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1

[박맹수]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동학, 그리고 생명평화 - 성산기획

[박맹수]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동학, 그리고 생명평화 - 성산기획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동학, 그리고 생명평화*



박맹수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





*이 글은 몇 년 전, 강원 원주시에서 있었던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 현판식 기념 강연 내용을 필자가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제가 1983년에 결혼을 했는데 그 때 집사람이 80년부터 사북(강원 정선군 사북읍)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었고, 83년에는 원주시 부론면에 있는 부론중학교, 85년에는 원주 시내에 있는 학성중학교로 전근을 와서 그때부터 저도 자연스럽게 강원도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저는 군대에서 5월 광주항쟁(1980년)을 겪었습니다. 그 때 고급 정보를 취급하는 사단 사령부 벙커에서 연락 장교로 근무를 했는데, 매일 새벽 6시에 사단장님이 출근하면 그 전날부터 새벽까지 일어난 일을 브리핑하는 게 주된 일과의 하나였습니다. 우리나라 전체가 나오는 커다란 지도(地圖) 앞에 서서 2미터 넘는 지시봉을 들고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날짜별 시간대별로 브리핑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81년 6월말에 제대(除隊)를 하고 나오니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우리 국군이 정반대로 국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서부터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었어요.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국민을 학살하는 군대의 하수인 노릇을 한 제 자신이 너무나 비참해서 도저히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81년 9월부터 전북 익산시에 있는 원불교중앙총부에서 처음으로 교역(敎役)에 임했지만 마음은 늘 “왜 광주학살과 같은 비극적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왜 나는 그 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던가” 하는 문제로 고민을 거듭하다가 82년부터 ‘삼동야학(三同夜學)’이란 야학교를 만들어 후배들과 함께 야학을 통한 민주화운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학운동을 하면서 80년 5월의 광주학살의 문제는 어떤 개인 한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 및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광주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야학운동을 병행하면서 1983년에 한국학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에 들어가서는 오늘의 한국사회의 문제의 근원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좌절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이 들어 83년부터 본격적으로 동학(東學) 공부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됐습니다.

1986년 봄에 연구자 중에서는 최초로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 선생에 대한 석사논문을 마무리하고 바로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공부하던 도중이었는데요. 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재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조교로 계셨던 최성현 선생(<<좁쌀 한 알>>의 저자)으로부터 우연히 해월 선생과 동학을 무지무지하게 좋아하시는 도사님 한 분이 강원도 원주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귀가 번쩍 뜨였지요. 왜냐면 당시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광주학살 때문에 충격을 받고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사회를 변혁(變革)해야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 때문에 모두들 동학혁명 최고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 1855-1895)에 대해서만 주목하던 시절이었는데, 해월 선생을 좋아하신다는 도사님이 계신다니 저로서는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사님 소식은 접했지만 어떻게 연락드릴 길이 없어 마음속으로만 기억해 두고는 그만 몇 달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원주에 내려갔더니 집사람이 무위당 선생님께서 참여하고 계신 어떤 모임에서 나온 소식지를 가져와 보여주더군요. 그 때 저는 “아 그렇구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염원하면 서로서로 기운이 통하여 만나게 되는 수가 있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소식지를 보고 바로 연락을 드린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요. 그 때 무위당 선생님과 연락이 닿게 해 주신 분이 당시 강원도 원주시에서 ‘천하태평’이라는 식당을 경영하고 계셨던 선종원 선생님이셨습니다. 선 선생님을 통해 연락을 드리니 “어디어디로 나와라”하는 연락이 바로 왔습니다. 약속한 날, 약속된 장소로 나갔더니 박준길 선생님이 무위당 선생님을 모시고 미리 와 계셨습니다. 선생님 댁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C도로 근처 2층 횟집으로 기억되는 데요. 생선회를 진수성찬으로 차려 놓고 미리 오셔서 저를 기다리시던 선생님을 처음 뵌 순간을 저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저에게 물으셨던 첫 질문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얘 맹수야! 넌 다른 놈들은 다 전봉준에 미쳐서 거기에 푹 빠져 있는데, 무슨 생각으로 해월 선생을 연구하게 되었냐?” 이 질문을 몇 번이고 저에게 물으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선생님께서는 젊은 놈이 그 때의 시류(時流)와는 다르게 해월 선생을 연구한다는 말씀에 대단히 기분이 좋으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때 제가 선생님 앞에서 말이 되는 얘기, 안 되는 얘기를 서너 시간 가량을 떠들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다 들어주셨던 것이 저 뇌리 속에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고, 바로 그것이 선생님에게 사로잡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위당 장일순



