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21

[이슬람 이해하기] (1-5)- 데일리굿뉴스

[이슬람 이해하기 ①] ‘삼위일체’의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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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10.10
 
비슷한, 그러나 다른…


이슬람은 기독교와 많이 닮았다. 유일신이며 인격신인 하나님, 하나님에 의한 천지창조, 십계명, 최후의 심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다만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부르지만,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부른다는 점이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을 이스마엘의 후예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등.


<성꾸란>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들도 많이 등장한다. 아담과 이브, 노아, 아브라함, 롯, 이스마엘, 야곱, 야곱의 열 두 아들, 그 중에서도 요셉, 모세, 아론, 다윗, 솔로몬, 욥, 요나, 엘리야, 엘리사, 요한, 마리아, 예수, 천사 가브리엘까지. 벌써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비슷하다지만 이렇게까지?’




삼위일체의 부정


그렇다면 그들과 우리는 정확히 어떤 점이 다른가? 무엇보다 먼저 그들은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이슬람의 신앙고백에는 ‘하나님은 한 분 임을 믿습니다’가 있다.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절대성을 강조하는 그들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세 인격이 일체를 이루고 계신다는 삼위일체의 개념을 강하게 거부한다.


이를 다신교의 개념을 받아들여 더할 나위 없는 신성모독으로 보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삼위일체를 성부ㆍ성자ㆍ성령 하나님이 아닌 성부, 성자, 마리아로 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이다. 삼위일체에서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라는 말씀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관계’ 내에서만 드러나는 인격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위해서는 관계를 맺을 인격적 대상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창조와 무관하게, 창조 이전에 이미 사랑이셨다면, 이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원래 인격적인 소통을 하셨다는 의미가 되고,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삼위로서의 존재성을 알 수 있게 된다.


삼위의 차별적인 인격으로 사랑의 소통을 나누시던 하나님은 흙으로 인간을 지으신 후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을 닮은 형상이 있게 하셨다. 즉, 인격을 허락하신 것이다. 우리 안에 인격을 허락하신 이유는 ‘사랑의 소통’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의 소통을 원하신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이슬람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유일무이한 절대자이고 인간은 그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래서 꾸란의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처럼 배신하고 타락한 인간을 어르고 달래고 아파하고 질투하고 진노하지만 버리지 못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즉, 끊임없이 소통의 길을 열려 하시는, 인간과 인격적 관계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꾸란의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서 위엄에 찬 모습으로 지시하고 명령하는 절대지배자로서의 하나님이며 인간은 그 명령에 전적으로 복종하기만 하는 노예 같은 존재이다.


기독교에서처럼 하나님과 인간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이슬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이슬람’이란 말 자체에서부터 잘 드러나는데, 이 단어의 아랍어 어원은 자기를 내맡김, 넘겨줌 등을 뜻하고, 이슬람 신자를 뜻하는 무슬림(muslim)이라는 단어도 본래의 의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신에게 완전히 내어 맡긴 절대 귀의자를 뜻한다.


<출처: 2007 사랑의교회 동역선교사 리포트 중심의 ‘무슬림을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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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이슬람 이해하기 ②] ‘예수’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

기자명정성진 입력 2007.10.10 16:18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 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 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 바로가기 본문 글씨 키우기 본문 글씨 줄이기


기독교를 기독교일 수 있게 하는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이슬람은 예수님의 개념도 당연히 기독교와 완전히 다르다. 예수는 꾸란의 총 14장에서 그 이름이 거론될 만큼 아브라함과 모세에 이어 상당히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지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그저 한 사람의 인간 선지자로서만 묘사된다.


유일신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을 수도 없는 것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해결하는 데 있어 직접 인간이 되어 가장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해야만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무시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 된다고 생각한다.


죄는 하나님이 그 전능성으로 언제든 용서해주시면 되는 것이고, 구원은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스스로 이뤄가는 것이지, 하나님 편에서의 대속(代贖)이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즉 이슬람은 예수님의 신성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마리아의 아들을 십자가의 고문으로부터 보호하셨고 그 대신에 배신자 유다가 십자가에 달리게 했다(이 부분에는 이 외에도 몇 가지 이설이 있다)고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믿고 있다.


