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다시 깨달음이다 | 오강남.성해영 | 알라딘종교, 다시 깨달음이다 - 탈종교와 AI 시대, 진정한 영성을 묻다
오강남,
성해영 (지은이)
김영사2026







































미리보기
책등 받기책소개
어제의 믿음을 해부해 내일의 영성을 내다보는 두 종교학자의 대담집. 비교종교학의 거장 오강남과 종교심리학의 대가 성해영이 만났다. 도발적일 만큼 통렬하게 기성 종교를 비판하면서도, 옛 성인이 깨닫고 주류 종교가 가르쳐온 지혜를 상찬하기를 잊지 않는다.
기독교, 불교, 힌두교, 유대교가 발견한 깨달음의 길은 서로 겹치며, 심지어 한국의 동학, 원불교 등에서도 명백히 이어진다. 마치 곁에서 이야기를 듣듯 두 학자가 짚어주는 구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현 시대의 과제와 마주친다. 더 이상 집단적 전통이 답이 되지 못하는 탈종교와 AI 시대, 불안과 공허 속에 갈급하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래서 다시, 깨달음이라는 구도와 구원의 끈을 살포시 쥐여준다.
목차
개정판 서문
초판 서문
스승과 제자로 만난 인연
1부 심층종교란 무엇인가
1 종교란 무엇인가
2 종교를 보는 새로운 시각, 표층종교와 심층종교
3 경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4 역사 속의 심층종교와 표층종교
5 심층종교와 신비주의
2부 심층종교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
6 여러 종교의 신비주의
7 깨달음으로 가는 길
8 심층으로 들어가기
9 심층종교의 경전 해석
10 한국의 심층종교
3부 깨달음의 종교는 어떤 모습인가
11 영성과 지성의 통합
12 전통 종교의 대안
13 심층종교에서 구원이란 무엇인가
14 종교 이해를 위한 종교학의 역할
4부 AI 시대와 종교의 미래
15 현대 사회가 종교에 던지는 물음
16 미래 사회와 영성 그리고 종교
맺음말
접기

책속에서
P. 49 “아이들이 산타클로스가 온다고 믿는 것은 ‘자연스런 문자주의’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커서 부모가 선물을 넣는다는 사실을 뻔히 알게 된 후에도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이해관계 같은 여러 가지 불순한 목적으로 산타가 실제로 온다고 계속 주장하는 것은 ‘반동적인 문자주의’라는 겁니다. 제가 보건대, 아직까지 문자주의를 고집하고 있는 현대인 대부분은 후자에 해당하겠지요. 하늘나라가 저 파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아직도 하늘나라가 지구 위 하늘 어디에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접기

P. 105 “우리가 익히 아는 무언가를 비는 기도는 다른 말로 ‘청원 기도’인데요. 표층종교는 청원 기도가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기도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특히 관상 기도와 같은 명상 기도, 류영모나 함석헌 선생이 했다고 하는 ‘참선 기도’는 심층종교에서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동방교회에서 실천하는 ‘예수 기도’나 불교의 염불 수행 같은 것도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서 의식을 변화시킨다는 의미에서 명상입니다.” 접기

P. 121 “불교에서도 부처님이 내 앞에 나타나 진리를 설한다 해도, 깨침을 얻는다는 나의 궁극 목표를 망각한 채 거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수행 과정에서 획득하는 초능력에 경도되면 끝장이라고 말합니다. 샤먼 역시 자신의 능력을 악용해 혹세무민하거나 돈벌이에만 급급하면 나쁜 샤먼이 됩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멈추지 않고 수행을 지속해나가면 참된 길을 걸을 수 있겠지요. 진정한 수행자는 궁극적인 지점까지 계속 나아갑니다. 예수님 역시 치유의 능력이 있었음에도 그 힘의 사용을 최소한으로 제한했습니다.” 접기

P. 152 “지성이 끝까지 가면 지성 자체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즉, 지성이 갈 수 있는 최고점에서 그 한계를 깨닫는 것이지요. 선불교에서는 ‘한 손으로 치는 손뼉 소리’라는 화두를 놓고, “한 손으로 치는 소리의 색깔이 뭐냐?” “그 부피가 얼마냐?” 등 엉뚱한 질문에 이성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대답하려다가, 그 답을 못 찾고 지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탁 놓을 때 영적 눈이 탁 트여 이른바 깨침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지성을 사용해보지도 않고, 혹은 아예 지성을 포기한 상태에서 영성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착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영성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접기

P. 170 “산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에베레스트에 올라가는 준비 과정을 포함해 올라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신이 나는 길일 겁니다. 이처럼 종교의 길은 희생의 길이 아니라 걸어가는 자체가 즐거움의 과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신나는 거예요. 무얼 꼭 하라고 명령을 받고, 안 하면 벌을 받게 될까 봐 노심초사하는 삶이 종교적 삶이라면 여기에 무슨 즐거움이 있겠어요? 종교적인 삶도 결국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무슨 일에서나 마찬가지로 종교적 삶도 신나야 합니다. “너 이거 안 하면 지옥 간다”고 하면 당연히 억압이고 고통이죠. 그러니까 심층종교는 종교를 ‘신나는 종교’로 되살리는 것입니다.” 접기

P. 224~225 “현대 사회가 개인에게 엄청난 자유를 부여했지만, 자유로 인한 선택의 중압감과 최근의 불확실성을 감당하지 못한 이들이 결국 정치적·종교적 극단주의로 발전한 것이겠지요. 동시에 극단주의는 외부에서 ‘미워할 대상’을 찾기 마련입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겪는 모든 문제가 특정 인종이나 계층 혹은 외국인들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혐오하고 배척함으로써 사회적 문제가 모두 해결된다고 설파합니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통해 삶의 확실한 기준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종교가 이런 경향을 한층 더 부채질하고 있고요.” 접기

추천글
“아름다운 노래 한 자락 가슴에 내려앉듯이
생명, 그 유구한 삶의 환희가 읽는 이의 마음 들판에 퍼진다.
이 책은 당신 안에 당신을 만든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비교종교학이라는 그림 조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 김창완 (가수, 작가)

“이 말 많고 수준 낮은 한국 종교계에 드디어 길을 밝혀주는 ‘지혜의 서’가 나왔다. 종교의 핵심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는 두 사람이 대담 형식으로 낸 책이다. 공전의 베스트셀러 《예수는 없다》의 저자인 오강남 교수와 한국종교학계에 혜성처럼 떠오른 성해영 교수가 쓴 이 책은 종교에 관한 모든 미혹을 한방에 날려 보낸다.”
- 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 인간의식연구센터 대표)

“이 책은 세계적으로 거의 유례가 없는 다종교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종교의 역할이 무엇이며, 개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너무 쉽게 이야기로 풀었다. 종교에 붙어 있는 다양한 껍질을 걷어내면 깨달음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고 얘기하는 저자들은, 독자들에게 표층종교에 머무르는 아이 같은 태도에서 벗어나 심층으로 들어가 함께 영성 키우기를 권한다. 깨달음이라는 다리를 통해 종교가 서로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새겨볼 수 있는 소중한 책이다.”
- 정정숙 (천도교 중앙총부 교화관장)

