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2

한국교회는 ‘민중신학’의 ‘유교적’·‘샤머니즘적’ 요소에 하나님의 반대’를 해야 한다. : 네이버 블로그

한국교회는 ‘민중신학’의 ‘유교적’·‘샤머니즘적’ 요소에 하나님의 반대’를 해야 한다. : 네이버 블로그

한국교회는 ‘민중신학’의 ‘유교적’·‘샤머니즘적’ 요소에 하나님의 반대’를 해야 한다.


바다찾기

2014. 4. 19. 11:47


한국교회는 ‘민중신학’의 ‘유교적’·‘샤머니즘적’ 요소에 하나님의 반대’를 해야 한다.

- 왜, 다시 ‘민족복음화’인가-

   

   

0. 한국교회는 ‘민중신학’의 ‘유교적’·‘샤머니즘적’ 요소에 하나님의 반대’를 해야 한다.

- 왜, 다시 ‘민족복음화’인가-


1. 바르트.

1-1. 삼위일체

1-2. 화해

1-3. 예수

1-4. 교회

1-5. 공동체

1-6. 세상

1-7. 계시


2. 민중신학

2-1. 김재준~바르트

2-2. 에큐메니칼, WCC

2-3. 자유주의 신학

2-4. 계몽주의

2-5. 아시아 계몽주의

2-6. 민주화·통일운동

3. 바르트는 중도였나?

   

   

   

   

0. 한국교회는 ‘민중신학’의 ‘유교적’·‘샤머니즘적’ 요소에 하나님의 반대’를 해야 한다.

- 왜, 다시 ‘민족복음화’인가-

   

⑴ 바르트의 ‘하나님의 반대’ ~‘하나님의 긍정’과 연결

- 부르주아 시민사회 = 계몽주의 = 자유주의 신학

- 자유주의 신학의 이성중심주의 ⇒ 파시즘을 인정하는 이기주의(시민들의 이기주의)로 빠져

   

70년대 민주화운동(민중신학 정치참여)

하나님의 반대 =반(反)박정희

⇒ 민중신학 교단 입장

- 보수신학 = 이기주의

- 민중교회 = 고백교회

- 박정희 = 히틀러

- 보수교회 성도 = 파시스트???

㈀ 민중신학

- 샤머니즘적인 자연종교 : 잘 먹고 잘 살기 (합리 X) → 민중 고유의 이기주의로 빠질 수 있다.

민중신학의 사상구조 (아래 3가지 논리의 조합인 경우가 대부분)

(1) 천도교 “내 안의 한울”, 씨알사상 “참나” ≒ 슐라이어마허 감정의 신학

(직관적 느낌 = 神)

(2) 심리 : 외상(trauma) → 힐링 (해원사상)

(3) 사건 중심 : 베르그송 생성 철학, 화이트헤드 생성철학

- 성경의 메시지 → 이기주의를 부정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고전 6:19)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2-5)

   

   

㈁ 자연(自然)종교는 같지만, 민중신학은 무속 비합리. 자유주의 신학은 이성주의

민중신학

자유주의 신학

무속적 자연종교

이성, 과학 자연종교

세속주의, 분파주의, 숙명주의 정당화

- 모래알 정서에 권력 의타주의

파시즘 체제 정당화

샤머니즘적 기복주의

(원망을 해소한다고 띄워주고, 그 욕구로 엘리트가 지배)

주체중심적 나르시시즘

(세상을 지배하는 주체로 설정하되, 그 바탕으로 엘리트가 지배)

- 원망 해소를 통한 혁명 기복주의 ≒ 이성 합리를 통한 세상지배욕구

   

   

하나님 중심 (정통신학) → 인간중심(자유주의 신학) → 신정통주의(바르트~ ) : 신정통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에 反명제로 정통신학으로 되돌아오려는 것이나, 한국은 자유주의 신학의 일부로서 신정통주의가 들어왔다.

   

㈀ 정통신학 (하나님 중심)

칼빈주의 5대 교리 (벗어나면 알미니안 주의)

⒜ 주권적 은혜의 계획(무조건적인 선택)

- 알미니안 주의 (조건 선택)이 아닌

⒝ 주권적 은혜의 유효성(제한 속죄)

-만인구원론이 아닌

⒞ 주권적 은혜의 필요성(전적 타락)

- 인간의 전적인 타락 : 성령으로 거듭나야 선(善)을 행한다.

⒟ 주권적 은혜의 적용(불가항력적 은혜)

⒠ 주권적 은혜의 보존(성도의 견인)

㈁ 자유주의 신학(인간중심)

㈂ 신정통주의 신학(神・人 협력 ≒  펠라기우스주의)

- 삼위일체 계시 (= 하나님의 선교)

㉮ 성령의 조명을 받은 이성인가?

㉯ 정치행위의 성경논리 알리바이인가? (이렇게 볼 때, 삼위일체 계시는 자유주의 신학의 직관적 느낌과 다를 바 없어짐. → 토착화신학 등 동양사상과 연결의 전제는 이런 수준??)

⑶ 슐라이마허 → 바르트 : 계몽주의 이성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하나님 중심으로 세우기. 하나님 중심 가치를 세웠으나 자유주의 신학의 흔적은 유지 (신정통주의라는 명분을 부정하며 자유주의 신학의 일부로 보는 외국신학 번역물도 나름의 근거가 있다고 본다)

바르트주의

민중신학

서구계몽주의 기반

- 세상(사회계약적, 헬라적 인본주의)

아시아 계몽주의 기반

- 세상 (깨우쳐야 할 愚民)

자연신학 반대

타계주의 반대 (정통신학의 영적 가치를 道家 짝퉁 아니냐고 보는 만큼, 행위 지향 권력주의)

“神・人 협력” → “진리 수호/시민사회” 로서의 교회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헬라적 인본주의인체 하되, 온갖 작위적 잡동사니 다 끌어 맞춰. 일반인은 몰라서 모르고, 외국인은 할 수 없어서 모르고, 엘리트 반론은 붕당정쟁론으로 의도가 있다고 우기면 끝. 사실상 의미는 萬物이 선비 몸안에 해석되듯, 만물은 엘리트 해석에 꿇어!! )

   

   

- 20년대 이후 성서적 가르침을 중시하는 교회와, 마음은 사회주의에 가 있으되 교회조직을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교회가 분리되는 경향이 보였다. 이것은 임시정부를 해석하는 역사관에서도 드러난다. 교회조직을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움직임이 각종 정치행위와 연결되는 데, 이는 정확한 의미에서 사림파의 근거지로서 ‘향약’과 일치한다.

임시 정부 主流

임시정부 사회주의 세력

천국 소망으로서 독립운동을 향한 연합

목적 달성을 위한 연합

교회

신앙=독립향한 ‘복음’ 자체의 권력 기능

교회

≒ 향약 (사림파 권력도구)

-인맥이 권력 기능

   

에큐메니칼

- 본래 성경이 뜻하는 에큐메니칼은 진리에서의 일치와 친교에서의 일치다. 이는 진리 수호로서의 교회 뿐만 아니라, 서구 자유민주세계 시민윤리의 근간이 되기도 했다.

- 한국은 독립운동을 위해서 교회가 세계와 맞물린 ‘창문’이 됐다는 특수성 속에서, ‘목적’에서의 일치라는 非 성경적인 움직임이 일어났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교회참여의 대부분은 이 전통에 속한다. 물론, 성서적 에큐메니칼 참여운동도 분명히 존재했으며 그러한 차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진리(복음주의)에서의 일치

서구 근대성 - 임시정부 주류

- 예수 안에서 일치 (복음의 본래의 다원성.복음이 여러민족에)

친교에서의 일치

목적에서의 일치

아시아 근대성(붕당 정쟁 때 사림파가 권력 장악 위한 협력 전통) - 기독교 사회주의 세력

   

*. 서구 계몽주의는 서구의 근대국민국가 형성기.

아시아 계몽주의는 아시아 근대국민국가 형성기(사실상 독립운동과정)에 연결된다.

“계몽주의”라는 말은 같지만,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서구계몽주의

아시아 계몽주의

시민사회 협력 → 자기존중・상대배려→ 질서 형성

(사회계약적 질서가 사회 전반에서 구현된다)

서구 카피 & 공동체 강화 → 권력 강화

(아시아 근대성은 아시아 공동체가 서구와 대화하는 명분 만들기에 급급하고, 실체적 서구성이 사회전반에서 구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민사회 상호 협력

“士(개명양반)-民” 수직 권력 구조

   

   

   

근본 계기

반공 권위주의 체제가 해방공간 사회주의 선택한 이들에 배제적 질서의 억울함

전망

자신들에 적대적인 사회의 모든 것의 붕괴

전망의 구현

기독교 내부의 ‘천국소망’/무속 신앙 원망 해소/마르크스주의 혁명론 (3가지 중 자유 선택해서 논리 만듦)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중신학 : ‘신학’이 예수 중심 가치보다, 특정한 정치집단 군중들의 이익을 보태주며, 군중들을 동원하며 부르는 호출기획 이데올로기 특성에 노골적이라면?  

 

   

- 반공체제에서 배제됐다는 감정 = 자신들만의 상처의식을 지나치게 전제. 해방이후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구성원을 유죄로 호출.(제랄드 벌고프・레스터 데 코스터, 124쪽)

   

- “엘리트의 아시아적 사(士) 의식” 잔재는 해방신학 자체의 신학적 배타주의(제랄드 벌고프・레스터 데 코스터, 112쪽)와 겹쳐져서, 고도의 독단주의를 초래.

- 어째서, 성령에 조명된 他者 인식이 없을까? 예수 믿는 지체로서 연합해야 한다는 인식이 없을까? 자기 스스로 자체가 예수 신앙에 구속되지 않고, 샤머니즘적 ‘벌림’ 증상에 있기 때문이다.

*. 종교가 엘리트를 조종하고, 엘리트가 대중을 조종하는 기억은 조선후기 붕당정치 때 있었다. 그리고, 한국 진보 에큐메니칼 신학에 반복된다. (박정희의 『국가와 혁명과 나』에 반복되는 붕당 비판은, 민주당 내부의 에큐메니칼 정치를 조선조 붕당 정쟁의 연장으로 보는 것이지, 관념론에 빠졌다고 보는 해석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70-80년대 중고등학교 학교 선생님들의 엄청난 숫자의 동일한 인식과 현저하게 다른, 민중신학적 관념으로 박정희를 읽은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조・붕당 정쟁

민중신학

제사 형식의 당파 결속 및 배척

-단색(單色)으로 모인 선비집단이 배척할 정적 논리 설정

종교형식의 당파 결속 및 배척

- ‘구조악’ 등의 해방신학 논리와, 무속신앙 해원사상에 접착시켜 논리 설정

끝으로 한국 신흥종교들이 지닌 공통적 성격을 예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사회적으로 불안한 시대에 파생되었다.

② 억압된 민중의 종교로 등장한다.

③ 종말론을 주장하고 신천지(新天地)의 도래를 선포한다.

④ 한국이 세계 역사의 중심이라는 내셔널리즘이 부각된다.

⑤ 다분히 무교적이다(교조의 카리스마적 성격, 신도들의 열광성, 주술적 신앙 등).

⑥ 현세이익적이고, 행동적이다.

한국의 제3의 종교현상으로 민간신앙이 있다. 민간신앙이란 민중의 신앙 현상 가운데 고대의 자연종교가 잔류 계승된 것을 중심으로 한 비조직적인 종교현상을 말한다. 자연종교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인 풍부한 생활과 평안한 삶에 대한 욕구에 응답하되, 안이한 방법과 찰나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신앙현상이다. 거기에는 교조나 체계적인 교리나 조직적인 교단이 없다. 그리면서도 민중 사이에 계승되며 신봉되고 있는 것이 자연종교요, 그 잔류현상이 민간신앙이다. 이것은 미개 사회의 원시종교와 구별된다. 그 자연종교적인 성격에 있어서는 같지만, 민간신앙은 특히 고등종교를 받아들인 문명사회 안에 잔류되어 있는 자연종교를 두고 부르는 명칭이다.(유동식, 285쪽)

   

해방공간 文盲이 다수였던 시절에 남로당 동원은 일정 부분은 ㉮ 일제 말 천황제 동원주의 ㉯ 일정부분은 地緣, 그리고 상당 부분은 ㉰ 샤머니즘적 세속주의의 좌파적 호출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도덕을 없앴다기보다는, 일제 36년간 교육받지 못한 민중에 원색적 물질 욕망을 통해서 非인간적 특성을 유도했다고 보는게 오늘의 감각에 맞다고 생각한다.

샤머니즘 영향으로 인해 형성된 종교학적 한국인 성격(황필호, 『이데올로기, 해방신학, 의식화교육』, 종로서적, 1985. 184~194쪽)

민중신학적 마르크스주의

- 현세주의 : 눈에 보이는 것만을 숭배

(금전만능주의, 권력지상주의, 결과제일주의)

유물론, 현장중심, 물질중심

- 분파주의 : 친소 구분주의, 가족주의, 차별주의, 사대주의

당파성 (편파적 편들기)

숙명주의 : 되는 데로 살려는 사상

엘리트 추수주의 (좌익 선동 따라가기)

   

      

   

- 불쌍한 상황을 보여주고 참 불쌍하지 않니? 하며 앞세우고, 이에 동참하는 것이 신앙인의 당연함이라 하지만, 이는 종교로 사람을 조종하는 고전적 논리다.

   

조종은 모든 분야에 존재하지만 자유주의 신학과 종교의 분야보다 더 심한 곳은 없다. 종교적 함의를 지닌 말들을 사용하는 현대신학은 ‘그리스도’, ‘하나님’ 또는 그 밖의 다른 기독교적 용어들을 아무런 내용도 없는 고도의 동기유발가치를 지닌 기치(旗幟)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조종을 원하는 사람은 그저 그 깃발을 움켜잡고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행진하면 되고, 우리는 그를 따른다.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는 아마 상황윤리일 것이다. 케임브리지 신학을 좇은 케임브리지 도덕은 어떤 소녀가 당신을 필요로 할 때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이 그리스도를 닮은 행위라고 말했다. 어떤 것을 그리스도를 닮은 행위라고 부르면 사람들은 그렇게 행하는 것이 예수 자신의 성윤리를 파괴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 채 그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의 진보주의자들과 개신교 신학자들을 포함한 신(新)신학자들은 아무 내용도 없는 종교적인 용어들을 사용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 내용도 없는 종교적인 용어들을 사용하여 동양 종교들의 방향으로 사람들을 조종하고자 하는 자들보다 이들이 좀더 강력한 입지를 확보하고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일 것이다. 첫째, 그들은 종교 조직의 연속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의 주요 교단들의 조직을 주관한다. 둘째, 그들은 사람들이 익히 들어왔던 것과 동일한 용어들을 사용하고 동양 종교들의 추종자들이 하는 것과 같이 이상하고 비의적인 용어들을 도입하지 않는다.

장래에 공산주의가 무신론이 아니라 종교적 토대 위에서 사람들을 조종한다고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서양에서 우리는 아무 내용도 없는 종교적인 용어들을 기반으로 한 완벽한 통제 아래 놓이게 될 공산이 크다. 무신론자인 줄리안 헉슬 리가 한동안 종교를 이런 식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생태학적 압력은 또다른 방식으로 종교에 의해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는 문을 열어놓는 다.많은 사람들이 생태학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범신론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범신론은 하나의 진리로서가 아니라 사회를 조종하는 한 형식으로 제안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대다수의 자유주의 신학과 불화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자유주의 신학은 이미 범신론적 경향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프란시스 A. 쉐퍼, 100-101쪽)

   

통일담론을 둘러싼 성서적 에큐메니칼과, 민중신학적 에큐메니칼의 차이

남북의 에큐메니칼 신앙 논리

민중신학적 변혁 논리

- 가시적 교회 : 개별교회

- 비 가시적 교회 : 민족교회 일치

→ 민족교회 일치를 위한 이성(理性)의 성서적 제한(하나님의 선교)

*. 비(非) 조종

- 남북 모두 임시정부 / 남북 모두 독재

- 행동으로 변혁하자.

   

*. 현실을 눈감게 하며, 자신의 주장만을 따르라고 조종

- 신앙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논리는, 정작 쉽게 쉽게 사는 샤머니즘 영향이 강한 한국인 사회에서 직접적 참여자가 많지 않은 문제.

남북 모두에 주어진 질서를 부정하는 것 같으나, 사실상 북한질서 부정은 북한영토가 아니기에 이루어지지 않고, 남한 사회 질서만 완전한 부정

*. 명분은 남북 정권 모두 성립 부정.

현실은 대한민국 정부 성립 부정만.

“성화”(예수님 닮아가기)는 법치주의를 지키며, 북한의 자유를 진흥하는 한에서

“성화”는 민중신학을 지지하는 기독교사회주의 진영의 이익안에서 (신앙을 反국가 가치로 조종하는 이데올로기로 구사)

   

하지만 “새 도덕”이나 “상황 윤리”의 옹호자들은 대체로 정확히 바리새인들이 행했던 것을 그대로 행하려고 애쓰고 있다. 사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반대되는 그리스도의 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싫어하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비슷하다. 그들은 율법을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또한 (바리새인들과 같이) 그것의 권위를 “완화시키거나” 그것의 지배력을 느슨하게 하려고 시도한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율법의 범주는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며, (예수께서 결코 행하시지 않았던 방법으로 ) 율법과 사랑이 서로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예수께서는 율법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해석에 견해를 달리 하셨던 것이지 그들이 율법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것에 견해를 달리 하셨던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예수께서 최대한 강하게 율법의 권위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장하셨으며, 또한 그의 제자들에게 율법의 참되고 엄격한 해석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셨다. (존 스토트, 109쪽)

   

- 민중신학은 反법치주의, 反대한민국 등 不義한 내용을 예수님 닮아가는 것처럼, 말한다. 민중신학의 해석에서 국가보안법 등 대한민국의 안보를 유지하는 법은 언제나 ‘율법’처럼 해석되며 부정된다. 이는 예수 가르침과는 다른 복음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의 네가지 기본 기둥이 해방신학의 골격을 이루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인간의 악의 근본은 계급 투쟁에 있다.

2. 계급투쟁의 원인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있다.

3. 오직 폭력적 반역만이 그러한 사유재산권을 파멸시킬 수 있다.

4. 그런 혁명으로부터만, 그리고 그런 혁명을 통해서만 인간은 자신을 “새롭게”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해방신학과 마르크스주의가 결정적으로 의견을 같이하는 점은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인간 자체 내에 완전한 자기 갱신의 모든 자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바로 자신의 구세주이다!

해방신학과 마르크스주의는 서로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꼭 닮았다. 그러나 해방신학에 있어서는 마르크스주의가 먼저 오고 해방신학이 그 뒤를 추종자처럼 따른다. 해방신학은 성경의 그리스도가 아닌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를 좇는 것이다.

국외 관찰자가 보기에는, 마르크스주의와 해방신학의 관계에 있어서 마르크스는 착취자이며 해방신학은 착취당하는 자로 보인다.

따라서 해방신학자들이 정말로 “해방”의 결정적인 행동을 취해야 할 곳은 마르크스주의의 사슬에서이다. 해방신학이 마르크스주의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새로운”것을 제시할 것도 없고 자신을 “새롭다”고 부를 수도 없을 것이다.(제랄드 벌코프・레스터 데 코스터, 109-110쪽)

해방신학

민중신학

마르크스주의가 배경

민중민족해방 종교 통일전선이 배경

마르크스주의가 主人, 해방신학이 奴隸

민족해방 종교 통일전선이 主人, 민중신학이 奴隸

   

   

*. 민중신학과 WCC(바르트) 신학의 결정적 차이!!

민중신학

바르트 신학

남북 아울러, 좌우 아울러,

- 한반도에서 우리 선비가 짱이다.

“한반도여, 이리 오너라!!!!”

(다원성은 거대 선비 머리 속에 화석화. 샤머니즘적 우주론은 그것을 포장. 사실상 단일한 일사분란)

말씀 수호와 성서적 실천을 구현하는 시민사회를 동시 구현하는 독일 고백교회

(다원성은 시민사회에 내재. 자유주의 신학적인 헬라적 우주론은 그것을 정당화)

 

‘교회’가 좌우 아닌 제3을 구현한다는 의미의 해석 차이  

 

   

- 독일 통일은 동독이 북한보다 개방됐음을 논외로 해도, 서독기독교인이 동독에 선교하러 가는 일의 발생은 쉽지 않다. 본회퍼의 신학이 그것을 유도했다. 즉, 천국소망으로서 독일 통일을 믿는 이름없는 무수한 실천이 깔린 것이다.

   

- 한국은 통일담론에서 거대 선비의 ‘내 똥 굵다’ 거대 논리 프레임만 난무.(통일담론이 유토피아는 커녕,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체제로 귀결될 요소 농후. : 김대중의 3단계 통일방안도 그랬지만, 김대중과 한때 동지였던 보수측의 인사들도 방향이 달랐지 사고방식에선 대동소이한 ‘엽기 거대담론’맹신론자

   

*. 교회 해석의 잘못 ≒ 시민사회 해석의 잘못

   

   

   

   *. 한국 시민단체는 보스 정치 중심으로 ‘고도’의 일사분란한 구조다. 활동의 핵심구성원은 가산제 보스정치와 분명한 연관관계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외곽의 인물들만이 새롭게 바뀌어온 것이다. 그러나, 시민단체와 보스정치와 분명한 연결이 있음에도, 대외적으로는 그렇지 않고 서구적 자율협력 구조의 것인양 주장한다. 이는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에서의 ‘말씀 전달’과 ‘시민사회’ 공존의 교회 가치를, 사림파의 권력 추구 거점인 ‘향약’처럼 헷갈리는 심리적 근원이기도 하다.

   

- 정치목적에 의한 성경의 자의적 사용을 남발한다.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경시하고, 개인적 조명을 강조하여, 정치목적에 의한 자의적 사용을 정당화한다. (제랄드 벌코프・레스터 데 코스터, 139쪽)

      

⑹ 민족복음화 운동 = 샤머니즘 문화로부터 망국적 유교 문화로부터 자기 부정을 수반하는 회개와 예수 신앙 실천을 통한 애국심 구현

   

한경직이 청교도주의에 특히 주목하는 것은 미국의 건국론에 작용한 청교도주의의 영향을 한국에 유비시키는데 있었다. 그 원인은 종교적 이념이 국가형성과 발전에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청교주의란 신의 듯이 지상에서 이루어지도록 한다는 원칙적인 신앙의 삶에 따라 신앙원칙에 입각한 생활태도의 문제를 중시하여 금욕적 생활태도, 영육의 온전한 헌신, 직업소명감, 근면성실, 정결과 절제, 애국심, 현실개척정신등을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이러한 특징들은 비단 종교적 의미 뿐 아니라 당시 사회적 이슈였던 개인주의 사상, 근대국가론, 사회진화론, 애국계몽운동, 절제운동, 건국론, 점진적 자강론, 기독교적 애국교육등과 일맥 상통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경직의 보수적 신앙을 청교도주의와 동질의 것으로 간주하기보다는 한경직의 신앙의 성격이 청교도주의를 포함하여 당시 사회적 정서를 내포한다고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다. 시기적으로 한경직이 청교도주의를 사상적으로 정립한 것은 유학기에 접어들면서 가능했기 때문이다.(이혜정, 83쪽)

   

한경직은 설교가 설교자의 말과 삶이 일치되어야 하며, 감정적 요소가 아니라 이성적 접근으로 청중들의 삶을 전인적으로 변화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제일 목적으로 강조하였다. 설교자의 생활이 곧 설교의 권위라는 정의는 신앙과 생활의 일치를 목적으로 삼는 청교도적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한경직의 청교도주의 인식은 모든 영역에서 합리성과 이성적 요소를 추구한다는 점에 애국계몽운동과 일맥상통한다. 특히 종교적 감정 표현에 대해 한경직은 열광적인 종교적 표현을 변태적 심리현상으로 간주하면서 질서정연한 예배 분위기를 강조하였다.

한경직은 기독교에서 나타나는 열광적인 종교적 표현들을 변태적 심리현상으로 간주하였으며 이러한 요인들은 무속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심리현상, 종교적 감정 표현과 유사한 것들로 인식하고 동일하게 배척하고 있다. 당시 무속은 비이성적, 비합리적 요소로 인해 계몽운동의 적으로 간주될 정도로 사회적 지탄을 받았고, 이것은 비단 한경직 뿐 아니라 당시 애국계몽운동, 특히 기독교 애국계몽운동을 이끌었던 기독교 개화지식인들의 공통된 견해였다.(이혜정, 85쪽)

   

- 엄밀한 의미의 캘빈주의를 지키는 차원에서 ‘현대신학’은 부정적이다. 그러나, 큰 의미에서 자유민주 대한민국 안에서 예수 신앙을 지키는 데에서는, ‘현대신학’을 기초하는 요소 보다도 정말 부정해야 될 요소로서 ‘샤머니즘’ 요소가 존재한다.

   

   

   

      

*. 하나님의 반대--하나님의 긍정(성서적 가치 회복) 연결

민중신학의 ‘샤머니즘’적 요소 → 구한말 “민중은 민중대로”, “엘리트는 엘리트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다 따로 따로 노는 것을 부활시켰고 정당화 (민중신학을 이끄는 핵심 엘리트 그룹을 제외하고는 대책없는 사회 와해의 극대화)

- 진보진영이 체제 전복 가능기 때 뻑하면 구한말 동학운동(천도교=샤머니즘)에서 정당성을 뽑는만큼, 샤머니즘적 요소는 통제되지 않을 때 사회 붕괴 요소로 자리하기 쉽다.

   

- 샤머니즘 요소 → 자기 위로 주의 → 일차원적 이기주의 → 사회협력결여

- 영웅주의 → 일차원적 이기주의의 소망을 퍼부은 허깨비 & 책임전가 대상

   

   

민중신학

조갑제기자 추종 시민단체 담론

샤머니즘 우상

영웅 김대중, 영웅 노무현

영웅 이승만, 영웅 박정희

원망 대상

구조악 반공자유세력

구조악 종북세력

상황 신학

국가보안법 상에 걸리는 사회주의자 인권

북한인권

 

⑺ 민중신학을 닮은 反共은 가능한가?  

 

   

양축 모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이성’에서 기초된 식민화되지 말아야 할 생활공동체를 전제하는,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에서의 ‘교회’(“말씀 전도/시민사회 구현”의 공동체)보다는, 엘리트 중심의 향약적 차원에 갇히고 교회 구성원을 자신 중심의 동원주의로 바라보고 있다.

   

- 反共 자체가 북한 정권 성립사에서 교회징발이란 신앙의 자유 탄압에서 기원됐음을 모른다. 알생각이 없다.

   

민중신학을 닮은 자유주의는 가능한가?

   

민중신학

신자유주의

시장=민중=저절로

참된 군주는 민중에 하나도 요구 안하고 서비스 잘해준다.

시장은 저절로 수렴된다. 국가 규제 손 떼라.

가치

세속적 이기주의

화폐 중심주의

성향

국가 말고 좌파 엘리트에 줄 서라

국가 말고 대기업에 줄 서라

   

- 신자유주의를 기초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자체가 英美 교회의 세속화 과정에서 생겨났음을 한국 신자유주의자들은 모른다. 아니 알 생각이 없다.

- 어찌하여, 북한인권 등 ‘짤’없는 바르트 신학을 적용하는 신학 담론을 쓰면서도, 바르트신학의 전제조건인 성령에 조명된 他者인식을 하지 않는가? → 복음중심 보다 엘리트 주권주의에 갇혔다 → 왜, 예수 앞에 회개 하며 내려놓지 않는가? → 회개하면 진보가 회개 안하는 데 자살골 된다. →그러면 왜 한꺼번에 같이 회개하는 계기를 마련하지 않는가? → 기성세대는 아무리 그래도 안 바뀐다.→ 그러면 청년 세대는 왜 안 하는가?

- 북한에서 교회 징발 및 토지 개혁으로 재산 몰수의 원망과 적개감에 기반된 이분법을 가져다가, 민중신학 샤머니즘에 잡탕 비빔밥을 하면 과연 그것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헌법 가치일까?

   

⑻ 붕당 정쟁 모드로 전복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반대가 필요한 이유

   

1988년 KNCC 선언~6.15~10.4 선언 앞에서,

- 서구 WCC 본부의 한국 사회 오인 (시민사회 능력 과대평가)

- 바르트 등 현대신학 요소 과소 대중화. (뭐, 엘리트만 알면 되는겨. 뭐하러 지식을 공유하는가?)

- 신학대 문제를 넘어서서, 대한민국 헌법 수호 문제앞에서도 ‘신학대 잇권’으로 해석해서 논쟁을 기피하는 문화. ( WCC진영의 엉터리 방터리에 논쟁하며 댓거리하다가, 저쪽 신학대학 장사 시켜주는 거 아닌가?)

- 북한인권 등 바르트주의를 적용해야 될 사안이며 성서적 계시를 주장해야 될 사안에서도, 정작 예수 주권보다 “함석헌” “장준하” “김재준”등의 [사상계] 주권성이 더 중요해? (보수시민단체 논객 상층 장년층의 공동된 오류)

- 2014년 상황에서 좌익이 무수하게 싸질러댄 지식 정보, 단 한 개도 안 읽고 89년 공안담론프레임(민중신학 외부)로만 비판하자. (공안검사 하셨던 분들이 뭐하러 낮은 곳에....)

→ 민중신학 마피아 엘리트 자기들 마음대로 짜고 치는 것을 허락.

   

1987년 이전

2014년

국가안보·사회안정 만능론

-다소, 억지스러운 방식으로라도, 일반국민의 권익을 지키려는 모습-

엘리트 밥그릇 만능론

-자치, 민주주의, 개혁 등 각종 다양한 명분으로 포장-

엘리트가 없다.

국민이 없다.

   

- 英美 시민사회조차도 시민윤리 교육

- 英美 시민사회도 시기별로 공동체적 각성.

그러나, 한국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국민의식이 스스로 샤머니즘적 이기주의로 못살겠다. 나라 팔자! 택하는 통일안이 되도록, 엘리트의 이기주의를 극대화시켜서 국민들을 사실상 방목 상태(보호받지 못하는)로 버려두게 하고 있다.

- 진보진영이 자기들끼리 논문으로 문예통일전선조직이라고 고도로 짜고치는 네트워크임을 적시하는 것을 별개로, 보수진영도 시민단체의 일사분란함으로 결론이 뻔할 뻔자 상황인데도, 87년 이후의 일사분란한 것을 서구 시민사회인양 코스프레하는 담론이 남발된다.

- 북한인권을 포함한 다양한 인권담론. : 성령에 조명된 이성을 둘러싼 하나님의 선교 담론의 절실

- 녹색성장을 포함한 환경담론 :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환경인식

- 경제민주화 (: 기독교 사회책임 관련) 등 바르트 신학에 기반된 사안의 정치를 추진하면서, 국민에 시민사회와 함께하는 현대신학 요소를 공유하며 공감대를 넓히긴 커녕, ‘비변사’만 장악하면 땡이란 가치로, 국가기구에 곧장 찔러넣기

*→ 어째서, 보수진영은 핵심 정책 아젠다를 둘러싸고, 젊은 층에 공감될 심층 문화를 갖지 못하나? 보수 엘리트 상층에서 장년 저학력층의 심리조종하는 데 필요없고, 알짜 문화 지원은 김대중 진영 다 퍼줘도 된다는 자기들끼리의 짜고치기가 있는 것은 아닌지?

   

민중신학의 ‘유교적 요소’ 및 ‘샤머니즘’ 요소에 물들은 자기의 罪를 고백하며, 사회에 성경 말씀의 주권성을 회복하면 反대한민국 신앙은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진보는커녕 보수 장년엘리트 조차 사림파 선비 감성 때문에, 자기 부정과 회개를 안한다. 이게, 진짜 문제다.

   

-하나님의 반대는 하나님의 긍정과 긴밀히 연결된다.

성령의 조명을 받은 시민윤리와 애국심의 복원이 필요하다. 다시, 민족복음화가 절실하다.

   

   

2. 바르트.

   

1-1. 삼위일체

   

- 삼위일체 계시 = 예수님은 누구신가 ? 의 신학적 답변

   

그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은 비록 그 형성 과정에서 온갖 인간적인 요소들의 간섭과 세속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성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교회가 도달해야만 했던 어떤 깊은 통찰이 있는가 라는 질문의 대상이며, 발견된 통찰을 함께 수용하려고 결단을 요구하는 교의였다. 그리고 그 결단은 옛 교회가 1500년 이상 그러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모든 교회가 하여야만하는 것이다.

또한 그에게 삼위일체론은 계시의 주체, 곧 ‘자기 자신을 계시하는 분은 누구신가?’라는 관한 신학적 답변 이었다. 성서는 하나님께서는 존재, 말씀, 행위를 통하여 자기 계시를 자기 은폐(self-veiling), 자기 계시(self-unveiling), 자기분여(self-imparting)를 하신다고 서술하는데, 그 계시의 특징을 거룩, 자비, 사랑으로 표시하며, 역사적으론 성금요일, 부활절, 성령강림절로, 또한 성부, 성자, 성령으로 이름 지어 표현한다. 하지만 성서 안에서 삼위가 동일본질이라는 직접적인 진술이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러한 동일 본질성을 근거로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이시라는 직접적인 진술도 없다. 따라서 삼위일체론은 성서의 고백을 뛰어넘는 교회의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신학적 답변이라 할 수 있다.(이인, 60-61쪽)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삼중형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로서 그 최종 근거를 자신이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식의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 계시가 성서에게 스스로 정경의 자격을 주었다. 그러기에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서의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가리키는 것에 있고(간접적인 말씀), 최고의 법정은 예수 그리스도(직접적인 말씀)이다. 이로써 우리는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의 인식의 최종적인 근거가 계시의 구체적 형태를 띠는 예수 그리스도 계시에 있음을 알 수 있다.(임순숙, 33쪽)

   

바르트는 창조 이전의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decretum absolutum)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의 존재 규정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내재적인 관점에서 일어난 모든 행위는 세 위격 안에서 주체자로서 동시에 대상으로서 파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부인 아버지의 선택에 있어서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대상인 동시에 주체로서 참여하게 된다. 바르트는 이 이중적인 명제를 예정을 이해하는 방법으로서 사용하였다.

삼위일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선택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가 되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서 선택하는 주체로서 참 하나님(Vere Deus)인 동시에 참 인간(Vere homo)로서 선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택하는 자는 신성으로부터 귀인하면, 선택되는 자는 인성으로부터 그러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은 다른 선택된 자들과 구별되며 동시에 예수의 선택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선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된 인간으로서 동시에 그 자신의 인성 가운데서 그들 모두를 선택하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선택된 다른 모든 인간들은 “그분 안에서” “그의 선택 안에서” “그의 선택과 함께” 선택되었다.(김득열, 39쪽)

   

하지만 바르트의 입장에서도 여전히 그 방어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보인다. 우선 한 가지 구분해야 할 것은 바르트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의 출발이 하나님의 일체 자체, 곧 그것이 본성이든 실체이든 간에 그것이 하나의 통일성(unity)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앞서 강조한 것처럼, 이 부분이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을 이해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통상적으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신학적 차이가 다음과 같이 말해지곤 한다. 서방 교회가 위격들을 보다 근본적인 본성이나 본질의 양식으로 생각하는 반면 동방 교회는 본성이나 본질을 제1위격의 내용으로 생각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대개 서방 신학은 본성의 일치로 시작하는 반면 동방 신학은 단일한 신적 본성을 공유하는 세 위격들로 시작한다고 이해된다. 하지만 이런 규정에 바르트를 적용하고자 할 때에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선 엄밀한 의미에서 바르트는 결코 본성의 일치로부터 삼위일체론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절반만 옳은 말인데, 바르트는 계시 자체가 삼위일체적이라고 말하면서 계시의 내용과 형식이 모두 하나님의 ‘주 되심’(주권)이라 강조하기 때문이다.(고준석, 25쪽)

   

그러나 바르트의 견해에 의하면, 기독교의 출발점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시작하며, 이 계시는 다음의 세 가지 질문들을 제기한다. 첫째, “자기를 계시하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둘째, “이 하나님은 무엇을 계시하는가?” 셋째, “이 하나님은 무엇을 일으키시는가?” 계시에 관한 이러한 질문들은 필연적으로 삼위일체론의 문제를 야기한다. “계시의 문제는 먼저 이 문제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한다.” ‘하나님은 누구(who)신가?’ 하는 질문을 뒤로 미루어 두고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의 문제들을 먼저 다룬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구별성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바르트는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은 전체 교의학에 있어서 결정적이고 지배적인 위치를 갖게 된다. 즉 삼위일체의 교리의 위치는 많은 수의 교리적 형식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삼위일체의 주제는 전 교의학을 가능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계시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삼위일체론의 문제를 유발하는가? 그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통하여 자기를 계시하기 때문이다.(공병섭, 10-11쪽)

   

바르트에 의하면, 계시로 성경을 거룩하게 만드신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먼저 분명하게 인식하지 않고는 그 성경의 신성함을 나타내는 표식(標識)을 전혀 말할 수 없다. 즉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이 첫째이고 기초이다. 다른 모든 신학적 질문은 여기서 제약을 받는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론을 분명하게 진술케하고 또한 계시 개념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빼어나게 진술하는 교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적 하나님에 관한 문제가 제일 먼저 제기되어야하는 질문이다.(이재영, 13쪽)

   

- 삼위일체 = 하나님의 자기 계시

   

그러나 다른 한편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의 부정으로서 명시적인 선언을, 즉 저 세 계기들은 하나님의 하나님 됨에 말하자면 생소하지 않다는 명시적인 선언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본래적인 하나님을 이러한 세 계기들 저편에서, 그가 아버지, 아들, 영이 아닌 어떤 더 높은 존재에서 찾아야 한다는 그러한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 따라서 아버지, 아들, 영으로서의 그의 존재는 본질에 생소한 어떤 경륜이 아니니, 위쪽으로 혹은 내적으로 말하자면 한정되는, 그래서 우리가 고유하게 하나님에 대하여 묻기 위해서는 가리워진 제4의 것에 대하여 물어야 한다는 식으로 한정되는 그러한 경륜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물을 때에, 우리는 오직 스스로를 계시하는 분에 대하여 물을 수 있을 뿐이다.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아버지, 아들, 영으로서 자아 은폐와 자아 전달에서, 거룩함, 지바, 사랑에서 존재하고 말씀해 오시고 행위하는 바로 그분, 다른 자가 아니라 바로 이분이 하나님이다. 하나님과의 공동교류는 인간에게 대하여 엄밀하게 또 전적으로 스스로를 계시하는 분과의, 그의 계시에서의 주체인, 실로 해소될 수 없이 주체인 그분과의 공동교류를 의미한다. 주체됨의 바로 그 해소 불가능성이 하나님의 본질 안에서의 세 존재양식들의 궁극적인 현실, 이 현실 위에 혹은 배후의 어떤 보다 높은 것이란 없는 그러한 궁극현실의 인식을 통해서 보장된다. 여기서 그의 계시로부터의 도피를, 그가 자기 자신을 제시하고 내어주는 그 현실을 넘어가는 상승을 의미하는 바 하나님과의 모든 공동교류란 단절되어 있다. 하나님은 엄밀하게 스스로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내어주는 분이다. 성서의 증언에 따라서 우리에게 삼중적인 다가오심에서 당신으로서 말씀해 오시는 분에 대하여 유보하는 자, 그는 다만 허공에로 재촉할 수 있을 뿐이다. (칼 바르트 1, 493쪽)

   

하나님은 그 자신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그 자신을 통해서’ 그 자신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그 자신’을 계시한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의 형식을 이끌고 있는 계시적 틀을 세우고 있다. ‘하나님이 말한다!’ 하나님이 계시로 말한다. 신학의 과제는 이러한 계시가 전제하고 함축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신학은 ‘재 - 사유’이다. 즉 하나님의 자기 계시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에 관해 ‘추후에/뒤따라 사유’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앎과, 그 존재와 본성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 사이를 주의깊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진술로,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의 틀을 만들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주어진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현존의 사실이 나타난 것인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계시가 실제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삼위일체론에 대한 바르트의 출발점은 교리나 개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과 그의 현존을 듣는 것에 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460-461쪽)

   

하지만 바르트에게 계시는 앞서서 길게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진실된 소통의 출발이자 관계로서의 하나님의 존재성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일찍이 존슨이 강조한 바,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본성은 오직 하나님의 행위 안에서 표현된다고 역설하였다고 말하면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역동성과 관계성을 하나님의 본질적 특성으로 규정한 것처럼, 바르트의 ‘계시’를 ‘하나님의 고립성’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몰트만에게 이러한 계시를 바탕으로 모든 만물과 소통하는 하나님의 열림과 사귐의 삶은 역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적 소통을 부정하지 못하게 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는가? 김명용이 정확하게 지적한 대로 바르트에게 있어 하나님의 계시는 매순간 구체적인 하나의 그리고 새로운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인격적 행위이며 인간의 정황과 자유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사건이며 행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사귐의 소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그것에 근거한 신비의 차원은, 계시가 가지는 본질적 주권에 의해 여전히 유지되어야만 하고, 또 유지될 수 있을 것이지만 말이다.(고준석, 93-94쪽)

   

바르트는 성서 안의 세계가 기존의 역사와 도덕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주장한다. 그 후 마지막으로 살펴 보는 것은 성서 안에 참된 종교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말하는 참된 종교란 슐라이어마허가 말하는 종교요, 경건주의자들의 경건이다. 바르트는 성서 안의 세계에서는 이 참된 종교 또한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성서 안에 있는 것은 종교와 경건보다 더 큰 것이 있다. “종교는 전혀 없다. 다만 ‘다른’새로운 더 위대한 세계가 있을 뿐이다.”성서 안에서 종교를 발견하려 한다면, 그것은 다만 자신이 원하는 종교 일뿐, 성서가 말하는 종교 일 수 없다.(중략)그렇다면 성서 안에 있는 새로운 세계란 무엇인가? 바르트는 성서 안에 있는 세계란 인간적이 아닌,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라는 것을 말했다. 인간의 역사가 아닌,하나님의 역사요, 인간의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덕이요, 인간의 참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참 종교가 바로 성서라는 것이다. 그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이은택, 22쪽)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전통적 개혁주의적 삼위일체론과는 다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계시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바르트의 계시론은 계시자, 계시 작용, 계시된 내용이라는 세 계기가 성부, 성자, 성령에 상응하는 계기 과정이다. 즉 계시자는 성부에, 계시 작용은 성자에, 계시된 내용은 성령에 상응 혹은 일치한다. 이 세 계기, 즉 계시자, 계시 작용, 계시된 내용은 서로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르트가 말하는 삼위일체론이다. 따라서 이러한 계시론에 근거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전통적 개혁주의적인 삼위일체론이 말하는 위격적 존재로서의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삼위가 아니라 세 존재 방식이기 때문이다. 단지 계시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일위(一位)의 하나님만 존재하며, 결국 유대교에서 말하는 한분 하나님으로 존재한다. 이것이 바르트가 삼위일체론의 중심이며 특징이다.(이재영, 31쪽)

   

우리는 전면에 걸쳐 성육신론을 전개해 오고 있으나 처음부터 여기까지는 역사적으로, 역동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이행되어져 왔었고, 인간과 하나님의 합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행되어져 온 operatio(작용) 의 표현으로 이해하며 해석해 왔었다.- 즉 그 분의 행위 안에 존재하는 그 분의 존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이 operatio 인 것으로 이해했다- 네가지 주제 안에서 세 번째의 마지막 설명이 되는 여기에서는 비교적 할말이 없는 편이다. 그러나 우리가 명쾌히 말해보자면 우리는 여기서 우선 communciatio operationum(작용의 나눔)의 개념적 범주 내에서 생각하고 말해 왔었다. 그래서 우리가 짤막하게나마 그것에 관한 정확한 이해와 해명을 다음과 같이 시도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operatio(작용) 그 자체의 개념에 대하여-물론 우리가 그것을 개혁주의자들의 전통과 관련해 보면, 곧 나로서는 나의 견해 없이 말하자면-말하자면 그것은 결코 고대 그리스도론이 취급해 오징 않았던 부분에 해당된다. 우리는 고대의 성육신론을 보다 사실적으로 묘사해 보려고 노력해 왔었다. 즉 우리는 unio(합일), communio(공유, 친교, 교류), communcatio(전달, 나누어줌, 나눔)등이라는 전례적인 주 개념에 대하여 보다 더 집약적인 의미를 찾아내고자 칼케돈의 도그마적 형식과 관련시켜 보면서 그 사건이 되고 있는 실제적인 것을 언어로 옮겨보고자 했다. 그리스도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성과 관련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성은 성육신이라는 사건과 동일한 것이다. 이 성육신은 예수그리스도의 실재성과 동일하다.(칼 바르트 4, 153쪽)

   

삼위일체론이란 무엇인가? 성서에 의하면 자기를 계시하신 하나님은 파괴될 수 없는 단일성 가운데에서 동일한 분이시며 동시에 파괴될 수 없는 상이성 가운데서 세 번 다르게 동일한 분이다. 혹은 교회의 삼위일체 교리의 표현에 의하면, 계시에 대한 성서의 증언에 있어서 아버지, 아들, 성령은 그들의 본질의 단일성 가운데에서 한 분 하나님이시며, 그리고 계시에 대한 성서의 증언에 있어서 한분 하나님은 그의 인격들의 상이성 가운데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이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삼위일체론은 ”계시의 해석“이요, 계시는 ”삼위일체론의 근거“이다.

