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01

'회복적 정의'는 '성소수자 공동체'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 사회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회복적 정의'는 '성소수자 공동체'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 사회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회복적 정의'는 '성소수자 공동체'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회복적 정의의 정치학> 온라인 북 콘서트…"여러 맥락 살펴야 진정한 사회변혁 가능"

기자명 구권효 기자
승인 2022.03.24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1974년 캐나다 온타리오주 '엘마이라(Elmira)'라는 작은 마을. 어느 날 밤, 고등학생 2명이 술에 취해 주차돼 있던 마을 사람들의 자동차를 때려 부수고 타이어를 망가뜨리는 등 난동을 부린다. 이 사건으로 스물두 가정이 피해를 봤다. 다음 날 가해자들은 경찰에 붙잡혔고 처벌을 피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당시 보호관찰관이었던 마크 얀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판사에게 보고할 문서 맨 뒤에 자기 의견을 하나 보탰다. "고등학생 두 명을 피해자들과 직접 만나게 하는 게 치유 방법으로 좋을 것 같다"고.

전례 없는 일이었지만 마크 얀치의 거듭된 요청에 판사는 이를 수락했다. 그렇게 가해자들은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게 된다. 이들은 주민들의 피해와 심정을 직접 들으며 진심으로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피해를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됐다. 날벼락 같은 피해를 당한 주민들도 이들의 모습을 보며 안도할 수 있었다. 조그마한 마을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일깨우며 캐나다를 넘어 전 세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오늘날 사람들은 엘마이라 사건을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의 태동으로 부른다.

그로부터 50년 가까이 흐른 지금, 회복적 정의는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발전해 왔다. 유엔은 2002년, 회복적 사법을 범죄 문제에 적용하도록 권장하는 지침을 발표했다. 유럽연합(EU)도 2015년, '피해자 권리 지침'에 회복적 정의를 포함했다. 한국에도 2000년경 소개돼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회복적 정의 패러다임을 교육 영역에 적용한 '회복적 생활교육'은 학교 현장에서 대안으로 떠올랐으며, 경찰은 2019년부터 대대적으로 '회복적 경찰 활동'을 시작했다. 회복적 가치를 교육하는 기관들도 주목을 받고 있고, 무엇보다 회복적 정의에 매료돼 공부하고 연대하며 자기 영역에서 적용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회복적 정의의 정치학 - 회복적 정의는 사회를 어떻게 변혁하는가?> / 앤드류 울포드·아만다 네룬드 지음 / 김복기·고학준 옮김 / 대장간 펴냄 / 384쪽 / 2만 5000원

2월 말 출간된 <회복적 정의의 정치학>(대장간)은 여러 영역에서 회복적 정의를 실천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나침반이 되어 줄 책이다. '회복적 정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워드 제어 교수(이스턴메노나이트대학교)가 쓴 <우리 시대의 회복적 정의>(대장간)와 제어 교수에게 수학하고 한국에 회복적 정의 운동을 시작한 이재영 이사장(한국회복적정의협회)이 쓴 <회복적 정의 세상을 치유하다>(피스빌딩)가 회복적 정의에 입문하는 교과서 같은 책이었다면, <회복적 정의의 정치학>은 회복적 정의를 객관적·비판적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다.

<회복적 정의의 정치학> 출간을 기념해 3월 22일 역자 김복기 목사(캐나다메노나이트교회)와 고학준 팀장(대장간)이 온라인 북 콘서트를 열었다. 김복기 목사는 "이 책은 무엇보다도 회복적 대화 모임 진행자들이 '우리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디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를 알려 주는 책이다. 대개 회복적 정의를 지도가 아닌 나침반으로 소개하는데, 그에 따라 우리의 방향성을 재점검해 주는 책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목사와 고 팀장은 책의 대략적인 내용을 설명하며 번역자로서의 소회를 풀어 냈다. 북 콘서트에는 50여 명이 참여했다.

