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하는 삶의 여정
영신수련과 하느님 체험 | 영성수련자료
베네딕도 Choi HJ 2011. 2. 6.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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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신수련과 하느님 체험
정제천(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 예수회 신부)
1. 영신수련의 기원
영신수련을 교회에 남긴 이냐시오 성인은 중세의 분위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1491년에 스페인에서 태어나 기사로 성공하기를 꿈꾸던 사람이다. 그런데 프랑스 군대와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집에 와서 병상생활을 하던 가운데 회심의 계기를 갖게 되었다. 그는 예수전과 성인열전을 읽으면서 자신의 과거가 얼마나 죄스러운지를 깨닫고 보속을 해야 한다고 느꼈으며, 성인들처럼 고행과 극기의 생활을 하고 싶어하였다.
어느 정도 걸을 수 있게 되자 그는 예수님께서 사시던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떠났다. 배를 타러 가다가 만레사라는 마을에 이르러 그동안 겪은 수많은 ‘영적인 움직임’을 정리해 둘 요량으로 잠시 머물기로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일 년 가까이 머물게 되었다. 만레사의 동굴에서는 심한 고행과 극기의 생활을 하였는데 자신의 죄스러움을 깊이 깨달았을 때에는 더 이상 인생을 지탱할 수가 없어 자살을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일생을 두고 배운 것을 합친 것보다 더 뛰어난 ‘영적인 비추임’을 받았다.
그는 영적인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겪은 모든 일을 회상하고 성찰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적어두었는데, 이것이 영신수련의 기원을 이룬다. 그리고 자신의 체험에 신학 공부를 하면서 얻게 된 새로운 지식을 덧붙여서 영신수련을 완성해 갔다. 영신수련이 완성되는 데에는 2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을 만레사에서 쓰기 시작하여 그 뒤에도 계속해서 적어 넣고 고쳤으며 로마에서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2. 영신수련의 구조
영신수련은 만레사 체험의 결론인 ‘두 개의 깃발’과 ‘그리스도의 나라’ 묵상이 핵심을 이루고, 이를 출발점으로 하여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생애를 관상하는 것이 근본 구조이다.
1) 제1주간(죄의 성찰)
영신수련은 인간이 창조된 사실부터 시작한다. “사람이 창조된 것은 우리 주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께 경배하고 봉사하며 또 이로써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다”(「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윤양석 옮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2년, 23항). 이 명제는 영신수련의 출발점이자 진행 원리가 된다. 세상만물을 바라보는 눈도 여기에서 나온다. 곧 인간관계를 포함하는 세상만물은 인간의 창조 목적인 하느님 찬미와 경배와 봉사를 위해 도움이 되도록 사용되어야 한다. 오직 이 목적에 맞는지가 취사선택의 기준이 된다.
피정하는 사람은 제1주간에 앞서 제시된 일반 성찰과 특별 성찰의 양식에 따라 성찰에 익숙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죄의 성찰은 고해성사를 위한 성찰과 달리 개별적인 죄행의 성찰이나 인간의 죄스러움에 대한 심리학적 통찰에 그쳐서는 안 되고 죄의 연대성에 대한 통찰과 내 죄의 역사적, 신학적 뿌리를 인식하는 데에 도달해야 한다. 무죄한 사랑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세상의 죄에 나도 일조해 왔다는 통찰과 이에 대한 뉘우침이 제1주간에 기대되는 열매이다.
2) 제2주간(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관상함)
제2주간은 영신수련의 핵심 체험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의 나라’ 기도로 시작된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왕들처럼 우리를 부르신다. 자신과 세상의 죄에 혐오감을 느끼게 된 피정자는 이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접하고 여기에 응답하게 된다. 이로써 구원사업의 협력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창조의 목적에 따라 회복하고자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회복을 위해 취하신 방법은 힘과 권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모욕과 업신여김과 가난을 참아 받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가난하고 겸손한 그리스도 왕을 따라 가난과 모욕과 업신여김을 참아 받는 길을 가야 한다. 피정자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소집에 응답하려는 능동적인 열망을 외적으로 보여야 한다. 예수님의 생애를 관상하려는 이는 예수님의 생애를 관람하는 관객이 아니다. 그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 생활양식에 민감한 이해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능동적 자세가 예수님 생애에 대한 관상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이다.