계시가 삼위일체론의 근거라는 명제는 두 가지 의미, 곧 부정적인 의미와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그 부정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즉 “삼위일체론에 관한 명제나 명제들을 계시에 관한 명제 내지 계시 자체와 직접적으로 동일하다고 요구할 수 없다.” 삼위일체론은 계시에 관한, 명제의 ‘한 분석’이다. 그것은 “교회의 한 사역”이다. 즉 계시에 관한 명제나 계시 자체에 대한 교회의 이해를 기록한 문서이며, “그의 (교회의) 하나님 인식의 문서 내지 오류를 거부하고 그의 선포의 내용적 일치성을 위한 투쟁의 문서”이다. 달리 말하여 삼위일체론은 교회가 가진 ‘신앙의 문서’이며 그런 한에서 그것은 “단지 간접적으로 계시 자체의 한 문서”이다. 삼위일체론의 내용은 성서의 증언과 관계되어 있고 성서의 개념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성서의 어떤 텍스트와 외적으로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서의 텍스트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면서 그것과 관계한다. (김균진, 242쪽)

   

바르트의 신학방법에 관해서 주목할 만한 점은, 바르트가 예수 그리스도이신 계시의 실재로부터 출발하여, 계시의 성서적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계시 속에 나타난 삼위일체, 즉 경륜적 삼위일체의 개념들로 나아가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삼위일체, 즉 내재적 삼위일체의 개념들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자면, 바르트의 신학방법은 바르트의 상호상응의 입장이 지니는 인식론적 측면의 순서와 더 잘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바르트에 따르면 우리는 계시 속에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계시되고 기록되고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만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로 나아가는 인식론적 통로이지 그 역은 아니라고 말하는 바르트의 주장은 타당하다. 그래서, 경륜적 삼위일체는 우리를 이끌어 내재적 삼위일체를 인식하게 한다는 것은 맞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백충현, 105-106쪽)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보편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1952년 빌링엔 국제 선교 협의회에서 네덜란드 신학자 호켄다이크(Johannes C. Hoekendijk)에 의해 처음 사용된 것이 아니다. 라틴어 형식의 이 개념은 당시 독일 슈투트가르트 감독이었던 하르텐슈타인이 빌링엔 대회에 관한 보고서를 쓰는 과정에서 처음 도입된 것이다. 이 개념은 세계 선교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회개를 촉구하는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이 내용은 교회의 핵심적 과제가 선교이며, 선교의 최종 목적은 교회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동적 상호 교류와 우주적 그리스도의 활동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이다. 하르텐슈타인은 교회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와 우주 전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는 것이 선교의 최종 목표임을 분명히 한다. 즉“선교란 단순히 개인의 회심이나 주님의 말씀을 향해 복종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공동체의 회집에 대한 의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전 피조물 위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려는 포괄적인 목표를 가지고 아들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란 이 개념은 신학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포괄적 시각으로부터 비롯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특성과 예언적 직분에 입각한 기독론에 강조점을 두고, 종말론적 차원으로 연결된다. 빌링엔 국제선교대회에서 비롯된 에큐메니칼 연합운동의 역사적 성과는 서구식 강압적 십자군 선교의 문제성을 구체화하고, 하나님의 선교라는 거시적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선교적 행진을 되새기는데 있다.(정미현, 70-71쪽)

   

바르트의 성령론에 관한 문제는 아마도 변증법적으로 다소 덜 불안정한 것 같다. 바르트가 신학적 문제들을 삼위일체 교리를 이용하여 해결하려 할 때, 실질적으로 나타나고 또 기능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다소 이중성을 띠고 있는 교리이다. 수많은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편의상 원리에 대한 명확하고 일반적인 진술에 호소할 수 있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내적이고 신적인 사귐을 바르트는 오직 쌍방향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성령이 사귐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바로 이 오직 쌍방적인 사귐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귐이 있기 위한 영원한 근거가 되는 바, 이 사귐은 처음에는 하나님과 아들 예수 사이에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과 예수의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쌍방적인 이 사귐이 모든 구원 역사의 영원한 근거라고 말하는 것이 되거니와, 이것이 우리가 바르트의 의도라고 짐작했던 사실인 것이다. (로버트 젠슨, 78-79쪽)

   

지금까지 살펴본 바르트의 입장을 통해 우리가 명확히 해야 할 부분은 이 부분의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에 대한 성서의 언급에 대한 교회의 해석이라는 점이다. 성서의 계시개념 그 자체가 삼위일체론의 뿌리이다. 칼 바르트가 이 부분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삼위일체론의 뿌리는 성서에 있으며, 성서가 언급한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에 관한 교회의 주석이 삼위일체론이다. 결론적으로 삼위일체론의 뿌리는 성서와 교회의 주석이라는 두 가지 핵심어로 요약될 수 있다.(이국희, 16쪽)

   

바르트는 교의학에서 삼위일체론을 먼저 다루지 않는다면 성경적인 삼위일체론과는 전혀 상관없는 공허한 사변[사색]의 위험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말하면서, 삼위일체론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교의학에의 일반론적인 신론의 도식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하는가,’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 ‘하나님은 무엇인가’ 라는 순서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삼위일체론의 실제적이고 종합적인 중요성에 모순되기 때문이다. 또한 삼위일체론이야말로 근본적으로 기독교의 신론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구별하는 것이며, 모든 가능한 다른 신론과 계시론에 대립되기 때문이다.(이재영, 11쪽)

   

1-2. 화해

   

- 화해 인식의 출발은 예수 그리스도 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연합은 그 분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동반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십자가를 수용하고 지고 감으로써, 하나님의 아들 곧 모든 쓰라린 고통 가운데서 또한 당연하고도 그리고 자명하게 사람의 아들이셨던 분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바쳤던 그 직접적인 고유하고 순수한 순종 안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들의 순종은 그들에게 선사된 자유에 후속적인 행위이며, 그것은 너무도 많은 불순종의 흔적들 가운데서 수행되기 때문에 만일 순종의 특성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써 옷 입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순종이라고 이름붙이기 어려운 것이다. 그들의 고난은 세상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에 대한 가장 작은 공헌도 하지 못한다. 그들의 고난은 화해의 사건이 그들 스스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완전하게 발생한 것이며, 그들의 고난이나 그 밖의 다른 어떤 골고다들의 보충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초해 있다. 그들 즉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한 가운데에서 그 화해 사건의 현실성과 완전성이 은폐된 것이 아니라 단지 공개된 그러한 사람들이다. (칼 바르트 4, 831쪽)

   

바르트는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를 각기 분리해서 다루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에서 출발한다. 전통적인 두 본성론에 의하면 신적 실체와 인간적 실체가 연합이 되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서로 분리되어 다루어진다. 이에 대해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존재와 역사는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다룬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그 안에서 화해하시는 하나님과 화해된 인간이 동시에 현존하는 분이다.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가 사건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로서 존재한다.” (김영한 1, 562-563쪽)

   

물론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통합적 이해는 신적인 화해의 주체를 공고히 만듦으로써 자유주의를 극복하게 한다. 자기를 낮추시어 수치의 상태를 겪으실 때 하나님의 신성이 드러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인간은 이미 해방을 얻은 자가 되고 그리스도가 승귀될 때 함께 올리어지게 되는 것이다. 인격과 사역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이해를 양성의 연합의 구조 속에서 필연적으로 출발시킨다.(권문상, 19쪽)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따라 사는 삶은 공동체적인 삶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공동체 안에서 살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을 행한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며 그 부름에 응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는 공동체를 구성하게 된다. 그 부름은 성령의 사역이며 일하심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믿음 안에서 역사하며 그렇게 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가 일어나게 한다.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인의 부르심과 이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칭의와 성화, 이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공동체를 설립하신다. 그것은 교회 자체의 목적을 위하여 설립하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그러하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제도나 조직, 전승, 관습에 의하여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감추어진 은폐성으로서 성령의 일하심의 사건 안에서 존재한다.(신태성, 71쪽)

   

바르트에게 성육신 곧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하나님의 계시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요 화해의 주로 직접 자신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는 바르트의 사상의 기초이며 중심이라 하겠다. 화해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라 할 때 하나님의 화해 인식의 출발은 기독론이 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기독론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중심이 되도록 하였다는 말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삶의 독특성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신학과 차별화하여 수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자신의 실제 계시 인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이 역사적 예수로부터 신적인 가치를 찾았다면, 바르트에게는 신적인 계시 자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도록 도전하였던 것이다. (권문상, 16쪽)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적 신학의 이해는 그의 화해론에서 잘 나타나있다. 그의 저서 『교회교의학』 제 4권의 화해론은 바르트 신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바르트는 “객관적 화해론”을 전개시킨다. 김명용은 그의 저서『칼 바르트의 신학』에서 바르트의 화해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인류가 하나님과 화해된 순간은 자신의 믿음의 순간이 아니고, 이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악을 짊어지고 죽으신 순간이다”라는 표현은 계시의 ‘객관적 측면’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사건에서 화해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이다. 이는 화해자 성자 하나님의 사역인 화해를 객관적 화해론으로 발전시켜 나간 것인데,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유일무이한 객관적 사건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사건이다.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화해 사건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이미 결정되었으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사건 안에 계시되었다는 것이 그 주요 내용이다.(임순숙, 12쪽)

   

하나님은 그의 말씀 속에서 어떻게 그의 아들을 보낼 것을 의도하시는가? 그 아들의 파송에 대한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바르트는 하나님의 선택론을 진술한다. 하나님은 선택하시는 분인 동시에 선택된 분이시다. 이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며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선택하는 반면 아들을 심판받는 자로 선택한다. 이 선택이 화해론의 전제에서 다룰 세 번째의 내용이다. 바르트는 선택론을 다루면서 그 내용이 하나님의 속성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하심에 의하여 성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육신이 된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을 하나님의 자기비하로서 다루며 이 비하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과 인간의 죄를 다루고 있다. 육신이 되신 말씀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서 죄인의 죽음을 죽으신다. 이것이 화해론의 첫 번째 주제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시며 영화롭게 하신다. 바르트는 이것을 하나님의 올리우심, 즉 귀향으로 다루고 있다. 이 부활을 통하여 인간은 옛 인간의 죽음과 새로운 인간의 창조가 선언된다. 그 새로운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나타났으며 이것은 예수의 죽음 이후 부활이 그분의 첫 번째 재림이라면 두 번째 재림인 세상의 마지막 날의 오심에 약속되어졌다. 이것이 화해론의 두 번째 주제이다.(신태성, 33쪽)

   

순환과 점유의 변증법의 형태에서, 하나님의 본질과 사역은 어떤 관계를 갖는가?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본질과 활동은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자기로부터 구별되었고, 창조되어야 할 혹은 창조된 현실에 대한 그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질이다.”

계시자-계시-계시의 능력, 창조자-화해자-구원자이신 하나님의 본질이 곧 하나님의 활동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활동이 곧 그의 본질이요 그의 본질은 곧 그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질 안에서 세 존재양식의 상호내재성(Involution)과 상호공존성(convolution)은 하나님의 활동에 있어서의 상호내재성과 상호공존성은 완전히 상응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활동은 “구분되어야”한다. 만일이 양자가 구분되지 않을 때, 하나님의 활동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자유로운 신적인 결단”이 아닐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을 때 하나님의 계시가 더 이상 없어도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그가 인간의 포로가 되도록” 계시하지는 않는다. “그는 활동함으로써, 그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자유롭게 존속한다.”

인간에 대한 활동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유롭다. 그는 하나의 비밀로서 은폐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 자체와 활동하는 자, 자기를 계시하는 자로서의 그의 본질을 구분”할 수밖에 없다. 그는 어디까지나 자유롭기 때문에, 어떤 필연성에 얽매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으며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앎은 적절하지 못하게 된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파악될 수 없음,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인식의 부적합성”은 하나님의 자유에 근거되어 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도 인간을 향한, 즉 “밖을 향한” 하나님의 활동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삼위일체도 우리에게 파악될 수 없다. 따라서 삼위일체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인식은 부적절하다.” 우리는 세 존재양식의 차이를 파악함과 동시에 그 자체를 파악하지 못한다.(공병섭, 39-40쪽)

   

바르트는 두 곳에서 삼위일체의 뿌리를 발견하는데 첫 번째는 계시의 형식적인 구조이고 두 번째는 아버지, 아들, 성령의 원초적인 표현에서이다. 먼저 계시사건의 형식적인 구조를 살펴보면 바르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Deus dixit)” 혹은 “내가 나를 보여준다.”라는 성서 구절을 분석함으로 하나님은 계시 활동의 주체(주어)이며 대상(목적어)이고 술어(보어)로 이해하였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이 세 영역에 모두 해당되므로 하나님은 계시하는 분이시며 계시의 사건이고 계시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본성 안에 손상되지 않는 다양성으로 나타나는 존재의 삼중적 양식은, 손상되지 않는 일치로서 계시자이며, 계시이고, 계시되어진 것인 동일한 하나님께 속한다.” 그리고 이러한 계시적 언설이 문법에 대한 형식적 분석이 삼위일체 자체를 만들어 내지 않고, 오히려 “예비적인 방법으로 삼위일체 교의에 대한 문제에 접근하게 한다.”고 바르트는 생각하였다.

삼위일체에 대한 두 번째 뿌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계시된 성서의 핵심적 표현들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성서는 창조자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하신 아버지시며, 화해자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며,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구원자 하나님이 성령이라고 계시하였다. 바르트는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세 존재양식은 한 하나님의 일치를 가정 할 때만, 구분을 유지하는 충분한 분별을 가능케 한다고 생각하였고 결국 이러한 계시의 분석은 하나 안에서 셋이라는 삼위일체의 고백을 낳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바르트의 분석은 비록 삼위일체 교의 혹은 명제가 문자 그대로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단순히 자연과 자연신학의 창조자 하나님과 일치시키는 오류를 막고, 신-중심적이지 않은 그리스도론이나 전혀 그리스도-중심적이지 않고 신-중심적이지 않은 성령론을 불가능하게 하는 즉 성서에서 벗어난 오류를 막기 위한 인간의 최선의 노력인 즉, 논리적 필연성에서 나온 노력의 열매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 뿐만 아니라 계시의 상황에 서있는 사람들의 경험을 진정으로 표현해 준다는 의미에서 삼위일체 교의는 계시된 교의라는 더 큰 의미를 밝혀놓았다. 웰치의 말을 빌려서 정리하자면 바르트는 삼위일체 교의는 하나님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였다는 직접적인 고백의 해설이며, 모든 교의의 출발이 되는 계시가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통하지 않고는 진술되어질 수 없기에 복음의 직접적인 결과이며, 삼위일체 교의가 복음 자체의 객관적 표현이며 구체화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의의 모든 영역과 모든 교의를 통합하는 것이라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이인, 25-26쪽)

   

하나님과 화해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체이시며,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들을 친구로 만드는 기적인,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연합 관계를 재생시키는 기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창조가 아니며, 창조의 연속도 아니며, 창조를 뛰어넘는 인간으로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이다. 그리고 이 사역이 계시의 현실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나타셨고 이 사랑으로 타자를 당신 자신 안에서 받아들이시고 화해하셨다. 따라서 화해의 사역을 아버지 없이는 생각할 수 없지만 화해의 영역에서는 둘째 존재양식 즉, 아버지의 아들 혹은 말씀으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이같이 바르트는 화해는 신적 본질에서 있어서 상이성이 아니라 오직 존재 양식의 있어서의 상이성이며 신성이 많고 적음 혹은 기적의 크고 작음을 고려할 수 없는 한 창조라는 완전한 기적이 있는 것 같이 화해라는 완전한 기적이 나란히 있음을 인식했던 것이다.(이인, 72-73족)

   

교회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장점을 파악하고 결국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화해의 행위 속에서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 남북의 갈등상황에서 평화에 대한 지시는 교회가 해야 할 유일한 길이다. 한국교회는 한국의 통일된 상황이 평화를 지향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하며 주변의 다른 모든 나라들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이 사실에 대하여 끊임없이 선포해야 하며 평화를 위한 사업과 행동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북한에 대한 시각을 체제의 대립보다는 고난에 처한 인간으로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들은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인권과 정신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구원되어야 할 사람들인 것이다. 교회는 보수적인 입장에 서서 좌파타도라는 구호를 외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바라보시는 시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남북갈등의 해결을 위하여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신태성, 148쪽)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재, 삶과 활동을 우리의 것과 실제로 연합하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유롭고 은혜로운 의지에 따라 “영원한 구원”인 자이다. 바르트는 기독교 메시지가 모든 내용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메시지의 전체 내용을 설명하고 전개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메시지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 메시지가 화해론에서 기독교 메시지의 중심에서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살고, 통치하고, 행동하며, 참된 하나님과 참된 사람이며, 평화와 구원”이라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존재동참”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구원의 규정과 구원을 위한 인간의 규정을 처음부터 정해 놓았으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존재동참을 우리에게 주도록 강요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강요받지 않고 인간이 어떤 요구를 하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과 약속이 더욱 더 강요하는 것이다. 인간을 위한 구원의 규정과 구원을 위한 인간의 규정은 “하나님의 근본의지, 기본의지이며,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의 의지의 근거와 목적”이다. 인간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과 약속은 창조자로서 하나님의 의지와 사역에 앞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세상과 사람의 존재를 먼저 원하고 창조하고, 그 다음에 세상과 사람을 구원에 이르도록 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앞선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앞선 목적과 함께 사람을 창조하고 보존하고 통치하시는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과 우리 사람들 간의 평화와 우리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특수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해 지시된 구체적인 것이라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 이름을 지니는 자가 “평화이고 구원”이기 때문이다. 평화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알려질 수 있고, 그의 이름에서만 선포될 수 있다.(서벤쟈민, 52-53쪽)

   

흔히 예수가 승리자라는 사실은 종교로써의 기독교가 승리한다는 뜻으로 이해되고, 남용되기 쉽다. 바르트의 화해론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예수가 승리자라는 이 대목이 형성된 배경과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적으로만 인용될 때 굉장히 오해될 여지가 있다. 특별히 지난 세월 동안의 선교 정책에 대한 죄책 고백과 방향 전환이 진지하게 모색되어야 하고, 종교간의 협력과 관용이 강조되어야 하는 오늘날의 세계 상황 가운데, 이러한 제목을 들을 때 굉장히 독선적이고 구시대적이며 편협한 것으로 여겨질 위험성이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그 진술의 역설적 성격이 쉽게 이해되기 어렵다. 즉 기독교 자체가 배타적이고 우월하고 규범적이며 절대적 기준이며, 신적 권위를 갖고 존재하는 유일한 종교로 부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우월성, 독단적 배타성이 아니라 말씀의 자유로운 독립성과 권위이다. 물론 그 말씀의 선포자가 말씀 자체와 동일시되는 것으로 부터 벗어나야 함을 전제하고서 말이다. 따라서 타종교인은 선교의 숫적 확장을 위한 선교의 대상이나 객체로 여겨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은 기독교 정체성의 중요한 핵심이다. 그러나 이 내용은 문자주의적으로 단순히 이해되기보다는 역설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 능력과 자유하심에는 어떤 한계나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타종교와는 대화와 협력을 위한 창조적 긴장관계에 있어야 한다. 성령은 이러한 사역을 가능케 하시는 역사를 도우시며 이루신다.“선교는 우선적으로 교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술어이다. 하나님은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선교란 교회와 기독교를 단순하게 지리적, 물리적으로 방어하고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총체적으로 동참하는 것이다.(정미현, 83-84쪽)

   

바르트는 예수그리스도는 선택하시는 하나님과 동시에 선택된 인간이라고 주장하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중예정을 말하였다. 하나님은 인간과 교제를 갖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자기와의 교제를 위하여 인간을 선택하셨다. 인간은 이것을 통해서 오직 ‘얻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오직 ‘잃을’ 수 있으신 것이다. 이것은 이중예정론의 본질인데, 인간에게는 ‘구원(salvation)’이 되나, 하나님께는 ‘위험(danger)’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중예정론은 결과적으로 더 이상 어떤 사람들에게 선택과 유기를 배분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닌 것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인간에게 곧 선택과 구원과 생명을 주시고, 자신은 거부와 저주와 죽음을 택하신 것이다. 거부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을, 그의 분노한 심판과 저주와 죽음과 지옥의 대상으로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가 받을 거부를 스스로 담당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거부는 인간의 몫이 아닌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 예정론은 결코 인간을 정죄하는 하나님의 부정이 아니다. 예정론이 거부를 포함하는 것은 사실이나, 이 거부는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거부인 것이다. 그러므로 골고다의 의미는 곧 골고다에서 성립된 위대한 교환(exchange)인 것이며 이 교환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결정인 까닭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요컨대, 골고다는 태초의 ‘구체적인 선택’에 대한 ‘역사적인 확증’이며 동시에 인류와의 화해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한 계시이다.(송명철, 26-27쪽)

   

바르트의 신학의 복음주의적인 핵심은 신적인 화해자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이다. 여기서 그가 신론으로부터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아버지를 아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기독론이 드러내는 것은 영원하신 아버지의 성실과 연민, 즉 그가 인간에게 호의적이라는 것과 그가 인간의 편에 서 계시고 그의 인간의 실존을 위협하거나 해치는 그 모든 것에 맞서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바르트가 하나님의 인간성으로서 말하고자 한 것인데, 그것은 인간의 하나님이 되고 인간이 그의 신적인 영광의 인간적인 파트너로서 자신과 친교를 나눌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향해 돌아섰던 하나님을 말한다. 바르트의 설명은 신학에 있어서의 중대한 분기점이 영원한 아들이신 하나님의 화육의 교리라는 것, 즉 공간과 시간 안에 있는 우리의 육체적인 실존 내에서 하나님의 인격적인 존재의 현실적인 현재에 대한 어마어마한 사실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 (T.F. 토렌스, 35쪽)

   

화해는 계시에 의한 기독교적 인식에서 서로 연관된 것이다. 화해는 그때 거기라는 것과 지금 여기라는 것의 길 위에서 변화된다. 화해를 인식하는 기독교인은 중립적이고, 어떤 생각하기 어려운 이유에서 옳다고 여기는 진리나, 어렵사리 고안해 낼 수 있는 생각들을 형성하고, 고정적으로 관찰되는 원칙이나 체계에서가 아니라, 올바르게 성립되고 교회적인 권위로 허락된 교리와 함께 하는 것이다. 화해는 하나님의 구원행위로서 인간에게서 드러난다.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 화해이다. 계시가 나타난다는 것은, 이상한 그 어떤 존재가 아니라, 그 분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다. 화해에 내포된 그 모든 것은 그분이 그 자체로 현실적으로 계시되는 것이다. 그 분은 스스로 낮추시고, 그의 낮춤에서 그의 인간적 형제, 자매들을 의롭게 하는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고양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높이 들리우심에서 그의 모든 인간적 형제, 자매들을 성화하고 상승시키는 존재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자기 비움(빌 2,6-11)이 하나님 선교의 근본이 된다. 이러한 구원의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사건을 계시하고, 그 분과 이 구원사건이 그 대상이자, 이유와 내용이 되고, 구원사건이 기독교적 인식의 바탕이다. 이 구원의 사건은 그 분에게서 일어난 구원의 행위이고, 세상전체와 모든 인간을 위해 그 분에게서 일어난 사건으로써 신적 구원행위에 은혜롭게 참여하는 예언적 사역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몸을 낮추어 내려 오신 이 땅이 바로 말씀 선포와 아울러 선교의 양 측면을 이루는 사회적 책임의 크고 작은 윤리적 실천과 봉사(디아코니아)의 공간이다. 이 세상의 약한 자와의 연대의 사건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마 25,45).(정미현, 89-90쪽)

   

이런 견해로부터 자연신학의 위험은 일단 그것의 근거가 인정된다면 그것은 그것 위에서 그 밖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귀화시키는 근거가 되고,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의 자기 계시를 통하여 전달되는 하나님의 지식 조차도 그것이 자연 신학의 한 형식이 될 때까지 길들이고 그것에 적응시킨다는 사실에 있다. 바르트는 비록 논박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극히 어려운, 독일 개신교 신학사에 대한 광대한 조사를 통하여 이러한 판단을 내렸다. 더구나 그는 히틀러의 권력 장악 이전과 이후의 현대의 상황에 대한 그의 분석을 통하여 이것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기독교 국가 안에서 일어나는 이교적 신앙의 쇄도, 그 배후에서 나타나는 것은 독일적 자연과 문화의 낭만적인 심연 속으로의 기독교의 길들여짐과 병합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르트가 에밀 브룬너의 소책자 <자연과 은총>이 독일에서 저항의 투쟁을 하는 그들에게 그것이 나치 체제와의 화해를 옹호하였던 소위 ‘독일 기독교인들’의 기초를 강화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에게 그렇게 화를 내었던 이유를 설명해주고, 그리고 바르트가 바티칸과 히틀러 사이의 협약을 위한 신학적인 근거를 제공하면서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하고 성취한다는 성 토마스의 격언을 잘못 인증하였던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을 마찬가지로 날카롭게 반대하였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T.F. 토렌스, 175쪽)

   

그리스도교 사신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사람의 죄가 사함받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 곧 하나님과 사람의 화해의 사건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이 화해 사건은 단지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의 근원과 내용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신학의 중심이고, 그의 모든 신학을 결정한다. 왜냐하면 이 화해의 사건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이 누구인가, 그 분이 인간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지가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은 저주받은 버려진 존재에서 선택된 존재로, 하나님의 원수에서 그의 자녀와 친구로 넘어간다. 이 역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전대미문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사건에 대한 묘사는 극적이고 급진적일 수 밖에 없다. 화해론은 이 사건의 내용과 의미를 통찰할 수 잇게 하고, 이해하게 하는 과제를 갖는다.

그런데 화해를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맺어진 '계약'의 성취이기도 하다. 바르트에 의하면 계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처음부터 존재하였지만 사람의 죄로 인해서 교란되고 위협 받게 된 사귐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역사 안에서 본래적으로 그것의 최초의 목적이 새롭게 확증되고 재건된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약의 하나님이 되고자 하셨고, 사람을 그 분의 계약 파트너로 삼고자 하셨다. (최영, 377쪽)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직접 자신을 그 안에서 신과 화해한 세상의 지체로서, 그 안에서 그의 죄에도 불구하고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된 인간으로서, 그 안에서 성취된 계약의 정당한 파트너로서 인식하고 파악한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종하고 고백함으로써, 그는 전혀 자연스러운 일,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므로 진리 안에 있는 자로서 그에게 합당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가 이로써 다만 그의 진정한- 오직 진정으로 인간적인-가능성을 실현한다. 그가 이로써 다만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따라서 진리 안에 있는 자로서 그에게 선사된 자유를 확증한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그가 자기자신이 그에게 선사된 자유를 확증한다. (칼 바르트 3, 77쪽)

   

한국에서 바르트의 신학은 유럽-북미에서와 같이 자유주의와 정통보수주의 사이에서 애매모호한 논쟁들을 야기하는 회색주의적인 사상이며 교회부흥과 신학교육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비 신앙적인 사상으로 오해되고 왜곡되었다. 이렇게 바르트의 신학이 한국에서 부정적으로 각인된 이유들 중의 하나는 한국 개신교의 일방적이며 배타적인 개교회-교단 중심적인 교파-교권주의 때문이었다. 이런 교파-교권중심적인 분위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자신들에게 속한 교단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하녀들로 전락됐고, 그렇게 제한적이며 주관적인 각 교단들의 교리해석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한국 교회들과 한국 기독교인들을 위한 고유한 한국적인 신학사상연구-개발에 소극적이었다. 대신 서양신학사상에는 무비평적인 자세로 일관하며 번역-복사신학에 집중했다.

한국전쟁 이후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불안한 시대를 살았던 기성세대 신학자들은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사고구조를 거부하고 일방적이며 절대적인 주관성을 바탕으로 흑백논리방식을 신학연구에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신학은 보수와 자유주의로 양분되어 예수그리스도 복음의 진리 안에서 그 개신교적인(Protestant) 정신에 기초한 참된 화해와 연합의 접촉점(Point of Contact)을 상실한 채 상호 비생산적인 논쟁들과 갈등들 그리고 극단적인 대립들을 양산했다.

1960년대 한국 개신교단들이 보수와 자유 양 진영으로 분열될 때, 보수주의 진영에서는 바르트의 신학에 적극적으로 수용적이었던 자유주의 진영에 맞서기 위해 에큐메니칼운동(Ecumenical Movement)을 “애매하게 칼 휘두르는 운동”으로, 칼 바르트는“칼 휘두르고 발악하는 신학자”로 곡해하고 비하했었다. 이렇게 그 당시 한국 개신교단들은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신학연구노력에 소극적이었고, 상대방의 신학적 방향과 특성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풍토가 만연했었다.(김영관, 74-75쪽)

바르트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중성을 창조주, 화해자, 구속주로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에 관하여 바르트는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성서대로 친히 자신을 창조주로서 즉 우리 현존재의 주님으로서 계시하신다고 말한다. 또한 성자에 관하여 바르트는 하나님께서는 성서대로 친히 자신을 화해자로 계시하시며, 이것은 우리가 그 분과 반대하여 원수가 되어 있는 곳에서 주님이 계시하시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성령에 관하여 바르트는 하나님께서는 성서대로 친히 자신을 구속주로 계시하시며 그 분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시는 주님으로 계시되는 분으로 우리는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 속에서 형태를 취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성령을 부어주셨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계시의 객관적 현실이며, 성령은 계시의 주관적 현실이 된다. 결국 성서에서 증거된 계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주로서 계시하신다는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김신현, 18쪽)

   

   

바르트의 이러한 신학적 내용과 방향은 하르텐슈타인에 의하여 심도 깊게 포착되었다. 즉 하르텐슈타인의 신학적 기초에는 바르트의 변증법 신학과 삼위일체적 지평 안에서 계시에 대한 기독론적 화해론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바르트의 신학은 선교에 대해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라는 강연에서 바르트를 진정한“하나님의 계시의 증언자”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사실성이 모든 신앙고백의 근거, 내용이고 규범이 된다. 또한 인간에게 진정한 회개를 촉구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교만을 경계하며, 이것을 선교에도 적용하는 것이다. 즉 선교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이 선교를 이루어 가심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 자신이 선교의 주체가 된다는 신학적 인식론의 기본틀을 마련한 것이다. 하나님이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서만 인식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즉 하나님의 말씀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가능하다. 이 말씀은 유일회적으로 그 당시에 증언되었지만,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오늘 각 신앙인의 마음에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쓰여지고 기록된 말씀이 성령의 역사로 선포된 말씀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은 역설적 연합성이다. 영원한 말씀이신 하나님이 바로 인간이 되신 성육신 사건 때문에 그렇다. 이 역사적 사실성과 실재성이 성령의 능력으로부터 우리에게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이다.(정미현, 74쪽)

   

- 만유화해론 이다/아니다?

   

만유화해론은 최후의 심판의 궁극 목적은 심판의 두 가지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과 모든 피조물들의 회복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회복시키실 것을 주장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최종적인 거부는 있을 수 없다. 진노는 최종적인 단어가 아니며, 사랑이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단어이다. 이상에서 만유화해론은 첫째, 복음의 선포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둘째, 인간의 의롭고 선한 행동의 동기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송명철, 49쪽)

   

바르트는 성경이 예정론 이해를 위한 유일한 원천이며 기초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자신의 이해에 기초해서 예정론을 전개해나갔다. 인간 예수 안에서 발생한 신인합일을 떠나서는 선택이란 존재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 바르트는 결국 예수께서 가르치신 선택론, 예수께서 가르치신 심판, 예수께서 가르치신 지옥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바르트의 예정론은 자기 자신의 계시이해에서 도출된 인간 예수로부터 출발해서 죄와 타락의 현실성뿐만 아니라 (그가 그렇게 소중히 여겼던) 인간의 자유와 결단마저 제거하고 결국 보편구원론에 이르고 말았다.(김찬영, 121쪽)

   

바르트에게 있어서‘하나님의 은총의 선택’개념은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무리들보다 더 크며, 나아가 그의 교회 개념보다 훨씬 더 큰 개념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은 이미 고정된‘현실’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개방되고 확장되어야 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효력’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으로 알지도 않으며, 그의 교회의 선택으로도 알지 않으며, 나아가 각 개인의 선택으로도 알지도 않으며, 오직 그의 자비의 선택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에 그 어떤 제한을 가하거나 경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종결시킨다면”, 그 결과는 단지“역사의 형이상학”을 만들어 내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 바르트는 선택과 부르심의 역사를 철저히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관점에서 해석한다.“한 사람이 선택되고 부름 받는 곳에, 즉 옛사람으로부터 한 사람의 새로운 사람이, 화해되지 못한 세계에서 하나의 화해된 세계가 선택되고 부름 받는 곳에는, 또 그러한 은폐된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곳에는 언제나 동시에 한 사람의 증거자, 즉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이라는 진리에 대한 증거자요 사자(使者)가 출현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만유화해론’이 선교의 의지를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막연한 우려를 불식시킬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박성규, 184쪽)

   

바르트는 그러므로 칼빈의 이원 예정론을 비판한다. 이원 예정론은 처음부터 인간을 불가항력적으로 선택된 자와 유기된 자로 나누고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진노와 은총을 균등하게 나누는 균형적 사고와 하나님을 그의 고유한 결정 속에 얽매이게 하는 정태적 사고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바르트는 만인구원을 주장하는 바 보편적 화해론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바르트는 선포의 개방적 상황에 머물고자 한다. 바르트는 “선포의 개방적 상황”에 머물고자 한다.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교회는 만인구원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무력한 은혜, 그리고 이에 대해 인간의 강력한 악성을 선포해서는 안된다. 대립의 약화 없이 그러나 이원론적 자기능력 없이 은총의 큰 힘과 이에 대한 인간적 약함의 무능을 선포해야만 한다.”(김영한 1, 556-557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논의의 진행을 위해서 바르트가 과연 ‘만유화해론’을 주장하였는가에 대한 대답을 미리 간략히 정리해 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 가장 명쾌한 답을 제시한 것은 다름 아닌 칼 바르트 자신이었다. 에브하르트 윙엘(E. Jüngel)에 따르면 바르트는 이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증법적인 대답을 하였다고 한다. 즉,“나는 그것(만유화해론)을 가르치지 않지만, 그렇다고 가르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그의 역설적인 대답은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니라 사실 그의‘만유화해론’에 대한 생각을 가장 신학적으로 잘 대변해 주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칼 바르트의‘선택론’에 대해 대체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틸리케(Helmut Thilicke) 조차도“바르트는 항상 이 교리(예정론)의 경계선(Grenze)에서 움직인다”고 보았던 평가와도 일치한다. 이는 또 다시 다른 맥락에서 이루어진 바르트의 대답과도 일맥상통한다. 1937년 이후로 바르트와 절친한 사이였고 또 그야말로“만유화해론의 전도사”였던 리하르트 임베르크(Richard Imberg)와의 대화 가운데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나는 만유화해론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만유를 화해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상호 일치하는 위의 두 대답은‘만유화해론’에 관한 바르트의 생각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준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 바르트의 만유화해론에 대한 신학적 함의를 풀어줄 결정적인 열쇠가 있기 때문이다. 그 결정적인 열쇠란 다름 아니라 바로“그리스도 중심적(Christozentrisch) 신학”이라는 사상이다. 바르트가 만유화해론을 가르치지 않았다면 만유화해론이 그리스도 중심성을 상실했을 때이다. 그리고 만일 바르트가 만유화해론을 가르치지 않은 것도 아니라면 그것은 만유화해론이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되었을 때이다. 바르트는 결국 만유화해론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만물을 화해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친 것이었다는 것이 지금 내릴 수 있는 우선적인 결론이다.(박성규, 175-176쪽)

   

여기에 대하여 바르트는 철학적 가설을 기초로 하고 인간 경험을 기준으로 하는 신학적 사상에 대하여 단호한 반대를 선언한다. 하나님은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다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으로 인하여, 바르트는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기독교의 정체성의 자리를 담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바르트의 종교신학은 타종교에 대한 열림과 관계를 위해 협력적인 모델을 제시하지 못한다. 즉, 종교 갈등과 대립이라는 현실에 대한 적절한 해결점을 주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종교간 갈등과 폭력은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지속되고 있다. 서로의 다름과 갈등은 화해의 가능성을 내포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인간은 대체로 폭력이라고 하는 가장 파괴적이고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대립을 다루어 왔으며 오히려 종교가 여러 갈등과 분쟁의 소지를 주어 왔다.(송영석, 147-148쪽)

   

이러한 화해역사의 목적론은 바르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존재만이 아니라 비그리스도인들의 존재까지도 결정짓는다. 그것은 물론 그들에게서 다양한 영향을 끼친다. 그것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겐 단지 그들의 뒤에서만 자신을 관철시키는 반면에, 다시 말하면 비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투쟁에 주체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반면에,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적극적인 인정을 받는다. 물론 바르트가 볼 때,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의 구분은 상대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의 역사성은 바로 그 본질상 화해에 대한 인간의 무관심과 저항을 극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부음과 약속은 모든 인간에 해당된다.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바로 이 성령의 역사, 화해역사의 이 포괄성과 보편성 안으로 그리스도인들의 특별한 역할도 포함된다. (울리히 단네만, 158-159쪽)

   

바르트에 의하면 전 인류의 역사는 이 화해의 역사와 관련된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역사는 하나님이 사람과 시간 이전에 맺으신 계약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화해는 결코 어떤 이념이나 개념이 아니고, 그것의 진리와 현실이 어떤 개념과 이념들에 의해 파악되는 어느 익명의 역사도 아니다. 오히려 화해는 모든 역사를 포괄하는 역사이고, 하나님이 사람과 맺은 영원한 은총의 계약의 성취의 역사, 하나님과 사람의 가장 특별한 역사이다.