“다종교 사회의 종교 간의 갈등, 교단 안의 알력과 투쟁 등 세속인들이 오히려 성직자들을 걱정하고 선도해야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이런 혼돈의 시대에 새로운 빛과 희망을 주는 심층종교를 다룬 책이 나와 퍽 다행스럽다. 공유할 수 있는 진리 추구에 몰두하면서도 자기 신앙에 철저한 확신과 깨달음을 강조하는 심층종교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에 깊은 공감을 갖게 된다.”
- 미산 (중앙승가대학교 교수, 서울 상도선원 선원장)

저자 및 역자소개
오강남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한국을 대표하는 비교종교학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도교, 힌두교 등 세계 각 종교를 섭렵하고 종교의 참된 의미를 찾는 일에 천착해온 비교종교학계의 석학.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10년 동안 기독교를 중심으로 종교학을 공부했고, 비교종교학이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1970년대에 캐나다로 건너가 동서 종교와 철학에 몰두하면서 종교에 대한 관점에 획기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화엄華嚴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노장사상을 풀이한 《도덕... 더보기

최근작 :
<종교, 다시 깨달음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오강남의 시선> … 총 79종
(모두보기)인터뷰 :
예수는 없지만 예수는 있다 - 2002.12.03
성해영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와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라이스대학교에서 플로티노스의 종교 체험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된 연구 분야는 종교심리학과 신비주의이며, 특히 종교 체험과 종교 사상의 상호 관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종교심리학과 신비주의의 관점에서 미래의 종교성을 다룬 《종교 이후의 종교: 내 안의 엑스터시를 찾아서》, 주요 종교의 역사와 교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종교학 강의》가 있다. 그 외에 《다시 이어지다: 궁극의 욕망을 찾아서》 《수행, 초탈인가 치유인가》 《디지털 시대, 인문학의 미래를 말하다》 등을 공저하고 《문명 속의 불만》 등을 옮겼다. 접기

최근작 :
<종교, 다시 깨달음이다>,
<종교학 강의>,
<수행, 초탈인가 치유인가> … 총 27종
(모두보기)출판사 소개
김영사 도서 모두보기 신간알림 신청

최근작 :
<[북토크] <내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권화운 북토크>,
<카이스트 미래전략 2027>,
<클루>등 총 1,905종
대표분야 : 요리만화 1위 (브랜드 지수 382,263점), 사회/역사/철학 1위 (브랜드 지수 793,985점), 과학 2위 (브랜드 지수 937,679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AI가 지성을 대체할수록 인간은 영성을 갈구한다!
종교의 현재를 진단하며 깨달음의 미래를 여는 두 석학의 대담
기성 종교가 기복과 맹신이라는 ‘표층’에 머무르며 현대인의 탈종교화를 자초하는 사이, 역설적이게도 물질적 풍요와 기술의 정점에 선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내면의 영성을 갈구하고 있다. 껍데기만 남은 형식적 믿음은 시대의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며, 오히려 존재의 근원을 향한 깊은 갈망만을 증폭시킬 뿐이다. 결국 종교의 ‘심층’ 차원과 맞닿을 때 성인과 선현들의 지혜는 비로소 AI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실존적 ‘깨달음’으로 치환될 수 있다. 고대 근동부터 현대 한국까지 시대와 공간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두 석학의 치열한 대담의 끝에서, 우리는 마침내 ‘신성한 사유’의 최전선과 마주하게 된다.
탈종교의 실체와 이면
우리나라에서 종교가 있다고 답한 사람은 40%이다. 종교가 있다고 답한 비율은 고령에선 높지만 나이가 어릴수록 낮아져. 20대에선 4명 중 3명이 종교가 없다고 한다. 젊은이들의 유입이 없으니 종교의 미래는 밝지 않다. 바야흐로 탈종교의 시대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철저한 무신론자이거나 유물론자인 것은 아니다. 무종교인 3명 중 1명 이상이 초월적 힘이나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고 말했다. 즉, 특정한 종교를 믿지 않을 뿐 초월적 세계나 영성에 대한 관심이 없다고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영성과 깨달음에 대한 욕구에 기존 종교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종교의 위기, 그리고 깨달음의 가능성
2010년대 초, 저자들은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에서 종교가 사람들에게서 멀어진 현상을 짚었다. 교세 과시에만 매달리면서 정작 종교의 본질인 ‘깨달음’을 잃어버린 탓이라는 게 두 종교학자의 진단이었다. 이른바 '표층종교'에 머물러버린 것이다. 그 빈자리를 채우려는 듯 뉴에이지, 명상, 마음챙김 같은 대안적 구도의 흐름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자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묻는다. 깨달음은 과연 기성 종교 밖에서만 찾아야 하는 것일까? 그들의 대답은 분명하다. 각 종교의 전통 안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깊은 깨달음의 가르침이 흐르고 있었으며, 한국의 종교 전통 역시 그 풍부한 유산에서 예외가 아니라고.
AI 시대, 더 깊어진 영적 목마름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 오히려 AI 시대를 맞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더욱 절박하게 떠오르고 있다. 종교는 더욱 극단화되어 사회 갈등을 부추기고, 젊은 세대는 종교로부터 등을 돌린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정신적 공허 속에서 영성을 갈망하는 욕구는 오히려 더 뚜렷하고 솔직하게 드러나고 있다. 명상 앱의 폭발적 성장, 마음챙김 열풍, 템플스테이의 인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세속화와 탈종교화의 물결이 거세질수록, 오히려 개인의 영적 탐구는 더 자유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두 저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배타적 근본주의에서 벗어나 각자의 영적 여정을 존중하고 지지하는 종교야말로 미래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하나의 예언처럼 읽힌다.
표층종교를 넘어, 깨달음의 종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을 비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다. 표층종교는 경전의 문자적 의미에만 집착하고, 모든 것을 ‘지금의 나’ ‘이기적인 나’를 중심으로 해석한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결국 ‘내가 잘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는다. 반면 예수, 붓다, 수운 같은 종교적 선각자들이 실제로 가르친 것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무지와 미망에서 비롯된 허상을 깨뜨리고, 날마다 더 깊고 높은 차원의 진실을 발견해 가도록 이끌었다. 종교의 본래 역할은 복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어나도록 돕는 것이었다.
깨달음의 개인화, 위기의 시대를 건너는 힘
제도와 형식에 갇힌 종교가 아니라, 개인의 내면을 깊이 두드리는 종교. 맹목적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가 아니라, 스스로 눈뜨도록 이끄는 종교가 필요하다. 앞으로는 개인이 특정 종교의 틀에 갇힐 필요도 없다는 것이 저자들의 제안이다. 심층종교적 차원에선 모든 종교가 통할 수 있듯이 개인도 자신에게 맞는 가르침과 수행법을 찾아 여러 종교를 탐색할 수 있다. 그 안에서 기성 종교가 쌓아온 지혜도 재발견되어 거듭날 수 있다. 저자들은 그것이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임을 지적한다. 방향을 잃은 시대일수록 깨달음이 답이다. 접기

