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전 - 법정이 묻고 성철이 답하다
법정,성철 (지은이)책읽는섬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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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성철과 법정은 근현대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이자, 대중의 스승이었다. 하지만 성철과 법정의 이미지는 사뭇 다르다. 성철이 혹독한 고행과 엄격한 자기 수행, 그리고 어떠한 지위와 권력 앞에서도 초지일관 자신의 원칙을 고수했던 초인의 이미지를 지녔다면, 법정은 온후하면서도 강직한 수도자의 자세와 품위를 잃지 않은 삶과 글로 큰 가르침을 주었다.
이 같은 인상의 격차 때문일까? 성철과 법정이 한자리에 있는 모습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성철과 법정의 인연은 깊었다. 법정은 성철을 불가의 큰 어른으로 따랐고, 성철은 뭇 제자와 후학들에게 대단히 엄격하면서도 유독 제자뻘인 법정을 인정하고 아꼈다.
<설전>은 성철과 법정이 나눈 대화와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인연의 흔적들을 발굴하여 처음 책으로 엮은 것이다. '성철 불교'의 본질을 끌어낸 법정의 지혜로운 질문과 거기에 화답하여 인간 존재와 현상의 심층을 드러내는 성철의 대답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여기에 성철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했던 원택의 증언이 더해진다. 원택의 증언을 통해 성철과 법정 사이에 있었던 일화들과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담긴 내밀한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목차
책을 시작하며
첫 번째 이야기 _ 我, 자기를 바로 보라
나를 찾아오지 말고 부처님을 찾아오라|자기 안의 광맥을 발견하라|깨끗하고 맑은 거울 하나|생각을 멈추라|진리를 위해 불교를 택했을 뿐|살아가는 것이 곧 해탈이다
두 번째 이야기 _ 俗, 처처에 부처이고 처처가 법당이네
선문으로 향하는 바른 길|참회만 있을 뿐 용서란 원래 없네|죽을 때까지 공부하라|지도자란 어떤 사람인가|밥을 먹을 것인가, 밥에 먹힐 것인가
세 번째 이야기 _ 佛, 네가 선 자리가 바로 부처님 계신 자리
깨닫는다는 것|참의미는 말과 글에 갇히지 않는다|방편가설과 일승|마음이 곧 부처다|자기 안에서 천국을 찾으라|중도를 깨치는 길|윤회 그리고 대자유|출가 기연
한 덩이 붉은 해가
책속에서
어떤 언론이든지 사회의 공기라는 것,
불편부당(不偏不黨)해야 한다는 근본정신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기관이나 단체의 이용물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곤란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춘추필봉(春秋筆鋒)
말 그대로 시퍼런 필봉을 세워 나가야만 사회에 공헌을 하고
사회에 대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지,
만약 언론이 근본정신을 버린다면 사회와 인류에 해를 주지 않겠어요?
지금도 잘하고 있겠지만,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명정대한 필봉으로
춘추필봉을 발휘하면 사회를 잘 선도하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살릴 수 있겠지요. 접기
어떤 단체의 지도자라고 하면 근본 전제가 사리사욕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라면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정치하는 사람이 사리사욕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 그것은 자살이 되고 맙니다.
어떤 단체의 지도자라면 그 단체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죠.
그렇게 하려면 사리사욕에서 완전히 떠나야 합니다.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면 그 단체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것을 버려야만 국가도 살고 민족도 살고 단체도 살고 자기 자신도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정치를 결국엔 국가와 민족에 큰 손해를 줄 뿐만 아니라
자기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지도자의 자격이란 참으로 사리사욕을 완전히 버린
무아(無我)사상에서 전체를 위해 사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접기
30쪽
내가 자꾸 깨친다 깨친다 하는 것은 사람이 그런 깨칠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다면 만날 노력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오. 땅 밑에 금이 많이 있는 줄 알면,
거기에 금이 꼭 있을 것 같아서 땅을 파면 금이 나오지만,
암만 파도 금이 없을 것 같으면 헛일이지 않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생에게 부처님과 같은 그런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깨치는 공부를 해도 헛일입니다.
문제는 그 광맥이 사람 사람 마다에 다 있나 없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에게 그런 무진장한 대광맥,
금광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진장의 대광맥이
사람 사람 가슴속에 다 있다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이것을 개발하고 이것을 소개한 것이 불교의 근본 생명선입니다. 접기
46쪽
무엇보다도 정신적으로 모든 생각을 쉬어 버리는 것, 이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모든 구하는 생각, 이것이 마음에 들어 있으면 아무리 섭생을 잘해도 소용이 없거든요.
그런 구하는 생각을 어느 정도 떨쳐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쉬고 사는 이것이 건강에 좀 도움이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 더보기
85쪽
흔히 `용서를 하자. 용서를 하자`고 하는데, 불교의 근본사상에 용서란 없습니다.
용서란 내가 잘하고 남이 잘못됐다는 것인데,
모든 것의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며,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남의 인격을 근본적으로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설사 어떤 사람이 칼로 나를 찌른다 할지라도
찌르게 한 것의 근본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참회`를 해야지 저 사람을 `용서`하다니요.
그래서 우리 불교사전에서 `용서`라는 말을 빼야 한다고 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접기
P. 48 자신에 대한 염려에 앞서
남을 염려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릴 때,
인간은 비로소 성숙해집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친절이라는 것을
마음에 거듭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작은 친절과 따뜻한 몇 마디 말이
이 지구를 행복하게 한다는 사실 역시
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법정, 2004년 6월 3일 법문 중에서 접기
P. 86 인간은 하나의 소우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극락도 지옥도 공존하게 마련입니다.
불안과 여유도
마음가짐에서 좌우될 수 있습니다.
항시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드리며
나보다는 남을 위해 살 일입니다.
성철 - little-dream
《팔만대장경》을 불법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손가락에 집착해서
달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자성을 깨치지 못하고
영원히 성불을 못하고,
헛된 공부가 되고 맙니다. - little-dream
P. 115 천하부귀를 다 누린다 해도
내가
본시 진금인 줄 아는 이 소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철 - little-dream
P. 56 사실 ‘다음 생‘이란 본래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옷을 가지고
그 한계성을 잡아서
옷이 다 떨어지고
새 옷을 갈아입을 그때를
이다음 생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사람 자체에서 볼 때는 옷 떨어졌다고 이다음 생이라고할 수 있나요?
본시 과거도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고
항상 그 사람은 그 사람일 뿐이지요.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법정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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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전라남도 해남 우수영에서 태어났다.
한국 전쟁의 비극을 경험하고 인간의 선의지(善意志)와 삶과 죽음에 고뇌하며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섰다.
1956년 효봉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은 후 통영 미래사,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서 스승을 모시고 정진했다.
이후 해인사 선원과 강원에서 수행자의 기초를 다지고 1959년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1960년 통도사에서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동참하였고, 1967년 서울 봉은사에서 운허 스님과 더불어 불교 경전 번역을 하며, 불교계 언론과 유력한 신문에서 ... 더보기
최근작 : <생애 단 한 번>,<침묵하라 그리고 말하라>,<법정 스님의 말과 글> … 총 124종 (모두보기)
성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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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옹당 성철스님(1912~1993)은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곁에 왔던 부처’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36년 스물다섯의 나이에 당대의 선지식인 동산스님으로부터 ‘성철’이라는 법명을 얻고 수행의 길에 들었다. 장좌불와 8년, 동구불출 10년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고, 그 독보적인 사상과 선풍으로 조계종 종정에 오르면서 이 땅의 불교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 퇴설당에서 “참선 잘 하거라”는 말을 남기신 채 법랍 58세 세수 82세로 열반에들었다. 생전에 “자기를 바로 보라” “남을 위해 기도하라” “일체 중생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라”고 이르시던 성철 큰스님의 참되고 소박한 가르침은 오늘도 가야산의 메아리가 되어 영원에서 영원으로 울리고 있다. 접기
최근작 : <무엇이 너의 본래면목이냐>,<성철스님 임제록 평석>,<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 총 49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성철과 법정,
떠나간 두 거인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이야기
당대를 대표하는 선승, 성철과 법정의 만남
그리고 천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을 현문과 현답들
雪.戰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눈의 성질로 수행자의 냉철하고도 온화한 자세를 형상화하는 한편,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웃게 만드는 유일한 다툼인 ‘눈싸움
성철과 법정의 아름다운 인연
그 속에 오간 대화를 처음 책으로 엮다
성철과 법정은 근현대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禪僧)이자, 대중의 스승이었다. 하지만 성철과 법정의 이미지는 사뭇 다르다. 성철이 혹독한 고행과 엄격한 자기 수행, 그리고 어떠한 지위와 권력 앞에서도 초지일관 자신의 원칙을 고수했던 초인의 이미지를 지녔다면, 법정은 온후하면서도 강직한 수도자의 자세와 품위를 잃지 않은 삶과 글로 큰 가르침을 주었다. 이 같은 인상의 격차 때문일까? 성철과 법정이 한자리에 있는 모습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성철과 법정의 인연은 깊었다. 법정은 성철을 불가의 큰 어른으로 따랐고, 성철은 뭇 제자와 후학들에게 대단히 엄격하면서도 유독 제자뻘인 법정을 인정하고 아꼈다.
《설전(雪戰)》은 성철과 법정이 나눈 대화와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인연의 흔적들을 발굴하여 처음 책으로 엮은 것이다. ‘성철 불교’의 본질을 끌어낸 법정의 지혜로운 질문과 거기에 화답하여 인간 존재와 현상의 심층을 드러내는 성철의 대답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여기에 성철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했던 원택의 증언이 더해진다. 원택의 증언을 통해 성철과 법정 사이에 있었던 일화들과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담긴 내밀한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뛰어난 사상과 좋은 글이 시대를 관통하여 사랑받듯, 한 시대의 정신을 상징했던 두 큰 스승이 나눈 이야기들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고전’으로 남을 것이다.
■ 1967년, ‘백일법문’ 속의 성철과 법정
법정, 성철의 백일법문에 등장하다
법정과 성철은 속세의 나이와 승려로서의 나이 모두 정확히 20년 차이가 난다. 법정이 출가하기 한 해 전인 1955년에 성철은 이미 초대 해인사 주지에 임명될 정도로 명성과 인망이 자자했다(이때 성철은 주지 임명을 거절하고 대구 파계사 성전암으로 옮겨 10년 동안의 수행에 들어갔다). 각기 해인사와 송광사에서 출가하여 법통이 달랐으나, 법정에게 성철은 아득한 선배이자 조계종의 큰 어른이었다.
법정은 경전 공부에 진척이 빠르고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실력이 뛰어나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하는 등 타고난 문재를 바탕으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경전을 번역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통도사와 해인사에 머물렀다.
법정이 해인사 강원에 머물던 1967년, 성철은 해인사 해인총림 초대 방장에 추대된다. 그리고 성철은 같은 해 12월 4일부터 100일 동안의 설법에 들어간다. 이것을 ‘백일법문(百日法門)’이라고 일컫는데, 이때의 설법은 하나 빠짐없이 녹취되었다. 그런데 이튿날인 12월 5일에 이르면 한 젊은 승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성철의 법문에 끼어든다. 바로 법정이었다.
성철의 현답을 이끌어낸 법정의 현문들
성철의 백일법문이 열린 장소는 해인사 대적광전이었고, 수많은 승려와 불자가 성철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 있었다. 법정은 여기에서 아주 원론적인 질문들을 던져 성철의 형이상학적인 설법이 대중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불교란 무엇입니까?”, “타 종교와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중도 이론을 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십시오.”, “중국 선종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등등의 질문은 불교의 초심자라도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법정은 스스로 초심학인의 입장에서 질문을 던져 성철의 법문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나누기 위해서 묻는 것이다. 성철의 뛰어난 점 역시 이 대목에서 빛을 발한다. 법정의 의도를 파악한 것인지, 성철 또한 법정의 그 질문들에 일일이 성심을 다해 답했다.
법문이 무르익으면서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기도 한다. 중국의 육조 혜능이 일자무식이었다는 이야기에 대해 법정이 성철을 따지고 든 것이다. ‘가야산의 호랑이’라는 별명에서 드러나듯, 뭇 제자와 후학들은 성철 앞에서 오금을 펴지 못했으나 법정은 스스로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해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 역시 성철의 넓은 품이 드러난다. 성철은 마치 영민한 제자의 도전을 즐거워하는 스승처럼 법정의 은근한 도전을 즐기는 음성으로 일일이 답한다.
그리고 법정이 조심스러운 어투로 성철에게 이렇게 묻는다.