책은 1장에서 '회복적 정의의 정치학'이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으로 시작해, 2장 '회복적 정의를 촉발하는 사건들', 3장 '회복적 정의의 에토스(신념)', 4장 '회복적 정의의 유형들'을 설명하며, 회복적 정의가 무엇이고 언제 어떻게 어떤 원칙을 가지고 적용되는지 설명한다. 5장 '회복적 정의 정체성 세우기'에서는 피해자·가해자·공동체·진행자가 각각 어떤 개념인지 정리한다. 6장 '회복적 정의의 여러 맥락'에서는 회복적 정의와 젠더, 인종, 성소수자 공동체, 사회 계급, 나이 그리고 이러한 지배 구조들의 교차성 등을 살핀다. 7장은 회복적 정의에 대한 기술적·본질적 비판을, 8장은 회복적 정의가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 경계하고 추구해야 할 것들을 이야기한다.

<회복적 정의의 정치학>은 캐나다 매니토바대학 사회학·범죄학 교수 앤드류 울포드(Andrew Woolford)가 쓴 <The Politics of Restorative Justice>의 2판이다. 2판에는 매니토바대학에서 수학하고 현재 맥이완대학 사회학 교수로 재직 중인 아만다 네룬드(Amanda Nelund)가 공동 저자로 참여했다. 네룬드는 자신의 연구 분야인 페미니즘 관점의 범죄학을 회복적 정의의 정치학에 접목했다. 고학준 팀장은 "이 책에서는 '페미니즘'을 단순히 남녀평등의 의미로 쓰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차별·배제·불평등 등을 구조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지칭하는 말로 쓴 것 같다"고 말했다.

김복기 목사. 줌 화면 갈무리

저자들이 회복적 정의 운동에서 경계하는 지점 중 하나는 회복적 정의 활동이 지배 구조에 포섭되는 것이다. 어떤 사건을 회복적 관점으로 풀어 나가려 할 때, 그 사건을 야기한 사회구조의 부조리와 불평등을 언급하지 않은 채 당사자 간의 개인적인 일로 치부해 버리면, 결국 회복적 정의 운동이 신자유주의 구조에 복무하고 오히려 그것을 강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는 6장에서 이야기하는 젠더와 인종, 성소수자 공동체 그리고 '인간이 아닌 주체들'(생태 등)을 고려할 때 분명해진다.


"동조적 회복적 정의는 가난, 성별, 인종 및 성소수자 개인들의 부당한 경험에 대해 립 서비스식 인식만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지배적 교차 방식을 확장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회복적 정의는 그러한 개인들을 진정시키거나 덜 파괴적으로 만드는 일을 할 수 있으며, 그들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맥락과는 싸우지 않은 채 특정 정의 요구에 관한 표면적인 포용과 생각을 제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겉으로는 트랜스젠더에 혐오적이지 않은 회복적 정의가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주거와 고용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인종에 관한 블라인드 채용 등의 관행을 도입하려는 회복적 정의 프로그램은 북미 내의 백인 우위 시스템에 관해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회복적 정의가 운영되는 맥락의 중요한 측면이며, 결국 교차하는 지배 형태 제거를 추구하는 다른 집단들과 연합하지 못한다면 회복적 정의는 항상 우리 사회의 중대한 불의에 작은 연고나 발라 주는 역할을 하는 위치에 머물고 말 것이다." (335쪽)


"갈등이 인간관계를 붕괴시키고자 위협할 때, 종종 인간 이외의 이해관계도 위험에 처해진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즐기고 전통적으로 공동생활의 중심으로 여겨 왔던 지방 하천이 오염되는 것을 염려하는 주민들과 공장 사이의 갈등은 대개 공장주가 지역 주민들에게 훈련과 일자리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하거나, 그들에게 하천 위협에 상응하는 보상을 약속하면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회복적 정의의 경우에서는 그 누구도 하천이나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구나 식물구의 입장에서 말하지 않았다. 여기서 회복적 정의는 갈등 해결 과정에 의해 영향을 받은 인간이 아닌 다른 개체들을 대신하여 말할 책임을 부여하도록 계획된 '로렉스 원칙(Lorax principle·로렉스는 1971년 미국 동화 <The Lorax>에 나오는 나무를 대변하는 요정이다. <The Lorax>는 환경 운동에도 영향을 줬다. -기자 주)'을 수행하면 좋을 것이다." (286쪽)

