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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제8장 일본 그리스도교- 1. 일본그리스도교의 전래 관리자 09-05 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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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제8장 일본 그리스도교- 1. 일본그리스도교의 전래 관리자 09-05 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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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2. (4) 엔도슈사쿠의 <깊은 강>에서 드러난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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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엔도슈사쿠의 <깊은 강>에서 드러난 하느님
엔도 슈사쿠는 <침묵>을 통해서 예수의 하느님을 찾고자 했고 이는 그의 마지막 소설인 <깊은 강>에까지 이어졌다. <깊은 강>은 엔도 슈사쿠의 사상의 깊이가 가장 잘 녹아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오오쯔라는 가톨릭 사제의 길을 가고자 했던 신학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프랑스에 유학 가서 서구 기독교를 배우면서 거기서 오는 갈등들 때문에 결국 신학교에서 쫓겨나고 인도 갠지스 강에서 시체들을 옮기는 일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엔도 슈사쿠는 이 소설에서 서구 그리스도교가 지는 배타성, 신에 대한 이미지들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시도했다. <깊은 강>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에 모든 것들을 품을 수 있는 갠지스 강줄기를 따라 일체의 대립을 넘어서 모든 것을 수용하고 포용하려는 그의 신앙관이 잘 녹아있다. ‘동반자로서의 하느님’이라는 표현 안에 초월적인 하느님의 이미지를 극복한 어머니라는 이미지를 통해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을 포용되는 의식으로 확장시키고자 함이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어머니로서의 신, 동반자로서의 신은 엔도 슈사쿠의 작품 세계에서 계속 나타나는 주제인데,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또 한편의 소설이 그의 마지막 소설 <깊은 강>이다. 그의 작품 세계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깊은 강>에 대해 살펴보자.
<깊은 강>의 주인공은 오쓰라는 사람이다. 그는 주변으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못나고 볼품없는 사나이다. 엔도 슈사쿠는 오쓰를 통해 자기가 그리고 싶은 신을 표현하려 했다. 오쓰 역시 엔도 슈사쿠처럼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고 대학을 졸업한 다음 프랑스에 신학 공부를 하러 떠난다. 그러나 그는 신학교에서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사제가 되기 위해 교회에서 받는 사제서품을 받지 못하고 고려 대상이 되고 만다. 오쓰와 선배들의 대화에서 드러나듯이 그가 가진 신관에는 범신론적인 냄새를 많이 풍긴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렇게 사제 서품이 연기되자 오쓰는 이스라엘에 가서 근신생활을 하다가 인도의 갠지스강으로 가게 된다.
「깊은 강」에서 갠지스강은 하나의 심볼로 등장하고 있다. 「깊은 강」은 갠지스강을 의미하는데 엔도 슈사쿠는 ‘갠지스강’을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하려 한다.
갠지스강가에는 화장터가 있다. 인도에는 카스트 제도가 있어서 천민들이 죽으면 그 시신을 누군가 매어다가 이 화장터에 갖다주면 화장을 한 후 그 재를 갠지스 강에 뿌린다. 오쓰가 바로 그 일을 한 것이다. 오쓰는 갠지스 강 주변에 버려져 있는 시체를 나르는 일을 하면서 이렇게 기도한다. “당신은 등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에 오르셨습니다. 내가 지금 그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에 오른 예수마냥 오쓰는 남의 시체를 지고 화장터를 오르내리며 예수를 흉내내고 있다.
엔도 슈사쿠는 오쓰의 삶을 통해 예수의 여러 면모를 그리고자 했다.
하나는 동반자로서의 예수의 모습이다. 이러한 예수를 잘 보여주는 성경 대목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는 장면이다. 오쓰는 예수를 양파라는 별칭으로 부른다. 오쓰가 좋아했던 미쓰코라는 여학생은 예수라는 이름을 아주 싫어해서 오쓰가 미쓰코를 위해 예수를 양파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 다음부터 예수는 양파라는 이름으로 소설 속에 등장한다.
엔도는 오쓰의 입을 빌려 이렇게 표현한다. “하느님은 존재라기보다는 활동입니다. 양파는 사랑이 활동하는 덩어리입니다. 양파는 버림받은 나를 어느 순간에 다른 장소에서 살게 했습니다.” 오쓰의 이러한 고백 안에는 엔도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잘 농축되어 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존재’로 생각한다. 서구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을 존재로 말하지만 엔도는 하느님을 존재라기보다 활동 그 자체로 본다. 양파는 사랑이 활동하는 덩어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이 엔도가 생각하는 하느님이다. 사랑이 활동하는 덩어리. 엔도 슈사쿠는 자신이 일본인이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궁극적으로 자기 안에 정착된 하느님을 ‘사랑이 활동하는 덩어리’로 표현하고자 한다.