이렇게 선생님과 인연이 돼서 한 달에 한 번, 또는 두 달에 한 번꼴로 원주에 내려오면 반드시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고 찾아뵈었습니다. 저는 그때만 해도 해월 선생에 대한 연구만 했지, 사실은 군대 안에서 광주학살이라는 비극적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에 ‘불덩어리’ 그 자체였어요. 무엇이고 만나면 온통 다 태워버릴 기세의 ‘불덩어리’말입니다. 작은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더 큰 폭력으로 민중을 압살하는 정치체제를 어떻게 해서든지 근본적으로 엎어버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대학원생 신분이었는데도 굵직굵직한 시위나 정치적 사건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여했어요. 그런 저를 보실 때마다 선생님께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해주셨던 말씀이 “전두환을 사랑해야 한다” 바로 그 말씀이셨어요. 군대 안에서 광주의 비극을 직접 겪었던 제가 어찌 전두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니, 정말 미치겠더라구요.

하지만 저는 선생님을 찾아뵐 때마다 그렇게 간곡하게 당부하시는 말씀과는 다르게 반대 방향으로만 반대 방향으로만 달려갔습니다. 87년 6월 항쟁 때는 수원과 익산 등지에서 가두연설을 하며 데모에 앞장서는가 하면, ‘인천사태’ 당시에도 가두시위에 참가했고, 대통령선거 당시에는 ‘공정선거감시단’을 결성하여 활동했습니다. 1988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노조 발기인이 되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이어서 어용교수 물러가라는 데모를 주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대학원에서 저의 목을 조여 오는데, 처음에는 지도교수를 바꾸라 하더군요. 지도교수를 특별한 이유 없이 바꾸는 것은 대학원 규정에 없어 못 바꾸겠다고 했더니, 그럼 자퇴해라 그러더군요. 제가 어용교수로 지목했던 교수가 대학원장으로 부임하여 그런 압박을 가해 오니 어쩔 수 없이 자퇴를 결심하고 가슴에 벌겋게 불이 난 상태로 원주로 내려 왔습니다. 그 때 저는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 시험에 응시하여 필기시험에서는 합격했으나 면접에서 노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불합격되었고, 데모 주동자라는 낙인 때문에 시간 강사 자리도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어요. 그리고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시절 ‘북한바로알기 운동’에 호응하여 북쪽에서 간행된『조선전사』보급 책임을 맡아 연구자들에게 보급했다가 그것이 문제가 되어 안기부 수배 리스트에까지 올라가 있는 상태였어요. 그런 저에게 무위당 선생님께서는 ‘혁명가의 로망(낭만)’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서 난을 한 점 쳐 주셨어요. “낭만주의자여야 진정한 혁명가가 될 수 있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포기하지 말고 ‘로망(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격려해 주시면서 “내유천지(內有天地)하면 외무소구(外無所求)니라”를 화제(話題)를 써서 주셨어요. “안으로 천지, 즉 온 우주를 가지고 있으면 밖으로 아무 것도 구할 것이 없느니라.” 네 안에 바른 중심만 서 있으면 바깥 일이 제대로 되는 것 하나 없어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씀은 당시 아무 것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던 저에 대한 선생님의 무한한 사랑과 격려의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화제가 쓰인 난 한 점을 주시면서 “절대로 니가 먼저 자퇴하지 마라, 버틸 때까지 버텨라” 하시면서 응원해 주셨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자퇴하지 않고 10년을 버티었습니다. 10년을 버틴 끝에 박사과정에 입학한지 꼭 10년째 되던 1996년에 가까스로 해월 선생님에 관한 박사 논문을 완성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해월 최시형 연구-주요 활동과 사상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지나간 80년대를 돌이켜 보면, 무위당 선생님께서 계시지 아니했더라면 저의 동학 공부는 진즉 중단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저는 선생님의 뜨거운 격려에 힘입어 10년을 버티면서 돈이 조금 생기면 해월 선생 은거지 답사를 계속했습니다. 답사를 마치고 원주에 오는 날이면 꼭꼭 선생님을 찾아뵙고 결과 보고를 드리곤 했지요. 그런 과정에서 선생님께서는 수시로 해월 선생님 말씀을 해주시고, 시(侍)에 대한 말씀도 해주시고 그러셨어요. 선생님과 저와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더욱이 무위당 선생님의 세상을 바라보시는 경륜을 생각할 때 저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은 존재였지만, 동학을 좋아하시고 해월 선생님을 존경하고 계시다는 이유 때문에 겁도 없이 이것저것 참 많은 질문을 드리곤 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동학에 관심을 가지시게 되었습니까?” “한국전쟁 무렵, 여기 원주에 오창세라는 친구가 있었다. 인격적으로 훌륭했지”라고 하시면서 그 친구로부터 동학을 알게 되고, 수운과 해월 선생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동학, 천도교 쪽 분들이 ‘민족자주’를 기치로 했던 혁신 정당이었던 근로인민당에 많이 가입했는데, 보도연맹사건 때 억울하게 학살당하셨다고 증언해 주셨어요. 눈시울이 뜨거워지던 순간이었지요.