“사람이…… 정말 성불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성직자가 “정말 천국이 있을까?”라고 의문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다. 법정의 이 질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법정이 성철에게 던진 질문들은 성철의 설법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한 포석이자, 서른 후반에 접어든 ‘청년’ 법정의 불교에 대한 간절한 관심과 생각 그리고 그의 마음 한 구석을 엿보게 만드는 창문이기도 한 것이다.
‘백일법문’ 속 성철과 법정의 대화는 12월 5일, 8일, 9일, 23일의 녹취록에 담겨 있다.
■ 1982년, 성철과 법정의 대담
법정, 불일암으로 향하다
공교롭게도 1968년 법정은 일종의 ‘필화’에 휘말린다. 성철은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반드시 불전에 3천 배를 해야 한다는 규칙을 정해 놓고 있었는데, 한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법당에서 절을 하는 대학생 무리를 목격한 법정이 그것은 절이 아니라 몸을 굽혔다 폈다 하는 굴신운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성철의 ‘3천 배’ 규칙을 폄하하는 글을 대한불교(현 불교신문)에 기고한 것이었다. 성철의 상좌였던 원택은 이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한다.
당사자인 성철 스님께선 별말씀이 없으셨고 해인사 주지 스님께선 “방장 스님(성철)은 법정 수좌를 좋아해.”라며 다독이셨으나, 혈기 넘치는 젊은 스님들이 발끈하여 법정 스님이 바깥나들이 가신 틈에 스님 방의 물건을 치워 버린 일이 있었다. 법정 스님은 논란이 일자 아무 말 없이 서울로 수행처를 옮기셨다. 이것이 1968년의 일이었다.
서울 봉은사로 수행처를 옮긴 법정은 이후 월남파병을 반대하는 뜻을 밝혔다가 승적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유신정권 시절에는 재야인사와 관계하다가 감시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던 중 1975년 송광사의 불일암으로 향했다. 시대의 걸작이 된 《무소유》가 출간된 것은 이듬해인 1976년이었다.
오늘, 지금을 향하고 있는 성철과 법정의 대화
1980년 초반, 두 권 분량의 원고를 탈고한 성철이 원택에게 일렀다.
“송광사 불일암 법정 스님을 찾아가라. 찾아가서, 당대에서는 법정 스님이 한글 글쓴이로는 최고이니 내가 《본지풍광》과 《선문정로》의 윤문을 부탁한다고 말씀드려라.”
성철의 전언을 전해 들은 법정은 “스님 글에 크게 손댈 생각은 없다”면서도 갖은 정성을 기울여 두 권의 책이 발간되도록 애썼다. 원택은 이때 법정과 함께 작업을 했던 인연으로 이후 성철의 사상을 전하는 책을 편찬하는 일에 매진하게 된다.
1981년, 성철은 대한불교조계종 제6대 종정에 추대된다. 같은 해 12월에는 《선문정로》가 발간되었다. 《선문정로》가 만들어지는 동안 성철과 법정 사이에 왕래가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1982년 벽두에 한 언론사의 주선으로 대담을 갖기 위해 성철과 법정은 다시 마주 앉았다. 못다 푼 응어리가 있었던 것일까? 법정은 대뜸 다시 ‘3천 배’에 관해서 묻는다. 이날의 대화는 성철이 ‘3천 배’ 규칙에 담긴 오해를 풀어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대담에서 성철과 법정은 자아를 닦는 일상의 수행법과 불교의 근본적인 정신, 지도자의 덕목, 물질만능 시대의 인간성 회복 문제, 권력과 이념에 편승하지 않는 언론, 미래가 꺾인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나눈다. ‘백일법문’ 속의 대화가 불교를 주제로 삼고 있다면, 이 대담은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80년대 초반의 고뇌와 문제들이 지금도 되풀이되고 것일까? 이때 성철과 법정이 나눈 대화의 내용들은 공교롭게도 정확하게 2016년 오늘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성철과 법정의 대화는, 선승이 세상과 외따로 떨어져 홀로 수행만 하는 존재라는 인상을 말끔히 지워 버린다. 이들이 치열하게 타인과 세상을 위해서 살아갔음을, 또 항상 사회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그 본질은 ‘사랑’이었다.
이후 성철과 법정은 보조국사 지눌의 사상을 두고 첨예하게 맞서는 동안에도 1987년 겨울에 성철이 포영집(사진집)을 낼 때 법정이 서문을 써 주는 등 두 사람의 우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1993년에 성철이 열반에 들었을 때 추모사를 쓴 이도 법정이었다. 일견 팽팽하게 맞서면서도 서로를 존경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 모두 사랑과 자비를 유일한 신념으로 받아들이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성철이 이 땅에 오고(4월 19일) 법정이 우리 곁을 떠난(3월 11일) 봄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큰 스승들이 떠난 빈자리는 너무도 커서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그런 안타까움 때문일까? 오늘, 《설전》에 담긴 성철과 법정의 메아리가 더욱 크게 울리는 듯하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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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에 가려져 있던 이야기들을 슬며시 훔쳐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어느새 후딱 읽어 버렸습니다.ㅎㅎ
스카이블루 2016-05-03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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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이 수필가로 저명하지만 불교 지식이나 선의 경지를 비교하면 성철 스님과 견주기에는 좀 그렇지요. 무소유 등 여러 글을 읽어봐도 선승으로서 높은 경지가 느껴지진 않습니다. 성철 스님은 자타가 공인하는 20 세기 최고의 스님, 불지를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도달하기 힘든 경지입니다
아톰 2018-08-01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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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하나 어렵고 재미는 없다. 불교에 관한 내용이 많아 불교에 거부감 있는 사람은 안 보는 것이…
브라운커피 2016-03-30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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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로서 인생을 살아야 할 기본 자세와 태도, 그리고 스스로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불자들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homes72 2016-05-17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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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네요. 너무 멋진 두 스님의 이야기를 아침마다 조금씩 읽고 있습니다. 짧게 명징하게 불교의 진리를 설파해 주시는 듯 합니다. (전 기독교지만...^)
monk 2019-12-15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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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이 묻고 성철 스님이 답하다
'법정이 묻고 성철이 답하다'라는 말을 앞에 달고 있고, 제목은 "설전(雪戰)"이다. 책이 조금 친절하지 않게 두 스님의 문답이 언제 이루어진 것인지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하긴 이 문답이 하루에 이루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또 그것이 언제인지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때와 장소가 중요하지 않고 무엇을 말하였느냐도 중요하지 않다.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면목을 깨우치게 하는데 문답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두 스님의 문답은 손가락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달을 쳐다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본다면 자신의 진면목을 깨달을 수가 없다. 그런데, 자꾸만 도대체 언제 어디서 이런 대화들을 했을까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도 손가락에서 벗어날 수가 없나 보다.
이 손가락에서 벗어나는 순간, 내 마음에 낀 먼지를 조금은 날려보낼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책의 겉표지 뒷부분에 쓰여 있는 제목을 붙인 이유가 마음에 와 닿는다.
'차갑고 냉철하면서도 부드러운 수도자의 자세를 '눈'이라는 매개로 형상화하는 한편,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웃게 만드는 유일한 다툼인 '눈싸움'의 이미지를 통해 성철과 법정 두 사람 사이에 오간 구도의 문답과 인연을 표현하고자 했다.'
다른 스님들이나 일반인들이 함부로 말을 걸기가 어려웠던 스님이 성철 스님이라고 한다. 자신에게 엄격한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연스레 보여줬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평생 동안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결심을 지켰던 분이기도 하고. 그러니 이런 구도자의 자세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려움으로 다가왔으리라.
다만, 법정 스님만은 성철 스님과 많은 대화를 했다고 한다. 성철 스님 역시 법정 스님을 도반(道伴)으로 인정했나 보다. 책을 편찬할 때는 법정 스님에게 도움을 구했다고 하니 말이다.
이 책 곳곳에서 성철 스님을 모셨던 원택 스님의 글이 있어서 성철과 법정 스님의 관계를 알 수 있게 된다. 또 이 책의 처음과 끝에 성철 스님과의 인연을 말하고 있는 법정 스님의 글이 있다. 그 글을 통해서도 두 분의 관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법정 스님과 성철 스님의 묻고 답하기를 통해 불교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좋다. 문답이라는 형식은 어렵지 않게 일반인들에게도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하나의 질문과 답이 모두 마음에 받아들이고 명심해야 할 것들이지만, 그 중에서 특히 몇몇 구절은 가슴을 때리고도 남았는데...
법정 : 그렇습니다. 어떤 현상이나 독립된 현상만이 아니고 사회 구조적인 모순에서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저희들 자신이 종교인이기 때문에 종교인에게도 그런 데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철 : '종교인에게도'가 아니지요. '에게도'가 아닙니다. 우리 종교인이란 정신을 지도하는 근본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그러니 책임은 근본 책임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 그러니 종교인이라는 사람, 성직자라는 사람부터 근본 자세를 바로잡아서 참다운 정신적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위에서 정신적 지도자부터 잘못되었다고 하면 밑에서 지도받은 사람이 탈나고 잘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러니 근본 책임을 맡은 종교인, 성직자인 우리가 참회해야 한다고 봅니다. (36-37쪽)
지금 사회가 어지러운 지경에 처한 것에 대해서 대화를 하는 중에 나온 말이다. 법정 스님은 '종교인에게도'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성철 스님이 '에게도'가 아니라고 하는 것.
이때보다 지금이 더 좋아졌을까. 아닐지도 모른다. 생명경시 현상은 더 심해지고 있지 않은가. 너무도 어지러운 모습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떤 종교인이 이렇게 참회를 하고 있단 말인가.
종교인에게 세금을 내게 하자는 안건도 제대로 논의가 되지 않고, 통과되지 않고 있는 현실 아닌가. 자기들 건물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지면서도 점점 가난해져 땅과 가까워지는 사람들은 외면하는 종교인들이 많지 않은가. 부끄러워해야 할 말이다. 이 말이 단지 종교인에게만 해당하겠는가.
'나는 진리를 위해서 불교를 택한 것이지, 불교를 위해서 진리를 택한 것이 아닙니다. ...... 참으로 진리를 위해 살려면 세속적인 일체 명리는 다 버려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앞서면 진리는 세속적인 영리를 추구하는 일종의 도구가 되어 버리니까요.' (51쪽)
'불교 믿는 첫 조건으로 모든 생명,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 모셔라. 모든 존재를 부모같이 섬겨라. 모든 사람, 모든 존재를 스승으로 섬겨라 하는 3대 조건이 있습니다.' (80쪽)
'불교의 사회봉사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금강경]이나 반야사상 같은 데서는 어떠한 선한 일을 하더라도 아무 자취 없이 하라고 강조합니다. 내가 선한 일을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보살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82쪽)
'인간의 가치란 누구나 똑같습니다. 남을 도우려면 존경하는 마음으로 해야지, 조금이라도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면 저쪽 인격을 무시하는 겁니다.' (82쪽)
이 부분을 읽으며 마음이 턱 막혔다. 도대체 지금 이 나라는 봉사활동이라는 명목으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정치인들이 선거철만 되면 무슨 무슨 기관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고 사진 촬영을 해서 언론에 내보내는 그 작태는 그들이야 그렇다치는데, 이들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잘못된(?) 학교 교육이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봉사활동이라는 것을 점수화하고 있다. 몇 시간 이상을 해야지만 기본 점수를 받는 것이다. 알리지 않고, 남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 봉사활동을 학생 시절부터 점수를 위해서, 그것도 기록이 되지 않은 봉사활동은 아무런 효력이 없으니 꼭 기록을 하게 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는 것이 지금의 학교 교육 아닌가.
그렇다면 얼마나 잘못된 교육인가. 봉사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봉사조차도 자신을 드러내는 쪽으로 쓰게 하는, 현재의 정치인들의 행태가 이런 사고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말이었는데... 아마도 거꾸로이겠지. 정치인들의 그런 행태가 학교에서 하는 봉사활동을 점수화 할 생각을 하게 했겠지만... 참, 이제는 이렇게 지낸 학생들이 사회 곳곳에서 활동을 하는 나이게 되었으니...
그럼에도 성철 스님은 말을 적게 하라고 했다. 글 역시 마찬가지다. 주옥 같은 말들이 더 많이 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아가면 될 듯하니... 이만 줄여야겠다.
