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권 누비던 신학생 선교사, 목사 대신 경찰 되다
[다른 길로 간 신학생들①] 아랍어 익혀 난민 돕는 김민혁 씨 "선교·섬김에 필요한 건 목사 타이틀 아니라 전문 능력"
기자명 최승현 기자
승인 2022.03.31
교계 신문이나 방송을 보다 보면, 늦은 나이에 목회자가 된 이들의 간증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다른 직업을 갖고 활동하다 뒤늦게 '목회자가 돼라'는 음성을 듣거나 소명 의식이 생긴 이들이다. 생업을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에 뛰어드는 이들을 보면, 때로 존경심이 생기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범죄 이력이 있으나 과오를 다 뉘우쳤다며 목회자가 되는 이들도 있어, 진정한 회개와 용서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이유에서든 저런 이유에서든, 한국교회는 '목회자가 되는 이들'에게 관심이 많고 그들의 이야기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반대로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준비하다 그 길에서 벗어난 이들의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별로 없다.
<뉴스앤조이>는 신학대학교 혹은 신학대학원 과정을 밟고도 목회자의 길 대신 다른 길을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었다. 이 릴레이 인터뷰의 이름은 당초 '목회 포기자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뉴스앤조이>가 만난 이들은 신앙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각자 삶의 방식에서 신앙적 가치를 실현하려 애쓰고 있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포기'라는 단어 대신 '다른 길'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다른 길로 간 신학생 릴레이 인터뷰 첫 번째 주자는, 신학교 졸업 후 경찰공무원으로 진로를 바꾼 김민혁 씨(가명)다. 직업 특성상 이름과 얼굴은 노출하지 않기로 했다. - 기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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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전직 신학생이자 현직 경찰공무원 김민혁 씨는 <뉴스앤조이> 기자들이 취재 현장에서 종종 마주친 인물이다. 그는 오래전부터 난민 문제에 관심을 두고, 열악한 환경에 노출된 국내 이주민들을 도왔다. 그는 "더 많은 사람을 더 잘 돕고 싶어 전문성을 키워 왔다"고 말했다.
민혁 씨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아랍어를 전문 통역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 실력을 갖췄고, 한국과 중동 지역에서 통역사로 활발히 활동했다. 또 국내에 정착한 아랍인들을 돕는 시민단체 활동, 봉사, 스터디 등을 몇 년째 꾸준히 해 오고 있다. 하는 일 하나하나가 '선교사'가 할 법한 일인데, 왜 진로를 '경찰'로 바꿨는지 이야기를 들어 봤다. 김민혁 씨와의 인터뷰는 3월 초 서울의 한 카페에서 2시간가량 진행한 후, 전화상으로 추가 인터뷰를 했다. 아래는 민혁 씨와의 일문일답.
- 먼저 신학대에 진학한 계기부터 물어봐야 할 것 같다.
나는 모태신앙이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그렇다고 원래부터 목회자가 되려고 신학대 진학을 희망한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선생님들이 방학 때 쉬는 게 좋아 보여서였다. 지리 과목을 좋아해서 지리 교사가 되기 위해 사범대학 진학을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집안 사정으로 교회에서 살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내가 교회 유아실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줬다. 내가 다니던 교회는 미자립 교회였는데, 우리 목사님은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고, 재정 수입을 모두 선교에 썼다.
내가 보기에 목사님은 '성인군자', '예수님' 같은 분이었다. 목사님이 내게 신학대에 진학하면 좋겠다고 했을 때, 거절하지 않았다. 신학에는 별다른 뜻이 없었지만 '이렇게 좋은 분이 가라고 하면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 진로를 '신학대학'으로 변경했고, 신학대에 오게 됐다.
- 선교 단체에서도 활동도 하고, 아랍 국가에 선교도 나갔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그것도 목사님의 권유 때문이었다. ㅇ 선교 단체 학생 선교사로 해외를 나가 보라고 하셨다. 자비를 들여 선교를 보내 주겠다고까지 하셨고, 이번에도 목사님 말씀에 순종했다. 그래서 튀니지에 갔다. 대학교 1학년 방학 때 3주간 단기 선교를 다녀왔고, 2학년 때 1년을 휴학하고 학생 선교사로 다시 1년을 머무르고 왔다.