공감순

종교에 대한 막연한 질문이 있던 분이라면 추천드려요. 저에게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홍연 2026-07-06 공감 (0)
댓글 (0)Thanks to
공감
===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 종교를 보는 새로운 시각, 심층종교에 대한 두 종교학자의 대담 검색
오강남,성해영 (지은이)북성재2011-05-06
공유하기
닫기
이전다음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 절판 확인일 : 2020-12-04
새상품 eBook 중고상품 (15)
책소개<예수는 없다>의 오강남 교수와 종교학자 성해영 교수의 유쾌한 대담집.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종교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미래의 종교는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지 모색하고, 우리 종교가 나아갈 길을 찾아보고자 이 책을 기획하고 출간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종교는 어떤 모습일까? 이 책에서 오강남, 성해영 두 종교학자는 과학적이며 세속적인 세계관을 그저 반대하는 종교보다는 인간의 영성, 나아가 인간성의 근본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시대의 갈등과 불화를 넘어서는 통합적인 종교가 꼭 필요하다고 피력한다. 특히 세속적인 세계관과 종교적 세계관, 나아가 종교적 세계관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건설적으로 통합하려 한다.
심층 차원의 종교가 보편적인 현상으로 부상할 때 우리 모두의 종교적 삶이 진실로 해방과 자유의 삶으로 바뀌고, 나아가 종교 간의 만남과 대화라든지, 환경문제, 인권문제 같은 데에서도 적극 협조하여 인류에 공헌하는 종교로 심화될 것이다. 심층적 차원의 깨달음이라고 해서 활연대오하는 일생일대의 큰 깨달음도 있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작은 깨달음도 매우 소중한 것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목차
프롤로그 | 대담을 시작하며 오강남 4
스승과 제자로 만난 인연 12
제1장 심층종교란 무엇인가
1. 심층 종교로 가는 길 27
진정한 종교를 찾아서 27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체험이다 31
2. 종교를 보는 새로운 시각, 표층종교와 심층종교 37
모든 종교에는 표층(表層)과 심층(深層)이 있다 37
3. 경전은 무엇인가? 47
문자주의, 근본주의, 원리주의를 뛰어넘다 47
종교의 심층은 서로 통한다 52
4. 역사 속의 심층종교와 표층종교 57
과학, 표층종교와 충돌하다 57
하나만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59
5. 심층종교와 신비주의 67
신비주의는 마술이 아니다 67
신비주의의 대가들 77
제2장 심층종교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
6. 여러 종교의 신비주의 87
신비주의는 어디에나 있다 87
동서양의 신비주의 91
종교적 상징과 신비주의 94
7. 깨달음으로 가는 길 97
신비적 합일체험 97
종교의 같음과 다름 101
깨달음과 윤리 104
깨달음과 이웃사랑 109
명상, 깨달음으로 가는 길 112
8. 심층으로 들어가기 119
종교체험과 의식변화 119
약물과 인간의 의식변형 체험 122
신비주의와 초능력 127
9. 심층종교의 경전해석 135
문자주의적 경전 읽기와 영지주의 135
왜 경전을 잘못 읽는가 139
10. 한국의 심층종교 143
대안종교로서의 동학 143
한국에서의 심층종교 148
다석 류영모의 심층종교 152
제3장 깨달음의 종교는 어떤 모습인가
11. 영성과 지성의 통합 159
열정과 이성 사이 159
12. 미래의 종교
뉴에이지, 어떻게 볼 것인가 167
심층종교에서 바라보는 종교의 참모습 174
환경과 여성 180
13. 심층종교에서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천국과 지옥 193
죽음은 마침표가 아닌 쉼표다 201
종교학과 심층종교의 의미 211
에필로그 | 대담을 마치면서 성해영 222
■ 읽을 거리 226
■ 찾아보기 249
접기
추천글
이 책은 세계적으로 거의 유례가 없는 다종교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종교의 역할이 무엇이며, 개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너무 쉽게 이야기로 풀었다.
종교에 붙어 있는 다양한 껍질을 걷어내면 깨달음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고 얘기하는 저자들은, 독자들에게 표층종교에 머무르는 아이 같은 태도에서 벗어나 심층으로 들어가 함께 영성을 키우기를 권한다. 깨달음이라는 다리를 통해 종교가 서로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새겨볼 수 있는 소중한 책이다.
- 정정숙 (천도교 중앙총부 교화관장)
다종교 사회의 종교 간의 갈등, 교단 안의 알력과 투쟁 등 세속인들이 오히려 성직자들을 걱정하고 선도해야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이런 혼돈의 시대에 새로운 빛과 희망을 주는 심층종교를 다룬 책이 나와 퍽 다행스럽다. 원숙한 원로 종교학자와 활력 넘치는 젊은 종교학자 간의 대담이 한 줄기 청량한 향을 피운 것처럼 맑고 향기롭다. 공유할 수 있는 진리 추구에 몰두하면서도 자기 신앙에 철저한 확신과 깨달음을 강조하는 심층종교에 대한 균형있는 시각에 깊은 공감을 갖게 된다. 진정한 심층 종교인은 활짝 열린 태도로 자기 변혁과 쇄신을 통해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도 함께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길 간절히 바라는 진취적인 분들이라 생각한다.
- 미산 (중앙승가대학교 교수, 서울 상도선원 선원장)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중앙일보
- 중앙일보 2012년 8월 3일자
저자 및 역자소개
오강남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한국을 대표하는 비교종교학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도교, 힌두교 등 세계 각 종교를 섭렵하고 종교의 참된 의미를 찾는 일에 천착해온 비교종교학계의 석학.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10년 동안 기독교를 중심으로 종교학을 공부했고, 비교종교학이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1970년대에 캐나다로 건너가 동서 종교와 철학에 몰두하면서 종교에 대한 관점에 획기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화엄華嚴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노장사상을 풀이한 《도덕... 더보기
최근작 : <종교, 다시 깨달음이다>,<종교란 무엇인가>,<오강남의 시선> … 총 79종 (모두보기)
인터뷰 : 예수는 없지만 예수는 있다 - 2002.12.03
성해영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와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라이스대학교에서 플로티노스의 종교 체험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된 연구 분야는 종교심리학과 신비주의이며, 특히 종교 체험과 종교 사상의 상호 관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종교심리학과 신비주의의 관점에서 미래의 종교성을 다룬 《종교 이후의 종교: 내 안의 엑스터시를 찾아서》, 주요 종교의 역사와 교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종교학 강의》가 있다. 그 외에 《다시 이어지다: 궁극의 욕망을 찾아서》 《수행, 초탈인가 치유인가》... 더보기
최근작 : <종교, 다시 깨달음이다>,<종교학 강의>,<수행, 초탈인가 치유인가> … 총 27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예수는 없다>의 오강남 교수 VS. 소장 종교학자 성해영 교수의 유쾌한 대담집
"한국종교 왜 이러나?" 걱정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다른 종교의 성전을 찾아가 땅밟기를 하고 기도를 하지 않나, 다른 종교의 성스러운 예식 중에 들어가 자기 종교 홍보물을 나눠주지 않나, 참으로 일부이지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현상들이 종종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다. 이런 현상들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다종교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웃고넘길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종교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미래의 종교는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지 모색하고, 우리 종교가 나아갈 길을 찾아보고자 이 책을 기획하고 출간하게 되었다.
심층종교란 무엇인가?