다만, 당장의 깨우침은 없을지 몰라도 읽는 동안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깨우침에 대한 생각, 즉 손가락이 무엇을 가리키려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이름은 들어봤음직한 성철, 법정 스님의 묻고 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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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ye91 2017-08-18 공감(1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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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나는 내비게이션
방향제를 샀다. 은은한 라벤더 향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통을 들고 살짝 흔들어본다. 손에도 냄새가 짙게 밴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이거였구나! 향수병 주변에 있으면 나에게도 향기가 배는 거였어! 다시 한 번 책을 펼친다. 책 속의 문장들이 처음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종교에 대한 나의 시각은 회의적이었다. ‘수행이란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불교의 수행 방식이 철저한 고행을 통한 깨우침이라면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남을 위할 수 있다는 걸까.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지 않고 중생들에게서 제공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먹고 살기 위해 몸을 움직이며 아등바등해야 하는 사람들을 수행자보다 못하다 할 수 있을까. 기도해주는 것이 진정 그들을 위하는 길일까. 기도를 해서 결국 편안해지는 것은 기도하는 이 아닌가.’ 이런 의문들로 가득한 나는 그리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종교인들을 삐딱하게 바라보곤 했다.
법정 스님이 묻고 성철 스님이 답한 책. 두 번째로 책을 읽으며 종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처음 읽었을 때에는 글자들이 마음의 표피만을 두드렸다면, 두 번째에는 그 아래 진피까지 스며들어온 느낌이다. 처음과는 다른 의미들이 눈 녹듯이 마음으로 흘러들었다.
스님의 존재 의미를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해본다. 향수병처럼 그 곁에 있으면 뿜어져 나오는 향기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나아가 나도 향기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향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존재라고. 스님의 가르침은 향기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길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과 같은 의미라고. ‘나도 했어. 너도 될 거야. 해 봐.’ 라며 용기를 주는.
책속에서 종교적인 내용 못지않게 자주 등장하는 ‘남’이란 말은 끊임없이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돕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러기위해서는 자신을 먼저 비우고, 욕심을 버리는 행동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목의 의미를 다시 해석해본다. 처음에는 <설전>이라고 해서 논쟁의 의미를 지녔다고 여겼다. 두 스님이 종교적인 견해를 열띠게 주고받으면서 진리를 파헤치는, 대략 이런 내용이리라 짐작했다. 자세히 바라보니 '눈 설'자를 쓰는 전쟁이다. 새삼 한자 사전을 찾아본다. ‘雪’이란 한자가 ‘더러움을 씻다’라는 의미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세상의 번뇌가 일으키는 더러운 욕심을 씻기 위한 대화의 치열함을 의미하는 걸까. 눈이 내리는 것처럼 고요하고 냉철하게 이루어지는 전쟁을 상상하니 참으로 적절한 제목이다 싶다.
눈을 배경으로 수록된 사진들도 참 좋았다.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라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사진에 담겨있다는 것은 어딘가에 존재하는 현실이라는 뜻이니. 현실에서도 수행을 한다면 충분히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교의 메시지와 맞닿아 있는 것만 같아서 좋았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158페이지와 159페이지에 펼쳐진 사진은 보는 순간 헉! 감탄사가 나왔다. 마음이 저절로 깨끗하게 씻기는 기분이었다. 새하얀 눈과 맑은 물에 비친 푸르른 하늘, 그 경계에 고요한 생명체인 나무가 존재하는 장면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명경’이란 말이 이런 느낌 비슷하지 않을까.
적게 드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다른 이에게 빚지는 기분, 한 때는 모두 생명이었던 음식을 섭취할 수밖에 없는 미안함 때문이었다. 음식을 남기지 않는 불문율은 이런 맥락으로 보면 ‘남기지 않는’것이 아니라 ‘남길 수 없는’것이었다.
마음을 맑게 하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향기로운 사람이 되어 주변을 향기롭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적게 자고, 적게 말하고, 적게 먹고, 지식에 안주하지 말고, 제자리를 지키라는 가르침(p190)’을 내비게이션인 듯 따라가는, 그런 일상을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다보면 희미한 들꽃 향기라도 나지 않을까 해서. 존재 자체가 향기가 된다는 것, 정말 의미 있는 삶인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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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9-04-01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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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과 숙고를 교차하게 하는 책
일단 리뷰를 써내려가기 전에 몇가지를 전제 할 필요가 있을듯 합니다.
난 2016년 3월 13일 아침까지 기독교인이던 사람으로 불교신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4살 때로 기억하는데(그 보다는 조금 늦을지도 모릅니다. 살아오면서 기억에 의지해 과거를 돌아보고나서 실제 그 시절의 사진이나 기록 등으로 재확인을 거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종종 내 기억에 다소 간의 시간차가 있음을 확인하게 되더군요. 다소의 시간차가 있다는 것은 기억과 사실 간에 커다란 괴리가 있음을 수긍할 도리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 즈음 《불교의 체계적 이해》라는 책으로 처음 붓다의 가르침을 읽고서 고타마 싯다르타 붓다께서 펼치신 가르침에 깊은 울림과 함께 압도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아무리 힘겹고 때론 방황과 휘둘림이 교차하며 거듭되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순둥이 아기였던 시절에도 원초적 불균등한 무력차에 압도 당하며 아기시절 부터 유년시절 전체를 감당할 필요없는 부조리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에 대한 반발로 내면에서 없던 반골기질이 싹틀 수 밖에 없었고 자라며 또 어른이 되어서도 사회의 양지 속 음지와 있는 그대로의 음지랄까를 거듭 거치며 더욱 사회의 부조리 하나하나를 겪어내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부조리는 그 자체를 수긍하고 받아들여 나 또한 그 부조리를 강화하며 난 적응한 것이다 세상은 원래 이런 곳이고 바꿀 수도 없으니 남들 보다 더 잘 적응해 갑이 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키워가거나 저항하거나 그냥 체념하고 아무 의식없이 살아가거나 하는 고작 이 정도의 선택의 폭 정도 밖에는 없는 문제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적응해서 갑이 되어 바꾸면 된다는 논리를 펼치는 이도 있으려나 몰라도 적응이라는 정신승리(자기합리화)로 사회가 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들 중에 사회 부조리를 강화하지 않고 바꾼 인물은 역사상 누가 있었던가 의문이니까요. -프랑스 혁명 등을 예로 든다해도 마리앙트와네트가 프랑스 혁명가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빵이 없으면 케잌을 먹으면 되잖아"라고 말할 정도로 소외계층의 삶에 무지했던 인물이 아니며 오히려 소외계층에 지속적 후원을 해 왔다는 내용을 일요일 아침 10시30분 이후에 하는 MBC프로그램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애초에 낭비벽으로 프랑스 경제를 파탄에 빠뜨린게 마리앙트와네트 왕비라는 주장 자체가 부조리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승자가 되면 패자의 과오는 무턱대고 과장하고 비방할 권리가 생겨나는 구조 속에서 역사는 이어져 왔습니다.-
동양에서 태어나 자라며 동양의 전통들에 익숙해질 수 밖에 없었고 삶이 버겁게 짓이기도 무너뜨리며 압도해 왔기에 자연히 무너지고 주먹을 쥐기를 반복하며 고통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왔습니다. 그 길에서 붓다께서 펼치신 가르침이 때론 빛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기독교인이었었기에 무조건적인 붓다의 설법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만을 한 것은 아니나 고타마 싯다르타 붓다에 대한 애정과 그분의 가르침에 대한 존경과 사랑 역시 너무도 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설전>이라는 법정 스님의 문득문득 혜안과 사랑이 흠씬 느껴지는 질문과 성철 큰스님의 답변에 대한 나의 감상은 기독교적 프리즘을 통해 이해할 수 밖에 없었으며 불교 경전과 논서 몇몇만의 짧은 불교 철학에 대한 지식만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었노라는 것을 고백해야 할듯 싶습니다. 더욱이 타고난 순응성과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존경과 애정에 더해 반강제적으로 육성된 반골기질로 인해, 종교적 수용과 비판적 반론이 교차하는 리뷰일 것임을 미리 말씀 드립니다.
《설전雪戰》이라는 본서는 『我, 자기를 바로 보라. 俗, 처처에 부처이고 처처가 법당이네. 佛, 네가 선 자리가 바로 부처님 계신 자리.』 이렇게 세단계로 전개됩니다.
법정 스님과 성철 큰스님의 질문과 답변의 첫시작은 성철 큰스님께서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은 매번 3천배를 하고 나서야 맞이해 주셨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묻고 답변하는데서 부터입니다.
성철 큰스님은 자신은 무슨 대단한 불교인이 아님에도 사람들이 자꾸 찾아오니 자신이 아닌 부처님을 사람들이 찾도록 하기위해 3천배를 하도록 하신 것이라 하더군요. 그런 이야기를 하시며 말씀하시길 " '내말 잘 들어. 중한테 속지 말어. 나, 중이야. 나한테 속지 말어. 도道를 아는 사람이니 뭐니 그런 뜬소문에 속지 말란 말이야.' 그 말 한마디밖에 나는 할 말이 없어요....중략... 자꾸 중한테 속으려고 달려드니, 할 수 없이 철망을 쳐 버린 거예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나를 찾아오지 마시오. 부처님을 찾아오시오.' 하고 말입니다."라고 하시더군요.
-이 말씀은 선불교 책자 한권이라도 읽어본 분들은 다들 아실 '부처가 나타나면 부처를 베어라(죽여라)'는 말씀을 비틀어 하신 말씀 같습니다. 부처라는 형상에 연연해 공경과 헌신을 나무나 돌이나 청동 조각상에 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옳은 길이라는게 선불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문자가 아니라 그 문자 깊은 곳에 담긴 심의를 체득하는 것으로 맹목적인 계율의 준수나 철학적 담론으로 논쟁에서 이기려고만 머리로 불경을 읽고만 있는 그릇된 길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아마도 이런 관점에서 성철 큰스님을 공경하는 이들이 성철이란 법호를 가진 한 사람에게 연연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다가서고 따르는데 그 가는 길이 정체될까 염려하신듯 합니다. 더욱이 그렇게 성철 큰스님을 존경하는 것을 넘어 동경하는 이들이 있게 된다면 그 자체로도 망상이다 또 성철 큰스님을 동경하던 이가 만에 하나, 사람인 성철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을 가려던 걸음에 회의를 느끼기라도 할까 여러 방면에서 고려하시고 이런 말씀도 이런 대응도 하신듯 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진제 차원의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고 가르침하시기 이전에는, 부처님의 전생에 대한 말씀을 하시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붓다가 될 이의 남다른 전생들을 말씀 하시기도 했고 아미타여래와 앞으로 오실 마이트레야 붓다에 대해서도 말씀 하시지 않았습니까? 부처님의 전생들에 대한 말씀은 그로 해서 카르마에 대해 즉, 인간의 삶에서 자신과 타자가 주고 받는 원인과 결과에 대해 가르침하시며 생의 버거움, 납득하기 힘든 절망스런 운명들을 감당할 근거를 주시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연기라는 자신과 대상 사이 서로 주고 받는 상관관계를 설명하시려 하신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또 선을 행하는 삶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정의를 사람들에게 심어주셔서 (깨달음이라는 목표를 성취하고자 욕망을 불러일으키신 이후 그런 욕망을 갖는 이들이 부처님께서 보시기에) 팔정도 이상의 바른 삶(보살행)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더해 사람들이 붓다라며 공경하는 깨달은 분 자신이 남다른 삶을 살았기에 이러한 경지에 이른 것이라는 논리적 귀결에 대중의 이해력이 이르도록 유도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앞서 말한 연기에 대해 카르마에 대해 선한 삶을 살아야할 필요성과 이유에 대해 설명하시며 깨달음에 대한 목표를 지닌 이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과 함께 부처님을 공경하는 관점을 갖도록 유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이미 깨달음이 목표인 이들 외에도 깨달음을 목표로 삼을 사람도 선한 삶을 선택할 사람도 또 깨달음에 바로 이를 근기라고 하나 오성이라고 하나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목표를 성취할 재능(지성, 감성 등등의 다중지능적 재능)을 이르는 그것이 낮은 이들도 부처님을 공경하는 삶 속에서 경건한 삶과 자기정화를 통해 거듭 성장할 것이라 고려하시고 그리 하신 것일 겁니다.