성령에 대한 오해가 꾸란의 오역으로 이어진 것


이 외에 꾸란에서는 예수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먼저, 성육신하여 구원자가 되신 예수는 거부하면서도 예수의 특별한 탄생, 즉 동정녀 탄생은 인정한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은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능력을 드러내기 때문에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기독교와 다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꾸란에서 보면 마리아의 수태를 ‘하나님은 그녀에게 성령을 불어넣었다(성 꾸란21:91)’ 혹은 ‘하나님은 그녀의 몸에 그분의 영혼을 불어넣었더니(66:21)’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한국어로 ‘성령’이라 번역된 부분은 단순한 영을 의미하는 아랍어 ‘rub’를 기독교의 개념과 혼동하여 오역한 것이며, 뒤 구절 각주에는 ‘가브리엘 천사로 하여금 혼을 불어넣으라 명령하니 그 혼이 마리아의 자궁으로 들어가 예수를 잉태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참고로 말하면 이슬람에는 ‘성령’의 개념이 없다. 아무래도 무함마드가 가장 이해하지 못했던 개념이 성령이 아닌가 싶다. 성령을 천사의 개념 정도로 이해하거나 하나님의 피조물인 어떤 영으로 알았던 것 같다. 한국어 꾸란에 몇 차례 등장하는 ‘성령’이란 단어는 모두 꾸란이 성경보다 약 2세기 정도 늦게 번역되면서 그 역자가 이미 가지고 있던 성령에 대한 오해가 꾸란의 오역으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다음으로, 꾸란은 예수를 자신의 뒤에 오는 사자인 아흐마드를 미리 알려주기 위해 파견된 자로 소개한다. 즉 무함마드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선지자인 셈이다. 이 세상의 마지막 선지자는 무함마드이기 때문이다. 마치 세례요한과 예수의 관계와 비슷하다.


이는 요한복음 14장 16절과 26절의 보혜사 성령을 소개하는 구절에 대한 오해로 보이는데, 보혜사를 뜻하는 그리스어인 ‘Parakletos’와 크게 칭송받는 자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인 ‘Perikletos’의 문자적 유사성, 그리고 크게 칭송받는 자라는 뜻의 아랍어 ‘아흐마드’와 그리스어 ‘페리클리토스’의 의미적 유사성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꾸란은 예수의 영원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이 마지막 날에 모든 죽은 사람들의 부활과 함께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점이 다르다. 최후의 심판 때에 하나님이 예수에게 증인의 역할을 담당시킬 것이라는 부분은 흥미롭다.


<출처: 2007 사랑의교회 동역선교사 리포트 중심의 ‘무슬림을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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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이해하기 ③] 성경과 꾸란

기자명뉴스미션 입력 2007.10.10 16:16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 카카오톡(으)로 기사보내기 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 바로가기 본문 글씨 키우기 본문 글씨 줄이기


이슬람 교리문답을 보면 이슬람이 구약성경, 시편, 신약성경, 성 꾸란을 하나님의 4가지 경전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읽어보면 신약성경의 원저자를 예언자 예수라고 알고 있다는 점 그리고 성 꾸란 외의 나머지 3개, 즉 성경은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고 모두 후세의 신자들이 쓴 해설서이고,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것은 성 꾸란 뿐이라고 주장한다는 점 또한 알 수 있다.


무슬림들은 성 꾸란이 최종적 율법이라 한다. 왜 그런가? 이는 성경과 꾸란이 만들어진 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먼저 구약성경은 대략 1,00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형성되었고, 율법서ㆍ선지서ㆍ역사서ㆍ시ㆍ지혜서 등 다양한 문서형식을 가지고 있다. 정경 수집본이 확정된 것이 빨라야 기원후 2년의 일이라고 하니 그 장황하고 긴 시간과 방대한 일의 분량을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신약성경의 완성도 그다지 신속하지 않았다. 기원 후 대략 70년부터 기록되기 시작하여 정경화 작업은 4세기 말경에 끝난 것으로 보고 있다. 사본도 약 1,500권에 이른다. 사도들의 문서인지 여부와 신앙에 부합하는 문서인지의 여부 그리고 모든 교회들에 인정되는 문서인지의 여부를 기준으로 삼아 교회의 합의를 통해 선정했다. 구약과 신약 둘 다 많은 시간, 많은 기록자, 많은 사본으로 형성된 셈이다.


