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6

인도에서 일본까지 --- - ▒일본불교사공부방▒ -

Everyday 공부방 19 ; 낮과 밤의 이중주 --- 인도에서 일본까지 --- - ▒일본불교사공부방▒ - 일본불교사공부방(일본 불교사 독서회)

김호성|작성시간10.11.07|조회수

낮과 밤의 이중주

              --- 인도에서 일본까지 ---

  최근 저는 일본불교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조금씩 공부해 가면서 재미를 붙이고 있습니다. 스스로 풍성해짐을 느낍니다. 풍성해 지는 만큼 행복합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에게 “일본불교를 공부하자”고 말합니다. 급기야 “일본불교사 연구소”까지 만들어서, 연구활동을 촉진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저는 일본불교에 대하여는 ‘시로우토(素人)’입니다. 아마츄어라는 말입니다. 본격적으로 일본불교의 원전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따라서 아직까지는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 논문을 쓴 일이 없습니다. 겨우 한국불교의 입장에서 일본불교를 말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일본불교를 공부하는 것이 제 전공 공부에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폭넓은 사유를 가능케 해 줍니다. 실제로 논문을 쓸 때 그러한 점을 반영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에를 들면, 「두 유형의 출가와 그 정치적 함의 --- 힌두교와 불교에서의 권력과 탈권력의 문제 --- 」(『인도철학』제26집, 인도철학회, 2009)라는 논문에서는 그 3장에서 ‘불교적 출가’ 답지 않는 사례(이를 反例라고 하였습니다만)로서, 일본불교사에서 예를 들어서 비판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논지를 강화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일본불교사에 대한 공부가 깊어지면 질수록 인도철학과 함께 생각하기(共觀) 역시 가능해질 것으로 봅니다. 만약 인도에서 일본까지 함께 볼 수 있다면, 그렇게 보는 것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아마도 그 이전에 나라와 나라 사이에 국경선을 그어둔 채 어느 한 나라만을 갖고서 생각할 때 보다는 안 보이던 것이 새롭게 보일 지도 모릅니다.

 

         인도의 경우  

 

  종교에는 상반되는 두 측면이 있습니다. 마치 낮과 밤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놀거나 쉬어야 하지요. 만약 일만 하고 놀거나 쉬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로로 쓰러져 죽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약 놀거나 쉬기만 하고 일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유지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유지를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을 인도에서는 카르마(karma)라고 합니다. 업인 것이지요. 업, 행위를 통해서 이 세상을 유지시킵니다. 이렇게 낮 -- 유지 -- 일의 측면을 한 마디로 말할 때 다르마(dharma)라고 합니다. 다르마는 ‘유지하다’라는 뜻의 동사 어근 dhṛ에서 왔습니다. 이러한 측면을 담당하는 힌두교의 신이 비쉬누(Viṣṇu)입니다.  비쉬누의 신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노동하자, 일하자, 이런 입장을 카르마 요가(karmayoga)라고 합니다.

  비쉬누의 화신인 크리쉬나(Kṛṣṇa)의 말씀을 담은 『바가바드기타』와 같은 경전은 바로 이러한 차원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텍스트입니다. 영국 제국주의 아래에서 신음하던 19세기말에서 20세기 전반까지 많은 인도의 선각자들이 『바가바드기타』에 주석을 달면서 “『기타』로 돌아가자”라고 역설한 것도, 그 속에 담긴 노동의 철학, 역동성의 철학으로 인도가 재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밤에는 쉬거나 놀기도 해야지요. 음악과 춤이 필요하고, 술도 필요한 이유입니다. 노동이 아니라 놀이입니다. 예술이 탄생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입니다. 이는 탄트라(Tantra)입니다. 힌두교 신 중에서 이 측면을 담당하는 것이 쉬바(Śiva)신입니다. 쉬바 신은 파괴의 신이라 하는데, 파괴라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유지가 노동이라면 휴식과 놀이가 파괴입니다. 얼핏 파괴는 유지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서로 상보적입니다. 휴식과 놀이가 없는 노동이 죽음이라면, 노동없이 휴식과 놀이만 있는 것도 죽음입니다.  

  이 두 측면을 다 갖고 있는 것이 힌두교입니다. 유지에는 이성과 합리성이 있고, 파괴에는 감성과 비합리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를 힌두교는 그 하나 속에 집어넣은 것이지요. 다르마와 탄트라, 비쉬누와 쉬바를 함께 다 충족하고자 하는 것이 힌두교입니다.