요가에서도 박티요가라는 힌두교 신자들이 그들의 신에 대한 경배와 헌신 자체를 수행으로 삼는 요가분파가 있으니까요. 또 부처님께서도 성문(부처님 설법을 듣고 읽고 계율을 지키며 따르는 수행) 연각(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요가 수행 등과 같은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경우라 이해했었는데 네이버 지식백과 검색으로는 홀로 깨달음을 위해 수행하는 수행자, 홀로 연기에 대해 깨우쳐 깨달음에 이르는 경우를 말한다고 하는군요) 보살(대중 속에서 서로를 위해 살아가며 자신과 타인의 깨달음을 함께 추구하는 수행)의 삼승으로 가르침 하시며 삼승은 방편이며 일승이 있을뿐이라 하셨다해도 분명 각각의 승을 따라 수행하며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요가에서도 갸나요가라 하여 지적인 각성을 거듭 갱신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요가분파가 있습니다. 즉, 경전에 대해 학습하며 궁구하는 것을 통해 깨우쳐가며 깨달음에 이르려 하는 것이지요. 선불교에서는 계율이나 문자에 집착하는 것 마저 경계하고 더우기 부처님의 상에 공경하는 것도 집착하는 것으로 보고 경계합니다만 그런 집착이 미망이라하던 미혹이라하던 어리석음이 그릇되이 착각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라한다해도 그 어리석음 마저 깨달음으로 가는 방편일 수 있을 것입니다. 탄트라나 불교의 밀교 수행들은 상에 집착하는 그런 분별 마저도 이용하여 무드라와 아사나, 만트라, 심상화 등을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으로 삼지 않습니까? 더나아가 탄트라 중에서도 그렇고 불교 밀교의 시륜교에서는 성애(성교) 마저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으로 삼고 있습니다. 인간이 미혹에 쉽게 빠진다면 그 쉽게 빠지는 어리석음을 깨려고만 하기보다 이용할 수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부처님께서 삼승을 말씀하셨고 아미타여래의 극락천에 왕생하기를 사람들이 기대하고 추구하도록도 하신 것이고 미래엔 마이트레야 붓다가 오실 것을 기다리도록 유도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법정 스님께서 "우리에게 일체만법의 근본을 깨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라고 질문 드리자 성철 큰스님께서는 "부처님과 같이 이렇게 명백하게 인간이면 누구든지 다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선포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말하겠습니다."라고 답변하시며 이후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별로 없었다고 하시는데 음... 자이나교에서도 그렇고 요가철학에서도 사람이 깨달음에 이른 경지를 이르는 표현이나 불교에서 붓다의 경지를 수식하는 표현들이나 별반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부도지에서는 복본復本을 말하고 있고 한단고기에도 사람(이 경우는 참사람을 말하는 것이지요)이 되고 싶다며 환웅께 말씀 드려서 웅족과 호족 여성이 삼칠일 간 수행에 정진해 웅족 여성이 웅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복본은 회복으로 의역할 수 있을듯 합니다. 본래의 우리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불교에서 말하는 원성실성, 불성을 이룬 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복본 개념입니다. 그러니 그런 본래 그대로의 자신으로 회복하는 것이니 복본이라 한 것이지요. 모르긴 몰라도 전세계 대다수 지역에서 우리나라의 복본 개념이나 불교의 불성, 자이나교나 요가에서 깨달음을 이르는 것과 같은 경지를 논하는 신화나 철학이 즐비할 것입니다. 종교를 정치화하며 몇차례의 종교회의를 거쳐 카톨릭 교단이 예수님의 상을 정형화하려 정경(캐논)과 외경(아포크리파)을 나누었습니다. 그럼에도 정경 속 예수님의 상 또한 생동감있게 살아있는 존재이시지 무슨 목각인형이나 점토상과 같이 조야해지지는 않았지요. 여하튼 이렇게 예수님 마저 재단하려 드는 정치조직화 되어 변모된 카톨릭이기에 대중 종교로서의 카톨릭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신앙인을 그저 창조주와 구세주와 피조물이자 구원의 대상인 신앙인으로 삼분해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지주의에서는 다르지요. 불가에서 말하는 분별을 그치라는 가르침과 다를 바 없는 말씀이 아포크리파 전체를 채우는 말씀이며 서양의 트리메기투스 헤르메스의 에메랄드 타블렛 가르침은 명백히 천상의 것을 지상에 구현해야 한다는 식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3:21에도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는 것이고요. 유대의 카발라 전승에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처음 그대로의 아담을 아담카드몬이라 하고, 카발라 철학에 입각해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설명하는 영지주의자들은 아담 카드몬을 새로운 시대에 다시 구현하신 분이 예수님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구현을 해내고 출현하신 것은 우리 모두가 그분과 같아질 수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이 구현해내는 그 완전성의 회복 상태(온전한 사람, 다시 말해 참사람)가 과연 그렇게 완벽히도 신적이기만 한 것일까 의문이 일기도 합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절대적이고 무한함에 대해 계속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모든 중생이 부처님 자기와 똑같은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더란 말입니다. 이 능력만 완전히 발휘하면 모두가 다 절대자이고 부처인 것입니다....한 문장만 중략... 그런데 어째서 중생이 근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늘 중생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집착으로 인해 사물의 본디 모습을 분간하지 못하는 분별망상 때문에 이 능력을 깨치지 못해서 입니다."
-성철 큰스님께선 깨달은 이 즉 붓다의 경지를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을 가진 존재라 여기는데 이 역시 아상我相 인상人相 수자상壽者相 처럼 부처님의 상을 분별하여 지니신 것이지 않나 싶습니다. 아니면 진제의 깊이를 숨기고 속제로서 대중을 제도하기 위해 그런 가르침을 펼치신 것인지도 모르지요.
허나 세속의 대중이건 득도하신 큰스님이건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 고 가르침하듯 부처의 경지를 품고 있는 이가 중생이라면 부처님 속의 중생 혹은 부처님의 삶 속에서 중생의 삶과 다를 바 없는 제약 또한 볼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생노병사를 초월하시겠다며 왕위계승권도 갓출산한 아름다운 아내도 첫아들도 아마도 한껏 아름다웠을 궁녀들도 안락한 하루하루도 모두 버리고 떠나 수행에 전념하셨던 분이시지만 결국 늙고 병들어(탁발하신 공양을 드시고 식중독으로 돌아가셨으니)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부처님께서 절대자이시고 무한한 능력이 있다고 강조하시는데 부처님 같은 깨달은 이께서 등장하셨다해도 모든 이들이 제도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도 뭇중생들 누구나가 깨달음에 이르고 보살행을 실천하는 대승적 삶을 살도록 하게는 못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아기를 잉태했다며 대중들 앞에서 부처님을 음해하던 여인도 있었고 법왕 지위를 빼앗으려고 고타마 싯다르타 붓다를 살해하려던 것은 부처님의 사촌형이셨습니다. 이로만 보아도 부처님이라 하더라도 중생의 근기, 오성을 넘어서 깨달음에 이르고 보살행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연기의 법칙에 따른 것입니다. 의원 후보이던 대통령 후보이던 아무리 자신이 상대 후보 보다 국민들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의지가 더 높고 공약의 실천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믿는다해도 국민들이 몰라주면 국민들에게 유익한 삶을 안겨줄 기회 조차 갖지 못하고 맙니다. 물론 정치인들이라면 그런 경우 대중을 이해시키고 납득시키려 유세하는 것이 아니냐 그런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 정치인이라 말하겠지요. 하지만 총선시기 즈음 국가영수가 남북관계 마저 의도적으로 경색시켜 정치적으로 이용한다치면 선거에 악영향은 피할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이런 상황을 출마한 후보자의 능력이 없어서라고 몰아세울 수는 없는 일이지요.
살아가다보면 모사재인 성사재천 謨事在人 成事在天 이란 말 마따나 아무리 잘난 사람도 그 스스로의 능력으로만 모든 것을 이루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지상전에서 이전엔 이 계절에 단한번도 없던 폭우나 지진이나 돌풍이 전쟁의 흐름을 바꿔 놓을 수 있는 것이고 해전에서 역시 예기치 않은 해저지진이나 예상을 벗어난 폭풍으로인한 풍랑이 승전 상황을 백지상태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정치인이라해도 충분히 예상할 수는 있지만 대처방법이 없을 문제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라 해도 그 능력이 절대적이고 무한하기만 한 것이 아니며 가르침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수용하는 상대의 내적 상태에 따른 것입니다. 내가 잘나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오만을 넘어선 극단적인 어리석음입니다. 모든 것은 상호간의 관계성 즉, 불가에서 이르는 연기 속에 서로가 영향력이 있는 것이지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으로 연기를 벗어나 모든 것을 압도한 사람은 인류가 인식가능한 기록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도 짚어보아야 할듯 합니다.
역사상 어떤 사람도 그렇게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을 보인 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십자가에 매달리신 직후 분명히 "다 이루었다"며 자신이 해야할 일을 완수하는 것임을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증명하는 듯한 말씀을 하셨으나 며칠 후인가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하나님 하나님 절 버리시나이까" 라며 절규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분명 자신의 뜻과 다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유추할 수 있을 외마디셨다고 봅니다. 애초 따로 하나님께 하셨다는 기도도 "이 잔이 제게 너무 무거우니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라는 내용이지 않습니까? 어느 부분은 하나님의 연출을 명확히 아셨고 연출에 동참도 하신 후 연기하셨다고 해도 십자가에 매달리신 후 그 상태로 돌아가시기까지 해야 하는 것은 모르셨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니 '도대체 왜 나를 버리시느냐' 는 식의 절규가 있을 수 있는 것이겠지요. 아마도 자신에게 초능력이 태생적으로 쭉 있으셨으니 십자가에 매달리신 이후에도 언제든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실 역할을 다 하시고 나면 자신의 능력으로 손발에 박힌 못이 저절로 뽑히고 상처가 아물고 에녹과 엘리야처럼 하나님께로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런데 막상 이젠 다 되었으니 십자가에서 내려가자 싶을 때 능력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서 절규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이지 인간의 의지 따위는 자신에게 주어진 설정과 배경 내에서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뿐입니다. 야곱은 모든 재산을 잃고 자식은 죽고 딸은 강간 당하고 집은 무너지던가 그랬고 나중엔 (한국에서 나병이라고 번역하는) 온몸에 종기와 괴사가 이는 질병에 걸리는 등 말 그대로 총체적으로 모든 것을 잃는 버티기 어려울 난이도의 시험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리신 악신을 사울 왕에게 보내시어 그후 사울 왕은 미친듯이 다윗을 죽이려 했다는 성경 내용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는 그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직접 명하셔서 아브라함이 가장 사랑하던 아들을 자기 손으로 헌제를 바치던 곳으로 데려가 살해하려는 순간까지 가기도 했었습니다. 이를 근거하자면 엘리사가 단지 대머리라고 놀린다고 어린이 42명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해서 곰을 불러내 찢어죽인 사례나 아브라함이 아내를 여동생이라며 원하는 남자에게 보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아내를 보호하신 경우나 여호수아의 적국의 민간인들 마저 어린이는 노예로 삼고 여자는 성노예와 가사 노예로 삼기 위해 살려둔 후 성인남성은 노소를 막론하고 무자비하게 몰살하던 경우나 다윗 왕이 신하의 아내를 탐해 그를 죽음이 확실한 전장으로 보내 사망하게 하고 그의 아내를 빼앗은 것이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솔로몬 왕이 배교하는 경우나 룻의 딸들이 소돔과 고모라 이후 아빠를 강간한 것이나 노아가 물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직후 주사로 바바리맨 추태를 부린 것이나 하다못해 카인이 지 동생 죽인 것까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인간 의지의 무력함을 보여주려 하신 것이지 않은가 싶기도 합니다. 하와에게 보낸 뱀도 하나님께서 인간이 이후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여 땅 위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기 위한 전제로 인간이 실락하도록 하려는 계획을 펼치시려 사단을 이용하신 것일지 모릅니다.
다시 예수님으로 돌아가 보아도 예수님께서 성전의 환전상들과 비둘기를 가둬놓고 파는 이들의 상을 엎으셨던 것도 예수님 스스로의 의지일 가능성만큼이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예수님의 내면에 격분을 불러일으킨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께서 보이신 여러 성향으로 보아 늘 성스럽기만 한 분이 아니라 다혈질에 분노조절장애 성향도 보이셨고(이미 언급한 성전 환전상들에 대한 폭력 일화) 여자도 나름 밝히셨고(예수님 곁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며 대접하던 여인과 주방에서 일하다 와서 자신만 수고하고 있다며 그녀를 그만 주방 일하게 보내주라던 그녀의 언니 일화) 그러면서도 부를 싫어는 하셨으나 타인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은 호탕하게 받아들이실 만큼 "청빈하게 살며 부는 모두 경멸하고 멀리하라"는 식의 편견에 치우치지 않으신 분(비싼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며 자신의 머리결로 닦아드렸던 여인 일화) 입니다. 때론 독선적이셨고(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는 말씀을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인가 자매를 바로 옆에 두고 하신 그 일화) 편협하기도 하셨고(공정한 추와 공정한 저울의 비유가 구약에도 등장하리만치 경제가 일상이고 사망하여 천국에 가면 심판을 할 때 가장 먼저 '너는 사업을 할 때 정당하게 했느냐?'고 묻는다는 종교만큼이나 경제를 중시하는 유대 사회에서, 부자는 천국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비유를 드셨고 돈과 관련된 업무를 보는 이들을 경멸하고-세리를 바리새인과 외식하는 이들과 동급으로 언급하시며 비난하셨다-심지어 실제 물리적 타격까지 하셨다-성전의 환전상 공격 일화: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돌발적 테러에 해당한다-) 찌질할 때 마저 있으셨지만("이 잔이 제게 너무 무거우니 거두어 달라"던 기도와 동시에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고 박성호씨 다중이 캐릭 실사판이셨던 분이다. "다 이루었다" 해 놓고는 "하나님 하나님 절 버리시나이까?"라는 대사가 이어진다는 건 아무리 보아도 설정 자체가 다중이 캐릭 포텐 터지는 연기셨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뛰어난 지성과 인간적 매력의 소유자로서 성스러운 길을 선택할 안목과 의지와 훈훈함을 모두 지니셨던 분입니다.
