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링의 글이다.
공자는 사람을 세 종류로 나눴다. ‘상지(上智)’가 한 쪽 끝이고, ‘하우(下愚)’가 다른 쪽 끝을 이룬다. ‘중인(中人)’이 이 둘 사이에 끼어 있다. 그의 스스로에 대한 평가는 그리 높지 않았다. 그는 “남들과 같다”고, 다시 말해 자신은 보통 사람이라고 말했다.
공자는 지(知)와 지(智)를 강조했는데, 이는 중인을 겨냥한 것이다. 중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주로 부귀한 이들과 빈천한 이들 사이에서 따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부유하고 귀한사람들도 아니고 배불리 먹지 못하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공자는 사람을 세 종류로 나눴다. ‘상지(上智)’가 한 쪽 끝이고, ‘하우(下愚)’가 다른 쪽 끝을 이룬다. ‘중인(中人)’이 이 둘 사이에 끼어 있다. 그의 스스로에 대한 평가는 그리 높지 않았다. 그는 “남들과 같다”고, 다시 말해 자신은 보통 사람이라고 말했다.
공자는 지(知)와 지(智)를 강조했는데, 이는 중인을 겨냥한 것이다. 중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주로 부귀한 이들과 빈천한 이들 사이에서 따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부유하고 귀한사람들도 아니고 배불리 먹지 못하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와 그의 학생들은 주로 이런 사람들이었으며 당시 가장 책읽기를 좋아했던 이들도 바로 그들이었다.
공자는 독서를 한 사람이되, 그 독서는 벼슬을 하기 위함이었다. 일생의 많은 시간을 길에서 보낸 그는 처량하게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그는 왜 길을 걸어다녔던 것일까? 그것은 벼슬을 하기 위한 여행, 즉 옛사람들이 말하던 ‘환유(宦游)’였다.
그는 농사는 지어봤댔자 배를 주릴 수밖에 없는데 비해 독서야말로 나라의 녹을 먹을 수 있게 한다고 보았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에는 나라의 녹을 먹는 것이 농사를 짓는 것에 비해 더 실속이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런 글들은 논어 속에서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
내가 논어를 읽을 때 나에게 주로 보인 것과는 다르다. 아마도 나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의 진화에 눈이 많이 갔었고, 그것은 알지도 못하면서 공자를 수구반동의 원조로 비난 배격했던데 대한 반성적 태도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리링의 글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실사구시적인 글로 보이지만, 한편 나에게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평가할 때 너무 가까이서 보는 것의 한 폐단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논어를 읽을 때 나에게 주로 보인 것과는 다르다. 아마도 나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의 진화에 눈이 많이 갔었고, 그것은 알지도 못하면서 공자를 수구반동의 원조로 비난 배격했던데 대한 반성적 태도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리링의 글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실사구시적인 글로 보이지만, 한편 나에게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평가할 때 너무 가까이서 보는 것의 한 폐단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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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時空을 포함) 보아야 보이는 것도 있다.
멀리서(時空을 포함) 보아야 보이는 것도 있다.
그러면서도 리링의 글은 나에게 양 극단 즉 배격과 찬탄을 넘어 공자를 만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런 글이나 전통적인 방식으로 유학을 공부하지 않고, 내 나름으로 공자의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정신’에 눈이 먼저 갔던 것이 공자를 만나게 한 인연이었다는 것이 고맙다. 그것이 Namgok Lee
t9S82770fog22ch ·
리링의 글이다.
공자는 사람을 세 종류로 나눴다. ‘상지(上智)’가 한 쪽 끝이고, ‘하우(下愚)’가 다른 쪽 끝을 이룬다. ‘중인(中人)’이 이 둘 사이에 끼어 있다. 그의 스스로에 대한 평가는 그리 높지 않았다. 그는 “남들과 같다”고, 다시 말해 자신은 보통 사람이라고 말했다.
공자는 지(知)와 지(智)를 강조했는데, 이는 중인을 겨냥한 것이다. 중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주로 부귀한 이들과 빈천한 이들 사이에서 따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부유하고 귀한사람들도 아니고 배불리 먹지 못하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와 그의 학생들은 주로 이런 사람들이었으며 당시 가장 책읽기를 좋아했던 이들도 바로 그들이었다.
