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평화운동’이 새 돌파구일 수 있는 5가지 이유
황대권 생명평화운동가
[황대권 칼럼]인간 넘어 생명계 전체로 확장된 ‘평화’, 폭력 배제, AI 등장, 기후 위기, 행동 중시 등 5가지 전략 부재의 탁발순례와 절 명상 운동 한계를 넘어, 영적 완성을 위한 과정으로서의 투쟁
황대권 생명평화운동가, '야생초 편지' 작가
나는 평생 명함 없이 살았다. 살아오면서 남에게 알릴 만한 공적 직함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속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시간이 되면 강연과 글쓰기, 사회봉사 활동 등을 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번에 제천 산골에 폐교 하나를 구하여 생태학교를 만들기 위해 나름 홍보를 할 필요가 생겨 명함을 하나 만들었다. 그냥 주소와 연락처만 쓸까 하다가 그래도 나의 정체성을 표시하는 단어가 있어야겠기에 잠시 고민타가 ‘생명평화운동가’라고 써넣었다. 아직 사상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생소한 단어로 자신을 규정한 것이다.
새만금 개발과 ‘생명평화’
‘생명평화’라는 용어는 사회운동판에서도 종교인을 포함해 일부 인사들이 사용할 뿐 운동권에서마저 낯선 용어이다. 한때 생명평화라는 말이 언론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인 2000년 11월 14일 종로5가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 2000명의 종교인들이 모여 ‘새만금사업 백지화’를 요구하며 <생명·평화 선언>을 발표한 무렵이었다.
세계적 희귀 자연자원인 갯벌을 메꿔 산업용지로 쓴다는 개발주의자들의 만행을 저지하기 위해 종교인들이 먼저 깃발을 들었지만 국민여론은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오락가락하였다. 생명평화선언에 참여했던 종교인들은 무언가 획기적인 저항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새만금 살리기 삼보일배’를 기획하였다. 2003년 6월 불교의 수경 스님을 비롯한 4대 종단의 대표들이 새만금 갯벌에서 출발해 “세번 걷고 한번 절하면서” 서울까지 무려 305Km의 거리를 기어갔다. 히말라야 설산에서만 볼 수 있었던 오체투지 순례가 사회운동 한복판에 나타난 것이다. 이때부터 생명평화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난 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외곽의 벌집 앞에서 날고 있는 꿀벌들 모습. 2024.4.8. AP 연합뉴스
‘생명 일반’을 위한 삼보일배
새만금살리기 삼보일배는 생명평화운동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아니 삼보일배만큼 생명평화운동의 방법론과 철학을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고 본다.
먼저, 처음으로 살아있는 생명 자체가 사회운동의 주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전에도 나무를 살리자 또는 야생 반달곰을 살리자는 등 개별 생명체를 주제로 한 적은 있었어도 ‘생명 일반’을 내세운 적은 없었다. 새만금 갯벌에 서식하는 바지락이나 망둥어, 갯지렁이 등의 생명이 인간과 똑같다는 주장은 충격이었다. 백년 가까이 개발 열풍에 젖어있던 사람들은 자연 또는 자연 속에 깃들어 사는 작은 생명들은 인간을 위한 보조적인 장치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거대한 개발사업이 ‘하찮은’ 생명들에 의해 중단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결국 새만금 사업은 예정대로 진행되었지만 이 운동은 개발주의자들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한다. 이후로 전개되는 모든 개발행위에서 환경운동가 또는 생명평화운동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난 5일, 베네수엘라 아라과 주 추아오 해안에서 베네수엘라 중앙대학교 동물학 및 열대 생태학 연구소의 프리아스 교수가 대포알 해파리(Stomolophus meleagris)를 보여주고 있다. 해파리는 아라과(중북부)의 청록색 바다에 떠다니면서 베네수엘라 해안의 어부들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2024.4.5. AFP 연합뉴스
인간 넘어 생명계 전체로 확장된 ‘평화’
삼보일배 당시 참가자들은 생명평화라는 용어를 쓰긴 했지만, 당시에는 생명과 평화라는 두 단어를 나란히 붙여놓은 형태였다. ‘생명 존중’과 ‘평화 실현’이라는 두 개의 이념을 동시에 달성하자는 의도이다.