오쓰에게 범신론적 측면이 있다고 했는데 그가 신학교 선배들과 나눈 대화를 살펴보자.
‘하느님은 당신네들(서구인들)처럼 인간 밖에서 바라보는 게 아닙니다. 사람 안에 있어 사람을 감싸고 나무를 감싸고 풀과 꽃을 감싸는 커다란 생명입니다.’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신관에서는 하느님은 초월적으로 인간 바깥에 있다. 신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엔도 슈사쿠가 생각하는 신은 초월적이기보다는 인간 내면에 계시는 분으로 그 내재성이 강조된다.
엔도 슈사쿠는 하느님의 속성 중 초월성보다 내재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하느님은 인간 밖에 있어 우리가 우러러 볼 존재가 아니라 우리 마음 안에 있어 우리뿐 아니라 나무와 풀과 꽃을 감싼다. 자연을 하느님으로 보는 것은 범신론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문제가 된 것이다.
오쓰는 말한다. “나는 서구의 그리스도교에서 이질감을 느낀다. 서구가 자연의 생명을 경시하는 것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자연의 커다란 생명이 곧 신인데 자연의 거대한 생명을 경시하는 것을 나는 참을 수가 없다.”
사실 이것이 일본인들의 마음 깊이에 있는 것이다. 신도는 일본인들의 토착 신앙이기 이전에 실존에 깊이 녹아 있다.
일본에는 하이쿠라는 한 소절로 된 짧은 시가 있다. 하이쿠는 주로 자연을 보면서 자기 안에서 움터나는 모노노아하레를 시로 표현한다.
‘자세히 보니 담장 아래 피어난 냉이꽃이여.’라는 유명한 하이쿠가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감탄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보통 사람들은 담장 아래 작게 핀 냉이꽃에 주목하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그러다가 어느날 자세히 보니 담장 아래 쪼그맣게 꽃이 피어 있는 게 아닌가. 거기서 터져나온 시구이다.
담장 아래 피어난 냉이꽃을 보며 감탄할 수 있는 심성, 자연 안에 녹아있는 신의 생명. 그것에 대한 감각. 자연 안에서 생명을 느끼는 일본인의 마음자리에 서구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접목할 수 있을까?
엔도는 일본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접목할 것인지를 문제 삼았다. 그 안에서 갠지스강을 하나의 신의 얼굴로 본 것이다.
<깊은 강>에는 힌두교의 여신인 ‘차문다’라는 여신이 나온다.
나도 인도에 가면 차문다 여신의 사원을 꼭 가고 싶은데… ‘차문다는 무덤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발밑에는 새에게 쪼이거나 작은 늑대 같은 재규어에게 먹히고 있는 인간의 시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녀의 젖가슴은 노파처럼 이미 쭈끌쭈글합니다. 그러나 이 주글주글한 시든 젖가슴에서 젖을 짜내어 늘어선 아이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녀의 오른발이 문둥병으로 짓물러 있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복부는 굶어서 움푹 파여 있는데 그곳을 전갈이 물고 있는 것이 보이시죠? 그녀는 그러한 병고와 고통을 참으면서도 쭈글쭈글 시든 유방에서 젖을 짜내어 인간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인도 사람의 모든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인도 사람들이 겪었어야 했던 병고와 죽음과 굶주림이 이 상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여신은 인간이 오랫동안 고통받아 왔던 갖가지 병에 다 걸려 있습니다. 굶주려 헐떡이면서도 시든 유방에서 젖을 짜내어 인간에게 주고 있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갠지스강을 이 여신에게 비유하고 있다. 어머니로서의 신을 여신인 갠지스강으로 표현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엔도 슈사쿠의 성모님에 대한 이미지이다. 보통 성모님은 아리따운 처녀의 모습으로 그려지곤 한다.
그러나 엔도 슈사쿠가 그린 성모의 모습은 차문다와 같이 모든 것을 다 주는 여신의 모습이다. 엔도 슈사쿠는 어머니로서의 신을 갠지스강이라는 심볼을 통해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갠지스강은 산 자도 죽은 자도 받아들이는 어머니로서의 강이다. 갠지스 강에는 부풀은 개의 사체가 둥둥 떠다니고, 인간의 시체를 태운 재도 거기에 뿌려져 지저분하다. 그럼에도 힌두교도들은 그 강에 들어가 목욕하고 그 물로 입을 가신다.…보통 사람들이 볼 때는 불결하다는 생각을 할 지 몰라도 힌두교도에게 갠지스 강은 성스러운 강이며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된다. 갠지스강은 그 존재가 어떤 존재든지 개든 인간이든 모든 존재를 품어주는 어머니와 같은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쓰는 자신이 좋아했던 미쓰코라는 여인을 만난다. 사실 그녀는 오쓰가 신학교에 갔을 때 결혼을 했다. 어떤 한 인도인이 갠지스 강가에 와 있는 미쓰코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들어오시오. 이 강에 들어오면 아주 기분이 좋소” 그러자 미쓰코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강 속에 살짝 한 발을 넣어보고 다른 발도 담근다. 그러면서 독백한다. ‘죽음도 이와 같겠지’ 발을 담그기 직전에는 주저했으나 몸 전체를 담그고 나니 불쾌감이 사라졌다. 아주 상징적인 표현이다. 처음에 갠지스강을 바깥에서 볼 때는 여러가지가 떠다니는 불결하고 더러운 물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실제로 그건 바깥에서 봤을 때의 느낌이고, 갠지스강에 발 하나를 넣고 몸을 넣으면서 느낌이 달라짐을 경험한 것이다.