바르트는 이렇게 계약을 화해의 영원한 근거로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의 사건은 인간의 죄에 대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근거,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 은혜의 결단으로 설명한다. 계약은 창조보다도 선행하고, 하나님이 우선 원했던 것은 구속과 화해이다. 하나님이 계약을 파기한 파트너를 그에 마땅한 저주와 비참, 어둠과 죽음 속에 내버려두지 않고 그의 반대와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는데, 바르트는 이 하나님의 특별한 행위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사건으로 설명한다. (최영, 380쪽)

   

-계시 = 말씀의 화육(세상으로)

   

한편, 계시는 예수의 탄생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우리 인간 본성의 떠맡음을 통하여 우리 인간의 실존 속에 들어온 하나님의 은혜로운 겸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것은 예수의 부활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의 본성을 그것의 소외, 타락과 어둠으로부터 신적인 생명과의 연합으로 들어 올린 승리이다. 그의 탄생과 그의 부활 사이의 괄호로 묶어지는 지상에서 예수의 모든 삶과 실존은 그 안에서 하나님이 그 자신을 인간에게 내어주고 인간을 그 자신과 화해시키는, 바르트가 표현하듯이, 이렇게 인간을 위해서 성령의 부음을 통한 계시의 ‘주관적 가능성'에 의해 보충되는 계시의 ’객관적인 가능성‘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계시의 구체화된 현실성이다.

이렇게 신적인 계시의 현실은 화육안에서 공간과 시간이라는 우리의 세상 속에 돌입해 들어왔고, 그리고 계속해서 성령을 통하여… 주 예수가 성령에 의해 수태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 탄생하였던 식으로, 그리고 그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비우고 다락방에 있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려고 닫힌 문을 통해 들어왔던 식으로-기적적으로 그 자체를 우리 인간의 이해 속에서 실현한다. (T.F. 토렌스, 126-127쪽)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 즉 육신이 된 하나님이라는 점에서 그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의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완전한 연합, 그리스도 신성과 인성 양쪽 모두의 완전함이다. 만약 그가 완전하게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는 하나님의 계시와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가 완전하게 인간이 아니라면, 그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 계시의 현실성이 아닐 것이다. (중략) 예수는 자유롭게 인간이 된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화육은 하나님의 은총의 순수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은총의 행동 안에서 인간 예수는 하나님의 화육된 아들의 하나이며 분할 할 수 없는 인격 안에서 참된 사람으로서 충만한 인격적인 현실을 지니고 있었다.(T.F. 토렌스, 128-129쪽)

   

계시는 말씀의 화육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화육은 우리의 속된 세상 속에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는 바르트의 주안점으로 다시 돌아가자. 이 속된 세상은 계시에 우연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적인 운동에 속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의 성격상 계시는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의 그것이 아닌 것에 의해서, 즉 그것이 주어졌던 자들의 인간성과 속됨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시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이해와 성서에 대한 우리의 모든 해석이 내적인 변증법이나 양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내포한다. (T.F. 토렌스, 137쪽)

   

- 예수 안에서 세상과 화해

   

그러나 또한 설교는 성서적-역사적 작업일 수도 없지만 또한 조직신학적 작업이 될 수도 없다. 설교는 반성하거나, 추론하거나, 토론하거나, 가르치지 않는다. 설교는 선포하고 부르고 초대하고 명령한다. 설교는 교의, 즉 교의적 문화로 가득해야 한다. 곧 편집된, 응용된, 실천된 교의학으로 가득해야 하고, 그러므로 모든 명시적 교의학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설교는 ‘인간에게’말함으로써 자칫 심리학적, 사회적, 윤리적, 정치적 학문의 논술이나 강의 그리고 설교자의 신념이 (그런 것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더욱 중요한 것은, 설교가 그것의 특수 봉사의 내적 흐름에 충실하며, 따라서 실제로, 배타적으로 복음과 그것의 계명, 그것의 요구, 그것의 심판,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의 약속을 표현하고 복음에 낯선, 복음을 제약하고 문제시하는 사상 및 법 구조를 표현하지 않는 것, 인간과 세상에 대한 신의 ‘그래’(여기에 신의 ‘아니’가 포함되어 있으니 바로 실제로 포함되어 있고, 이것에 반해서 신의 ‘아니’는 독자적인 주제가 될 수 없다)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모든 차원에서의 화해를 표현하고, 다른 것, 화해에 반하는 것, 이것에 대해 중립적인 것을 발설하지 않는 것이다. 설교는 우회해서가 아니라 즉시 문제로 향해 가며 청중을 혼란스럽게 풀어놓거거나 지치게 펼쳐 놓지 않고 신의 영광을 위해 인간의 기쁨을 위해 집약해서 간략하게 이것을 발언하고 설명하고 인간들에게 설득하고 호소함으로써, 설교는 또한 예전적 행위가 되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봉사 전체 및 모든 다른 형태의 맥락 속에서 자기 봉사를 이행한다. (칼 바르트 3, 416-417쪽)

   

화해는 단순히 겸비하셔서 인간이 되시는 하나님의 움직임으로 완성되지 않고, 사람이 높아져서 하나님과 교제의 관계에 들어감을 포함한다. 화해는 하나의 ‘교환’이다. 두 사건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연합에서 일어났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우리의 인간 본성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된다. 비록 이것이 우리 안에서 반복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인류는 이로 인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의 집에로의 귀환을 시작했다. 이러한 승귀는 우연적이거나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고, 자연적인 인간적 발전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이기 때문에, 모든 진리의 절대적 규범으로서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것이 역사적으로 실현될 때, 이것은 신비이며, 기독교 신앙의 유일하고 진정한 성례이다. 그의 존재양식 안에서 아들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이 되려고 작정하셨다. 이분은 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성의 형태와 연합하려 하셨다. (아놀드 B 콤, 151쪽)

   

바르트는 하나님과 화해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즉자적으로 진정한 인간성 자체에 참여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객관적인 성취의 과제에 대한 인식 근거를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바르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 윤리학을 신학적 근거 밖에서 형성함으로써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논의로 전락시키는 입장과는 매우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기독교인의 실천원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한, 그럼으로써 하나님과 더불어 존재하며 살아가고 행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에 바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인간과 더불어 계신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며, 이 하나님과 만남은 하나님의 자기계시로서의 하나님의 뜻에 직면한다. 즉 하나님의 명령 앞에 선 존재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과 더불어 존재하며 삶을 나누는 하나님은 인간을 향해서 계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학은 삶의 여정 매 지점마다 독특한 성격에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간의 만남의 신비를 지시하면서 일종의 특수윤리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기독교윤리학의 과제는 창조로부터 화해와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과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 일어나는 윤리적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박충구, 201쪽)

   

이와 같은 고립은 신학의 본질과 상치되는 것이므로 감당하기 어렵다. 대중과 동떨어진 곳에 신학의 자리를 두는 일은 신학의 성격에 위배되는 것이다. 종교는 개인의 사사로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과 세상의 화해이기 때문에, 신학의 대상이란 모든 인류의 상황에 대한 가장 과격한 변혁이요, 모든 인간에게 관계되는 바 이 변혁의 계시이다. 따라서 이 계시는 그 자체로서는 틀림없이 최대한의 보편사이다. 사람의 귓 속에 속삭여진 말이지만 지붕 꼭대기에서 선포되어져야 할 것이다. (칼 바르트 2, 119쪽)

   

공동체가 신을 위하여 있기 때문에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이며 그 안에 존재의 근거를 가진다는 사실에서 직접적으로 결과한다. 그는 공동체를 부르고 모으고 세운다. 그는 공동체의 주와 모가로서 공동체를 다스린다. 그는 언제나 새로이 그의 임재의 사건에서, 그의 성령의 조명능력을 통해서 공동체를 구성한다. 그는 중심이고 공동체는 그 주변을 원심적으로 움직인다. 바로 그 안에서 그를 통해서 공동체는 신을 위해 획득되었고, 신을 추종하고 섬기도록 요구된다. 바로 그 안에서 신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 있고, 신은 자신을 세상을 위해 내어 줌으로써 세상을 자신과 화해하게 하였다. 신은 진실로 신이 됨으로써, 또한 참 인간이 되었다. 이로써 그의 공동체의 존재의 방향, 의미와 목적이 결정되었다. (칼 바르트 3, 304쪽)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의 주관적인 측면에 관해서,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을 우리가 들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관해서 다음절에서, 즉 성령 하나님에 관한 교의에서 진술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어떤 것을 도대체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이, 죄된 인간에 대한 그의 분노에 직면해서 이러한 첫 번째의 불가사의한 것이 하나님의 계시에서 아들의 役事 혹은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이다. 아들의 혹은 말씀의 역사는 하나님의 현재와 나타냄이니, 이것이 인간적인 암흑에 있어서도 또 이러한 암혹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사건화된다는 사실에 직면해서 우리가 그러한 현재와 나타냄을 오직 계시로서만 표식할 수 있을 뿐이다. 화해라는 말은 그 동일한 사실에 대한 다른 말이다. 하나님의 계시 그 자체가 하나님만이 수행할 수 있는 것을 수행하는 한, 즉 우리에 의해서 파괴된 교류, 실로 부정되어 버린 바 하나님과의 인간의 교류의 회복을 수행하는 한, 실로 하나님의 계시의 사실에서 적대자들이 그의 친구들로 되는 한, 계시 그 자체가 화해이다. 이렇게 반대로 화해가, 저 교류의 회복이 분노에서 분노를 넘어서는 승리하는 바 하나님의 자비가 오직 신비의 형태를 취할 수 있는지, 이것을 우리는 바로 계시로서 표식한다. (칼 바르트 1, 524-525쪽)

   

   

1-3. 예수

   

이러한 바르트 신학의 출발점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존재론적인 유비가 없다. 즉 연속성이 없다.

둘째,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만이 유일한 접촉방식이다.

셋째, 이 계시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된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다. (이승현, 252쪽)

   

이상 바르트의 참된 이스라엘과 거짓 이스라엘에 대한 설명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난 것은 불트만의‘기독교의 비신화화’를 포함하여 무신론자들의 인간적‘종교’는 철저히‘율법적’이고‘세상적’이며 ‘인간의 행위를 우상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가 말하는 기독교는 철저히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 밖으로부터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초월적 은혜’에 관한 것이기에, 그 어떠한 인간의 노력과 행위를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불신앙’은 인간학적‘종교의 단초’가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그는“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주체에 붙어 있는 술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기독교적 종교 사이의 관계 속”에서 ①“신적 창조의 행위,”②“신적 선택의 행위,”③“신적 칭의와 죄 용서의 행위,”그리고 ④“신적 성화의 행위”가 다루어진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계시사건을 현재화하는 성령의 사역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무신론자들의 그 어떠한 인간적 기독교 비판도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김재진, 270쪽)

   

1945년에서 50년 사이 감신대, 한신대 그리고 장신대에서 바르트신학에 관한 연구열풍이 불며, 학부생들에게 바르트 신학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르트의 예수 그리스도 중심사상(Christocentrism)에 기초한 복음주의적인 측면들은 배재된 채 감신대에서는 한국의 사회-문화-종교전통유산인 유교와의 토착화 신학의 수단으로, 한신대는 민중신학의 체계화를 위한 방편으로, 그리고 장신대에서는 캘빈과 관련된 말씀 중심 신학의 확립을 위한 측면이 부분적으로 강조되었다. 그러므로바르트 신학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고(revealed), 기록되어(written) 역동적이며 초월적인 성령님의 능력으로 선포되는(spoken) 그 하나님 말씀진리의 우선성이 간과되는 경향이 형성되었다.(김영관, 76쪽)

   

- 19세기 자유주의 신학 부정

   

바르트가 사역하던 당시의 자유주의 신학은 말씀의 주체자인 인간에게 주도권이 쥐어져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바르트는 말씀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만드는 데서부터 신학은 시작되고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바르트의 말씀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에 반대한다. 오히려 바르트는 신학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의 말씀을 직접 전하시는 것에 기초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씀의 신학은 인간의 죄악된 모습과 유한한 존재이기에 인간 자신이 스스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오직 하나님 편에서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성경이 그 증거를 제시해주고 있고, 교회가 설교를 통해서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진다. 이 계시적 말씀과 분리되어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 자신의 계시 자체인 말씀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신다.(구종모, 23쪽)

   

슐라이어마흐와 헤겔 이래로 만연했던 신에 대한 자유주의적 사고의 전반적인 흐름과는 정반대로, 바르트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초월을 주장했고, 특히 하나님의 자유라는 입장에서 그것을 생각했다. 하나님의 고상함, 주권적 위엄, 거룩함, 영광, 심지어 초월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은 살아 계시고 사랑하시는 이 신적 인격의 자기 결정과 자유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사실, 하나님이 하나님인 것은 그 분이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절대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최고의 것 그리고 철저히 독립해 있는 모든 것과 대비된다. 그것들이 전혀 존재치 않았거나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지라도 그 분은 작아진다거나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유의 완벽한 완전월성은 조화와 편재(omnipresence), 불변과 전능, 영원과 영광 등인데, 바르트는 그 모든 것을 창의적으로 재해석했다.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단순한 일시적 기분과 같은 것으로, 즉 그의 신적 삶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 다 주지 않고 사실 그에게는 별 관심도 없는 어떤 것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충만함은 피조적 생명과의 조화를 향하여 기울어져 있다. 더욱이 하나님은 자기의 자유에 매여 있지 않고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이 나와 이 세상과의 진정한 교제로 들어가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심오한 조화에 도달한다. 사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피조물들과의 연합이라는 이러한 의욕과 결심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근거와 기초로 보았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예수의 성육신, 죽음 그리고 부활 안에서 세상과 언약적 교제를 맺으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이렇게 바르트는 예수 안에 계시된 사랑의 하나님 뒤에 어떤 하나님도 감추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과 사랑을 오직 자신만을 위하여 남겨둔 채 이 세상에 대해서는 그것을 허락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분은 우리가 없는 하나님이기를 원치 않으며, 오히려 우리와 함께 나누기 위하여, 즉 우리의 존재와 삶과 행위 안에서 그 분의 비길 데 없는 존재와 삶과 행위를 나누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다.(이동현, 21-22쪽)

   

신학자들이 세 번째 항목의 신학으로, 즉 성령의 신학으로, 그리고 첫 번째 항목에서의 지고하신 하나님의 신학에 반대되는 경험의 신학으로, 밀고 나아가려고 하였을 때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때에도 역시 그들은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슐라이어마허에게서 특징적으로 발견되는 현대신학의 전부는 17세기와 18세기의 어떤 발전들에 의하여 준비된 신학으로서 이해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세 번째 항목이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무엇을 의도하셨는지를 선언하는 두 번째 항목에 대한 설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반성하지 않은 채, 오직 성령에 대해서만 모험적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던 세 번째 항목의 일방적인 신학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고 오직 그 분에게서 시작할 때에, 우리는 기독교적 의미에서 강력한 관계에 의해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즉 그것을 단순히 다시금 반복하여 진정으로 놀라면서 단순히 지적할 수 만 있을 뿐이고, 그것에 대하여 우리가 큰 오류의 위험 속에 빠질수도 있는, 신․인(God and man)을 알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이 말로써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적절하게,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우리의 고백에 의하여 선언될 수만 있을 뿐입니다. 한편으로는 창조와 존재의 현실 사이에 있는 관계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와 구원과 하나님에 대하여- 이것은 우리의 존재에 대한 어떤 일반적인 진리로부터느 결코 이해될 수 없으며, 종교사의 현실로부터도 결코 이해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오직 예수와 그리스도 사이에 있는 관계로부터만 배울 수 있습니다. (칼 바르트, 90-91쪽)

   

슐라이에르마허에 의하면, 신학의 기능은 세 가지 차원, 즉 자아, 자아와 세계의 관계, 그리고 자아와 하나님의 관계로 탐구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의존의 감정에 관련되지 못한 것은 신학 속에서 아무런 자리를 차지할 수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 감정(feeling)은 지각(perception)과 활동(activity)과 함께 정신적인 삶의 본질적 요소들이며, 지각은 지식을 낳고, 활동은 도덕적 삶의 행위를 낳으며, 감정은 종교적인 독특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슐라이에르마허에게 있어서 종교는 본질적으로 감정의 영역에 속한다. 후일 그는 자신의 대표작 『그리스도교 신앙』(Derchristliche Glaube,1821-1822)에서 이러한 감정을 “절대의존의 감정”(the consciousness of being absolutely dependent)이라고 표현했고, 이것이 그의 신학에 있어서 가장 큰 특징적인 요소가 되었다.

슐라이에르마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완전한 이상(理想)이자 모범이다. 이상적인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 의식을 가진 존재이며, 하나님의 구속 능력의 전달을 위한 중보자라는 점에서 완전한 인간 본성의 모범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 의식의 능력 속으로 신자들을 끌어들임으로써, 그들을 구원한다. 즉 신자들은 자신의 신 의식 강화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구속을 완성하게 된다. 따라서 종교에 초자연적 탄생, 부활, 승천, 재림이 결여되어도 무방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유경수, 23-24쪽)

   

바르트는 19C 신학에서 하나님과 인간, 영원과 시간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여 신학을 종교철학이나 심리학 혹은 도덕적 가치 정도로 취급했던 것과는 다르게 분명한 노선을 취한 것으로서 하나님 말씀올 바로 세우는 것 이었다 그것이 그의 신학의 출발점이 며 과제였다 “키에르케고르, 루터, 칼빈, 바울, 예레미야의 이름이 나타내 는 바는 애매모호하지 않은 비( 非)쉴라이에르마허적 명백성이다. 즉 인간에 대한 봉사는 하나님에 대한 봉사이어야 하며 그 반대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우선 신과 인간의 가장 큰 간격, 즉 단절을 말할 때, 그의 진정한 통일을 보게 되며, 이러한 간격을 신학적 인식의 출발점으로 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서 주석 』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엄숙한 심판, 어둠 속을 꿰뚫고 들어오는 빛과 같이 전 역사에 대해 내려지는 심판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심판, 그것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긍정, 곧 구원이 된다. 한마디로 『로마서 주석」은 종교개혁자들 이 강조했던 “오직 은총으로만", “오직 그리스도만" 의 재현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바르트에게 있어서 강조점은 초월, 간격 , 부정(Nein) 에 있었다. 그것이 그처럼 단호한 부정이었던 것은 19C 백년 동안 굳게 깔려있는 낙관주의적인 신학의 이상주의의 터전을 깨뜨려 부수기 위해서였다.『로마서 주석 』은 바로 인간의 행위를 종말론적으로 심판하는 것이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 (Nein) 이었다. 이 부정 아래 인간의 전 실존과 역사는 뿌리 채 흔들리는 ‘위기’ 에 직면하게 된다 ‘ 위기 ’는 가장 깊은 곳에서 ‘심판’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이 모두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명령 아래 놓여 있다. 계시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의식으로 그것을 들어야 한다.(최종호 1, 166-167쪽)

   

바르트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내재적 방법을 부정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연속성을 주장했다. 동시에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 역사, 인간 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본질적으로 성육신하시는 하나님이라 했다. 인간이 하나님 인식의 주격으로서 출발점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격과 출발점이 되고, 인간은 수동적인 자리에서, 즉 신앙의 응답에 의해서 이차적인 주격이 된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이러한 도전은 19세기 신학의 방법론으로부터의 180도 방향전환을 의미한 것이었다. 바르트는 인간과 하나님간의 영원하고 질적 차이를 강조한다. 이러한 질적 차이의 무한한 거리를 연결시키는 것은 인간의 사고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 자신의 계시에 있다고 한다. 하나님 자신의 계시만이 하나님 인식의 유일한 원천이며 규범이다. 바르트는 인간의 가능성에서부터 계시의 실재성에 이르는 길을 거부하고 오직 계시에서 시작하는 인간의 사유의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죄인 된 인간이 소유한 개념이나 직관은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할 수 없으며 오히려 거짓 하나님, 우상만을 만들어낼 뿐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힘의 영역에 속하거나 다른 대상들과 동일하게 인식되고 파악된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되지 못할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 하나님 인식의 유일한 원천이자 규범이 되는 하나님 자신의 계시는 계시의 주체로서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하나님의 계시와 이 계시를 객관적으로 이루는 아들의 계시와 우리 안에서 계시를 주관적으로 성취시키는 성령의 계시이다. 계시의 객관적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하나님이 만드신 시공 안에서 자신을 말하고 자신을 인식하도록 허용한 하나님 자신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이 사건에 현존하고 우리는 이 사건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박성국, 8쪽)

   

- 예수가 중심된 교회의 공동체성

   

바르트는 공동체의 근거와 본질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것은 교회공동체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동체의 존재와 본질과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참된 인간성과 신성을 드러내 보이셨고, 세상을 위해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실상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세상과 구별되도록 부름받은 백성인데, 바르트는 이러한 구별을 위해서 세상에 대한 교회공동체의 책임성이 있음을 알아야 하고, 이러한 책임성 아래 교회는 에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해져야 한다고 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세상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살면서 공동체의 근거를 찾도록 세상에 보내신 공동체라고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공동체는 세상을 위하여 존재하도록 보내진 것이다.(김영두, 33쪽)

   

바르트 신학의 가장 의미심장한 특징은 '교회성'에 있다. 그는 "교의학은 교회에 매어 있으므로써 의미있고, 가능한 학문이다"라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교회야말로 신학의 실존근거이며 그 주체이다. 그러면 그의 신학의 전체가 된 교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교회를 말하는가? 그는 개혁교회의 일원으로 태어났으며, 이러한 근본적 소여성은 가정, 학교, 교회 교육을 통하여 강화되었다. 나중에 그는 국민교회라는 개념을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판은 그 자신의 개인적인 교회경력에 아무런 손상도 입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형성한 개혁교회의 전통 안에 항상 머물렀다. (중략)

물론, 바르트는 종파주의에 머무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자신의 고백 속에서 경험하고 반성하려고 노력했다.(이신건, 716쪽)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는 기독교 교회의 대변자가 아니다. 예수의 삶의 방식은 무신론자나 유물론자나 다윈주의자나 할 것 없이 예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가 있음을 보여 준다. 바르트는 예수님이 성경에서 보여주신 예수님 자신이 노동자였고, 가장 낮은 사회 계급 출신으로 가난한 자들과 비천한 자들과 어울리신 것처럼 사회주의와 예수를 연결하는 것은 밑으로부터의 운동임을 그는 확신하게 되었다.

1911년 아르가우(Aargau)주 노동당의 공식 기관지인 『자유 아르가우』(Derfreie Aargau)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사회주의 운동”(Jesus Christus und die sozialistische Bewegung)이라는 제목 하에서 그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이렇게 나타내었다. “예수께는 단결의 하나님, 곧 사회주의의 하나님 밖에 계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또한 오직 단결의 종교, 사회주의적 종교가 있을 뿐이다.” “인간은…인간이 되기 위해서 동료(Genosse)가 되어야 한다.”(구종모, 10쪽)

   

그는 하나님의 인식론에 있어서 인간의 존재 사이에 존재론적 상호관계 내지는 연결성을 전제하고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인 인식을 주장하는 19세기 문화신학 및 자연신학을 향한 바르트의 변천하는 신학 가운데 드러나는 입장은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간격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되었으며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며 이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과 경외와 순종의 태도이어야 함을 말한다. 자유주의 신학이 바르트에게 주는 의미는 정통주의의 무력한 합리화 경향을 극복케 해 주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를 강조하기 위해 구축한 태도로써 인간의 전적 타락과 죄의 공장으로써의 이성, 성서의 기계적 영감설을 강조한 정통주의의 한계성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큰 업적이며 역사의 경험에 의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바르트가 영향을 받은 것은 성서에 대한 새로운 이해, 이성의 존중, 예술을 중심에 두게 되는 기동론적 영향, 역사진보와 합리적 사고 등이다.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의 틀은 자유주의를 극복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종교 사회주의를 문화신학의 지류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엄밀히 말해서 바르트에게 있어서의 종교 사회주의는 문화신학에로부터 로마서 강해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경험의 신학이었다. (최홍성, 56-57쪽)

   

이 관점에서, 바르트는 온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온전한 인간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 지상에서의 역사적 현현(the lowliness of an historical existence in this world) 이 가시적이므로 그의 지체요 실체가 되는 교회 역시 “가시적인 기독교공동체 " (a visible Christian community)가 됨을 역설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가시적인 기독교교회공동체들은 각 개인 구성원들과의 진실 되고 신뢰할 만한 관계성 안에서 영적인 친교를 확립하므로 하나님말씀진리의 행위자들(doers of the Word of God)로서의 그 가시적인 속성을 실행하고 입증할 수 있게 된다(약 1:22). 이 영적인 친교는 이 지상인간들의 현실적이며 확고한 삶의 형태로서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 모두 가시적인 기독교교회공동체 안에서 지속적인 친교모임에 참여하므로 이 지상에 역사적으로 현현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하심과 온유하심 그리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의 모욕과 수치 그리고 고통을 조건없이 수용하신 “그 무조건적이시며 아가페적인 사랑의 기적" (the miracle of the unconditional agape-love)을. 역동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됨을 바르트는 주장한다.(김영관 1, 124쪽)

   

공동체가 예배 속에서만이 스스로 고양되어 나가는 것만은 아니다. 우선 공동체는 예배를 언제나 새롭게 여기서 드려야만 한다. 공동체가 예배를 ‘여기서’ 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배를 드림이 아니다. 공동체가 예배외에 더 드릴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여기에서 행하는 바를 확대시키고 변형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공동체를 고양시키고, 신인이신 인자께서 공동체를 고양시키고, 또한 그분들께 참여하는 인간들인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를 고양시키는 것은 어떤 막연한 이념이 지배하고 나타나는 것과는 뚜렷이 구분된다. 여기서 공동체를 고양시킴은 특정한 ‘시간’과 관련되고 특저한 장소와도 관련되어 전적으로 구체적인 ‘사건’이 된다. 여기서는 이 사람 저 사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면 그 ‘모든 자들’이 함께 엮여 있고, 여기에서는 그 모든 자들이 한결같이 예민하고도 즉각적으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로서(약 1:22) 그 모든 일에 임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 모든 자들이 서로들 간에 경고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한다. (중략) 또한 결국은 공동체가 세상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속죄와 의롭게 함은 성화의 ‘잠정적 표현’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인지 또는 그렇지 않은 것인지, 또한 입증이 된다면 그 어떤 의미로 입증되어야 하는 것인지가 아주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공동체가 고양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일상생활 내에서도 공동체는 고양되지 않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 우주 속에서 공동체가 공동체를 증거해야 할 사명을 수행할 수는 더욱 더 없는 것이다. (칼 바르트 4, 881쪽)

   

우리가 실제적인 참된 교회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도상에서의 의미로서, 또는 실제적인 참된 교회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도상에서의 의미로서, 또는 실제적인 참된 교회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도상에서의 의미로서, 또는 실제적인 참된 교회가 처해 있어야 할 운동의 의미에서 그 잠정적 표현을 이해한다면, 이때 우리는 예수가 그렇게 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려는 구원은, 이제 그리하여 특별한 가호 아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에게 이미 성취된 인간을 ‘높임’과 ‘일으켜 세움’이란 인간 후면의 알 수 없는 먼 곳에서 또는 인간 위에서 어떤 알 수 없는 높이에서, 스스로를 숨기고 있는 구원의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서 일어나고 있는 ‘구원의 사건’이다.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부활의 날에 예수가 계시안에서 완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계시 속에서 살아계신 주님이신 예수가 막을 올리고 있는 ‘구원의 역사’이다. 예수의 마지막 계시가 있기까지 이 구원의 역사가 지속되는 동안 그것은 골고다에서 단 한번 예수에 의해서 성취된 힘을 지니게 된다. 구원은 예수의 본질이고 불가피한 일이다.(히 13:8)(중략) 최고의 성도에게 존재해 있는 그리스도교적 사랑이라고 할지라도, 또 그러한 그리스도교적 삶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인간들에게 조우로 끼쳐진 성화를 개체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제한을 받으며 잠정적으로 표현한 이 표현보다 결코 더 큰 것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느 한 명의 위대한 성자이리라도 그 성화를 부분적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입장에서 그 성자의 입장으로 그 성자적인 이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성자의 제약성 안에서 그 표현이 부분적인 표현으로 제시될 수 밖에 없고, 또한 공동체의 사랑과 삶으로 둘러싸이고, 표현되어, 자양분을 얻으면서 그것들로 비판적으로 제한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표현을 통해 성화를 잠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성화가 그것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을 표현하는 자는 진정 인간일 뿐이다. 즉 그는 오직 성도의 공동체에 존재하는 한 명의 성자인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화를 잠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꺼려 하면서 스스로 성자이려고 하는 성자가 아니어야 한다. “교회를 떠난 존재는 존재가 아니다” (칼 바르트 4, 855쪽)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신과 인간을 알기 위해 그리고 신과 인간 사이에 세워진 계약을 앎으로써,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된다는 첫 번째 근본적 의미에서 세상을 위해 존재하고 세상에 파송되었다. 우리는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한다. 공동체는 세상에 속함으로써, 세상이 자신에 대한 눈을 드게 되고, 자신에 대한 무지가 종말을 고하게 되는 세상 내의 장소이다.: 즉 여기서 세상이 자신을 진실로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장소이다. 이 근본적 의미에서 공동체가 세상을 위해 존재하고 세상으로 파송된다고 할 때, 이 근본적 의미에서부터 공동체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이 얻어져야 할 것이고 얻어질 것이다. 만일 공동체가 세상을 알지 못한다면, 공동체가 어떻게 세상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으며, 세상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 될 수 있으랴? 공동체는 본래 그의 정초와 모음과 세움에서, 세움과 더불어서, 세상을 알기 위해서(신과 인간과 신과 인간 사이의 계약을 앎으로) 존재한다.(칼 바르트 3, 311쪽)

   

공동체의 임무, 곧 공동체의 일에서 ‘아니’를 내포한 ‘그래’가 중요하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함으로써, 지배적으로 결정적으로 원래적으로 궁극적으로 ‘그래’이며 ‘아니’가 아니다. 이것은 ‘아니’에 의해 제한되거나 한정되거나 제약받는, 그러므로 약화된 문제시된 ‘그래’가 아니다. 그러므로 ‘아니’ 혹은 ‘그래’와 ‘아니’를 말하는 것은 공동체의 임무, 직무가 될 수 없다. 공동체가-확실히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망각함으로써-‘그래’ 대신에 아니를 말하거나 같은 권위와 권능을 가지고 ‘그래’와 더불어 ‘아니’를 말한다면, 자신의 임무를 그르치는 것이다. (칼 바르트 3, 341쪽)

   

셋째, 이렇게 조직되고 구성된 그 선하고 진실한 기독교교회공동체들에 의해 이 세상의 타락되고 죄악된 모든 인간들의 삶도 “살아계신 주님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일깨우시는 능력” 의 원천이 되시는 그 성령님의 일깨우시며 초월적이신 사역을 통해 그 성화계시 (the revelation of the sanctification) 의 근원이 되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생명복음의 진리를 목격케 되며 궁극적으로 그 생명복음진리의 영원성 (The Eternity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에 동참케 된다. 다시 말하면,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된 그 기독교교회공동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고 신실한 지체들로서 결국 이 죄악된 세상에서 자신들의 실존적인 상태 즉 “미완성적 (fragmentary) 이며 불안한 불완전성(insecure & incomplete nature)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또한 그것을 겸손한 태도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 이런 솔직하고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가장 진실한 믿음의 표출이며, 이를 통해 기독교교회공동체들은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이며 역사적인 실체가 됨을 인식할 수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머리가 되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예수 그리스도생명복음의 진리를 온전히 그리고 안전하고 견고하게 세상 안의 비기독교인들에게 담대히 선포할 수 있게 된다.(김영관 1, 117쪽)

   

위에서 정리 - 분석한 것과 같이, 바르트의 “모이는 기독교공동체"(the gathering Christian community)로서의 교회 개념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 (Christocentric) 이다. 기독교교회공동체들은 상호-호혜적인 대화와 협력 그리고 사량을 통해 덕을 추구하며 지속적으로 성장하는(upbuilding) 교화된(edified)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인 지체요 역사적인 실체들로서 그리스도의 그 두 번째 파루시야’ 즉 그 ‘마지막 은총의 시간” 까지 가시적이며 견고하게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거듭나 연속적인 성화의 과정 안에 있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고 (Revealed) 기록되어 (Written) 선포된(Spoken) 그 하나님 말씀 진리 생명의 유효성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과 통퉁한 “영적 교류와 친교” 를 실행하므로 신실한 그리스도의 교회공동체들은 세상 안에서 (in the world) 그리고 세상을 위해 (for the world) 존재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실체들로서의 그 분명한 정체성과 함께 자신들에게 부여된 그 복음전도사역에 집중할 수 있게 됨을 바르트는 강조한다.(김영관 1, 134-135쪽)

   

이런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의 신학사상은 보수적인 학자들과 교단들 그리고 신학교들에 의해 여전히 배척당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개신교계와 신학계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21세기 한국의 신학계들과 개신교공동체들에게 요구되는 중대한 임무는 자신들의 개교회-교단중심적인 주관성과 이기심을 과감히 포기하고 타자들의 입장에서 타자들의 다양성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너그럽게 인정해 줄 수 있는 그런 관용성과 포용성 그리고 수용성을 갖는 일이다. 그 관용성과 포용성 그리고 수용성은 이 지상의 모든 기독교공동체들이 자신들의 머리가 되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 복음진리의 권위성과 주권성(Headship) 을 회복하므로 형성될 수 있는 각 그리스도 지체들 간의 온전한 연합을 통해 획득될 수 있다. 자신들 만의 교단들을 위한 교의(Dogma)해석에 제한받는 그런 하녀와 같은 신학의 역할을 과감히 포기하므로, 한국의 신학계와 교계는 이 지상의 모든 교회들의 머리가 되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복음진리의 유효성을 온전히 그리고 적절히 설명-분석할 수 있게 된다. 동시에 구원의 대상이 되는 이 지상의 모든 인간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종교전통들 안에서 그 예수 그리스도 복음진리의 그 유효성과 영원성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적용할 수 있게 된다.(김영관, 97쪽)

   

-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를 아우르는 예수의 계시

   

바르트에 의하면 역사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자기계시(Selbstoffenbarung Gottes)”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 완벽한 계시의 역사이다. 그런데 왜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고 그의 역사가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라는 것을 몰랐을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요1:46)의 비아냥거리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왜 유대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 바르트에 의하면 그 이유는 성자이신 예수께서 나사렛 예수라는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의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계시인 동시에 은폐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명백히 하나님의 계시이지만 그 계시가 갖고 있는 인간적 요소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을 몰랐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기 위해서는 나사렛 예수라는 한 인간으로 나타나실 수밖에 없는데,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인 이 인간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를 은폐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김명용, 96쪽)

   

이와 같은 바르트의 계시관은 벌코프가 보기에 비개혁주의적이라고 평가되어진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개혁파의 원리를 약화시키고, 하나님의 원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강조하다 보니 일반 계시도 부인하게 되고, 성경의 무오성도 부인하는데 이르기 때문이다. 벌코프는 일반계시에 대한 바르트와 브룬너의 논점의 차이를 간단하게 언급하면서 바르트가 자연 계시를 전부 부인했으며, 타락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멸절되고 없기 때문에, 어떤 신인간의 접촉점도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바르트는 특별계시의 목적을 다룸에 있어서 계시의 목적이 회복에 있음을 주장하긴 하지만, 결국 그 계시는 특별계시 곧 성경이 아니다. 벌코프는 성경 영감론을 다루는 부분에서 바르트와 브룬너는 “성경의 무오한 영감 교리”를 부인하며, 그것을 개신교 스콜라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슬픈 일이며, 그들의 입장에 대한 해명이 요청되어진다고 말한다. 벌코프는 초기 바르트의 저술들 만을 참조하고『교회교의학』1/2에 개진된 성경관을 다루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코프는 초기 바르트의 계시관을 깊이 탐구해서 정확하게 이해하였으며 그 비평도 공정하다고 판단되어진다. 벌코프는 바르트가 계시의 객관적인 성경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관념론적인 대상 개념에 근거한 듯 하다고 비평을 하는 가 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성령의 의해 유효하게 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과 쉽게 동일시되어 버리는 것처럼 말하는 바르트의 입장은 진짜 그러하다면 이것은 “특별계시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것이다”라고 비평하기도 했다.(이상웅, 50-51쪽)

   

이러한 종교와 정치가 흔합된 상황 속에서 바르트는 신학 연구와 신학 논쟁이 시대와 동떨어지거나 곡해된 시대를 동조하는 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특히 변증법적 신학자로서 함께 길을 걸었던 고가르텐이 ‘독일 기독교당’에 협력하면서 『복음과 민족의 통일』 을 내 놓았을 때 , 바르트는 “나 - 너의 이론올 넘어 그것이 질서에 대한 대중의 도그마로 되어가는 과정이 종말엔 어디까지 갔단 말인가?"하면서 신학 잡지 『중간시대』를 고별한다. 바르트는 고가르텐이 19C자유주의적 인간학으로 돌아갔다고 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 창조 질서 자연신학 등을 주장한 브룬너(E. Brunner) 에 대한 바르트의 공격은 강렬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외 에 는 하나님과 인간의 접촉점 이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브룬너가 자연을 계시의 접촉점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분노하는 부정을 했다. 그가 그렇게도 강한 부정을 한 것은 당시 히틀러가 어느새 독일 국민을 위한 영도자, 심지어는 메시아로 여겨져 왔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바르트의 ‘교회의 투쟁’은 계속되었고, 결국 그는 1935년 독일 에서 추방되었다.(최종호 1, 173쪽)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본회퍼는 그에게 신학을 가르쳤던 스승들의 자유주의와 결연히 단절하고자 했다. 특히 그는 ‘종교적 선험’이라는 개념을 배척했다. 이 개념은 슐라이어마흐 신학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그의 스승 라인홀트 제베르크를 거쳐서 그에게 전수된 것이었다. 자유주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하나의 접촉점이 있다는 사상을 개진시키기 위하여 인간안에 무한자를 감지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자여신학을 수립했다.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본회퍼는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그 분안에서만 주어진다고 믿었고, 이 하나님의 자기계시(즉 기독론)가 신학과 윤리학의 핵심이라고 믿었다.(스탠리 그랜츠․로저 올슨, 237쪽)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영이시고, 교회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기관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계시 되었다. 그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의 선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의 선취라는 바르트의 주장은 매우 눈길을 끄는 주장인데, 그 이유는 몰트만이 1964년 『희망의 신학 』(Theologie der Hoffnung)에서 언급한 하나님 나라의 선취 개념이 후기 바르트의 신학에 이미 앞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후기 바르트의 신학은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 언급하고자 했던 것 중 많은 것들을 이미 몰트만 보다 앞서 언급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선취이고 이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의 활동으로 세상 속에 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고,이 일과 관련되어 있는 일이다.(김명용, 112쪽)

   

- 말씀이 이끄는 사회변화

   

그리하여 바르트에게 점점 더 분명하여진 것은 인간의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말할 수 있게 되는 분명한 현실은 하나님의 선택으로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제까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물었던 질문의 방식에 변화를 지시한다. 이제는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사건 자체가 하나님의 인식에 대한 가능성을 묻는 인간적 질문을 넘어서 중요하게 드러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의 타자성의 현실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선택이며 그 인간적 상황 가운데 더욱 분명하게 하나님 자신이 알려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바르트가 인간의 현실 가운데 드러난 새로운 하나님의 현실로서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행위(Deus dixit)에 강조를 하게 된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현실은 하나님의 주체성과 하나님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 가운데 현재적으로 드러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 자신과 인간이 새로운 관계를 나타낸다는 것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자기 전개 과정을 지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은 인간의 현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현실로서 하나님을 책임적으로 말할 수 있게 만드는 새로운 현실이었다. 그리고 바르트가 이후로부터 추구하였던 신학적 과제는 바로 이 새로운 현실로부터 드러나는 신학적 가능성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황돈형, 121-122쪽)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서의 내용은 그 전체가 신학적 탐구 대상의 영역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19C 역사 비판적 방법을 수용한다 그러나 그는 19C 역사 비판적 방법에 는 ‘영감’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정통주의의 성서관에 더욱 관심을 가진다. 누군가가 바르트 에게 역사 비판적 성서 연구방법과 정통주의 성서 영감설 중 에서 택일해야 한다면 단연코 후자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정통주의 성서이해가 문자 자체의 내재적 조명에만 머무는 것 에 대해 비판을 하면서 정통주의보다는 칼빈을 택했다 왜냐하면 칼빈은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영의 조명속에서 전체적 말씀을 통해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르트는 자을 성서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것을 믿는 ‘성서주의자’라고 말하는데는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바르트의 ‘ 성서주의’는 문자에 얽매이는 방식에서의 성서주의는 아니었다. 그 에게 있어서 성서는 전체로서 인간의 문서이며 동시에 ‘하나님 의 말씀’ 이었다.