이어서 예수님의 강생과 탄생 관상으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생애 관상이 계속된다. 이와 병행하여 제2주간에는 이냐시오식의 고유한 기도가 제시된다. 두 개의 깃발,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 세 단계의 겸손이 그것이다. ‘두 개의 깃발’ 기도에서 이 세상은 그리스도와 사탄의 나라 사이에 일대 결전을 벌이는 싸움터로 묘사된다. 중요한 것은 두 진영의 전술이다. 사탄의 전술은 부와 명예를 추구하게 하여 교만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예수님의 전술은 가난과 업신여김을 사랑하게 하여 겸손으로 이끄는 것이다. 두 개의 깃발 묵상이 그리스도와 그 진영에 대한 지성적인 동의를 요구한다면,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 묵상은 예수님에 대한 정서적인 지지와 추종을 다짐하는 것이다. 이 내적인 움직임이 반복되면서 종합을 이루는 것이 ‘세 단계의 겸손’이다.
3) 제3주간(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수난)
여기서 피정자는 최후의 만찬에서 시작하여 게쎄마니 동산의 기도, 체포, 재판, 군중들의 배척과 십자가의 길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관상한다. 피정자는 수난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아파하면서 그분의 수난 여정에 동참하게 된다. 그 여정에 온전히 동참하고자 제3주간에는 “고통과 슬픔, 당황스러움”(「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193항)을 기도의 선물로 청한다.
4) 제4주간(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삶)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시면서 고통 중에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영광 중에도 당신을 따르게 하겠다(「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95항 참조)는 약속을 하셨는데, 그분의 부활은 이 약속이 정녕 실현될 것임을 희망으로 맛보게 하는 사건이다. 영신수련을 마치는 이 단계에서는 위로부터 오는 기쁨을 마음껏 누리도록 초대받는다. 이 주간에는 성모님께 발현하신 장면에서 시작하여 복음서에 나오는 부활 장면을 관상하게 된다.
부활 관상에 이어서 피정자는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230-237항)으로 전체를 마무리한다. 우주적 그리스도상이 제시되는 이 관상은 영신수련의 구도에서 볼 때 성령 강림에 해당한다. 성령 강림을 체험한 사도들은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경험한 사실들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 이후에 교회는 자발적으로 복음 선포에 나섰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은 ‘지금까지 받은 그 많은 것들에 대한 내적 인식’을 구하며 영신수련 전체 과정을 총정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피정자는 세상에 파견되어 그리스도를 증언할 임무를 받는다.
3. 영신수련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주제들
1) 이냐시오식 관상
관상(觀想: contemplation)은 글자 그대로 “보면서 생각하는” 기도이다. 산 위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경치를 관조하거나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듯이, 복음서의 장면이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상상하면서 사건과 메시지의 구원사적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복음서를 가지고 기도하는 방법인데, 원칙적으로 일정한 시공간에서 이루어진 사건을 묘사하는 장면일 때에 가능하다. 장소와 시간, 등장인물을 상상의 눈으로 재구성하여 그들이 2000년 전에 행한 것을 지금 여기 기도 속에서 재현하는 것이다.
이 기도의 장점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생생한 현장감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전인적 존재이기 때문에 기억과 상상력, 감수성이 망라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기도 체험은 다른 기도에서 느낄 수 없는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이 체험을 가지려면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있어야 하며 침잠을 방해하는 어떤 사건이나 기억으로 혼란 상태에 빠져있어서는 안 된다. 상상력을 통한 복음 속의 예수님과의 만남이 ‘내가 멋대로 지어 만든 허상’이 되지 않으려면 복음서의 내용을 존중해야 하고 특히 지도자와 면담을 통해 확인받을 필요가 있다.
