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6

붓다로살자 - 조성택 교수의 글 <불교는 ‘이야기’다: 교리에서 ‘이야기’로> 꽃을 설명하고 있는 다음 두 가지...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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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로살자
17 March 2014 at 14:55 ·
조성택 교수의 글 <불교는 ‘이야기’다: 교리에서 ‘이야기’로>
꽃을 설명하고 있는 다음 두 가지 경우를 보자.


사례 1.
식물의 생식 기관으로 꽃잎, 꽃받침, 암술, 수술로 이루어져 있다. 형태와 색채가 매우 다양하여 각각 그 특징이 있
으며, 구조상으로는 필수기관인 꽃술과 보조기관인 화피(花 被)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꽃술은 수술과 암
술이 있는 데 이를 모두 가진 것을 양성화(兩性花), 하나만 가진 것을 단성화(單性花)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등에서 요약발췌)]
사례 2. [김춘수 ‘꽃’ 그리고 ‘꽃 1’에서 각기 발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꽃> 中에서]
“그는 웃고 있다. 개인 하늘에 그의 미소(微笑)는 잔잔한 물살을 이룬다.” [<꽃1>中에서]
두 경우 모두 꽃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르다. 사례 1은 과학적이며 논리적인 설명의 경우다. 이는
곧 꽃에 관한 지식이다. 따라서 정확성 여부가 지식으로서의 가치를 결정하게 된다. 한편 사례 2는 꽃에 대한 ‘이야
기’들이다. 여기에서 꽃은 사물화(事物化)된 객관적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이야기를 통해 ‘꽃’은 의미를 발생시키
는 매체이자 의미 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의미의 세계’에서 꽃은 우리 삶의 일부가 된다.