튀니지는 나와 잘 맞았다. 신앙적으로 많이 생각하는 계기였고 1년을 금세 보냈다. 성격상 진취적이고 열심히 하는 걸 좋아하다 보니 언어를 남들보다 빨리 익혔다. 선교 단체도 그런 모습을 좋게 보고 나를 좋은 자원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김민혁 씨(맨 왼쪽·가명)는 20대 초반 튀지니로 선교를 떠나 아랍어를 익혔다. 사진 제공 김민혁
- 아랍어 통역까지 가능할 정도로 언어를 익힌 이유는 뭔가.
언어를 습득하려면 어디서든 현지 사람들과 최대한 많이 접촉하고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 나는 튀니지 생활에 만족했기 때문에 언어가 빠르게 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가 매주 만나는 가정 중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해 6남매를 혼자 키우는 여성이 있었는데, 그분이 우리에게 울면서 얘기를 하는 거다. 뭔가를 요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신세 한탄을 하는 것 같기도 한데, 하나도 이해를 못 하겠더라. 알고 보니 사망한 남편에 대한 보상 문제로 재판이 열리고 있는데, 아직도 판결이 안 나와서 수년간 보상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고 하더라.
그때 충격을 받았다. 나름대로 언어를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못 알아들었으니까. 그때까지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게 성령님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못하니까 진짜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도질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더니 그들의 이야기가 차츰 들리기 시작하더라. 지금도 초심을 잃을 때마다 그때 일을 기억한다.
-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아랍인들을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했나.
신학생 시절, 교회 물품을 사러 대형 마트에 간 적이 있다. 아랍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몰려다니면서 뭔가를 사고 있더라. 그들에게 다가갔더니 "우리는 시리아에서 왔다", "한국에 온 지 꽤 됐다"고 얘기해 주더라. 그래서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그들이 사는 곳에 한번 놀러 갔다.
그들이 알려 준 주소는 경기 파주시에 있는 한 폐차장이었다. 폐차장 안에 기숙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컨테이너 같은 가건물이 있었는데, 그 컨테이너 안에 네댓 명이 몰려 살고 있었다. 처음에는 좀 무서웠지만 사람들이 착하고 좋았다. 별거 없는 형편인데도 뭔가 해 주려고 하고. 그러면서 그들과 친해졌다.
- 전도를 목적으로 만난 건가.
아니다. 내 역할은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복음을 전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경험상 교회에서 사역하거나 신학교를 다닌다고 해서 내 삶이 다 변하고 행복해지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이들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와 차원이 달랐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문제라면, 연애나 취업 같은 거다. 물론 이것도 중요하고 큰 문제지만, 이 친구들은 갑자기 형이 연락이 안 된다고 하면 단순히 'PC방 갔겠지' 수준이 아니라 아예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 거다. 내가 이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시리아 내전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죽은 형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니까…
그들에게 어떻게 감히 '너희들이 믿는 신앙과 문화는 다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겠나. 그저 이 친구들을 위로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컸다. 물론 말을 몇 번 꺼내 본 적은 있고 복음과 성경을 주제로 함께 글을 읽고 토론도 해 봤지만, 그런 얘기를 할 때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 뿐이었다. 그래 봤자 이들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으니까.
김민혁 씨(맨 오른쪽)는 전도보다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중동 곳곳에서 한국으로 온 이들을 만나며, 그들을 돕고 그들과 친구가 됐다. 사진 제공 김민혁
- 그렇지만 일부 선교 단체는 이들을 '미전도 종족'으로 보고 공격적으로 전도하라고 하는데.
내가 속했던 선교 단체에서도 '시리아 난민팀' 같은 식으로 사람들을 모집해서 여름 캠프 같은 걸 한다. 언젠가 한 번은 그 단체 청년·대학생 팀에게 내가 돕고 있는 이들을 연결해 줬다. 사전에 그들에게 "이분들 앞에서는 난민이나 인도적 체류자 같은 말 대신 그들의 이름을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사회에서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는 건 기본 에티켓이니까. 무슬림이든 난민이든 주님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이라는 걸 인정해 달라는 거였는데, 부탁한 지 30분도 안 돼 바로 '난민'이라고 부르더라.