모든 종교에는 표층과 심층이 있다. 표층과 대비되는 심층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표층종교는 문자주의적이어서 문자의 표피적 뜻에 집착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지금의 나, 이기적인 나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결국 표층의 종교는 자신이 잘되기 위한 것이다.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까지도 포함된다. 문자주의의 예를 들자면, “야베스가 이스라엘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해 ‘지경을 넓히기 위해 ’봉은사 땅밟기’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심층종교는 문자를 넘어서 더 깊은 것을 찾으려 한다. 즉 글의 속내를 알아차리려는 것이다.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것을 알고 문자를 통해 문자가 가리키는 그 너머를 보려 한다. 더욱이 지금의 나에서 벗어나 참나, 큰나, 얼나로 부활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렇게 새롭게 된 참나, 얼나가 바로 내속에 계신 신성, 불성, 인성임을 깨닫는 것이다. 종교란 깨달음이라는 체험과 분리될 수 없고 , 나아가 신비주의라는 개념은 이러한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 다른 말로 신비적 합일에 기반한다고 요약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깨달음 체험에 뿌리를 둔 종교를 지칭하는 간단한 표현이 심층종교다.
우리에게 필요한 종교는 어떤 모습일까?
서양속담에 “목욕물은 버려도 아이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게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아이를 종교에 비유하자면 문자주의적 표층 밑에서 발견되는 심층종교다.
현대에는 과학적 합리주의에 충실한 <만들어진 신>의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나 밀스 같은 과학자들은 종교가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인위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며, 종교가 오히려 인간들의 삶을 훼손하고 평화적인 공존마저 가로막는 원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렸다. 그러나 반대편에 서 있는 문자 그대로의 믿음만을 강조하는 근본주의적 종교에서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종교가 약화되어서 발생한다고 하며, 종교적 교리에 충실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자고 한다. 무신론과 근본주의적 종교는 정반대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오강남, 성해영 두 종교학자는 과학적이며 세속적인 세계관을 그저 반대하는 종교보다는 인간의 영성, 나아가 인간성의 근본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시대의 갈등과 불화를 넘어서는 통합적인 종교가 꼭 필요하다고 피력한다. 특히 세속적인 세계관과 종교적 세계관, 나아가 종교적 세계관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건설적으로 통합하려 한다.
미래의 종교
이렇게 심층 차원의 종교가 보편적인 현상으로 부상할 때 우리 모두의 종교적 삶이 진실로 해방과 자유의 삶으로 바뀌고, 나아가 종교 간의 만남과 대화라든지, 환경문제, 인권문제 같은 데에서도 적극 협조하여 인류에 공헌하는 종교로 심화될 것이다. 심층적 차원의 깨달음이라고 해서 활연대오하는 일생일대의 큰 깨달음도 있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작은 깨달음도 매우 소중한 것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진정한 의미의 종교, 예수나 붓다, 수운과 같은 종교적 선각자들이 가르치는 종교는, 무지에서 생겨난 미망과 허상을 깨뜨리고 날마다 더 깊은, 더 높은 차원의 실상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타조처럼 머리를 쑤셔박고 현실을 도외시함으로써 헛된 위안을 팔고 다니는 종교가 아니라, 독수리처럼 더욱 높이, 더욱 멀리 봄으로써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진정한 종교다.
접기
공감순
어렵다. 전공자를 위한 책. 구매
rosaleon 2011-06-27 공감 (0) 댓글 (0)
Thanks to
공감
마이리뷰 리뷰, 100자평 운영 정책
구매자 (3)
전체 (13)
리뷰쓰기
공감순
깨달음과 종교 새창으로 보기
장면 하나. 지하철 풍경
혼잡한 출근시간이었다. 늘 그렇듯 새벽까지 마신 술이 아직 덜 깬 상태였다. 손잡이에 몸을 기대고 멍하니 광고판을 쳐다보고 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저쪽 칸에서 이쪽 칸으로 건너오신다. 손에는 공손하게 성경책을 받쳐 들고 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확 짜증이 올라왔다. 분명히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설파할 모양새다. 아니나 다를까 뭐라고 하는지 잘 알아듣지도 못할 정도로 중얼중얼 거리며 열심히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이럴 땐 음악이라도 들으면서 귀를 막아 버려야 맘이 편한 법인데, 젠장 오늘따라 엠피쓰리를 놓고 나왔다. 할아버지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니 참 구경거리도 이런 구경거리가 따로 없다.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한 젊은 여성의 무릎을 건드리는 통에, 그 여성이 눈을 뜨고, 짜증 섞인 표정으로 째려봤는데, 할아버지는 오히려 혀를 차면서 자기 얘길 들으라고 한다. 그 여성이 뭐라고 하려다가 그냥 참고 다시 눈을 감아버리자, 이번에는 그 옆에 앉은 학생으로 보이는 남성에게 말을 붙인다. 그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뭔가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포기하지 않고, 책을 툭 쳐서 주의를 끈다. 그는 이어폰을 꽂은 상태 그대로 한번 째려보고는 다시 책으로 눈길을 준다. 할아버지 다시 혀를 끌끌 찬다.
그런 식으로 앉거나 선 사람들을 계속 건드리면서 다가온 할아버지가 마침내 바로 앞까지 접근했다. 나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 나를 건드리면 남은 평생을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어느새 술이 깨고, 정신이 번쩍 든 느낌이다. 투지를 불태우고 있는데, 이 할아버지 나는 건드리지도 않고 그냥 지나친다. 어라! 이거 뭐야! 이러면 재미없는데....... 나만 지나친 게 아니라, 조금 덩치가 큰 아저씨도 그냥 지나친다. 이제 보니 이 할아버지 만만한 여성이나, 어려보이는(학생처럼 보이는) 사람들만 건드리는 것이었다. 다시 몇 명의 여성들을 더 건드린 할아버지는 다음 칸으로 넘어가버렸다.
장면 둘. 친한 친구들
어려서부터 주위에 교회에 다니는 친구나 동생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경우 부모님 손에 이끌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게 된 사람들(이런 걸 모태신앙이라고 한다는 얘길 들었다.)이 많았다. 나도 그런 친구들 덕분에 여러 교회를 구경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교회를 자주 놀러가도 신의 존재를 믿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목사님의 설교나 나를 설득시키려는 어른들의 태도 때문에 더더욱 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의심스러운 이야기만 들려주는 곳이 바로 교회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고등학교 때였다. 정말 친하게 지냈던 한 친구와 독서실에서 밤새 종교에 대한 토론을 했다. 그 친구는 내가 교회에 다녀서 주님의 선한 양이 되기를 바랬고, 나는 그 친구가 교회라는 허황된 집단에서 벗어나 참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했다. 나는 신의 존재를 믿은 적은 없지만, 친구들을 따라서 교회는 열심히 들락거렸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 주워들은 이야기가 많았다. 성경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둘의 대화는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마침내 밤을 꼴딱 새우고 아침을 맞았을 때, 우리는 서로를 설득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그렇게 친했던 친구가 그날 이후로 멀어졌다.
그 후로도 여러 번 그런 일이 있었다. 이상하게 조금 친해지고 나면 교회에 데려가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았다. 나중에는 교회에 열심히 따라다니곤 했다. 교회에 가서 기타도 치고, 축구도 하고, 연극도 하고, 여학생들도 만났다. 자주 따라가다 보면 세례나 침례를 받기를 강요하는데, 그때쯤 되어서 발길을 끊어버리곤 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친구와의 관계도 끊어지곤 했다. 이 책을 읽으며 그렇게 나를 스쳐갔던 여러 명의 친구들이 떠오른다.