사례 1의 경우처럼 사물에 대한 지식은 ‘사실’에 바탕을 둔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한 사물에 대한 두 개의 다른 지
식은 있을 수 없다. 반면에 한 사물이 드러내는 ‘의미’는 무궁무진하다. 단 하나의 의미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그
래서 삶이란 늘 익숙한 사물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흔히 말하는 ‘깨달음’이란 그 발견의
의외성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이 글의 목적은 꽃에 대한 것이 아니다. 불교에 대한 이해의 방식을 위의 두 가지 경우에 빗대어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근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 까지 한국불교인들의 일반적인 불교 이해는 사례 1에서와 같은 지식적인 이해
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조계종단에서 일반신도들을 위한 기본교육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불교개론』을 보면
고성제를 설명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인간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색(色)’이란 몸을 이 루고 있는 물질 일반을
말한다. ‘수(受)’란 ... 감수작용이다. ‘상(想)’이란 ... 지각하는 작 용이다. ‘행(行)’이란 ... 결심·노력 등을 말한다. ‘식
(識)’이란 ... 판단하는 작용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러한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고 실
체화하며 고정 화 시킨다. 그럼으로써 고통이 발생한다. 그것이 오취온고의 의미다.
[『불교개론』,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2012년, 114-115쪽에서 요약 발췌]
오온에 대한 위 인용문의 설명이 정확하냐의 여부는 이 글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논외로 한다. 위 설명문을 인용
하는 이유는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불교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소위 불교 공부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
를 단적으로 보여주고자 함이다. 위 인용문이 잘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오늘날 한국불교는 ‘불교적 지식’을 통
해 불교를 교육하고 또 이해하고자 한다. 물론 이 개론서의 목적이 불교의 역사와 교리를 지식화하여 전달하는 것
에 있기 때문에 그 책임을 개론서 자체에 물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지식을 중심으로 불교를 공
부하고 이해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불교에 대한 공부방식이라는데 있다. 그리고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지식
중심의 불교관을 가진 사람들이 전통적인 기복신앙에 젖어있는 소위 ‘보살들’을 비판하고 폄하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지식불교의 폐해는 기복불교의 폐해보다 결코 적지 않다. 지식불교의 관념성은, 의식적이
든 무의식적이든, 불교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종교성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지 때문이다.
사실 근대 이후 지금까지 한국불교의 큰 흐름중의 하나는 불교의 ‘지식화’였다. 현재 종단의 출재가 교육의 내용과
방향을 보더라도 불교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습득하게 하는 것을 주로 하고 있다. ‘불교의 지식화’는 한편으로 조
선 오백년의 ‘산중불교’를 극복하고자 하는 근대불교 선각자들의 의지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불교의
지식화는 근대 식민주의의 한 부산물인 근대불교학이 추동해온 세계불교사의 한 흐름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근대
불교학이 직접 혹은 일본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한국근대불교가 원하는 불교지식의 주 공급원이 되었던 것은 자
연스러운 일이었다.
근대불교학은 잘 알려진 대로 교리와 역사를 통해 불교를 재구성하였다. 이는 유럽의 발달된 문헌학과 역사학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근대불교학에서 중요한 것은 불교와 그 역사에 대한 ‘사실’과 객관적 ‘지식’이었다. ‘의미’는 근
대불교학의 일차적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 결과 불교는 과거의 전통으로 그리고 ‘텍스트’로 환원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불교는 지식으로 박제되고 관념적인 철학체계로 변하고 말았지만 동양의 근대불교 선각자들은 개의치 않았
다. 아니 오히려 반겼다. 막 밀려들기 시작한 기독교의 교세에 대항 할 수 있는 불교의 강력한 무기가 바로 ‘지식’으
로서의 불교 ‘철학’으로서의 불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양의 근대불교인들이 보기에 기독교는 전근대적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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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2020 붓다로살자 - 조성택 교수의 글 <불교는 ‘이야기’다: 교리에서 ‘이야기’로> 꽃을 설명하고 있는 다음 두 가지...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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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seung Shin
공유합니다~ ^^ _()_
심백섭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Chin Bae Cho
좋은 관점입니다. 도움이 됩니다.
지’ 그 자체였다. 지식이 아니라 신앙을, 역사가 아니라 신화를 내 세운 전근대적 종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러나 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의 힘이었다.
기독교의 현실적 힘은 신학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를 전 인류의 그리스도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신학이 아
니라 예수의 삶을 인류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로 전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학은 ‘이야기’를 설명하는 체계일
뿐이다. 현실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는 것은 예수의 사랑 이야기가 전하는 ‘의미’이지 이야기에 대한 ‘설명’은 아니
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요체는 적어도 내가 보기에 신학에 있지는 않다. 바이블에 담겨 있는 다양한 ‘이야기
들’이 기독교의 요체다. 해방, 사랑, 구원, 용서 이 모든 것들이 이야기를 통해 전달되고 있으며, 바이블의 이야기는
예수 이후 이천년이 넘는 현실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들로 변용되고 활용되어 왔다.
반면 불교는 적어도 근대이후 지금의 불교는 관념적 교리와 역사로 구성된 ‘과거의 전통’일 뿐이다. 불교 경전에
산재되어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그냥 ‘꾸며낸’ 혹은 방편적인 장치로서만 이해되고 있다.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불교경전에 등장하고 있는 다양한 화소(話素) 즉 이야기의 요소들은 ‘이야기’로서 재구성되거나 활용되고 있지 못
한 채 여기저기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을 뿐이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불교가 담론으로 구성되지 못하고 ‘날 것’ 그대로 교리로서만 논의되고 통용되고 있는 것은
불교에 관한 지식을 곧 불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은 관념일 뿐이다. 지식이 현실의 삶에서 힘을 발휘
하기 위해서는 담론화 되어야 한다. 담론이란 곧 이야기다.
일반적 정의에 따르면 의사소통을 전제로 한 서사 담론의 모든 형태가 이야기다. 이야기를 통해 지식은 비로소 ‘의
미’를 발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의 불교인들은 부처님의 생애에 관한 역사적 사실에도 밝고 교리에 관해서도 많이
알고 있다. 그리고 역사와 교리를 통해 불교에 대한 수준 높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생애가 어떻
게 뭇 생명들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이야기로 재구성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은 많지 않다. 교리와 역사로서 충
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지식이 곧 불교는 아니다. 그리고 지식은 실천을 담보하지 못한
다.
지금의 한국불교에서 감동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교리만 있을 뿐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꽃에 관한 지식이 우
리에게 감동을 줄 수 없는 것처럼 불교에 대한 지식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꽃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김춘수의 시가 그러한 것처럼 새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이다. 사물에 대한 지식은 ‘단 하나의 사
실’을 추구하지만 사물에 대한 의미는 다양하며 늘 새롭게 발견된다. 불교에 대한 지식은 과거의 전통을 ‘재생’하
고자 한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이야기’는 과거를 ‘재현’하고자 한다. 재생과 재현의 차이는 지식과 의미의 차이이
자 과거와 현재의 차이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재생은 삼인칭의 일이지만 재현은 바로 ‘나’
일인칭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시를 쓰는 일과 마찬가지로 ‘부처로 살자’는 모방(mimesis)을 통해서다. 따라서 ‘부처로 산다는 것’은 부처님의 삶
을 ‘이야기’로서 재현하는 것이며 그 이야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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