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 Dongwon Goh
16 m ·
서울대학교에서 기독교를 가르치시는 손은실 교수님의 두봉 주교 방문기.. 오늘 몇 년 만에 우리말로 설교를 하는데 예화로 나누려고 한다.
손은실 *영원한 현재를 사시는 두봉 주교님을 뵙고 온 이야기
지난 2월 호주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께서 최근에 우연히 보고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면서 두봉 주교님의 작은 이야기 동영상을 보내 주셨다. 신뢰하는 목사님의 추천이라 동영상 보는 것을 즐기지 않지만 클릭해보았다. 동영상에 소개된 두봉 주교님의 ‘기쁘고 떳떳하게’ 사시는 모습은 정말 성탄 선물 같았다.
두봉 주교님은 파리 외방선교회에서 파견된 선교사로 본명은 르네 뒤뽕(René Dupont, 1929~)이다. 동영상을 보고 주교님의 삶에 깊은 감동을 받고, 주교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한번 찾아가 뵈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마침 지난 화요일 석박사과정 수업에 예기하지 못했던 휴강 사정이 발생했고, 학생들과 휴강을 결정한 후에 미리 두봉 주교님께 연락을 드려서 휴강일에 남편과 함께 찾아뵐 수 있었다. 솔직히 학기중에, 그것도 내가 집에서 나가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아니 가장 무서워하는 이른 아침에 먼 길을 떠나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웠지만, 한 가지를 기억하고 밤잠을 못자더라도 가기로 마음 먹었다. 주교님께서 처음 한국에 오실 때는 배를 타고 험난한 바닷길로 두달 반이나 걸려서 오셨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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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생이신 주교님은 1954년 한국전쟁후 폐허가 된 한국에 선교사로 오셔서 지금까지 한국교회에서 사목을 하고 계신다. 입국 당시 한국의 처참한 상황에서 주교님은 10년간 고국 프랑스에는 한번도 못 가시고, 매년 여름에 미국에 가셔서 선교 보고와 말씀을 전하시고, 미국교회의 선교 지원비를 받아 오셨다고 한다. 이 말씀은 내가 고국에 종종 가셨는지 물었을 때 대답하신 것이다.
주교님은 출생하신 프랑스에서 보다 한국에서 사신 세월이 훨씬 길고 지금은 국적도 한국이다. 가까이서 뵙고 보니, 단순히 국적만 한국인이 아니라 입맛, 성품, 정서, 감수성, 언어 감각 모두 한국사람이었다. 모든 말씀 가운데 한국을 지칭하시는 표현은 “우리나라는”이었다. 주교님이 하신 말씀을 옮겨보면 이렇다. “우리나라는 외국에서 선교사가 오기 전에 먼저 중국에서 기독교 책을 가지고 와서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우리나라 인구 절반이 비종교인이라는 점은 참 안 좋은 일이에요. 기독교, 유교, 불교, 어떤 종교이든지 종교를 찾고 신앙을 가진 이들은 아무래도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기가 더 싶거든요”
주교님의 말씀과 태도를 듣고 보면서 내 안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아! 두봉 주교님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모범을 그대로 본받으신 분이시구나. 성육신 선교(Incarnation Mission)의 전형이시구나!”
두봉 주교님의 말씀에 따르면 파리 외방 선교회에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는 약 170명이고, 그 가운데 현재는 10분이 계신다고 한다. 이번 학기에 한국기독교 강의를 하면서 조선에 와서 순교했던 이 선교회 소속 프랑스 사제들 이야기를 책에서 읽고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복음의 기쁨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삶으로 선교하는 두봉 주교님을 뵙고 말씀을 들으면서 한국기독교역사 연구에서 이 선교회의 많은 자료들을 연구할 제자도 기를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 글을 쓰다가 최근에 유퀴즈에 출연하셨다는 얘기가 기억나서 잠깐 찾아봤다. 1954년 한국전쟁 직후, 한국 선교사로 발령이 나셔서 “무척 좋았어요”라는 말씀을 시골 할머니들처럼 박수를 치면서, 온 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면서 말씀하시는 모습이 나왔다. (아래에 붙이는 동영상).유퀴즈 출연 후에 사방에서 많은 분이 찾아오신다고 한다. 그 가운데 절반이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어서 주교님은 조금은 놀라기도 하시고, 반갑기도 하신 것 같았다. 유퀴즈 출연하셔서 말씀하신 이야기 한토막을 들려 주셨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이셨던 주교님의 부친께서 젊은 아들을 머나먼 타국으로 보내시고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편지를 쓰는 것이라 여겨 30년의 세월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매주 편지를 보내신 사연. 정말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랑의 편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랑의 모태는 사랑임을 다시한번 절감했다. 아 주교님께서 처음 보는 우리를 얼마나 따뜻한 사랑으로 환대해 주시던지! 주교님의 사랑과 어린이같은 맑음, 청아함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지난 화요일 도리원 주교관에서 주교님을 뵙고 말씀을 나누면서 가장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던 주교님 삶의 모습은 늘 하느님 안에서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기쁘게 살아오신 모습이었다. 한국에서 어떤 것이 가장 좋고 어떤 것이 가장 안 좋으셨는가라는 우문을 던지자, 주교님은 특별히 좋거나 나쁜 것은 없었다고 대답하셨다. 모든 것을 주님 안에서 수용하고 주님의 선하심을 믿고 희망했기 때문에 좋은 것, 나쁜 것이 따로 없었다고. 그러시면서 세상에 넘쳐나는 고통과 악의 현실을 모르거나, 눈을 감아서, 어떤 상황이든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님을 덧붙이셨다.
1929년생이시니, 우리나라 나이로 94세이시다. 주교님께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늘 현재를 살고 계셔서 그러신 것이 아닐까? 처음 전화를 드렸을 때 전화받으시는 목소리와 말씀이 어린이처럼 티없이 맑아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 천진한 웃음, 성령의 숨결로 살아가는 사람의 유쾌함과 기쁨이 충만한 모습을 가까이서 듣고 볼 수 있어서 매우 행복했다. 하지만 주교님도 인간의 몸을 가지고 사시는 분이라 몸의 노화를 피할 수는 없으셨다. 특히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그 반대로 이행하실 때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시는 어려움을 가지고 계셨다. 눈에 눈물도 많이 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웠다. 선글라스와 안약? 안과 의사의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영육을 그가 지상의 순례를 마치는 날까지 지켜 주시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