생명 존중은 알겠는데 왜 갯벌에다 대고 평화 실현을 외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의 평화운동은 거의 모두가 인간들 사이의 분쟁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외친 구호였기 때문이다. 삼보일배는 인간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 그리고 모든 개체 생명들 사이에 평화가 절실하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무자비한 개발행위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평화,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생명들 사이의 평화를 깨는 폭력행위와 다를 것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했다. 삼보일배로 인해 평화 문제는 인간 사회를 넘어 생명계 전체로 확장되었다.
2003년 5월, 새만금 개발에 반대하는 삼보일배 시위.
폭력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없앤 삼보일배
삼보일배는 사회운동의 방법론에 있어서도 대전환을 이룬 계기가 되었다. 그전에는 말로 하다가 안 되면 위력을 동원하여 상대를 굴복시키거나 양보를 얻어내곤 했다. 여기서 위력이라 함은 세를 과시하는 것에서부터 적극적 폭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가 있다. 보통은 말로 하다가 잘 안 되면 폭력사태로까지 발전하는 경우가 많아 기득권자들은 저항활동가를 ‘불법 폭력옹호자’라고 매도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삼보일보는 원천적으로 폭력의 가능성을 없애버렸다. 굳이 폭력적 요소를 찾는다면 활동가가 자신의 몸에 가하는 폭력 정도이다. 삼보일배는 하나로 연결된 세상에서 눈앞에 벌어지는 생명파괴의 현실은 나 역시 ‘공범’이라는 ‘자기반성’이 깔려 있다. 그래서 생명파괴를 적극적으로 막지 못한 자신에 대한 형벌로 극기와 인내를 요구하는 행위를 선택한다.
새만금 살리기에서는 세 번 걷고 한 번 엎드려 절하는 오체투지 행위를 선택했다.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는 훗날 여기에 참가한 일부 성직자들이 만성적인 관절염과 신경통에 시달린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삼보일배를 주도한 수경스님은 무릎 연골이 다 닳아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삼보일배에는 투쟁의 대상을 상대방이 아닌 나 자신으로 돌림으로써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역설이 숨어 있다. 폭력을 쓰지 않으면서 폭력에 버금가는 효과를 내자면 자기 자신을 극한상태로 몰아야 한다.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 독립과 대중교화를 위해 그토록 많은 단식투쟁을 한 이유이다.
나는 평생 명함 없이 살았다. 살아오면서 남에게 알릴 만한 공적 직함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속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시간이 되면 강연과 글쓰기, 사회봉사 활동 등을 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번에 제천 산골에 폐교 하나를 구하여 생태학교를 만들기 위해 나름 홍보를 할 필요가 생겨 명함을 하나 만들었다. 그냥 주소와 연락처만 쓸까 하다가 그래도 나의 정체성을 표시하는 단어가 있어야겠기에 잠시 고민타가 ‘생명평화운동가’라고 써넣었다. 아직 사상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생소한 단어로 자신을 규정한 것이다.
새만금 개발과 ‘생명평화’
‘생명평화’라는 용어는 사회운동판에서도 종교인을 포함해 일부 인사들이 사용할 뿐 운동권에서마저 낯선 용어이다. 한때 생명평화라는 말이 언론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인 2000년 11월 14일 종로5가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 2000명의 종교인들이 모여 ‘새만금사업 백지화’를 요구하며 <생명·평화 선언>을 발표한 무렵이었다.