《제 2의 성서 아포크리파 신약시대》 중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시절 토마스 복음』이라는 『토마스복음』과는 별개의 아포크리파에서 어린시절의 예수님은 무섭고 섬찟하기까지 한 순수함을 보이십니다. 남다른 능력을 지니셨기에 누구보다 바르게 자라야 할 필요성이 더 컸던 분이셨습니다. <맨 오브 스틸>에서 지구에 와서 클라크 켄트로 자라나는 칼 엘처럼 예수님께서도 아마 갈등의 시절을 충분히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런 이후에야 클라크 켄트와 칼 엘 사이에서 갈등하던 한 사나이가 자신의 내면을 조율하고 수퍼맨으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였듯 예수님께서도 그리스도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신 것이겠지요. 그래서 그런 어린시절의 무섭고 섬찟한 순수함을 스스로 제어하게 되신 것일테지요. 그 과정에서 많은 슬픔과 아픔이 그를 잠식했을 것임을 넘치게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점은 <맨 오브 스틸> 속 수퍼맨은 너무도 이상적인 인간상을 만화가가 창조해내 살냄새가 나지 않으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인간미 넘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바로 위의 아포크리파에서 해당 장과 절의 내용을 줄거리만 요약하면, 어린이였던 예수님께서 물웅덩이를 만들며 놀았던 자리에 다른 어린이가 버드나무가지로 웅덩이를 건드려서 웅덩이의 물을 빼버리자 화가 난 어린 예수님은 그 어린이를 저주해서 온몸이 바짝 말라 죽어가는 지경이 되게 만드셨다고 합니다. 피해아동의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가 예수님의 '양부'인 요셉에게 하소연 하자 예수님께서 피해 아동의 소년 몸의 작은 일부분은 남겨두고 다 치유해 주셨다고 합니다. (몸의 작은 일부분은 남겨두고 치유하시다니 예수님 잔인하신 분, 피해아동 캐안습)
무엇보다 예수님의 무섭고 섬찟한 순수함이라 표현하던 그런 면이 주목되는 사건은 어린 예수님이 길을 가고 있는데 다른 어린이가 달려오다가 예수님의 어깨에 부딪쳤다고 하는군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너는 더이상 걸을 수 없어" 라고 저주하셨고 해당 피해아동은 그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고 합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님의 '양부'인 요셉에게 "그 아이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을 하게 하던가 아니면 여기를 떠나 주시오. 그 아이가 우리 아이들을 죽이기 때문이요"라며 하소연 합니다. 요셉이 이 일로 어린 예수님께 "넌 왜 사람을 해쳐서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박해하게 만드느냐?"고 탓하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니 탓하진 않겠지만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한 이들은 영원한 벌을 받을거에요"라고 저주합니다. 그러자 요셉을 찾아와 하소연하던 사람들 모두가 눈이 멀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식이 죽었음에도 저주가 아니라 축복을 하도록 하면 않되겠냐는 부탁 수준의 소극적 대응만 하던 순둥이 같은, 자식 잃은 피해자가 눈까지 멀어야 하는 2차 피해의 대상이 되고만 것입니다. 게다가 영원한 벌을 받을거라 했으니 이 첫 저주가 파훼되지 않는다면 저들은 자식도 잃고 눈도 먼 채 평생을 살다가 죽어서도 장님인 채여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요?
예수님께서는 출생 전후 부터 어린시절까지 그 시절 예수님의 등장으로 사망한 해당 피해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는 축복이기 보다 대재앙이던 날들을 거치셨습니다. 복음서에서 동방박사를 보고 당시 이스라엘의 통치자인 로마 정치인이 방문 이유를 묻자 동방박사들은 이스라엘의 왕이 나셨다고 그래서 방문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당시 통치자가 문제의 근원을 없애려 그즈음 태어났거나 태어나는 아이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탄생 자체가 당시 피해아기들과 산모들과 가족들 전체에게는, 이스라엘 거주민들 대다수에게는 어마어마한 대재앙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대재앙이 인류에게 축복이 되는 역설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하시는 수퍼 하이레벨 조크인 모양입니다.]-
법정 스님께서 성철 큰스님과 대담하던 그 시절 흉악 범죄로 피해사망 사례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법정 스님께서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인간 노릇을 할 수 있을까요?"라고 성철 큰스님께 물으셨고 성철 큰스님께서는 "요새 사람들이 너무나 물질에 치중한다고 물질에 치중해서 물질에 자꾸 매달리다 보니 이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중략... 그 근본 원인을 보면 서양의 물질문명을 너무 맹종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물질 탓만한다고 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돈을 맹종하고 개인 성취와 성장만 중시하는 사회, 인간 내면의 이기성과 이타성 중 그러한 이기주의 성향만을 주목케하고 그러한 성향을 확장하도록 조장하는 제도적 문제점을 개인의 문제로 개인이 바뀌어야 한다에서 문제 인식과 문제 해결 방안을 그쳐버리면 문제 해결에 이르는 것은 요원해질 것입니다. 개인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만할 뿐 개인의 변화에 제도적 차원의 기여를 간과한다면 변화를 외치는 목소리는 공염불일 뿐이지 않습니까?
개인이 변해야 한다며 설법하고 다른 승려분들에게도 그런 말하라 한다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철 큰스님, 법정 스님 입적하신 이후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그 시절의 문제점들은 변한게 없을 것입니다. 문제 많은 세상 적당히 정도에서 그친다면 "뭔 말이 뭔 말이 필요해!"-미스 에이- 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양산될 때 개인이 문제니 개인이 변해야 한다며 제도적 차원의 접근을 시도 조차 안한다면 실제 변화를 바라는 말은 아닌 것이 명백하다 싶습니다.
실제적 변화를 위해 제도적으로 접근해야 할 일은 가정 폭력과 학교(유치원 포함) 폭력에 강력 대응하도록 해당 범죄에 처벌을 강화해야 합니다. 또 가해자들이 수감기간 동안 재범의 여지가 없도록 폭력성향과 공감능력이 결여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다각도의 심리치료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가해자에 대한 치료라면 피해자 역시 지속적인 가정 폭력과 학교폭력으로 부터 받은 내적 상처를 치료해야 합니다. (지속적 폭력의 피해에 노출되어 갖게된 이상심리로) 자살이나 자해 등과 성장 이후 결혼하여 자신의 자녀나 배우자에 대해 있을 수 있을 가해 성향을 즉, 고려할 수 있을 모든 경우의 2차 피해를 차단하기 위해 피해자의 심리치료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피해가 없다고 하더라도 성장과 성취만을 추구하도록 교육하여 인간의 이기성과 이타성 중 유독 한가지만 제도적 차원에서 강화하는 현 교육 제도를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교가 정보습득이나 문제해결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다중지능을 육성하는 곳으로 혁신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공감능력 없이 이성만 강화된 인간들이 기득권층에 있는 세계가 어떤지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초중고교 동안 정보 습득이 아니라 정서 함양과 정서적 소통과 교류를 통한 사람들이 '사람다운 사람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기대하는 그런 사람으로 자라게 해 주어야 할 일입니다. 다중지능에 대한 연구와 교육학 교육심리학 예술치료를 중심으로 심리치료 전반에서 시작해 자아초월심리학에 이르는 과정으로 아이들을 정서적 영적으로 충만하게 자라나는데 중점을 둔 교육제도로 바뀌어야 합니다. 명상과 뇌심리학 전반을 적용해야 하며 파동학과 음성학 등의 학문과 빛을 이용한 치료에 대한 최근 연구 성과를 적용하거나 더욱 연구를 지원하여 심리치료와 영적 성장에 활용해야 할 일입니다. 그에는 요가 철학에서의 만트라, 얀트라, 차크라에 대한 연구 결과를 수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과학 기술과 요가의 전통을 결합한다면 사람의 정신과 영성을 위해 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지 모릅니다.-
법정: 우리사회의 존립 터전으로 여겨 온 기존의 가치체계나 규범이 지금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성철: 이 병을 고치려면 아무래도 정신문명이 동양문명이 서양 보다 수승하다고 보는데, 그래서 우리 고유의 동양 정신문화를 새로 복구시켜서 정신이 위주가 되어 정신이 물질을 지배해야 합니다.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게 되면 역지배가 됩니다. 그러면 인간은 자기 상실을 하고 힘을 가진 사람은 완전히 동물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약육강식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참다운 바른 생활을 하려면 정신이 주가 되고 물질이 종이 되어 따라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중략... 지금 서양의 나라들도 그런 것 같은데, 물질만 자꾸 발달하면 인간은 자신을 상실하고 악행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유념해야 합니다.
-성철 큰스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질문명이 금전만능 주의적인 세계상을 말씀하신다면 부분적으로는 동의 합니다.(돈이 문제라고 해도 결국 돈에 집착하는 사람과 성장만 중시해서 성장과 사회적 성취(성공)의 척도를 부의 축적으로 가늠하게 해 돈 자체를 어떤 방식으로든 획득하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로 비약하게까지 만든 사회에도 문제가 있으니 부분적으로는 동의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돈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집 없는 이에겐 집이 되고 굶주린 이들에게는 식량이 되고 병든 이들에게 치료가 되는 마법의 원료입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만 동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철 큰스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질문명이, 과학기술까지를 포함한 개념이라면 과학기술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 둘다가 있는 것이지 어두운 면만 두드러진다고 볼 수는 없을듯 합니다. 컴퓨터 사줬더니 야동만 보고 이상한 짓만 한다고 초등 고학년 아동이나 중고딩들을 나무라는 부모님이 아직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런 부모님들 말씀만큼이나 답답한 말씀이었습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야동만 보는 소년소녀들이 어디있겠습니까? 기성세대가 답답하게만 새로운 기술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자라나는 아이들이 과학기술의 결실로 시간 낭비만 하고 있을리 없습니다. 영화와 TV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이런 식의 비난은 있었을 것이나 사회고발 다큐멘터리 영화도 있고 문학만큼 경우에 따라서는 문학 이상의 정서적 지적 충격을 주는 영화도 있습니다. TV 역시 바보상자라는 평과는 달리 뉴스와 시사, 건강, 역사 교양프로그램 등등으로 정보전달자로서의 역할도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물질문명은 인간의 정신을 부패케 한다며 아이들 EBS채널도 못보게 하고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는 인터넷 강의도 수강 못하게 하는 등의 극단적 처방을 하는 사람이라면 물질문명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정신이 문제인 겁니다.
앞선 문단에서 말했듯 과학기술과 요가철학의 만트라, 얀트라, 차크라의 형상과 빛과 소리를 연계할 수 있다면 인간의 영적 진보에 마저 과학기술은 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영적 차원에 까지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는데 물질의 부정적 면에만 주목해야 할까요? 그리고 애초 정신문명에 있어서 동양문명이 서양문명 보다 수승하다는 말씀 역시 근거가 미흡해 보입니다. 서양인들이 되려 동양의 명상과 철학 체계 연구에 매진하다시피해서 그렇지, 《유럽의 신비주의》를 보면 인도와 중국, 한국, 일본의 명상과 철학 체계와 전혀 다름없는 정신문명을 유럽은 충분히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카톨릭이 정치권력화 되며 예수님의 상을 정형화하려 성경을 정경과 외경으로 분리하면서 신앙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남기며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어린시절 기록 마저 줴다 가지치기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영지주의를 일부만 권력화된 카톨릭에 포섭하고 대부분의 영지주의 가르침은 사장하다시피 하였기에 유럽인들 스스로가 동양에서만 정신문명을 찾게 되었던거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물질문명 차원에서는 20세기가 다 지나도록 눈에 띠게 서양에 밀렸던 동양으로서는 정신문명은 우리가 낫다는 정신승리를 하고 있게나 되었던듯 합니다.
