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15

(1) 박성용 - <누가복음 주제초점 ⑪> 포스트코로나 시대에서 복음적인 평화교회의 재구축 본문: 누가복음 8장...

(1) 박성용 - <누가복음 주제초점 ⑪> 포스트코로나 시대에서 복음적인 평화교회의 재구축 본문: 누가복음 8장...



박성용

56 mins ·

<누가복음 주제초점 ⑪> 포스트코로나 시대에서 복음적인 평화교회의 재구축

본문: 누가복음 8장



지금까지 계속해서 누가복음을 읽어오면서 누가복음이 혁명적이라 함은 환상과 실재에 대한 전복에 대한 인식의 교정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게 되었기 때문임을 알게되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현상들의 현실이라는 가이사 나라의 지배체제와 달리 누가기자는 처음부터 마지막된 자(the last), 미천한 자(the least), 그리고 잃은 자(the lost)들의 미약한 증언들을 통해 ‘우리에게 일어난 일’(눅1:1)의 새로운 현실인 자비로운 실재의 새로운 현실성-해방, 눈뜸, 자유, 평화, 기쁨-의 도래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자비로운 실재의 화육자이자 전형(典型)으로서 예수의 말과 행동에 대한 앞에서의 목격과 증언들이 이제는 ‘말씀이 목격자이자 일군된 자들’(1:2)의 스토리텔링 흐름이 목격자에서 일군된 자들인 제자들의 선택으로 전환되어가는 것을 6장에서부터 소개하고 있다. 예수에 관한 초기의 이야기에서 ‘예수의 일행’인 제자들의 ‘일군됨’의 준비와 훈련으로 초점은 바뀌어진다. 목격자의 진실성이 이제는 섬김(service)으로서, 하느님 나라의 담지자로서 그 역할에 대한 중요성의 전환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6장의 열두 사도의 선택 이야기는 매우 치열한 분별과 자각의 훈련을 요구하고 있었다. 즉, ‘복있을진저’와 ‘화있을진저’의 정반대의 삶의 길(way of life)이 우리에게 놓여짐(6:20-26),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행동 원리인 보복과 비판의 금지(27-42)와 더불어 말씀을 실행하라는 점에서 이는 추상적인 이슈가 아니라 향후 ‘홍수가 나서 큰 물이 집으로 들이치는’ 상황에서 ‘무너져 여지없이 파괴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지음’(46-49)의 실천성을 답보하기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는 진정성의 문제를 넘어서 위험에 대한 실효적인 복지(well-being)을 위한 살아있는 지혜와 능력에 대한 것이라는 권고도 두드러진다. 관심밖의 이방인인 백부장에 대해 그리고 우리 안의 추방된 자인 과부와 ‘죄많은 여인’이라는 사회적 살인의 이슈에 대해 주목하는 돌봄의 철저성을 확대하고 있다. 주목의 한계와 경계선을 내려놓는 인식의 확장에 대한 실천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2천년 전의 성서 이야기와 지금의 현실을 연결하는, 생생한 목격에 따른 증언자의 삶이자 활동가라는 ‘일군됨’의 문제라는 살아있는 이슈에 직면하고자 할 때 잠시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코로나19를 누가기자가 말하는 새로운 비유로서 ‘홍수가 나서 큰 물이 집으로 들이치는’ 상황에 대해 확인하고 8장을 다룰 필요가 있다. 코로나 19는 세상의 나라가 지닌 통치와 질서의 허구, 속빈 강정의 리더십과 권력의 오용으로 인한 비참함의 현실, 사회적 약자의 차별과 불행의 시스템적인 구조화, IT의 장밋빛 환상과 권력의 재편, 사회적 안전망과 복지인프라의 건강한 토대의 필요, 시민사회의 참여와 민주역량의 긴급성, 소통의 리더십의 출현의 요청, 자연의 통제에서 자연과의 상생적 공존 등등의 이슈에 있어서 과거의 수정적인 접근을 넘어서서 아예 패래다임 전환의 도약이 필요한 전례없는 위기를 가져오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중세의 흑사병이 사천만 명이 넘는 사망자와 더불어 르네상스를 가져온 문명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과거 역사와 유사하게,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문명 속으로의 진입을 코로나19가 가져온 것이 종교의 영역에도 중대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화상 예배로의 전환과 그 긍정적인 가능성, 형식적인 종교권위로부터의 자율적 개인 공간과 선택의 확보, 작은 신앙공동체의 중요성과 같은 신앙의 ‘겉옷’의 바꿈에 대한 것만 아니라 본질적인 물음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우리의 신앙의 본질적인 것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디에 토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그것이다. 양파껍질을 벗기듯이 신앙의 겉옷을 벗기면 무엇이 본질로 남는 것인가? 그리고 어떤 방향이 진정성의 토대 위에서 가능한 선택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이 다가오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코로나 질병의 상시적인 위협과 이에 대한 두려움의 일상화 –방송과 언론의 일상적 정보의 ‘홍수’와 이에 대비하는 안전을 위한 문화와 구조의 시스템화라는 ‘맨땅에 집짓기’(6:48-49)-는 실재가 두려움과 결핍에 기초하고 있다는 환상을 계속 의식적으로 심어주게 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는 신앙인에게 신앙의 본성에 대해 무엇이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가에 대한 나침판에 있어서 혼동과 착시의 안내를 주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누가복음 8장은 방향에 있어서 필자에게는 매우 지혜로운 안내를 제공하고 있고, 이것은 2천 년 전의 상황이나 지금의 삶의 맥락에도 적절한 나침판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이해에 도달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다.