바르트 에 의하면 성서는 과거의 삶의 상황을 넘어서 각 시대의 ‘ 삶의 정황’ ( Sitz im Leben ) 에 선포된 ‘사실’ (Sache)로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 이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을 그 에게 있어서 삼중적 구조, 즉 선포된 말씀(설교) - 기록된 말씀(성서 ) - 계시된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가진다. 그러므로 그의 성서 이해는 기계적 축자영감설을 말하는 정통주의 성서관과는 다르다. 정통주의가 축자영감을 강조하는 ‘성서 축자영감론’을 말한다면, 바르트는 성서, 즉 하나님 말씀을 강조하는 ‘성서 축자영감론’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바르트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성령의 현실 속에 서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선포의 말씀’이었다. 이 ‘선포된 말씀’은 ‘기록된 말씀’인 성서를 그거로 하고 그리고 성서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 즉 ‘계시된 하나님 말씀’을 기초로 하고 있다. 바르트는 성서가 ‘하나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영의 창조적 현실성에 있다고 보았다.(최종호 1, 186-187쪽)

   

그러나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에게 정신과 물질의 두 세계가 없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한 현실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에게 적대적인 것은 물질이 아니다. 하늘에 맞선 것은 땅이 아니다. 그것은 악이다. 인간 안에 사는 악마이다. 영을 물질에서 분리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가 물질 안으로 들어가고 이 땅으로 온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 1:14) "하나님 길의 끝은 몸이다."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정의는 외적인 것과 지상적인 모든 것을 지배한다. 하나님 나라도 외적인 것과 실제적인 삶 전체를 지배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로 호칭될 가치도 없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영적인 것만 아니다. 그래서 굶주린 자가 배부르게 될 것이므로, 그들이 복되다는 것이다. 겸손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소유할 것이므로, 그들은 복되다고 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바르트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의 물질적 이익에 더 잘 봉사하는 사회질서를 지향하고 있으므로, 사회민주주의를 비기독교적인 것이라고 물질주의적인 것이ㅏ고 비판할 권리가 누구에게도 없다고 말한다. 예수 자신도 군중들의 물질적 곤궁과 고통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나타냈다. 하나님 앞에서 타당성을 지닌 영은 사회적 도움으로 나타나는 정신이다. 그래서 예수는 말만 하지 않고 행동으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했다. (오영석, 40쪽)

   

우리가 구원을 신앙 안에서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약속으로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구원 받았고 해방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믿으니,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에서 일어나는 약속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데, 우리가 그 약속을 우리 자신의 현재와 관계해서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조금도 성취되었다고 또 수행되었다고 보지 못할지라도 또 보지 못할 때에도 그 약속 그 자체를 받아들인다. 우리가 그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약속이 우리에게서의 하나님의 행위에 관해서 진술하기 때문인데, 우리가 다만 우리의 공허한 손들을, 우리가 그 경우에 하나님에게 내미는 공허한 손들을 볼 뿐이고 또 볼 때에도, 또 우리에게서의 하나님의 행위에 관해서 진술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의 존재를 믿으며, 우리는 죽음의 골짜기 한복판에서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 그렇게, 이러한 미래성에서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소유한다. 그 확실성, 이에서 우리가 이러한 가진다는 것을 아는 그 확실성은 바로 신앙의 확실성이며, 또 신앙의 확실성은 구체적으로 희망의 확실성을 의미한다. (칼 바르트 1, 594쪽)

   

바르트에 의하면 윤리학은 율법을 복음의 형식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성화시키는 하나님인 동시에 성화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근거 두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에 대한 책임을 지셨다. 그래서 바르트는 윤리학을 신론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켰다. 바르트의 눈에는 그리스도 신앙을 통한 義認과 공의 및 인간 율법의 문제는 불가분리적인 것이었다. 국가는 하나님의 성소의 바깥뜰과도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되심은 인간의 내적 생활이나 교회에만 국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권세와 힘 위에 뛰어나는 주이시다. 이처럼 국가를 그리스도와의 관련에서 이해하는 해석은 마침내 바르트로 하여금 히틀러 통치하에서 제1급의 활동가가 되게 하였다. 그는 독일에 있어서의 신학적저항운동의 중추적 인물이 되었다. 그리스도를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한 ‘바르멘 선언’은 주로 그의 업적이었다. 1938년 가을의 뮤니히 위기 때에 그는 체코 크리스천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의로운 국가’를 위해 싸우는 것이 곧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싸움이기도 하다고 하였다. (중략)

히틀러가가 넘어가고 공산주의가 일어나자 카를 바르트는 다른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공산주의를 정죄하는 데 있어서 서방측과 연합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헝가리의 크리스천들에게 충고하기를, 새로운 통치를 반대하거나 그들의 평온과 유우머의 정신을 잃지 말고 차라리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생활은 근본적으로 선의 긍정이며 악의 정죄는 단지 제이차적이기 때문이다. 에밀 브룬너가 이에 대하여 실망을 표명하자, 바르트는 브루너가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답변하였다. 그는 주장하기를, “일부 완미한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서방진영에서는 아무도 마치 독일 크리스천들이 국가사회주의를 신격화한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를 신격화하는 유혹에 빠질 사람은 없다. 교회가 왜 트루먼과 교황과 신문기자들이 주동이 되어 행하는 일에 휩쓸려서 동조해야 되겠는가? 교회는 主義에 의해서 활동하지 않고 개개의 경우를 정신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J.L.니브․OW 하이크 공저, 338-339쪽)

   

단순히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빛 안에서 그리고 조명된 이성을 가지고 살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일어나는 모든 것의 근거와 목표를 확신하게 됩니다. 한편 더 이것으로 인하여 시야가 극히 거대하게 넓어지게 됩니다. 진리 안에서 이 대상을 아는 것은 단순히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모든 것, 즉 심지어 인간과 자아와 우주와 세계를 진실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는 다른 것들 가운데에 있는 한 가지 진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진정한 진리, 즉 이것이 하나님의 진리인 만큼 확실하게 모든 진리를 창조하는 우주적인 진리이며, 또한 궁극적인 진리이기도 한 제일의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우리 모두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칼 바르트, 36쪽)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인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에서 의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 안에”는 이 인간, 그리스도인이 있는 그 곳에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바로 그의 때에 그의 공간에, 그의 자유로운 사고, 의지, 결정, 행위 영역 가운데 사는 것, 그리스도가 그의 내면에, 그의 가슴에 거주하고 집 주인으로서 임재하고 그 자신보다 그를 더 잘 이해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 안에”는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그와 함께, 그의 시간과 공간 속에, 그의 의도와 행동의 중심 가운데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이런 그의 고유한 주권을 사용함으로써(이것은 언제나 그에게 고유하다!) 그에게 낯선 자가 아니라 그의 이웃, 가장 잘 알려진 자, 친근한 자가 되는 방식으로 있는 것을 말한다. 그가 자신을 이해하는 것보다 그는 더 잘 그를 이해한다. 양자가 상호 병행한다. :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기 헌신과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기 헌신은 소명의 목표, 그리스도인의 참 존재이다.(칼 바르트 3, 150쪽)

   

그러나 그는 어쨌든 그리스도 인으로서 눈에 뜨일 것이니, 즉 세상에서 세상과 다르게 존재할 것이다. 그에게 그의 소명에서, 소명을 통해서 그는 말씀을 잊거나 감출 수 없다고 말해진 것을 통해 규정되고, 형성되고 윤곽이 만들어졌으므로 다르다. 그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제2의 그리스도가 되지는 않았으나 그의 말씀과 또 역사, 그의 실존, 그의 안에서 일어난 신의 행위의 지시자가 되었고, 그러므로 또한 그 안에서 세상에 일어난 세상 전체 현실의 혁명적인 변화의 지시자가 되었기 때문에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해서 세상의 진리의 지시자가 된다. 그 진리에 대해서 세상의 눈은 닫혀 있고, 세상은 진리에도 부룩하고 자신의 어두운 내면 속으로 들어오려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는 신이 세상에 말한 큰, 세상을 새롭게 하는, 궁극적으로 자유롭게 하는 ‘그래’의 증인이다. 신이 세상에 말하는 이 ‘그래’가 세상 자신의 진리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면전에서 이 진리를 말하는 사자이다. 그는 세상에 크게든지 작게든지, 말로든지 행위로든지, 그의 존재를 통해 이 복음을 말한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복음, 바로 세상에 말해진 신의 자비로운 ‘그래’자체를, 그러므로 자체의 진리를 파악하지 않고 붙잡지 않는- 못하는가? 하지 않으려 하는가?- 어쨌든 파악하지 않고 붙잡지 않는 세상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세상에 관용할만한 그리스도 종교의 무해한 형태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인의 형태로 만들어진다면, 그러므로 만일 세상이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간과할 수 없고 하나의 사실로서 그 실존과 대결해야 한다면, 세상이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통해서 세상에 행해진 지시를 어떻게 파악하고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가?(칼 바르트 3, 159-160쪽)

   

바르트는 하나님과 화해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즉자적으로 진정한 인간성 자체에 참여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객관적인 성취의 과제에 대한 인식 근거를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바르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 윤리학을 신학적 근거 밖에서 형성함으로써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논의로 전락시키는 입장과는 매우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기독교인의 실천원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한, 그럼으로써 하나님과 더불어 존재하며 살아가고 행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에 바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인간과 더불어 계신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며, 이 하나님과 만남은 하나님의 자기계시로서의 하나님의 뜻에 직면한다. 즉 하나님의 명령 앞에 선 존재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과 더불어 존재하며 삶을 나누는 하나님은 인간을 향해서 계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학은 삶의 여정 매 지점마다 독특한 성격에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간의 만남의 신비를 지시하면서 일종의 특수윤리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기독교윤리학의 과제는 창조로부터 화해와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과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 일어나는 윤리적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박충구, 201쪽)

   

희망의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행동, 그러므로 그 안에서 이미 거룩해진 이름의 계시, 그 안에서 이미 가까이 온 그 나라의 계시, 그 안에서 이미 일어난 신의 뜻의 계시, 이로써 그 안에서 이미 칭의 받고 성화된 인간의 계시가, 그 자체로 아무리 완전하다고 할지라도 그 완성을 향해 간다는 데 있다. (칼 바르트 3, 451쪽)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영으로 성령과 함께, 성령의 친교 속에서(롬 8:16) 신의 증인일 수 있다면, 성령은 그렇지 않고 언제까지나 신의 영이다. “나 홀로 한 걸음도 갈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우리가 들은 모든 것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그럴 자유 안에서, 그리고 그 자유를 사용하면서 매일 매시간 새로이 그것을 간구하지 않기에는 너무나 높은 일이다. 오직 살아있는 신의 입김만이 그를 살아있는 인간으로 만든다. (칼 바르트 3, 492쪽)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안에서 빛으로 나아오는 세상에 관한 모든 지혜를 탐구하고 설명하는 임무를 가진다. 이러한 지혜는 자연과학이나 순수한 이난 경험과 사고에 의해 획득한 것을 무효화하거나 대체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그러한 의문이 궁극적이고 영원한 의미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운명에 관한 것이고, 그러한 질문에 대해 우리가 창조주 자신의 빛을 받는데, 왜 단지 피조물로서의 실체에 대한 제한되고 부분적이며 죄악으로 타락한 피조물의 지혜를 고려해야 하나? “예수님의 인간 본성 안에서(in) 그리고 그 본성과 함께(with) 우리에게 주어진 전제는 다른 모든 전제들을 포괄하고 그러한 것들보다 뛰어나다. 그리고 다른 모든 전제는 예수님의 본성 안에서 주어진 전제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유용하게 된다. (아놀드 B 콤, 177쪽)

   

이제 우리는 위와 동일한 이치에 의해 신약성서에 있어서의 핵심적 개념이 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언급할 수 있겠다. ‘하나님의 나라’란 말하자면 예수 안에서 이 세상에 세워진 영토, 즉 예수 안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 지배를 의미한다. 예수! 그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종종 성급하고도 사려가 깊지 못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공동체이다’라고 표현해 버렸다. 공동체의 완성된 면모는 한편으로는 인자(사람의 아들) 되시고 또 한편으로는 신자(하나님의 성자) 되시는 인격 속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한 완성된 면모 속에서 공동체는 그 모든 역사의 종말과 목적을 겨냥하면서 직접적이고도 우주적이며, 최종적이고도 가시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공동체의 완성된 면모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인 ‘하나님의 주권적 지배’가 공동체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비 완성적이면서도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성령의 권능이 역사하시는 가운데서, 그리하여 종말의 목표를 향해가는 역사적 사건 안에서, 공동체가 일어서야 함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게 되고, 그러한 성도의 교제가 발생하는 곳에서 현실적으로 이미 공동체가 현실화되고 있다면, 이러한 새로운 인간성 곧 그 분께 복종할 줄 아는 인간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지배를 의미하며, 그것은 곧 공동체를 함축한다.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이다.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 나라로서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를 취하면서 죄인 중의 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믿어, 성스럽지 못한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일어서고 있다는 상태를 인식하면서 성스러운 자들로 되기에 이를 때 그러하다!) (칼 바르트 4, 907쪽)

   

소명은 신의 은혜의 역사와 계시를 통해 결정되고 지배받는 인간의 시간 속에서 살아있는 신의 특별한 행동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소명은 당시에 종으로 낮아진 주로서, 주로 올리워진 종으로서 살았고 죽었고 그러나 또한 부활하였고 그러므로 영원히, 그러므로 모든 인간의 동시대인으로서 살아 있으며, 그의 말씀으로서 그의 영을 통해서 예언자로서 그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이다. 그러므로 소명은 그것이 어디서, 언제, 어떻게 사건이 되든지 간에, 시간 속에서, 그러므로 시간적으로 인간에게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이다. 부르는 자가 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인간의 소명을, 그것이 어디서, 언제, 어떻게 일어나든지 간에, 다른 일반적 사건과는 구별되는 능력의 은혜 사건, 은혜로운 능력 행위로 만든다. (칼 바르트 3, 27쪽)

   

여기서 오직 하나의 출발점만이 시야에 들어올 수 있다: 이러한 거룩한 자들, 곧 세상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 분 거룩하신 이, 즉 자신의 죽음 안에서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으로 고양되신, 그리하여 왕이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가 마주하고 계신 사람들인데, 그 분은 그들을 어떤 객관성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고 저 역사의 예수로서가 아니라, 그리고 그들에게 제시된 문제로서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제공된 가능성과 기회로서 대면하신다. 이는 마치 그들이 그분의 실존의 도달영역을 현실화를 위하여 투쟁해야 하는가? 이차적으로는 물론, 그것도 대단히 진지하게 그래야 하겠지만-여기서 다시 그리스도교 윤리의 문제가 등장하는데-그러나 여기서는 그분과 그들 사이에는 어떤 분리도 없으며, 오직 ‘서로 함께’만이 있다는 근거를 우선 제시하기로 하자. 이 ‘서로 함께’ 안에서 그분은 그들과 갈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과 결합된다. (중략) 성령은 다음과 같은 행동 중에 계신 그 분 자신, 즉 본래의 모습 그대로의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계시하시고 알리시며, 그로써 그들을 자신의 거룩성의 증인들로 요청하시는 행동안에 계시는 그 분 자신이다. 성령은 세상 안에 있는 특별한 자기 백성들을, 즉 자신의 공동체와 그것들의 모든 지체들을 거룩하게 하는 사역 중에 계신, 살아계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칼 바르트 4, 722-723쪽)

   

우리는 이제까지 형식적으로 그 역사의 일반적인 구조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바로 하나님께서 이 역사에 함께 계시며, 활동하고 계시고, 확인하고 계신다: 그는 이 역사의 근원이고, 목적이며 중재이고 통일성 그 자체이다. 만일 우리가 이 역사를 보고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세 번 하나님을 말할 수 밖에 없다.: 즉 어떤 곳보다도 하나님을 전부 말해야 하며, 어떤 곳보다도 분명하게 진실된 의미로 말해야 하고, 전체적인 조망 가운데서 현실적으로 세 번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말해야 한다. 만일 이 세 가지 중 어느 한 부분에서라도 하나님에 대하여 덜 신중하게 언급된다면 이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게 될 것이다. (중략) 이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참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예수의 역사에서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은-첨가적이고 부수적인 것 같으나 그러나 모든 것이 다 걸려 있는 것처럼 중요한 것으로서- 바로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과 동일한 셈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첨가성이나 부수적인 것, 그러나 그 중요성 안에 속한 자로서-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바로 그의 역사 가운데서, 즉 그 세가지 동기와 요소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칼 바르트 4, 467쪽)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서 우리의 존재를 본다는 것은 바로 은폐된 것을 본다는 것이고, 이는 하나의 불연속적인 봄으로서, 우리가 지속적으로 방황하는 상황에서 경험하는 사건들이며,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의 정반대 안에서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는 그것이 우리에게 불안을 가져다주고,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경계하도록 그와 그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을 심각하게 감추는 것이 있다는 점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이가 로마서 8장을 있는 말씀 그대로 따라서 자신에게 적용하여 언급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이 분명해진다. 우리는 이 감추어진 존재와 여기서 활동적으로 나타나는 감추는 존재에 대해,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 있는 우리 존재를 보는 것에 대해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그렇게 특별한 성격을 부여하는 그러한 감추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칼 바르트 4, 405쪽)

   

즉 예수는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로서 하나님이시며 사람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왕 같은 사람으로서, 그 자신 안에 근거하신 유일한 분이요, 가장 높은 분이시며 바로 이점에서 우리와 다른 사람이시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 아래서 그분의 것으로서 그에게 속하여 그 분의 영역에 속하고, 그 안에서(그 안에 ‘머무르며!;) 그와 함께 그리고 그와의 공동체적 친교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높여지게 된다. 그리고 이제 그 안에서 비록 여전히 우리 자신의 악한 길로 행할 때도 우리는 바로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요, 그와 함께 하나님과 거룩한 자이며,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계약의 정당한 동역자가 되는 것이다. 이때 반드시 생각해야 할 점은 우리는 마치 로마서 8장에서 말씀되어진 것처럼 더 이상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견고하며 부서지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칼 바르트 4, 397쪽)

   

   

   

   

   

   

   

요컨대, 필자는 바르트가 ①대속적 심판과 ②최후의 심판을 구분하지 않고 모호하게 진술하였거나 이를 혼선 또는 동일시 한 것으로 평가한다. 우리는 바르트가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하여 예정론을 재해석함으로써 기독교적인 정체성을 확고히 하였음에 이를 높게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그가 다시금 성서의 증언을 경시(輕視) 혹은 배제(排除)하는 것으로 그의 예정론을 전개하고자 한다면 이 또한 비기독교적인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노력이 되리라는 점에서 이를 경계한다. 성서의 취사선택적 사고방식이 의미하는바 그것은 또 하나의 신학적인 의견을 부를 수 있어도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며 또한 신앙을 가능케하는 원동력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싶다.

최후의 심판을 무시하는 경향은 현대에 들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성서의 명제적 진리를 오늘날 신앙의 깊은 자리에서 재현하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납득이 쉬운 편만한 정서로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에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이 하나 있다. 신학의 역할은 일반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인가, 아니면 일반인의 정서에 반할지라도 성서적 증언을 그들의 잠재적 이해능력에 바탕을 두고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것인가? 필자는 신학의 역할이 혹은 교회의 선포가 전자에 치우쳐져 있기 때문에 오늘날 이와 같이 최후의 심판에 대한 불편한 정서가 만연해있지 않은가 진단해본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의 죽음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결코 일반적이지 않다.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이 모든 이들에게 어찌 넉넉한 마음으로 쉽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기독교의 진리를 통해 그들을 설득하고 그들로 하여금 신앙의 자리에서 그 진리를 선포할 수 있게 하였다. 필자는 기독교의 종말론이 성서의 명제적 진리에서 규정하는 것을 결코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 오히려 예수의 말씀 속에 그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고려할 때 가장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여긴다(마25:31-46). 기독교의 정체성을 사랑에 두는 것이 옳다. 최후의 심판은 그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사랑이 오늘날 ‘현대판 면죄부’로 인식되어 있다면 이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송명철, 42-43쪽)

   

   

기독교의 메시지는 역사적인 메시지입니다. 단순히 영원과 시간을, 하나님과 사람을 함께 봄으로써, 단순히 그 다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을 이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의 실재입니다. 우리는 첫 번째 조항의 의미에서 계속하여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하게 되는 것은 오직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뿐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이 하나님과의 계약 속에서, 즉 이 사람으로서의 그의 구체적인 형태 속에서 사람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의 세 번째 항목에서 우리가 사람 속에 계신 하나님에 대하여, 즉 우리와 더불어 우리 안에 행동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들을 수 있을 때, 이것은 그 자체 안에서 하나의 관념론이나, 인간의 열의에 대한 묘사, 혹은 황홀감과 체험이 있는 인간의 내적인 삶의 의미에 대한 과도하게 이루어진 관념이나, 우리 인간들 속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가 성령이라고 부르는 상상의 신의 높은 곳으로 투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과 실제로 맺으신 계약을 살펴보게 되면, 우리는 이것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은 실제로 깊은 곳에서 우리 사람들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현존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시는 이 한분 안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의 이 계약을 고려할 때 성령의 실재에 대하여 대담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칼 바르트, 94-95쪽)

   

바르트 신학에 있어 칼케돈 원칙, 즉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의 상관관계는 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is)라고 하는 바르트의 신학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헌싱어 역시 이 점에 착안하여 신학과 심리학은 서로 “유비 관계(analogical relationship)”에 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서로 유비 관계에 있는 것은 신학과 심리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하나님관계와 교회의 하나님관계, 혹은 그리스도의 세상과의 관계와 교회의 세상과의 관계라고 해야 한다. 바르트에 따를 때 관계의 유비는 일차적으로 성부의 성자와의 관계가 세상 속에서 성자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유비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지칭한다. 때문에 성자의 인간관계는 세상에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바르트에 따르면 이러한 관계의 유비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제자공동체의 삶으로까지 확장된다. 즉 그리스도의 제자공동체, 즉 교회는 그것의 하나님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유비적으로 증거한다. 그들의 하나님관계가 그들의 인간상호관계를 통해 유비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관계의 유비로 말미암아 그들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된다. 이제 다음에서 필자는 이러한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교회가 어떻게 그 공동체 안팎의 사람들 마음에 참된 하나님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참 하나님을 알게 하는지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이제현, 318-319쪽)

   

그러나 이제 우리가 강조해 보아야 되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 안에는 신적인 본질과 인간적인 본질이 다 함께(common) 실현화되는 것, 즉 communcatio operationum(작용 혹은 활동의 나눔)이 그 관건이 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신적인 새로움도 인간적인 새로움도 그 자체적으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고 실효될 수도 없고 우리가 그것을 알아 볼 수가 없다. 전적으로 오로지 신적인 새로움과 인간적 새로움이 함께 해야만 그 계획을 실현하면서 실효될 수 있고 계시될 수 있고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적이고 순전하게 신적으로 그의 역사를 일으키니 그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동일한 본질 그 하나만으로 스스로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과 동일한 그의 신적 본질과 그리고 그의 인간적 본질이 함께 하고 있는 그 속에서 역사를 일으키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적이고도 순전하게 인간적으로 그의 역사를 일으키니 그 모든 인간들의 인간적인 본질과 동일한 인간적 본질 안에서 그의 역사를 일으키지만 그러한 인간적 본질 그 하나 안에서만 스스로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그 모든 인간들이 다 가진 인간적인 본질과 그리고 그 자신의 신적인 본질이 다 함께 하고 있는 그 속에서 그의 역사를 일으키신다. (칼 바르트 4, 167쪽)

   

복음서에서 증거되고 있는 왕 같은 예수의 완전한 실존은 바로 이 표시 아래 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가 강조한 복음서에서의 그의 모습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초대교회가 이 예수의 실존에서 받아들인 권위와 그의 비밀스러운 모습 속에서 더욱 혁명적인 방식으로 경험하였던 그의 하나님으로서의 고유한 존재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이중적 연관성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우리 삶의 한가운데서 그의 활동적인 삶을 통해 그의 말과 행위로 말미암아 유일한 하나의 사건으로 이루어지고,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구원의 현실이 드러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의 생애가 결국 십자가를 향해서 급하게 진행되어 갈 때 모든 것은 최후의 가장 분명한 그의 표시 아래 있게 되었고, 그 목적과 그 생애의 성격은 이러한 십자가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칼 바르트 4, 408-409쪽)

   

   

   

   

   

   

   

   

그러기에 교회는 그러한 사도들의 증거를 그 언제나 청취했고 그 증거는 언제나 전해져 나갔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그 언제나 사건이 되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된다. 그런 만큼 그 어떤 다른 원천도 규범도 없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이 지식의 출처를 따지지 않고도 있을 수 있고 인간이 만들어놓은 개념이 아니어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 지식은 겸손과 단호함의 근거이다. 겸손한 자 그리고 단호한 자는 그 지식의 은사를 통하여 아는 자가 되고 성령을 따라가는 자이다. 그런 자는 실상 아는 자이겠으나 이 세상에선 그 언제나 마치 아는 것 없는 사람처럼 처신하며 아는 것이 없다고 고백하고 아는 것 없음을 한탄하며 알기를 갈구한다.: 창조주 영이여 오시옵소서!

의심할 여지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그 모든 인식의 근거는 그것이 올바로 되어 있는 근거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말할 수 있는 그 아주 구체적인 것을 그 인식의 근거로 말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완벽한 것이 될 수 있다. (칼 바르트 4, 184쪽)

   

   

1-4. 교회

   

- 세상~교회

   

여기서 바르트는 기독교적인 바른 세계관과 구원에 관한 올바른 이론을 숙지하고 있더라도, 낡은 사회질서를 옹호하고 불의한 제도에 의하여 희생당하고 비참해진 계층의 사람들의 해방을 위하여 투신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이교도일 수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바르트는 그가 만난 노동자들의 비참, 비하, 도덕적 타락을 야기시킨 사회적 질곡에 충격을 받고 노동자들의 물질적, 도덕적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교회의 책임적인 행동을 추구했다. 그러므로 바르트가 사회주의를 신뢰한 것은 신학적인, 철학적인 이론을 탐구한 결과에서가 아니고 자펜빌의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과 대결한 결과이다. 교회는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실제로 돕고 그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영석, 36쪽)

   

교의학의 주제는 기독교 교회입니다. 학문의 주제는 단순히 문제가 되는 대상과 활동 영역이 현존하고 있고 또한 잘 아는 것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학문의 주제가 교회라고 말하는 것이 학문으로서의 교의학의 개념에 대한 제한이나 비방은 아닙니다. 이것은 교의학이 관여하고 있는 대상과 활동, 즉 복음선포를 위탁받은 장소이며 공동체입니다. 교회를 교의학의 주제라고 부름으로써 우리는 교의학이 어디에서 추구되며, 학생에 의해서인지 교사에 의해서인지를, 그리고 우리가 교회의 영역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교의학에 종사하려 하면서 일부러 자신을 교회 밖에 두는 사람은 그에게 있어서 교의학의 대상이 낯선 것이며 만약 그 첫 번째 단계들 이후에 그 자신의 방향을 찾을 수 없거나 혹은 손해를 끼쳤다 하더라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중략)

기독교 교회는 하늘에 있지 않고, 땅 위에서 시간과 더불어(in) 존재합니다. 비록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는 이것을 지사적이고 인간적인 환경 속에 바르게 두셨으며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그 사실에 부합됩니다. 기독교 교회는 땅 위에서 살되, 역사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위탁하신 고상한 善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고상한 선을 소유하고 실행하면서, 이것은 강함과 약함 속에서, 신실함과 불성실함 소에서, 보종과 불순종 속에서, 자신에 대하여 언급된 이해와 오해 속에서 역사를 통하여 자기의 길을 나아갑니다. 땅위에 펼쳐진 역사, 예를 들어 자연과 문명의 역사와, 도덕과 종교의 역사, 예술과 학문의 역사, 사회와 국가의 역사 가운데에, 또한 교회의 역사도 존재합니다. 이것은 또한, 인간적이고 지상적인 역사입니다. (칼 바르트, 14-15쪽)

   

'그리스도성', '보전성' 그리고 '구속성', 이 세가지 고난점들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와 국가의 상관관계는 '하느님의 선교'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느님은 교회 안에서 혹은 교회를 통해서 선교 할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 선교하고 있다는 하느님의 선교 개념의 도식, 즉 하느님-세계-교회는 필자가 제시한 교회와 국가의 상관관계 개념들의 도식, 즉 그리스도성-보전성-구속성과 다름 아닌 것이다. 하느님의 선교 개념에 의하면 하느님은 교회의 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주도 된다. 따라서 선교의 주체는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삶의 전 영역,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자유로운 책임적 존재로 창조되었고 부름받은 존재가 된다. (노철래, 91쪽)

   

바르트에 의하면 국가는 교회가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마련함으로 하나님 나라에 봉사한다. 그런데 이때의 국가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봉사는 국가가 직접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고 간접적인 도움을 주는 것 뿐이기 때문에 국가의 기능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간접 봉사이다. 또한 국가는 교회의 도움을 받아 국가 속에 하나님 나라의 유비들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 유비들은 물론 하나님 나라와 유사성이 있지만 비유사성도 있는 유비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온전함에 비추어 보면 일시적이고 상대적이고 잠정적인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바르트에게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한다. 왜 국가는 간접적인 의미에서만 하나님 나라에 봉사하는 기관일까? 정의와 평화와 공동의 행복은 그 자체로 하나님 나라의 상징들이 아닐까? 성서의 메시아 왕국의 상징들은 정의와 평화와 공동의 행복의 상들을 갖고 있다. 정의와 평화와 공동의 행복은 복음전파를 위한 배경이기도 하지만 또한 복음전파의 궁극적 목적이 아닌가?

교회가 국가 속에 하나님 나라의 유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이미 국가가 하나님 나라를 향한 목적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세속적인 국가는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국가 속에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길 원하고 계시고, 이 하나님의 뜻은 결국 국가를 통해 구현되어야 한다. 교회론적으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언급하면 교회는 국가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김명용, 102-103쪽)

   

이처럼 국가 역시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의 속성을 갖고 있다(gleichfähig).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국가의 공의라는 것은 교회가 믿고 선포하는 하나님나라에의 비유, 상응, 유비로서의 국가의 존재를 말해주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내지는 하나님나라와 국가 사이에 존재하면서 국가로 하여금 자신의 본질을 보도록 도와준다 : 바르멘 제 5항에서 말해주듯이 국가는 먼저 인간적인 통찰력과 능력으로 바른 통치원리를 세우고 여기서 형성된 잣대를 갖고 정치적인 판단과 결정을 내리면서 공권력을 행사하여 법과 평화를 지켜간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통찰력과 능력이 죄로 인하여 오염되고 왜곡됨으로 국가는 올바른 판단과 정책을 펼치지 못하고 부패의 길로 가기 쉽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인간적인 통찰력과 능력이 국가로 하여금 공의를 세울 올바른 정치적인 척도를 세워갈 수 있는지가 의문시 된다.

이러한 이성의 오류와 한계성으로 인하여 국가는 비유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나라와의 유비성을 검토 받을 필요가 있다(gleichnisbedürftig). 국가는 하나님나라, 그 근원적인 세계를 볼 수도 알 수도 없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으로 이 세계를 보는 교회가 유비적인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이성에서 산출된 판단과 잣대가 하나님의 말씀에 상응한 것인지를 분별하고 판단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교회의 세상국가에 대한 책임과 역할이 있는 것이다.(최현범, 135쪽)

   

'세상을 위한 교회의 존재는 누구를 향해 있는가?' 그 대답은 인간안에, 그러나 다만 복음의 출발점에서 본 인간안에 있다. 그것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뜻과 일에 의한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자신의 무지와 반역 속에 있는 인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가 그것의 과제를 성취하기 위해서 말하는 이 인간은 자기 모순과 자기 오해 속에 있다. 그러나 복음 안에 있을 때 그는 크리스찬이고, 희망 속에 있는 크리스찬이다. (김영두, 39쪽)

   

바르트는 사회당에 입당하기 전부터 공장 교회의 목사로서 빈곤과 고통 속에서 생존하고 있는 노동자들 편에 섰고, 그들의 임금 향상을 위하여 투쟁했고, 그들의 권익을 자본가들의 착취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노동조합을 창설했다. 그는 조직화되지 못한 방직 공업노동자들의 참상을 목사로서 피할 수 없는 도전으로서 받아들였다. 그는 노동자들을 투신함으로써 치러야 할 대가를 분명히 인식했다. 그것은 기독교인과 목사로서 지불해야 할 값진 대가로서 인식했다. "나는 섬기는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목도하고 있는 계급갈등에서 처음으로 현실적인 삶의 문제성과 마주쳤다. 그래서 나는 이제 공장법제정, 보험제도와 노동조합을 연구하게 되었다. 나의 기분은 열렬히 노동자들 편에 서서 싸우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바르트는 자펜빌에서 세 곳의 노동조합을 세워, 공장주들과 중산층들에게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직하고 노동자들을 의식화하는 교육을 했다. 그래서 그는 교회와 사회의 지배계급들의 비난과 저항을 받았다. (오영석, 31쪽)

   

- 말씀에 구속돼 사회를 변화시키는 교회

   

신학은 교회의 전통이 물려준 그 어떤 교리와 신앙고백도 처음부터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에 규준하여 판단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된다. 신학이 진리물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한 그 어떤 신조적 명제들을 전통에 충실한다는 이유와 널리 알려진 것이라는 이유에서 마구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세상에 이와 같은 정통주의보다 더 나쁜 이단은 없다. 신학이 알고 있으며 행사하는 신실성이란 오직 하나이다. 이 하나의 신실성은 “신앙의 지성”에 근거하여 고대 및 종교개혁의 신앙고백에로 나간다! (칼 바르트 2, 63쪽)

   

교회의 설교가 신․구약 성경의 증거에 구속받아야 하며 이 관련 속에서 힘을 발휘하고 계속 그래야 한다는 사실도 누구나 그냥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은 아니다. 신학은 교회공동체에게 오직 성경 말씀에의 구속만을 생각나게 해야 하며 모든 다른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권장해야 한다.