하지만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며 색과 공이 다르지 않고 공과 색이 다르지 않다는 그것이 불가의 가르침이 아닙니까? 그런데 정신이 먼저니 물질을 따르면 자기를 상실하며 동물이 되느니 (게다가 인간은 애초에 동물입니다. 식물도 광물도 아니지요) 자신을 상실하고 악행이 더 많아질거라는 것은 지나친 판단착오라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물질을 과학기술을 포함하지 않는 단지 돈이라고만 본다하더라도 화엄경에서 장자(부자)들이 선을 행하며 보살행을 실천하는 근거가 되는 것도 결국은 돈이 아닙니까?
또 연기적 차원에서 논한다해도 정신이 있기에 물질이 있고 물질이 있기에 정신이 있는 것입니다. 분자생물학과 뇌 과학적으로 봐도 마음의 변화가 뇌 내 호르몬 분비에 영향을 주며 그와는 역으로 뇌 내 호르몬 분비에 영향을 주어도 마음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파동학인가 양자학인가로 보아도 뇌를 감싸고 있는 전자기 파동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뇌 내 호르몬 분비 변화를 유도 할 수 있으며 그 역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그럼 결국 뇌뿐만 아니라 온몸을 감싸고 있는 장(필드) 차원의 변화만이 육체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상태도 그러한 장 차원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장이나 파동을 물질 보다는 영에 가까운 것으로 본다면 영적 변화가 육체에 영향을 주고 육체의 변화 역시 영적 변화를 준다고 보면 틀린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정신과 물질은 서로 영향력을 주고 받는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지 정신만이 물질을 지배하고 압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초끈이론을 잘은 모르지만 초끈이론에서는 하나의 원형고리가 근원적 파동에 의해 물결치는 것이 초끈이며 이것이 물질을 이루는 소립자를 존재케 하는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어떤 과학자는 초끈이론이 수학적으로는 성립되지만 증명할 길이 없는 가설이라 주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초끈이론으로 물질과 정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교에서는 희론이라 하여 가치없는 일로 여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왕에 시작한 말이니 끝맺고 보자면 초끈을 구성하고 있는 원형의 끈이 물결치는 상태 즉 파동이 초끈에 더해진 상태가 물질을 존재하게 한다고 하는 그 상관관계 속에서 물결치게 하는 파동을 정신으로 보고 원형의 끈을 물질적 요소로 본다면 정신과 물질은 상호 영향 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초끈이론으로 그러한 상관 관계(연기) 자체가 정신과 물질을 상호 존재하게 한다는 이미지를 전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애초에 그 둘이 결합된 상태가 물질이 존재케 하는 구성요소이니 끈을 물질적 요소로 파동을 정신적 요소로 전제한 자체가 오류입니다. 하지만 상호 관계성 속에서 모든 것이 존재하지 무엇이 무엇을 압도한다는 건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계(저는 물질차원의 세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에서는 그다지 깊은 여운으로 남기에는 부적절한 가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법정 스님께서는 다시 인간이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것을 걱정하시며 "이와 같은 가치관의 변화 속에서 현대인이 의지할 가치 의식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하십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인간의 근본 가치는 인격에 있는 것이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가치관을 바로잡으려면 인간의 존엄성부터 회복시켜야 된다고 봅니다....중략... 인간의 존엄성은 명경明鏡 , 깨끗한 거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거울은 본시 깨끗하고 아무 티도 없는데, 먼지가 꽉 앉으면 제 역할을 못합니다. 이것은 거울의 근본 능력을 상실하는 것입니다....중략... 먼지만 닦아 내면 딴데 가서 거울을 구할 것도 없고 찾을 것도 없습니다. 먼지만 닦아 내면 깨끗한 본래의 거울 그대로이니까요. 절대적 인격, 인간의 존엄성을 복구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라고 답변하십니다.
-성철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 시켜야 한다는 것이 바로 《부도지》에서 말하는 복본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듭남일 겁니다. 거듭남은 잠시 뒤로 미루고 복본에서 부터 시작하자면 부도지에서 복본이 필요케 된 이유 즉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를 회복해야 할 필요성이 있게 된 스스로를 잃게 된 원인은 포도 열매로 상징된 감각 세계의 총체를 통해 오미五味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미라는 다섯가지맛으로 상징되는 것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불교에서 말하는 육식에서 의식을 제외한 전오근前五根에 해당하는 것인듯 합니다. 즉, 감각을 통해 의식이 외부로 향하기에 -동양에서는 흔히 술취한 원숭이로 상징 되는- 미혹(어리석음, 또 어리석음을 통한 착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라 합니다. 다시 말해 감각이 대상을 향하는 것이 분별을 일으키는 근본원인이 되는 것이겠지요. 성철 큰스님께서 말씀하시는 불교에서 "거울을 닦는다"는 비유는 결국 감각을 제어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요가에서 말하는 제감制感일테지요. 한국 선도에서 말하는 지감止感이기도 할테구요. 감각을 제어하는데서 부터 시작해 의식을 통제하여 이르는 것이 止(사마디)이고 불교 수행은 그와 함께 觀(위빠사나)가 있습니다. 불교수행이 요가와 차별화되는 바는 위빠사나인듯 합니다. 변성의식(초월의식) 상태에 이르는 것은 거의 모든 명상체계가 의도하는 바이나 특정지은 의식수준에서 대상을 해체하며 지성을 닦는 것은 불교 외에서는 흔히 찾기 어려울 수행인듯 합니다. 한국에 소개된 저작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불교 만큼의 역사를 지닌 수행법 중 국내에서 불교의 위빠사나와 같은 수행법을 본 바가 없습니다. 어쨋든 근본적으로 대다수의 수행체계들과 목표가 같은 수행법은 감각을 제어하는데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변성 의식이 깊은 수준에 이르면 수행의 성취가 있다고 하던데 그 의식수준을 유지하며 그 의식 수준에서 지혜를 활용가능하면 깨달았다고 하는가 봅니다. 불교의 철학과 요가의 철학이 유사하면서도 달라 불교 이외의 다른 모든 가르침과 자신의 가르침을 차별화하며 다른 가르침들은 유사하지만 다르다는 뜻으로 사이비(似而非)라 붓다께서 말씀하시기도 했지요. 각 가르침의 차이 같은 이렇게 세밀하고 방대하게 들어서야 할 것은 직접 깊이 공부하여 검증하고 습득하여야 할 겁니다.
아! 기독교의 거듭남에 대해서 짚어야겠군요. 기독교의 거듭남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이고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요한일서의 말씀을 근거할 때 사랑을 깨닫고 실천하며 사는 것일 겁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마지막 결실로 물질질료로는 사람의 육체를 만드시고 그 육체에 하나님 자신의 숨(영)을 불어넣으셔서는 사람을 생령이게 하셨지요. 그러니 사람은 하나님의 부분을 담은 존재입니다. 요한일서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를 전제 할 때 우리는 우리 내면에 사랑을 담고 있는 존재이며 우리 자체가 이미 사랑일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의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 안의 그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지 못할 때 사랑은 아마도 우리 안에서 잠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내면의 사랑을 일깨워 사랑 속에서 사랑의 손길을 서로에게 건네며 더불어 함께 사랑 가득히 살아가야 하는 것이 사람의 삶인 것일 겁니다. 그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신 우리의 존재 이유이리라 성경을 읽으며 생각케 되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영생과 거듭남의 이유가 따로 있는거라면 누구든 그 이유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이렇게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행과 기독교인이 살아야 하는 다스리는 길은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의 거듭남도 영생도 다스리는 것도 모두 사랑하기 위해서이고 사랑을 깨닫고 실천하기 위해서이고 사랑으로 서로를 보살피며 더불어 행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여기까지가 설전이라는 본서의 세 단원 중 첫번째인 『我, 자기를 바로 보라』의 내용이었습니다. 앞으로 두차례 더 리뷰를 올릴 것이지만 아마 4월 중순 경에 올리게 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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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라 2016-03-18 공감(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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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문현답, 과거에서 오늘을 만나다
현문현답, 과거에서 오늘을 만나다
우선 종교에 연연하지 않고 두 어른의 이야기에 주목하고자 한다. 삶을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이들이기에 그 삶에 담긴 지혜를 엿보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시대가 안고 있는 물음이나 개인적인 관심사에 혹 힌트라도 얻을 수 있길 기대한다.
우선 성철 스님은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혹독한 고행과 엄격한 자기 수행, 그리고 어떠한 지위와 권력 앞에서도 초지일관 자신의 원칙을 고수”했던 원칙주의자의 모습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에 반해 법정 스님은 글을 주요한 매개로 대중과의 소통하며 “온후하면서도 강직한 수도자의 자세와 품위를 잃지 않은 삶과 글”로 친숙한 이미지로 알려진 스님이다.
한국 현대 불교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던 두 어른인 성철과 법정은 세속의 나이차이 만큼이나 불교 내에서도 어른과 후배 종교인으로 인연은 깊었다고 한다. 법정은 성철을 불가의 큰 어른으로 따랐고, 성철은 뭇 제자와 후학들에게 대단히 엄격하면서도 유독 제자뻘인 법정을 인정하고 아꼈다는 것이다.
이런 인연의 과정에서 성철과 법정의 대화를 ‘첫 번째 이야기 : 我, 자기를 바로 보라, 두 번째 이야기 :俗, 처처에 부처이고 처처가 법당이네, 세 번째 이야기 : 佛, 네가 선 자리가 바로 부처님 계신 자리’의 세 가지 주제로 분류하고 엮은 책이 설전이다. 두 거인들의 대화를 통해 불교의 중심적 관심사의 핵심적인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책 제목 설전雪戰은 "차갑고 냉철하면서도 부드러운 수도자의 자세를 '눈'이라는 매개로 형상화하는 한편,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웃게 만드는 유일한 다툼인 '눈싸움'의 이미지를 통해 성철과 법정 두 사람 사이에 오간 구도의 문답과 인연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한다.
성철의 원리원칙을 중요하게 여기는 강직함을 법정의 부드러움으로 이끌어내어 종교적 현안들을 대중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평이한 수준으로 진행된다. 이것이 두 거인이 대중들에게 내놓고 있는 따스한 마음자리로 보인다. 여기에 이 대담집의 제목을 설전으로 부여한 까닭이 드러나고 있다.
시종일관 성철 스님의 어른스러운 타이름과 대중을 배려하는 따스한 마음을 보여주는 법정의 질문이 종교로써 불교에 대한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보인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진정한 가치를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온전한 마음자리에 빛을 발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길 바라는 따스함이 함께한다. 원택 스님의 증언을 통해 성철과 법정 사이에 있었던 일화들과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담긴 내밀한 의미를 접할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의 매력 중 하나다. 거장들의 여유가 가져다주는 따스하고 넉넉한 마음이 돋보이는 기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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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無盡 2016-03-07 공감(6)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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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된 말, 그 속의 진리
<절제된 말, 그 속의 진리>
너무나 아름답고 화려한 미사여구가 넘친다. 말 잘하는 사람들도 넘친다. 그러나 듣기 좋으면 좋을 수록 화려하면 화려할 수록 잠시동안의 위안을 줄 지언정 이후에 찾아오는 허무함도 커진다. 아름답고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정말 진심이 담긴 그런 말을 듣고 싶어지는 그런 때이다.
설전이라는 단어만 보고 처음에는 설이 눈 설자인 줄 몰랐다. 왜 이렇게 썼을까 궁금했는데 불교에서 수도자의 수행을 눈에 비유한다니 법정스님과 성철스님의 대화 자체가 수도자의 대화라고 할 수있으니 이리 말한 듯하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하게 조용히 이어가는 그들의 대화는 조용히 눈이 쌓이듯 읽는 이들로 하여금 마음의 깨달음을 쌓게 해주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도 성철 스님과 법정 스님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다 .종교를 떠나서 두 분이 남긴 말과 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둘이 불교에 귀의한 것만 해도 20년이상 차이가 난다고 한다. 법정 스님에 비하면 성철 스님은 이미 명성을 얻은 위치에 있던 분이다. 이런 나이 차와 그를 뛰어 넘는 두 사람의 통함 때문에 개인적으로 율곡과 퇴계의 만남이 떠오르기도 했다.