1) 하느님 나라의 재건의 주체자들은 지배체제의 억압, 눈가림, 덫에 희생이 되었던 마지막 된 자, 미천한 자 그리고 잃은 자들의 파트너십 체제를 통해 이루어진다(8:1-3). 열 두 (남성)제자들의 민중성과 사회적정치적 지배체제로부터 얻은 ‘악령이나 질병으로 시달리다가 나은 여성들’의 파트너 리더십으로 ‘예수의 일행’이라는 돌봄과 섬김의 리더십을 꾸린다. 이들은 자신들의 구체적인 희생 경험으로부터 가장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지혜와 열정을 통해 ‘육화된 앎(embodied knowledge)’을 갖고 있는 이들이다. 삶의 가장자리(the edge)에 있던 자들과 ‘악령이라 질병’의 고통을 알고 있는 (여성) 경험자들은 변혁 담론의 주체가 되고, 그들은 가장자리에서 중심인 그리스도를 섬기고 돕는 서번트의 역할을 파트너됨이라는 방식으로 실현할 수 있다. 예수 운동의 뒤따름은 그러한 자들의 결합과 포함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복음 전하는”(8:1) 데 있어 핵심역량을 세운다.



2) 그 핵심역량이 알아야 할 첫 번째 인식은 이것이다. 즉, 씨뿌리는 자의 비유(4-15절)에서 신앙이란 철저하게 그리고 일관성을 갖고 인식하는 ‘자비로운 실재의 제약없는 베푸심’에 대한 자각의 수행을 말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두려움과 결핍의 실재가 아니라 자비로움과 풍성함의 베푸심의 실재가 우주와 세상의 터전임을 안다. 이것은 우리의 지각(perception)으로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하느님은 자비로운 실재로서 자신의 베푸심을 중단하지 않고, 씨앗이 떨어지는 토양에 대한 조건이 없으며, 변함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8절)에게 보이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10절; 씨앗처럼 보이지 않지만 곧 드러날 실재로서 신비)이다.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뺏어가는 길가의 조건이나, 믿음이 오래가지 못하는 돌맹이, 혹은 세상 걱정과 재물과 현세의 쾌락의 가시덤불의 상황이 어떠하든 그 자비의 베푸심이라는 씨앗뿌림은 조건없이 주어진다. 그것이 보이는 현실보다 더 참된 실재이다. 실재가 자비롭다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며, 변화하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 운동은 그러한 실재에 대한 자각–보이는 현상에 대한 지각을 넘어 비전(vision)에 기초한 깨달음-에서 시작되고 확장된다. 이런 점에서 징벌하는 두려운 하나님 개념은 오류이며, 십자가의 처형과 대리적인 희생의 논리 또한 두려움과 결핍의 지각에서 해석한 오류이다. 하느님이 선하시다면 실재는 선하고 자비롭다는 뜻이며, 무한하시다 함은 그러한 선과 자비의 궁극성과 변함없음을 뜻하며, 원죄나 희생의 보상과 처벌에 대한 실행들은 두려움과 결핍에 따른 인식의 오류라는 것이다. 그것은 지배와의 공모에서 나중에 기독교 역사의 제국주의적 발상에 따라 –어거스틴 이후의 신학에서- 나온 교의적 해석이지 복음의 원의(原意)는 다르다.