그러나 꾸란은 전혀 다르다. 꾸란은 기원 후 610년부터 632년에 걸쳐 이루어진 무함마드의 단독 기록이다. 그가 40세 되던 해부터 죽을 때까지의 23년 활동기간 동안 가브리엘 천사가 하나님의 계시를 무함마드에게 전한 말씀으로 기록된 하나의 문서로 성경과는 완전히 다른 균질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꾸란을 기록한 선지자 무함마드는 문맹이었다고 한다.


이슬람에서 꾸란과 더불어 무함마드의 언행록이 상당한 비중으로 다뤄져


꾸란에서 사용된 아랍어 운문은 상당히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꾸란’이라는 말 자체가 ‘낭독’을 뜻한다고 하니, 그 언어적 아름다움을 짐작해볼 수 있겠다. 문맹인 선지자와 뛰어나게 아름답고 지혜로운 문서의 관계는 분명히 신의 계시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꾸란의 정리 작업은 무함마드의 사후 메디나에 있었던 여러 개의 꾸란 원본을 3대 칼리프인 우스만 아판(Uthman b. Affan)이 최종 정리하여 성문화함으로써 무함마드 사후 35년 만에 완전히 끝이 난다. 성경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이다.


다만 이슬람에서 꾸란이 기독교에서의 성경과 조금 다른 점은, 기독교에서는 성경 이외에는 어떠한 다른 책도 성경과 같은, 혹은 비슷한 위상도 가질 수 없는 반면 이슬람에서는 꾸란과 더불어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가 꾸란 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위상으로 비중 있게 같이 다뤄진다는 점이다. 꾸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디스를 참조한다.


이슬람의 신앙내용을 살펴보면 꾸란이 성경과 닮아 있다는 것, 성경의 많은 부분을 인용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실제로 연구에 의하면 꾸란의 모든 단어의 18%가 아랍어 성경의 어형을 지니고 있으며, 그 3/4은 신약성경에서 인용한 것이고, 꾸란의 60%가 5경의 보고서와 율법 및 구약의 역사서에서 유래했고, 꾸란장들의 약 8%가 신약에서 끌어낸 것이라 하며, 특히 창세기와 시편, 공관복음서와의 유사성이 두드러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함마드는 무엇을 기준으로 성경의 내용을 발췌했을까? 그 기준은 유일신론적인 경향을 가지느냐의 여부였다. 무함마드가 아브라함과 모세를 비중 있게 다룬 이유도 그들이 유일신론을 선포한 대표적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꾸란에서 구약에 비해 신약의 비중이 낮음은 당연하다. 신약에서 주로 발췌한 공관복음의 예수어록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는 조금 다르게 인용된다. 예를 들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마태복음의 말씀이 꾸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오만하고 거만한 자 그들에게는 하늘에의 문이 열리지 아니하며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죄지은 자들에 대한 대가라’고 되어 있다.


<출처: 2007 사랑의교회 동역선교사 리포트 중심의 ‘무슬림을 위한 기도’>
[이슬람 이해하기 ②] ‘예수’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
[이슬람 이해하기 ①] ‘삼위일체’의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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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이슬람 이해하기 ④] 순니파와 시아파



기자명정성진
입력 2007.10.10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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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에 대해 귀동냥을 할 때면 반드시 듣게 되는 두 단어가 바로 ‘순니파’와 ‘시아파’다. 순니와 시아는 단순히 ‘파’의 개념 정도가 아니라 같은 이슬람이면서도 매우 다른 모습의 신앙을 갖고 있다.

단순하게 분류하면 순니는 아랍 이슬람을 대표하고 시아는 이란 이슬람을 대표하며, 수적으로는 순니가 전체 무슬림의 약 84% 정도를 차지하고 시아는 약 16%정도를 차지한다고 구분해 볼 수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둘의 모습을 살펴보자.

순니파

앞서 간단히 설명한 바에서 잘 드러나지만 순니는 이슬람의 다수파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정통파라고 생각하고 있다. 순니파는 쉽게 말하면 법률주의파 혹은 율법주의파라고 부를 수 있다.