세계적 희귀 자연자원인 갯벌을 메꿔 산업용지로 쓴다는 개발주의자들의 만행을 저지하기 위해 종교인들이 먼저 깃발을 들었지만 국민여론은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오락가락하였다. 생명평화선언에 참여했던 종교인들은 무언가 획기적인 저항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새만금 살리기 삼보일배’를 기획하였다. 2003년 6월 불교의 수경 스님을 비롯한 4대 종단의 대표들이 새만금 갯벌에서 출발해 “세번 걷고 한번 절하면서” 서울까지 무려 305Km의 거리를 기어갔다. 히말라야 설산에서만 볼 수 있었던 오체투지 순례가 사회운동 한복판에 나타난 것이다. 이때부터 생명평화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난 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외곽의 벌집 앞에서 날고 있는 꿀벌들 모습. 2024.4.8. AP 연합뉴스
‘생명 일반’을 위한 삼보일배
새만금살리기 삼보일배는 생명평화운동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아니 삼보일배만큼 생명평화운동의 방법론과 철학을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고 본다.
먼저, 처음으로 살아있는 생명 자체가 사회운동의 주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전에도 나무를 살리자 또는 야생 반달곰을 살리자는 등 개별 생명체를 주제로 한 적은 있었어도 ‘생명 일반’을 내세운 적은 없었다. 새만금 갯벌에 서식하는 바지락이나 망둥어, 갯지렁이 등의 생명이 인간과 똑같다는 주장은 충격이었다. 백년 가까이 개발 열풍에 젖어있던 사람들은 자연 또는 자연 속에 깃들어 사는 작은 생명들은 인간을 위한 보조적인 장치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거대한 개발사업이 ‘하찮은’ 생명들에 의해 중단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결국 새만금 사업은 예정대로 진행되었지만 이 운동은 개발주의자들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한다. 이후로 전개되는 모든 개발행위에서 환경운동가 또는 생명평화운동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난 5일, 베네수엘라 아라과 주 추아오 해안에서 베네수엘라 중앙대학교 동물학 및 열대 생태학 연구소의 프리아스 교수가 대포알 해파리(Stomolophus meleagris)를 보여주고 있다. 해파리는 아라과(중북부)의 청록색 바다에 떠다니면서 베네수엘라 해안의 어부들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2024.4.5. AFP 연합뉴스
인간 넘어 생명계 전체로 확장된 ‘평화’
삼보일배 당시 참가자들은 생명평화라는 용어를 쓰긴 했지만, 당시에는 생명과 평화라는 두 단어를 나란히 붙여놓은 형태였다. ‘생명 존중’과 ‘평화 실현’이라는 두 개의 이념을 동시에 달성하자는 의도이다.
생명 존중은 알겠는데 왜 갯벌에다 대고 평화 실현을 외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의 평화운동은 거의 모두가 인간들 사이의 분쟁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외친 구호였기 때문이다. 삼보일배는 인간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 그리고 모든 개체 생명들 사이에 평화가 절실하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무자비한 개발행위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평화,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생명들 사이의 평화를 깨는 폭력행위와 다를 것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했다. 삼보일배로 인해 평화 문제는 인간 사회를 넘어 생명계 전체로 확장되었다.
2003년 5월, 새만금 개발에 반대하는 삼보일배 시위.
폭력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없앤 삼보일배
삼보일배는 사회운동의 방법론에 있어서도 대전환을 이룬 계기가 되었다. 그전에는 말로 하다가 안 되면 위력을 동원하여 상대를 굴복시키거나 양보를 얻어내곤 했다. 여기서 위력이라 함은 세를 과시하는 것에서부터 적극적 폭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가 있다. 보통은 말로 하다가 잘 안 되면 폭력사태로까지 발전하는 경우가 많아 기득권자들은 저항활동가를 ‘불법 폭력옹호자’라고 매도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삼보일보는 원천적으로 폭력의 가능성을 없애버렸다. 굳이 폭력적 요소를 찾는다면 활동가가 자신의 몸에 가하는 폭력 정도이다. 삼보일배는 하나로 연결된 세상에서 눈앞에 벌어지는 생명파괴의 현실은 나 역시 ‘공범’이라는 ‘자기반성’이 깔려 있다. 그래서 생명파괴를 적극적으로 막지 못한 자신에 대한 형벌로 극기와 인내를 요구하는 행위를 선택한다.