그런 모습을 보자니 내가 흥분하게 되더라. 복음화가 어쩌고, 시리아 난민의 고난이 어쩌고 하지만, 사실 한두 번 만나면 끝이다. 에티켓도 없다. 아랍어를 배운다든지, 이슬람에 관해 공부한다든지, 본인이 가진 공격적 성향을 배제한다든지 하는 노력도 없었다.
이전부터 내가 '사영리'를 전하는 기계처럼 다뤄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 선교사라고 해 봐야 1~2년 다녀오는 건데, 20대 초반 학생들이 무슨 능력이 있다고 뭘 하겠나. 입대도 미뤄야 하고, 교회에서 사역도 해야 하는데, 단체 입장에서는 그저 청년들을 써먹고 싶어했던 것 같다. 이게 정말 복음의 본질이 맞는지 고민했다. 선교가 사역이 아닌 사업처럼 진행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런 모습에 지쳤고, 그 선교 단체와는 조금씩 멀어지게 됐다. 소리 소문 없이 국내 난민을 돕는 분들의 네트워크를 찾아 그들과 함께하기 시작했다.
- 졸업 이후에도 신대원에 졸업하지 않고 아랍어 통역 등 중동·난민과 관계된 일을 했다. 이유가 있나.
튀니지에 다녀온 이후, 운이 좋아 국방부 아랍어 통역병으로 입대하게 됐다. 아랍에미리트로 파병도 다녀왔다. 그런 경험을 토대로 신학교 졸업 이후에도 난민 인권 단체들과 조력하면서 통역, 법률적 조력, 인터뷰 지원 등 다양한 일을 했다.
법원에서 계약직으로도 아랍어 통역 일도 했다. 일해 보니 이 일로도 계속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항상 중립을 지켜야 하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어도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하루는 어디서 많이 본 이름의 외국인이 법원을 찾아왔다. 알고 보니 내가 평소 함께하는 단체에서 돕던 난민이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내심 반가웠는데, 그렇다고 '평소에 내가 이렇게 돕고 조력했다'고 아는 척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건조하게 '서류는 뭐 내고, 어디 어디로 가라'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내가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없고 전문 능력도 없다 보니 '내가 무슨 선교사냐, 내가 무슨 신학생이냐' 하는 자괴감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능력을 갖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전문 능력 없이는, 선교도 없고 섬김도 없다고 생각했다.
- 수많은 목회자가 어려운 이들을 돕지 않나. 목회하면서도 충분히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애초에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신학교에 가 보니, 전부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분위기이더라. '목사'라는 직책이 없으면 인정받기 어렵다면서 '일단 타이틀은 따라'는 분위기가 있었으니까. 심지어 주말에는 다들 교회에서 사역을 하니, 나도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목사를 해야 하나 생각했다. 그래서 안수를 고민한 적은 있다.
그런데 졸업할 때쯤 되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목사 타이틀로 누구에게 인정받아서 선교를 한다는 게 '세상적'이라고 느껴졌다. 졸업을 앞두고 자비량 선교사, 교단 선교사, 단체 선교사 등 다양한 분들을 만나면서 이야기를 듣고 이런 생각을 더 굳혔다. 그래서 신대원에 진학하지 않기로 했다.
- 신학교에 보낸 목사님이 서운하셨을 것 같은데.
오히려 어렸을 때부터 너무 좋은 목사님과 함께해 왔기 때문에 목사가 되지 않으려는 거다. 목사님은 어려운 이웃을 도우면서도 자비량으로 힘들게 목회해 오셨다. 그 모습을 봐 온 입장에서, 주의종으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절감하게 됐다. 그래서 목회를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 같다.