제가 한 30년 동학(東學) 공부를 하긴 했는데요. 아직도 동학의 핵심 사상이 무엇인가라고 물으시면 주저주저하곤 합니다. 그런데 단 하나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있어요. 동학을 ‘하는’ 분들의 가장 큰 특징은 “제 발과 제 힘, 제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된 삶과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동학은 특정 종교가 결코 아닙니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제 결대로 제대로 사는 것을 지향한 ‘생명사상’, 바로 그것이 동학의 진정한 면모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따라서 창도(創道) 당초부터 제 힘으로, 제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된 삶을 지향했기에, 동학이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한결같이 ‘민족자주’를 고민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었죠. 바로 이것 때문에 동학은 외세(外勢) 및 그 외세와 결탁한 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협공을 당합니다. 오창세라는 분도 그런 가운데 희생되신 분이지요.

강원도 원주는 해월 선생님과 인연이 깊은 땅입니다. 두 군데 유적이 있는데, 1898년 6월에 체포되신 호저면 송골이라는 곳과 1890년대 후반 몇 개월간 은신해 계셨던 수레너미라는 곳이 있습니다. 수레너미는 원주 쪽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었지만 지금은 숲이 우거져 버려 갈 수가 없습니다. 횡성에서 안흥을 거쳐 들어가는 길만 있어요. 어느 날 제가, 횡성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수레너미까지 답사를 간 적이 있었어요. 답사를 마친 뒤 선생님을 뵙고 산세가 이렇고 저렇고 라고 말씀드렸더니 “앞으로 거기다가 한살림 수련원을 만들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호저 송골에 해월 선생님 추모비를 세울 적에는 원주에서 선생님과 함께 활동하셨던 ‘치악동우회’ 회원들의 합력이 컸다는 말씀도 해주시고, 경남 하동에서 올라온 해월 선생님 후손인 도예가 최정간 선생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던 기억도 납니다.






해월 최시형 피체지 묘비 제막식



이렇게 무위당 선생님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을 무렵, 원주에서 출범한 ‘한살림’이 서울로 올라가고(박재일 회장님이 제기동에 ‘한살림농산’이라는 이름의 가게를 차린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한 쪽으로는 ‘한살림모임’의 주도로『한살림선언』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을 뵈오니,『한살림선언』이라는 작은 책자 한 권을 주시면서 “이것 공부해라. 네 생각이랑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시면서 ‘한살림모임’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한살림모임’에 참여하면서 저는 꿈에도 그리던 김지하 시인을 비롯하여, 박재일 회장님, 김민기 선배님, 최혜성 선생님, 서정록 선생, 윤형근 선생 등을 만나게 됩니다. 그 때만 해도 저는 돈 없는 가난한 대학원생이었기 때문에 가난하기 그지없는 ‘시인 김지하’님께 몇 번이나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가난한 ‘시인 김지하’ 선생님에게 밥 얻어먹은 사람은 저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하니, 그 시절 그다지도 염치가 없었던 제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납니다.