새만금 살리기에서는 세 번 걷고 한 번 엎드려 절하는 오체투지 행위를 선택했다.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는 훗날 여기에 참가한 일부 성직자들이 만성적인 관절염과 신경통에 시달린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삼보일배를 주도한 수경스님은 무릎 연골이 다 닳아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삼보일배에는 투쟁의 대상을 상대방이 아닌 나 자신으로 돌림으로써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역설이 숨어 있다. 폭력을 쓰지 않으면서 폭력에 버금가는 효과를 내자면 자기 자신을 극한상태로 몰아야 한다.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 독립과 대중교화를 위해 그토록 많은 단식투쟁을 한 이유이다.
2023년 2월 8일 러시아 시베리아의 도시 옴스크에 서리가 내린 날 일몰 시간에 정유소의 굴뚝에서 배기가스와 증기가 솟아오르고 있는 가운데 새들이 그 위로 날아가고 있다. 2023.2.8. 로이터 연합뉴스
영적 완성을 위한 과정으로서의 투쟁
삼보일배 투쟁의 또 하나 특징은 기도와 명상을 투쟁의 일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삼보일배를 종교인이 시작했다는 점에서 당연한 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사실 이 지점은 운동사에 있어 획기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사회운동의 현장에서 ‘투쟁 정신’이나 ‘투지’ 등을 강조하는 일은 많지만 ‘투쟁의 영성’ 또는 ‘사회 영성’을 얘기한 적은 없었다. 삼보일배는 투쟁을 영적 완성을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보았다. 투쟁을 하되 같은 생명인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영적 완성을 통해 상대를 변화시키자는 의도가 깔려 있다. 실제로 이후 진행된 각종 투쟁 현장에서 기도와 절 명상, 오체투지 등이 널리 행해짐으로써 투쟁문화가 훨씬 다양하고 깊어진다.
지난 9일 워싱턴에서 기후환경 활동가들 활동가들이 미국 가스협회 앞에 모여 고객의 에너지 요금에서 얻은 자금을 그룹의 반기후환경적 로비 활동 비용으로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시위는 가스 기기와 관련된 건강 위험에 대한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2024.4.9. AP 연합뉴스
순례와 명상의 ‘생명평화 결사’
새만금 살리기 삼보일배 투쟁의 성과는 같은 해에 탄생한 <생명평화 결사>(이후 ‘결사’로 표기)라는 사회운동 단체에 고스란히 이어진다. 결사의 주역이었던 도법스님은 2000년 <새만금 살리기 생명평화선언>의 참여자이기도 했다. <결사>는 삼보일배 투쟁의 철학과 방법론을 그대로 가져왔다. ‘순례’와 ‘절 명상’을 가지고 한국사회의 폭력 수위를 낮추고 진영을 떠나 상생화해의 분위기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한 염원을 품고 2004년부터 2008년까지 <결사>는 길위에서 먹고 자며 전국을 도는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감행한다. 5년 동안 순례 행진에 참여한 사람만 수십 만에 이를 정도로 큰 기획이었지만 당시 운영진의 한 사람으로서 평가한다면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통해 생명평화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고 사회운동에 새로운 기운이 스며든 것은 틀림없으나 5년 후의 세상이 더 평화로워지지는 않았다.
<결사>는 “세상에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고 외쳤지만, 세상은 우리의 염원을 비웃듯 더 폭력적으로 변했고 양극화 현상은 심해져만 갔다. 한류문화의 첨병 노릇을 했던 ‘올드 보이’나 ‘오징어 게임’, ‘기생충’ 같은 영화만 보더라도 한국 사회의 폭력 수위와 경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인간의 성악설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 싶은 정도이다.
18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해안에서 남방큰돌고래 무리가 유영하고 있다. 2024.3.18. 연합뉴스
탁발순례와 절 명상 운동의 한계
탁발순례를 마치고 내부적으로 토론이 이어졌다. 정치세계의 무자비함에 비해 우리의 운동방식이 너무 ‘나이브’했다는 반성에서부터 써클운동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얘기까지 많은 논의가 있었다. 무소불위의 자본력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디지털 문명 속에서 순례와 절 명상 만으로는 어떤 임팩트도 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더욱이 기후위기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서민 대중의 삶이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 같은 낭만적 구호는 설 자리가 없었다. 학계에서는 ‘생명평화’가 과학적 용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논의에 끼어들기를 주저하고, 운동권에서는 아직도 근대적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에서 근대를 초월하는, 더욱이 정신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사회운동에 동참하기를 꺼려했다. 대중은 대중대로 먹고 살기 힘든데 팔자 좋은 소리를 한다며 먼 산 구경하듯 했다.