이냐시오식 관상에서 기대되는 핵심 체험은 시각적인 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복음서를 통하여 전해지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듣는 데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장소 구성과 생동적인 장면 전개가 어느 정도 되느냐는 사람들의 재능, 기질, 성향에 따라서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이냐시오식 관상에 더 적합하다든지 또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이냐시오식 관상의 본질을 시각적인 것에서 찾는 데서 오는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관상의 본질인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듣는’ 데에는 열망에 따른 개인차는 있을지언정 능력에 따른 개인차는 없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예수님을 만나려는 열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영신수련의 방법에 따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해야 옳다. 이냐시오식 관상에서 장소 구성과 그에 따르는 시각적 체험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복음서 내용을 현재화하는 의미 있는 수단이라고 보아야 한다.
2) 부칙들(「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73-90. 127-131. 206. 226-229항)
인간은 감각적, 정감적, 영적 차원을 고루 갖고 있는 다차원적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 조건상 기도를 좀 더 잘 하려면 기도의 준비, 자세와 횟수, 기도를 위한 분위기 조성, 고행의 정도 등을 세심하게 배려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이냐시오는 각 주간에 맞는 요령들을 제시하고 있다.
3) 영들의 식별 규칙(「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313-336항)
이냐시오는 영적 회심 체험 이후 자신의 내면에 일어난 일들을 회상하고 성찰하면서 어떤 규칙들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이것을 알면 영성생활을 진보시키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고 이를 적기 시작하였다. 영들의 식별에서 기본이 되는 개념은 영적인 위안과 실망이다. 하느님을 향해 진보하려는 영혼에게 성령께서는 영적인 위안을 주셔서 그 길에 매진할 수 있게 하며, 악한 영은 그와 반대로 걸림돌을 놓고 실망감을 불러일으켜서 길을 바꾸게 한다는 것이다. 영들의 식별 규칙은 이냐시오의 순수 창작물이 아니고, 자신의 체험에 교회의 전통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4) 기부금(자선금)의 처리(「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337-344항)
영신수련 피정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공적인 임무를 맡아 재산을 관리하거나 기부금(자선금)을 분배하는 일을 담당하는 경우가 있다. 이 규칙들은 이들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이 규칙들은 오늘날 사제들의 생활 개선에도 의미 있는 시사점이 되어준다. 기부금은 사심 없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공정하게 분배하도록 한다.
5) 세심증에 관한 규칙(「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345-351항)
영성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은 세심증을 당할 수가 있다. 이냐시오 역시 만레사 생활 도중에 세심증으로 마음고생을 했다. 세심증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며 극복되어야 하지만 ‘아무 잘못이 없는 데서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량한 영혼의 표지이다.’는 그레고리오 성인의 말처럼 더욱 정화된 영혼을 갖게 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심증으로 하느님께 드려야 할 영광과 봉사에 소홀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6) 교회와 함께하는 정신(「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352-370항)
영신수련 피정을 마치는 사람은 자신의 내적 체험을 과신하는 나머지 교회의 가르침과 맞서는 오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영신수련을 하는 동안에 각 개인을 이끌어준 성령과 교회 지도자들을 통해서 교회를 인도하고 통치하는 성령은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이 둘은 모순되지 않는다. 만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개인적인 신념보다 교회의 가르침을 우선해서 따라야 한다고 이냐시오는 가르치고 있다.
7) 영신수련 지도자와의 관계
이냐시오는 자신의 만레사 체험을 구술하면서 선생이 학생을 가르치듯이 하느님께서 자신을 다루셨다고 고백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신수련의 진정한 지도자는 하느님이시다. 영신수련에 동반하는 지도자는 하느님과 그의 피조물의 직접적인 만남을 돕는 중개인일 뿐이다. 지도자는 피정자의 체험을 이해하여 그를 돕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영신수련의 지도자는 고해 사제와 다르기 때문에 피정자의 개인적 생각이나 죄에 대하여 묻거나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영신수련은 피정자가 지도자와의 관계에서 차츰 많은 자율성을 얻어가는 과정이다.
4. 영신수련의 특징들
1) 성서적이다
영신수련의 전체 4주간은 구약성서에서 시작하여 신약의 복음서 전체를 망라하고 있다. 제1주간은 구약에서 보이는 천사와 원조의 죄, 본죄들을 묵상하도록 초대한다. 제2주간은 예수님의 강생, 탄생에 이어서 전체 지상 생애를 복음서에 따라서 관상하는 것이며, 제3주간은 예수님의 수난을, 제4주간은 예수님의 부활을 관상하도록 되어있다. 영신수련은 그리스도교의 모든 신앙 체험의 원천인 성서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성서의 원체험을 각자가 고유한 상황에 맞게 내면화시키도록 돕는 유효한 수단이다.