공자는 독서를 한 사람이되, 그 독서는 벼슬을 하기 위함이었다. 일생의 많은 시간을 길에서 보낸 그는 처량하게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그는 왜 길을 걸어다녔던 것일까? 그것은 벼슬을 하기 위한 여행, 즉 옛사람들이 말하던 ‘환유(宦游)’였다.
그는 농사는 지어봤댔자 배를 주릴 수밖에 없는데 비해 독서야말로 나라의 녹을 먹을 수 있게 한다고 보았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에는 나라의 녹을 먹는 것이 농사를 짓는 것에 비해 더 실속이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런 글들은 논어 속에서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내가 논어를 읽을 때 나에게 주로 보인 것과는 다르다. 아마도 나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의 진화에 눈이 많이 갔었고, 그것은 알지도 못하면서 공자를 수구반동의 원조로 비난 배격했던데 대한 반성적 태도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리링의 글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실사구시적인 글로 보이지만, 한편 나에게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평가할 때 너무 가까이서 보는 것의 한 폐단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멀리서(時空을 포함) 보아야 보이는 것도 있다.
그러면서도 리링의 글은 나에게 양 극단 즉 배격과 찬탄을 넘어 공자를 만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런 글이나 전통적인 방식으로 유학을 공부하지 않고, 내 나름으로 공자의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정신’에 눈이 먼저 갔던 것이 공자를 만나게 한 인연이었다는 것이 고맙다. 그것이 장수 시절이었다.
만일 리링의 글을 먼저 읽었다면, 아마 논어를 더 이상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앗을 것 같다.
내 접근 방식이 유효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ㅎㅎ
‘제도와 사람’에 대해서도 양 방향의 구체적이고 치열한 접근을 통해 어떤 균형점 그것도 움직이는 균형점에 도달한다.
나는 젊어서 제도의 혁명을 추구했던 사람인데, 정신(사람)의 토대 없는 혁명의 실패를 통해서 ‘사람(정신)’의 중요성에 눈이 가게 되었다.
그런데 주로 정신을 이야기하던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뒤늦게 제도(구조)에 눈이 많이 간다.
다른 경로를 거치지만, 변혁과 전환이 요구되는 시기(특히 지금처럼 인류 존속 자체가 고도의 과학기술문명 속에서 물어지는)에는 결국 ‘종합혁명(인간, 사회, 문명)’으로 귀결하게 될 것이다.
요즘 일각에서 이야기되는 ‘개벽’ 운동도 이런 경로를 거쳐 ‘종합혁명’에 이르는 길로 보편화되는 길이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절이었다.===
만일 리링의 글을 먼저 읽었다면, 아마 논어를 더 이상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앗을 것 같다.
내 접근 방식이 유효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ㅎㅎ
‘제도와 사람’에 대해서도 양 방향의 구체적이고 치열한 접근을 통해 어떤 균형점 그것도 움직이는 균형점에 도달한다.
나는 젊어서 제도의 혁명을 추구했던 사람인데, 정신(사람)의 토대 없는 혁명의 실패를 통해서 ‘사람(정신)’의 중요성에 눈이 가게 되었다.
그런데 주로 정신을 이야기하던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뒤늦게 제도(구조)에 눈이 많이 간다.
다른 경로를 거치지만, 변혁과 전환이 요구되는 시기(특히 지금처럼 인류 존속 자체가 고도의 과학기술문명 속에서 물어지는)에는 결국 ‘종합혁명(인간, 사회, 문명)’으로 귀결하게 될 것이다.
요즘 일각에서 이야기되는 ‘개벽’ 운동도 이런 경로를 거쳐 ‘종합혁명’에 이르는 길로 보편화되는 길이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9You, 강길모 and 1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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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20419/45634361/1
사회주의자였던 내가, 공자의 ‘無知也’에 빠져 책까지 쓸 줄이야
입력 2012-04-19
사회주의자였던 내가, 공자의 ‘無知也’에 빠져 책까지 쓸 줄이야
입력 2012-04-19
■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 펴낸 이남곡 씨《 “저는 젊은 시절 사회주의자였습니다. 예순 살이 넘어 공자의 ‘논어’를 강의하고, 책을 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죠.”