영적 완성을 위한 과정으로서의 투쟁
삼보일배 투쟁의 또 하나 특징은 기도와 명상을 투쟁의 일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삼보일배를 종교인이 시작했다는 점에서 당연한 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사실 이 지점은 운동사에 있어 획기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사회운동의 현장에서 ‘투쟁 정신’이나 ‘투지’ 등을 강조하는 일은 많지만 ‘투쟁의 영성’ 또는 ‘사회 영성’을 얘기한 적은 없었다. 삼보일배는 투쟁을 영적 완성을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보았다. 투쟁을 하되 같은 생명인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영적 완성을 통해 상대를 변화시키자는 의도가 깔려 있다. 실제로 이후 진행된 각종 투쟁 현장에서 기도와 절 명상, 오체투지 등이 널리 행해짐으로써 투쟁문화가 훨씬 다양하고 깊어진다.
지난 9일 워싱턴에서 기후환경 활동가들 활동가들이 미국 가스협회 앞에 모여 고객의 에너지 요금에서 얻은 자금을 그룹의 반기후환경적 로비 활동 비용으로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시위는 가스 기기와 관련된 건강 위험에 대한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2024.4.9. AP 연합뉴스
순례와 명상의 ‘생명평화 결사’
새만금 살리기 삼보일배 투쟁의 성과는 같은 해에 탄생한 <생명평화 결사>(이후 ‘결사’로 표기)라는 사회운동 단체에 고스란히 이어진다. 결사의 주역이었던 도법스님은 2000년 <새만금 살리기 생명평화선언>의 참여자이기도 했다. <결사>는 삼보일배 투쟁의 철학과 방법론을 그대로 가져왔다. ‘순례’와 ‘절 명상’을 가지고 한국사회의 폭력 수위를 낮추고 진영을 떠나 상생화해의 분위기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한 염원을 품고 2004년부터 2008년까지 <결사>는 길위에서 먹고 자며 전국을 도는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감행한다. 5년 동안 순례 행진에 참여한 사람만 수십 만에 이를 정도로 큰 기획이었지만 당시 운영진의 한 사람으로서 평가한다면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통해 생명평화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고 사회운동에 새로운 기운이 스며든 것은 틀림없으나 5년 후의 세상이 더 평화로워지지는 않았다.
<결사>는 “세상에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고 외쳤지만, 세상은 우리의 염원을 비웃듯 더 폭력적으로 변했고 양극화 현상은 심해져만 갔다. 한류문화의 첨병 노릇을 했던 ‘올드 보이’나 ‘오징어 게임’, ‘기생충’ 같은 영화만 보더라도 한국 사회의 폭력 수위와 경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인간의 성악설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 싶은 정도이다.
18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해안에서 남방큰돌고래 무리가 유영하고 있다. 2024.3.18. 연합뉴스
탁발순례와 절 명상 운동의 한계
탁발순례를 마치고 내부적으로 토론이 이어졌다. 정치세계의 무자비함에 비해 우리의 운동방식이 너무 ‘나이브’했다는 반성에서부터 써클운동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얘기까지 많은 논의가 있었다. 무소불위의 자본력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디지털 문명 속에서 순례와 절 명상 만으로는 어떤 임팩트도 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더욱이 기후위기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서민 대중의 삶이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 같은 낭만적 구호는 설 자리가 없었다. 학계에서는 ‘생명평화’가 과학적 용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논의에 끼어들기를 주저하고, 운동권에서는 아직도 근대적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에서 근대를 초월하는, 더욱이 정신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사회운동에 동참하기를 꺼려했다. 대중은 대중대로 먹고 살기 힘든데 팔자 좋은 소리를 한다며 먼 산 구경하듯 했다.