예전에 신학생이 비둘기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고 성경에서는 성령을 상징하지만, 시내 한복판에서는 모두가 혐오하는 '닭둘기'로 전락하지 않나. 게을러서 남들이 뿌려 주는 음식만 먹고… '멀리서는 평화와 성령의 상징인데, 가까이서 보면 왜 이럴까' 생각하면서 목회자의 소명이나 삶에 관해서도 깊이 고민했다.
나는 교단 또는 제도 안에서 성공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저명한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다. 어영부영 생계를 위해 목회를 하면 나중에 뭐가 남을까, 자녀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는 또 뭐가 있을까 생각했다. 폐지 주워서 십일조 내는 할머니들의 헌금으로 본인만 배부를 요량이라면 사역을 안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뜻을 주시면 나중에라도 목회자가 될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되돌아갈 마음이 없다. 내가 생각하는 선교, 사회적 봉사를 굳이 '목사'라는 타이틀을 갖고 해야 하는지 의문이 있다.
민혁 씨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아랍어를 전문 통역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 실력을 갖췄고, 한국과 중동 지역에서 통역사로 활발히 활동했다. 또 국내에 정착한 아랍인들을 돕는 시민단체 활동, 봉사, 스터디 등을 몇 년째 꾸준히 해 오고 있다. 하는 일 하나하나가 '선교사'가 할 법한 일인데, 왜 진로를 '경찰'로 바꿨는지 이야기를 들어 봤다. 김민혁 씨와의 인터뷰는 3월 초 서울의 한 카페에서 2시간가량 진행한 후, 전화상으로 추가 인터뷰를 했다. 아래는 민혁 씨와의 일문일답.
- 먼저 신학대에 진학한 계기부터 물어봐야 할 것 같다.
나는 모태신앙이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그렇다고 원래부터 목회자가 되려고 신학대 진학을 희망한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선생님들이 방학 때 쉬는 게 좋아 보여서였다. 지리 과목을 좋아해서 지리 교사가 되기 위해 사범대학 진학을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집안 사정으로 교회에서 살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내가 교회 유아실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줬다. 내가 다니던 교회는 미자립 교회였는데, 우리 목사님은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고, 재정 수입을 모두 선교에 썼다.
내가 보기에 목사님은 '성인군자', '예수님' 같은 분이었다. 목사님이 내게 신학대에 진학하면 좋겠다고 했을 때, 거절하지 않았다. 신학에는 별다른 뜻이 없었지만 '이렇게 좋은 분이 가라고 하면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 진로를 '신학대학'으로 변경했고, 신학대에 오게 됐다.
- 선교 단체에서도 활동도 하고, 아랍 국가에 선교도 나갔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그것도 목사님의 권유 때문이었다. ㅇ 선교 단체 학생 선교사로 해외를 나가 보라고 하셨다. 자비를 들여 선교를 보내 주겠다고까지 하셨고, 이번에도 목사님 말씀에 순종했다. 그래서 튀니지에 갔다. 대학교 1학년 방학 때 3주간 단기 선교를 다녀왔고, 2학년 때 1년을 휴학하고 학생 선교사로 다시 1년을 머무르고 왔다.
튀니지는 나와 잘 맞았다. 신앙적으로 많이 생각하는 계기였고 1년을 금세 보냈다. 성격상 진취적이고 열심히 하는 걸 좋아하다 보니 언어를 남들보다 빨리 익혔다. 선교 단체도 그런 모습을 좋게 보고 나를 좋은 자원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김민혁 씨(맨 왼쪽·가명)는 20대 초반 튀지니로 선교를 떠나 아랍어를 익혔다. 사진 제공 김민혁
- 아랍어 통역까지 가능할 정도로 언어를 익힌 이유는 뭔가.
언어를 습득하려면 어디서든 현지 사람들과 최대한 많이 접촉하고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 나는 튀니지 생활에 만족했기 때문에 언어가 빠르게 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가 매주 만나는 가정 중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해 6남매를 혼자 키우는 여성이 있었는데, 그분이 우리에게 울면서 얘기를 하는 거다. 뭔가를 요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신세 한탄을 하는 것 같기도 한데, 하나도 이해를 못 하겠더라. 알고 보니 사망한 남편에 대한 보상 문제로 재판이 열리고 있는데, 아직도 판결이 안 나와서 수년간 보상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고 하더라.