저는 지금도『한살림선언』을 처음으로 접했던 순간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충격이란 무어라고 할까, 제 인생에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 준 사건이 바로『한살림선언』을 처음 접했던 순간입니다. 저의 인식의 대전환은 무위당 선생님과의 만남에서도 이루어지지만, 결정적인 대전환은 바로『한살림선언』을 손에 넣고 읽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선언을 읽자마자 바로 떠오른 생각은 “동학이 바로 이거야”였습니다. “동학이 바로 이거야”란 동학이 새롭게 부활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한살림선언』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한살림선언)이 해월 선생께서 38년 동안 조선팔도를 전전하시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알려주고, 깨우쳐주시려 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이게 무위당 선생님께서 평생토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 했던 바로 그 (생명)사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이거다.” 라는 생각에 제가 그대로『한살림선언』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고, 그때서야 비로소 “아 내가 미친놈이 결코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그 전까지만 해도 선배와 친구들에게, 그리고 지금 생존해 계신 진보적 역사학자로 유명하신, 상지대 총장님도 역임하셨던 강만길 교수님께 어느 학회 모임에서 1893년 보은취회에서 해월 선생님이 하신 역할을 얘기했다가 엄청 얻어맞은 적이 있었어요. “역사학은 학문의 골키퍼인데 제대로 공부도 안하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라면서 저를 엄청나게 꾸짖었어요. 잘 아시다시피 강만길 선생님은 당시만 해도 역사에 있어서는 경제적인 문제, 사회경제적 상황이 전체를 좌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지니고 계셨죠. 그런 선생님 앞에서 전봉준 대신에 해월 선생님 역할을 강조하고,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사상과 정신 문제를 말했으니 혼이 날 법했죠. 그런 강 선생님도 지금은 완전 달라지셨지요. 그리고 1998년 1월에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札幌市)에서 뵐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는 정말 따뜻하게 저를 진심으로 격려해 주신 기억이 새롭습니다.