장면 셋. 아내와의 대화
지금은 아내와 그런 대화를 일부러라도 잘 안하지만, 초기에는 종교에 대한 대화를 자주 나누곤 했다. 처가 식구들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주말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에 가야하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내야 한다. 아내는 기독교를 무척 싫어하고, 정확히 불교를 믿는 건 아니지만, 불교에 가까운 어떤 신앙을 믿는다. 한때 인도에서 전해져 온 명상을 열심히 했던 영향인 것 같다. 어쨌든 아내는 무언가 믿는다. 나는 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다고 본다. 신을 믿지 않으므로 종교라는 것을 가질 수 없다.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 낸 하나의 지배 수단이라고 본다. 아내와 부딪힌 건 바로 이 지점이다. 간단히 서로의 입장만 확인했다면 좋았을 텐데, 고등학교 때 친구와 밤새 토론했던 날 못지않게 열을 올리며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서로 감정이 상할 때까지 자기주장만 우기다가 결론도 내지 못하고 그냥 이야기는 끊겼다.
결론. 깨달음
환경운동을 하면서 큰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늘 종교인들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새만금 때는 4대 종단(천주교, 불교, 기독교, 원불교)의 수경스님, 문규현 신부님 등 큰 스승님들께서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3보1배를 했다. 지율 스님은 목숨을 건 단식을 여러 차례 해왔고, 도법스님께서는 ‘생명평화결사단’을 만들어 전국 방방곡곡을 걸었다. 평택과 용산에서는 문정현 신부님께서 늘 함께 계셨다. 환경단체에 들어오기 전까지 나는 종교가 쓸모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아니 오히려 자본과 권력에 결탁하여 지배 구조를 더 견고하게 하는 장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앞장서서 행동하는 큰 스승님들을 가까이서 보면서 점점 생각이 바뀌었다. 물론 지금도 그 분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분들의 숭고한 정신이 종교적인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책 덕분에 다시 한 번 더 깨달았다. 무교 혹은 무신론자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큰 편견이자, 근본주의자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도 종교를 가질 생각은 없지만, 존경할만한 종교인들에 대해서는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는 종교라는 것에 아예 관심이 없었지만, 한국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에 대해 좀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몇 가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들을 잘 짚어주었다. 대화 형식이라 술술 잘 읽히는 것도 장점이다. 읽다 말고 한동안 미뤄두고 있었던 오강남 선생의 <세계 종교 둘러보기>도 마저 읽어야겠다.
- 접기
감은빛 2011-06-22 공감(21) 댓글(11)
Thanks to
공감
이 책은 나에게 있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았다. 새창으로 보기
이 책을 읽으며서 밑줄을 긋지 않는 페이지가 거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읽었다. 그만큼 공감도 하고, 마음은 후련하며, 정신은 점점 맑아자는 느낌이었다.
요즘 부쩍 많이 느끼는 거지만, 무지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니겠다 싶다. 무지야 깨치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조금 알게된 것이 더 큰 문제다. 조금 알면 더 이상의 넓이와 깊이로 나가지 않으며, 그 조금 알게된 것 가지고 아는 척을 한다. 그래서 문제다. 그래서 또한 인간은 편견의 존재다. 요즘 나는, 내가 얼마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존잰지 깨달을 때마다, 내가 나한테 속고 있다는 걸 절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역시 그런 나와 자주 자주 마주치곤 했다.
솔직히 이 책은 나에게 있어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오강남. 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그가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라는 건 알겠는데, 예전부터 그가 펴낸 책들의 제목이 꽤나 도발적이고 수상한 느낌이었다. 난 그렇게 처음부터 깨끗한 느낌을 갖지 못하는 책들은 아예 마음을 두지 않았다. 괜히 복잡하고 흔들릴 것 같아 싫었던 것이다. 교회 어느 목사가 그의 책을 언급했다면 사 볼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니고. 이게 아니어도 난 관심을 가져야할 분야도 많고, 읽을 책도 많은데 뭐 이런에 까지 마음을 두나 생각을 덮어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읽고난 지금, 진작에 알지 못했던 것이 아쉬울 정도다.
책은 오강남, 성해영이란 두 종교학자가 간의 대담집이다. 무엇보다 성해영 씨는 오강남 교수의 제자였다고 한다. 잘 키운 제자 하나 열 제자 부럽지 않다고, 오강남 교수 시종 대담에 임하면서 흐뭇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언뜻 스치기도 했다.
그들은 먼저 표층종교가 무엇이고, 심층종교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들어간다. 나중에 책을 보면 알겠지만, 한마디로 표층종교는 이제까지 우리가 종교를 갖는 표면적인 이유들, 이를테면 병고침 받고, 잘 살고, 마음에 평안을 얻는 등의 기복적인 류의 것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러나 심층종교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좀 더 깊이있게, 신의 뜻을 알고, 나와 우주삼라만상의 깊은 뜻을 알게되고 그래서 깨달음을 얻는 그런 것이라고 하면 맞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데 읽다보니, 우리나라 타종교는 몰라도 기독교는 이 두 사람이 말하는 표층종교 그것에서 어쩌면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을까? 놀라울 지경이었다. 더구나 내가 다녔던 학교는 정통 보수 신학을 가르쳤던 학교로서, 그맘도 20 몇년 전을 헤아린다. 나는 그때 배우기를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은 이단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보수 신학 계열에서는 환영 받지 못하는 분야였다. 또한 여성신학은 태동기였거나, 아직 태동하기도 전이었다. 그러니 신학이란 학문을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기는 쉽지 않았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 또는 여성신학이 생길 수 밖에 없는 배경을 알게 되었을 때, 어쩌면 내가 배웠던 신학은 서양의 백인 신학은 아니었을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지금은 이런 분야의 신학을 어떻게 강의하고 있을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학문도 시대마다 그 조류를 달리하는 것처럼, 신학도 그렇지 않을까? 지금은 이들 분야을 조금이라도 우호적으로 가르치고, 배우지 않을까?
아무튼 왜 한국의 기독교는 표층종교, 그 이상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현재 다니고 있는 교회도 보수적인 교회이고 보면,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은 공부할 필요가 없는, 아니 하면 안 되는 분야로 치부되었고, 타종교에 대해서도 배타적인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기독교는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다. 그러다 보니 열혈 신도는 그 도를 넘어서 오히려 타종교를 핍박하는 것이 자기의 신앙에 대한 열정을 보이는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믿는 종교가 받는 것은 핍박이고, 내가 타종교를 핍박하면 그건 충성인 줄 착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기독교만 있어 온 것은 아니다. 조금씩 차이와 양상은 달라도 종교는 이러면서 그 명맥을 이어오고, 공존해 오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교회가 이럴수밖에 없는 건 꼭 유일신을 섬기는 그 정통 때문마는 아닐 것이다. 교회 역시도 보면, 형태는 조금씩 변해갔을지 몰라도 그 근본은 발전시키지 못했다. 난 그것이 신도들의 관리와 커뮤니케이션의 한도를 정하는 문제 때문은 아니었을까란 생각도 해 본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렸다는 것은 미리 정하므로 신도의 누수를 막고, 교회는 그야말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오는만큼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누릴 수 있는 포괄적인 은혜가 무엇인가를 상정하다 보니 기복, 즉 표층의 수준에서 머물렀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다 보니 성직자들의 타성과 나타함 역시 이에 한몫을 했을 것이다. 이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선교와 불우이웃 돕기 정도가 전부다. 그것도 좋은 눈으로 보면 좋은 것이긴 하지만, 그것만이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는 아니다.