16일 전북 장수군 번암면의 깊은 산골마을. 벚꽃, 살구꽃, 개나리, 목련, 진달래가 순서도 없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휴)을 펴낸 이남곡 씨(67)가 이곳에 정착한 것은 8년 전이다. 그의 집 뒤쪽 마당에는 장류사업을 하기 위해 그가 담가놓은 된장, 고추장 항아리가 따사로운 햇살을 받고 있었다. 》
16일 만난 전북 장수군 논실마을학교 이사장 이남곡 씨는 “기업인들이 공자와 같은 고전을 많이읽는다는데, 인간 중심의 가치를 내세우는 진보운동가들이야말로 논어를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농사를 짓는 이 씨가 담가놓은 고추장 된장 항아리들이 보인다.
장수=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저 앞에 보이는 게 대성산(大聖山)입니다. 큰 성인, 즉 공자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웃 ‘논곡(論谷) 마을’에서는 예전부터 사람들이 주경야독하면서 공자를 읽었다고 합니다. 제가 여기에 정착해서 논어를 강독하게 된 것도 인연인가 봅니다.”
이 씨는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상경해 경기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교사운동을 하다 1979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에 연루돼 4년간 복역했다. 1980년대 정토회 법륜 스님의 요청으로 불교사회연구소장을 지내고, 무소유를 표방한 경기 화성 ‘야마기시(山岸) 실현지’ 공동체에서 8년을 살았다. 2004년 아내와 함께 전북 장수에 정착한 뒤론 이웃 주민들과 ‘논어’를 강독하고, 논실마을학교 이사장으로 시골사람들에게 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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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는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상경해 경기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교사운동을 하다 1979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에 연루돼 4년간 복역했다. 1980년대 정토회 법륜 스님의 요청으로 불교사회연구소장을 지내고, 무소유를 표방한 경기 화성 ‘야마기시(山岸) 실현지’ 공동체에서 8년을 살았다. 2004년 아내와 함께 전북 장수에 정착한 뒤론 이웃 주민들과 ‘논어’를 강독하고, 논실마을학교 이사장으로 시골사람들에게 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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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논어를 읽기 시작했나요.
“농촌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장수, 전주, 익산 등지에서 귀농자들, 마을 주민들과 2년 동안 함께 읽으며 공부했죠. 처음엔 공자가 봉건제와 군주제, 가부장제의 옹호자라는 생각에서 막연한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논어를 다시 읽으면서 왜 그동안 공자 사상의 탁월함, 특히 인간 지성에 대한 태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렇게 비판했을까 하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그는 논어에서 가장 핵심적인 말로 ‘무적무막(無適無莫·군자에겐 옳다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다)’과 ‘무지야(無知也·나는 모른다)’라는 구절을 꼽았다.
“배우기를 즐기는 모습, 이것이 공자가 가진 최대의 매력입니다. 그런데 공자의 ‘호학(好學)’은 ‘나는 모른다’에서 출발해 ‘무엇이 진리인가’를 끊임없이 물어가는 과정입니다. 옳고 그름을 쉽게 단정하지 않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진리다’ ‘내 생각은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소통과 배움은 불가능합니다. 무지를 인정한다는 것은 먼저 자신의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여 무엇이 진리인가를 자유롭게 찾아갈 수 있는 첫 단계인 셈이죠.”
―공자와 다른 사상을 진보성 면에서 비교한다면….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이 공자에게 배우려는 것은 아집을 넘어 끝까지 진리를 탐구하려는 정신입니다. 반면 ‘완고한 이념체계’인 마르크스주의는 스스로 과학을 표방했지만 계급성과 당파성에 치우쳐 과학에서 멀어졌습니다. 이른바 ‘당의 무오류성’이란 말은 가장 완고한 종교임을 나타내죠. 북한에서는 개인숭배로 왜곡돼 마침내 3대 세습이라는 시대착오적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이 시대 가장 필요한 운동을 꼽는다면 무엇일까요.