더욱이 교회공동체는 이 세상을 향하여 통고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이 세상에서 돌아가며 교회공동체 안으로 항상 밀고 들어오는 그 어떤 말들도 아니다. (칼 바르트 2, 189쪽)

   

그리스도의 교회는 인간을 돌이킴으로 일깨우는 사건이 있음을 고려한다. 만일 교회가 이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성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인하는 것이며, 또한 성육하신 거룩하 사람의 아들의 육신 안에서 왕과 같은 인간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고 역시 성령을 믿지 않게 되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때, 하나님에 대한 상상의 신앙 고백 안에서 단순히 이념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며, 죽은 우상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의미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는 또한 그 믿음과 함께 인간을 돌이킴으로 일깨우는 사건을 믿는다. (중략)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가? 그렇다면 오직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돌이킴으로 인간이 일깨어지는 일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인간이 돌이킴으로 일깨워지는 일을 믿는가? 그렇다면 오직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다.(칼 바르트 4, 770-771쪽)

   

"교회가 무엇인가?"하는 물음은 무엇보다도 "교회가 무엇이 아닌가?"를 확정함으로써 답변될 수 있다. 바르트가 교회가 아니라고 보고 한계선을 그은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그는 일평생 신학의 양대전선에서 싸웠는데, 그것은 로마 가톨릭 사상과 문화 개신교주의로 대표된다. 이것은 그의 교회관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한편으로 그는 교회가 제도화된 하느님의 계시인양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관을 배격했다. 거기에서는 하느님의 뜻, 진리와 은총이 인간의 소유물이 되거나 인간이 처분하고 다스릴 수 있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교회가 인간의 구원의 방법이나 구원의 장치와 동일시 될 수 있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님을 강조했다. 교회는 기다리고 재촉하는 교회로서 아직 그 목표에 이르지 못했고, 하느님의 나라를 창조할 수도 없고 그 분의 계시를 끌어올 수도 없다. (이신건, 739쪽)

   

사실“나치 정부는 바르트가 말한 하나님과 세계,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 양자를 하나의 동등한 문화적 고리 속에 상호 연결시킴으로써 예배와 설교를 정치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바르트가 1932/33년 겨울학기와 1933년 봄 학기 본(Bonn) 대학에서 조직신학 과목으로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설교 준비를 위한 연습”이란 제목의 세미나를 예언자적인 시각으로 개최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이 아니었다. 바르트는 거기서 설교가 철저하게 말씀에 입각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하나님을“전적인 타자”로 보는 신학 명제는 이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반면에 설교학적- 전략적으로 성서의 텍스트에 접근했던 것이다. 성서 텍스트는 이제 하나님과 세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원론적인 차이를“지켜야”만 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르트가 1935년 행했던 강연“설교의 교회 적합성”에 관한 강연도 이해될 수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여기서“교회”는“지도자가 앞서고 우리는 따라가는 그런 추종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다르다.“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세상적인 공동체 관계가 아니고, 또 지도자가 전체의 대표자가 되고 동시에 자신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다하는 그런 지도체제도 아니다.” 이것은 바로 시대적 상황과 관련된, 시대 비평적인, 가장 현실적인 설교학이었다. 이러한 바르트의 설교학은 고백교회를 통해 실현되어 나갔다. 바르트가 말한 “교회에 적합한 설교”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봉사하는” 곳에서 나타났던 것이다.(박성규, 243-244쪽)

   

세계 제1차 대전의 패배로 말미암아 겪게 된 민족적 모욕감,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 이래로 계속되어온 정치적 혼란, 그리고 6백만명 이상의 실업자를 거리로 내몰은 경제 공황 등 정치적, 경제적, 정신적 어려움에 빠진 독일인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열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합리적 대안을 찾으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독일을 하나의 비합리적 이상으로 끌어 올렸으며, 국민교회의 이념도 은근히 혹은 분명히 이 이상과 결합되어 갔다. 교회에 속한 자들 가운데는 국민과 신앙이 분리되는 위험을 방어하기 위해 국가를 종교적으로 이해하기를 갈망하는 자들이 많이 생겨났다. 1920년대에 이르자 독일과 독일국민은 독일인들에게 하나의 고백적 언어가 되어갔고, 국민들의 운동도 종교적 색채를 띄게 되면서 열광적으로 독일국민, 독일성서, 독일 전통을 모든 비독일적인 것에 대립시켰으며, 결국에는 독일 게르만적 종교를 숭배하려는 데까지 이르고 있었다. 독일 국민은 점점 더 분명하게 그 자신의 구원자로서 등장했고, 히틀러라는 인물 속에서 그 구원의 창조자를 필요로 했다. (이신건, 727쪽)

   

하나님 인식은 교회에서, 말씀에서, 그리고 신앙과 복종에서 일어난다. 바르트는 하나님 인식의 문제는 '하나님이 실제로 인식 가능한가'의 질문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의 계시 속에서 이미 인간에게 계시되었으며 그로 인해 이미 하나님 인식은 성취된 것이라 못박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오직 하나님 인식은 '어떻게(Wie) ' 그리고 '어느 만큼(Inwiefern ) ' 이루어지는가를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계시의 현실성을 떠나서 하나님 인식을 물을 수가 없으며 이미 하나님은 알려졌고,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나님 인식의 성취, 실제적인 하나님 인식의 사실이 일어났는가? 바르트는 이것을 하나님의 측면(Die Bereitschaft Gottes)과 인간의 측면(Die Bereitschaft des Menschen )으로 나눈다. 먼저 하나님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행위이며, 인간에 대한 은총의 행위인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응답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준비성' (Die Bereitschaft des Menschen)이다. '하나님의 준비성' (Die Ber eit schaft Gottes)이 '은혜와 그리스도'라면 '인간의 준비성'(Die Bereitschaft des Menschen)은 '신앙과 복종'이다. '하나님의 준비성' (Die Bereitschaft Gottes)과 '인간의 준비성' (Die Bereitschaft des Menschen)은 서로 필요충분조건이 되지만 하나님 인식에 있어 하나님 자신이 출발점이기에 바르트는 '하나님의 준비성' (Die Bereitschaft Gottes )을 먼저 다루고 있다.(박성국, 33쪽)

   

바로 이러한 뚜렷한 유사성에서 성서와 오늘의 선포사이에는 또한 질서에 합당한 비유사성이 일어나는데, 후자에 대한 전자의 우위성과 순전히 구성적 의미, 성서에 대한 오늘의 선포의 정초를 통한 그리고 성서에의 오늘의 선포의 유대를 통한 오늘의 선포의 현실성의 제약성이 일어나며-따라서 교회에서 나중에 말해진 또 오늘날 말해져야 하는 모든 다른 인간의 말에 대한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기록된 말씀의 근본적인 구별성이 일어난다. 우리가 말한 것이 옳다면, 교회는 그의 선포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자체를 홀로 있다고 보지 않고 구체적인 마주 섬에 처해 있으니, 이 마주섬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이미 일어난 계시를 회상한다. 그리고 그의 마주 선자의 구체적인 형태가 현실적으로 성서적인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말씀이라면, 그렇다면 이 말씀에 교회에 마주 서는 근본적인 구별이 귀속해야 한다. 교회의 선포의 대리가 참되다면, 즉 교회가 그의 선포에 있어서 은밀히 자체안에 정초하지 않고 그의 주이신 타자 안에, 교회가 그분의 주가 되지 않고 그의 주이신 타자 안에 정초한다면, 그렇다면 대리의 구체적인 형태는 계승이어야 한다. (칼 바르트 1, 144쪽)

   

하나님이 막연히 어떤 곳에서 어떤 양식으로 스스로를 계시했다는 것이 아니며, 막연히 어떤 곳에 성서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니며, 막연히 어떤 곳에 설교와 성례전의 교회가 있다는 것이 아니며, 또 역사 혹은 사회가 하나님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그 자체의 법칙을 따라 하나님에게 마주 서 있다는 것은 아니며, 또 교회가 말하자면 밖으로부터, 저 우주와 무관하게 머물러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교회의 일, 즉 하나님의 일을 저 우주에 대해서 공격적으로 또 변호적으로 대변하고 주장한다는 것이 아니다그와 같이 교회는 세계 밖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세계는 세계 내에서 하나님 없이 있는 것이 아니다. (중략) 계시 아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고 또한 성서와 교회가 저 회상의 빛에서 또 이러한 대망의 빛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면,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마주 서게 되는 인간세계는 전체적으로 한 결정적인 변혁에 던져진 세계로서 고찰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세계는 교회와 무관하게 세계의 무신성에 고착되어 무신성 안에서 진지하게 취급될 수는 없으며, 교회가 세계를 그렇게 고착된 것으로 보는 한 또는 보는 동안에는 교회는 다만 교회 자체가 하나님이 말씀을 진지하게 믿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한다. 만일 교회가 믿는다면, 그렇다면 교회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권을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 말하자면 그에게 잔존하는, 하나님의 창조에 합당한, 하나님과의 상호소속성과 유대성의 근거에서- 마치 죄의 타락이 철저하게 중대한 것이 아닌 것처럼 자연적인 근거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관계된다고 요청된다는 것이 문제될 수 없다. (칼 바르트 1, 208쪽)

   

- 교회의 정치성 : 성령에 조명된 시민사회

   

칼 바르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가 두 개의 강대세력권 안으로 편입되는 것에 그다지 놀라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러한 과정이 세계의 자연역사에 속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세계적인 강대국들의 대립과 충돌은 이미 옛적부터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강대세력들의 출현을 무상한 피조물의 종살이의 형태로 간주하고, 언젠가는 그것들로부터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릴 날이 올 것임을 기대했다. 강대세력들은 하느님이 자신을 자비로운 하느님으로 실증해 보인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내려진 심판의 그늘이다. 강대세력들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큰 야수들과 같이 왔다가는 사라진다. 그러나 교회는 신앙 속에서 그 강대세력들을 통과하면서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서도 끝끝내 견디고 살아 왔다.

여기서 바르트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소련과 거기에 맞선 다른 강대국 미국을 말하고 있다. (이신건 1, 436쪽)

   

이 양대세력 사이에 있는 교회는 어떤 편을 들어야 하는가? 바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원칙적인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듯이, 원칙적인 반공주의자, 즉 자본주의자가 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공산주의 체제나 자본주의 체제도 아닌 하느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는 교회가 어느 편에도 설 수 없고, 오히려 하느님 나라의 희망 안에서 두 체제의 대립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일과 인간의 일을 지시해야 하며, 그러기에 두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비판하고 더 높은 하느님 나라의 상응형태로 양자를 지양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양대세력의 대립 속에 끼어들 필요가 없다. 바르트는 이 대립을 그리스도인들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고, 필수불가결한 것도 아니며, 진정한 것도 아니라고 보았다.(이신건 1, 437쪽)

   

바르트는 교회가 자본주의 국가에서 그 질서와 연대하고, 주어진 상황을 종교적으로 정당화시켜 줌으로써 자본주의를 섬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추악한 모습이라고 공격했다. 그에 비해서 교회의 충실한 회원들을 경제적·직업적 진보를 위해 억누르는 무신론적 국가도 물론 이상적이지 못하다. 그렇지만 공산국가가 복음선포를 허락하고 교회 모임을 허용하기만 한다면, 무신론적 공산국가는 자본주의적 국가보다 나은 것이라고 바르트는 생각했다. (이신건 1, 442쪽)

   

교회 공동체 내에서 하나의 특수한 활동이 있어야 하는 것이 옳다. 즉, 이것은 신학 활동인데 이 활동은 전(全)공동체적 행동을 진리 물음에 조명하여 직업적으로 검토하며, 이 공동체를 대표하여 이 일을 수행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학적인 학문이요, 탐구요, 가르침일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논하는 형태의 신학의 교회공동체와 그것의 신앙과의 관계는 법학의 국가와 국가의 법에 대하여 맺는 관계와 같다. 신학의 탐구와 가르침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기능하며,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봉사한다.

신학은 교회를 섬기되 특히 교회 내에서 설교직, 교육, 목회상담을 떠맡은 지체를 섬긴다. 신학은 이들의 인간적인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는가를 항상 새롭게 물어야 한다. (중략) 따라서 신학이 교만한 자세로 하나님, 세상, 인간, 역사적인 일들 등에 관심한다면 신학의 본분을 상실한 것이다. 교회 공동체의 그 구성원(지체)들, 특히 책임을 부여 받은 지체는 자신의 상황과 과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하여 신학으로부터 깨우침 받아야 하고, 자신의 섬김에 있어서 신학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 (칼 바르트 2, 59-60쪽)

   

그는 12년 동안 히틀러 제국의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의 공범자들에게, 사람들은 하나님을 우롱할 수 없으며, 근본적인 反 유대주의를 표명하는 아주 분명하고 철저하게 反기독교적인 특징을 띤 체제는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었다. 독일과 그의 동맹국들이 완전하고 피로 물든 패배를 당하고 무너지자, 거기서 바르트와 모든 고백교회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그들이 선포하였던 것이 실현되는 것과 바빌론의 함락에 관한 구약성서의 위대한 예언자들의 설교가 현실화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조르즈 까잘리, 38쪽)

   

- 두 왕국론 의 문제점

   

셋째로 두왕국설은 정치적인 무관심을 야기한다. 복음을 통한 믿음의 영역을 개인적인 삶으로 제한하고, 공적인 삶으로부터 분리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탈정치적인 성향을 갖게 되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세상없는 믿음과 믿음 없는 세상”을 가져다줄 뿐이다. 세상은 일시적이고, 우리의 고향이 아니기에 사회의 변화를 위한 노력과 책임은 그리스도인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 사회와 국가를 새롭게 하는 것은 믿음의 테마도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대상도 아니다. 진정한 가치는 반대로 개개인의 내적인 믿음과 영성이다. 이렇게 믿음을 개인적이고 내적이고 영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으로 인해서 두왕국설은 “정치적인 금욕”(politische Abstinenz)를 불러왔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일은 세상에 속한 불신자 즉 극단주의자들이나 인본주의자나 물질주의자에게 넘겨졌던 것이다. 1920, 30년대 당시 독일 시민의 대부분은 정치를 냄새나는 일로 취급하면서 스스로 손을 더럽히려는 사람들에게 그 일을 넘기려고 했다.

넷째 두 왕국설은 정치적인 중립을 지향하면서 보수적인 성향으로 흘러갔다. 루터주의자들은 교회로 하여금 정치적인 문제에 관여하지 말고 중립에 머무르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처럼 겉으로 표현되는 중립 이면에는 언제나 “일방적으로 보수주의적인 경향”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유리된 창조론적 정치윤리에서는 창조질서(Schöpfungsordnung)와 보존질서(Erhaltungsordnung)가 중요했고, 여기서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혼란으로부터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민사회의 질서를 지켜주는 것 즉 체제유지였다. 히틀러가 독재를 합법화하는 특별법을 공포했을 때에 루터주의자들이 환영한 것은, 체제와 질서유지를 자유나 인권보다 앞세웠기 때문이다. 이런 보수적인 성향은 2차세계대전후에도 여전했는데, 서독의 루터주의자들은 국가의 평화와 안녕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막아야 한다며 미국이 앞세우는 반공이데올로기에 충실했고, 동독의 루터주의자들은 소련이 앞세우는 공산주의 국가이데올로기에 충실하려고 했던 것이다.(최현범, 129-130쪽)

   

   

동양에서는 일본에 바르트 신학이 들어온 것은 1924, 5년에 고창덕태랑과 그 일문에서 시작된 것이라 하다. 복전정준이 브룬너의 ‘철학과 계시’‘ 신비주의와 말씀’을 읽고 호산교회의 청년회에서 이를 소개한 것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1925년 동경 신학사에서 브룬너의 신학이 강의되었고, 1925년 복음신보 지상에 ‘신앙의 본의’라는 제목으로 브룬너의 ‘체험, 인식, 신앙’이 번역 소개되었다. 그리하여 1926년 이후의 신학생들 중에는 사회적 그리스도굔 위기 신학이냐의 둘 중에 하나를 택하질 않으면 안될 고민을 느끼고 있었다 한다. 쉬스토프의 불안의식이 소개되자 따라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전성하여 전집이 간행되고 1925년을 전후하여 키엘케골, 니체, 하이덱거 등이 부지런히 소개되었다. 일제 말기 패전을 앞두고서도 신학으로는 여전히 신정통주의가 대세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궇고 당시 전체주의 정부에 대하여 바르트만큼 용감하지 못했던 것은 전통없는 피선교지 교회로서의 일반적 약점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한국에 있어서는 평양 신학교에서 박형룡 박사가 ‘신학난제’라는 그의 저서에서, 바르트 신학에 대하여 근본주의 입장에서 극히 일방적인 평을 가한 것이 있을 뿐이요, 1949년 전국 기독 청년 대회가 서울에서 모였을 때에, 필자가 ‘대전 전후 신학사조의 변천’이란 제목으로 강연하는 중, 이 신정통주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운동을 극히 동정적으로 소개한 이래, 근본주의 진영에서 간행하는 신학정론지에 신정통주의 비판 특집이 나왔고, 그 다음달에 한국신학대학에서 내는 임마누엘지에 이에 대한 대답과 해명으로서의 특집이 나왔었다. 그 후 한국교회에서도 다른 여러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정통주의 신학이 신학계의 주류를 형성해 가고 있다. (김재준 1, 신정통주의의 역사적 고찰, 십자군, 1960.4. 49쪽)

   

   

   

1-5. 공동체

   

- 순전한 집단논리 (북한 등 아시아 사회 )

- 개인으로 예수를 믿는 성도들의 공동체

   

보수교회 젊은이들과 기성세대의 관점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은 1988년 2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교회 선언"에 대한 서로 다른 평가였다. "평화선언"이 발표되자 보수교단을 대표하는 교단, 성직자, 평신도, 신학자 단체들이 앞 다투어 나와 격렬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미군철수, 유엔군 해체, 핵무기 철수 등 "평화선언"이 요구한 대부분의 것을 거부했고, "민중"이라는 용어, 북한의 기독교 공동체와 정권에 대한 전향적인 태도 등도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비하여 <대한기독신문>은 사설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서 보수교계의 신경질적 반응을 비판하여 평화선언을 지지하고 나섰다. <대학기독신문>은 통일선언이 근본적으로 7.4 남북공동성명의 원칙을 재천명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한 후 탈 이데올로기 시대에 "왜 우리 보수교단들은 북한사회를 온갖 악한 것들로 가득찬 악당들의 소굴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가? 그것이 애국이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요 충성인가?" 라고 질문했다.(류대영, 70쪽)

   

세상을 아는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세상과 결속한 공동체이다. 우리는 공동체가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두 번째 근본적 의미앞에 서 있다. 공동체가 세상사에 무관심하게, 다만 유보적으로, 부분적으로 관여한다면, 다만 피상적으로, 멀리서부터 세상에 접근한다면, 그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공동체가 자신의 일에서 세상의 일을, 세상의 일에서 자기 자신의 일을 보고 발견함으로써, 공동체는 행동하며 의미 있게 행동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들이다. 확실히 공동체는 그의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인간들에 대해 거리를 취할 것이고 그들에 반대하고 반립할 것이다. 공동체는 아니오를 말함이 없이는 그들에게 그래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칼 바르트 3, 315쪽)

   

신앙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신앙이란 저 흔들어 놓는 충격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근본적인 관계이다. 이 경험은 모든 다른 인간의 경험과 다르다. 물론 기독교적 공동체의 신앙이 인간을 신학자로 만드는 고유한 요인이다. 그런데 이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긍정하고, 이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유의 사용인바, 이 자유는 기독교인들 모두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에게는 “신앙의 동반자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적 공동체란 “믿는 사람들의 회집”으로서 다음과 같은 개개인들의 공동체다. 즉 이 개개인들은 이 세상에서 홀로 신앙하는 하는 사람이 된다고 하여도 개인으로 믿어야 하고, 믿고 싶어하며, 믿을 것이다.

이 길이 아니고는 신학자가 되는 길은 없다. 오직 이 길만이 그가 기독교적 공동체와 이 세상에서 그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길이다.(칼 바르트 2, 123쪽)

   

   

1-6. 세상

   

- 말씀이 계시되는 장소는 피조물 대상으로서의 세상

   

개혁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은혜는 창조질서를 뒤로 물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구속의 질서는 창조질서 위에 다른 질서를 다시세우는 것(donum superadditum)이 아니라,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달리 말하여, 구속의 질서는 창조질서를 폐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완성한다. 창조질서를 회복한다는 것의 적용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즉 결혼과 부모와 자녀의 관계, 인간과 피조물의 관계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은혜는 자연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스며들어 그것을 변화시켜 완성에 이르게 한다는 개혁신학의 공리는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성경의 뚜렷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피조물의 관계 안에 죽음과 질병과 부조리를 가져왔으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을 경험하게 되면, 이 관계 안에 생명이 약동하고, 관계가 회복된다. 인간만이 아니라 창조질서가 회복된다.(유태화, 12쪽)

   

이렇게 하나님은 ‘인간적인 것’, ‘세상적인 것’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 더 나아가서 ‘종교적인 것’ 등, ‘이미 주어진 것’을 통해서 당신을 계시하실 뿐 아니라, 이런 것을 통해서 인간과 함께 역사를 만들어 나가신다. 더욱 놀라운 것은 때로 종교적으로 더러운 것처럼 보이는 무엇도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사용하신다는 사실이다(행 10:15). 신약에서도 이런 예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바울의 선교 대상이었던 ‘이방인’들은 유대 종교전통에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종교사적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매우 헬라-로마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 서신(예를 들면, 롬 6장:1-11, 살전 4:15-17 등)에서 종종 이방 종교의 심상과 개념이 사용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지극히 ‘세속적인 것’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새로운 의미의 체계를 설명하는 도구로 변혁되고 있는 것이다.(김성열, 76쪽)

   

그러나 교회 협의회의 입장이 바르트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볼 수 없다. 선교에 대한 교회 협의회의 입장은 처음에는 교회에 대한 강조에 있었지만 그 후에 교회 보다는 세상에 더 강조를 하게 된다. 이 때 등장하는 이가 호겐다이크 (J.C. Hoekendijk)로서 자신의 견해를 ‘흩어지는 교회’를 통하여 주장하였다. 이때부터 선교는 교회보다는 세상을 강조하였고 교회의 의미가 퇴색하게 된다.

선교에 있어서 교회에서 세상으로의 강조는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그것은 선교의 주체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며 교회가 주체가 되어 선교하는 것에서 초래되는 부조리한 측면을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 개념은 1952년 독일 빌링겐 (Willingen)에서 열렸던 IMC (세계선교대회)에서 바젤 선교부 원장이었던 칼 하르텐슈타인 (K. Hartenstein)이 사용한 용어로서 비체돔 (G. F. Vicedom)에 의해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러한 개념이 성립되기에는 그 배후에 칼 바르트의 신학의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바르트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성육신에 나타난 하나님의 화해에 관한 신학이 하나님 선교에 대한 개념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신태성, 127쪽)

   

하나님의 말씀의 ‘세상성’ 아래서 그것이 피조물의 옷을 입고 우리와 해후한다는 것이 이해되어야 할 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피조물의 현실이 타락한 인간의 현실이기 때문에, 또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와 해후하기 때문에, 말해져야 하는 것은 그의 형태가 말하자면 순전한 본성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 그러한 것으로서 곧 주변의 비 본성과 구별될 수 있을 그러한 형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우리의 인식도 어떤 양식으로 순수하게 머물러 있는, 따라서 하나님의 신비를 피조물 현실에서 관통해 통찰할 수 있는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의 타락한 이성에 의해서 일어난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되는 그 장소는 개관적으로 또 주관적으로 죄가 주관되는 우주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형태는 따라서 현실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반항 가운데 서 있는 우주의 형태이다. (칼 바르트 1, 222쪽)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세상성을 말하자면 어떤 치명적인 우연으로서,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아마도 언젠가는 제기될 수 있는 악조건으로서 파악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성에 있어서, 따라서 이러한 이중적인 간접성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성육화됨을 의미한다. 성육화됨은 실로 이러한 세상성에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 안에 있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 철두철미 세상성을 지닌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적으로 말씀하지 않는다면 그는 전혀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씀의 세상성을 회피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회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육체이고 따라서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기관과 능력이 없고 오히려 그에게 대한 적대성에서 그에게 복종하게 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우리에게 언젠가 비로소 드러날지라도, 그것은 우선 어리석은 방해물처럼 보이는 바 그것을 하나님이 그 자신의 길에 세우니,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이르는 그의 현실적인 따라서 필연적인 또 선한 길이다. 왜 그것이 그래야만 하는 지 또 그러할 수 있는지를 우리가 통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실로 하나님 위에 또 우리 자신위에서 있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이 스스로를 우리와 관계 짓는 그 관계의 필연성과 선에 대해서 이러한 관계의 현실을 차후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그러한 판단 이외에 다른 어떤 판단을 말할 수 없다. (칼 바르트 1, 225쪽)

   

- 복음적인 사회 참여

   

하나님 나라의 역사성, 복음전파의 총체성에 관한 복음주의 세계의 새로운 이해가 온건한 형태로 잘 반영된 것이 1974년의 로잔언약이었다. 로잔에서 개최된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의 선언적 협약으로 영국의 성공회 신부인 존 스토트가 초안한 로잔언약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학과 가치관을 유지하면서도 변화하는 세계의 요구에 부응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가 점증하는 가운데 그 동안 개인 구령에 초점을 맞추었던 복음주의권 교회도 인권, 착취, 환경등 전 세계적인 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 없었다. (중략)

전체 15개 항목으로 된 로잔언약의 제5항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은 사회참여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잘 설파하고 있다. 하나님이 온 인류의 창조주요 심판자이기 때문에 인류를 모든 종류의 압박에서 해방시키고 정의와 화해를 실현하려는 그의 뜻이 온 인류 사회에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따라서 언약은 그 동안 이런 노력에 소홀했던 점, 그리고 때로는 복음전파와 사회적 관심이 배타적이라고 여겨온 데 대해 참회를 해야 했다. (류대영, 41-42쪽)

   

복음주의도 그리스도인의 사회 및 정치적인 책임에 대하여 또렷한 소리를 낸다. 그리고 복음주의의 관심사가 총체적인 구원이라는 사실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서 보는 것처럼, 이러한 사회적인 책임의 출발점이,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인종, 종교, 피부빛, 문화, 계급, 성 또는 연령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이 타고난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사람은 서로 존경받고 섬김을 받아야 하며 누구나 착취당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되어 있을지라도,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기독론적인 신앙고백에 근거되며, 동시에 사회적인 책임의 대상이 뚜렷하게 인간론 중심적이라는 것이 특징적이다. 환언하여, 구속이라는 중심에서 사회적 책임이 언급된다는 것이다. 미상불 성경이 일면 이런 측면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단순하고 일방적이지가 않다. 말인즉, 구속사건으로서 십자가와 부활은 역사의 중심이며, 역사의 중심이라는 말을 할 때, 그것은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는 구조를 전제한다. 따라서, 후술하겠지만, 구속에 참여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있는 삶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창조(creation)에서 완성(consummation)에 이르는 명쾌한 이해가 동반되어야 하며, 이는 성경이 바로 그런 토대에서 구속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기독론과 인간론에만 근거시킨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피상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창조신학적인 기반을 뒤로 물리고 기독론적 기초, 즉 구속을 전방에 위치시키거나 혹은 창조신학과 구속을 긴밀하게 연결 짓지 않고 구속을 창조 위에 둘 때, 더 나아가서 그 적용의 범주를 인간론적으로만 제한할 때, 몇 가지 필연적인 문제를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인 책임이 구체적인 기초와 방향을 상실한 채 단순히 상황에 응전하는 방식으로, 혹은 주관적인 판단으로 기울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말인즉, 그리스도인이 총체적인 복음증거의 과정에서 대면하게 되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떤 기준에서 어떤 방법으로 그 상황에 반응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자칫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과 그때그때의 상황적인 판단에 내맡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어떤 기준에서 어떤 방법으로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그 기준의 모호성으로 인해서 또 다른 혼란에 봉착할 수 있다.(유태화, 4쪽)

   

이상 우리는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칼 마르크스,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인간학적‘종교(기독교) 비판’을 알아 보았다. 그 결과 이들의 방법은 하나 같이 이 지상적, 세상적, 인간적인 것의 ‘투사(Projection)이론’에 기초해 있다. 다만 그 원천 혹은 기원이 포이에르바하에서는 ‘불완전한 인간 이념’으로, 마르크스에게서는‘비- 인간적 사회 현실’로, 그리고 프로이드에게서는‘외디푸스 콤플렉스적 원의(怨意) 곧 억압된 심리’가 서로 다를 뿐이다. 그리고 이들 모두의 주장은 보이지 않은 영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 착상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종교(기독교)는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환상’, ‘착각’, ‘이념’에 불과하다. 그러한 종교를 만들어내게 된 근본적인 동기는 바로 불합리하고 비- 인간적이고 억압된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 혹은 소망이다. 이러한 주장은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칼 마르크스,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말 그대로 ‘착각’이며 ‘환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을 역설적으로 이해하면 모든 인간은 여러 가지 삶의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싶은 욕구가 누구에게든지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말을 빌리면, 인간은“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롬 7:24)라고 탄식하고 있는 존재이다. 결국 인간학적‘종교(기독교) 비판’들은 인간의 비참함을 깊이 인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스스로 그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이야 말로 스스로 ‘착각’에 빠지는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왜냐하면‘종교(기독교) 비판가’들이 이미 스스로 증언하였듯이 이 인간 세상은 불의와 비참과 억압으로 가득한 세상이기 때문이다.(김재진, 257-258쪽)

   

바르트는 이전의 신학적 사유와는 달리 하나님과 인간이 동일한 지평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런 그의 신학체계는 키에르케고르의 ‘시간과 영원의 무한한 질적 차이’의 개념에서 영향을 받았다. 하나님은 절대타자이시며 따라서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사고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 이것은 그의 유명한 명제인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세상은 세상이다”로 대표된다. 바르트 신학의 특징이 위 명제로 대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명제는 바르트에게 결정적 중요성을 지닌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절대타자이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객관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객관적 사실은 세상 속에 은폐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은폐로서 자기의 존재 특성을 갖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종교성이나 도덕성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영역과 사람이 사는 영역은 근본적으로 구분되며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와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계시하실 때만이 가능하다.(김신현, 9-10쪽)

   

바르트의 성서와의 씨름은 그가 변증법적 시나이라고 불렀던 것의 근원이 되었다. 즉 그것은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말들과 말씀, 계시의 세상적인 형식과 그것의 신적인 내용 사이의 양극적인 관계 속에 있는 양쪽 모두를 정당하게 취급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성서 본문에 대한 진실한 주석은 그에게 그 자체를 넘어서 하나님의 자기 증거와 자기 계시를 지시하는 증거로서 그것의 기본적이고 의미론적인 기능을 진지하게 다루도록 하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바르트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향해 팔을 펼치고 그의 집게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는 세례 요한에 대한 그뤼네발트의 인상적인 그림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요한은 외쳤다. 정확히 이렇게 해서 성서의 진술들은 그들 자체를 넘어서 하나님의 객관적 현실성들을 가리키는 진술들로서 간주되는 것이다. 성서의 진술들은 그것들이 그 자체로 진리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참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그 자체와 무관한 진리를 가리키기 때문에 참된 것이다. 이렇게 참된 진술들과 진술들의 진리 사이에서 어떤 차이점이 인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바르트는 성서의 진술들을 진리와 동일시하는 어떠한 유명론적인 동일화도 거부하려고 애를 썼고, 그리고 철저하게 진리에 존재론적으로 근거되고 그리고 그것에 의해 통제되는 것으로서 성서의 진술들에 대한 실재론적인 이해를 추구하였다. (T.F. 토렌스, 139쪽)

   

1-7. 계시

   

바르트의 기독론적 원리는 정통적인 계시관을 거부하게 됨에 따라 이렇게 정통적 신관을 거부하게 된다. 바르트의 「그리스도의 사건」이란 개념은 계시를 주시는 자충족자(自充足者)인 하나님과 계시를 받을 피조 인간에 대한 정통주의적 구분을 폐지시키고 그 둘을 병행 시킨다. 하나님의 실존도 역시 인간의 실존이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현재 임하는 것과 같이 인간에게 전적으로 현재 임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바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 사건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를 정통주의 이상으로 심각하게 구별 짓는 차별 원리가 되려하다. 곧 하나님은 우연히 인간과 동시적인 사실을 바르트는 주장한다. 바르트는 그의 『기독론적 원리』를 주장한 결과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계시한다는 정통파의 성경관을 부인하게 되었다. 거기에 따라서 그는 정통주의적 신관을 부인하게 되었다. 바르트에게는 계시와 관련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하나님은 언제나 없다. 그런 하나님이 있다면 그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은 독단적인 하나님이어서 그의 의는 은혜에 속하지 않을 것이라 하며 본성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구속하시는 이가 아닐 것이라고 한다. 정통파의 신관에 대항하여 바르트는 그리스도 안에 은혜의 하나님을 전한다고 하며 모든 사람에게 은혜로운 것이 하나님의 본질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질이라고 한다.(이동현, 51쪽)

   

- 하나님 말씀안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더불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말해짐으로써 그 말씀은 인간과 더불어 있고 인간은 그 말씀과 더부렁 있다. 그 말씀과 인간의 이러한 공존의 확증이란 없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다른 인간에게 말해짐으로써 그 말씀이 그와 더불어 그러한 공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지시하는 것 외에 다른 확증이란 없다. 신앙의 확증은 신앙의 선포안에서 성립한다. 그 말씀의 인식가능성의 확증은 그 말씀에 대한 신앙 고백에서 성립한다. 신앙과 고백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적인 사상으로 되고 인간적인 말이 되며, 물론 무한한 비유사성과 부적합성에서, 그러나 그 말씀의 원형에 대해서 전적인 생소함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전적인 죄된 왜곡성에도 불구하고 그 원형의 현실적인 형상에서, 신적인 것의 가리움으로서 동시에 나타냄으로서 그 말씀이 인간적인 사상이 되고 인간적인 말이 된다. 이 때에 인간적인 사상, 인간적인 언어의 어떠한 내재적인 변질이 생각될 수 없으며, 말씀이 육신이 된 바 그 걸림돌의 적절한 어떠한 제거도 생각될 수 없다. (칼 바르트 1, 317쪽)

   

하나님 한 분에게만 신실함이 있으며, 신앙은 우리가 그와 그의 약속과 그의 인도를 붙들 수 있다는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붙드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그곳에 계신다는 사실을 신뢰하고, 이러한 확신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기에 있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동시에 또한 인도를 의미합니다. 나는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내버려지지 않았으며, 나는 내가 모든 것 속에서, 즉 나의 전체 지상의 존재 안에서 붙들 수 있는 그의 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언제나 동시에 복음이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으로서 이것은 필연적으로 또한 율법입니다. (칼 바르트, 27쪽)

   

하나님의 계시행위는 곧 그의 사랑의 행위이다. "하나님이 계신다"라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한다"라는 말과 동일하다. 그의 사랑의 행위는 우리와의 친교 관계를 구하고 창조한다. 그의 이러한 행위가 자유하다는 것은 그가 우리 없이 그 자체 안에서도 사랑하는 자로서, 사랑의 대상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 없이 존재하지 아니하여 리를 위하여 우리와 더불어 있기를 원하며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준다(요 3:16) 이 적극적인 관계 설정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행위가 자유하다는 것을 승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저 부정적인 자유 즉 우리 없이도 자체안에서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을 동시에 승인해야 한다. 그는 우리와의 친교를 창조하기 이전에 자체 안에 스스로와 더불어 있고, 스스로를 위하여 있고, 상호 침투하고, 교류한다. 그가 우리와의 친교를 설정하는 것은 사랑하는 자로서의 그 자체의 충만성에서부터 넘쳐 나오는 행위이다. (박순경, 170쪽)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말해짐으로써 그 말씀은 인간과 더불어 있고 인간은 그 말씀과 더부렁 있다. 그 말씀과 인간의 이러한 공존의 확증이란 없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다른 인간에게 말해짐으로써 그 말씀이 그와 더불어 그러한 공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지시하는 것 외에 다른 확증이란 없다. 신앙의 확증은 신앙의 선포안에서 성립한다. 그 말씀의 인식가능성의 확증은 그 말씀에 대한 신앙 고백에서 성립한다. 신앙과 고백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적인 사상으로 되고 인간적인 말이 되며, 물론 무한한 비유사성과 부적합성에서, 그러나 그 말씀의 원형에 대해서 전적인 생소함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전적인 죄된 왜곡성에도 불구하고 그 원형의 현실적인 형상에서, 신적인 것의 가리움으로서 동시에 나타냄으로서 그 말씀이 인간적인 사상이 되고 인간적인 말이 된다. 이 때에 인간적인 사상, 인간적인 언어의 어떠한 내재적인 변질이 생각될 수 없으며, 말씀이 육신이 된 바 그 걸림돌의 적절한 어떠한 제거도 생각될 수 없다. (칼 바르트 1, 317쪽)

   

하나님 한 분에게만 신실함이 있으며, 신앙은 우리가 그와 그의 약속과 그의 인도를 붙들 수 있다는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붙드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그곳에 계신다는 사실을 신뢰하고, 이러한 확신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기에 있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동시에 또한 인도를 의미합니다. 나는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내버려지지 않았으며, 나는 내가 모든 것 속에서, 즉 나의 전체 지상의 존재 안에서 붙들 수 있는 그의 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언제나 동시에 복음이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으로서 이것은 필연적으로 또한 율법입니다. (칼 바르트, 27쪽)

   

하나님의 계시행위는 곧 그의 사랑의 행위이다. "하나님이 계신다"라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한다"라는 말과 동일하다. 그의 사랑의 행위는 우리와의 친교 관계를 구하고 창조한다. 그의 이러한 행위가 자유하다는 것은 그가 우리 없이 그 자체 안에서도 사랑하는 자로서, 사랑의 대상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 없이 존재하지 아니하여 리를 위하여 우리와 더불어 있기를 원하며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준다(요 3:16) 이 적극적인 관계 설정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행위가 자유하다는 것을 승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저 부정적인 자유 즉 우리 없이도 자체안에서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을 동시에 승인해야 한다. 그는 우리와의 친교를 창조하기 이전에 자체 안에 스스로와 더불어 있고, 스스로를 위하여 있고, 상호 침투하고, 교류한다. 그가 우리와의 친교를 설정하는 것은 사랑하는 자로서의 그 자체의 충만성에서부터 넘쳐 나오는 행위이다. (박순경, 170쪽)

   

하나님의 말씀과 행적에 헌신할 때에만 신학자는 한 자유자로서 그의 학문의 방법과 법칙을 존중하면서 실존하는 것이다. 만약에 신학자가 다른 방법론에 집착하든가, 다른 낯선 인식론을 존중하며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필연성에 말려들 때 그것은 그에게 짐, 강제성, 바벨론의 포로일 것이다. 하지미나 신학자가 일단 “신앙의 지성”을 추구하기로 했고 이 길을 계속 걷고 있는 한 그는 다른 방법론이나 법칙을 이미 포기한 것이다.(칼 바르트 2, 98쪽)

   

- 바르트의 자연신학에 대한 생각 : 부정

   

2) 자연신학은 하나님의 준비성을 일차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이전의 인간의 준비성을 전제한다. 다시 말하여, 자연신학에 있어서 유일하게 고려되는 대상은 하나님의 준비성이 아니며, 인간의 준비성은 하나님의 준비성 안에 포괄되어 있고 하나님의 준비성에 의존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신학은 “인간의 준비성을 독립적인 요소로” 고정시킨다.

3) 자연신학은 다음의 세 가지 점에 있어서 하나님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인간의 준비성을 말한다. ㄱ) “인간의 필요성”, ㄴ) 이 “필요성의 인식과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객관적으로 현실적이라는 데 대한 인식”. ㄷ) “그의 필요성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인간의 주권적인 자발성”. 이 세 가지 점에 인간의 준비성이 있다고 자연신학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교만과 자기 주장을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ㄱ) “자기 자신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존재할 수 있는 부요한 인간이고자 하는 그의 이 필요성을 자기 자신에 대하여 숨길 수 있고 은폐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ㄴ)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 그 자체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에 해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인식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은 이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사실상 더욱 더 멀어지고 “하나님의 사신에 대하여 예전과 마찬가지로 폐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ㄷ)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신의 자발성을 인식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교만한 인간이 되며, 자신의 자발성 가운데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인간 자신의 자발성과 이 자발성에 대한 인식은 그래도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업적이요 공로가 되기 때문이다. (김균진, 280쪽)

   

바르트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지식의 진정성은 스스로 의지된 어떤 것에 의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에 의존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르트가 자연신학을 부정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알기 위한 인간의 ‘준비’ 또는 스스로 의지된 지식의 가능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James Barr)는 ‘바르트가 아주 사납고 결정적이며 비타협적으로 성경 안에서 아주 조금 나타나는 자연신학의 암시들에 대항해서 싸웠다’고 지적한다. 계속해서 그는 말하기를 ‘그의 주석 안에서 바르트는 이러한 자연신학을 위한 소수의 그리고 보충적이고 보조적인 역할을 위한 공간의 어떠한 표도 보여주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바르트의 하나님 이해에 대한 기독론적 측면은 플라톤적 전제에 기초한다. 이것은 곧 바르트의 안셈에 대한 해석이 안셈 자신의 고려와 다르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안셈의 ‘알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mtelligam)’는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이해에 선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안셈은 “Creasti me ad imaginem tuam!(나를 당신의 형상에로 창조하소서)!”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Creasti im me hanc imaginem tuam!(당신의 형상을 내 안에 창조하소서)”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에 따르면 이 부분은 자연신학의 권위가 아니라 계시신학 다음에 오는 두 번째 것이라고 말한다.(김용준, 171쪽)

   

그런데 이 자연 계시를 가지고 신학을 전개하는 것을 자연신학이라고 한다. 즉 자연신학은 특별계시에 호소하지 않고 일반계시 안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증명하거나 믿음을 정당화 하려는 논증이다. 이 논쟁은 지금까지 지속되는 신학사의 논제 가운데 하나이다. 한때(19세기) 자연신학은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여 왔다. 그리고 이 논쟁에는 신학자들 뿐 아니라 흄(D. Hume)과 칸트(I. Kant)를 비롯한 세속적 철학자들과 사회학자, 자연과학자들까지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 해석은 쉽게 단정을 내릴 수 없는 복잡한 양상을 지닌다. 사람들은 보통 자연신학이 하나님을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럴 경우 자연신학 사상의 출발점은 자신을 보이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이 된다. 기독교적 헌신을 지닌 운동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창조론 운동의 한 분파인 지적설계운동의 중심에 있는 윌리엄 뎀스키도 지적설계운동은 과학이 발달하면서 자연신학을 보다 세련된 형태로 시도하려는 운동임을 표방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지적설계운동과 자연신학이 전혀 충돌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자연신학은 기독교 신념과 믿음에 대한 헌신이 없어도 이성에 기초하여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에 이를 수 있다는 신념을 고수한다. 자연이 은총의 영역보다 약간 낮은 영역이기는 하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두 영역 중 하나이다. 지적설계 삼총사 중의 한 사람인 마이클 베히가 카톨릭 신자인 것도 그 때문이다. 이렇게 지적설계운동에는 로마 카톨릭, 이슬람, 만유내재신론자, 유대교, 힌두교, 범신론자 이신론자들을 비롯한 다양한 창조론자들도 기꺼이 참여가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신학에서 불신앙에 대항할 수 있는 유용한 논증을 발견하려 하는 반면, 이신론자들을 비롯한 비 기독권 창조론자들은 오히려 자연신학에서 특별계시를 부인하고 정통주의 신학에 대항할 수 있는 논증을 발견하려 한다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한다.(조덕영, 8쪽)

   

통상적으로 보면 성경은 바르트가 신랄하게 비판했던 “그 자연신학”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르트가 생각하는 “그 자연신학”만 그렇다. 성경을 지지하는 자연신학은 왜 고려하지 않았을까? 즉 자연신학이라는 명칭에 대해 우리는 이제 달리 해석할 시점에 와 있다고 본다. 복음적 창조론 오픈포럼이나 복음적 지적설계운동처럼 복음적 자연신학이라면 성경적 모색을 추구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조심스럽게 길을 열 수 있다. 복음에 입각한 창조 신학이 아닌, “자연신학을 어떤 종교적 신념도 전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해 종교적 신념을 뒷받침하는 논증을 제공하고자 하는 기획”이라고 한 윌리엄 앨스턴(William Alston)의 축소된 자연신학 개념이 자연신학 해석을 지배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것이 과연 자연을 창조한 하나님의 자연 계시를 무시할만한 심각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확인이 신학을 파괴할 것이라는 믿음과 자연신학을 주장하면 신학이 인류학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영원한 소극적 두려움에 빠질 만큼 복음과 계시는 아주 힘이 부족한 도구에 불과하단 말인가? 하나님이 주신 자연이 그렇게도 이상스러운 복음의 괴물에 불과하단 말인가구속 교리에만 매달릴 때 사람은 조금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구속 교리를 제외한 모든 것은 썩어질 더러운 것들이요 복음에 방해만 될 뿐이고 자연 세계는 악하고 더럽고 구속에 아무 도움도 못되는 타락의 본보기에 불과하다고 매장해버린다.(조덕영, 15쪽)

   

바르트가 보기에, 이것은 말할 수 없는 존재를 말하려고 하는 인간의 교만에서 나온 월권행위이며 무한자와 유한자와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무시한 인간의 존재론적 개입이며, 인간의 범주를 초월하는 신의 존재를 인간의 범주로 축소하려는 자유주의적인 전략이다. 바르트는 브루너의 신학에서 그 자신이 극도로 혐오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부활 가능성을 보고 극단적으로 브루너의 신학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다.

