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4

질병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주간경향연재글 : 네이버 블로그

질병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주간경향연재글 : 네이버 블로그

질병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21세기는 인류 사상 유래 없는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고령화입니다. 고령화는 사람이 만든 경제, 사회 및 정치제도에 예상치 못할 정도의 큰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한데 특히 질병의 양상이 전염병에서 만성 질환으로 급격하게 바뀌고 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우리는 몇가지 질병으로 죽기 쉬울텐데 치매, 심장병, 암 그리고 낙상에 의한 골절입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장수라는 것은 하늘의 선물 또는 조상의 선물이었습니다. 유전적으로 아주 건강한 사람들만이 질병의 공세를 이겨내고 장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과학의 발달로 이젠 유전적으로 평범한 사람도 약물과 의료의 힘으로 장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수의 대중화 시대가 열렸습니다. 공짜는 없습니다. 평범한 사람도 오래 살다 보니 과거에는 별로 볼 수 없었던 여러 가지 병이 많이 출현하는데 대표적인 병이 치매이고 흔히 성인병이라고 부르는 당뇨병, 고혈압, 고지혈증 등도 덩달아 늘고 있습니다.



질병은 형벌이 아닙니다.



아직도 고쳐지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대담 프로나 드라마를 보면 질병을 마치 형벌처럼 말합니다. 암을 ‘선고’ 받았다고 하고 당뇨병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선고’나 ‘판정’이라는 말은 잘못된 행위에 대해 벌을 주고 어떤 행위에 잘잘못을 가린다는 뜻입니다. 질병에는 쓰일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암을 진단받았다고 하지 않고 ‘선고’받았다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말이 계속 쓰이고 있는 것은 그 말을 쓰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질병은 뭔가를 잘못해서 받는 응보라는 잠재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학 이전의 시대에서는 어떤 병이 걸리면 대개 그 사람이 뭔가를 잘못했거나 가족 또는 공동체가 죄를 지어서라는 습관적인 공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굿도 하고 참회도 하고 희생제도 지내곤 했습니다. 질병의 원인을 윤리적인 데서 찾거나 초자연적인 존재의 진노의 결과로 보았던 과거의 잠재의식이 아직도 이렇게 우리가 쓰는 말 속에 남아있습니다.



병을 처음 진단 받은 환자를 보면 가끔 이렇게 본인의 질병이 자신의 윤리적 잘못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병을 부끄러워하고 좌절하거나 부모 탓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질병이 자랑할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부끄러워할 것도 아닙니다. 성질머리가 나쁘고 고약해서 치매에 걸리는 것도 아니고 나쁜 일을 해서 암에 걸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여러 가지 원인이 촛점이 맞아 질병에 걸릴 뿐입니다.



질병은 본인의 삶을 되돌아 보게 하는 큰 기회입니다.



당뇨병을 예를 들면, 당뇨병 진단을 받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합니다.

진단이 잘못되었을거야, 약을 먹기 싫은데 약 안먹고 고친다고 선전하는 데 가볼까, 빨리 죽는 거 아니야, 이제 맛있는 건 다 먹었구나, 약만 먹으면 어떻게 되겠지 등의 별별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걱정과 불안과 공포와 부정 등의 여러 감정이 뒤섞여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기 힘들어 합니다. 저는 당뇨병을 처음 진단 받은 분들에게 다음과 같은 객관식 문제를 냅니다. ‘보통 당뇨병에 걸리는 경우는 4가지가 있다. 식사가 건강하지 않은 경우, 운동 부족인 경우,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 생활을 한 경우 그리고 잠이 불규칙하거나 부족한 경우인데, 본인은 어디에 해당되는가?’ 본인이 잘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경우도 드물게 있지만 대부분은 이 네 가지 중에 몇 개가 걸립니다. 그 부분이 그 사람의 약점인데 역설적이게도 그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위기가 기회인 것입니다.



만성병을 진단 받으면 공포나 불안에 빠지지 마시고, 급한 마음에 쉽게 행동하지 마시고 일단 차분하게 본인의 삶을 되돌아 보세요. 그리고 개선할 부분을 찾으세요. 그렇게만 해도 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질병 치료에 왕도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성질이 급합니다. 그 급한 성격이 질병 치료에도 예외없이 나타납니다. 바로 결론을 내려 하고 바로 뿌리를 뽑으려고 합니다. 급한 마음은 항상 실수를 낳습니다.