3) 두 번째로 핵심역량으로서 제자가 알아들어야 하는 점은 실재가 자비롭고 풍성함과 동시에 우리의 본성은 원래가 거룩한 빛(등불)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16-18절). 우리의 내면은 괴물이 아니라 신성한 불꽃이 있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과 같다. 우리의 본성이 원래 그러한 신성한 빛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16절) 것과 같이 우리의 의식이 그러한 방해물을 덮어 두거나 그 등불을 사용하지 않는 습관으로 인한 것이다. 그래서 내면의 신성한 빛에 의해 안내를 받는 사람과 달리 그것을 갖고도 우리가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바로 그것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자각의 결과로 일어난다. 따라서 “(내면의 등불을)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18절)의 작동원리는 자연스러운 예측이다.



이 내면의 빛은 자비로운 실재를 비춘다. 그래서 두려움과 결핍의 세상됨이 아니라 자비로움과 풍성함의 현실을 보고, 세상이 종살이와 얽매임의 감옥이나 여인숙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할 집으로 볼 수 있게 하고, ‘그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그 빛을 볼 수 있는’(16절) 상호 조명이 일어나게 되어 빛의 안내를 받아 삶에서 실족하지 않는다. 자비로운 실재와 내면의 빛은 동심원처럼 서로 연결되어 삶에서 풍성함을 가져오는 ‘더 받는’ 삶에로,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원래 있는 것마저 ‘빼앗기는’ 결과의 삶을 초래하게 된다. 이 원래 주어진 내면의 빛은 성취나 재능의 특별성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원래 보편적으로 주어진 본성적인 것이며 여기서 나의 온전함과 창조성과 무제약적인 나눔의 본성이 있는 것이다. 이는 원래 있는 것의 사용 여부에 있는 것이지, 나중에 도달하여 성취될 차원이 아닌 것이다.



4) 세 번째는 인식에서 '소속'으로 나아감에 대한 것이다. 신앙공동체는 친밀함과 혈연적 소속이라는 몸의 위치성이 아니라 말씀의 새김과 실행이라는 영적 가족됨이라는 제자직을 요청한다(19-21). 이상적인 목표로서 영적 가족됨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21절)라는 점에서 의식적이고, 비개인적인 우정어린 실천 공동체를 말한다. 그것은 혈연, 학연, 지연의 혈과 육의 친소관계 중심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보편적 이상에 대한 헌신과 투신을 요청한다. 그렇다고 시민사회의 가치중심의 윤리적 선택의 범위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비로운 실재인 하느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이를 실행하는 근본적인 자각(awareness)과 일관성 있는 말씀의 자장력 ‘안’에 있는 수행의 커뮤니티를 말한다.



영적 가족됨은 나와 우리를 둘러싼 외부환경이 자비로운 실재의 베푸심이라는 자장력안에 내가 살아가고 있고, 내 안의 중심도 또한 내면의 빛이라는 등불에 의해 내 정체성이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에 의한 점화가 나를 이끌어 간다는 점에서 타율과 자율을 넘어선다. 화살이 시위에서 떠날 때, 화살인 나는 시위를 당기는 ‘자비로운 실재(곧 하느님)’의 선제성과 시위를 벗어난 화살로서의 나의 내면의 빛이 조화되어 과녁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이 바로 창조(creation)이다. 반대로, 과녁을 벗어남이 죄(하마르티아)이며 이는 분리됨을 의미한다. 구원은 이러한 분리됨, 곧 양극성을 해체하고 다시 자비로운 실재와 내면의 빛의 ‘거룩한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양극성이 해체되고 자비로운 실재와 내면의 빛이라는 거룩한 관계에 따라 “하느님 나라의 신비”(10절)에 들어가는 길(hodos)을 가는 자들이 연결되는 것이 바로 영적 가족됨이라는 것이다.



누가 기자는 이렇게 실재의 자비로움과 내면의 빛의 거룩한 관계를 형성하는 영적 가족으로서 신앙공동체를 통해 어떤 미션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그 잠재적인 가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표현을 하고 있다.



어느 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게 되었다.

예수께서 "호수 저편으로 건너 가자"

하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배를 젓기 시작하였다.(8:22)