교회에서 젊은이들이 떠나가고 있다. 신성한 절대권력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가 부동산 매매에 들어간다. 교회가 더 이상 사람의 삶에 어떠한 선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한창 배고픈 시절에 교회를 알았던 사람만이 교회의 그루터기로 남아 있다. 이 공동화 현상을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맴돌았던 생각들이다.
이제 교회가, 아니 종교가 사람의 생애 전반을 한층 성숙시키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간의 전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인간 전쟁의 거의 대부분은 종교 전쟁이라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종교우월주의와 아직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들의 믿는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성해영 씨는 말한다. 만약 종교가 갈등과 반목을 조장해 우리 삶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더 힘있게 삶을 꾸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라면 인간의 행복에 꼭 필요한 것(174p) 이라고.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고, 여전히 전쟁 같은 위협으로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게 무슨 종교라 말할 수 있겠는가? 자기네들이 믿는 종교가 그토록이나 귀하고, 선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젠 그것의 깊이와 넓이를 가르치고 인간 삶의 지평을 넓혀 가도록 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한 가지만 아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과 같다'고 말했던 사람은 독일의 시성 괴테가 한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은 거라고 말했던 건, 바로 이런 의미다. 나의 뿌리는 여전히 기독교인채, 특정한 종교적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의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찾아가는 과정(214p), 이것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람이 바로 이 책에 나오는 두 대담자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그것은 아직 교회가 해 줄 수 없는 부분이기에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을 말할 때 종교없이 말할 수 없고, 종교를 말할 때 역시 인간을 따로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 21세기를 전망할 때 그 어느 때보다 종교의 역할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늘날과 같은 물질만능주의에 종교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말하지 말자. 오히려 물질과 과학만능주의의 시대 일수록,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때 종교가 대안이 될수없다면 그 종교는 반드시 도태될 것이다.
이 책은 정말 책상 책꽂이에 꽂아두고 수시로 보고 싶은 책이다. 그리고 내가 당장 종교학을 정식으로 공부하지 않더라도, 이 책 뒤에 나와있는 부록의 읽을 거리를 참조하면서, 표층종교인에서 심층종교로의 이행을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강추다!
- 접기
stella.K 2011-06-08 공감(6) 댓글(4)
Thanks to
공감
장로가 대통령인 나라에 산다는 건… 새창으로 보기 구매
나 같은 사람도 이런 책을 읽게 한다. 때늦은 신정정치 체제에 살려니 적응하기가 만만치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거대한 종교시설만큼의 위세를 떨치고 있는 자들의 입심에서 나는 구취가 참을 수 없다. 유사상품이 상거래 질서를 어지럽힐 때 정품이 뭔지 알고 싶은 욕망 따위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절대 넘어가면 안될 보이싱 피싱 같은 침 튀듯 튀어나오는 구원과 자비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이 세계에 종교의 근본에 대한 설명은 현명한 소비자의 덕목처럼 다가온다. . 두 종교학자의 대담은 대단히 쉽게 쓰여져 있다. 다만 두 학자... + 더보기
라주미힌 2011-07-02 공감(3) 댓글(3)
Thanks to
공감
종교도 재미있는 분야구나! 새창으로 보기
얼마전에 학생 토론수업을 참관했는데 선생님께서 학부모도 참여하라며 종이를 주신다. 거기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여럿 있는데 지구가 멸망할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꼭 필요한 여섯 명을 고르란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골랐는데 거기에는 목사도 끼어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교회를 다니느냐? 그건 절대 아니다. 기본적으로 어딘가에 구속되는 것을 싫어하는지라 종교를 갖지 못한다. 그런데도 주저하지 않고 목사를 고른 이유는 사람이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종교란 상당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종교를 갖진 않았지만 종교의 긍정적 측면을 부정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인다. 게을러서 종교생활을 하지 못한다고. 일요일이나 휴일에 갑자기 어딘가로 떠나는 일이 많았던 지금까지의 생활을 고려하건대 종교가 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이다. 한때는 교회를 다녀보고자 비교적 큰 교회에 나갔으나 한 번 나가고 그만 두었다. 목회자의 경험과 철학이 묻어나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찾아간 것인데 계속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만 하고 영양가 있는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는 등 기대한 바와 너무 달라 그 후로 가지 않았다. 아마 지금 대개의 교회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 두 교수가 하는 말을 빌리자면 심층으로 들어가지 않고 표층에만 머무는 종교인 셈이다.
가장 관심 없는 분야 중 하나가 바로 종교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어떤 종교를 갖고 어떤 종교생활을 하든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면 아예 상관하지 않는다. 그래서 친한 친구라도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을 계기로 종교라는 것도 관심을 가질만한 분야라는 생각이 든다. 인류가 탄생하면서부터 종교를 가졌다고 할 수 있으니 인간과 종교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니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세계 자체를 이해하는데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솔직히 종교학이라는 분야는 특정 종교에 심취한 사람이 관심 갖는 분야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 않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심지어 충분히 매력적인 분야라는 생각까지 든다. 특히 비교종교학은 상당히 광범위한 분야를 아우르기 때문에 역사와 사물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상당히 높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내가 모르는 게 정말 많다는 생각이 든다.