  한편 불교는, 붓다의 초기불교는 애시당초 유지의 입장에서 출발합니다. 낮의 입장입니다. 근면, 자조의 이성적인 노동/정진의 종교가 초기불교였습니다. 대승불교 역시 유지의 입장입니다. 특히 계율이 강조될 때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후기 대승불교인 밀교에 오면 밤의 입장이 반영됩니다. 그것이 밀교이고, 탄트라입니다. 모든 것을 다 수용합니다. 욕망마저 있는 그대로 수용합니다. 자칫 밀교에서 계율이 느슨해 지기 쉬운 까닭입니다. 그러한 느슨함에서 오는 폐해를 목격하고, 밀교이면서도 계율을 강조한 것이 일본불교에서 진언율종을 창시한 에이존(叡尊)스님입니다. 그는 다르마와 탄트라의 조화를 다시 기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경우

 

  인도에서는 낮과 밤, 유지와 파괴가 하나의 힌두교 속에 종합되어 있었습니다. 불교는 오랜 세월 동안 유지를 선택하고 파괴를 외면합니다. 그러다가 힌두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대승불교인 밀교에 이르러서 파괴를 다시 수용합니다. 어떻게 보면 힌두교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유지에 파괴의 측면을 덧보태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이것이 다시 나누어 집니다. 낮의 이성은 유교가, 밤의 감성은 도교가 담당합니다. 한 가지가 둘로 나뉘어지게 된 것입니다. 물론 유교 안에서도 理만이 아니라 氣를 말할 때는 밤의 감성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그렇지만 주자나 퇴계의 주리론(主理論)은 이성중심주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감성을 억압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주리론을 완성한 그 절정의 시간은 곧, 주리론에서 주기론으로 전개되는 역사의 새로운 출발점이 됩니다. 그러니까, 중국이나 우리나라 유학사는 모두 이에서 기로 나아가는 역사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근대/현대에 이르러서는 이가 아니라 기가 더욱 중시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성/유지가 아니라 감성/파괴의 전성시대를 걱정해야 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될까요? 일본의 불교에는 이 두 가지 입장이 공존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8세기 9세기의 헤이안(平安) 시대에 진언종과 천태종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의 영향이 쭉 이어져 오는데요. 이 두 종파의 영향 속에서 일본중세 불교를 파악하려는 입장을 현밀체제론(顯密體制論)이라 합니다. 현교는 『법화경』을 의미하고, 밀교는 진언종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현밀체제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낮과 밤의 공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현밀을 포괄하는 불교 자체를 양(陽)의 종교, 유지의 종교로 놓고서 그보다 더 극단적으로 음(陰)의 종교, 파괴의 종교 노릇을 하는 종교가 있습니다. 신도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의 도교가 담당한 기능을 일본에서는 신도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불교가 중국의 유교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 이미 음의 차원, 즉 밀교를 갖고 있으니까요.)

 
  중세에 이르러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고 해서, 신도와 불교가 함께 습합되는 그러한 모습은 바로 인도의 힌두교가 하나로 아울렀던 두 가지 측면을 다시금 하나로 아우르려는 시도로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불교가, 신도를 통하여 밤 - 음 - 파괴의 측면을 보완하는 바로 이 지점이 일본에서의 기독교 선교를 방어하는 제일의 방어선이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쉽게 수용되지 않는 이유라고 저는 봅니다. 이미 신도가 기독교를 대신 해주고 있으니까요.

  우리나라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볼까요? 조선시대의 경우를 보면, 유교가 양 - 낮의 측면을 담당할 때 불교는 음 - 밤이 되어서 천대됩니다. 양으로부터 억압됩니다. 유지로 억압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서양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여기서는 상론을 자제합니다.) 이렇게 천대되는 속에서 조선의 불교는 음의 종교, 밤의 종교인 무교(巫敎)와 많이 어우러집니다. 황석영의 『장길산』 속에 등장하는 불교의 모습은 바로 이것입니다. 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측면이 바로 이것입니다. 무교화되어 있는 것, 미신이라고 공격합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 불교는 스스로를 양 - 낮 - 유지로 보면서 무교를 음 - 밤 - 파괴로 위치지우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무교를 어느 정도 키워주는 겨를을 갖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일본에서 보듯이 본지수적(本地垂迹, 신도의 신은 원래 불타이지만 일본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일본의 신으로 화현해 왔다는 이론)을 말하면서 신불이 하나가 되는 경험을 갖지 못합니다. 일본에서는 신도가, 중국에서는 도교가 성장한 것과 같이 우리의 무교는 이론화되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묵교가 굳건히 자리하지 못한 그 자리, 바로 그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도올 선생이 말하는 것처럼, 한국에서 기독교는 바로 무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든 일본은 무교가 불교의 도움을 받아서 이론을 갖추면서 신도로 자라납니다. 그런데 우리 무교는 그렇지 못하니 불교 만큼의 힘을 못 갖게 되고, 불교는 기독교 앞에서 연대할 카운터파터가 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런 이야기들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인도에서 일본까지를 전망하면서 말입니다. 결론은 낮과 밤, 이성과 감성, 유지와 파괴 둘 다 존재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교가 담당하는 탄트라적 기능이나 위상을, 우리 불교는 불교 안에서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또 비쉬누로 상징되는 정진과 수행의 측면과 함께 쉬바가 담당하는 파괴적이고 예술적인 측면을 불교는 또 어떻게 충족하고 조화시켜갈 것인가? 중요한 숙제가 되리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