김복기 목사는 6장 내용을 설명하며 "회복적 정의의 여러 맥락을 보면서 내가 처한 공동체 혹은 지역사회에서 어떠한 부분을 놓치고 있는지 살펴보시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고학준 팀장은 "6장에서 상호 교차성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사람에게는 여러 정체성이 교차하기 때문에 어떤 회복적 프로그램을 운영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맥락을 살피고 그에 따라 적용해야 한다는 뜻으로 보인다"며 "한국적인 맥락과 이 책이 쓰인 캐나다적인 맥락이 많이 다른 부분도 있다. 그건 독자의 몫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회복적 정의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라고 했다.

고학준 팀장. 줌 화면 갈무리

질의응답 시간에는 실천적인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한 참가자는 '회복적 정의의 여러 맥락'에 나오는 내용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느냐고 질문했다. 고학준 팀장은 "정답은 없을 것 같다. 다만 내가 이 책을 읽어 낸 방식은, 우리가 아주 작은 단위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으나 그 작은 단위에서 우리가 이 활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맥락을 알아야 하며 그래야 진정한 회복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복기 목사도 "회복적 정의는 결국 자기 삶 속에서 먼저 적용돼야 한다.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보고 분석해 내고 반응해야 한다. 철학과 패러다임을 바꿔야 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다른 참가자는 회복적 정의가 철학과 패러다임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한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은지 우려했다. 김복기 목사는 "회복적 정의 실천가들이 현실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뿌리가 든든해야 한다. 좀 더 깊이 연구하면서 철학과 패러다임을 강화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며 "학교 상황을 보면 회복적 생활교육 연구 모임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의 차이가 크다. 연구 모임이 있는 학교는 잘 뿌리를 내리는데, 개인적으로만 하려다 보면 지치고 좌절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회복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연결돼야 한다. 특히 지역사회에서 연결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의 맥락에서 회복적 정의 운동이 놓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일까. 대선이 막 끝난 지금, 지지하는 정당을 기준으로 갈라져 첨예하게 갈등하는 상황에 회복적 정의 운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기자가 묻자, 김복기 목사는 "한국 사회에서는 서로 대화를 시도하기는커녕 너무 쉽게 왼쪽·오른쪽, 찬성·반대 등 흑백논리로 갈라 버리는 게 익숙하다. 안타까운 것은 대선 후보들도 그랬다는 점이다"라며 "회복적 정의에 입각한 프로그램의 핵심은 '구조적인 대화'다. 질문을 잘 준비하고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 서로 존중하고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공포를 없애는 것이다. 한국에 회복적 정의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진행자)가 많아지고 있다. 이런 분들이 역량을 발휘할 날이 곧 올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학준 팀장은 "회복적 정의 운동은 꼭 진보나 좌파의 개념이 아니다. 캐나다 상황을 봐도 진보 정부 때 회복적 정의를 확 밀어 준다거나, 보수 정부 때 회복적 정의 운동이 축소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회복적 정의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정치 성향이 다양하다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로 그는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적 갈등이 세대적인 양상으로 많이 나타나지 않나. 'MZ세대'라고 불리는 20·30대를 '스윙보터'라고 표현하는데, 그만큼 그들이 유연하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40·50대, 60·70대와의 간극이 크지만, 반대로 어떤 식으로든 그 간극을 이어 줄 수 있는 세대라고도 생각한다. 그런 지점에 회복적 정의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