순니파는 꾸란과 무함마드, 그리고 선지자들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을 그들의 목표로 삼고 있다. 순니라는 이름도 ‘선지자의 삶’을 뜻하는 ‘Sunna’에서 왔다.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이슬람이란 새 종파를 창시하고 설파했을 때 메카 사람들은 그의 새 종교운동을 맹렬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무함마드는 약간명의 동지들과 함께 힘겨운 싸움을 거듭하다가 결국 메디나로 피신했다.

그래서 그가 메카에 있을 당시 썼던 꾸란은 상당히 개인적이며 실존적으로 음울하고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띤다. 그러나 그가 메디나로 피신하고 나서 분위기는 역전된다. 이슬람이 사라센제국이라는 빛나는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서기 662년(이슬람력 1년) 무함마드가 메디나로 옮긴 해부터 꾸란은 밝고 화창해진다. 메카에서 심판의 주였던 하나님의 모습은 은혜의 주로 바뀌고 개인적 색채가 강했던 종교적 내용은 공동체를 중시하는 모습으로 바뀐다.

당시 아랍은 혈연 중심의 작은 공동체였다. 무함마드는 종교를 가지고 혈연 중심성을 끊어 아랍 사회를 거대 공동체로 확장시킨다. 종교가 혈연을 대신하기 위해서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규정짓는 종교법이 분명하고도 강해야 한다. 그래서 이슬람은 꾸란과 하디스를 종합하여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할 수 있는 법률을 마련했고, 그 후에는 개개인이 꾸란을 개별적으로 해석하여 법적인 판단을 내리는 일을 전면 금지시켰다.

종교가 삶의 법이 된 이슬람의 법을 ‘샤리아’라고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샤리아는 법적으로 출판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꾸란과 하디스를 어떻게 해석해서 어떻게 법 체계화할 것인가에 대해 학자들의 견해가 나뉘면서 순니의 법학파를 만들어냈는데 여기에는 대표적으로 한바리, 말레키, 하나피, 사페이의 네 개의 법학파가 있다. 이들의 꾸란 해석이 순니 무슬림의 일상적인 법이 되는 것이고 반드시 이 넷 중의 하나가 소속되어야 한다.

시아파

앞서 순니파에 대한 설명이 잘 되었다면 독자들은 순니파 꾸란에 대해 경직된 성격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율법에 치중하다 보면 그 율법이 만들어지게 된 ‘정신’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소홀해지게 된다.

외면적 율법에 치중하여 꾸란을 분석하는 것에 반발하여 그 내면적 본질과 의미를 이해하려고 한 것이 시아파이다. 그래서 시아 무슬림들은 꾸란을 문자 그대로 읽는 책이 아니라 문자 이면의 심오한 뜻을 찾아내야 하는 책으로 이해한다.

꾸란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법체계도 순니와는 다른 개별적 법체계를 가진다. 시아파는 또한 ‘이맘’을 숭배한다. 이는 알라 외에 그 어떤 것도 숭배해서는 안 된다는 순니파 입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순니파에서 이맘은 이슬람사 초기의 ‘칼리프’란 말과 같은 단어로 사용되거나 금요일 회중예배 때의 인도자 정도로 사용되지만, 시아파에서의 이맘은 영성의 최고 권위자를 의미한다.

시아파는, 꾸란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무함마드 계승자가 되었으나 권력자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1대 이맘 알리를 추종한다. 시아란 말도 ‘알리를 좇는 사람들’이라는 ‘Shia-t-Ali’에서 유래되었다.

초대 알리 이후 이맘은 대대로 이어져 추종자들의 존경을 받는 동시에 권력자들의 위협을 겪으며 12대까지 이르는데 12대 이맘인 무함마드 이븐 하산은 그가 다섯 살 되던 해인 874년 지하의 밀실로 사라졌다.

시아파들은 이 12대 이맘이 죽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약 70년간 숨어 있으면서 네 명의 대리인을 통해 시아 이슬람을 통치했는데 그가 잠복의 시간을 끝내는 날 세상은 종말을 맞이할 것이고 그는 그 종말의 때에 메시아로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것이 시아파의 종말론 신앙이다.

