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7

최현민 > 일본종교 연구 > 제8장 2. 엔도 슈사쿠를 통해 본 일본 그리스도교

최현민 연구실 > 일본종교 연구 > 제8장 2. 엔도 슈사쿠를 통해 본 일본 그리스도교

25 제8장 4. 일본개신교의 시작 2 관리자 09-05 707

24 제8장 4. 일본 개신교의 시작 관리자 09-05 767

23 제8장 3. 2) 정통그리스도교 신학과 자유신학 3) 한국… 관리자 09-05 781

22 제8장 3. 일본그리스도교와 천황제 관리자 09-05 703

21 제8장 2. (4) 엔도슈사쿠의 깊은강에서 드러난 하느님 관리자 09-05 797

20 제8장 2. (4) 엔도슈사쿠의 <깊은 강>에서 드러… 관리자 09-05 831

19 제8장 2. (3) 후미에를 통해 본 일본그리스도교 관리자 09-05 841

18 제8장 2. 엔도 슈사쿠를 통해 본 일본 그리스도교 관리자 09-05 873

17 제8장 일본 그리스도교- 1. 일본그리스도교의 전래 관리자 09-05 698

===

제8장 2. 엔도 슈사쿠를 통해 본 일본 그리스도교

2014-09-05 

===

2. 엔도 슈사쿠를 통해 본 일본 그리스도교


엔도 슈사쿠라는 가톨릭 작가의 문제 의식을 통해 전통 그리스도교가 일본 문화 안에서 왜 뿌리를 내리기 어려운지 살펴보기로 하자. 

오늘날 한국에서는 그리스도교 신도가 총 종교인구의 약 25%에 해당되는 데 반해, 일본 그리스도교 신자수는 전체 인구의 1%에 해당된다. 
그것은 일본이라는 문화에, 일본인들의 마음자리에 그리스도교가 먹혀 들어가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와 일본문화는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운 뭔가가 있는가? ~~은 엔도 슈사쿠 작품 안에 잘 녹아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은 일본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엔도 슈사쿠는 일본의 풍토 안에서 그리스도 신자로서 자신이 겪는 갈등 문제를 자기 작품 안에 그대로 녹여서 표현했다. 그가 쓴 대부분의 소설에는 그러한 문제의식이 잘 나타나 있으므로 그의 소설을 통해 일본 그리스도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엔도 슈샤쿠(1923-1996)의 생애와 침묵의 배경

침묵이라는 작품을 살펴보기에 앞서 엔도 슈사쿠의 생애에 대해 먼저 언급할 필요가 있다. 
어렸을 때 그의 모친은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고 이혼을 당했다. 엔도 슈샤쿠는 자신도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를 배반했다는 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가톨릭신앙을 물려받았다.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어머니로부터 양복을 받은 셈이다. 이 양복은 일본인인 내 몸에 잘 맞지 않았다. 몸에 안 맞는 양복을 입었을 때 느껴지는 어색한 느낌이 바로 자신이 지닌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그는 고백한다.
그는 신앙을 버리는 것은 어머니를 버린다는 느낌을 가졌으므로 그리스도교를 버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뭔가 자기 몸에 맞는 그리스도교를 만들려는 문제의식 속에서 작품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침묵>이라는 소설은 그의 나이 44세 되는, 1966년 작품이다. 작품 배경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17세기 초,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세바스찬 로돌리코는 요셉 페켈러라는 예수회 선교사로 일본에 들어왔다가 결국 배교하고 일본 여자와 결혼해서 오카야마라는 이름으로 64세까지 살았던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또 한 인물인 페레이라 역시 예수회 선교사이다. 그는 로돌리코에 앞서 일본에 와서 선교활동을 한 로돌리코의 스승으로 로돌리코가 존경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일본 선교에 성공했던 페레이라가 배교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의 배교 소식을 듣고 로돌리코는 어떻게 자신이 존경하던 스승께서 배교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을 지니고 일본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침묵>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 좀 더 살펴본다면, 그것은 일본에 그리스도교가 토착화되려면 전통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변형되어 갈 것인가 라는 문제의식이다. 전통 그리스도교의 신관은 아버지로서의 신이었다. 이러한 신관이 엔도 슈사쿠에 와서 <침묵>이라는 소설 끝에서 나타나듯이 어머니로서의 신관으로서 변형이 일어난다. 전통 그리스도교의 신관이 아버지로서의 신관이었다면, 엔도 슈사쿠에 와서 일본 그리스도교의 신관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시도한 것이 어머니로서의 신관이다.

