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23

유식무경(唯識無境) - 불교신문

유식무경(唯識無境) - 불교신문

유식무경(唯識無境)


승인 2002.09.01

앎의 교리 삶의 교리 <31>

인식 속에서만 대상 존재

우리 눈앞의 대상은과연 실재하는 것인가  모든 사물은 의식의스크린에 투영된 이미지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텔레비전은 과연 실재하는 것일까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대통령은 과연 텔레비전 속에서나마 실재하는 것일까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면 모두 실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누구에게나 동일한 인식의 대상이면서 단순한 외견이나 착각, 환상, 허구와 같은 것과는 구별되는 ‘사물의 진실된 자세’란 무엇일까요. 감관에 의해 지각되는 존재인 현상을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실재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을 의식과는 분리된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무엇을 보고(眼) 듣고(耳) 맡고(鼻) 맛보고(舌) 부딪치는(身) 개별적인 인식 활동은 의식(意識)이 종합하고 통제합니다. 만일 의식(제6식)이 여러 인식활동(전5식)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면 우리의 삶은 혼돈 속에 빠지겠지요. 뇌의 갑작스런 혈액 순환 장애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팔다리의 수의(遂意) 운동이 불가능해진 중풍(腦卒中) 환자를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손과 발 등 몸의 반쪽이 그의 의식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말을 듣지 않지요. 

이러한 마비(痲痺)현상을 한의학에서는 ‘불인(不仁)하다’고 합니다. 은행씨(杏仁)나 복숭아씨(桃仁)처럼 혈액이라는 생명의 씨앗(仁)이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즉 생명 활동의 커뮤니케이션(識)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不仁) 뜻입니다. 때문에 의식은 즉 의사 소통 내지 혈액 순환 등 생명활동의 기반이 되지요. 그런데 이 의식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을 통섭하는 의근(意根)과 비감각적 대상(法境)을 인연으로 하여 생깁니다. 인식 활동인 이 식은 여러 교리에서 설명되지요. 가장 대표적인 것은 존재의 다섯 가지 요소(五蘊) 가운데 다섯 번째인 식과, 열 두 가지 인연 생기(十二緣起) 중의 세 번째인 입니다. 특히 이 식은 ‘유식’(唯識)이라는 말에서 보다 심화되지요. 표층의식인 제6식과 심층의식인 제7식과 제8식 내지 제9식으로까지 설명됩니다. ‘식’은 ‘의식’ 내지 ‘인식의 작용 그 자체’를 말하지요. 

이 식은 ‘비즈냐아나’(vijn~a-na)‘비즈납띠(vijnapti)로 변별됩니다. 이는 인식의 주체로 보느냐 활동으로 보느냐에 의해 분기되는 것이지요. 
‘비즈냐아나’(識)는 ‘식 자체’ 내지 ‘어떤 대상을 내용으로 하는 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식’은 ‘항시 변하고 있는 흐름으로서의 식’입니다.
‘비즈납띠’는 ‘인식되어진 것’ 또는 ‘인식의 내용’ 내지 사물의 겉모습인 ‘표상’(表象)을 일컫습니다. 우리가 흔히 인식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는 사물은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단지 내 마음에 나타난 사물의 겉모습(表象)일 뿐이며, 모든 사물은 내 의식의 스크린에 투영된 이미지(影像)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즉 인식 속에서만 대상은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를 주관적 관념론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유식학을 반드시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유식 역시 연기·무자성·공의 입장에서 존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세친은 그의 〈유식이십론〉(실은 22송)에서 대상의 비실재성을 논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물의 시간적, 공간적 구별, 동일한 대상의 인식, 대상에 따라 취하는 성공적인 행위들에 대한 설명을 꿈의 현상에 대비하여 해명하지요. 
즉 악업으로 지옥에 떨어진 이들에게 지옥의 고통을 체험하지 않는 지옥의 문지기들은 객관적 존재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지기들은 단지 지옥의 고통을 받는 이들의 나쁜 업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결코 객관적 실재로서 존재하는 문지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업이 남긴 힘’ 또는 ‘습기’(習氣)는 모두 우리의 식 안에 내재한다는 것이지요. 세친은 우리의 인식은 모두 식 자체의 종자(씨앗)로부터 생겨나는 것일 뿐이며 주체와 객체는 모두 식의 나타남에 지나지 않는다고 역설합니다. 

중국 자은(법상)종에서 ‘안난진호(安難陳護)1·2·3·4’라는 말로 식의 사분(四分)설을 제기한 것도 바로 ‘대상’을 ‘인식’ 속에서 해명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 식이라는 것도 실체는 아닙니다. 폭포수와 같은 하나의 흐름일 뿐이지요.

고영섭/동국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