첫번째 실수는 좀 심각한 유형입니다.



힘들고 지겨운 식생활조절과 약물요법말고 좀 쉽고 간단한 지름길을 찾으려는 마음이 발동합니다. 그래서 귀가 솔깃하고 그럴 듯한 치료법을 찾아 나섭니다. 약 없이 어떤 음식만 몇개월 먹으면 당뇨병이 완치된다거나, 체질이 개선되어 피가 깨끗해져서 오히려 몸이 좋아진다거나 하는 비과학적인 치료법을 시도해서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몸을 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그런 치료법이 정말이라면, 그 사람은 노벨상을 받아야 하고 한국에 있지 않고 미국이나 유럽에 가서 돈도 많이 벌고 있어야 합니다. 혹시 아주 신기하고 정말 그럴듯한 비주류적 치료법을 만나게 되면 이 두가지를 꼭 질문하세요. 왜 이 사람은 노벨상을 받지 못하는가? 그리고 왜 이 사람을 세계 굴지의 제약회사가 모셔가지 않았을까?



두번째 실수는, 방향은 다르지만 급한 마음에서 비롯된 점이라는 것은 같습니다.



당뇨병 진단을 받은 분 중 일부는 굉장히 열정적이고 너무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입니다. 너무 열심히 하면 쉽게 지칩니다. 첫 진단 때 당화혈색소가 12%였던 분이 있습니다. 식생활교육과 약물요법을 시작한 후에 무섭게 살을 빼고 식사도 엄청나게 줄이고 술도 아예 안 마시고 탄수화물 종류도 마구 줄이고 남는 시간에 오로지 운동만 했습니다. 3개월 만에 당화혈색소가 7% 미만으로 떨어지는 경이적인 성적을 냈습니다. 너무 열심히 하지말라고 만류했지만 혈당 떨어지는 즐거움과 당뇨병을 극복하겠다는 급한 마음으로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지쳐 떨

어졌습니다. 1년 안에 다시 당화혈색소가 10% 근방으로 올라갔습니다. 만약 당뇨병이 50세에 생겼다면 당뇨병이 생기는데 50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런 당뇨병이 불과 몇개월의 치료로 완치되겠습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시간이 필요하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꼭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열심히 하는 데 열심히 하지 마세요. 평생 할 수 있을 정도로만 적당히 하세요.



무병은 단명이요, 일병은 장수입니다.



당뇨병에 걸려 실망하는 분에게 꼭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무병장수는 아주 드뭅니다. 그러나 한가지 병에 걸리면 그 병을 치료하고 관리하기 위해 생활습관을 올바로 하고 섭생을 잘 하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병이 예방되고 자주 검사를 받느라 다른 질병이 조기에 발견되어 오히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병이 하나도 없다고 방심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식생활을 하는 사람 중 일부는 오히려 큰 병에 걸려 손쓸 틈 없이 나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뇨병이 걸렸지만 그 덕분에 생활습관이 교정되어 다른 병이 예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기가 좋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미 와 버린 질병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면 더 나빠집니다. 이 병이 나에게 온 의미를 깊이 숙고하면 오히려 약이 됩니다.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닙니다. 좋고 나쁜 것은 우리의 마음이지 실제로는 그렇게 딱 부러지게 구별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병들고 죽습니다.



우주는 생겨나서 성장하고 쇠퇴하고 사라집니다. 사람 역시 태어나고 아프고 죽습니다. 태어난 이상 병들고 죽는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태어남은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건강하다는 것은 질병이라는 것이 있어야 성립되는 관념입니다.



 질병은 격퇴되어야 할 외부로 부터 오는 적이 아닙니다. 질병은 건강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이루는 필연적인 부분입니다. 지금 건강한 사람도,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의사인 저도 자잘한 아픔이 있으며 조만간 어떤 종류의 질병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은 그 병이 문제가 아니라, 그 병을 문제 삼는 것이 문제일 때가 많습니다.

어떤 병에 걸리면, 너무 놀라거나 두려워 마시고 그 병의 의미와, 그 병을 가지고 어떻게 의미있고 조화롭게 살아 갈 것인지 깊이 숙고하고 성찰하세요. 그래야 그 병이 나에게 약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