바르트가 보기에 브루너가 자연신학으로 빠진 근본적인 원인은 브루너가 형식적인 형상과 실질적인 형상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브루너는 형식적인 형상을 실질적인 형상으로 바꾸어서, 모든 인간들에게 가능한 형식적인 형상 속에서도 참된 신의 인식이 부분적이라 할지라도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즉, 브루너는 신의 형상을 형식적인 형상과 실질적인 형상으로 구분한 것 자체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그 둘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데 실패해서 자연신학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졌다는 것이다.(오승성, 185-186쪽)

   

쉴라이에르마허는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신학적 긴장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계몽주의가 지니고 있었던 지성주의와 도덕주의가 종교를 오해하고 나아가 비하시키고 있다고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다소 계몽주의의 건조한 이성주의에 반발하던 그는 한결같이 종교와 형이상학과 도덕 사이의 구별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그 당시 과학 정신을 받아들여 종교를 종교학으로 이해하려 하는 일련의 움직임들, 그리고 이신론적인 하나님 이해, 자연종교론, 그리고 칸트의 이성의 한계안에 있는 종교이해에 대하 비판자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종교개혁 사상이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그리스도의 삶에 관심하였다면, 계몽주의는 이성에서 도덕성의 문제를 찾으려 한 운동이다. 초기에는 이성과 계시를 거의 동등하게 여겼으나 계몽의 빛이 더욱 강해지면서 이성이 계시를 대치하는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계시가 특수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에 비하여 계몽주의가 수반하고 있었던 이성은 보다 보편적인 지평을 열어나가는 것이었으므로, 이성에 기반을 둔 합리적 윤리가 형성된다면, 계몽주의는 세계를 위한 보편적인 윤리를 형성할 수 있다는 가설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계몽주의의 빛이 강해지면 질수록 기독교윤리학의 기독교적인 성격은 애매해질 수 밖에 없었다. (박충구, 60쪽)

   

바르트는 신앙사유를 이로써 인간의 주관적인 작업으로부터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로 방향을 바꾸었다. 바르트는 계시의 권위의 자리를 마련하고 그 어떠한 비판도 불가능한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의 권위인 성경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물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근본입장은 이제 신앙과 사유의 관계를 명백하게 규정하기에 이른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사유’란 하느님 물음을 위한 어떠한 원초적이며 자존적인 기능을 하지 못한다. 사유란 이제 하느님이 말씀하신 그것의 전개, 즉 계시에 대한 숙고의 기능에 머물러 버리게 된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에 복종적으로 믿고 그로써 믿어진 바를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학은 우리 스스로 말할 수 없는 것을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도록 하는 것을 사유적으로 전개시키는 것 뿐이다.

이로써 바르트는 인간의 이성의 작용으로써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법에 반하여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하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법을 새롭게 주창하였다. 바르트의 이러한 신앙사유의 계시실증적 특성은 불관용적인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계시가 우선적으로 인간에 대한 부정 내지는 심판을 의미하였기에 바르트에게서는 어떠한 자연적 인간이해의 긍정이나 일반적 이성에 근거된 철학적 시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어떠한 인간의 종교성, 경건성, 철학성도 죄된 것이었다. 오로지 바르트는 신앙만이 요구되었으며, 그 신앙은 인간의 입장에서 전적으로 자신을 비우는 어떤 것, 오로지 이 빈 공간을 신적인 내용, 신적인 신실하심, 말씀사건으로 채우는 것을 뜻하였다.(이은택, 60쪽)

   

- 성화

   

왜냐하면 성화는 그분으로부터 그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한에 있어서, 성화는 그들에 대한 그 분의 사역이며, 그들의 현 존재의 현실적 변모와 변경이 된다. 그들이 죄인이며 계속해서 죄인일 것이라는 사실, 그들의 행위가 인간적 태만의 모든 징조들로 짐 지워져 있고 그래서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창조할 수 없는,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에 대하여 아무런 의무도 없는 그런 용서와 칭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참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을 일으켜 세움으로써 그들의 현 존재가-아무리 그것이 유혹 받기 쉽다고 해도-그들의 주님의 현 존재와 비슷하게 그리고 바로 그 현존재로 되어가는 하나의 운동을 실행한다는 사실은 더욱더 참된 사실이다. (중략)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씨앗과 파종이 아니라 열매 맺기 위해서 죽어야 하는 참된 씨앗,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위로부터 유래한,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아래에 뿌려진 씨앗을 의미한다. 이것이 성화이며 한 분 거룩하신 자에 의해 실제로 발생하는 성도의 성화이다. 이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며 칭의와 마찬가지로 존엄성과 현실성을 가진다. (칼 바르트 4, 732-733쪽)

   

개개인의 성화는 자기를 주시하는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반영하는 형태를 취한다. 성화는 인간의 피조된 본성에 대한 초월적 성취이며, 인간본성의 타락인 자기 고집적인 사랑(에로스)을 근절시키기 위한 전쟁에 참여케 한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 분과의 관계 속에 살도록 부르심에 근거해서 살 수 있다. 이에 의해서 사랑으로서의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 존재에 대해 한정된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유로우며 이유가 없고, 순전하며 의기양양하고, 새로운 삶에 있어서 창조적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인간은 이로써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새롭고 자유로우며 즐거운 행동을 위탁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을 향해서는 찬양과 순종 그리하여 그의 삶에 참여하게 되고 그후에, 모든 인간들을 이미 형제가 되었든지 그들의 길을 가고 있든지 간에, 그리스도님 안에서 형제로서 받아들인다. 이웃을 향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며 사랑 받으시기에 마땅하다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는 그 누구도 홀로 외로이 있지 않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아놀드 B 콤, 156쪽)

   

- 하나님의 반대

   

복음주의 신학이란 이 하나님의 은혜의 “yes”에 대한 응답의 노고요, 인간을 향하신 그의 우정을 통하여 계시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응답의 노고이다. 복음주의 신학은 “인간”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관계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인간으로서 인간과 관계한다. 복음주의 신학에 있어서 인간은 결코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니체)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극복에로 확정된 존재이다. 만약에 “신학”이란 말이 그의 대상이 지니는 이 결정적인 차원, 즉 자유롭게 반응하는 사랑을 불러 일으키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 감사를 불러 일으키는 하나님의 은혜를 결여한다면,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신학”이란 말의 의미내용을 충분히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주의 신학의 관심이 누구며, 무엇인가를 더 잘 표현해주는 말은 “신()-인간(人間)”이다. 이것은 결코 ‘인간론적 신학’과 혼동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미 우리가 지적한 의미의 복음주의 신학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이 복음주의 신학이 중요하다. 이 신학은 물론 비인간적인 신에게 향해 있는 율법주의적 신학이 아니다. 복음주의 신학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바 임마누엘을 관심의 초점으로 한다. (칼 바르트 2, 33쪽)

   

하나님의 “Yes”와 “No”는 상호보충적이거나 상극적인 것이 아니다. 이 둘은 무게가 같은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르다. 물론 전자가 우월하고 후자가 열등하지만 신학은 이 이중성에 맞는 신학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신학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행하시고, 말씀하시는 바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적인 “yes”에로 축소시켜 버려도 안되고, 하나님의 “no”를 동일한 가치와 무게로서 저 하나님의 “yes”에 대등하게 맞서게 할 수 없다. 물론 신학자는 하나님의 “no”를 그의 “yes에 선행시켜서는 안되며, 하나님의 ”yes“를 그의 ”no“ 속에서 사라지게 해서도 안된다. 그림자가 빛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 대신 빛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야 하듯이, (칼 바르트 2, 104-105쪽)

   

벌코프는 신학의 방법을 다루는 중에 경험적 방법의 아버지인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에 대해서 논평한 후에 바르트 역시도 특별계시의 중요성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토록 회피하려고 했던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방법론에 빠지는 우를 범하였다고 비평한다. 이는 바르트가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 영혼에 직접 말씀하시고, 각 개별적 경우마다 성령의 특별한 작용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는 말씀을 하시는 거기에 있으며,” 이러한 계시는 객관적이기 보다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벌코프는 이러한 바르트의 계시론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에 대해서 바르트주의는 “각자가 성경의 어느 부분이 자기에게 권위가 있는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거대한 주관성(a vast subjectivity)에 봉착하게 된다”라고 바르게 비평한다.(이상웅, 47쪽)

   

-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된 이성

   

바르트에 따르면 이러한 계시의 사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진리는 형이상적인 차원에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인식은 현실적 차원에서 하나님 자신에 대한 대상적 진술로서 인간의 주관적 진리의 한계를 드러내며 계속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원리처럼 모든 것을 제한하는 것으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정체성이 모든 개별적 사건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계시의 언어는 개별적인 것을 무시하는 통일적인 언어방식이 아니며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말씀의 사건 가운데 모든 이에게 개방적으로 알려지는 대상적인 하나님의 자기 인식이 각각의 사람들에게 고유하게 경험되어지는 인격적인 언어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황돈형, 116쪽)

   

‘여기서 장벽을 두드리고 입구를 찾는 것은 실제로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설명하는 것과 같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 즉 그것을 발설하는 하나님 그 자신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즉 그것을 발설하는 하나님 그 자신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사실상 하나님 그 자신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말씀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서가 문을 여는 새로운 세계이고,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계시하면서 주권적으로 그리고 활동적으로 현재하는 하나님의 세계이다. 이것이 바로 성서를 그렇게 전적으로 비상한 책으로 만드는 것이다. 성서의 목록은 “하나님”이고, 하나님 자신, 유일하고, 언제나 현재하며, 영원한,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 목록의 내용이다. 하나님 자신, 바로 그 하나님이 그의 계시의 내용이다. (T,F, 토렌스, 106쪽)

   

그러나 일단 이 사실이 확립되면, 기독교 신앙이 이성의 조명과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이 또한 언급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신조가 언급하고 있는 바, 대상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 대상,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본성과 존재에 대한 것인데, 그는 인간의 지식의 힘으로는 알려지실 수 없으며 오직 그 자신의 자유와 결정과 행동으로 인하여서만 이해되고 파악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그의 자연적인 능력과 그의 이해와 그의 감정의 척도에 따라서 그 자신의 능력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최고의 존재, 절대 본성과 같은 어떤 것이며, 완전히 자유로운 힘이나, 혹은 모든 것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존재의 관념일 것입니다. 이 절대적인 최고의 존재, 궁극적이고 가장 심오한 존재, 이 物자체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사고, 즉 인간이 고안해 낸 직관들과 주변적인 가능성들의 일부입니다. 인간은 이 존재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자신의 자유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해될 수 있게 하실 때에 하나님은 생각되고 알려지십니다. (중략)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인간이 하나님을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인간에게 나타내시는 실제적인 경험이 있는 곳에서, 즉 인간이 스스로 이해할 수 없게 된, 그가 야기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그리고 하나님이 그와 더불어 살고 있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신적인 계시가 일어나고, 하나님이 인간을 조명하시며, 인간의 지식이 전달되고, 이 비교할 수 없는 교사가 인간을 교훈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칼 바르트, 32-33쪽)

   

하나님의 계시! 그것은 고가르텐에게서 이 연합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이러한 표현을 동일한 장소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를 통해서 해석하는데, 즉 계시는 “이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창조 때부터 그의 하나님과 主로서 스스로를 결부시켜온” 것이며, 또 얼마후에 더 분명히 해석하시기를, “계시는 세계의 시초부터 인간의 창조와 보존”이라는 것이다. (중략) 고가르텐이 그 위에다 그의 인간학을 정초하려는 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대와 상호소속성은 그렇다면 창조자로서의 하나님과 피조물로서의 인간 이해 안에 설정된 유대와 상호소속성일 것이다. (칼 바르트 1, 176쪽)

   

하나님의 말씀이 자체를 우리에게 부여하고 이해하도록 부여할 때에만, 그것은 현실적이고 오직 현실적인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그 물음이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포섭할 수 있는 범주에 대한 물음을 의미한다면,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삼단논법에 대한 물음을 의미한다면, 완전히 희망 없는 물음이다. (중략) 모든 일반적인 개념들은 하나님 말씀이 오직 그 자신의 결단에서만 현실이라는 본질적인 것을 억압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결단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간구하는 하나님의 이름 밖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어떠한 개념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니, 왜냐하면 그가 그 이름의 담지자이기 때문이다.(칼 바르트 1, 213쪽)

   

어떻게 이러한 통찰이 성립될 수 있는가? 바르트는 아주 분명하게 말한다. 죄인인 인간은 계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어떤 긍정적인 역할도 할 수 없다. 인간의 지식도 신적인 계시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 바르트는 에밀 브루너의 다른 의도를 십분 이해하면서도 그를 아주 심도 있게 비평한다. 계시로서 계시에 대한 해석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하는 사역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성령의 사역이다. 인간은 주의 말씀을 파악할 수 없으며, 말씀을 듣지도 않는다. 듣는 것과 듣는 능력은 오직 성령의 능력 안에서 주어진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462쪽)

   

- 계시에 기초된 실존

   

총괄하자면, 인간 실존은 인간의 자아 규정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경험에 있어서 인간 실존의 규정,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인간의 자아규정이 문제된다면, 그렇다면 그 자아 규정 아래서 이해되어야 할 것은 이러한 혹은 저러한 인간적인 가능성의 원칙적인 부각 없이 또 원칙적인 부각 없이 또 원칙적인 배제 없이 총체적인 능력들의 활동이니, 이 활동에서 인간이 인간이 되는 이 활동이어야 한다. 모든 그러한 종류의 특수한 부각 혹은 배제는 우리의 연관에서는 이미 방법적으로 거부되어야 하니, 왜냐하면 그러한 부각이나 배제는 우리의 연관에서는 이미 방법적으로 거부되어야 하니, 왜냐하면 그러한 부각이나 배제는 일반적인 철학적 인간학의 결과들이고 전제들이기 때문이며, 이것들의 구성들에 의해서 우리는, 그것들이 자체들의 기반위에서 어떠한 정당성 혹은 부당성을 가지든, 여기서 영향 받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인간 실존의 규정은, 상이한 측면들로부터 보자면, 감정규정으로서 의지규정으로서 지성규정으로서 이해될 수 있으며, 이 규정은 구체적인 경우에 있어서 심리학적으로 고찰하자면 사실상 정신이기보다는 더 이것일 수도 있다. 그 규정은 사실상 결정적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전체적인 인간의 한 규정이다.(칼 바르트 1, 270쪽)

   

바르트의 유비적이고 매개적인 간접계시의 사유에 나타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의 주심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바르트에 따르면 계시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간접적으로 매개를 통해 신앙의 유비의 방식으로 주시는데(God’s self-giving) 있다. 바르트의 이러한 계시의 유비와 매개에 대한 사유는 하나님의 존재와의 관계가 형이상학적 현존(방법)의 관계이기 전에 근본적으로 선물(진리)의 관계임을 분명히 해준다. 바르트의 존재유비에 대한 비판은 형이상학적 현존의 과잉의 맥락에서 사유와 존재의 관계성을 존재론적 유비의 방식으로 안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의 어려움을 표현해주는 듯하다.“신앙의 유비”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현존의 과잉의 맥락에서 계시사건에서 하나님의 존재의 원초적 선물을 강조하기 위한 논리로 기능하는 것으로 보인다. 존재와 사유의 관계성에 있어서 형이상학적 현존을 근본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선물을 더 근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존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선물의 현존의 사유는 존재의 타자적 현존을 생각하는 사유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의 脫형이상학적인 신학적 현존의 사유는 이성과 사유를 부인하는 권위주의로의 복고를 부추기지 않는다. 오히려 계몽주의적 이성과 사유를 하나님의 존재의 타자성의 현존을 향해 열어젖힌다. 그리고 계몽주의적 이성이 현존의 논리를 통해 사유의 동일성의 이름으로 지우려고 했던 그 타자를 회복시키려 한다.(박형국, 237-238쪽)

   

그러나 브루너는 자신의 의도에 반하여 이와 모순되는 주장으로 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즉, 신앙 없이도, 은혜 없이도 비록 그것이 불충분하고, 불완전하고, 부분적이지만 일반계시를 통해서 신을 알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다. 이러한 자기모순은 그의 변증법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즉, 자연과 은혜의 변증법이 작동하기 위해서 먼저 인간은 자연 속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신 앞에 서 있을 때만 자신이 죄인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은혜 이전의 자연 상태 속에서도 자신을 죄인으로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의 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소유해야만 한다. 만약 인간이 자연 상태 속에서 파악한 신에 대한 지식이 거짓이라면 인간은 자연 상태 속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알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 상태 속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알기 위해 필연적으로 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한다.(오승성, 183쪽)

   

인간이 하나님과 대면하게 될 때, 그곳에는 불가피하게 충돌과 십자가 처형이 있다. 십자가는 거룩한 하나님과 죄된 인간 사이에 있는 만남의 최상의 유일한 사건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는 자기를 신격화하고 자기의 권력을 무한히 확대하는 인간의 모든 미묘한 시도들이 폭로된다. 그것은 특히 종교적 인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원래 죄인은 종교적 인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원래 죄인은 종교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관해 참으로 놀랄만한 사실은 하나님의 순전한 은총과 무한한 사랑이 인간을 자기 기만이라는 그의 의복으로부터 잡아 떼어 놓고, 다시 하늘 아버지의 자녀로서 그의 두발로 서게 하고, 이렇게 참된 인간 존재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의로 그를 옷 입히신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은 이런 절박한 쟁점들 안에서 예리한 변증법적 형식을 취하였다. 그의 날카로운 질문들은 그에게 거룩한 하나님과 죄된 인간, 창조주와 피조물, 은총과 심판, 하나님의 긍정과 하나님의 부정의 대립들을 숙고하게 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바르트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신학과 사색들 안에 있는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였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생각하고, 하나님에 관해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지며, 인간이 하나님 알기를 갈망하고, 그에 관해 말하고 그에 관해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마주 대하고 설 때, 그는 그가 하나님의 심판 법정에 서 있다는 것과 그에게 말을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발견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 관해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다.(T.F. 토렌스, 20-21쪽)

   

「로마서 강해」 제 2판의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극단적인 혁명을 무(無)로 만드는 혁명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를 레닌주의보다 더 극단적인 사회주의로 생각하면 안 된다. 레닌주의 자체에도 문제가 있기 때문에 레닌주의 속에 있는 바르지 못한 요소를 극복하고 철저하고 극단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뒤엎는 혁명이다. 그것은 인간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혁명인데, 곧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혁명이다. 그런 까닭에 악한 국가를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이나. 혁명하고자 하는 노력이나, 모두 옛 질서에 속한 운동일 뿐이지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에 의해 건설되는 나라가 결코 아니다. 인간의 고상한 뜻이나 고상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인간의 모든 행위 역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모든 것을 부수는 심판이고 혁명이다.(김명용, 77-78쪽)

   

첫째, 바르트가 볼 때, 슐라이에르마허가 종교의 본질을 절대의존 감정으로 여기면서, 기독교 신학을 이 절대의존의 감정의 다른 표현인 하나님의식으로 해석하려 한 시도는 신의 절대적 초월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즉 칸트식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에게 a priori하게 주어지는 선험적인 내재적 감정을 통해서 신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절대적인 계시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접촉점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둘째, 죄라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 의식이 불완전한 상태라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죄해석, 따라서 구원은 완전한 하나님 의식의 회복이라는 그의 구원해석은 바르트가 볼 때,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구원 개념과 상반되는 반성서적이며 인본주의라는 문제를 지닐 수 밖에 없다.

즉, 불완전한 하나님의식을 갖고 있는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의식을 갖게 되면 그리스도와 같은 신성을 소유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단순히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론적 유비를 인정하는 정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신성화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이승현, 260쪽)

   

   

2. 민중신학

   

첫째, 해방신학, 민중신학은 사회적 성화를 목적으로 하는 반면 웨슬리의 구원론은 개인적 칭의와 개인적 성화를 강조한다.)

둘째, 해방 신학과 민중신학이 웨슬리 신학과 성격이 맞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이들의 주된 신학적 입장이 바로 ‘신인협력’이나 펠라기우스의 인본주의적 접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론은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 하여 인간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의 중심 사상이 바로 인간이 주체가 되어 사회를 개혁하고 인간의 노력으로 사회를 성화하고자 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철저하게 하나님 절대적, 성서 의존적인 신본주의적 신학을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접목은 웨슬리의 주된 신학적 사상과 전혀 다른 성격이다.(김연희, 161쪽)

   

2-1. 김재준~바르트

   

-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교회에 대해서 장공은 "이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의 거점"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란 것은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뜻일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기독교 문명의 극복이라고 할 것이다. (중략) 그러면서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진정 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하고 공동사회를 사랑으로 화육하는 마음의 왕국을 제공하는 일을 자신있게 감당해 나가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재산, 72쪽)

   

그러므로 교회는 이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의 거점이요, 더 나아가 전선기지이다. 전 우주 만물이 사랑의 공동체 안에 감싸인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범우주적인 사랑의 공동체로 확대된다.

범우주적인 사랑의 공동체는 종말론적인 차원을 갖는다. 범우주적인 사랑의 공동체가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처럼 이 땅에 임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범우주적인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는 완성을 향한 현재 진행형의 과정 가운데 서 있다.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계적 사랑의 공동체, 더 나아가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구현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김원배, 231쪽)

   

그리스도의 사업을 신․인으로서의 그리스도 사업으로 볼 때에는 신․인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나라 건설 사업이 그 핵심으로 됩니다. 악마의 권세를 이긴 메시아의 메시아 왕국 사업입니다. 하느님․인간을 구심점으로 한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조성 사업을 목표로 하고 발전합니다. 신․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인격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격적 신비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신적 신비 또는 비의라 하겠습니다. 이 신․인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는 모든 것이 통전되어 있기 때문에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은 한 사랑의 대상이요, 두 분리대상이 아니게 됩니다. (중략)

사랑은 이웃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웃과 함께 싱싱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이웃을 없는 것으로 여기고 혼자서만 살려고 하면 혼자서도 못 살게 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내 사랑과 이웃 사랑은 공동체적 생명입니다. (김재준, 최대의 계명, 1956.6, 289쪽)

   

그렇다면 기관이나 조직체로서 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김재준은 교회가 기관으로서 직접 사회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간접적으로 사회정치에 참여할 것을 말한다. 곧 첫째, 교회는 국가 사회에 올바른 기독교 정신과 도덕적 기초와 기독교적 양심의 기준을 제시한다. 둘째, 교회는 성령으로 거듭난 양심적인 기독인 지도자를 직접 사회에 파송한다. (임걸 1, 267-268쪽)

   

김재준의 정치적 사회참여 신학의 전통은 한국교회의 통일운동 그리고 통일신학으로 이어졌다. 또한 2천년대 들어와서 '기독교 총선연대' '기독교윤리 실천운동'과 '공의정치 실천연대', '교회개혁실천연대' 등은 기독교 유권자 운동을 결성하여 공명선거운동 또는 낙천낙선운동 그리고 부패정치 추방과 지역감정청산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현재 진보적인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 개혁을 주도하는 정치적 시민사회단체에 기독교인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지원하면서 깊이 관계하고 있다. 이것은 진보적 한국교회가 이미 정치적으로 직접 사회정의와 대안을 제시하는 직접 정치적 사회참여, 곧 직접적인 정치적 사회봉사를 전개하는 시대가 시작됐음을 뜻한다. (임걸 1, 280쪽)

그런데 지금까지의 장공연구는 그의 이러한 유교적 배경에 대해 주의깊게 살펴보지 않았다. 그가 읽은 유교 경전은 무엇이 있는지, 유교의 경전들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했는지, 그 중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어떤 것을 비판했는지 혹은 거부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연구한 논문은 없다. 그리하여 김재준에 대한 대부분의 글들은 김재준의 삶과 신학 형성에 있어 유교적 요소를 간과해 버리거나 오히려 김재준의 그리스도교 개종을 유교에서의 탈출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삶과 신학에서 유교적 요소를 간과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된다. 어릴 때 생리화한 유교적 사유와 습관은 그리스도인이 된 장공에게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문덕, 2쪽)

   

이렇게 지성적이고 이성적인 김재준의 기독교 수용은 천주교의 전래 당시 다소 맹목적인 감정과 신앙으로 천주교를 수용했던 일반 대중과는 달리 학적인 입장에서 기독교와의 만남을 모색했던 남인계열의 실학자들과 통하는 바가 있다. 그래서 스캇 박사는 김재준의 신앙체험 예기를 듣고 "역시 김목사는 학을 통하여 믿게 됐구료"라고 말한다. 이러한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사유 속에서 신학을 접한 김재준은 어릴 때에 동양 고전을 한자 한자 외우듯이 성서신학을 전공하게 되고 역사 비판적 성서해석의 방법론을 수용하고 가르침으로써 한국 신학계의 뜨거운 논제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한문덕, 14쪽)

   

첫째, 공맹의 정치사상과 역사 참여적 신학의 방향이다. 이 둘은 모두 현실 역사를 변혁하는데 관심을 갖는다. 공맹의 사상은 춘추와 전국 시대에 전쟁으로 어지러워진 중국 전체를 잘 다스리고자 하는 데서 발생한 사상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문제나 종교적 신앙의 문제보다는 현실적인 정치와 경제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종공은 공맹의 이러한 정치적 변혁을 위한 노력을 잘 알고 있었다. (중략) 이러한 공맹의 정치사상과 그들의 삶은 바로 장공 김재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하여 공자가 역사의 핸들을 돌리려고 한 것처럼 장공은 전통적인 정교분리의 원칙보다 더 나아가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역사 변혁을 꿈꾸는 역사 참여신학을 형성한 것이다. (한문덕, 88쪽)

   

둘째, 공맹의 정치사상과 역사참여적 신학의 핵심에는 인간회복과 민본의 정신이 함께 녹아있다. 공자의 정치사상은 기본적으로 군자를 만드는 것에 핵심이 있으며 군자란 자기 수양을 하여 남도 이롭게 하는 仁을 실천한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이 지위를 얻어 군주의 자리에 가면 백성으로 하여금 자발적 동의를 얻도록 인치와 예치를 얻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의 정치사상은 이것보다 한발 더 나아가 백성의 자발적 동의 뿐만 아니라 백성과 함께 하지 않고 백성을 위하는 정치가 아니라면 뒤엎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공맹의 정치사상의 핵심은 인간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한문덕, 89쪽)

   

- 유교~기독교~진보

   

그 때 이후, 한국교회는 민족주의, 자유독립운동자들의 은신처, 또는 온상의 구실을 해왔다. 이동희 선생과 같은 독서인을 겸한 순회 전도사가 되어 함남북과 간도, 연해주 등지에 전전하며 전도 겸 독립운동에 종사하였고 여운형씨도 일시 승동교회 전도사로 지냈으며, 3.1운동 직후의 한국교회 강단에서 가장 총애를 받은 설교본문은 주로 출애급기에서 나왔었다. 민족해방, 노예에서, 자유주의에서 건국의 거인 모세가 청소년 동경의 목표였었다.

그리고 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이상재옹, 윤치호 선생, 신흥우 전사등이 대내대외로 미래의 민주대한을 위하여 숨은 유산이 되어 주었던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3.1운동 직후 제등실이 새로 일제로부터 임명된 총독으로 부임하여 소위 문화정치를 한다는 의미에서 헌병을 순사로 대신하고 출판과 언론에 약간의 자유를 주고 해외유학도 조금 허락하고 사립중학교 설립도 한두군데 허락하는 통에 ‘동아일보’가 창간되고 ‘서울’ ‘개벽’ 등 잡지도 나오곤 했다. 교회에서도 기독교 창문사의 창립등올 출판문화에 다소 공헌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은 미구에 다시 돌아왔다. 일본에서 천황절대주의가 날로 강화되고 천황은 직접 통수하에 있는 군벌이 천황권을 농락함에 따라 정치가 군인의 손에 옮겨지기 시작하면서 한국에서의 문화정치도 저절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교회로서의 대사회활동이 차단됨과 동시에 교회내에서는 부흥운동이 전국적으로 파도쳐 흘렀다. 황해도 출신인 김익두 목사는 본격적인 부흥목사로 나선 첫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사회적 진출에 길이 막힌 교인들은 이 부흥위 대중운동에 흥분된 감정으로 타계적인 소망에 쏠려갔다. (중략)

이리 하여 한국교회는 역사참여 거부에서 오는 불만을 역사도피의 신비 상태에서 보충해 보려 하였다. 여기서 자파의 교리체계를 절대화하여 사상적으로 폐쇄 정체된 소위 정통주의 신학이 신자의 지성을 사로잡아 버렸다. (중략)

정통주의 신학에 의한 사상의 동결, 부흥운동에 의한 감정의 승화, 일제 강압에 의한 굴종의 관습, 이것이 해방시에 물려 받은 한국교회의 전통이었다. (김재준 1, 한국교회의 민주참여와 사명, 기독교사상, 1960.6, 64-65쪽)

   

우리는 1930년대 한국교회의 자유주의를 연구할 때에 한국의 신앙과 신학과 교회의 모습이 미국의 그것들과 유사한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있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즉 김재준도 송창근도 모두 불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유교적인 교육을 받고 세속작업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다가 청년 때에 극적인 회심을 하고 예수를 믿고 한국적인 보수주의 교히에 오래도록 출석하였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들이 아무리 기존교회를 비판적인 안목으로 보고 새로운 성경해석의 방법을 소개한다고 하여도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면이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과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까지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사고가 철저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나서 과학과 세속화를 받아들였던 미국의 자유주의와는 사고하는 방식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장동민, 189-190쪽)

   

경찰서 수를 줄이고 교회수를 늘려야 한다. 정치는 그리스도교 이념에서 해야 한다고들 강조하였다. 그때 거기 모인 기독교 청년들은 열광적인 박수와 갈채를 보냈었다. 일제 시대의 압제와 비굴에 지쳤던 한국 기독교인들은 일제 천년왕국이나 이루어지듯 소망에 불탔었다. 저분들이 집권하면 우리나라도 영미등 여러 나라와 같이 기독교적 왕국이 되리라고 좋아하였다. 하나의 하염없는 그리고 나이브한 ‘christian utopianism것이었지만 그때 그들은 미처 거기까지 생각질 못했던 것이다.

미소 공동위원회 때에 기독교청년회도 그 일원으로 거기 참가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결렬되는 때 그들은 처음으로 정치가 감미한 것이 아니라는 실망을 느꼈다. 신탁통치 반대 때에도 그들은 열렬히 이에 참여하여 공산주의자들과 항쟁했다. 구호운동에는 언제나 솔선적이었다.

여운영씨는 좌익에 포로되고 김구, 이승만, 김규식 제씨가 신생 한국의 집권을 노리고 각기 탐탐히 지낼 때 교회청년의 주동분자들은 오히려 김규식 씨 편에 있었다. 그러나 결국 전형적인 정략가라는 평을 듣고 있는 이승만씨에게 정권은 쥐어지고 그가 초대 대통령으로 권좌에 올라 앉게 되었다. 여운형, 김구, 송진우, 장덕수 등 암살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씨에 대한 기대는 별로 퇴색되지 않았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그에게 더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김재준 1, 한국교회의 민주참여와 사명, 기독교사상, 1960.6, 67쪽)

   

- 유교적 정서로 기독교 읽기, 그리고 에큐메니칼

   

장공은 당시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이 개인구원만을 강조했을 때 개인구원만이 아니라 사회구원을 외쳤고. 이 둘이 전체적 구원이라고 강조하였다. 장공은 다음 같이 피력한다. “어떤 신자는 개인구원만을 말하고 전체 구원은 이단시한다. 그러나 전체사회에서 단절된 개인이 없고 개인을 제외한 사회가 있을 수 없는 한, 구원은 전적 행동이다. 예수님이 간단없이 하느님 나라를 설교하고 전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모두 하느님 아버지에게 귀속되는 때 구원의 완성이 온다’는 것이다. 주기도문 마감에 붙은 송영과 묵시록 12장에 있는 ‘세상나라는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고, 주께서 영원히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다’(묵11:15-16) 한 것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 서로 응답하는 구원의 노래요 예언이다.”

장공은 사회구원의 근거를 역사의 주재자인 하나님에서 찾는다.

“역사의 주재자는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그때 그때 역사의 주역은 하느님의 뜻과 선한 설계에 순종하여 무대에서 연출하는 주역이다. 주역이 잘못하면 감독이 딴 사람으로 교체시킬 수 있다.”(김영한, 17쪽)

   

김재준은 어디에서 사회정치참여교회론의 신학적 근거를 찾고 있을까?

1) 창조주 하나님의 세상 주권 : 김재준은 사회정치 참여 교회론의 신학적 근거를 신론적이며 창조론적인 관점에서 찾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 시간과 공간의 창조물에 대한 주인이 되신다.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이 인간을 부르시고 보이시는 곳이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유일한 아들을 세상에 보낼 정도로 그 분이 만드신 세상을 사랑하신다. 따라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에 포함된다. 따라서 정치를 포함하여 기독교인의 책임과 교회 선교의 대상에서 제외될 세상의 분야는 하나도 없다. (임걸, 270-271쪽)

   

그렇다면 1973년 이후 심화된 김재준의 사회참여 교회론의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1973년 이후 심화된 김재준의 사회정치 참여 교회론의 특징은 '책임적 사회정치 참여 교회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책임적 사회정치 참여 교회론'이란 이제 개개의 기독교인으로서 도한 사회적·영적 조직체로서 교회가 직접 사회정치에 기독교적 입장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직접 책임을 지는 교회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책임'아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사회 전분야의 부정의에 대해서 교회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행동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임걸 1, 274쪽)

   

역사의 주인인 인간은 교회를 통하여 예수를 따르고 배워서 결국에는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하는 변혁의 일군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있는 전 세계가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통하여 힘을 모아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義를 이루는 데 하나가 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필요하다고 김재준은 지적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현에는 교회가 '하나'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의 양심과 신앙과 사상도 존경하여 서로 이론을 초월한 그리스도교 사람으로 자신의 씨가 되어 연합하기를 힘서야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하여 세계적인 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명숙, 67쪽)

   

둘째, 김재준에 의하면, 교회는 '선교론적인 차원'에서 볼 때, 본질적으로 '세계적 우주적 공동체'이다. 교회는 세계적으로 다양한 민족, 다양한 사회경제적 계급, 다양한 문화, 다양한 국가와 정치 구조를 초월하는 세계적 우주적 공동체이다. 김재준은 세계적, 우주적 공동체로서 교회가 태생부터 모든 민족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부활한 예수의 선교 명령에서 그리고 태생부터 복음은 공간적으로 전 세계를 선교의 대상지로 삼고 있었다는 것을 아그립바 왕 앞에서 한 바울의 변증에서 그 근거를 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김재준은 교회 자체란 본질적으로 다양한 민족성은 뛰어넘은 공동체라는 근거로는 바울의 기독론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임걸 2, 135쪽)

   

- 교회 공동체 안에 붕당 정쟁 마인드로서

   

배타적인 교파 교회의 결정적인 단점은 개신교 특징인 '다양성 속에 통일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곧 다시 말하면 배타적인 교파 교회는 교회의 다양성도 인정하지 못하고 교회의 통일성도 협소하게 이해하고 이다. 교파교회가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니까 배타성을 띠게 되고 고립주의를 빠지게 되고 독선주의에 빠지게 된다. 교파 교회가 '협소한 통일성'에 있으니까, 이들이 말하는 교회의 일치란 넓어야 교파 교회 내의 '피해 망상적 소극적 일치'를 추구하는 데 그치고 역사적, 공간적인 전 우주적인 교회의 일치성에는 관심이 없다. (임걸 2, 138쪽)

   

우리 한국에 소개된 기독교는 주로 정통주의 신학을 체계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들은 주로 반문화적이며 극히 타계적이어서, 현세 생활은 그 자체에 의미있다는 것도 영생, 속칭 천당갈 준비과정 또는 지옥에의 유예기간으로 간주되어 있었다. 이러한 신학인데다가 환경마저 일제의 전횡으로 한국인으로 역사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전적으로 막혀 버린 것이었다. 의붓아비 홍패메고 춤추는 쑥맥이 아닌 한, 한국인에서 한국인이 할 일이라곤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울분하여 해외로 나가지 않으면 내세복락을 기대하여 기독교에 입교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이런 정경에서의 종교로서는 아까 말한 반문화적, 타계적인 정통주의신학이 제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경향은 타계에의 동경을 더욱 자극시켜서 ‘천당의 기구와 지옥의 온도’까지도 미리 알아보려는 호기심을 가지게 하였다. 이런 미로가 신비와 기적을 미끼로 몽환을 팔아먹는 역사에서의 유리도피를 가져왔으며 이런 것을 기독교는 神聖이라고 오인하게 한 것이다. (김재준, 역사참여의 문제와 우리의 실존, 기독교사상, 1958.3, 487쪽)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교직자의 역사적 사도 전승 문제라든지, 세례에 있어서 침례강요 문제라든지, 조합교회적인 지교회주의라든지 성찬의 형식 문제라든지 아직도 극복하기 어려운 굳은 전통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심정과 사도시대 교회의 본 모습에 좀더 겸손히 또 좀 더 가깝게 접촉한다면 결코 문제가 아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캐나다, 스코틀랜드, 인도 등에서는 이미 연합교회를 갖고 있으며 미국에서도 근년에 착착 연합운동에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에 있어서는 미국의 극소수의 분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들여 한국교회의 최대교파라는 장로교회가 사분오열의 곤경에 빠지게 되었으며 아직도 연합보다는 분열에 열중하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는 세계교회운동을 파괴하기 위하여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행을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다. (중략) 그리고 자유진영에서 자기 의를 과신하는 것이 스스로의 눈을 어둡게 하여 공산주의자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세계교회에서는 공산주의의 악을 지적함과 동시에 자본주의의 악도 지적하여 적극적인 개선과 건설에서 자유를 유지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의 꿈을 능가하는 실질적인 승리를 가져오게 하려는 것이다. 세계교회를 용공으로 볼려는 사람들의 사고방식대로 한다면 UN 은 가장 미워할 용공단체로 규탄을 받아야 할 것이다. (김재준 1, 에큐메니칼 운동과 한국교회, 기독교사상, 1961.4, 125쪽)

   

하지만 한국 교회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보수적이고 근본적인 신학은 오래가지 못하고 1930년에 들어서면서 미국과 일본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인물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물론 1898년부터 1907년까지 한국의 모든 장로교 공의회에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공존해 있기는 했지만,1934년에 일어난 ‘아빙돈 단권주석 사건’은 ‘김영주 목사의 모세 창세기 저작 부인 사건’,‘김춘배 목사의 여권문제 발언 사건’과 함께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를 부각시켰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가 정점에 달하게 된 것은 1947년 4월 장로회 총회에서 조선 신학교 학생 51명이 연서한 진정서가 제출되면서였다. 문제는 앞에서 언급했던 보수주의적 근본주의 신학에 길들여진 한국교회 목회자 후보생들이 “신앙은 보수적이나 신학은 자유”라는 조선신학교의 교육이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더욱이 조선 신학교에서 가르치던 내용 중 문서설을 주장하고, 성서의 권위를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에 이의를 제기했다. 주재용은 이것을 1930년대 성서관 논쟁의 연장으로 성서 무오설과 성서 고등비평의 대립이 재현되는 사건으로 보았다. 총회는 이 사건을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사상이 문제라고 명명하고서 8명으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를 파견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갈등은 김재준의 진술서와 성명서, 이에 대한 박형룡의 비판, 다시 이에 대한 반박으로 김재준의 “편지에 대신하여”가 차례로 발표되면서 문제가 확산되었다. 결국 총회는 1948년 서울에 설립된 장로회신학교와 조선신학교를 통합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신학교 측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1952년 제37회 총회는 김재준의 면직을 결정했다. 결국 1953년 한국신학대학에 모여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분립되어 나갔다.(정지호, 14-15쪽)

   

장공은 외세에 의한 분단의 원인을 제대로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의 길로 연결된 장공의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는 지금 여기에 있는 후배들의 몫으로 남았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죄인을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 민족의 분단을 화해와 통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의 실현일 것이다.(이재산, 80-81쪽)

   

그 밖에도 ‘모순에 처한 인간’, ‘계시와 이성’ 등이 계속 세계에 퍼져 가고 있다. 그러나 그와 바르트 사이에는 자연 신학의 소재에 관하여 격론이 벌어졌고, 따라서 균열을 일으키고 말았다. 브룬너는 말하기를 ‘계시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알 도리가 전혀 없다면 인간을 복음을 듣기 전에는 죄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인간에게도 하나님 자신의 증거를 남기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르트는 단연 ‘아니다’하고 그 유명한 ‘Nein'을 써냈다. 바르트는 말하기를, 부룬너는 성령의 교리를 상실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과 말씀하시기를 원하실 때, 극 인간과의 접촉점을 만드시는 이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이가 성령이신 까닭이다.’하고 응수한 것이었다.