이 대목은 어떤 면에서 엔도의 신앙 역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 발은 일본 땅에, 한 발은 그리스도교에 담겨있는 모습이랄까. 양쪽에 발을 넣으면서 엔도 자신이 느낀 여러 갈등을 그는 소설로 표현하고자 했다. 사실 그의 실존은 갠지스강에 완전히 몸을 집어넣으면서 바꿨다. 그는 다른 발까지 갠지스 강에 넣고 몸 전체를 담그고 나니 불쾌감이 사라졌다고 표현하는데에서 우린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바깥에 있을 때 보던 갠지스강과 몸 전체가 그 안에 들어갔을 때의 갠지스강은 똑같은 갠지스강이 아니다. 강에 몸을 넣었을 때 갠지스강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자신의 체험을 통해 드러나는 갠지스강. 그것이 무슨 세계든지 간에, 어떤 세계를 경험하든 간에 그걸 상징적으로 갠지스강에 비유할 수 있겠다. 하나의 종교에 몸을 담고 있을 때와 그 세계 바깥에서 볼 때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엔도 슈사쿠는 그것을 ‘미쓰코’나 ‘오쓰’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결론적으로 엔도 슈사쿠는 갠지스강을 통해 아시아의 그리스도교가 갠지스강에서 새롭게 어머니로서, 마치 차문다여신과 같이 모든 것을 품어주는 생명의 종교로 거듭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는 그러한 그리스도교 신앙이 일본 땅에 새롭게 정착하기를 희망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의 화두인 사랑을 삶을 통해 풀어내야 한다.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사랑을 어떻게 드러나고 표현해야 하는지, 어떻게 꽃피워야 하는지는 각자에게 맡겨진 과제이다.
엔도 슈사쿠는 이것을 자기 소설 세계를 통해 풀어내고자 했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 일본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융합시켜 일본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명을 불러 일으켰고 그것을 통해 서구 그리스도교가 동양이라는 문화 속에 어떻게 정착을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묻고 있다.
엔도가 말하고자 한 것은 어떻게 서구의 영육이원론적 사유 세계를 극복할 것인가였다.
이원론적 사유 세계를 넘어서는 것이 일원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원론도 하나의 고착화된 개념이다.
엔도가 말하려 했던 것은 고착화되지 않은 ‘활동’이며 그러기에 끊임없는 역동성을 지닌 것이다. 오늘날 과정신학이나 현대신학 안에서 엔도의 이러한 표현들은 하나의 과제로 남아있다.
하느님은 한번 창조하신 후 창조가 끝난 게 아니라 창조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며 우리도 여전히 그 창조과정 안에 있다. 이것은 완전히 사유를 바꿔놓는 것이다. 하느님이 전지전능하셔서 모든 것을 예정해놓고 우리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창조해나간다는 과정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하느님의 존재보다 그분의 활동이 훨씬 강조될 수밖에 없다.
엔도가 제시하는 문제들은 나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나는 개인적으로 엔도의 작품을 읽으면서 나의 신앙, 내가 걸어왔던 신앙의 세계를 되돌아 본다. 나도 태어날 때 이미 유아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 신앙을 물려받아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이 엔도와 내가 유사한 점이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 내 신앙을 찾아나서야 했다. 뭔가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어 버리고 싶었지만 버려지지는 않고 계속 뭔가에 붙잡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동양사상을 공부한 것도 그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였다.
엔도의 작품을 보면서 나는 나 자신의 문제 의식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 안에서 갈등을 느끼고 찾아가는 과정들이 참 비슷했다. 나는 지금도 찾아가는 과정 속에 있다. 동양이라는 문화 속에서 서구 문화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 그냥 자기 옷인양 여겨지는 사람도 있지만, 나같은 사람은 그것이 참 어려웠다. 그래서 갈등을 느끼고 내 몸에 맞는 옷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해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