“공자가 내세운 ‘정명(正名)’을 현대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시대정신의 구현을 위한 종합철학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과거의 좌우, 진보-보수 개념의 고정된 시각으로는 지금의 시대적 요구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기 힘듭니다. 이를 위해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인문(人文) 운동’입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꾸준히 지속되는 인문운동의 힘을 믿고 있습니다.”
▼이남곡 씨의 인생 역정▼
경기고 - 서울대 법학과 나와 남민전 사건으로 4년 복역
불교사회연구소장 지내다 무소유 공동체서 8년 생활
아내와 전북 장수에 정착해 장류사업하며 인문학 강좌
장수=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이남곡·서혜란 부부의 웰빙 이야기
기자명 육관응
입력 200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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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효식품은 몸에 유익합니다"
장수 번암에서 된장·간장·고추장 생산
물과 풍부한 일조량이 장맛에 영향
▲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도모하는 야마가시즘을 통해 공동체의 의미를 각인하게 되었다는 이남곡(사진 왼쪽)·서혜란 부부는 발효식품의 우수성을 강조했다.
평화가 깃든 '좋은마을'. 장수군 번암면 멍덕골에 늦가을이 찾아 들었다. 산세 좋은 이곳에서 6년째 귀농생활을 하고 있는 이남곡(65)·서혜란(58)부부. 젊은 시절 사회 변혁과 농촌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이 멍덕골에 정착한 후 처음 시작한 일은 장류 사업이다. 소통, 상생, 나눔을 공존하는 야마기시즘 실현지의 8년간 생활이 장류사업을 하는 밑바탕이 됐다.
현재 좋은마을대표로 있는 이남곡 선생이 마을 제일 위쪽에 들어선 장류가공 공장의 지형적 특징에 대해 설명했다. 한마디로 이곳이 발효조건이 좋다는 것이다. "저희들이 특별하게 한 것도 없는데 발효가 상당히 잘 돼요. 아마도 물이 좋고 좋은 원재료를 쓰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는 풍부한 일조량도 한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이 선생은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250여개의 항아리 중 된장과 간장이 담긴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특유의 구수한 향내가 풍겼다. 아마도 주변 자연환경과 장수지역에 나는 국산콩을 비롯 간수를 뺀 임자도 소금을 쓰는 요인도 있으리라.
"된장은 1년 묵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맛이 있다고 해요. 간장도 다른 집에 비해 적게 뺍니다. 그래야 맛에 차별이 생기죠." 지난해에는 11월에 수매한 40㎏ 콩 150가마를 전문공장으로 보내 메주를 위탁 생산하게 했지만 그 뒷일은 이들 부부가 마무리 짓는다. 콩 수매부터 장 담그기, 납품까지 1년 작업이다. 이를 통해 된장 항아리 75개와 간장 항아리 45개가 거의 동이 났을 정도다. 올해는 200가마를 준비하고 있다.
옆에서 남편 말을 귀담아 듣고 있던 서 씨도 한마디 거든다. 그녀는 실제 이곳 장류 가공공장의 대표다. 그의 말속에는 체험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러움이 있다.
"장 담그기는 음력 1월 보름 전후가 가장 좋습니다. 장맛이 자연스럽게 우러납니다. 이 시기가 계절의 전환점입니다. 며칠 사이로 기후와 땅 기운이 다르다는 것을 느껴요."
그녀는 청국장 띄우는 법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담양에서 구입한 대소쿠리에 짚을 넣고 옛날 전통방식으로 띄운다. 1번 생산량은 3가마 120㎏이다.
"본격적으로 청국장을 하다 보니 찾는 분들이 많아요. 청국장은 10월쯤 시작됩니다. 소쿠리에 이불을 씌워서 만들고 있어요. 1주일에 1번 정도 띄우는데 7∼8월을 피하고 있습니다. 한 여름 띄운 것은 쓴맛이 비칩니다."