특정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내가 보기에는 도대체 종교가 무엇이길래 그토록 오랜 세월 종교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때로는 갈등이 해소되는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냥 조금씩 상대방을 이해하면 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막상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가 보다. 이 책에서는 그런 원인이 각각의 종교가 표층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를 각각 가로로 잘랐을 때 각각의 종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보다 세로로 잘랐을 때 개별종교 안에서의 차이가 더 크다(53쪽)'는 오강남 교수의 말이 지금의 종교 문제를 아주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는 주로 기독교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며 종교의 본질에 대해 차근차근 이야기하기에 종교에 의미를 두지 않는 나조차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낀 책이다. 이 책을 읽고 종교의 기본에 대해 궁금해서 세계의 종교를 훑어주는 책을 읽고 있다. 이런 게 바로 책 읽기의 즐거움이 아닌가 싶다. 하나의 책으로 인해 새로운 분야에 관심을 갖고 좁고 편협한 생각을 조금씩 넓혀가는 것 말이다.
- 접기
봄햇살 2011-07-04 공감(2) 댓글(0)
Thanks to
공감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새창으로 보기
처음 이 책을 보았을때, 솔직히 종교에 관한 책이라는 점이 무척 부담 스러웠어요. 우리나라가 기독교 국가가 아니었는데, 어느순간 종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교회이고, 이제는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기분이 들어서 그다지 이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한 평이 좋고, 제가 좋아하는 분이 적극 권장하셔서 읽게 되었어요. 이 책을 읽고보니 제가 종교 특히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바로 표층적 종교관 때문인것 같습니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세계관이 확장되고 기존의 종교적 세계관이 균열되면서 비롯되는 믿음에 대한 불신등.. 지금 제가 겪고 있는 심경인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 교회를 다니시다보니 자연스럽게 저와 동생도 교회에 다니게 되었어요. 하지만 점점 클수록 저희 가족 중에 저만 교회에 좀 비협조적이었어요.^^;; 의무적으로 예배만 보고, 교회에 관련된 활동들은 잘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가끔은 교회 간다고 거짓말하고 다른곳으로 도망간적도 무수합니다. -.-;; 아마 아직도 엄마는 그런 저의 비행을 모르실겁니다. 절대 동생에게 엄마에게 이르지 말라고 용돈으로 회유를 했으니깐요.
암튼, 제 선택이 아닌 부모님의 선택으로 종교를 가지게 된것이 전 불만이었어요. 최근에 주디 블룸의 'Are you there God? It's me Margaret.'(마이 리틀 레드북을 통해 알게 된 책인데)을 읽었는데, 그 책에서도 유대교인 아버지와 기독교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마가렛이 부모의 종교적 갈등으로(부모님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결혼할때, 마가렛의 어머니는 부모님과 의절을 합니다.) 마거릿은 12살까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아, 오히려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긴했지만, 적어도 마거릿은 어릴적에 여러 종교들을 체험하며 자신이 선택할수 있는 점이 부럽더군요.
그래도 습관도 신앙인지 무언가 어려운일 있으면 자연스레 신을 찾게되는것 같습니다. 저는 기독교이지만, 신랑은 카톨릭이랍니다. 다행스러운것은 저희들 부모님들은 두 종교가 다르다 생각하지 않으시고, 저희가 어디로 가든지 크게 신경쓰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신랑을 데리고 교회를 갈때가 더 문제가 있긴했어요. 해외생활을 하다보면, 종교에 의지하기도 하는데, 솔직히 기독교인으로써 제가 챙피해서 신랑과 교회를 가다가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바로 배타적인 종교관 때문이지요. 타종교를 비판하려거든, 그 종교에 관해 정확히 알고 난후 비판하면 좋으련만,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잘못된 지식으로 자신만의 잣대를 재려는 사람들을 보고 좀 울적했었습니다. 종교란 양날의 칼과 같아서 잘 사용하면 아주 유용하지만, 자칫 잘못 사용하면 타인은 물론 자신까지 다칠수도 있습니다. 타종교의 가치를 함부로 평가하지 않고, 여러 종교의 전통을 공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해할수 있는 성숙한 종교인으로써의 자세가 필요한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종교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있어야한다고 하지만, 결국 그 무조건적인 믿음이 지금의 불신과 배타적인 종교관이 성립이 되는것 같습니다. 그런 종교적인 문제점을 이 책에서는 표층적인 종교관(무조건적인 믿음)에서 심층적 종교관(깨달음, 신비주의)를 통해 해결해야한다고 제시합니다. 대담집 형태는 처음 읽는데, 대담집이라 그런지 어려울것 같은 종교가 쉽고 흥미롭게 읽을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제가 가지고 있는 종교에 대한 흔들리는 마음을 이해해주고, 잘 다독여주는 책 같았어서 좋았습니다. 저도 남만을 탓할것이 아니라, 제 자신을 돌아보고 심층적 종교관을 따르도록 노력해야할것 같아요.
- 접기
보슬비 2011-06-08 공감(1) 댓글(0)
===
표층종교 vs. 심층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아편종교 vs. 해방종교냐가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비판하는 입장이 있다.
'표층-심층' 구도는 종교를 지나치게 내면적 깨달음이나 영성, 의식의 문제로 탈역사화(De-historicize)할 위험이 있다. 개인의 내면이 '심층'에 도달해 평화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가 속한 사회의 구조적 폭력과 억압을 외면한다면 그 심층 영성은 불의한 구조에 방조하고, 결국 역사적 고통을 잊게 만드는 고차원적인 '영적 아편'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종교의 참됨은 '내면의 깨달음(심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는 민중의 삶을 자유하게 하고 역사적 현장을 변화시키는 '해방적 실천'으로 입증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심층 없는 해방의 한계: 내면적 해방(심층)이 전제되지 않은 정치적 해방 운동은 또 다른 권력 투쟁으로 변질되거나, 새로운 독재와 억압 체제를 낳는 비극(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의 일부 과정처럼)을 반복하기 쉽다.
해방 없는 심층의 한계: 역사적 현장성을 상실한 심층은 지성인들의 사유 유희나 개인적 안식처로 사사화(私事化, Privatization)될 위험이 크다.
▸두 관점의 창조적 親合: '예언자적 심층'
동서양의 위대한 해방적 종교 운동가들은 언제나 '심층의 깨달음'이 '역사적 해방'의 에너지가 되었다. 예) 동학(東學)의 시천주(侍天主) 사상과 동학혁명, 마틴 루터 킹과 함석헌
종교의 근본 문제는 '표층인가 심층인가'라는 인식론적 지평과, '아편인가 해방인가'라는 역사·실천적 지평이 서로를 감시하고 견인하는 교차점에 있다. 심층으로 내려가지 않는 해방은 ‘타성에 젖은 이데올로기’가 되기 쉽고, 해방으로 피어나지 않는 심층은 ‘자기 만족적인 영적 도피’가 되기 때문이다
===
제시된 비판과 종합적 통찰은 종교철학과 사회철학이 만나는 가장 치열한 핵심을 정확하게 짚고 있다. 종교를 개인의 의식 변화로만 보는 <영성주의적 환원론>과 외적 제도 개혁으로만 보는 <정치주의적 환원론> 양쪽의 함정을 모두 극복하는 균형 잡힌 시각이다.
이에 대한 평론적 고찰은 다음과 같다.
종교학자 오강남 등이 대중화한 <표층 대 심층>의 구도는 교조주의와 문자주의, 기복 신앙에 매몰된 종교 지형을 비판하고 본질적 영성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이 구도는 필연적으로 탈역사화와 사사화(Privatization)라는 치명적인 한계를 내포한다. 자아의 내면적 평화와 우주적 일체감에만 몰두할 때, 종교는 고통받는 이웃과 구조적 악에 침묵하는 세련된 도피처로 전락한다. 칼 마르크스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규정한 것은 단지 미신적 신앙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고 체념을 내면화하는 모든 종교적 메커니즘을 꿰뚫어 본 통찰이었다.