(2) 어머니로서의 하느님

<침묵>이라는 소설 이후에도 엔도 슈사쿠는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띤 하느님의 모습을 소설의 문제의식으로 삼았다. <깊은 강> 외 다른 소설들에서도 이를 확인해볼 수 있다. 즉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은 어떠한 하느님인지를 그리는 것이 엔도 슈사쿠의 소설 주제라 할 수 있다.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은 인간과 함께 하시는 동반자로서의 하느님이시다. 초월적인 하느님으로서 우리와 무관한 분이 아니라 자신을 밟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자리를 이해하는 하느님, 배교하는 사람의 심정과 함께 하는 하느님. 엔도는 그런 하느님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태인들을 총살할 때 다른 유태인들이 보는 앞에서 한다고 한다. 어느 날 한 유태인이 ‘하느님이 어디 있는가?’ 하고 독백하자 옆에 있던 사람이 ‘하느님은 죽어가는 저 사람들 옆에서 함께 죽어가고 있다’ 고 대답했다고 한다. 엔도 슈사쿠가 말하려던 어머니로서의 하느님 역시 인간의 고통과 무관한 하느님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하느님이었다. 그는 그런 하느님을 그리려고 노력한 것이다.

엔도 슈사쿠는 일본에서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마치 일본인이 몸에 안 맞는 서양 양복을 입은 것에 비교할 수 있다고 했다. 일본인의 감성에 전통 그리스도교 사상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맞출 수 있나? 어머니라는 이미지를 동원해서 맞춘다고 했지만 그래도 아직 잘 ~~가 남아있다. 

일본인의 감성이 무엇이길래 그런 차이가 생겨났을까? 
엔도가 본 일본인의 감성은 자연 속에 자신을 몰입시키고 죽음과도 화해하는 감성이다. 
절대신이나 죄에 대해 무감각적으로 반응하는 일본인의 감성에 그리스도교는 잘 맞지 않다.
엔도 슈사쿠는 일본인의 감성에 걸맞은 신을 생각했고 거기서 나온 것이 어머니로서의 이미지를 지닌 신이다. 
사실 어머니로서의 신관은 엔도 슈사쿠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위엄을 갖춘 아버지로서의 신관보다 어머니로서의 이미지에 대해 더 많이 말하고 있다. 
초월적인 신관아버지로서의 신관이라면 어머니로서의 신관포월적인 신관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포월적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기어가시는 하느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초월적인 신은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간격이 있다면, 포월적인 신은 그들의 역사 안에 함께 하신 분이시다.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역사 안에 하느님이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 그들의 체험을 써 놓은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 체험의 핵심은 출애급 사건이다. 그 사건을 중심으로 성서가 씌어졌다. 이 사건에 대한 체험이야말로 유대인들의 신앙의 핵심이다.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해서 시나이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가는데 자그마치 4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어떻게 갔길래 40년이나 걸렸을까. 기어갔다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이 그들의 삶에 함께 하셨음을 의미한다. 사실 구약성경에서는 출애굽 사건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이 체험한 바로 그 하느님이 창조주임을 고백하고 있다.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이 사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려는 신관에 가깝다고 보기 때문에 엔도 슈사쿠의 작품은 일본 그리스도교 안에서 새롭게 조명받아 왔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의 모습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들 수 있다. 돌아온 탕자에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이야말로 예수께서 알려주고자 한 하느님의 모습이다. 아들 둘에게 재산을 똑같이 나눠주었는데 큰 아들은 집에 남아 일을 했고 작은 아들은 가출해서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자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것을 보고는 맨발로 달려가 아들을 껴안았다.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께서 말씀하고자 한 것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다. 재산을 다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맨발로 나가 맞으며, 죽었던 내 아들이 돌아왔네 하며 껴안고 돌아와서 잔치를 벌리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의 신관신약성서에서의 신관은 차이가 있다. 구약성서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강하게 드러난다. 이에 반해 예수는 ‘돌아온 탕자’에서와 같은 이미지의 하느님을 얘기하면서 율법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신관을 뛰어넘는 신앙을 제시하려고 했다. 예수가 체험한 하느님은 ‘압바’였다. 예수는 하느님을 ‘압바’라고 불렀다. ‘압바’라는 표현은 한국말의 ‘아빠’와 뉘앙스가 유사하다.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른 것은 하느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신앙인이란 예수가 체험한 하느님을 자신의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이들이다. 
예수를 통해 새롭게 경험된 하느님을 자신의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만들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교회가 되었다. 
예수가 빠진 그리스도교는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을 만난다. 그래서 엔도 슈사쿠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포인트를 맞추고 그의 얼굴을 통해서 새롭게 하느님을 찾고자 했다. 

그리스도교는 희랍 철학과 만나 그리스도 신학을 형성해 나갔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 그리스도교 신학이 플라톤의 이데아와 만나면서 그리스도교의 본래 정신이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희랍 철학의 껍질을 벗겨내고 원시그리스도교로 돌아가자는 운동은 본래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