이곳에서 생산되고 있는 고추장에 대해서는 이 선생이 설명했다. 보리·오미자·찹쌀·사과고추장 생산에 대해서다. 보리고추장의 경우 보리쌀을 쪄서 삭이고, 찹쌀고추장 역시 마찬가지란다. 오미자고추장의 경우 찹쌀과 오미자 엑기스를 주 원료로 하고 사과 고추장은 찹쌀고추장에 사과 시럽을 넣는 점을 덧붙였다. 이 모든 것에는 청국장 가루가 포함된다는 사실도 밝혔다. 그는 "고추장은 종합식품이다"는 부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들어 놓으면 주문이 막 들어 옵니다. 1주일에 한번씩 두레생협연합과 한국여성 민우회생협에 택배로 보내죠. 최대한 항아리에 있게 하는 것은 맛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보리고추장은 단골이 많이 생겼습니다. 주문량에 따라 사업을 하다 보니 수요량이 늘어났어요."
그러나 이들 부부는 서로를 쳐다보고 웃음만 짓는다. 무리하게 판로를 늘리는 것은 지양하겠다는 뜻이다.
▲ 맛있게 숙성된 된장은 불티나게 팔린다.
마침 고추장을 항아리에 담고 있던 좋은 마을 귀농 5년차인 전용우(53)씨와 귀농 10년차인 최석민(50)씨도 웃음을 머금는다. 그만큼 이들 부부의 마음씀이 편안하다는 것일게다.
잠시 산천을 구경하던 서씨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된장, 간장, 고추장, 청국장 등 장류사업에 대해 자신있게 말했다. 주위 많은 사람들의 걱정을 기쁨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랜 세월동안 장류가 밥상에 계속 올라오는 것에 호감을 가졌다. 발효식품인 관계로 소비도 계속 될수 있다고 판단했다.
"장류사업을 하길 잘했어요, 푸대접을 받은 일이 없습니다.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권할 수 있잖아요,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발효식품만으로도 소박한 밥상을 꾸밀 수 있습니다. 가짓수가 많지 않더라도 몸에 유익합니다. 선조들이 밥과 장류만 먹고 살았어도 건강을 유지하고 농사일을 했던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의 말은 집 거실에서 그대로 증명됐다.
점심공양으로 내어 놓은 김치, 찌개, 마늘장아찌 속에서도 자연스런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한마디로 보석밥상이었다.
육관응 yuk@wonnews.co.kr
http://www.w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1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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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마을’대표 이남곡 서혜란 부부
승인 2008.11.22 12:01
호수 152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나란히 옥살이를 했던 이남곡.서혜란 부부. 당대 최고의 ‘엘리트 부부’로서 사회개혁과 농민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전북 장수의 ‘좋은 마을’에서 ‘둘도 없는 도반’이 되어 자연과 더불어 새로운 꿈을 지피고 있다.
“佛心 버팀목 삼아 행복한 세상 만들 겁니다”
사회 변혁 꿈꾸던 부부, 야마기시즘 실현위해 정진
전북 장수서 새삶…“생명 넘치는 행복공동체 꿈꿔”
때는 1979년 가을 서슬퍼런 유신시절. 6.25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연북지하조직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이하 남민전)서 활동한 부부는, 생후 6개월 된 갓난 아들을 남겨두고 철창에 갇혔다. 하루아침에 아들과 며느리를 빼앗긴 어머니는 홀로 남은 손자를 업고 무작정 집 근처 사찰을 찾아갔다. 당시 천막법당에 부처님을 모셨던 부천 석왕사는 가난과 공포에 떨고 있는 한 할머니를 따뜻하게 맞아줬다. 이남곡(66) 서혜란(56) 부부의 삶은 여기서 출발한다.
“어머님은 전쟁통에 아버님과 시동생을 잃고 오로지 남은 자식들 먹여 키우기 위해 사셨어요. 그 옛날 제 남편이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하늘을 얻은 듯 좋았고, 서울대 법대 들어가서 사법고시 자격시험에 덜컥 붙었을 때 세상이 다 당신 것인 양 행복하셨대요. 그러면서 ‘그 뒤부터 삐그러졌다’고 말씀해요…” 승승장구할 것만 같은 아들의 삶이 언제부턴가 더디고 굽어지고 있음을 느낀 어머니의 ‘삐그러졌다’는 말뜻을 알 것도 같다.