그때 충격을 받았다. 나름대로 언어를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못 알아들었으니까. 그때까지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게 성령님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못하니까 진짜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도질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더니 그들의 이야기가 차츰 들리기 시작하더라. 지금도 초심을 잃을 때마다 그때 일을 기억한다.
-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아랍인들을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했나.
신학생 시절, 교회 물품을 사러 대형 마트에 간 적이 있다. 아랍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몰려다니면서 뭔가를 사고 있더라. 그들에게 다가갔더니 "우리는 시리아에서 왔다", "한국에 온 지 꽤 됐다"고 얘기해 주더라. 그래서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그들이 사는 곳에 한번 놀러 갔다.
그들이 알려 준 주소는 경기 파주시에 있는 한 폐차장이었다. 폐차장 안에 기숙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컨테이너 같은 가건물이 있었는데, 그 컨테이너 안에 네댓 명이 몰려 살고 있었다. 처음에는 좀 무서웠지만 사람들이 착하고 좋았다. 별거 없는 형편인데도 뭔가 해 주려고 하고. 그러면서 그들과 친해졌다.
- 전도를 목적으로 만난 건가.
아니다. 내 역할은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복음을 전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경험상 교회에서 사역하거나 신학교를 다닌다고 해서 내 삶이 다 변하고 행복해지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이들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와 차원이 달랐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문제라면, 연애나 취업 같은 거다. 물론 이것도 중요하고 큰 문제지만, 이 친구들은 갑자기 형이 연락이 안 된다고 하면 단순히 'PC방 갔겠지' 수준이 아니라 아예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 거다. 내가 이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시리아 내전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죽은 형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니까…
그들에게 어떻게 감히 '너희들이 믿는 신앙과 문화는 다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겠나. 그저 이 친구들을 위로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컸다. 물론 말을 몇 번 꺼내 본 적은 있고 복음과 성경을 주제로 함께 글을 읽고 토론도 해 봤지만, 그런 얘기를 할 때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 뿐이었다. 그래 봤자 이들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으니까.
김민혁 씨(맨 오른쪽)는 전도보다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중동 곳곳에서 한국으로 온 이들을 만나며, 그들을 돕고 그들과 친구가 됐다. 사진 제공 김민혁
- 그렇지만 일부 선교 단체는 이들을 '미전도 종족'으로 보고 공격적으로 전도하라고 하는데.
내가 속했던 선교 단체에서도 '시리아 난민팀' 같은 식으로 사람들을 모집해서 여름 캠프 같은 걸 한다. 언젠가 한 번은 그 단체 청년·대학생 팀에게 내가 돕고 있는 이들을 연결해 줬다. 사전에 그들에게 "이분들 앞에서는 난민이나 인도적 체류자 같은 말 대신 그들의 이름을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사회에서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는 건 기본 에티켓이니까. 무슬림이든 난민이든 주님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이라는 걸 인정해 달라는 거였는데, 부탁한 지 30분도 안 돼 바로 '난민'이라고 부르더라.
그런 모습을 보자니 내가 흥분하게 되더라. 복음화가 어쩌고, 시리아 난민의 고난이 어쩌고 하지만, 사실 한두 번 만나면 끝이다. 에티켓도 없다. 아랍어를 배운다든지, 이슬람에 관해 공부한다든지, 본인이 가진 공격적 성향을 배제한다든지 하는 노력도 없었다.
이전부터 내가 '사영리'를 전하는 기계처럼 다뤄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 선교사라고 해 봐야 1~2년 다녀오는 건데, 20대 초반 학생들이 무슨 능력이 있다고 뭘 하겠나. 입대도 미뤄야 하고, 교회에서 사역도 해야 하는데, 단체 입장에서는 그저 청년들을 써먹고 싶어했던 것 같다. 이게 정말 복음의 본질이 맞는지 고민했다. 선교가 사역이 아닌 사업처럼 진행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런 모습에 지쳤고, 그 선교 단체와는 조금씩 멀어지게 됐다. 소리 소문 없이 국내 난민을 돕는 분들의 네트워크를 찾아 그들과 함께하기 시작했다.