성철스님은 스님들에게 유독 엄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고 한다. 호랑이라 할만큼 엄하고 엄햇지만 단 한 사람 법정 스님에게만 유하게 대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법정 스님의 글을 인정햇다고 한다. 스스럼 없이 문답을 주고 받았을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 이면서 벗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조금만 유명하다면 기자든 보통 사람이든 한번 보겠다고 수 없이 찾아드는데 성철 스님은 그들을 향해 자신이 아닌 부처를 찾으라 일렀다. 그래서 성철스님을 보려면 삼천배를 해야 한다고 하니 이에 대해서도 의도하는 바를 깨달으면 결국 모든 것은 외부적인 것보다 자신의 마음에서 깨달음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법정이 질문하고 성철 스님이 대답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다른 무엇보다 마음에 와 닿는 것은 마음을 비우고 자기 자성을 깨치는 것이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혹은 지금의 복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고 절대자에게 의지하지만 결국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해 복을 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누구의 도움이나 의지보다 자기 자성을 통해야 세상을 이해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은 욕심에서 비롯되기에 그 말이 가장 와 닿는다.
너무 빠른 템포로 부와 성공을 위해서 달려가는 현대인들에게 잠시동안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도와주는 책이 아닌가 싶다. 어렵고 힘든 말로 이끄는 대화가 아니니 꼭 한번 읽으면 좋겟다. 이제는 날도 따뜻해졌으니 성북동의 길상사에도 한번 찾아가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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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 2016-03-07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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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스님이 묻고 큰 스님이 답하다
[참고] 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수 있음.
[법정이 묻고 성철이 답하다]
이 책은 알라딘 인터넷 서점의 책 전용 SNS인 북플이라는 곳에서 알게 된 책이다. 법정 스님을 좋아해서 책에 눈이 바로 갔다. 법정 스님이 떠나신 봄이 벌써 여섯 해 전이다. 세월이 참 빠르다. 그는 떠났지만, 여전히 마음 속에는 그가 늘 자리잡고 있다. 그런 법정 스님이 성철 스님과 나눈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것이 바로 <설전>이라는 책이다. 부제가 "법정이 묻고 성철이 답하다"라고 되어 있다.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라는 말씀으로 유명하신데, 나는 성철 스님의 책은 읽어본 적이 없다. 성철 스님이 입적하신 것이 1993년이었다고 하니,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책과 담을 쌓고 지내던 시절이라서, 그 분의 책을 접하지 못한 듯… 성철 스님이 어떤 분인지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 책을 통해서 그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어 좋았다. 이 책은 부제에서 말한 것처럼 법정 스님이 묻고, 성철 스님이 답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법정 스님보다 성철 스님의 생각이 더욱 많이 드러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으로 치면 대담이나 토크콘서트를 책으로 엮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묻고 답하는 경우, 답하는 사람이 주인공인 것이 맞지만, 좋은 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좋은 질문이다. 이 책은 책의 뒷표지에 적힌 것처럼 현문과 현답들로 이루어져 있다. 책 두께는 그리 두껍지 않다. 그리고 책에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자연의 사진들이 많이 들어있다. 그래서 금방 읽을 수 있지만, 그 적은 양이 담고 있는 슬기와 교양은 깊은 심금을 울린다.
[눈싸움]
책 제목 설전. 설전이라고 하면 말로 옳고 그름을 다툰다는 설전(舌戰)이 바로 생각이 난다. <썰전>이라는 TV 프로그램도 생각이 나고… 그런데 책 제목에 옆에 적혀 있는 한자를 보니 눈 설(雪), 싸울 전(戰). 이라고 써있다. 우리말로 해석해보면 눈싸움. 어린 시절 친구들과 눈이 온 겨울이면 눈을 뭉쳐서 던지면서 놀던 그 눈싸움. 책제목을 왜 그렇게 지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후반부의 대화 주에 두 분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많은 시주들 앞에서 이루어진 대화가 있다. 다른 제자들은 성철 스님 앞에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는데, 법정 스님은 성철 스님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면 꼬치꼬치 캐묻기도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좀더 진면목의 답을 이끌어내신 것이다. 이렇듯 두 분이 서로 주고 받는 말씀이 마치 즐거운 눈싸움 같았기 때문에 제목을 눈싸움이라는 뜻의 <설전(雪戰)>이라고 하지 않았나 생각했다. 나중에 책 뒷날개를 보니 아래와 같이 책제목이 <설전(雪戰)>인 이유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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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고 냉철하면서도 부드러운 수도자의 자세를 눈이라는 매개로 형상화 하는 한편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고 오히려 서로 웃게 만드는 유일한 다툼인
'눈싸움'의 이미지를 통해 설전과 법정 두 사람 사이에 오간 구도의 문답과 인연을 표현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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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불교]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불교에 관한 이야기. "불교란 무엇입니까?", "타 종교와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등 처음 불교를 접하는 사람들이 가질 만한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질문들도 있고, 중도 이론이나 중국 선종에 관한 질문 등 비교적 불교를 접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낯선 질문과 답변도 오가곤 했다. 아무래도 두 분이 불교 신도들 앞에서 나눈 대화들도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예전에 불교에 관련된 책들을 좀 접해서 그리 낯설지 않게 읽으면서, 오랜만에 불교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새기는 기회가 되어 좋았다. 그런데 이 책을 법정 스님이 생전에 쓰신 수필집처럼 생각하고 책을 편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설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성철 스님과 법정 스님의 대화의 또 다른 주제는 우리네 삶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관한 질문들도 오가곤 했다. 많은 대화 중에 요즘 우리나라 언론이 새겨들었으면 하는 내용과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에 특히 공감을 했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우리나라 언론의 편향성은 이제 당연한 것으로 생각들 하고 있는 것 같다. 주변 사람들 중에도 주요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분명 다른 의도를 가지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히려 대안 언론을 찾아 듣는 이들이 더 많다.
객관성이 결여되고 주관성이 깊이 개입한 기사들... 그런 언론들을 향해 성철 스님이 주시는 깊은 가르침 같은 글이 실려 있었다. 그들이 들을 리 없겠지만 말이다. 이번 선거에서 여당이 졌으니, 그들은 더욱 편향적이 될까 싶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더욱 편향적이 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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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언론이든지 사회의 공기라는 것,
불편부당(不偏不黨)해야 한다는 근본정신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기관이나 단체의 이용물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곤란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춘추필봉(春秋筆鋒)
말 그대로 시퍼런 필봉을 세워 나가야만 사회에 공헌을 하고
사회에 대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지,
만약 언론이 근본정신을 버린다면 사회와 인류에 해를 주지 않겠어요?
지금도 잘하고 있겠지만,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명정대한 필봉으로
춘추필봉을 발휘하면 사회를 잘 선도하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살릴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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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지도자의 덕목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일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을 다시 읽고 발췌해 보았다. 이 쉬운 지도자의 덕목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그나마 이번 선거에서 그런 지도자들에게 백성들이 회초리를 들어준 것을 보고, 아직 우리 백성들의 힘은 세다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희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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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단체의 지도자라고 하면 근본 전제가 사리사욕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라면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정치하는 사람이 사리사욕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 그것은 자살이 되고 맙니다.
어떤 단체의 지도자라면 그 단체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죠.
그렇게 하려면 사리사욕에서 완전히 떠나야 합니다.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면 그 단체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것을 버려야만 국가도 살고 민족도 살고 단체도 살고 자기 자신도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정치를 결국엔 국가와 민족에 큰 손해를 줄 뿐만 아니라
자기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지도자의 자격이란 참으로 사리사욕을 완전히 버린
무아(無我)사상에서 전체를 위해 사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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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어떤 언론이든지 사회의 공기라는 것,
불편부당(不偏不黨)해야 한다는 근본정신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기관이나 단체의 이용물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곤란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춘추필봉(春秋筆鋒)
말 그대로 시퍼런 필봉을 세워 나가야만 사회에 공헌을 하고
사회에 대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지,
만약 언론이 근본정신을 버린다면 사회와 인류에 해를 주지 않겠어요?
지금도 잘하고 있겠지만,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명정대한 필봉으로
춘추필봉을 발휘하면 사회를 잘 선도하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살릴 수 있겠지요.
어떤 단체의 지도자라고 하면 근본 전제가 사리사욕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라면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정치하는 사람이 사리사욕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 그것은 자살이 되고 맙니다.
어떤 단체의 지도자라면 그 단체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죠.
그렇게 하려면 사리사욕에서 완전히 떠나야 합니다.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면 그 단체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것을 버려야만 국가도 살고 민족도 살고 단체도 살고 자기 자신도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정치를 결국엔 국가와 민족에 큰 손해를 줄 뿐만 아니라
자기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지도자의 자격이란 참으로 사리사욕을 완전히 버린
무아(無我)사상에서 전체를 위해 사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30쪽
내가 자꾸 깨친다 깨친다 하는 것은 사람이 그런 깨칠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다면 만날 노력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오. 땅 밑에 금이 많이 있는 줄 알면,
거기에 금이 꼭 있을 것 같아서 땅을 파면 금이 나오지만,
암만 파도 금이 없을 것 같으면 헛일이지 않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생에게 부처님과 같은 그런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깨치는 공부를 해도 헛일입니다.
문제는 그 광맥이 사람 사람 마다에 다 있나 없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에게 그런 무진장한 대광맥,
금광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진장의 대광맥이
사람 사람 가슴속에 다 있다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이것을 개발하고 이것을 소개한 것이 불교의 근본 생명선입니다.
46쪽
무엇보다도 정신적으로 모든 생각을 쉬어 버리는 것, 이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모든 구하는 생각, 이것이 마음에 들어 있으면 아무리 섭생을 잘해도 소용이 없거든요.
그런 구하는 생각을 어느 정도 떨쳐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쉬고 사는 이것이 건강에 좀 도움이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85쪽
흔히 `용서를 하자. 용서를 하자`고 하는데, 불교의 근본사상에 용서란 없습니다.
용서란 내가 잘하고 남이 잘못됐다는 것인데,
모든 것의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며,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남의 인격을 근본적으로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설사 어떤 사람이 칼로 나를 찌른다 할지라도
찌르게 한 것의 근본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참회`를 해야지 저 사람을 `용서`하다니요.
그래서 우리 불교사전에서 `용서`라는 말을 빼야 한다고 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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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holic 2016-04-16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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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과 법정 스님의 문답을 통해 불교의 의미와 살아가는 자세를 가르쳐주는 책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말로 대중들에게도 친근한 성철 스님과
'무소유' 등 여러 에세이로 대중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던 법정 스님.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이름은 들어봤을 두 큰 스님들의 문답을 실은 이 책은
그동안 잘 몰랐던 두 사람의 인연과 함께 구도자로서 평생을 수행한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성철 스님은 입적하고 나서 언론에 보도되면서 알게 되었는데 이 책을 보니 그의 삶은
정말 속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범접할 수 청빈한 수도자의 삶이었다.
그럼에도 본인과 자신과 같은 길을 가는 후학들에게는 대단히 엄격해서
제자와 후학들은 성철 스님 앞에선 오금도 펴지 못했다는데,
법정 스님만큼은 때대로 쓴소리도 하고 대화를 나누는 중에 궁금한 걸 그냥 넘기지 못했다니 성철 스님이
법정 스님을 그만큼 인정했고 법정 스님도 성철 스님의 인간적 면모를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에선 법정 스님이 성철 스님에게 궁금한 점을 물으면 성철 스님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불교가 지향하는 가치와 성철 스님의 생각, 그리고 성철 스님의 여러 에피소드들이 담겨 있었다.
평생을 오로지 수행에 힘쓴 성철 스님은 의식주 세 가지에서 최저의 생활을 하면서
최고의 노력을 하자는 신념으로 성불해서 중생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살기 위해 노력했다.
공부하는 스님들에게 권한 5계는 잠을 적게 잔다, 말하지 말라, 문자를 보지 말라, 과식하지 말고
간식하지 말라, 돌아다니지 말라였는데, 정말 수행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잘 보여주었다.
영원한 진리를 위하여 일체를 희생한다는 생활자세로 끊임없이 정진한 성철 스님은
본래 생사가 없고 삶 이대로가 열반이고 해탈이라고 얘기한다.
현실을 바로 보기만, 마음의 눈만 뜨면 지상이 극락이라고 하는데
그런 경지에 이르기는 결코 쉽지 않겠지만 정말 모든 게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근본적으로는 타당한 말씀인 것 같다. 단지 삶의 무게에 치이고 현실에 시달리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의 눈을 닫은 채 욕망의 노예로 살다보니 삶이 고통스럽고 지상이 지옥과 같이
느껴지는 게 아닌가 싶다. 더 놀라운 사실은 성철 스님은 불교의 근본사상이 중생이 본래 부처이고,
현실이 극락세계이며 현실 이대로가 절대라는 데 불교의 근본이 서 있다고 얘기한다는 점이다.
