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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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민 연구실 > 일본종교 연구 > 제8장 2. (4) 엔도슈사쿠의 깊은강에서 드러난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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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제8장 2. (4) 엔도슈사쿠의 <깊은 강>에서 드러…    관리자 09-05 831

19 제8장 2. (3) 후미에를 통해 본 일본그리스도교    관리자 09-05 841

18 제8장 2. 엔도 슈사쿠를 통해 본 일본 그리스도교    관리자 09-05 873

17 제8장 일본 그리스도교- 1. 일본그리스도교의 전래    관리자 09-05 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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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2. (4) 엔도슈사쿠의 깊은강에서 드러난 하느님

2014-09-05


<범신론과 범내재신론>


일본은 기본적으로 범신론적인 측면이 있다. 범신론은 범내재신론(凡內在神論)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범신론에서는 자연 자체를 신으로 여기는 데 반해 범내재신론은 존재하는 모든 삼라만상 내에 신이 존재한다고 본다. 신이 활동하신다는 활동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즉 범신론은 존재 자체를 신으로 여기지만 범내재신론은 하느님이 활동하신다고 본다

그리스도교 교회에서는 범신론적 사상은 이단으로 간주해왔다. 그럼 범내재신론은 어떻게 보는가?

현대신학자인 매튜 폭스원복(original blessing)을 강조한다. 종래 그리스도교에서는 원죄 사상을 강조해온데 반해 매튜 폭스는 원복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원죄있는 존재로 창조한 게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축복받은 존재로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메튜폭스의 신학 사상에 범내재신론적인 측면이 농후하다 하여 가톨릭 교회는 그를 파문시켜버렸다. 매튜 폭스는 원래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사제였는데 교회로부터 파문당한 후 성공회로 개종했다. 교회는 오류 없는 집단이 아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기 때문에 계속 오류를 저지르고 오류 속에서 성찰하고 변화해가면서 살아가고 있다. 범내재신론 역시 교회가 계속 성찰해야할 과제임에 틀림 없다.


<일본 그리스도교의 박해사>

<침묵> 소설은 교회박해를 배경으로 씌어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하면서 그리스도 금령이 내려진 것은 1587년이다. 그 후 1596년에 펠리페호 사건이 일어났다. 스페인 선박이 일본에 들어왔을때 그 배에 탄 스페인 선원이 스페인이 영토를 확장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당시는 포르투갈, 스페인이 세력을 펼치던 시기였다. 스페인은 동남아시아에 선교사를 보내서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후 일본을 침략하려 한다고 선원이 소문을 낸 것이다. 

이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귀에까지 들어갔다. 히데요시는 기독교를 가만히 두면 안 되겠다 생각하고 모든 선교사들에게 추방령이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남아있던 프란치스코회 신부님들 중 1597년 남아 있던 6명이 발각되고 말았다. 이 6명의 신부님들과 20명의 신자들이 이때 순교를 당함으로써 26명의 순교성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히데요시가 죽고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막부를 열었다. 이에야스는 가톨릭 150개 교회를 모두 파괴시켜버렸다. 처음에 그가 정권을 잡았을 때는 관대함을 좀 보였으나 1614년에 다시 그리스도교 금교령을 내렸다. 그 후 1619년 교토에서 박해가 일어나 25명이 순교했고 1622년에는 나가사키에서 박해가 일어나 55명이 순교했다. 나가사키는 사실 선교사들이 처음 정착했던 곳이다. 일본 다른 지역에서는 그리스도교인을 찾아보기 힘든데 나가사키는 주민 대부분이 그리스도교 신자이다. 

1623년에는 에도에서 박해가 일어나 50명이 순교했고 1627년에 운젠에서 16명이 순교했다. 이것은 문헌으로 확인된 순교자의 숫자이다. 이 사람들을 포함해서 에도막부 시대 순교자는 총 4045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사실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수까지 합치면 4만 명 정도 될 것으로 본다. 실로 엄청난 박해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박해와 함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배교하기를 강요당했고 후미에 제도도 약 1650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침묵> 소설도 후미에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음은 앞서 말한바 있다. 순교하는 방법도 십자가형, 화형, 열탕을 붓는 고문, 거꾸로 매달려서 귀에 구멍을 뚫어 죽게 하는 방법 등 각양각색의 방법이 동원되었다. 당시 그리스도인 중에 순교한 사람들은 이런 고문을 당하면서 죽어간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에 가톨릭 신자 수는 약 200만 명이었다. 그러다가 선교사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게 된 것이 1644년, 그 후 서서히 가톨릭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853년에 안세이 조약으로 인해 서구와의 문호 개방이 이뤄졌는데 1644‐1853년 사이에 가톨릭 교회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약 2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지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면면히 맥을 이어갔고 한참 뒤에야 개신교 선교사들이 일본에 들어왔다. 개신교는 1859년 일본에 돌어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개신교는 순교의 역사없이 일본에 정착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