지난 11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외곽의 유채밭 사이를 달리고 있는 사람. 2024.4.11. AP 연합뉴스
생명평화운동이 돌파구가 될 수 있는 5가지 이유
근대 이래의 모든 사회적 모순이 중첩되어 있는, 소위 “비동시적인 것들의 동시적 혼재”라는 특이한 상황에서 과연 생명평화운동은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감히 말하건대, 충분히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따라와 준다면” 같은 허황된 전제는 필요 없다. 생명평화운동은 다음과 같은 특성으로 인해 미래의 대안사회를 열어갈 화수분 같은 운동이 될 수 있다.
첫째, 폭력을 근원적으로 배제하기 때문에 ‘폭력의 악순환’에 빠진 인류문명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 만약 폭력이 문명 발달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문명 자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문명을 써내려 가야 한다.
둘째, 물질과 인간 중심의 문명사가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인해 더 이상 존재 의미가 없어졌다. 인공지능으로 인해 물질 세상은 더 발전하겠지만 그 발전은 인간의 행복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물질의 물질을 위한 발전이 될 것이다. 달이 차면 기울듯 이제부터는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질적 도약의 시대가 전개될 것이다. 정신적 가치의 중심에는 ‘생태영성’이 자리하고 있다.
셋째, 기후위기와 환경재앙이 이러한 전환을 가능케 하고 있다. 인간은 기술의 발달로 이 위기를 극복하려 하지만 어떤 기술도 자연의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다. 기술을 만든 인간 자체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넷째, 생명평화운동은 전혀 새롭고 낯선 운동이 아니다. 인류문명이 물질 진보와 폭력에 의지하여 발달해왔기 때문에 그동안 비주류 영역에 있었던 대안의 사상과 삶이 비로소 빛을 보는 것이다. 이 부분은 종교와 공동체 속에 면면히 살아 있어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삼보일배가 종교인에 의해 촉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섯째, 정신적 가치를 중시한다고 했지만 생명평화운동은 결코 관념적 운동이 아니다. 오히려 생명평화운동은 철저히 ‘행위’를 중시하는 운동이다. 정신적 가치를 현실의 삶에서 어떻게 구현하는지가 관건이 되는 운동이다. “믿음이 아니라 행위가 너와 세상을 구원하리라”이다.
3월 29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앞 광장에서 열린 성금요일 묵상 기도회에 참석한 가톨릭 신자들. 2024.3.29. AFP 연합뉴스
종교조직 포교활동과 닮은 사회운동
이런 특성이 있다고 해서 생명평화운동이 저절로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는 운동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운동이란 개념 자체가 익숙한 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상태로 나아가자는 의미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 대중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는 물질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보면 종교조직의 포교활동과 닮은 점이 있기는 한데 굳이 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따지고 보면 세상을 풍미했던 대부분의 사회운동도 종교의 포교 전략을 적당히 손질하여 적용했을 뿐이다. 역사상 가장 많은 인구에게 영향을 끼쳤던 공산주의운동도 실은 기독교의 포교 전략을 그대로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전략과 전술의 부재
생명평화운동이 등장한 지 20년이 넘었어도 대중적 영향력이 여전히 미미한 데에는 전략의 부재가 큰 이유로 작용했다. 이 운동을 처음 시작한 종교인들에게 애초부터 운동의 전략전술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행위에 몰두했을 뿐이다.
사회운동이란 거대한 체스 게임 같아서 치밀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해야만 겨우 대중을 움직여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상황에 따라 (가상의) 적을 기만하거나 타협할 수도 있고 그들의 방법을 빌려다 쓸 수도 있다. 종교적 고고함을 가지고는 절대 대중을 움직일 수 없다. 종교적 고고함이 대중을 움직이는 경우는 오직 종교 안에서만 가능하다.