- 졸업 이후에도 신대원에 졸업하지 않고 아랍어 통역 등 중동·난민과 관계된 일을 했다. 이유가 있나.
튀니지에 다녀온 이후, 운이 좋아 국방부 아랍어 통역병으로 입대하게 됐다. 아랍에미리트로 파병도 다녀왔다. 그런 경험을 토대로 신학교 졸업 이후에도 난민 인권 단체들과 조력하면서 통역, 법률적 조력, 인터뷰 지원 등 다양한 일을 했다.
법원에서 계약직으로도 아랍어 통역 일도 했다. 일해 보니 이 일로도 계속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항상 중립을 지켜야 하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어도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하루는 어디서 많이 본 이름의 외국인이 법원을 찾아왔다. 알고 보니 내가 평소 함께하는 단체에서 돕던 난민이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내심 반가웠는데, 그렇다고 '평소에 내가 이렇게 돕고 조력했다'고 아는 척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건조하게 '서류는 뭐 내고, 어디 어디로 가라'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내가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없고 전문 능력도 없다 보니 '내가 무슨 선교사냐, 내가 무슨 신학생이냐' 하는 자괴감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능력을 갖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전문 능력 없이는, 선교도 없고 섬김도 없다고 생각했다.
- 수많은 목회자가 어려운 이들을 돕지 않나. 목회하면서도 충분히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애초에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신학교에 가 보니, 전부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분위기이더라. '목사'라는 직책이 없으면 인정받기 어렵다면서 '일단 타이틀은 따라'는 분위기가 있었으니까. 심지어 주말에는 다들 교회에서 사역을 하니, 나도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목사를 해야 하나 생각했다. 그래서 안수를 고민한 적은 있다.
그런데 졸업할 때쯤 되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목사 타이틀로 누구에게 인정받아서 선교를 한다는 게 '세상적'이라고 느껴졌다. 졸업을 앞두고 자비량 선교사, 교단 선교사, 단체 선교사 등 다양한 분들을 만나면서 이야기를 듣고 이런 생각을 더 굳혔다. 그래서 신대원에 진학하지 않기로 했다.
- 신학교에 보낸 목사님이 서운하셨을 것 같은데.
오히려 어렸을 때부터 너무 좋은 목사님과 함께해 왔기 때문에 목사가 되지 않으려는 거다. 목사님은 어려운 이웃을 도우면서도 자비량으로 힘들게 목회해 오셨다. 그 모습을 봐 온 입장에서, 주의종으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절감하게 됐다. 그래서 목회를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 같다.
예전에 신학생이 비둘기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고 성경에서는 성령을 상징하지만, 시내 한복판에서는 모두가 혐오하는 '닭둘기'로 전락하지 않나. 게을러서 남들이 뿌려 주는 음식만 먹고… '멀리서는 평화와 성령의 상징인데, 가까이서 보면 왜 이럴까' 생각하면서 목회자의 소명이나 삶에 관해서도 깊이 고민했다.
나는 교단 또는 제도 안에서 성공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저명한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다. 어영부영 생계를 위해 목회를 하면 나중에 뭐가 남을까, 자녀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는 또 뭐가 있을까 생각했다. 폐지 주워서 십일조 내는 할머니들의 헌금으로 본인만 배부를 요량이라면 사역을 안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뜻을 주시면 나중에라도 목회자가 될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되돌아갈 마음이 없다. 내가 생각하는 선교, 사회적 봉사를 굳이 '목사'라는 타이틀을 갖고 해야 하는지 의문이 있다.
타인을 돕기 위해 경찰에 지원했다는 그는, 경찰이 된 후 자원해 이태원 지구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월급이 들어왔을 때보다 타인을 도울 때 더 마음이 기뻤다고 했다. 사진 제공 김민혁
- 졸업 후 경찰이 됐다. 선교를 꿈꿨던 입장에서 경찰이라니 다소 의외다.