2)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영신수련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자 하는 역동적인 정리 과정이다. 제1주간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분으로 제시된다. 제2주간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 시작되며 그리스도의 진영에 속하고자 하는 결심과 선택을 바탕으로 하여 진행된다. 제3주간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관상하면서 그분의 아픔에 동참하려는 의지를 보이며, 제4주간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함께 나누는 기쁨의 시간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영신수련은 그리스도 제자 됨의 과정이다.
3) 삼위일체적이다
영신수련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와 하나가 되는 삼위일체 구도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피정자는 기도 때마다 필요한 은혜를 청하게 되는데, 이 은혜는 다름 아닌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에 결국 피정 기간에 성령께 기도의 은혜를 청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을 떠나서는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위에서 말한 대로 매 기도에서 ‘청하는 은혜들’ 외에도 영들의 식별, 제2주간의 선택에서 확인을 구하는 일, 삼중담화에서 구하는 은총은 모두 성령의 인도 및 열매와 관련을 갖고 있으며, 특히 마지막 관상인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은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 성령 강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4) 정감의 훈련
많은 이들이 이냐시오식 기도는 지성적이고 의지적인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냐시오가 강조하는 기도의 틀은 마치 수영을 배울 때 익혀야 하는 기본기와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상상력을 활용하는 장소 구성은 앞서 보았듯이 복음서를 여러 차례 읽어서 내 것이 되어갈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장소를 택하는 것이 좋다. 이를 위해서 처음에는 의지와 지성을 활용하여야 하지만, 반복에 따른 효과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반복은 이냐시오식 관상의 성공 여부를 가리는 중요한 안전장치이다. 반복을 통하여 관상 기도는 마음의 기도가 된다.
영신수련의 성격과 관련하여 중요한 또 하나의 요점은 기도의 목표이다. 기도는 머리의 훈련이 아니라 마음의 훈련이다. 기도를 달리기 경주처럼 생각하여 꼭 도달하여야 할 어떤 목표가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기도는 나와 하느님의 만남으로 목표가 달성된다.
5) 봉사의 신비가
영신수련 피정은 사도적인 사람을 지향한다. 피정자는 제1주간부터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다. 제2주간에 들어서 세상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소집에 응답하고 제2주간부터 제4주간에 걸쳐 예수님의 생애와 수난, 죽음에 대한 관상을 통하여 남을 위한 사람인 그리스도의 생활양식을 배운다. 영신수련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 안에서 정리한 영혼이 가난하고 미소한 이들을 위한 봉사자로 태어나도록 돕는 과정이다.
6) 영성생활의 종합적 수련소
영신수련은 기도 방법들의 가르침 외에도 영들의 식별 규칙, 세심증, 기부금 배분의 원칙 등 영성생활의 기본 원리에 해당하는 것을 망라하고 있다. 영신수련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회개와 용서의 체험이며, 새로운 삶의 기획이 내포된 종합적 프로그램이다.
5. 영신수련의 실행 현황
한국에서는 1980년대 이후 수녀회에서부터 영신수련 피정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서강대학교 안에 있는 이냐시오 영성 연구소에서 영신수련 지도자를 양성하는 과정이 있고, 수원 ‘말씀의 집’에서 정기적인 피정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참가자들에게 영신수련 피정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각 예수회원들이 수녀원, 신학교의 요청에 따라서 현지에 가서 봉사하고 있으며, 몇몇 수도회와 교구에서는 자체 지도요원을 양성하여 피정을 하고 있다. 연례 피정으로 영신수련을 하는 경우에는 8일 피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여러 교구에서는 사제 서품 전에 한 달 동안 영신수련 피정을 하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있고, 수도회에서도 종신서원 전에 한 달 피정을 하는 곳이 많다.