하여튼 사회경제적 문제 중심으로 역사를 연구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던 80년대 내내 저는 학회에서 ‘미친 놈 아니면 조금 모자라는 놈’ 취급을 당했고, 동학의 사상적 중요성이나 해월 선생을 다시 보아야 한다는 제 발언은 언제나 반대 의견을 가진 연구자들의 벌떼 같은 공격으로 초토화되곤 했었습니다. 그런 삭막한 상황 속에서 해월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주목하신 무위당 선생님을 뵙게 되고, 그리고 동학의 핵심 사상을 생명사상으로 새롭게 해석해 낸『한살림선언』을 읽었을 때, “아! 내가 80년 광주학살 이후 그토록 찾고자 했던 동학의 핵심 사상이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구나. 40여 년에 이르는 해월 선생의 고난이 결코 헛되지 않고 이렇게 부활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기 시작하였고, 그 때서야 비로소 “내가 나사가 몇 개 빠진 모자란 놈이 결코 아니었구나! 내가 그토록 어렵게 찾아 헤매며 해결하고자 했던 주제= 해월 연구가 결단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구나!”하는 확신이 들고, 그렇게 확신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동학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2년에 원불교 교단에서 ‘영산원불교대학’이라는 대학을 신설하게 되는데, 저는 그 대학 창립 멤버로 포함되어 강원도 원주를 떠나 전남 영광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 때 제가 “영산원불교대학 창립 멤버로 발령이 나서 전라도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 때 무위당 선생님께서는 벌써 소식을 들으시고 “일체중생 하심공경 시수행인 청정심야(一切衆生 下心恭敬 是修行人 淸淨心也)”라는『육조단경』말씀을 화제(話題)로 써서 주시더라구요. 이 글이 어디에 나오는 글귀이고 너에게 왜 준다는 그런 내용이 담긴 편지까지 미리 써서 준비해 두셨더라구요. “모든 중생(사람 뿐 아니라 벌레 한 마리와 같은 미물 곤충까지도 포함)을 하심(下心)을 해서 늘 공경을 해야 그게 종교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으로, “니가 이 경구대로만 살면 아마도 후회 없는 삶이 될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후학(後學)을 기르기 위해 떠나는 저에게 무한한 신뢰와 격려를 실어 주셨습니다. 정말 선생님의 큰 사랑을 입은 저로서는 이 경구가 영원한 화두(話頭)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광주학살 이후에 동학, 그 중에서도 해월 선생님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무위당 선생님을 뵐 때마다 늘 가슴 한 구석에 갈등과 고민을 안고 살았습니다. 저는 원불교라는 신생종교의 교역자 신분의 종교인이지만 ‘혁명’을 하고 싶었고, ‘혁명’을 하면서도 종교적인 심성, 영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자 고민이었어요. 개인의 구원과 사회의 구원을 제 삶으로 통합하는 것이 꿈이었거든요. 그런데 해월 선생님 연구에서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있었고, 다시 무위당 선생님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저에겐 두 분 모두 영성과 혁명을 탁월하게 통합한 어른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박사 논문에서 해월 선생님이 바로 혁명과 영성을 통합한 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섯 분 심사위원 선생님들이 아무도 인정해 주시지 않습디다. 박사논문 심사를 받을 당시에는 관련 기록이 김구 선생님 자서전인『백범일지』에만 나왔기 때문이예요. 전봉준 장군(혁명)과 해월 선생(영성)이 손을 잡고 혁명을 하는 기록이 백범 선생님 자서전에서만 나오니 심사위원들께서 근거가 약하다며 인정해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동안 포기하고 있다가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일본 유학을 하게 되어 일본 측 자료를 널리 섭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어요. 한국 학자로서는 최초로요. 4년 동안 일본 측 자료를 광범위하게 찾아보니 해월 선생께서 전봉준 장군과 협력하여 혁명을 수행하고 있는 1차 사료(史料)들이 10여 개 이상 나오더군요. 두 분이 비밀 연락 루트까지 두고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구요. 거기서 저는 어떤 결론을 얻었냐 하면, 동학혁명 당시에 영성과 혁명이 통일되어 있던 분이 바로 해월 선생님이시고, 그런 온전한 인격을 갖추신 해월 선생님을 무위당 선생님께서 그토록 존경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해월 선생님의 참 모습, 즉 영성과 혁명을 당신의 인격 안에 온전히 통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일본어로 써서,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 박사 논문으로 제출하여 일본 교수님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제 평생의 화두를 해결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2001년 4월에 일본어 박사 논문을 들고 귀국하자마자 원주로 편지를 드리고, 다음 해 5월에 무위당 선생님 묘소에 논문을 올리고, 그리고 술 한 잔을 올리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 눈물은 지난 1백 년의 비참했던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회한과 슬픔, 분노의 눈물인 동시에, 제 인생 전체를 걸고 고투했던 화두를 해결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해월 선생님과 무위당 선생님의 크신 가르침과 삶의 모범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온통 어우러진 그런 눈물이었습니다.

저는 생전의 무위당 선생님을 뵈올 때마다 언제나 100년 전의 해월 선생님께서 부활하셔서 이 자리에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곤 했습니다. 저에게는 해월과 무위당이 서로 다른 두 분이 아니라 늘 한 분이셨어요. 100년 전의 무위당이 바로 해월 선생님이셨고, 현재의 해월이 바로 무위당 선생님이셨지요. 그런데 그 두 분에게는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풀뿌리 민초(民草)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무한한 관심 그 자체 말입니다. 무위당 선생님께서 봉산동에 있는 댁을 나오셔서 시내로 오는 길은 천천히 걸어야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늘 두 시간 넘게 걸려서 시내로 나오시곤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널리 알려진 사실 아닌가요. 두 시간 동안 내내 걸어 나오시는 동안 길거리에서 좌판 장수를 하시는 할머니와 아주머니들과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시고, 리어카 끌고 군고구마를 파는 아저씨와도 장사 이야기 나누시느라 그러셨다지요.