신앙공동체라는 배의 공간에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 타고 있음이란, 자비로운 실재의 무제한적인 베푸심의 화육인 예수와 ‘말씀의 목격자이자 일군된 자’(1:2)인 증인들로서의 제자들이 함께하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함께 함의 목표는 ‘저편으로 건너가기’(let’s go over the other side; 디엘도멘[우리는 건너가자] 에이스[으로] 토 페란[그 건너편])의 실천에 있었다. 이편(this side)이라 생각되는 것이 그간 익숙한 가이사 나라의 통치 방식(분리와 힘의 지배)이라고 한다면 저편은 하느님 나라의 삶의 방식(연결과 힘의 분배라는 파트너십체제)일 수 있다. 아니면 에고의 두려움과 결핍의 일상생활에서 자비로운 실재에 따른 참자아의 내적인 차원으로의 건너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비로운 실재의 인식과 내면의 빛의 자각 그리고 그 둘의 거룩한 관계의 실천으로서 영적 가족됨이라는 신앙공동체의 회복은 샬롬의 실천에 있어서 토대와 자원이 된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라는 샬롬의 실천은 그러한 토대구축인 ‘배에 함께 탐’으로 그 시작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 시작은 ‘저편으로 건너가자’라는 움직여 나아감을 일으킨다. 그러한 저편으로 건너감(passing-over)은 어떤 결과를 보고자 하는 것인가? 누가는 이에 대해 두 가지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 하나는 바로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에 있는 게르게사 지방’(26절)에 사는 ‘군대(레기온);로마군인 부대의 명칭임)’라는 마귀들린 사람의 치유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사람은 발작을 일으키고,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단단히 묶였으나 번번이 부수어 버리며, 집없이 무덤들 사이에 살고 있었다. 추측건대 잦은 전쟁과 약탈 그리고 무자비한 진압의 군대들의 방화나 저항하는 거주민들에 대한 억압에 의한 결과로 얻은 트라우마를 지닌 추방자에 대한 온전함을 회복하는 이야기이다. 그는 온전함을 찾아서 ‘옷을 입고 멀쩡한 정신으로 예수 앞에 앉아 있는’(35절) 상태로 회복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아서, 집/마을로 돌아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온 동네에 알리게 된다(39절).



다른 하나는 살아난 야이로 딸의 스토리의 중간에 가미된 ‘열 두 해동안 하혈병을 앓고 있는 여자’의 치유 이야기이다(40-56절). 군대귀신 들린 자의 치유는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에서 일어난 이방인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야이로 딸의 소생과 하혈병 치유의 이야기는 다시 갈릴래아호수 이편으로 돌아와 유대인들 중에 일어난 이야기이다. 이편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의사나 자신들의 자원으로는 치유가 안 된 중병과 거의 죽어가는 처지에 대해, 공통으로 가망 없는 –12해나 고치지 못함 &, 거의 죽게 됨의- 상황에 있어서 변화의 이야기였다.



저편(the other side)으로 ‘건너감’은 거룩한 관계의 분별(실재의 자비로움과 나의 꺼지지 않는 내면의 빛의 자각) 후에 오는 능력(뒤나미스)이다. 그 능력은 아웃사이더로 처리된 타자(the Others)에 대한 돌봄과 온전함으로의 회복에서 비유가 내재한 ‘하느님 나라의 신비’(8:10)는 현실로 경험되어진다. 그 하나의 새로운 통치는 나/우리/신앙공동체의 저편에 있는 아웃사이더인 사회정치적 지배체제의 희생자에 대한 회복에 관한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새로운 통치는 나/우리/신앙공동체의 이편에 있는 내부자의 출혈에 대한 회복이다. 외부의 억압과 내부의 출혈이라는 비극적 현실에 있어서 ‘건너감(passing-over)’이라는 행동은 그러한 비극적 현실을 온전함의 회복으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8:22) 돌려놓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서 평화교회가 누가복음이 제시하고, 또한 전례 없는 코로나19의 새로운 상황에서 가야 할 목표가 명료해짐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인식-구축-실천의 메커니즘에 대한 것이다. 인식이란 포스트코로나시대의 위험/두려움의 일상적인 자기-보호와 타인에 대한 의심의 실천에 있어서 자비로운 실재와 내면의 빛에 대한 신뢰하기의 중심을 세우는 것이다. 구축이란 그러한 거룩한 관계의 인식을 새기고 실천할 영적인 가족됨의 세움을 말한다. 그리고 실천은 바로 외부의 억압과 내부의 출혈에 대한 온전함으로의 건너감(경계를 넘어섬)이라는 공동적인 수행을 말한다.



“사나운 바람이 내리 불어 배에 물이 들기 시작하여 사람들이 위태롭게 된”(8:23) 지금의 현실에 나의 신앙과 내가 속한 신앙공동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자비로운 실재에 대한 신뢰 속에서 내면의 빛을 켜서 건너감의 질문을 해야 할 때라고 보여진다. 주변에서 비참함의 희생자를 볼 때는 다가가서 묻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8:30) 당신의 정체는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통해 비인간화의 억압 시스템을 제대로 보게 만든다. 내부의 손상과 출혈에 의한 희생자에게는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8:45), 누가 우리에게 자기 필요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는 손길을 내밀고 있는지에 대한 민감성을 계속해서 확인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