<출처: 2007 사랑의교회 동역선교사 리포트 중심의 ‘무슬림을 위한 기도’>

[이슬람 이해하기 ③] 성경과 꾸란
[이슬람 이해하기 ②] ‘예수’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
[이슬람 이해하기 ①] ‘삼위일체’의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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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이해하기 ⑤] 수피즘과 뉴에이지 운동 < 선교 < 교계 < 기사본문 - 데일리굿뉴스


선교
[이슬람 이해하기 ⑤] 수피즘과 뉴에이지 운동


기자명정성진
입력 200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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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피즘은 흔히 이슬람 신비주의로 알려져 있다. 수피즘은 꾸란을 외면적으로 해석하는 데 반대하여 내면의 깊이로 파고들어 그 본질에 닿고자 한다. 이 점만 놓고 보면 시아파와 비슷할 수도 있지만 이들은 신에 의해 태생적으로 선택되는 특별한 이맘의 존재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아파와 다르다. 수행을 통해 신에게 가까이 가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수행을 잘 해내는 것이 관건일 뿐이다. 그래서 이들의 신앙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수피라는 용어도 고대 근동의 수행자들과 예언자들이 자기부정의 상징으로 입었던 거친 양털 옷을 뜻하는 아랍어 ‘수프(suf)’에서 유래한다.

수피가 중요시 하는 것은 자기부정이다. ‘나의 나됨’이라는 의식을 버리고 끊임없이 자기 안으로 파고들어가다 보면 자기 안에 내재한 신을 만나게 된다. 완전한 자기 부정 속에서 완전히 신과 일체가 되는 것. 이것이 이들의 수행 목표이다. 그래서 수피들은, 신을 외부에 존재하며 피조 세계와 분리되어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만물 속에 편재되어 있고 자기 안에도 내재되어 있는 존재로 이해한다. 이러한 이들의 신 개념은 범신론(汎神論)에 가깝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들이 순니파 이슬람과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이슬람 신앙의 대표적 특성 상태로 나아갔고, 다음으로 이들은 꾸란의 자유로운 해석을 중시하여 반(反)샤리아(반율법주의)적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강한 저항을 받고 있다. 그러나 종교에서 영성이 차지하는 부분을 무시할 수 없기에 수피즘은 이슬람에서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

수피즘은 신비적으로 범신론적인 경향성은 1960년대 뉴에이지 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그 영향력은 여전하다.

내가 ‘나’라는 자기긍정을 고집하는 한, 신과 나는 분리되어 대립하게 되고, 신과 나의 분열이 곧 ‘악’이라 말하는 것이 수피즘이다. 영성을 수련하되 자기를 부인하고 또 부인하여 내면에서 이미 내 안에 내재해 있던 신과 조우하여 일체가 되도록 하라 - 기독교 신앙과 비슷하지 않는가?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이슬람 신비주의가 기독교와 이슬람이 화해하는 가교가 돼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기독교와 이슬람 신비주의는 출발점, 즉 근본이 다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일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 교제하는 것이다. 교제를 통해 우리는 그 분을 알아가고 알아갈수록 기꺼운 순종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또한 끊임없는 자기 부인으로 신과 일체가 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자기 구원을 자기 스스로 이룬다는 뜻인데 인간은 자기 구원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존재임을 기독교는 분명히 하고 있다.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반드시 필요하다.

요즘 동양 종교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기를 얻고 있다. 명상과 수련을 통한 정신적 안정과 신비로운 도약이 복잡한 현대사회에, 삭막한 기계문명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바야흐로 범신론적 영성이 약진하고 있다. 그러나 비슷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세계가 물질뿐인 것은 아닌 듯한데, 그렇다고 꼭 찍어 하나님, 예수님과 성령님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 거기에 찾아드는 것이 범신론이 아닐까? 또 다른 형태의 이슬람의 도약에 경각심을 가지고 대처해야 할 때인 듯하다.

<출처: 2007 사랑의교회 동역선교사 리포트 중심의 ‘무슬림을 위한 기도’>

[이슬람 이해하기 ④] 순니파와 시아파
[이슬람 이해하기 ③] 성경과 꾸란
[이슬람 이해하기 ②] ‘예수’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
[이슬람 이해하기 ①] ‘삼위일체’의 부정

[정성진] 정성진 biking11@newsmiss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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