처음에는 졸업 후에 팔레스타인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선교 사역을 하려고 했다. 졸업 후 3개월간 배낭을 메고 요르단에 있는 시리아 난민 캠프를 갔는데, 현장을 가 보니 타이틀보다는 전문 능력이 더 필요해 보였다.
그런데 개인 사정 때문에 해외에 오래 머무를 수 없게 됐다. 결국 한국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회사에 다니기는 해야겠는데, 남을 도우면서 돈 벌 수 있는 직업이 뭔가를 찾았다. 고민 끝에 누군가를 지키거나 돕는 일을 해 보면 어떨까 싶었다. 가지고 있는 언어적 능력이 있으니 남들보다 수월하게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경찰공무원을 선택했다. 집념을 갖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다행히 운도 좋아서 굉장히 빨리 합격할 수 있었다.
- 경찰이 되어 이웃을 도운 경험이 있나.
처음 경찰공무원에 임용되면 기동대에서 2년을 근무해야 한다. 집회와 시위를 전담하는 부서라, 왠지 시위하러 나온 학교 선후배들을 만날 것 같더라.(웃음) 나는 직접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이태원 지구대에 보내 달라고 자원했다. 주위에서 "지구대가 제일 힘든데 뭐 하러 가냐"고 했지만, 애초에 돈이 아니라 경찰의 직무 때문에 일을 시작한 것이니 나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태원은 이슬람 사원이 있을 뿐 아니라 외국인이 제일 많은 지역이다. 그렇다 보니 단체를 통해 돕던 난민이 민원인으로 오기도 하는 등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을 돕고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는 활동을 하면서 가슴이 뛰었다. 내가 가진 능력으로 남을 도우며 살고 싶었는데, 실제로 월급이 들어오는 날보다 조력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제공할 때가 훨씬 더 행복하더라.
경찰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많다. 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 사건만 해도 경찰의 역할이 크다. 적극적으로 피해자에게 쉼터를 제공할 수도 있다. 결국 경찰관 마음가짐에 달린 거니까. 일선 사건에서 피해자 보호나 사건 처리는 99%가 경찰관 본인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복음적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면 도울 수 있는 일은 정말 많다.
어느 조직에 있든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복음적인 거라고 본다. 그것이야말로 선한 영향력이 전파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마음을 잘 지키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면 뭐라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나.
- 졸업 후 경찰이 됐다. 선교를 꿈꿨던 입장에서 경찰이라니 다소 의외다.
처음에는 졸업 후에 팔레스타인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선교 사역을 하려고 했다. 졸업 후 3개월간 배낭을 메고 요르단에 있는 시리아 난민 캠프를 갔는데, 현장을 가 보니 타이틀보다는 전문 능력이 더 필요해 보였다.
그런데 개인 사정 때문에 해외에 오래 머무를 수 없게 됐다. 결국 한국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회사에 다니기는 해야겠는데, 남을 도우면서 돈 벌 수 있는 직업이 뭔가를 찾았다. 고민 끝에 누군가를 지키거나 돕는 일을 해 보면 어떨까 싶었다. 가지고 있는 언어적 능력이 있으니 남들보다 수월하게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경찰공무원을 선택했다. 집념을 갖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다행히 운도 좋아서 굉장히 빨리 합격할 수 있었다.
- 경찰이 되어 이웃을 도운 경험이 있나.
처음 경찰공무원에 임용되면 기동대에서 2년을 근무해야 한다. 집회와 시위를 전담하는 부서라, 왠지 시위하러 나온 학교 선후배들을 만날 것 같더라.(웃음) 나는 직접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이태원 지구대에 보내 달라고 자원했다. 주위에서 "지구대가 제일 힘든데 뭐 하러 가냐"고 했지만, 애초에 돈이 아니라 경찰의 직무 때문에 일을 시작한 것이니 나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태원은 이슬람 사원이 있을 뿐 아니라 외국인이 제일 많은 지역이다. 그렇다 보니 단체를 통해 돕던 난민이 민원인으로 오기도 하는 등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을 돕고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는 활동을 하면서 가슴이 뛰었다. 내가 가진 능력으로 남을 도우며 살고 싶었는데, 실제로 월급이 들어오는 날보다 조력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제공할 때가 훨씬 더 행복하더라.
