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용서와 이해와 화해 속에서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2.04.19
한남대 명예교수
[금강일보] 나는 몇 친구들과 함께 헨리 나우웬의 책 '탕자의 귀향'을 읽고 생각과 느낌을 서로 나누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저자 나우웬은 매우 유명한 가톨릭 신학자로서, 오랜 동안 몸담았던 가르치는 생활을 멈추고 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로 들어가게 된다.
이 때 러시아의 상트 페터스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전시된 렘브란트의 그림 ‘탕자의 귀향’을 아주 세밀히 오래도록 여러 번 감상한다. 이 책은 바로 그 그림을 보고 자기에게 찾아온 감동을 기초로 쓴 것이다. 많이 알려졌듯이 이 그림은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가 신약성경 '누가복음' 15장 11절에서 32절에 걸쳐 펼쳐지는 이야기를 한 작품 속에 그려넣은 것이다.
가부장 사회의 이야기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상속으로 돌아오게 될 재산을 미리 달라고 한다.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그 몫을 준다. 그 아들은 나가서 그 돈으로 온갖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여 인생 자체가 망가졌다는 것이다. 더 이상 그를 받아주는 데와 사람이 없어서 고생과 고생을 거듭하다가 마지막에 아버지에게 돌아온다. 돌아오면서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빌고, 아들이 아니라 종으로 일할 것이니 거두어주실 것을 요청한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아주 따뜻하고 융숭하게 맞이한다. 기쁨을 크게 잔치를 베풀어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 이때 일터에서 돌아온 아버지와 늘 함께 있던 첫째아들이 이 광경을 보고 불평과 불만을 터뜨린다. 항상 같이 있던 자기를 위하여는 이런 잔치를 베풀어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할 때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네 것인데 뭐 그리 불평할 것이 있느냐고 말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 떠남과 머묾과 돌아옴과 돌아올 집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하여 보았다.
- 어버이와 아이들과 뉘우침과 용서와 화해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여 보았다.
- 아이됨과 어버이됨이 무엇인지도 생각하여 보았다.
이 책은 그 그림을 감상하고 해설하면서 나우웬 자신과 렘브란트와 아이와 독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논리를 전개한다.
작품을 감상하는 자로 머물게 하지 않고, 그 그림 안에 있는 등장인물 하나하나와 읽는 이 자신과 작가와 화가를 일치시켜서 볼 것을 요청한다. 나에게 렘브란트의 자리에서, 어버이의 자리에서, 돌아온 아이의 자리에서, 집에 머물던 아이의 자리에서, 작가 나우웬의 자리에서 번갈아가며 그림을 볼 것을 요청한다.
이렇게 볼 때 책을 읽는 나는 점점 더 나와 그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과 같은 속성을 가진 존재로 일치시켜 보게 된다. 관찰자, 평가자, 감상자가 아니라, 그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될 때 내 인생과 가정과 사회를 하나로 보게 된다는 것을 느꼈다.
어버이인 나, 집을 나갔다 돌아오는 둘째 아이인 나, 집에 어버이와 함께 있으면서 충실하게 일하던 첫째 아이인 나, 그리고 세상의 풍상을 다 겪고난 뒤 자신의 전 생의 깨달음과 사람됨을 이 한 폭의 그림 속에 넣는 렘브란트인 나, 이 그림을 보고 이런 책을 써낸 작가 나우웬인 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온갖 것을 겹쳐서 생각해보는 나인 나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이들은 떠나는 존재다.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항상 떠나려고 하는 존재요, 떠나면 다시 돌아오는 존재다. 떠나면 고생하고 잘못하고 뉘우치고 돌아와 용서를 빌고 새 삶을 다짐하는 존재가 아이들이다. 착실하여 어버이와 함께 있는 첫째 아이는 얼마나 많은 시절을 떠나고 싶은 유혹을 누르면서, 모험하지 못하면서 답답하게 사는 자신을 탓하였을까? 이 때 어버이는 길떠나는 아이와 함께 자신도 가출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아이와 함께 가출하지 않은 어버이는 돌아오는 아이를 맞이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또 자기와 함께 가출하지 않은 어버이라면, 떠났던 아이는 그에게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또 한 아이, 집에 있는 착실한 아이를 바라보는 어버이의 맘 역시 참으로 착잡하였을 것이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욕망을 표출하지도 못하고 억누르기만 하는, 맘으로는 항상 떠나고 싶고 떠나는 큰 아이의 답답함 속에서 함께 답답함을 느끼지 못하는 어버이라면 또 답답한 사람이다.
그러는 어버이는 언제나 자기 집에 있는 사람이었다. 떠난 아이나 집에 있는 아이가 돌아올 집은 어버이가 있는 집이다. 어버이는 집에 있는 존재다. 그러나 그 집은 어느 한 장소에 붙박이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집은 어버이를 품은 아이가 떠도는 그곳에도 항상 있었다. 집은 불만과 욕망과 떠남과 돌아옴과 머묾과 뉘우침과 용서와 화해를 한 곳에 섞어 넣고 달구어 끓이는 용광로다. 그것을 우리는 혹시 참이요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자리에서 좀 비약이긴 하지만, 모든 것을 하나로 섞어 녹여버리는 용광로와 우리 사회가 겪는 온갖 복잡한 것들을 겹쳐서 생각해 본다. 모든 것이 하나로 녹아 새로운 것으로 탄생하는 용광로. 우리 사회의 온갖 복잡한 것들을 하나로 녹여 새로운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용광로. 그것은 무엇일까?
어느 누구도 항상 정의로울 수도, 항상 공정할 수도, 항상 평화로울 수도, 항상 정당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항상 더럽고 지저분하고 부정하고 부패하기만 할 수도 없다. 때에 따라서 이것들을 이리저리 오고간다.
그것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조사하고 처벌함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더 큰 용광로 속에 네것 내것을 다 섞어 넣어 펄펄 끓여 뒤섞어 새로운 작품을 만들 큰 결단의 순간과 관점은 무엇일까? 그런 문화가 창출되지 않으면 역사는 개미 쳇바퀴 돌듯이 악순환만 반복될 것이다. 그것을 끊을 철학과 용기는 어떻게 찾고 올 것인가? 어버이됨의 사회문화는 어떻게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