이 ‘Nein!' 이 두분의 입장을 갈라 놓은 다음,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우위에는 변함이 없으나, 학문적 노작에 있어서는 각자의 계통적 조직 신학을 저술하기에 여념이 없다. (김재준 1, 신정통주의의 역사적 고찰, 십자군, 1960.4. 45쪽)

   

   

2-2. 에큐메니칼, WCC

   

(1) WCC

   

가장 시급한 과제는 초국가적 기독교인의 친교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여러 영역으로부터 기독교인의 내적 일치를 강화시켜 나라사이의 평화와 화해에 기여케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적인 기독교 대회를 평화가, 회복되기 이전에라도 개최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이런 아이디어는 개신교 세계의 곳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 모든 실마리를 한 손위 쥔 사람은 죄더 블롬이었다. 그는 몇 년 동안 국제적인 기독교 대회를 소집케 하려는 모든 시도에서 추진력을 발휘하였다. (이형기, 188쪽)

   

19세기 후반 전체를 통해서 기독교적 일치의 추구의 진전은 동일한 신실성을 가지고 기독교인들의 일치를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신학적 차이에 의해서 조건지어졌고 방해를 받았다. 여러 신학학파들은 기독교적 일치와 일치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해서 서로 다르게 이해함으로써 에큐메니칼 진전을 저해했다. 우리가 이미 논한 바, 17-18세기에는 기독교적 일치에 이르는 두 가지 이상이 항상 긴장관계에 있었다. 하나는 진리에서의 일치요, 다른 하나는 기독교 친교에서의 일치였다. 이 둘은 서로 모순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어떤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접근방법이 전개될 것이다. (이형기, 78쪽)

   

   

기독교인들의 일치에 대한 결과물은 훗날 생활과 실천운동에서 나타날 일치 개념의 본질적 특징을 나타내 보였다. 우선, 이 대회는 기독교인들의 일치를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일치로 정의하였다. 이 일치란 그 어떤 외적인 것,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무엇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자신의 행위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일치의 중심 그것이다. 그것은 모든 지상적인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다. 둘째로, 이 대회는 기독교적인 일치를 다양성 속의 일치로 특징지었다. 이 대회가 지향하는 새로운 일치운동은 여러 교파의 독립성을 결코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각 교파의 본성과 특수과제는 역사적으로 조건지어진 것이다. 그것은 획일적 일치가 아니라 교회들(교파들) 사이의 자유로운 협력을 추구한다. 셋째로, 기독교적 일치란 삶과 선포에서 일치다. 일치란 일치를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의 여러 영역에서 기독교적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형기, 191쪽)

   

- 약자를 위한 WCC의 인식

   

WCC가 인식하는 가난한 자들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압제의 희생물이며, 또한 그들을 위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에 대한 지식과 그 지식을 가져다주는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해방을 종종 박탈당해 온 사람들이다. WCC는 어린 아이들, 장애인들, 여성들을 가난의 잔인함과 절망을 가장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 속의 우선적 가난한 자들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에 부응하는 성실함으로 가난한 자를 돌보고 그들의 상황을 바꾸어놓으려는 교회의 노력이 세상에서 전개되는 선교의 전체성과 보편성에 성실히 반영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 내쫒김을 당한 자들, 과부들, 고아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편들어 주시는 것은 곧 안일한 기독교인들과 교회에 대한 질타이며, 회개와 정의를 위한 새로운 헌신에 대한 명령이라고 하는 명제는 WCC의 ‘정의’에 대한 개념을 보다 명확하게 구체화시키고 있다. ‘정의’를 추구하는 것으로서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란,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며 그들의 편에 서서가난을 야기 시키는 조건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과, 이러한 부당한 조건들을 제거하여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위한 새로운 국제질서를 위한 투쟁과, 이에 상응하여 기꺼이 교회 자신의 구조를 변혁하려는 자세로 교회가 권세자들에게 인간의 삶을 보다 인간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의 권력을 사용하도록 촉구함으로써‘해방’이라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까지를 의미한다.

가난한 자들이 개인적 비참함에서 해방되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갱신만을 위한 투쟁을 지향한다면 그것은 육체와 영혼, 개인과 사회로 이분화 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WCC의 사회정의와 관련된 주제들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선포에서 영적인 복음과 물질적 복음 모두를 하나로 만드는 노력을 기울임으로서 섬김 없는 말씀은 공허하고, 말씀 없는 섬김은 힘이 없음에 대한 인식을 보다 강화시키고 있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과 불의한 세력에 압제당하는 사람들의 대변인이 되어야 하고 투쟁해야 하는 이유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불의한 세력을 고발하고, 불행당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죽음 가운데서 삶의 희열을 증거하며 오늘의 시대에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는 것은 죄와 권세 그리고 착취와 인간성 상실에 대한 하나님나라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김한경, 52-53쪽)

   

JPIC에서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기독교인이 기독교인 됨과 교회가 교회됨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만드시고 화해 시켜주시고 평화를 심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공로 때문인 것을 깨달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화평의 도구인 것을 인식함에서 비롯되었다.

불의한 인간과 불의한 사회 안에서 갈등과 분쟁과 분열을 극복하고 평화를 심는 역할은 생명의 공존과 참여를 가능케 하는 이 시대 교회의 참으로 귀한 선교사역이다. 핵전쟁의 위험과 무분별한 자연 착취와 살생과 파괴 앞에서, 더 이상의 생명의 파괴를 막는 교회의 임무는 전쟁과 폭력과 테러를 근절시키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이다. 그러나 교회 안밖에는 전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방해하는 많은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으므로 교회는 이러한 방해물들에 대한 방안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된다.(김한경, 56쪽)

   

WCC는 참 하나님이 참 인간이 되신 사건은 우리에게 3가지 의미를 전달한다고 고백한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아버지와 영원히 함께 계시며 하나의 본질을 공유하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예수의 신성에 대한 여러 도전이 있었지만 WCC는 참 하나님으로 머물러 계시면서 또한 참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예수의 신성에 대한 여러 도전이 있었지만 WCC는 참 하나님으로 머물러 계시면서 또한 참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또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은 가난하고 소외당한 자들과 함께 하며 당신의 사랑을 보이셨고,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다. 이러한 동행을 통해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 현존 및 고난을 경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다 깊이 있게 하나님을 인식 할수 있게 되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완벽한 계시이자,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험 사건이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 완전히 참다운 인간성을 체현하며 우리가 마땅히 닮아가야 할 모습과 우리 자신의 소중함을 가르치셨다.(육윤수, 40-41쪽)

   

이와 같은 차별은 소외를 불러 일으켜 나와 너를 구분하며, 그 간격을 벌려 놓는다. WCC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평등하기 때문에 교회가 앞장서서 차별 때문에 일어나는 소외를 이 땅에서 몰아내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앞서 살펴본 WCC의 구원론에서 나타난 구원의 대상은 특정한 인종, 연령, 삶의 수준을 넘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러기에 교회는 구원의 대상인 모든 사람들을 동등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바라보고 동일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의무를 가진다.WCC는 교회의 본질과 교회 본질에 대한 깊은 토론이 이루어진 1차 총회에 발표된 제3분과 보고서에서 교회와 사회의 관계성을 이야기 하며 보다 다양한 사회의 구성원이 모여 예배하는 공동체가 그렇지 않은 공동체 보다 더 큰 영향력을 사회에 흘려보낼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교회가 먼저 교회 안에 있는 인종차별적 시선과 제도들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2차 총회 제 4분과 보고서는 당시 전쟁의 여파로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향한 교회의 구제사업이 ‘근원, 인종, 혹은 종교에 관계없이 취해져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문제가 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국가도 교회와 동일하게 인종, 성, 언어, 종교에 관계없이 인간의 본질적 존엄함과 가치,기본권을 인정하고 배려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육윤수, 58쪽)

   

그런데 보수적 복음주의 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오해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정작 에큐메니칼 운동을 추구하는 교회도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정체성을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분석된다. 첫째, 에큐메니칼 운동은 역사적으로 ‘신앙과 직제’(Faith & Order)와 ‘생활과 실천’(Life & Work)과 ‘선교와 전도’(Mission & Evangelism)라는 세 흐름의 연합 운동이었다. 그래서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는 교회도 세 흐름을 종합할 수 있는 안목을 갖기가 어려웠다. 둘째, 에큐메니칼 운동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정해 놓고 출발하지 않았다. 사실 WCC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라는 최소한의 기초 위에서 교회일치를 추구하는 대화의 장(포럼)에 불과하다. 신학적 결정은 언제나 회원 교회의 몫이다. 신학적 이슈를 연구하도록 위임받은 신학자들이 연구하고 위원회가 보고서를 만들고 WCC 총회가 이를 검토하고 승인한다. 그러나이 보고서를 수용할 것인지 여부는 회원 교회가 결정한다.(송인설, 310쪽)

   

에큐메니칼 운동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교회에 대한 논의를 보다 더 심화시켰다. 우선 ‘신앙과 직제’는 교회 일치에 대한 이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52년 룬트 제3차 ‘신앙과 직제’는 그 동안의 비교 교회론적 방법을 극복하고, 이미 교회 안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주어진 일치’(a God-given unity)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1961년 뉴델리 총회는 교회일치와 관련하여 삼위일체의 사랑을 교회 일치의 근원으로 보았다. “성령의 일치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든 인간과 피조물을 위해 바라시는 일치의 원천이요 목표이다.” 그리고 뉴델리는 교회 일치가 ‘각 지역의 모든 그리스도인’(all in each place)의 ‘온전히 헌신된 교제’(fully committed fellowship)로 가시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WCC의 유기체적 일치 개념이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에게 점차 비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1975년 나이로비 총회는 ‘협의회적 교제’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나이로비는 ‘진정으로 연합된 지역 교회들의 협의회적 교제’(a conciliar fellowship of local churches)를 일치 개념으로 제안했다. 협의회적 교제는 분리되어 있는 교회들이 때때로 공동의 관심에 대해 권위 있게 말하기 위해 협의회에서 함께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송인설, 326쪽)

   

1910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WMC)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보편성을 찾아 윤리적인 하나님 나라 건설을 선교 개념에 포함시킴으로서 18-19세기 경건주의적 복음주의 전통과 함께 20세기적 선교의 개념을 확대시켰다. 이것은 명실공히 '하나님의 선교'를 예견했다고 볼 수 있다. 1928년 예루살렘 국제선교협의회(imc)는 에딘버러의 선교 개념에서 한발 앞서 나가 사회와 역사를 변혁시키는 것을 포함하는 복음 선포를 주장하면서, 교회의 대 사회적 책임을 선교 개념에 포함시킨다. 여기에서 인종과 제3세계의 문제도 처음으로 등장한다. 1938년 탐바람 국제선교협의회(IMC)는 교회의 정체성 확립에 몰두하고, 복음 이해가 삼위일체적 틀 안에 들어오면서 하나님의 나라 실현과 연결된다. 하나님의 선교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1947년 휫비 국제선교협의회는 복음이해를 소망없는 세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부활을 선포하는 기독론적 이해에 한정 지우고 있다. 이는 이전의 논의에서 후퇴한 것이지만, 성육신 신학에 바탕을 둔 사회참여를 부르짖는 1989년의 산 안토니오 세계 선교와 전도위원회를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1952년 빌링겐 국제선교협의회(IMC)는 탐바람까지의 선교전통을 이어받아,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 위하여 이 세상 속으로 파송되었다고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교회를 선교 공동체로, 하나님의 선교의 대행자로 봄으로써, 하나님의 선교라는 틀안에서 교회론과 윤리학이 만나는 그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해도 좋을 듯 하다. 1954년 에반스톤 세계교회협의회는 빌링겐 국제선교협의회의 결과를 충분히 반영하면서도 한걸음 더 나아가 삼위일체론과 종말론의 틀을 가진 하나님의 선교라는 패러다임의 선교신학을 마련했다.

1961년 뉴델리 세계교회협의회는 지틀러의 우주적 기독교론에 근거하여, 복음과 기독론을 인간 실존의 역사개념을 넘어서서 창조세계에까지 관련시키고 있다. 또한 이때 국제선교위원회가 세계교회협의회에 합류함으로써 선교가 일치 및 봉사에 더욱 가까워 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1968년 웁살라 세계교회협의회는 1960년대 일련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여 창조와 생명보다는 역사에 대한 관심에 집중함으로써 그간의 하나님의 선교에 절정에 도달하였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교회-세상이라고 하는 패러다임이 '하나님-세상-교회'라고 하는 패러다임으로 바뀌었다.(정성한, 25-26쪽)

   

암스테르담 총회 이후 WCC의 선교론은 복음주의 선교관에 지나쳐 이른바 '하나님의 선교' 신학을 형성하게 된다. '하나님의 선교' 신학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전 세계 모든 선교지에서 철수하게 되자 전통적인 선교가 어려워지게 되었고, 특히 1949년 중국의 공산화는 세계 최대의 선교지를 상실케 했다. 그러자 해외 선교외에 새로운 현장 선교의 개념이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2)WCC와 IMC의 선교학자들이 점차 보편구원설의 경향을 보이게 되었기 때문에,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복음의 핵심이 깨어지게 되었다. 3) IMC 지도자들은 전 세계 모든 곳에 교회가 이미 충분히 세워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해외 선교의 필요성이 줄어들게 되었다. 4) 서구 기독교가 비 서구 기독교 세계에 대해 식민주의와 양차 대전에 대해 갖는 죄책감 때문에 좀더 적극적인 선교를 주저하였다. (배본철, 106쪽)

   

- 한국 민중운동(민주화운동)과 함께 한 WCC

   

통일문제는 종래 정부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독교계는 통일문제를 민간차원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1974년 초, 기독교청년협의회 회원 약 3천여명은 '통일을 기원하는 예배'를 드린 후 가두데모를 감행하였다. 통일문제로 데모를 감행한 것이다. 1976년 3월 1일에는 '명동사건'에서 '민주구국선언서'가 발표되었는데 그 선언서에서는 민족통일의 긴급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국은 처리과정에서 이 문제를 간과해버린 채, KNCC 등 사회참여세력을 용공으로 몰아세우려 하였다. (이만열, 141쪽)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남북교회는 1986년 부터 2년 간격으로 세 차례에 걸쳐 스위스 글리온에서 만나게 되었다. 남북교회의 만남은 1986년 9월 2일부터 5일까지 스위스 글리온에서 세계교회협의회 국제문제위원회가 주최한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의 성서적·신학적 기반'이라는 주제의 세민에 참석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제1차 글리온 회의'로 불려지는 이 만남은 '조선기독교도 연맹'의 4인 대표와 WCC 회원교회 및 대한민국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대표하는 6인대표단을 포함한 22명이 참석했으며, 악수와 포옹을 나누고 교회의 일치와 인류의 일치를 상징하는 표징으로서의 성만찬도 이뤄졌다. (이만열, 143쪽)

   

1975년 제네바회의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포함, 이런 문제들을 협의하기 위해 민주동지회 동지들과 한국 민주화를 지원하는 미국과 독일․일본 등의 이름난 인사들인 에밀리오 카스트로, 나이난 코쉬, 죠지 토드 같은 WCC 간부들이 함께 모였다. 이 회의는 1975년 11월 WCC 세계선교위원회에 의해서 열린 한국문제에 관한 모임과 같은 형태, 같은 목적을 가진 모임으로 이번에도 세계선교위원회 디렉터 에밀리오 카스트로 박사와 그의 동료들의 지원을 받아 모였다. 이 회의를 준비하면서 WCC는 국제문제위원회 디렉터 레오폴드 니일루스와 세계선교위원회 디렉터 에밀리오 카스트로 명의로 회의 참석 예상자들에게 서신을 보내 최근 남한에서의 상황변화에 따라 한국 및 세계교회의 한국문제에 관심 있는 지도자들이 1975년 제네바회의와 같은 모임이 다시 개최되기를 원하고 있다면서 이 회의를 알렸다. 이 회의의 의제는 독일교회도 협력해 주었으며 후일 독일대통령이 된 바이제커 박사, 베를린교구의 샤프 주교도 참석하였다. 바이제커는 기민당의 고위급 인사 및 독일교회 대표의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이 모임의 의제는 토론의 전반적인 콘텍스트를 제공하는 한국측의 주제발표, 한국교회 및 기독교인들의 민주화투쟁에 대한 신학적 성찰, 한국과 일본․독일․미국 사이의 관계에 대한 사회과학자들의 발표, 에큐메니칼 전략 및 실제적 협력을 위한 구체적 문제의 토의 등이었다. 샤프 주교는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의 민주화투쟁의 신학적 의의”(The Theological Significance of the Democratic Struggle of the Korean Churches and Christians)라는 제목의 발표를 맡았다. 동경대의 사카모도 요시카주(“Japan and Korea in a Macro-Historical Perspective”), 그레고리 핸더슨(“American-Korean Relations and the Korean Dilemma”)도 지역적 관점을 발표했다. 이 회의는 박정희 사망과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이라는 상황 변화 가운데 열린 회의라서 전체회의 주제는 “한국의 새 사태와 한국교회의 자세”였다. 이 모임에서 중요하게 토의된 것은 민주화운동의 이념을 어떤 방향에서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 회의는 “기독자 민주동지들은 독점자본주의적 체제와 공산독재체제의 비리와 모순을 지양할 수 있는 제3의 이념의 가능성을 모색하여야 한다”는 합의에 도달했다.(김흥수, 212-213쪽)

   

   

이 시기 민주화․인권운동의 신학적 근거를 최초로 제공한 것은 “1973년 한국기독교인 선언”이었다. 이 문서는 일본에서 작성되어 비록 국내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으나 세계 교회에 한국교회의 고난을 알리고 연대를 호소한 사건이었다. 이 문서는 유신을 국민에 대한 반역으로 규정했고, 기독교 사회참여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국민의 요청이고, 교회의 역사적 전통에 근거를 둔 것으로 해석했다. 또한 민주주의 부활을 위한 국민적 연대, 눌린자와 가난한 자와와 연대해야 할 교회의 책임, 세계 기독교인들의 기도와 연대를 호소했다.

1973년 12월 말부터 확산되어가는 개헌 운동을 두려워 한 정권은 1974년 3월말부터 학생들을 대량 검거해서 그해 4월 ‘전국민주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해서 발표했다. 이 사건은 1,024명을 조사하고 203명을 구속하고, 비상 군법회의에서 183명에게 무기징역고 사형을 포함한 실형을 선고했다. 기독교 지도자들로서 윤보선, 지학순, 박형규, 김찬국, 김동길, 이직형, 안재웅, 정상복 등이 구속되었고 이 사건으로 KSCF 실무자 26명이 전원 투옥되었다. 다행이 신구교의 성직자들이 학생들과 함께 투옥됨으로써 정권은 학생들을 용공으로 매도하지 못했다. 결국 박정권은 국제여론에 밀려 대다수의 학생들을 석방했지만, ‘인민혁명당’관계자 8명을 사형시켰다.

민청학련 사건은 민주화운동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 민주화․인권운동이 학생, 언론계 등 각계각층으로 확신되어, 1974년 11월 27일 민주회복국민회의가 결성되었다. 2) 세계교회와 세계 인권단체의 관심을 한국으로 끌어모았고, 박정권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 3) KSCF 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교단 내 기독청년들이 사회참여 역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정병준, 330쪽)

   

민주동지회는 세계교회들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70년대 이후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독일, 일본, 미국 교회들 및 WCC의 지원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런 협력 및 지원관계는 민주동지회의 1975년의 제네바 회의나 1981년의 밧볼 회의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은 한국교회 자체의 운동이기도 하지만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과의 밀접한 관계에서 성사되어 왔다는 것을 뜻한다.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과의 밀접한 관계는 민주화운동뿐만 아니라 통일운동에서도 유지되어 왔으며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들을 연계시켜 준 것은 민주동지회 회원들이었다. 이 점에서 이 조직은 민주화운동 단체로서의 직접적인 투쟁보다는 국내의 민주화운동을 세계교회들에게 소개하여 연대의식을 갖게 하기 위한 결성 당시의 목표에 충실하였다. 잘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기독교인으로서의 동지적인 결속과 국제적인 활동으로 민주동지회는 국내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강력한 지원자 역할을 한 조직이었다.(김흥수, 220-221쪽)

   

1972년 7월 7일 WCC 총무 Eugene Carson Blake는 남북의 두 정상에게 7·4남북 공동 성명을 환영하는 담화문을 보낸다. 내용은 1972년 7월 4일 양 정부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성명서에 대한 격려의 글이고, 화해와 평화를 추구하는 두 나라의 정치적 의지를 담고 있는 이번 전례(前例)가 세계 속에 존재하는 분열의 힘 가운데 특별히 환영되어질만한 일일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1973년 유엔 산하 세계보건기구에 가입하여 제네바에 북한 대표부를 구성한 북한은 그 후 제네바 유엔사무국 북한 대표부를 통해 WCC에 두 통의 편지를 보낸다. 한글로 쓰인 이 두 통의 편지들은 각각 1974년 2월 2일과 2월 3일 작성된 것이지만 제네바의 북한대표부가 영문 번역문을 첨부해 제네바에 있는 세계교회협의회 본부에 이 편지를 전달한 것은 그해 7월 초반이었다. 편지의 수신인에는“세계교회리사회 서기장 유진카손블례이크에게”로 되어져 있었고, 보내는 이는 “조선기독교도련맹 중앙위원회”였다. 아마도 1972년 7월 7일 WCC총무 Eugene Carson Blake가 남북의 두 정상에게 보낸 ‘7·4남북 공동 성명을 환영하는 담화문’의 답장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 편지의 내용은 먼저 WCC가 7·4공동성명을 환영한데 대해 감사하고, 그 다음 남한정부가 파쇼적 탄압을 감행하고 있다는 것, 이 일로 민주인사들과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이 고난당하고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WCC가 남한 민중과 종교인들의 투쟁을 지지 성원하여 줄 것을 부탁한다는 것이었다.(강혁, 27쪽)

   

1981년과 82년 연이어 열린 ‘북(北)과 해외동포 기독자 대화’는 남북교회가 화해와 용서라는 생명의 강을 향하여 나아가는 디딤돌이었다. 첫 옹알이가 쉽지는 않았지만 많은 방해와 견제 속에서도 남과 북의 교회가 함께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 세계에 보여준 사건이라 하겠다. 하나님은 이제 그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시기 원하셨다.‘제 2차 북(北)과 해외동포 기독자 대화’가 헬싱키에서 마친 이듬해인 1983년 7월 24일부터 8월 10일까지 날마다 약 4.500여명의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밴쿠버 몰려왔다. 이는 세계교회협의회 제 6차 총회 때문이었다. WCC는 이번 총회를 통하여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JPIC)을 선언하고 이 일을 위해서 전(全)세계회원교회가 함께 협력하기로 결의하였다. 특별히 JPIC가 가장 필요한 곳이 바로 동북아라는데 모두가 인식을 같이 했다. 이는 20세기 초 서구 열강의 탐욕 아래 나라를 잃은 고아의 민족이요, 강대국의 이념의 전장으로 그 가슴에 한(恨)을 품은 지아비를 잃은 과부 같은 민족이요, 매일의 삶 속에서 미움과 분노의 독(毒)을 품어내는 제 집 잃은 나그네와 같은 민족이 바로 남과 북이었기 때문이었다.(강혁, 47쪽)

   

(2) 에큐메니칼

   

1957년 제42회 총회에서 “친선과 사업협조에만 참여하고 합동에는 반대한다”는 WCC 가입 문제에 대한 지지자와 반대자의 절충안이 공식적으로 결의되었지만 양측의 입장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더 벌어지기만 했다. 그 원인은 ‘3천만환 사건’때와 동일한 양상의 세력 간 파벌․정치적인 문제들 때문이었다. 또한 이 무렵, 미국 교회협의회(NCC) 주최로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세계질서연구회의(WOSC)에 참석한 500여 명의 미국 에큐메니칼 개신교 지도자들이 중공의 승인과 UN가입 및 공산 국가와의 공존을 미국 정부에 건의하고 그 선전비로 3,500만불의 거액을 사용키로 했다는 소문은 WCC가 용공단체라는 교회의 의혹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빨갱이’라는 말만 들어도 패닉현상을 일으키던 시대에 WCC가 용공단체라는 의혹은 에큐메니칼 세력에 대한 치명적 불신감을 조장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이 결정적으로 반목하게 되는 계기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것은 1959년 경기노회 총회 임원선거였다. 복음주의 진영은 에큐메니칼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고, 총회 임원선거를 앞두고 에큐메니칼측의 득세를 저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복음주의 진영이 결국 패배하면서 신학교 이사회와 총회의 주도권을 에큐메니칼 진영에 빼앗기게 될 상황에 처하게 되자 비신사적인 모습을 노출하기 시작했다. 복음주의 진영의 장로들인 박희몽․김자경이 에큐메니칼은 용공, 신신학, 단일 교회운동이라 고함을 치며 소란을 일으켰던 것이었다. 결국 장로교는 통합, 합동의 완전한 둘로 나뉘어 신학교의 분열과 각 노회 및 교회들의 분열까지 감수해야 했다. 이후 교회 안팎에서 갈라진 교회에 대한 재통합 여론이 일자 양측이 교단 통합안을 마련하기도 했으나 양측이 제시한 통합안은 서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항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었고, 중재를 위해 선교사들까지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교단 통합의 노력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이지영, 69-70쪽)

   

   

에큐메니칼 운동은 항상 세상 전체에 대한 시각을 갖고 있었다. 사실‘오이쿠메네’(oikoumene)가 문자 그대로 ‘인간이 살고 있는 땅 전체’(the whole inhabited earth)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에큐메니칼 선교 운동은 세계 전체를 선교의 장으로 받아들였다. 1910년 에든버러는 교회의 선교를 ‘복음을 비기독교 세계에 전달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세계 전체에 대한 복음화를 꿈꾸었다. 1928년 예루살렘 IMC는 통전적 선교개념을 발전시키면서 사회적, 산업적, 경제적, 인종적, 국제적 관계 등을 포함하여 인간 삶의 모든 관계를 교회의 선교적 과제로 인정했다.

생활과 실천’은 처음부터 세계 문제에 대해 일치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생활과 실천’은 제1차 세계대전의 위기 속에서 평화 문제에 헌신했다. 1925년 스톡홀름 대회는 사회적 기독교의 좌절과 제1차 세계대전의 아픔 속에서, 교회가 복음을 ‘인간의 삶의 영역 즉 산업적, 사회적, 정치적, 국제적 영역’에 적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1937년 옥스퍼드 ‘생활과 실천’은 ‘교회와 사회 공동체와 국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교회뿐만 아니라 시민 사회 공동체와 국가의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했다. 옥스퍼드는 1929년 세계 대공황과 1930년대 전체주의 정치 체제의 출현 이후 세계의 문제를 논의했다. 옥스퍼드는 특정 사회 체제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하고, 권력에 한계를 두어야 하고, 사회 제도와 경제 구조와 정치 체제의 상대적이고 부분적 기준으로서 정의의 원리를 주장했다. 옥스퍼드는 또한 인종주의를 단호하게 비판했다.

1948년 암스텔담 총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재건과 평화와 나눔과 구조의 문제를 논의했다. 암스텔담은 또한 세계 질서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양극 체제로 변화되는 과정 속에서, 책임지는 자유와 책임지는 권위를 중심으로 ‘책임적 사회’의 원리를 제시했다.(송인설, 317-318쪽)

   

2-3. 자유주의 신학

   

- 펠라기우스주의

   

펠라기우스의 인간관은 주어진 자유의지를 따라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을 말한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그리고 인간은 책임이 있다. 하나님은 입법자이며, 심판자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을 그들의 행위에 따라 상과 벌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을 외모로 보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 특별히 다른 이에게보다 더 은혜로 임하는 일이 없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불공평하게 대하는 일이 없다. 또한 누구에게나 할 수 없는 것을 명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명령의 사실이 이미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든지 뜻만 가지다면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을 행할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면 사람이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주셨을 것이다. 할수 없는 일을 하라고 명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요, 할 수 없는 일을 못하였다고 벌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을 인간이 행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심판에 있어서 각 사람의 공로만을 보신다. 각각 행한대로 받게 되는 것이다. 결국 펠라기우스의 인간론은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며, 자유의지로 선행을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죄가 없을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최규희, 9쪽)

   

어거스틴이 묘사한 바에 따르면,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들의 공로에 따라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슥1:3)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에게로 돌아서는 것이 공로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우리 안에 주셨고,그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대하서에서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대하15:2)를 인용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들의 공로에 따라 주어진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문사라, 15-16쪽)

   

펠라기우스의 교리 개념에서 모든 것은 자유의지라는 원칙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유의지는 펠라기우스의 죄와 은총론을 결정짓는 기본 개념에 속한다. 펠라기우스에게 있어 선뿐만 아니라, 악도 결정할 수 있는 완전한 능력으로서의 자유의지는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선에 해당한다. 인간이 악을 택할 자유가 있을 때 자유가 진정한 자유가 되게 하며, 선을 더욱 선하게 만든다. 악을 택할 자유를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는 두드러지게 되고, 인간이 선을 행하는 것은 강요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판단하고 원하고 행하는 자유의지에 놓이게 된다. 그럼으로써 선한 행동의 자발성이 보장된다. 또한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기 때문에, 그 결정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한 행동은 참으로 칭송을 받을 수 있는 반면, 악한 행동은 행위자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 결정했기 때문이다.(권진호, 37-38쪽)

   

-알미니우스주의

   

알미니우스의 선행적 은총은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지지자들이 만든 '항의자의 5개 조항' (the Remonstrant Articles)에 잘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여기서 선행적 은총이 양심과 자유의지의 회복이라고 보았다. 1.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도록 무능한 인간이 되었다. 어떤 선을 행하거나 구원받은 신앙을 가지려면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또한 인간이 타락했지만 선행적 은총(prevenient grace)에 의해 양심과 자유의지가 회복되었다고 믿는다. 4. 은혜는 불가항력적이 아니다. 성령의 영향의 보편으로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자유의지에 의하여 은혜를 거부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선행적 은총의 자극에 의해 회복된 자유의지가 효과적인 은총(efficient grace)과 협동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믿음과 자유의지가 다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알미니우스는 자유의지의 회복과 양심의 회복을 선행적 은총으로 보았다. 그리고 성령은 바로 이 선행적 은총의 수혜자이다. 어거스틴은 믿음마져도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알미니우스에게 믿음은 무엇인가?믿음이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선행이나 공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부자와 거지의 예를 들어 말한다. 부자가 거지에게 필요한 것을 줄 때에 팔을 내미는 것, 그것이 믿음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공적이라고 할 수 없다.(윤동철, Ⅴ. 알미니우스의 선행적 은총 단원 중)

   

   

   

첫째, 칼빈주의가 인간의 전적 무능력 또는 전적 부패를 주장하는 데 대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인간의 능력을 인정한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이 타락하여 오염되기는 했지만 전적으로 무력한 상태가 아니며, 인간이 회개하고 믿을 수 있게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을 한다고 말한다. 즉, 인간은 자유의지를 소유하며 영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이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선택과, 어떤 이는 영원한 죽음으로의 유기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공포스러운 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예정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라는 칼빈주의에 대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조건적인 예정을 말한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인간을 선택하고 계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끝까지 신앙의 인내를 하는 자들은 구원을 하고 불신자와 회개치 않는 자들은 정죄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개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은 예지에 의해 기초를 두고 있으며, 선택은 인간이 행하는 것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며 그것에 의존되어 있다. 오직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간의 믿음에 의해서 구원을 얻도록 선택되어질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따라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으로 예지한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인 구원은 죄인이 하나님에 대한 선택이 아니고 죄인이 하나님을 선택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선택자들만 구원하려는 제한된 구속이라는 칼빈주의에 대해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보편적 구속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셨지만 오직 그 분을 믿는 사람들만이 구원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이 믿는다는 조건위에서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오직 인간이 “선택받은 자만을 구원하려고 의도되었으며 필연적으로 유기된 자들은 전혀 은혜가 없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제한된 선택을 반대하였다.

넷째, 칼빈주의에 의하면 성령의 부르심은 불가항력적이어서 인간이 거절할 수도, 거절될 수도 없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이를 거부하고 효과적으로 성령을 저항할 수 있다 라고 한다. 즉, 성령께서 복음의 초청에 의해서 외적으로 부르심은 모든 사람을 내적으로 부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죄인을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데에 그가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 아니어서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자유의지로 거부할 수도 받아 들일수도 있으며 선행적 은총에 의해 회복된 자유의지가 효과적인 은총과 협동할 수 있다고 한다.

다섯째,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의해 선택받고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으며, 성령의 의해 믿음을 부여받은 모든 자들은 영원히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한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믿음 안에서 지켜지며 그로 인해 끝까지 견인한다는 교리이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시험을 견디어 내고 막아내는 것은 성령과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통해서 가능하다. 어떤 사람들은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함을 얻는다고 주장해 왔는데 그 말은 죄인이 한번 중생하면, 그는 결코 잃어버린바 될 수 없다고 하는 의미이다.(동영화, 44-45쪽)

   

그리고 이러한 자유의지의 개념과 함께할 수밖에 없는 다른 개념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충분히 저항할 수 있는 은혜라는 것이다. 즉, 은혜는 칼빈주의 예정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아닌, 자유의지를 통하여 충분히 저항할 수 있는 은혜란 사실이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이라면, 자유의지의 역할은 축소되며 그로 인해 역시 칼빈주의 예정설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다시 일으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로, 이 두 개념으로 인하여 한 가지 사실을 더 알 수가 있다. 믿음을 가진 이후에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저항 할 수 있기에,자유의지를 통하여 믿음을 버릴 수 있는 것이며, 그로 인해 다시 멸망의 자리로 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알미니우스는 인간의 책임이란 개념을 사용함으로 신적 행위의 극대화로 인한 오류에서 벗어났으며, 충분히 윤리적일 수 있었다.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도 인간의 책임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유기하시는 것에 있어서는 분명한 인간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즉, 부정적인 면에 있어서는 인간의 자유의지 오용으로 인한 것이기에,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문시환, 22쪽)

   

아르미니우스 예정론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죄인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절대적인 작정은 그 작정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 자신의 죽음으로 죄를 파괴하시며, 친히 복종하심으로 상실된 구원을 회복시키시고, 그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전달하여 주시는 중재자와 구속자와 구세주와 재사장과 왕으로 삼으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두 번째 정확하고도 절대적인 작정은 그 작정 안에서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 은총을 베푸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끝까지 인내한 회개한 자들과 믿는 자들의 구원을 성취시키시되, 그러나 회개치 아니하며 믿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들은 죄와 진노아래 방치하며, 그리스도에게서 버림받은 자들을 떨어뜨리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세 번째 작정은 하나님께서 충족하면서도 유효한 방법으로 회개와 믿음을 위해 필요한 수단들을 집행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집행이 신적지혜에 의하여 하나님은 무엇이 자신의 자비와 엄격함에 적합하며 또 양자를 만족케 하는지를 아신다. 그리고 신적공의 이공의에 의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가 지시하는 것은 무엇이나 채택하며 또 그것을 실행에 옮기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나 이 공의에 의해 실시되도록 결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네 번째 작정은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또 저주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이 작정은 하나님의 예지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데,이 예지에 의하여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의 보호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믿게 되며,또 그의 계속적인 은총으로 말미암아 인내하게 될 사람들을 아셨다.이러한 믿음과 인내는 회심과 믿음을 위해 적절하고도 적합한 수단들을 사전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집행하심으로써 비롯되는 것이다.그리고 이 예지에 의하여 하나님은 또한 믿지 아니하고 인내하지 아니할 사람들을 아셨다.(김남철, 15-16쪽)

   

전통적 예정론의 오류는 바르트와 몰트만으로 이어지는 20세기의 위대한 개혁교회의 신학자들에 의해 크게 수정되어 매우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예정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예정론은 절대주권과 절대은총의 강조로 일관하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나타내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현재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마저도 인간의 자유의지와 함께 매몰되어 버리는 모순을 갖게 되었고, 운명론적인 무시무시한 교리로 둔갑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나 바르트의 예정론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는데 그 초점을 맞추어 온 전통적인 예정론의 시각을 완전히 탈피하여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빛으로 새롭게 조명된 사랑과 기쁨의 예정론을 전개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결국 바르트의 하나님의 예정은 복음의 총화요 기쁨만을 일으키는 모든 인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이다. 예정론은 신앙의 깊이와 무게를 더하는 교리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과 계획과 경륜을 그 중심에 담고 있는 복음의 핵심을 표현하는 교리이다.(김남철, 61쪽)

   

- 半 펠라기우스 주의 : 神․人 동행

   

5-6세기에는 특히 프랑스 남쪽의 수도자와 주교까지도 소위 '반(半)펠라기우스주의', 즉 세미펠라기우스주의에 빠졌다. 이 명칭은 원칙적으로 17세기부터 생겨난 명칭이었으며, 근본적으로는 Semi-Pelagiusmus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은총 발생 속에서 인간의 자유에 여지를 마련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건 규정에 저항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주의에 반대하는 일단의 여러 신학자들이 있을뿐이다.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교리는 프랑스 남부 고울(Gaul)지방에서 전통적 교리에서 벗어나는 주장으로서 이를 강하게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크리소스톰의 친구이며 제자인 카시안(JohnCassian)이 주관하는 수도원의 수도사들과 이 학파에 속한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반대하였다.

카시안은 수도사로써, 펠라기우스의 교리를 수정하여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인류의 보편적 부패를 시인하였으나 자유의지와 사람의 자기 결정력을 부인하는 교리는 전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은혜의 도움 없이도 자유의지는 그 자체의 회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고, 반면에 예정의 교리를 배격하였다.그대신 하나님이 예지하시고 예정하신다는 예지예정의 주장을 펼쳤다. 그러다가 후에는 은혜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고 주장하였다.(이인숙, 48-49쪽)

   

이단설이라고 비난받는 세미-펠라기우스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인간타락을 인정했으나 타락이 인간의 본성이 약화되어 병든 정도로 인정했다. 따라서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남아 있다고 보았다. 2)절대예정을 부인하고 예지예정을 취했다. 그것은 곧 인간이 자유의지로 믿을 것을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였다는 이론이다.3)중생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 의지가 연합하여 산출한다고 말한다.곧 신인협동설이다.

펠라기우스 논쟁은 은총과 자유의지의 관계를 이야기 했다면,세미펠라기우스 논쟁은 은총과 성화의 관계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미펠라기우스주의의 영향에서도 은총보다는 행함의 공로를 강조하는 극단적인 양상으로 흐르고 말았다. 그 영향을 받은 로마 카톨릭은 구원을 말함에 있어 은총의 받음을 세례에 결부시키고, 행함의 공로를 강조하여 내세우는 결과는 후에 종교개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이인숙, 51쪽)

   

반 펠라기우스 주의자들 중 두드러진 인물이었던 영국의 파우스투스는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점에서 페라기우스에 더 가까웠는데 당시 그의 저술들은 그 합리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교회는 잠시 반페라기우스 주의자들이 득세하는 듯 했지만 로마의 대 감독들(Prosper, Fulgentius, Maxentius) 중에는 어거스틴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이들의 주장에는 어거스틴주의를 약간 수정해 놓은 것 같은 공통점이 있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하나님은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막론하고 모든 일들을 미리 아신다. 그러나 그는 선한 것만 원하신다. 그러므로 예정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관계 되는 것이다.