해월 최시형



100여 전의 해월 선생님도 무위당 선생님처럼 민초들에 대한 시선이 똑 같았어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하나 소개하지요. 해월 선생님 제자 중에 서장옥(徐璋玉)이라는 이가 있어요. 서인주(徐仁周)라고도 합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서장옥은 의협심이 대단히 강해서 불의(不義)한 일을 보면 참지 못하는 기질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저와도 약간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아요. 그런 서장옥의 눈에 동학(東學)을 ‘한다’는 죄목 때문에 동지들이 무수하게 잡혀가 억울하게 죽기도 하고, 귀양 가기도 하고, 부당하게 재산을 빼앗기는 것을 참다참다 못해 항의를 하다가 관에 잡혀 죽을 지경에 이르렀어요. 그 때가 1880년대 말엽 아니면 1890년대 초엽의 일입니다. 이 일로 인해 해월 선생께서도 신변이 위태로워져서 강원도에서 충청도 쪽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종일 빗속을 뚫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밤이 되어 어느 이름 모를 주막에서 하루 저녁을 지내게 됐습니다. 그런데 밤이 늦어졌는데도 해월 선생께서 주무시지를 않습니다. 옆에 모시고 있던 제자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여쭙습니다. “종일 비를 맞으셔서 감기가 들지도 모르고 피곤도 하실 텐데 왜 주무시지 않습니까?” “장옥이가 지금 동지들을 위해 일을 하다가 잡혀 감옥에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 있는데, 내가 어찌 이만한 일로 따뜻한 이불을 덮고 편한 잠을 잘 수 있겠느냐”하면서 꼬박 밤을 지새우셨다고 합니다. 너무나 가슴 찡한 이야기 아닌가요. 해월 선생께서는 또 “내가 젊었을 때 남의 집 머슴살이를 많이 했는데, 그 때 사람들이 ‘머슴 놈, 머슴 놈’ 하면서 멸시를 하곤 했을 때 참 가슴이 많이 아팠느니라. 사람이 곧 하늘님이니 너희들은 사람 모시기를 하늘님 모시듯이 해야 한다”고 평생토록 강조하셨다고 익산 출신 동학 접주이자 해월 선생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오지영 선생이『동학사』에다 써 놓았습니다. 이 모두 해월 선생님 역시 민초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자 그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894년 동학혁명 당시 혁명 대열에 동참했던 이름 없는 민초들의 꿈이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보기로 합시다.

우리들은 비록 시골의 이름 없는 백성들이지만 이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이 땅에서 나는 것을 입고 사는 까닭에 나라의 위태로움을 차마 볼 수가 없어 팔도(八道)가 마음 을 합하고 억조창생(億兆蒼生)들과 서로 상의하여 오늘의 이 의(義)로운 깃발을 들어 잘못되어 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도탄(塗炭)에서 헤매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 것을 죽기로써 맹서(盟誓)하노니, 오늘의 이 광경은 비록 크게 놀랄 만한 일이겠으나 절대 로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말고 각자 자기 생업에 편히 종사하여 다 함께 태평성대(太 平聖代)를 축원하고, 다 함께 임금님의 덕화를 입을 수 있다면 천만 다행이겠노라.

위 내용은 문맹률이 80-90%가 넘던 시절인 갑오년(1894) 음력 3월 20일경에 전봉준 장군을 필두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을 내걸고 전라도 무장(茂長)에서 전면 봉기한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조선 팔도를 향해 포고(布告)한「무장포고문(茂長布告文)」에 있는 내용입니다. 당시 민초들의 간절한 꿈이 너무나 절실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꿈을 실현하기 위한 동학군들이 어찌 폭도(暴徒)요 비도(匪徒)란 말입니까? 저는 바로 이런 민초들의 모습을 가장 절절하게 이해하시고, 가장 깊게 사랑하신 분들이 바로 해월 선생님이셨고, 무위당 선생님이셨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