6. 맺음말
영신수련 체험은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중요한 전기가 되어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신앙과 생활을 통합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오늘날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여러 유사 종교 운동들이 있지만, 그러한 운동들이 사람들을 인간의 진정한 고향인 하느님께로 이끌지 못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우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북극성이 있을 뿐이다. 영적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현대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올바로 이끄는 것은 오직 성서 속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영신수련은 감수성과 체험을 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끝으로 영신수련에 수반되는 문제점 또는 극복되어야 할 과제가 있다면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 이를 지적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영신수련의 첫 번째 약점은 대중화가 쉽지 않아 본의 아니게 영적 엘리트주의를 추구한다는 누명을 쓰게 되는 점이다.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들로서는 한 달은 고사하고 단 며칠이라도 피정에 참석하는 일이 쉽지 않다. 그래서 이냐시오는 영신수련 일러두기에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일상생활을 하면서 하루에 한 시간씩 기도 시간을 내서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영신수련의 두 번째 약점은 영신수련의 언어와 신학이 16세기의 것이라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나라’와 ‘두 개의 깃발’ 개념은 다분히 중세적인 배경을 연상시킨다. 또 제1주간의 죄의 묵상과 관련하여서는 그동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도 꾸준히 발전되어온 신학의 업적을 활용하는 것이 좋겠지만, 모두가 공감할 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같은 틀을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현대 예수회원들이 풀어가야 할 과제라고 하겠다.
<부록>
이냐시오식 관상기도의 순서와 요령
1. 기도의 먼 준비: “마음을 드높이!” 하는 자세로 일상생활을 지낸다. 분노, 증오심, 질투와 같은 격렬한 감정을 피하고 텔레비전을 멀리함으로써 시각을 절제하는 생활을 한다.
2. 기도의 가까운 준비: 해당 복음서를 렉시오 디비나의 방법으로 천천히 세 번 정도 읽는다. 이를 통해서 성서의 내용과 장면을 숙지하게 된다. 이때 마음에 와 닿거나 깊이 묵상하고 싶은 요점들을 세 개 정도 선정한다.
3. 기도의 실행: 기도는 들어가는 부분과 본 부분, 마무리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1) 들어가는 부분(5분 정도)
· 기도하는 자리에 서서 잠시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앉는다.
· 기도하려는 내용을 떠올린다. 예) 마르코 복음 4장 35-41절을 기도한다면,
“배 안에서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풍랑이 일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고…….”
(이때 복음서를 읽으면서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으면 기억한다.)
· 기도에서 구하는 은총을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로 청한다.
2) 본 부분(50분 정도)
· 사건이 일어나는 장면과 등장인물을 머리에 그려본다.
명확하지 않아도 되고 장면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 성서 읽기를 통해서 익숙해진 줄거리에 따라 기도를 진행한다.
요점을 따라서 기도하면 헤매지 않아서 좋다.
· 기도를 하다가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있으면 더 나아가려는 부담을 갖지 말고 충분히 머문다.
3) 마무리(5분 정도)
· 기도를 마치면서 주님의 기도, 성모송 등 익숙한 기도를 바친다.
4. 기도의 성찰
· 기도에서 무엇을 체험했는지를 돌아보면서 떠오르는 것을 노트에 적어둔다. “어떻게 시작했는가? 어떤 확신이나 강렬한 느낌이 있었는가? 하느님의 사랑을 느꼈는가? 평화로움을 느꼈는가? 창조적인 느낌이었는가? 거룩한 느낌이었는가? 기도를 잘하게 만든 태도나 잘못하게 만든 태도가 있었는가?” 등을 돌아보는 것이다. 이로써 반복 기도 때에 집중할 요점을 찾아내고 다음 기도에서 개선할 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 Spiritual Exercises는 그대로 해석하면, 영적인 훈련, 영적 수련이란 뜻이다. 이 글에서는 이냐시오의 영적 수련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윤양석이 번역한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이후 계속해서 사용해 온 영신수련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다. 이 명칭은 서구어의 spirit이 가리키는 ‘영과 정신’을 포괄하여 만든 ‘영신’이란 말로써 수련의 주체를 드러내는 장점이 있다. 최근 번역어로 사용되는 ‘영성 수련’은 묵상, 기도 등 영적인 수련들을 통칭하는 용어로 쓰기로 하고 이냐시오의 한 달 피정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는 종전대로 ‘영신수련’이라고 부르기로 제안한다. - 필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