간에 이루어질 때라야 진실한 것이 된다.
깨달음의 세계처럼 엄정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의 세계는 ‘무분절의 세계’라는 이해 정도만 있어도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즉 ‘내가 원수처럼 생각하는 그 상대가 있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어렴풋한 인정만이라도 있으면, 세상이 다르게 보여 오고, 자신의 삶과 사회적 실천도 보다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격렬한 분절Ⅰ의 쟁투를 통해서 적어도 이런 진화라도 있어야 ‘헛고생’이나 ‘후퇴’로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나 자신도 다시 볼 겸, 옛 글을 공유한다.
좀 길지만,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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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어제가 부처님 오신 날이다. 우리나라 현대불교를 대표하는 선승(禪僧) 성철 큰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생각한다. 원래 선승의 화두를 이치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아마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수도 있고, 선문(禪門)의 금기(禁忌)일지 모르지만, 요즘 보고 있는 <의식과 본질(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박석 옮김)>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것을 말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필부의 만용일수도 있지만, 이제는 선가(禪家)의 화두 속에 은밀하게 전해 내려오는 극히 소수의 깨달음의 세계에 머무를 수 없는 보편진리와 그에 바탕한 삶 그리고 사회적 실천이 시대의 요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먼저 박석 교수의 번역을 통한 이즈쓰 도시히코의 견해를 간단히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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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출한 선사들이 지금까지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분절Ⅰ→ 무분절→ 분절Ⅱ’의 전체 구조를 적확하고 명쾌하게 제시한 것으로는
길주吉州 청원유신靑原惟信의
‘산은 산임을 본다→산은 산이 아님을 본다→산은 다만 산임을 본다’
보다 탁월한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청원유신의 이야기는 이야기를 인용하여 무본질적 분절을 분석하는 실마리로 한다.
“노승이 30년전 아직 참선을 하지 않을 때, 산을 보니 산이고, 물을 보니 물이었다. 나중에 친히 선지식을 만나서 하나의 깨침이 있음에 이르러서는 산을 보니 산이 아니고, 물을 보니 물이 아니었다. 지금에 이르러 하나의 휴식처를 얻고보니 여전히 산을 보니 다만 산이고 물을 보니 다만 물이다.”
원래 본질이란 존재의 한계 짓기, 즉 존재의 부분적·단편적· 국소적 한정을 의미한다.
이 부분적 존재 응고의 중심적 거점을 이루는 것이 본질이다.
이렇게 국소적으로 규정된 본질을 둘러싸고 하나의 사물이 조립된다.
그러한 사물의 전체가 분절Ⅰ의 세계다.
상식은 그것을 경험적 세계라 부르고, 대승불교에서는 망념의 세계, 허공 꽃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망념의 소산이라고 보는 것은
분절 Ⅱ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실 즉 진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절Ⅱ의 세계는 그 성립과정에서도 내적구조에서도 분절Ⅰ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분절 Ⅱ를 분절Ⅱ답게 만들고 분절Ⅰ로부터 확연히 나누는 결정적인 특징은 그것이 무분절과 직결되고 있다, 혹은 직결된 것으로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존재의 궁극적 무분절태란 보통 선수행자가 무라든지 공이라든지 하는 이름으로 의미하는 의식·존재의 제로 포인트이고 나아가 그것이 동시에 의식과 존재의 두 방향으로 분기되어 전개하는 창조적 활동의 출발점이다.
이 의미에서의 무(無)에는 유(有), 즉 존재의 끝없는 창조적 에너지가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 존재 에너지가 온전히 그대로 무로부터 발산하여 사물을 드러나게 하는 그 모습을 분절 Ⅱ의 의식은 알아차린다.
즉 이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에서는 이른바 현상계 경험적 세계의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제각각 무분절자의 전체를 들어서 자기분절하는 것이다.
무의 전체가 그대로 산이 되고 물이 된다. 즉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이다’
분절 Ⅱ의 존재차원에서는 모든 분절의 하나하나가 그 어느 것을 취해서 보아도 반드시 무분절자의 전체 현현이며 부분적 · 국소적 현현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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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이즈쓰 도시히코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진한 글씨는 내가 임의로 한 것이다.
나는 상당히 탁견이라고 생각되었다.
분절Ⅰ의 의식으로부터 분절 Ⅱ의 의식으로 나아가는데는 이른바 ‘무분절에 대한 깨달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이 깨달음이 예전에는 탁월한 사람들이 각고의 노력을 통해 오직 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 현대 즉 21세기의 인류사에서 보면 보통 사람들이 이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지점에 왔다고 생각한다.
무분절의 깨침은 이제 현대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계의 상식(?)으로 되고 있다.
‘일체(一體)’, ‘온생명’, ‘유일한 생명단위로서의 우주’ 등 표현은 다양할지 몰라도 분리독립된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상식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장의 종이, 한 벌의 옷 속에서 우주를 본다’는 표현은 더 이상 신비스럽지 않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선사(禪師)들의 깨달음이 결코 경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적 인식이나 논리적 접근으로는 표층의식은 바꿀 수 있을지 모르나, 심층 의식까지를 바꾸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적 노력들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깊이 다가오는 생각은 종교적인 접근이든 과학적인 접근이든 그것이 구체적 삶과 사회적 실천 속에서 연습되고 실천되어야 진실하다는 것이다.
무분절을 깨닫는 삶은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정확히 들어 맞는 예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몇 년간 참여했던 공동체는 ‘무아집, 무소유, 일체’를 이념으로 그것을 실제로 현현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목표가 현실의 의식 수준보다 높게 설정되어 있었다든지, 그 실행 과정에서 무리가 있었다든지 해서 보편화에는 한계를 노정했지만, 나는 상당히 중요한 실험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인류가 지금의 자본주의 문명을 넘어서기 위한 철학적 기초는 도시히코의 표현대로 하면 분절Ⅱ의 의식을 바탕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철학적 기초가 구체적 사회운영의 원리로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내가 끝까지 실험을 계속하지는 못했지만, 나의 공동체 경험에는 그 운영원리가 있었다.
그것은 ‘무소유(無所有) 공용(共用)의 일체(一體)사회’에서의 전문분업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에서의 전문분업과는 그 바탕에서 다르다.
분절Ⅰ의 사고방식에 의한 분업은 사람을 작업과정의 일부분으로 고정하고 제약한다.
그러나 무소유일체사회에서의 전문분업은 분절 Ⅱ의 사고방식으로 이루어진다.
6개월에 한 번 자동해임(自動解任)을 시스템화한 것이 그 바탕으로 된다.
비록 전술(前述)한 이유들 때문에 그 진가를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언젠가 보편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일까?
분절 Ⅱ의 의식으로 살게 되면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새 한 마리가 다 무분절 즉 일체(一體)의 현현(顯顯)체이기 때문에 생태적 삶은 너무 자연스럽게 되어 ‘산은 푸르고, 물은 맑게’ 된다.
또한 나와 너의 경계가 점차 사라져 ‘사랑과 평화’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이다.
예술적 감각이 고도로 발달하게 되어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에서도, 이름 모를 산새의 지저귐이나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느끼는데서도, 그 감각의 순도가 높아져 세상이 있는 그대로 최고의 예술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우주자연계 안에서 자신이 지닌 특성을 가장 잘 발휘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 오신날의 단상(斷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