그동안 내가 아는 불교는 중생이 부처의 가르침을 본받아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되면
윤회에서 벗어나 극락세계로 갈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성철 스님은 부처나 극락세계를 먼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고 얘기한 것이다. 그러면서 불교를 믿는 첫 조건으로 모든 생명,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 모시고, 모든 존재를 부모같이 섬기며, 모든 사람, 모든 존재를 스승으로 섬기는
3대 조건을 제시하는데, 실천하기는 결코 쉽지 않지만 만약 세상 사람들이 저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정말 모든 사람이 부처고 바로 여기가 극락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현실과의 괴리감이
너무 큰 게 문제인 듯 하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으로 불교는 많은 지식을 얻거나 절대신의
계시에 의지해서 세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의 자성, 즉 일체만법의 자성을 바로 깨쳐서
부처가 되었고 바로 거기서 불교가 출발하고 있다고 설명하는데, 여기에 불교의 차별화된 가치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절대자에게 기대는 게 아닌 스스로 깨달음에 의해 상대유한의 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 인간 스스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인간에게 최고의 가치를 둔다는 점에서 절대자를 믿는 다른 종교들과의 차이점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이 책에 나오는 성철 스님과 법정 스님의 인연 얘기도 흥미로웠는데, 이 책을 읽다 보니 그동안
얼마나 불교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었고, 삶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온 게
아닌가 하며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루하루 아등바등 살아가기 바쁘다 보니 뭐가 중요한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무 생각없이 허송세월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자책도 했는데,
성철 스님의 말씀을 제대로 실천해서 살아가기는 쉽지 않겠지만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충실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면서 살아간다면 성불은 아니더라도 보람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꼭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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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ny 2016-03-10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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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과 성철 그리고 설전雪戰
아무래도 설전하면 말싸움이 먼저 떠오른다. ‘법정이 묻고 성철이 답하다’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에 담긴 두 분이 나눈 ‘설전雪戰’은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웃게 만드는 유일한 다툼”인 눈싸움의 의미이기도 하고, 또 ‘설전舌戰’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화라고 하기에는 수도자로 살아온 두 분의 지혜와 통찰이 만나서 더 큰 생각으로 더해지는 과정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법정 이번 기회에 선의 요체를 한마디로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성철 날이 추우니까 핫옷(솜옷)을 입었지요?
법정 에...... 하하, 알겠습니다.
그리고 성철스님을 가까이서 모셔온 원택의 내레이션이 있어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 부분이 없었다면 법정스님이 깨달은 것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었을 테고, 그러면 이런 선문답을 내가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거기다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사진과 그림이 더해져서 마치 나 역시 그분들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 기분마저 들었다. 정말이지 책을 읽으면서는 뭐처럼 너무 행복했다. 남아있는 페이지를 확인하며 줄어드는 것을 아쉬워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막상 서평을 쓰려니 참 만만치가 않다.
나도 성철스님을 만나 뵈려면 3천배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왜 그런 제안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미처 알지 못해서, 그 부분이 기억에 남았다. 자신을 보기 위해 3천배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절을 하고 기도를 하면서 스스로 변화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나만 그런 것일까? 남을 위해 살아가라고 하면 조금은 거창하게 희생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일체 중생이 행복하게 해주십시오’라며 절을 하는 것만으로도 남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고, 마음가짐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 예전에 간절한 바람으로 108배를 하는 친구 옆에서 딱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저 사람이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십시오’라고 함께 절을 했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들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뭔가 많이 건너뛰면서 글을 쓰는 거 같지만서도, 늘 뭔가 대단한 것을 생각하지만 실천에 옮기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것 같아서, 이런 마음이 든 거 같다.
그리고 인간은 본디 깨끗한 거울이었다라는 말도 생각난다. 이제는 뭔가 마법의 주문 같기도 한 ‘긍정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 읽다 보니, 도리어 부정적인 나의 사고방식이 더욱 부각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약간 삐뚤어지는 마음으로 나는 원래 부정적인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다라고 우기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나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말 태어날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부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봤을까? 사실 그것은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지를 닦아내는 과정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내 마음을 움직인 거 같다. 물론 본래의 내 심성이 부정적일 수도 있지만, 사실 제대로 닦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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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6-03-17 공감(4)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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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전(雪戰)
한국을 대표하는 각 종교계의 지도자들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각 종교의 본래 가르침을 따르고 삶에 크게 대입시켜 뭇사람들의 본보기가 되는 종교인 및 종교 지도자들을 보면 마음 한 켠에선 '독실한 신앙심의 참모습과 종교의 위력'이 스며들곤 한다.그런데도 나는 아직까지는 어떠한 종교를 갖지는 못했다.나이가 들어가면서 삶의 이정표를 굳건히 지켜내기 위해 종교 하나쯤은 갖어야겠다는 생각은 늘 있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 절을 가곤 했다.할머니께서는 사월 초파일과 가족의 안녕을 비는 의미에서 불공(佛供)을 지극 정성 드리셨는데,어디 갈 때마다 나를 꼭 데리고 가곤 했다.할머니를 따라 가면 늘 먹을 것이 생기곤 했다.그것이 어린 내겐 참을 수 없는 유혹이고 기대감을 부풀어 오르게 했던 모양이다.절에서 나오는 각종 음식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조촐하고 정갈하여 뒷맛이 개운했다.사찰 본당에서 불어오는 향불 내음과 함께 먹는 절 음식은 입에 인이 박힌 듯 오랜 세월이 흘러도 할머니,어머니가 해 주신 음식 맛과 같이 내 뇌리에 깊게 아로새겨져 있다.지금도 어린 시절 졸졸 따라 갔던 절의 풍경과 음식은 마음의 본향과 같이 아련하기만 하다.
한국 현대 불교계의 지도자로 잘 알려진 성철(性撤)스님과 법정(法頂)스님의 대담집을 접하게 되었다.뜻깊은 시간이 되었다.도서의 제목에서 시사하듯 설전(雪戰)은 차가운 하얀 눈 위에 두 불교 지도자의 말씀을 덧대고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제자격인 법정 스님이 스승격인 성철 스님께 불교계에 입문하게 된 동기부터 신앙인으로서의 본분과 행각(行脚),(삶의) 철학 등을 들려 주고 있다.성철 스님은 고이 고이 보자기에 싸여진 삶의 진리와 말씀,나아가야 할 길 등을 담담하게 설파하신다.두 분의 인연은 해인사 백련암(白蓮庵)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내가 본 두 분의 공통점은 물질적 소유욕과는 거리가 먼 (보기 드문) 무소유의 상징 인물이다.
이 글은 성철 스님이 "누구든 자신을 찾아오려거든 3천 배(拜)를 해야 한다"는 불문율부터 시작한다.3천 배를 하라는 의미는 남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하라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그것을 수행하면 심중에 변화가 찾아오고 이타적인 생각과 감정이 생긴다는 법이다.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게 하여 성철 스님을 찾아 온 본인에게 이롭게 하고 싶었다는 속뜻을 알게 되었다.불교는 깨친 사람(붓다)의 가르침이라는 의미로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같이 스스로 깨우쳐서 우주 만법의 근본을 바로 알게 되면,부처 자신과 같이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그런데 무릇 중생은 집착이 강하다 보니 사물의 본디 모습을 분간하지 못해 부처님과 같은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을 깨우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물질적 가치관에 심히 경도되어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다.인간 본래의 이성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의 모습은 사라지는 대신 돈과 물질의 힘이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으로 둔갑하여 정글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야만 하게 되었다.정신의 힘이 부재하고 물질의 힘이 드세게 되면 개인적.사회적으로 선행보다는 악행의 우려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즉 인간의 근본 가치는 인격이 우선이고 물질은 다음이다.이러한 화두가 오래 전부터 있었음에도 여전히 물질적 가치관이 우선시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인간의 존재 이유,인간의 존엄성의 회복은 우리 모두가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다.성철 스님의 공양은 매우 간소하고 의복은 더욱 검소하다.성철 스님은 '영원한 진리를 위하여 일체를 희생한다.'는 신념으로 일관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성철 스님의 생사관은 따로 없다는 것이다.삶 자체가 열반이고 해탈이다는 점과 눈을 감았을 때는 윤회고 눈을 떴을 때엔 대자유!라는 점이 인상 깊다.인간이 마음의 눈을 떠야 지상이 비로소 극락으로 다가온다는 가르침이 마음 속 깊게 다가온다.
그러면서 성철 스님은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 목표를 "상대유한의 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즉 상대유한의 세계는 생멸의 세계이고 절대무한의 세계는 해탈의 세계로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이것은 개인의 태도와 마음 자세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또한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는 점은 겸손하면서 선행을 많이 쌓으려 한다.인과사상과 업(業)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생전에 잘해 놓아야 후세에게 정신적 가르침과 음양의 덕이 쌓일 것이기 때문이다.세 가지 화두(자기를 바라 보라,처처에 부처이고 처처가 법당이네,네가 선 자리가 바로 부처님 계신 자리)로 성철 스님의 불교관과 삶의 이력을 전반적으로 느껴 보는 시간이 되어 무척 다행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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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 2016-03-08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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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문과 현답들,설전(雪戰)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은 법정 스님과 성철 스님의 묻고,답하기 설전이라기에 더 궁금해진 이야기입니다. 물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설(舌)이 아니라 서로 깨끗한 눈을 주고 받으며 그러다보면 웃게 되는, 그런 설(雪)전이라는데요. 20년 나이차라서일까요. 직설적으로 보이는 법정 스님의 질문과 약간은 엄격한 분으로 보이는 성철 스님의 오랜 시간 수도로 만들어진 답을 보며 그 분들이 어떤 모습으로 이 대화를 하고 있을지 상상해보게 됩니다.
"차를 마신다고 해서 그냥 물 끓여서 차만 홀짝 마시고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을 끓이고 비우고 또 다기를 꺼내서 매만지고 펼치고 마시고 나서 씻고 거두어들이고 하는 이런 과정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것은 차뿐만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일 자체가 그래야 합니다."- 법정
'삶은 고행이다' 라고 스님들은 말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요. 현실을 바로 보기만 하면, 마음의 눈만 뜨면 지상이 극락이라는 성철 스님의 말씀이나 살아있는 일 자체가 여러 과정이고 좋은 것이라는 법정 스님의 말씀이 날 괴롭히고 있는 일들이 내 마음이 놓지 못한 집착때문이고 그건 나만이 놓을건지 말건지 결정할 수 있다는 걸 다시 알게 합니다.크게 "자기를 바로 보라, 처처에 부처이고 처처가 법당이네, 네가 선 자리가 바로 부처님 계신 자리" 라고 말씀해주시는데요. 깨달음을 위한 공부의 5계로 '잠을 적게 잔다.','말하지 말라','문자를 보지 말라.',과식하지 말고 간식하지 말라.','돌아다니지 마라.'라는 평범한 우리가 하기 힘든 일을 말씀하시긴 하셨지만 내 안에 부처가 누구나 있는 것이고, 마음만 잘 닦으면 자신이 가진 내면의 진리가 투명하게 보일거라는 성철 스님의 이야기가 멀게만 느껴졌던 불교가 왜 우리 곁에 그리 오래 있었는지를 알게 합니다.
그 분들의 이름만 알고 있던 지라, 바흐의 음악보다 목포의 눈물이 낫다라 한 답에 미소를 지었다거나 면 옷을 좋아하는 법정 스님을 따로 챙겨주셨고 받은 그 옷을 소중히 입고 있다거나 '수도자다운 처신'을 마음에 새기게 됐다는 이야기등의, 작지만 두 분 사이가 어땠는지 알 수 있게 하는 일화들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같은 그 분들의 속깊은 마음을 알게 하는데요. 시간이 갈수록 서로에게서 같은 길을 잘 가고 있는 이를 보며 뿌듯함을 느끼기도 하고, 길을 닦아 놓은 분을 믿고 따라가는 기쁨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 그 분들의 설전이 중간없이 가볍거나 무거운 쪽으로만 생각이 쏠리는 우리들에게 진리를 찾아가는 분들의 그 과정이나 삶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짐이 덜어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불교하면 생각나는 게, 불경을 정성껏 외우던 할머니 모습입니다. 아침마다 불경을 읽고나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때의 난 뭔가를 외우는 것만으로 어떻게 사람 마음이 달라질까가 궁금해지곤 했는데요. 아마 이런 궁금증을 가진 이들을 위해 법정 스님은 묻고, 성철 스님은 모르는 척 답을 주신거 아닐까 합니다. 길지않음에도 곰곰히 생각해봐야 하는 이야기들이 사람의 깊이가 어떤 생각에서 나오는지를 조금은 알게 하는데요. 삶에 질문이 생기는 이들에게 두 분의 현문과 현답 모두가 위로와 의지가 되지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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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하루 2016-03-06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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