남편을 만나서 고생을 자초한 건 부인도 마찬가지. 경남 거창의 부잣집 외동딸로 태어나, 여성 엘리트계 산실과도 같은 이화여대서 역사학을 전공한 그녀는, 공동체적 삶, 혁명을 넘어 개벽을 지향하는 남편의 꿈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
잠시나마 남민전 활동을 했던 전력으로 남편과 나란히 형무소에 갇혔지만 그 역시 그녀에겐 후회와 고통의 시간만은 아니었다. “6개월만에 남편을 두고 저 혼자 석방됐지요.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했기에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서 친정집 근처에 양품점을 차렸답니다. ‘여자는 공부 잘해도 소용없다’ ‘저 집 딸 봐라’ 동네사람들이 수군대도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내 삶은 내가 선택했기에 책임지고 또 짊어지고 살아야 하니까요.”
경기고에 합격한 1960년 봄. 처음 서울땅을 밟은 이남곡씨는 당시 4.19를 온몸으로 겪었다. “그 시절엔 4월1일이 입학식이었지요. 학교 들어간 지 얼마지 않아 4.19가 일어나는 바람에 유일하게 알고있던 길(광화문~안국동)이 막혀 그날 무척 고생했던 기억이 나요.” 4.19혁명은 그가 시대에 눈 뜬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훗날 대학에 가서도 사회적 부자유와 불평등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마르크스의 사상에 심취한 인연이 됐다. 급기야 1964년 한일회담의 반대서열에 앞장서고 지하운동에 가담하기에 이르렀다.
남모르게 혁명을 꿈꿨던 그가 다시 지상으로 올라온 이유 중 하나는 ‘불교’에 있었다. 당시 서울대 법대불교학생회에 가담해서 종교와 과학을 화두삼아 불교의 진정성을 탐구한 그다. 대학동기 중 출가한 휴암스님과의 인연도 작용했다.
그가 4년(1979~1983)이란 짧지 않은 복역생활을 끝내고 세상의 빛을 본 첫날, 휴암스님이 머물던 영천 은해사의 한 암자에서 사회구조와 더불어 인간의식 전환을 위한 ‘개벽’에 착안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정토회 법륜스님이 이끈 불교사연구소에서 새로운 인간과 사회, 새로운 문명을 고민하고 설계하기도 했다. “20세기가 낡은 집을 허무는 것을 주된 테마로 했다면 21세기는 새로운 집을 짓는 것이 핵심입니다. 억압과 착취, 빈곤의 긴 터널로부터 인류를 해방하는데 큰 획을 그은 지난날을 버팀목 삼아 이제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사회로 가야합니다.”
‘자유롭고 행복한 사회’로 가기 위해 그는 안간힘을 썼다. 대안은 농촌운동. 교사자격증을 따서 농촌지역 학교에서 신바람나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반공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교사들을 계도했다. 농업근대화연구회, 푸른들신용협동조합 등 여러 농촌운동단체와 손을 맞잡고 농촌변화의 필요성을 외쳤다. 농촌사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해야 총체적인 사회변혁이 실현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 즈음 무아집 무소유 일체의 이념으로 집약되는 ‘야마기시즘’을 만났다. 야마기시즘 특별강습연찬회에 참여한 인연으로 8년여간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야마기시(山岸) 실현지’에서 새 삶을 꾸렸다. 소통의 방식(연찬)과 상생(무아집)과 나눔(무소유)이 공존하는 야마기시는 이들 부부와 더불어 두 아들과 고령의 어머니에게도 활력을 불어넣었다. “당시 화성의 야마기시 실현지에 살 때, 석왕사 주지 영담스님께서 몸소 찾아주셨어요. 석왕사 유치원을 나온 두 아들은 청년이 다됐지만 어려웠던 시절에 만나셨던 스님과 어머님의 인연은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고단했던 삶 속에서 절망과 아픔에 스러져갈 때, 스님께서 우리 가족에 베풀어주신 자비와 사랑은 잊을 수 없지요.”
서혜란씨는 한때 불치병에 걸려 생을 장담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갔었다. 이들 부부가 지난 2004년 화성을 떠나 전북 장수에 새 터를 닦아 둥지를 틀었던 이유도 그녀의 요양과 치유를 위한 방편이었다.