반면 남미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이 강조한 <아편 대 해방> 구도는 종교를 역사와 현실의 고통 한가운데로 끌어내렸다. 그러나 내면의 변혁 없는 구조적 해방은 과거의 지배자를 끌어내린 자리에 또 다른 지배자를 세우는 권력 투쟁의 악순환을 낳기 십상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나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전체주의적 억압은 심층적 자기 비움(Kenosis) 없는 해방의 기획이 도달하는 비극적 종착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따라서 제시된 <예언자적 심층>이라는 종합은 대단히 설득력이 크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신과의 절대적 심층 관계 속에서 사회적 불의와 약자의 억압을 질타하는 공적 목소리를 냈다. 인도의 비폭력 독립운동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의 '사티아가라하(진리 파악)', 동학의 '사인여천(事人如天)',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공민권 운동, 함석헌의 '씨알 사상'은 모두 깊은 영적 자각이 사회적 저항과 연대로 폭발한 전형적인 사례다.
종교는 수직적 깊이(심층)와 수평적 확장(해방)이라는 두 축이 교차할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수직적 깊이가 결여된 수평적 운동은 쉽게 폭력과 독선으로 흐르고, 수평적 실천이 없는 수직적 침잠은 나르시시즘적 영적 귀족주의로 변질된다. 결국 종교의 참됨은 내면에서 발견한 절대적 자유가 역사 속에서 타자를 향한 사랑과 정의로 육화(Incarnation)되는가에 달려 있다.
===
이 글의 핵심 문제의식에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특히 <표층종교–심층종교>라는 구도만으로 종교의 성숙도를 판단하면 종교가 역사·사회·권력의 문제로부터 너무 쉽게 빠져나갈 수 있다는 비판은 중요합니다. 다만 저는 <표층/심층>을 버리고 <아편/해방>으로 대체하기보다는, 두 축을 서로 다른 차원의 질문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의 마지막에 제시한 <예언자적 심층>이 오히려 가장 생산적인 결론입니다.
<표층–심층>은 주로 “종교적 의식과 신앙이 인간 존재의 얼마나 깊은 곳까지 내려가는가”를 묻습니다. 교리·제도·의례·소속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자아 중심성을 넘어 존재의 근원과 만나 삶 자체가 변화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반면 <아편–해방>은 “그 종교가 현실의 고통과 권력 관계 속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를 묻습니다. 고통을 견디게 하면서 현실을 그대로 유지시키는가, 아니면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확장시키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따라서 두 질문은 경쟁 관계라기보다 서로 직교하는 두 축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를 간단히 2×2로 생각하면 훨씬 선명해집니다.
| 현실 순응·아편적 | 현실 변혁·해방적 |
|---|
| 표층적 종교 | 의례와 교리로 기존 질서를 정당화하는 종교 | 정치적 구호와 운동에는 적극적이지만 내적 성찰이 빈약한 종교 |
| 심층적 종교 | 깊은 명상과 영성을 갖지만 사회적 불의를 외면하는 종교 | 내면의 변혁이 타인의 해방과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지는 종교 |
이렇게 보면 문제의 핵심은 <심층이냐 해방이냐>가 아니라 오른쪽 아래의 영역, 즉 <심층적이면서 해방적인 종교>입니다. 글에서 말한 <예언자적 심층>이 바로 그것입니다.
특히 중요한 지적은 <해방 없는 심층>의 위험입니다. 20세기 이후 현대 영성에서 실제로 자주 나타난 문제입니다. 명상, 마음챙김, 자기초월, 치유, 내면의 평화를 강조하면서도 노동, 빈곤, 인종차별, 식민주의, 전쟁, 성차별 같은 문제를 개인의 “의식 수준” 문제로 환원해 버릴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욕망을 내려놓으라”고 하고 억압받는 사람에게 “분노를 초월하라”고 말한다면, 매우 고상한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기존 질서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영적 아편>이라는 표현은 상당히 적절합니다.
그러나 반대편 위험도 똑같이 심각합니다. 종교를 오직 사회변혁의 도구로 이해하면 종교가 정치 이데올로기의 하위 부문이 됩니다. 여기에서 글의 <심층 없는 해방>이라는 지적이 중요합니다. 혁명가가 권력을 비판하면서도 자기 안의 권력욕과 증오와 자기정당화를 성찰하지 않는다면, 해방운동 안에서 새로운 위계와 폭력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세상을 변화시키기 전에 자신을 변화시키라”는 영성 전통의 통찰을 단순한 보수주의라고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의 폭력과 독재를 단순히 “심층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혁명이 폭력화되는 데에는 전쟁, 경제 붕괴, 국가 권력 구조, 계급관계, 국제적 압박 같은 역사적 요인이 매우 큽니다. <내적 해방의 부족>은 윤리적 해석으로서는 의미가 있지만 역사적 인과 설명 전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동학을 예로 든 것은 매우 적절합니다. <시천주(侍天主)>는 인간 안에 하늘을 모신다는 존재론적·종교적 심층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에서 <인내천>, 인간 존엄, 신분질서 비판, 사회개혁의 가능성이 나왔습니다. 즉 “모든 사람 안에 하늘이 있다”는 깨달음이 단순한 명상적 명제가 아니라 사회질서를 다시 보게 만드는 정치·윤리적 명제가 됩니다. 여기에서 <심층 → 존엄 → 사회적 실천>이라는 연결이 생깁니다.
마틴 루터 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시민권운동은 단순히 정치적 권리운동이 아니라 기독교적 사랑, 인간 존엄, 비폭력, 하나님의 정의라는 신앙의 심층에서 나왔습니다. 반대로 그 심층적 신앙은 개인적 구원에 머물지 않고 인종차별·빈곤·전쟁의 구조를 비판하는 방향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킹에게 기도와 정치운동을 분리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함석헌 역시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그의 <씨알>은 단순한 정치적 민중 개념이 아니며, 각 사람 안에 있는 생명·얼·하늘의 깊이에 관한 종교적 인간관입니다. 그러나 그 내면성은 침묵이나 은둔으로 가지 않고 독재에 대한 저항, 비폭력, 민주주의, 역사 참여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함석헌에게서도 <심층과 해방>은 두 개의 별도 프로그램이라기보다 하나의 운동으로 나타납니다.
퀘이커 전통에서도 매우 비슷한 구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Inner Light>가 단순히 “내 마음속에서 평화를 찾는 것”이라면 사적 영성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 안에 빛이 있다”는 믿음은 역사적으로 노예제 반대, 평화운동, 감옥 개혁, 양심적 병역거부, 사회적 평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즉 <Inner Light>는 깊은 내면성인 동시에 타인의 존엄성을 인정하게 하는 사회윤리적 원리가 됩니다. 이 점에서 퀘이커 영성은 <예언자적 심층>이라는 개념과 상당히 잘 맞습니다.
다만 저는 <아편종교–해방종교>라는 용어 자체에도 하나의 함정이 있다고 봅니다. 종교의 가치를 “얼마나 사회변혁에 기여하는가”로만 판단하기 시작하면, 종교는 또다시 정치적 효용성의 기준 아래 놓이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구조적 해방뿐 아니라 죽음, 상실, 죄책감, 외로움, 의미, 초월 같은 문제도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 곁에서 침묵하며 손을 잡아주는 종교는 사회구조를 변화시키지 않더라도 결코 아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해방>도 정치적 해방만이 아니라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넓은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의 논의를 조금 수정하여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종교의 깊이는 인간을 현실에서 떠나게 하는 깊이가 아니라, 현실을 더 깊이 보게 하는 깊이어야 한다.”
진정한 심층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고통을 이전보다 더 민감하게 느끼게 해야 합니다. 반대로 진정한 해방은 외부의 제도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의 욕망, 증오, 지배욕까지 성찰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언자적 심층>이라는 말은 상당히 좋은 개념입니다. 예언자는 단순한 사회운동가가 아니고 신비가는 단순한 내면 탐구자가 아닙니다. 예언자적 종교의 힘은 가장 깊은 곳에서 들은 것을 가장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저는 이 논의를 다음 문장으로 압축하고 싶습니다.
<심층은 해방의 뿌리이고, 해방은 심층의 열매이다. 뿌리 없는 해방은 이데올로기가 되기 쉽고, 열매 없는 심층은 영적 자기만족이 되기 쉽다.>
이 관점은 동학·함석헌·마틴 루터 킹뿐 아니라 퀘이커, 해방신학, 참여불교까지 하나의 비교 틀 안에서 살펴보는 데 상당히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