생명평화운동이 돌파구가 될 수 있는 5가지 이유
근대 이래의 모든 사회적 모순이 중첩되어 있는, 소위 “비동시적인 것들의 동시적 혼재”라는 특이한 상황에서 과연 생명평화운동은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감히 말하건대, 충분히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따라와 준다면” 같은 허황된 전제는 필요 없다. 생명평화운동은 다음과 같은 특성으로 인해 미래의 대안사회를 열어갈 화수분 같은 운동이 될 수 있다.
첫째, 폭력을 근원적으로 배제하기 때문에 ‘폭력의 악순환’에 빠진 인류문명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 만약 폭력이 문명 발달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문명 자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문명을 써내려 가야 한다.
둘째, 물질과 인간 중심의 문명사가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인해 더 이상 존재 의미가 없어졌다. 인공지능으로 인해 물질 세상은 더 발전하겠지만 그 발전은 인간의 행복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물질의 물질을 위한 발전이 될 것이다. 달이 차면 기울듯 이제부터는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질적 도약의 시대가 전개될 것이다. 정신적 가치의 중심에는 ‘생태영성’이 자리하고 있다.
셋째, 기후위기와 환경재앙이 이러한 전환을 가능케 하고 있다. 인간은 기술의 발달로 이 위기를 극복하려 하지만 어떤 기술도 자연의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다. 기술을 만든 인간 자체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넷째, 생명평화운동은 전혀 새롭고 낯선 운동이 아니다. 인류문명이 물질 진보와 폭력에 의지하여 발달해왔기 때문에 그동안 비주류 영역에 있었던 대안의 사상과 삶이 비로소 빛을 보는 것이다. 이 부분은 종교와 공동체 속에 면면히 살아 있어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삼보일배가 종교인에 의해 촉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섯째, 정신적 가치를 중시한다고 했지만 생명평화운동은 결코 관념적 운동이 아니다. 오히려 생명평화운동은 철저히 ‘행위’를 중시하는 운동이다. 정신적 가치를 현실의 삶에서 어떻게 구현하는지가 관건이 되는 운동이다. “믿음이 아니라 행위가 너와 세상을 구원하리라”이다.
3월 29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앞 광장에서 열린 성금요일 묵상 기도회에 참석한 가톨릭 신자들. 2024.3.29. AFP 연합뉴스
종교조직 포교활동과 닮은 사회운동
이런 특성이 있다고 해서 생명평화운동이 저절로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는 운동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운동이란 개념 자체가 익숙한 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상태로 나아가자는 의미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 대중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는 물질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보면 종교조직의 포교활동과 닮은 점이 있기는 한데 굳이 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따지고 보면 세상을 풍미했던 대부분의 사회운동도 종교의 포교 전략을 적당히 손질하여 적용했을 뿐이다. 역사상 가장 많은 인구에게 영향을 끼쳤던 공산주의운동도 실은 기독교의 포교 전략을 그대로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전략과 전술의 부재
생명평화운동이 등장한 지 20년이 넘었어도 대중적 영향력이 여전히 미미한 데에는 전략의 부재가 큰 이유로 작용했다. 이 운동을 처음 시작한 종교인들에게 애초부터 운동의 전략전술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행위에 몰두했을 뿐이다.
사회운동이란 거대한 체스 게임 같아서 치밀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해야만 겨우 대중을 움직여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상황에 따라 (가상의) 적을 기만하거나 타협할 수도 있고 그들의 방법을 빌려다 쓸 수도 있다. 종교적 고고함을 가지고는 절대 대중을 움직일 수 없다. 종교적 고고함이 대중을 움직이는 경우는 오직 종교 안에서만 가능하다.