웬일인지 장수에 정착한지 얼마지 않아 병마는 기적처럼 사라졌다. 칠흑같은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그녀는 정성과 사랑, 감사를 오롯이 담아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된장과 고추장, 간장과 장아찌 등 맛깔스런 음식을 빚어냈다. 일주일에 한번씩은 마을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논어를 ‘연찬’하고, 일상을 공유하고 내일의 흐름과 삶의 방향을 점검한다. 평생 한몸이 되어 울고 웃으며 새로운 꿈을 지피며 사는 이남곡 서혜란 부부. 이들과 같은 도반이 세상에 어디 또 있으랴.
이들 부부가 지향하는 공동체
품앗이가 아닌 ‘즐거운 노동’되게 해야
“의기투합해서 어렵게 만들어진 공동체가 왜 깨질까요? 단순해지려고 자연으로 돌아와 서로 내가 더 단순하다고 경쟁합니다. 누가 더 생태적인가 비교하기 시작하면 그 공동체는 무너지기 마련입니다.(이남곡)” 지난 1996년 경기도 화성에서 첫 귀농생활을 한 이들 부부는 8년만에 전북 장수에 새 터를 마련했다.
공동체 이름은 ‘좋은 마을’. 현재 세 가구가 살고 있고 내년에 두 집이 더 늘어난다. “우리가 이 작은 골짜기에서 ‘작은 마을’을 만들어가려는 것은 세상의 큰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고 이웃마을과도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까, 힘과 지혜를 모아 검토하고 실천하는 장입니다.(이남곡)”
첫 조건은 서로 다른 사람을 침범하지 않도록 선을 정하는 것. 적절한 간격이 서로를 존중하고 발전시키는 약이 된다는 설명이다. “독립된 단위세포가 모여야 원만한 생명력을 갖추는 법입니다. 공동체라고 해서 모든 울타리를 걷어내고 알게모르게 희생을 강요하면 생명력 있는 집단으로 승화시키기 어렵지 않을까요?(서혜란)”
마을 성원들이 생활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물질이 보장되는 요건도 중요하다. 거래로서의 품앗이가 아닌, 자유노동에 준한 즐거운 노동의 필요성도 제기했다. 개인의 자율성과 공동체적 협동이 조화를 이루는 마을을 말한다. 이남곡씨는 마지막으로 “자본주의 이후에 도래하는 무소유의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수=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불교신문 2479호/ 11월26일자]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2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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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투합해서 어렵게 만들어진 공동체가 왜 깨질까요? 단순해지려고 자연으로 돌아와 서로 내가 더 단순하다고 경쟁합니다. 누가 더 생태적인가 비교하기 시작하면 그 공동체는 무너지기 마련입니다.(이남곡)” 지난 1996년 경기도 화성에서 첫 귀농생활을 한 이들 부부는 8년만에 전북 장수에 새 터를 마련했다.
공동체 이름은 ‘좋은 마을’. 현재 세 가구가 살고 있고 내년에 두 집이 더 늘어난다. “우리가 이 작은 골짜기에서 ‘작은 마을’을 만들어가려는 것은 세상의 큰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고 이웃마을과도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까, 힘과 지혜를 모아 검토하고 실천하는 장입니다.(이남곡)”
첫 조건은 서로 다른 사람을 침범하지 않도록 선을 정하는 것. 적절한 간격이 서로를 존중하고 발전시키는 약이 된다는 설명이다. “독립된 단위세포가 모여야 원만한 생명력을 갖추는 법입니다. 공동체라고 해서 모든 울타리를 걷어내고 알게모르게 희생을 강요하면 생명력 있는 집단으로 승화시키기 어렵지 않을까요?(서혜란)”
마을 성원들이 생활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물질이 보장되는 요건도 중요하다. 거래로서의 품앗이가 아닌, 자유노동에 준한 즐거운 노동의 필요성도 제기했다. 개인의 자율성과 공동체적 협동이 조화를 이루는 마을을 말한다. 이남곡씨는 마지막으로 “자본주의 이후에 도래하는 무소유의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수=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불교신문 2479호/ 11월26일자]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2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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