경찰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많다. 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 사건만 해도 경찰의 역할이 크다. 적극적으로 피해자에게 쉼터를 제공할 수도 있다. 결국 경찰관 마음가짐에 달린 거니까. 일선 사건에서 피해자 보호나 사건 처리는 99%가 경찰관 본인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복음적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면 도울 수 있는 일은 정말 많다.
어느 조직에 있든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복음적인 거라고 본다. 그것이야말로 선한 영향력이 전파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마음을 잘 지키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면 뭐라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나.
김민혁 씨는 앞으로 노무사 자격증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려면 전문 자격증이 필요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이런 행동을 모두 '선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김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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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선교를 하고 싶다. 선교는 단순히 성경을 들이미는 게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픔과 분쟁 속에 사는 이가 많다. 정말 외로운 친구들이다. 어린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한국에 와서, 하고 싶은 공부도 포기하고 컨테이너 같은 곳에 거주하며 일하는 친구들을 돕고 싶다.
한국 사회의 난민 문제도 쉽게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난민 캠프에 가서 뭐라도 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또 능력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기회가 되면 행정사·노무사 자격증도 공부해 보려 한다. 자격증이 있으면 그에 맞춰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테니까.
- 민혁 씨처럼 신학교에 오면 막연히 목회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신학생이 많다. 특히 다른 학과와 달리, 신학과에 왔다가 진로를 변경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진로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얘기하는 건 경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신학교를 나와도 '다른 길이 있다' 정도는 얘기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스스로 하루하루 길을 걸어가며 헤쳐 나가는 과정에 있다.
확고한 신념과 새로운 길에 대한 개척 의지가 있으면 어쨌든 성과는 나타나는 것 같다. "무릇 지킬 만한 것 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고 하신 성경 말씀도 있지 않나. 나 같은 경우, 스스로에게 따뜻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강박적으로 살았던 부분이 있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강박이 나에게는 긍정적으로 작용했고 삶의 방향성을 보여 준 것 같다.
신학교에 다니는 후배들 중에 진로 상담을 요청하는 이들에게는, 도전해 보라고 조언한다. 혹시라도 진로 때문에 고민하거나 방황하는 신학생들이 있다면, 일단 이것저것 많이 해 보는 게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 주고 싶다. 신학교 교수님이든, 다른 대학교 교수님이든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보고 또 도전해 보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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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선교를 하고 싶다. 선교는 단순히 성경을 들이미는 게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픔과 분쟁 속에 사는 이가 많다. 정말 외로운 친구들이다. 어린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한국에 와서, 하고 싶은 공부도 포기하고 컨테이너 같은 곳에 거주하며 일하는 친구들을 돕고 싶다.
한국 사회의 난민 문제도 쉽게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난민 캠프에 가서 뭐라도 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또 능력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기회가 되면 행정사·노무사 자격증도 공부해 보려 한다. 자격증이 있으면 그에 맞춰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테니까.
- 민혁 씨처럼 신학교에 오면 막연히 목회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신학생이 많다. 특히 다른 학과와 달리, 신학과에 왔다가 진로를 변경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진로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얘기하는 건 경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신학교를 나와도 '다른 길이 있다' 정도는 얘기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스스로 하루하루 길을 걸어가며 헤쳐 나가는 과정에 있다.
확고한 신념과 새로운 길에 대한 개척 의지가 있으면 어쨌든 성과는 나타나는 것 같다. "무릇 지킬 만한 것 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고 하신 성경 말씀도 있지 않나. 나 같은 경우, 스스로에게 따뜻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강박적으로 살았던 부분이 있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강박이 나에게는 긍정적으로 작용했고 삶의 방향성을 보여 준 것 같다.
신학교에 다니는 후배들 중에 진로 상담을 요청하는 이들에게는, 도전해 보라고 조언한다. 혹시라도 진로 때문에 고민하거나 방황하는 신학생들이 있다면, 일단 이것저것 많이 해 보는 게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 주고 싶다. 신학교 교수님이든, 다른 대학교 교수님이든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보고 또 도전해 보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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