기후위기비상행동 기후정치특위 관계자들이 19일 오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22대 국회 정책과제 제안 발표 기자회견'에서 기후부총리제 신설 등 기후정책 제안를 담은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4.3.19. 연합뉴스
명상조직 ‘아난다마르가’의 경우
이제 생명평화운동은 그동안의 성과와 오류를 점검하고 기후위기 시대를 돌파하는 전략과 전술을 짜야 한다. 여기에는 운동의 이념과 철학을 정립하는 일에서부터 구체적인 행동 방침과 운동노선을 결정하는 것까지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한때 <결사>는 운동의 노선으로서 ‘마을공동체 건설’과 ‘좌우대립 해소’라는 구체적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한번도 실효성 있는 사업을 벌이지 못한 채 이념의 전파와 자기만족적인 순례와 명상에 집착하는 바람에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세계적인 명상 조직인 인도의 <아난다마르가>가 ‘프라우트 PROUT’라는 획기적인 경제론과 사회조직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중에게 접근하기 위해 명상을 강조하는 바람에 대중은 아난다마르가를 그렇고 그런 명상단체의 하나로 인식하는 오류에 빠진 것과 같다.
<민들레>를 통한 새로운 시도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그래서 생명평화운동이 도대체 무엇인데?” 하고 물을 것이다.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시민언론 <민들레>에 이 기획이 만들어졌다. 한두 마디로 정리할 수 없기에 여섯 명의 필자를 동원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점검해 보려고 한다. 공산주의운동의 시발점이 된 <공산당 선언 The Communist Manifesto>이나 한살림운동의 출발을 알린 <한살림 선언> 같은 것이 조만간 나오지 싶다.
20여 년 전에 나온 ‘생명평화선언’은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해 급히 만들어진 것이라 그 자체로 역사적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선언으로서는 부족한 점이 많다. 우리가 굳이 다수가 보는 언론에 칼럼의 형식으로 이 과정을 밝히는 것은 피드백을 통해 세상의 지혜를 구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다.
생전 처음 만든 명함에 자신의 직함을 ‘생명평화운동가’로 적어 놓은 무모함을 설명하다가 말이 많아졌다. 철모르던 시절 제국주의 세계지배에 분개하던 한 청년이 일흔 살이 되어 자신의 전 생애를 생명평화운동으로 정리하자니 오죽 할 말이 많겠는가! 독자 제현의 질정을 바라마지 않는다.
명상조직 ‘아난다마르가’의 경우
이제 생명평화운동은 그동안의 성과와 오류를 점검하고 기후위기 시대를 돌파하는 전략과 전술을 짜야 한다. 여기에는 운동의 이념과 철학을 정립하는 일에서부터 구체적인 행동 방침과 운동노선을 결정하는 것까지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한때 <결사>는 운동의 노선으로서 ‘마을공동체 건설’과 ‘좌우대립 해소’라는 구체적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한번도 실효성 있는 사업을 벌이지 못한 채 이념의 전파와 자기만족적인 순례와 명상에 집착하는 바람에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세계적인 명상 조직인 인도의 <아난다마르가>가 ‘프라우트 PROUT’라는 획기적인 경제론과 사회조직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중에게 접근하기 위해 명상을 강조하는 바람에 대중은 아난다마르가를 그렇고 그런 명상단체의 하나로 인식하는 오류에 빠진 것과 같다.
<민들레>를 통한 새로운 시도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그래서 생명평화운동이 도대체 무엇인데?” 하고 물을 것이다.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시민언론 <민들레>에 이 기획이 만들어졌다. 한두 마디로 정리할 수 없기에 여섯 명의 필자를 동원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점검해 보려고 한다. 공산주의운동의 시발점이 된 <공산당 선언 The Communist Manifesto>이나 한살림운동의 출발을 알린 <한살림 선언> 같은 것이 조만간 나오지 싶다.
20여 년 전에 나온 ‘생명평화선언’은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해 급히 만들어진 것이라 그 자체로 역사적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선언으로서는 부족한 점이 많다. 우리가 굳이 다수가 보는 언론에 칼럼의 형식으로 이 과정을 밝히는 것은 피드백을 통해 세상의 지혜를 구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다.
생전 처음 만든 명함에 자신의 직함을 ‘생명평화운동가’로 적어 놓은 무모함을 설명하다가 말이 많아졌다. 철모르던 시절 제국주의 세계지배에 분개하던 한 청년이 일흔 살이 되어 자신의 전 생애를 생명평화운동으로 정리하자니 오죽 할 말이 많겠는가! 독자 제현의 질정을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