* 하나님은 모든 악한 사람들을 미리 아시고 감화시키시지만 그들을 미리 정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에게는 악이 없다. 그러므로 악은 하나님의 예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

* 은총은 보편적인 것이며 선택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자녀가 예정을 통해서 악마의 자식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를 거역하고 타락하게 될 자들을 구원으로 예정 하시지는 않았다.

* 하나님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공적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원하신다(딤전2;4)(정두용, 38쪽)

   

- 주관적 종교로서 자유주의 신앙에 반대한 바르트

   

우리가 이미 주목하였듯이 바르트는 그의 초기 사상을 특징 지었던 것은 자기 만족의 신학적인 자유주의로부터 그를 흔들었던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함께 그의 눈앞에 닥친 개신교의 윤리적 파산이었다고 우리에게 말했었다. 그가 그의 신학적인 인생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윤리를 견고한 토대 위에 놓으려고 결심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T.F. 토렌스, 39쪽)

   

자유주의가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현실’은 바르트에 의해 더 상세히 구체화되었다. 자유주의가 변혁될 수 없이 주어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의 부분적 복합체들은 특히 시민들의 가족, 자본주의, 예술 지상주의, 국가, 군대 그리고 자기목적이 된 조직화된 종교이다. 자유주의는 사회의 부분적 복합체와 사회 그 자체를 물적인 소여성으로 파악함으로써, 그것들을 주물화된 ‘현실’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지만 자유주의는 그것들을 ‘물 그 자체’로 만들기 때문에, 주물화된 현실에 상응하지 않고 신적인 사회 현실에 상응하는 정치를 수행할 수 없게 된다. 자유주의가 기존하는 사회를 긍정하는 것은 바르트에 의하면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긍정은 사회의 총체성과 그 부분적 복합체들의 내면적 운동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바르트에게서 정치적 자유주의를 배격하는 것은 신학이론의 귀결이 되었다. (울리히 단네만, 49쪽)

   

우선 바르트는 점차 활기 있게 계시는 하나님의 행동, 우리의 역사적인 실존과 현실 안에서 우리와 부딪치는 역동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은 하나님 편에서의 어느 능동적인 개입의 측면에서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전적인 의존의 감정의 측면에서부터 생각되어진다는 쉴라이에르마허의 견해와 의식적인 대조를 이루며 주장되었다. 그러므로 쉴라이에르마허의 견해와 의식적인 대조를 이루며 주장되었다. 그러므로 쉴라에르마허가 주장했던 교리들은 그 근거를 진리에 대한 어떤 직접적인 교감에서가 아니라 종교적인 자의식의 감정들에서 갖는다. 일반적으로 인정하듯이 우리가 절대의존의 이런 감정의 결정자로서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는 쉴라이에르마허의 주장은 그에 의해서 하나님의 객관성의 표현으로, 즉 하나님의 객관화할 수 없는 타자성 혹은 초월성으로 의도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은 정반대의 결실을 얻었다. 단지 하나님-의식과 자의식이 서로의 표면으로서 우리의 경험 안에서 함께 뒤엉켜 짜여져 있기 때문에, 신학은 그의 자신의 감정들에 대한 인간의 반성들을 말이 없는 하나님의 입속에 투사하는 것이 되었고, 그것은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 자신의 주관성의 범위내로 끌어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쉴라이에르마허에서 기원하는 그런 사상 노선의 발전에 반대하여 바르트는 하나님의 활동을 그의 초월과 자유와 독자적인 객관성의 표시로서 주장하였다. (T.F. 토렌스, 60쪽)

   

이러한 확인의 가능성과 필연성의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실 안에 있다.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 이로부터 생겨나는 하느님의 포괄성의 보편타당성의 토대 위에서 신학은 부정적인 하느님 관계가 이간의 세계관계에 미치는 귀결들을 숙고해야 한다. 신학이 부정적인 하느님 관계의 내적인 논리를 연구한다면, 우상숭배와 물화의 사회적․정치적 함축성을 탐색하는 일을 회피할 수 없다.

이로써 바르트는 무엇보다도 자유주의를 비판하게 된다. 바르트는 자유주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와 실천 안에서 우상생산과 물화의 특징들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우주의적 사회질서는 종교적인 하느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채택되었던 바로 그 기본 모델에 따라 기능한다. 종교적 (혹은 정치적) 소유욕은 종교적(혹은 정치적)으로 소유되는 현상으로 뒤바뀐다.(울리히 단네만, 64쪽)

   

1. 바르트는, 그의 자유주의 비판이 보여주듯이, 부르주와적 국가를 계급국가와 억압도구라고 특징 지은 점에서 레닌과 일맥 상통한다. 그렇지만 이 점에서 인식할 수 있는 바르트와 레닌간의 유사점들은 여기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2. 바르트가 레닌과 달리하는 점은 그가 부르즈와적 국가 대신에 혁명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사상을 배격한데에 있다. 이점에서 바르트는 레닌보다 더 급진적이다. 그에게 혁명이란 국가를 전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중략)

3. 다른 한편으로 바르트는 국가에의 능동적인 정치적 참여도 염두에 두었다는 사실로 인해 레닌이 의미한 ‘무정부주의자들’과 분명히 구분된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그는 다시금 레닌의 의도와 분명히 가까워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레닌의 정치적 입장에서 특징적인 점은 바로 ‘개량주의적인’ 국가긍정이라는 스킬라 뿐만 아니라 ‘극좌익적인’ 국가부정이라는 카립디스도 역시 피하려고 한 시도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바르트는 레닌주의적 국가비판보다 더 큰 것을 기대함으로써 말하자면 레닌의 좌익에 정착했지만, 그는 국가를 부정함으로써 추상적․총체적 국가부정에 빠지지 않고, 국가에 맞선 투쟁을 정치적․현실주의적으로 중재하고 구체화하려고 애썼다. (울리히 단네만, 81-83쪽)

   

합리주의가 종교를 침식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은 영국, 독일, 북미의 발전을 볼 때 확실해진다. 독일 경건주의와 영국 복음주의(18세기)에서 명백히 드러난 힘찬 모습은 합리주의가 보편적 인간의 요구와 의미에 강력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음을 입증한다. 철학은 무미건조한, 최악의 의미로 탁상공론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외적인 실제적 삶과 내적 인간의 의식, 이 모두에게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의 기여는 바로 이런 상황, 곧 합리주의에 대한 환상이 점차 깨지고 인간의 ‘느낌’을 새로 인식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이러한 느낌에 대한 관심을 고양했다. 그는 종교일반, 특히 기독교는 느낌 혹 ‘자의식’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345쪽)

   

사회 속의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의 기본적 명령을 우리는 이미 다음과 같이 인용한 바가 있다. 하느님의 세계 혁명의 전제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은 바르트에게서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1.소외된 사회의 현재적 출현형태에 대한 비판: “너희는 지금 세계와 대립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다른 존재와 본질이 너희 안에서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너희는 먼저 대부분의 이웃들과 분리되고 … 실로 그들과 적대적인 대립관계에 놓이게 된다. … 너희는 새로운 생활원리의 담당자들이다. 그러한 자들로서 너희는 지금껏 낡은 생활원리의 담당자들인 자들과 원수관계를 맺어야 한다. 오늘날 새로운 생활 원리의 적대자들에 속하는 자는 바르트에 의하면 특히 자유주의적 사회질서의 대표적 인물인 부자, 즉 자본의 소유자와 자유주의 사상가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들에 의해 지탱되는 사회질서의 우상과 충돌함으로써, 오고 있는 하느님의 세계혁명을 신봉한다. 2. 이것은 긍정적으로 오고 있는 자유의 나라에 길들여짐을 포함한다. : 악은 단지 선에서만, 즉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들인 너희 안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선 그 자체의 힘에 의해서만 패배당할 수 있다. (울리히 단네만, 91쪽)

   

칼 바르트 신학의 특징 중 하나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거부이다. 바르트는 관념론자들의 형이상학과 도덕적, 철학적, 종교적 주관성의 문화를 반대하였고, 따라서 신학적 접근에 있어서 그러한전통들과 결별하고자 하였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주된 요소 중 하나는 신학의 인간학화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에 대한 인간의 종교적 경험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에게 신학의 주체는 인간의 영혼 혹은 양심이었다. 현대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에르마허(F. Schleiermacher)는 신앙을 절대 의존의 감정이라고 설명함으로써 믿는 주체와 신앙의 주관성을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절대적 의존이라는 신과 관계되어 있는 내적 직관과 감정의 근원이었고, 결과적으로 슐라이에르마허에게 있어 하나님에 대한 발견은 인간 자신에 대한 발견이었다.(송영석, 139쪽)

   

바르트는 종교신학과 관련하여 19-20세기의 기독교 신학의 중요한 질문은 “종교를 하나님의 계시의 견지에서 볼 것인가 또는 계시를 종교의 관점에서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현대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은 대체로 계시를 종교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접근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종교에 대한 비신학적인 이해”를 채택하게 하고, “종교에 독립적인 자리를 부여”하려고 시도하며, “계시 위에 종교”를 세우기 때문에 바르트는 이러한 인간 중심적인 접근을 반대하였다. 오히려 바르트에 있어 신학은 종교를 볼 때 “계시와 신앙의 관점에서 보는 인간 삶의 실재”로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르트는 모든 인간중심적이고 주관주의적인 신학에 반대하며, 따라서 그에게 종교는 불신앙의 한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행위를 예견하거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치하기 위한 자기 합리화의 부질없는 인간적 시도이다.(송영석, 143쪽)

   

우리는 바르트를 20세기 초반 자유주의가 지배하던 세계에서 신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학자라고 평가한다. 구체적으로 바르트는 당시 인간 중심적 자유주의신학이 풍미할 때, 성서 중심의 계시 신학을 주장했고, 그 신학으로 그 시대의 신학적 패러다임을 전환하였다. 그가 제시한 패러다임은 말씀 중심인데, 교의학에서도 인간의 이성적 사유를 통해서 보다는 성서의 내용으로부터 교의학을 구성해야한다는 것이다.

바르트에게 성서를 벗어난 계시와 신학은 철저하게 거부되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성서란 무엇인가? 바르트는 “성서란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낸 책”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현시(Selbstenthullung)이다. 하나님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분이시다.

따라서 바르트가 말하는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적 사유의 방법과는 불연속적이다. 오직 하나님은 계시를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알리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기독교란 엄밀하게 종교와는 별개의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김득열, 42쪽)

   

자유주의 혹은 현대주의는 그 안에 다양한 입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뜻을 정확히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기본적인 의미는 ‘제한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떤 사상 체계나 입장을 절대시하거나 그것에 제한을 받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주의 정신은 개방된 마음, 관용, 진리에 대한 겸허하고 헌신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는 19세기의 모든 사상, 즉 종교를 비롯한 과학, 철학, 경제, 정치 등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종교적 자유주의는 현대의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시대정신에 근거하여 기독교 신앙을 재해석하거나 재진술함으로써 기독교를 변호하려는 노력이었다. 19세기 들어 개신교는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문제 제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현대에서 종교가 어떻게 가능하며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였다. 이것에 대한 응답으로 나온 것이 자유주의 신학이며 종교와 신학의 가능성 문제, 그리스도론의 가능성 문제 및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 문제가 그 주관심사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어느 특정 신앙 고백이나 신조에 종속되지 않고 종교 개혁 신앙을 그 시대에 적절하고 타당하게 만들려고 한 시도였다. 그러나 신학이 중심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경험이나 정황에 둠으로써 인간중심적 신학이 되었다.(목창균, 15-16쪽)

   

그렇다면 이러한 주제에 대한 논의를 통해 여러 갈래로 전개된 자유주의 신학은 어떤 특징과 특색을 지니고 있는가?

첫째, 신학의 토대를 인간의 경험에 두었다. 성서나 신조를 신학의 출발점이나 궁극적 규범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슐라이에르마허가 인간의 종교적인 의식을, 리츨이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의 경험을 신학의 근본적 자료로 간주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중심적이며 주관주의적인 경향을 띄게 되었다.

둘째,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공관복음서의 자료에 근거하여 역사상의 예수를 신앙의 그리스도와 구분하려 했다. 특히 역사비평적 신학파는 신앙의 그리스도는 후대 교회가 부가한 비역사적 요소에 근거한 것으로 취급하고, 역사적 예수를 회복시키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선재성,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에 관한 전통적인 교리를 포기하거나 거부했다. 그리스도를 인간의 원형이나 모본 또는 교사로 봄으로써 인간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슐라이에르 마허는 그리스도를 완전한 신의식을 소유한 분으로, 그리고 리츨은 탁월한 도덕적 능력을 소유한 분으로 이해했다.

셋째,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했다. 정통주의 신학은 무한하고 완전한 하나님과 유한하고 불완전한 세계 사이의 근본적인 분리를 주장했으나, 자유주의 신학은 세계 내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계, 신앙과 이성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타종교간에 연속성이 있다 하여 종교적 관용의 태도를 취했다.

넷째, 낙관주의적 인간관을 주장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강조한 반면, 타락과 원죄 교리를 거부했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다섯째, 기독교의 윤리적, 사회적 의미를 강조했다. 현재의 세계와 인간의 상황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것은 도덕과 종교의 일치를 주장한 칸트의 영향이며 특히 리츨학파, 종교사학파, 사회복음주의 신학파에서 현저했다. (목창균, 28-29쪽)

   

슐라이에르마허가 없었다면 바르트의 신학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양자는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바르트의 신학은 슐라이에르마허를 근원으로 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하려는 반작용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슐라이에르마허에게 많은 것을 힘입고 있음을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중략) 바르트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천재성은 인정했지만, 훌륭한 신학교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인간이 인간이기에 전적으로 구원을 필요로 하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소망이 전혀 없다는 것”과 “우리는 큰 소리로 사람에 대해 말하듯 하나님에 대한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키에르케고르, 칼빈, 루터, 바울, 예레미야로 이어지는 자신의 사상계열에 슐라이에르마허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또한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에 이르는 길은 없다고 보았다. 바르트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왜곡을 슐라이에르마허의 역사적 의의로 간주했다. (목창균, 147쪽)

   

종교도 이와 같다. 우주는 끊임없이 활동하며 매 순간 우리에게 계시된다. 우주가 산출하는 모든 형식, 삶의 충만에 따라 각별하게 현존하는 모든 존재자들, 우주가 그 충만하고 늘 풍성한 품에서 쏟아내는 모든 사건들, 이것이 곧 우리를 향한 우주의 행위이다. 이렇듯 종교는 모든 개별자를 전체의 부분으로, 모든 제약자를 무한자의 표현과 서술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체의 본성과 실체로 더 깊이 파고들어가 보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주가 이러한 것들로 간주되기 원한다면 이는 불가피하게 공허한 신화로 떨어지고 만다. (슐라이에르마허, 61쪽)

   

그러나 칸트의 방법에 의하여 만들어진 신학은 인간 중심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그 자신이 그렇게 애써 거부하려고 했던 신의 내재성을 어쩔 수 엇이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궁극적으로 보면, 자율적인 인간의 이성이-계몽주의에서 말하는 순수이성이든, 칸트의 실천이성이든-보편적으로 듣게 되는 ‘신의 음성’은 인간 자신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인 것이다. 그것은 저 초월적인 ‘저편’으로부터 오는 말씀은 아닌 것이다. 칸트가 제시한 제안을 보면, 초월적 신은 인간의 ‘실천적 이성’의 심연 어딘가에서 발견되는 정언명법의 음성 속으로 쉽게 묻혀 버린다. (스탠리 그랜츠․로저 올슨, 43쪽)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내재주의가 헤겔이 현대 신학에 대하여 했던 가장 중요하며 가장 그 영향력이 지속되고 있는 공헌일 것이다. 그의 사변적 관념론이 이지러지거나 또는 사변적 유물론으로 급진적으로 재해석되고 있을 때에도 신과 세계의 일치에 대한 비전은 신학을 위한 가장 유력한 선택으로 남았던 것이다. 헤겔은 “이 세상이 없으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그 자신 스스로(卽自的으로) 또는 그 자식을 위하여(對自的으로) 자족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기의 ‘자기 실현’을 위하여 이 세계를 필요로 한다. 세계 역사는 또한 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과 이 세계의 관계에 대한 헤겔의 견해는 후에 통상 萬有在神論이라 불리는 많은 신학적 대안을 위한 모형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이름 아래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과 세계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나 동시에 구별되는 실재라고 보는 모든 견해이다. 이러한 접근법이 하나님은 이 세계와의 관계에서 전적으로 자족적이라고 보는 전통적 유신론과 하나님을 이 세계와 밀접히 연관짓는 범신론 사이의 중도노선을 형성한다. 이후의 모든 만유재신론적 표현들은 모두 이 중요한 부분에서 그들 나름으로 헤겔을 좇는다. (스탠리 그랜츠․로저 올슨, 54-55쪽)

   

슐라이어마흐의 신학적 방법의 약점은 그의 신론에 심각한 결과들을 가져왔다. ‘절대의존감정’은 너무도 쉽게 기독교적 하나님 개념을 견강부회식으로 억지로 짜맞추는 프로크루테스의 침대가 된다. 맞아 떨어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제 아무리 성경적 증거나 기독교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것일지라도, 잘라 버려야 한다. 그의 사상이 범신론이라고 하는 것이 근거없는 것이지만, 슐라이어마흐의 신론은 내재성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그는 하나님의 행동을 자연과 거의 동일시한 나머지 구속이 하나님의 행동인 것만큼 악의 고통 역시 하나님의 행동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더욱이 이 세계 위에 그리고 이 세계를 떠나서 존재하는 분으로서 하나님이 존재하는가가 불분명하다. 하나님과 이 세계를 상호 연관지으면서 그 둘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는 면에서 슐라이어마흐의 신론을 만유재신론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모든 만유재신론적 사상체계들이 그러한 것처럼, 슐라이어마흐가 제시한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비전은 은총론에 민감한 문제를 제기한다. 만일 이 세계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속한 것이 어떻게 은혜로운 것이겠는가?(스탠리 그랜츠․로저 올슨, 73쪽)

   

바로 이 자립적 개별성으로 인해 직관의 영역은 이렇게 무한한 것이다. 여러분이 물질 세계의 가장 먼 지점에 선다면, 거기서 여러분은 똑같은 대상을 다른 질서 가운데서 보게 되며 새 영역에서 전혀 새로운 대상을 발견하게 된다. 또 여러분이 거기서 찾아내지 못한 이전의 임의적인 그림들을 고수하려고 한다면, 이는 완전히 정도를 벗어난 일이 될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평이야말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가장 넓은 지평이며 이 지평 저편에서는 어떤 것도 직관될 수 없으며 이 지평 내에서는 가장 잘 무장한 존재이기도 한 여러분의 눈을 어떤 것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여러분은 어떤 곳에서도 한계를 발견하지 않으며 스스로 어떠한 한계도 생각할 수 없다. 더 상위적인 의미에서 볼 때 이러한 사실은 종교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여러분은 대립적인 지점으로부터 새로운 직관을 새로운 영역에서 획득할 것이며, 과거의 잘 알려진 공간에서는 최초의 요소들이 다른 형태로 통합될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직관이 무한한 것은 행위와 손상이 똑같은 제약적 질료와 심정 사이에서 끝없이 변화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사변이 갖는 유일한 무한성임을 여러분은 잘 안다. 직관이 무한한 것은 그것이 도덕과 같이 내면을 향해 완성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직관은 모든 측면에서 무한하다. 그것은 질료의 형식의 무한자이며 존재와 보는 활동, 즉 지식의 무한자이다. (슐라이에르마허, 64쪽)

   

종교는 이와 같은 것이다. 유한자인 여러분의 내면에 자신을 계시하는 우주의 행위는 여러분의 심정 및 상태와 새롭게 관계한다. 우주를 직관하면서 여러분은 필경 갖가지 감정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종교에서는 직관과 감정 사이에 색다르고 더 확고한 관계가 생겨날 뿐, 감정이 소멸될 정도로 직관이 우위를 점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중략) 우주가 여러분의 직관 속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특별한 방식이 여러분의 개인적인 종교의 특유함을 형성하는 것처럼, 이러한 감정의 강도가 경건의 등급을 규정한다. 감각은 건강할 수록 모든 인상을 더욱 예리하고 확고하게 포착한다. (슐라이에르마허, 69쪽)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 슐라이어마허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토론에서 『기독교신앙』의 마지막 부분에서, 삼위일체론을 기독교 신학의 부산물로 간주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실상 슐라이어마허는 삼위일체론 교리-이 교리가 없었다면 기독교 신앙은 와해 되었을 것이다-가 예수의 정체와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한 다수의 비판적 통찰을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삼위일체론은 ‘머리돌/마무리돌’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얹음으로써 마침내 전체 구조물 속의 모든 구성부분이 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458쪽)

   

쉴라이에르마허는 현대의 계몽주의적 정황에서 신학의 가능성을 찾아 기독교의 전통적인 진리를 재해석함으로써 현대 자유주의 신학을 위한 방향을 제시했다. 자유주의 신학 (liberal theology)은 18세기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기독교 신학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의 이성, 감정, 경험, 도덕적인 능력, 역사적인 낙관론, 문화 창조능력을 중요시하는 변증 신학이었다. ‘자유주의’의 개념은 그 안에 다양한 입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뜻을 정확히 정의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것의 기본적인 의미는 어떤 사상 체계나 입장을 절대시하거나 그것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현대신학자 쉴라이에르마허는 성서 본문, 신조 및 교리를 신학의 토대로 삼는 전통적인 신학과는 달리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을 신학의 토대와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것은 신학의 방법론의 혁신이었다. 신 중심의 초월에서 인간 중심의 내재로의 전환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신학의 과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발견되는 종교적 감정을 기술하는 것이었다. 그는종교론: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에게 보내는 담화에서 책 제목 그대로 종교를 멸시하는 현대인들을 향해 종교란 “절대 의존의 감정”(das schlechthinnige Abhängigkeitsgefühl)이라고 변증했다. 종교에 대한 그러한 변증은 많은 지성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 그들이 외면하고 멸시했던 종교에로 다시 돌아오는 계기를 마련했다.(최종호, 400쪽)

   

바르트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성서-계시의 삼중 형태에서 설명한다. 선포된 말씀-기록된 말씀-계시된 말씀이었다. 여기서 ‘선포된 말씀’이 맨 앞에 위치한 의미는 말씀의 현실성에 대한 강조다. 또한 특이한 것은 하느님 말씀이 위의 셋을 모두 합쳐야 비로소 성립된다는 점이다. 선포된 말씀은 반드시 기록된 말씀 성서를 근거로 하여 행해져야 하고, 그리고 성서는 다시 계시된 말씀을 근거로 하여 읽혀져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하느님의 마음에 들을 수 없고, 그리고 하느님과 자기 자신조차도 인식할 수 없다. 오직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는 성서의 내용이요, 출발점이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계시인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하느님 자신의말씀이며, 성서는 하느님 자신의 모습을 계시한 삶이다.

바르트는 정통주의 신학과 계몽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의 성서관을 비판하면서 독자적인 성서관을 수립한다. 그는 성서는 두 가지 차원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는데, 하느님의 말씀으로서의 차원과 이 말씀에 대한 인간적 증언으로서의 차원이 그것이다. 바르트는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은 성서를 하느님의 계시이요, 말씀이라는 것을 말했지만 성서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것을 간과한 것으로 보았다. 즉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적 증언이라는 사실을 간과했고, 또한 ‘성서문자 영감론’( verbal inspiration)에 대한 ‘문자’를 강조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바르트는 그들과는 달리 문자 대신에 ‘성서’를 강조한 성서 영감론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수립한 것이다. 그는 종교개혁이후 성서를 바르게 세운 20세기 복음주의 신학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강조한 성서는 문자가 아니었다.(최종호, 408쪽)

   

자유주의 신학은 17,18세기로부터 특히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유산으로 받았다. : 세계 역사의 일체성, 현실의 일원성에 직면해서 신앙과 이성의 연결, 공적 종교와 사적 종교의 구분 및 외적 교회의 삶과 내면적 종교성의 구별, 성서의 역사화 및 이와 결부해서 종교의 본질과 기독교 교회의 실증 전승을 구별, 반교리주의와 개인적 종교 신앙 체험에 대한 요청, 세계 섭리관의 표현으로서 이신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나라, 도덕, 종교성의 교사로 축소시킴, 법적 기구로서의 교회와 대립하여 개별자들의 종교 윤리 공동체로서의 교회 이해, 인간학적 구조로서의 종교성. (황정욱, 72쪽)

   

쉴라이에르마허의 신학적 관점에 의하면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모든 개별적 경험의 근저에 놓여 있는 통일성에 대한 자각 안에 현존하신다. 이 명제는 쉴라이에르마허의 하나님이 사적인 신비주의적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는 비난을 극복하게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인식이 다른 사람들과 역사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조화와 합일의 원리로서 모든 존재와 사건 안에 내재하신다. 종교적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개방하고, 그 분을 전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며, 무한한 하나님 속에서 모든 것이 통일을 이루는 의식은 우리의 감정 속에서 담겨질 수 있는 것이며 경건을 향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박충구, 63쪽)

   

칸트와 함께 바르트에게 영향을 끼친 신학자는 슐라이에르마허였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를 ‘감정’의 영역에 정초(定礎)시켰으며, 철학적 신학을 시도함으로써 신학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기독교를 윤리적으로 연구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기독교의 중요성을 보다 높은 도덕성의 근원이 되는 점에 착안했다. 바르트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절대의존의 감정에 대한 종교적 이해는 결국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만드는 길을 연 것으로 직시했다. 인간의 경건한 감정이 종교의 근원이라면, 그것은 결국 피조된 것에서부터 신(神)의 개념을 만드는 것으로써,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사고라고 바르트는 지적한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가 만들어낸 신앙의 형태는 인간이 좋아하고 받아들이기에 가장 적합한 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유경수, 28쪽)

   

하나의 통제적 단일적 원리에 기초해서 교의학을 발전시킨 슐라이에르마허의 방법에 관해서 우리는 몇 가지 지적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가 기초로 삼은 원리는 무한자에 대한 경건한 영혼의 의존 감정이었다.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은 이보다 다른 원리들을 택하였다. 신중심적이니 혹은 구원론적이니 하는 원리들은 근본적인 것을 제시하는 데 실제로 유용할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가 감정으로서의 종교를 택했고, 헤겔파 사람들이 사고 활동에 있어서의 통일을 택하였으며 또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이 의지의 운동을 택했을 때, 그것을 보고 칸트나 헤겔이나 슐라이에르마허 중의 어느 하나를 따르는 신학이 미완성의 단편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한 것은 실로 옳은 말이라고 보겠다. 사실 성서와 신앙 고백에 기초하여 교회 생활에 힘이 되는 모든 긴요한 요인들은 한데 종합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점에서 과연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물려 받은 방법적 유산이 그를 찬양하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그렇게 큰 공헌을 하였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옛날의 객관적 방법과 오늘날의 주관적 방법을 합리적으로 적절히 결합시키는 것은 영혼 구원의 신학을 필요로 하는 교회를 봉사하는 데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 교의학의 목적은 정신적 수련의 도장이나 새로운 사상의 燦然性을 전시해주는 일이 아니라 복음전도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물론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많은 반대자들이 있으리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다. (J.L.니브․OW 하이크 공저, 227쪽)

   

   

- 공동선의 문제를 생각한 서구 자유주의

   

본래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익을 지나치게 억압했던 봉건적인 신분질서와 절대권력에 대한 사회 정치적 저항으로서 출현했다. 그것이 의도한 진정한 목표는 공동체 그 자체의 파괴가 아니었다. 자유민주주의는 단지 개인들이 어느 정도는 자유로운 판단과 선택을 통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때에 보다 인간답고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열망의 표현이었지, 결코 공동체 그 자체의 해체를 목표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근대 초에 형성된 자유주의가 표면적으로 反공동체적으로 보였던 이유는 주로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채택했던 방법론적 개인주의, 그 존재론적 가정으로서의 추상적 개인관, 그리고 그 논리적 귀결로서의 계약주의적 사회관념 때문이었다. (김비환, 227쪽)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결코 공동선 혹은 공익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문헌상의 증거들은 풍부하게 있다. 설령 그들이 공익 혹은 공동선의 중요성을 부인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공동선의 추구라는 명목하에 행해진 개인의 권익에 대한 부당한 횡포에 대한 전략적 대처로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김비환, 233쪽)

   

루소는 종교개혁의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종교개혁파가 어떻게 그런 원리(개인적 해석의 자유)에 근거하여 단결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어떻게 해야 했습니다. 즉 서로가 서로를 유능한 판단자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단결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너그러이 봐주었습니다. 한가지, 즉 해서그이 자유를 빼앗는 [가톨릭의] 해석을 제외하고는 모든 해석을 용인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로마 교회만을 일치단결하여 거부했는데, 로마교회도 마찬가지로 그 종교개혁파 모두를 거부했습니다. 루소는 개신교의 단결을 마치 각자의 자연권을 인정하는 기초 위에서 개개인의 자유롭고 합리적인 동의에 의해 탄생한 사회계약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계약이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 인간의 정서에 작용할 수 있는, 종교라는 훌륭한 설화가 필요하고, 계약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도 (이해를 요구하는 교육과는 다르게 믿음을 요구하는) 시민종교라는 정서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루소가 자신의 정치 이론 속에서 고려해야 했듯이, 종교개혁과 이후의 개신교의 전개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의 정서적 힘이 작용할 수 밖에 엇음을 루소는 알았어야 했다. (공진성, 123쪽)

   

루소는 유럽의 기독교화 과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문예가 하지 못한 것을 기독교가 이루었기 때문이다. 루소는 기독교의 덕택에, 신민이 세속정부에 순순히 복종하게 되어서, 정부들이 더할 나위 없이 확고한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또 혁명이 덜 발생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신민을 정부에 복종케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기독교가 정부자체를 덜 잔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이와 같은 평가는 '사회계약론'에서의 얘기와 모순되지 않는다. 거기에서 루소는 기독교의 내세지향적 성격이 처음에 이교도들에게는 물론이고 기독교도들에게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고, 그래서 억압과 대립이 발생했다고 얘기 했는데, 여기에서 루소는 기독교의 성격이 사람들에게 더욱 잘 알려지면서 광신이 점차 사라졌고, 이 세계의 왕국과 저 세계의 왕국이 제대로 구분되면서 정부의 권위가 확고해졌으며, 그래서 정부가 덜 잔인하게 되었다고 얘기한다. (공진성, 128쪽)

   

시민종교에 관한 스피노자와 루소의 생각은 종교 개혁 이후에 형성된 유럽의 근대 국민 국가체계가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개인에게 작용하는,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구심적 사랑과 원심적 사랑 사이에서 바로 그 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위해 필요한 정치공동체가 어떻게 그 구성원의 사랑을 자기에게 향하게 할 수 있을것이냐의 문제이다. 초국가적으로 이 사랑을 바티칸으로 향하게 하는 사제의 종교 로마가톨릭과, 국가 이하에서 이 사랑을 자기 공동체로 향하게 하려는 많은 종파들 사이에서 루소와 스피노자는 모두 자유의 원인이자 결과인 공화국으로 시민의 사랑을 향하게 하려고 했다. 그것이 곧 개인이 자기의 자연적 권리를 지키는 길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또한 자연법과 신법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가톨릭 교회에 맞서 스피노자와 루소는, 한편으로는 루터와 칼빈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를 탈 세속화하고 내면종교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약해진 시민의 국가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국가를 재종교화한다. 이것이 스피노자와 루소의 시민종교 기획이다. (공진성, 139쪽)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유한성은 곧 인간의 위기이다. 이 위기를 극복할 다른 방법은 없다. 방백들을 의지할 수도 없고 다른 인생을 의지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 위기에서 건져낼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 위기는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며, 인간의 모든 지혜와 비밀이 심판앞에 놓이게 되는 거시다. 바르트는 율법도, 자연이성도, 인간의 선행도, 그리고 인간의 아름다운 지혜도 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무용하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설사 내가 하나님 편에 선다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지지를 받는 자리가 아니라고 한다. 오직 한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편에 서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인간으로서의 낙관적인 아름다운 미래를 그려보려는 시도는 정지되고 있다. (박충구, 189쪽)

   

- 한국의 바르트 수용 과정의 혼란

   

신 정통주의는 1930년대 북미 신학계를 풍미했는데, 특히 당대의 신교 자유주의의 낙관적 전제에 의거한 사회사상을 비판하는 라이놀드 니버나 여타 저술가들의 작품에서 잘 나타난다.

신정통주의는 여러 가지 점에서 비판을 받았는데 그 중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초월성과 ‘타자성’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을 고원하고 잠재적으로 인간과 무관한 존재로 만들 수 있다. 때때로 이러한 입장은 극단적 회의론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 받았다.

2. 신정통주의가 오직 신적 계시에 정초한다는 주장에는 순환논리가 엿보인다- 동일한 계시에 호소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이것을 검증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환언하면 신정통주의와 진리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공인된 외적 기준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신정통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단지 경건주의의 한 형태일 뿐이라 주장한다- 곧 그 어떤 외부의 비판에도 무간한 신앙체계라는 것이다.

3. 신정통주의는 다른 종교에 호감을 느끼는 자들에게 유용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이런 종교들은 왜곡되고 타락한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에, 다른 신학적 접근방식은 이러한 종교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고, 기독교 신앙과 관계를 맺게 할 수 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359쪽)

   

독일에서의 이러한 바르트 신학의 연구동향이 다양한 만큼 한국에서의 바르트 연구동향 또한 그에 못지 않게 다양하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에서의 연구동향의 다양한 측면들이 독일에서의 연구의 다양한 측면들과 어느 정도 일치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신학사를 전체적으로 개관해보면 바르트의 신학은 교계와 신학계의“분열”과 동시에 “일치”의 정점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바르트 신학이 한국 신학계의“일치”의 정점에 서 있는 이유는 한국 신학자들 제1세대를 통틀어 적어도 신학자로 이름을 내놓은 이상 바르트의 신학에 관해 한 편의 논문이라도 쓰지 않은 신학자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내로라 하는 신학자라면 누구나 한 번 이상 바르트의 신학에 관련된 논문을 당시에 발표하고 있다. 실제로 바르트 서거 1주기를 계기로 ‘한국바르트학회’가 주관하여 발행한 최초의 바르트 연구 논문집이라 할 수 있는『바르트 신학 연구』에는 한국의 신학자로 윤성범, 박순경, 이종성, 박봉랑, 은준관, 전경연, 한철하, 변선환, 지동식, 윤성범이 기고하고 있다. 아무튼 조직신학자 뿐만 아니라, 성서신학자, 선교신학자, 역사신학자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영역의 신학자들이 바르트 신학에 대한 소개, 해석, 비판에 참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 바르트의 신학은 한국 교계의“분열”의 정점에 서 있다. 그 이유는 박형룡을 위시한 소위 자칭 “정통주의자들”이 바르트의 신학을 ‘신신학’또는 심지어‘자유주의 신학’으로 매도하여 교회 정치적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에서의 바르트 해석의 지형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박상규, 177-178쪽)

   

칼 바르트 신학자들은 박순경의 태도 변화를 비판하였고, 또 바르트 비판가들은 박순경을 환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박순경 자신은 스스로를 끝까지“바르트 전공자”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박순경이“바르트 신학을 서양신학의 마지막으로 간주”하고,“ 그동안 서양 신학 전통에 너무도 몰입해 왔음에 반하여 이제 한국 신학적 주제를 취하겠다는”결의를 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순경의 이러한 신학적 결단을 칼 바르트 신학과의 완전한 단절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박순경은 그 이후에도 칼 바르트 교회교의학을 번역하겠다는 의지를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으며,“ 바르트 신학 전공자로서의…책임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순경은 한 편으로는 바르트 신학의 결정체인 교회교의학을 번역해서 소개하는 과제와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의 분단과 이념문제 그리고 통일문제를 신학적으로 해결하는 과제를 “병립시키려고”무던히 애쓴 신학자였던 것이다. 박순경은 이 두 과제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었을까? 두 과제는 완전히 분리된 과제였을까? 박순경 자신이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분단 이데올로기와 통일에 대한 박순경의 신학적 해법은 역시 바르트의 신학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앞서 박순경이 민족통일신학으로 관심을 전향하면서 했던 선언, 즉“인간이 다스리는 교회나 국가가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해서 인간의 권력과 권위를 절대화하려는 위험과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기본적인 인식이며 동시에 도구”를 신학으로 규정하는 선언에서 우리는 칼 바르트의‘바르멘 신학선언’제1항의 흔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박상규, 186쪽)

   

   

2-4. 계몽주의

   

시민들의 자유에 관한 무신론적이고 이성주의적 견해들에 반대하여, 버크는 하나님을 숭배하고 정부, 의회, 통치자들, 귀족, 그리고 영적 기관과 같은 역사적으로 뿌리를 받은 기구들, 즉 그 안에서 시민들의 자유가 구체화될 수 있는 기구들을 존중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그런 존중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에 따르면 인간의 기본적 도덕개념과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헬베티우스와 홀바흐와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그런 존중을 선입관이라고 비판했지만, 버크는 그 선입관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소중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지혜와 덕목들을 장려하고, 정치적 삶을 강화시켰기 때문이다.(김병국 , 195쪽)

   

⑴ 기독교 자연법 ~ 헬레니즘 자연법

   

버크도 역시 자연법을 지적했는데, 그 때 그가 의미했던 것은 초이성적인 하나님의 법이었다. 그것은 우주적 질서 속에서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법이었다. 비록 버크도 사회계약에 대해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가 의미했던 것은 로크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버크가 의미했던 것은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과, 미래에 태어날 세대사이에 맺어진,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성격을 띤 원시계약이었다.

만약 로크가 사회계약과 자연법에 기초한 것이라고 간주한 법들이 정부에 의해 훼손된다면, 그 계약은 국민들에게 반란의 권리를 제공했다. 모든 세대들은 그 계약을 새로이 평가할 수 있었다. 버크에게 있어서 그 문제는 더욱 어려웠다. 그에게 있어서 정부의 독재는 하나님의 법과 상충하는 것이었지만, 무법한 반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버크는 너무 강력한 전제군주의적 권력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지만, 로크가 주장한 국민주권과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오직 극단적인 독재의 경우에, 헌법적 권리들과 자유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전제하에서만, 자유를 위한 싸움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의 시대의 대부분의 정치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국민의 이익을 위한 제한된 형태의 민주주의를 옹호했을 뿐이지 국민에 의한 민주주의를 옹호하지는 않았다.(김병국, 200쪽)

   

여기서 허치슨은, 사익의 추구가 그 '의도되지 않은' 결과로 공익에 기여한다는 멘더빌의 주장에 반하여, 사람들은 상호승인을 받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과정에서 공익에 기여하게 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사익을 추구하는 행위가 어떻게 타인에게 승인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해 그것이 '전체의 이익'에 기여하기 때문이라는-맨더빌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근거를 제시한다. (이종흡, 191쪽)

   

사회구성원의 한결같은 - 즉 규칙적인- 자기승인에 대한 허치슨의 강조는, 도덕감각에 기초한 냉정한 자기승인의 상호작용이 거대한 추상적 사회, 즉 상업사회에 정착되는 것이야말로 그 사회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동시적으로 결정하는 관건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허치슨의 이러한 의도는, 1750-60년대 스코틀랜드 명사들의 토론주제에 반영되었다. 각종 토론회에서 단골 메뉴였던 사익과 공익에 관한 논의는 허치슨의 폭넓은 영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이종흡, 195쪽)

   

본래 계몽운동은 유럽과 미국의 현상이었고 숫자적으로 가장 중요한 형태의 종교인 기독교문화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이 역사적 관찰은 중요하다. 종교 일반에 대한 계몽주의 비판은 종종 기독교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부각되었다. 전례없이 강한 열정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바로 기독교 교리였다. 전례 없이 강한 비판적 검증에 시달렸던 것은 이슬람이나 힌두교 경전이 아니라 기독교 경전이었다.- 문학적․역사적으로 성경이 마치 다른 책인양(벤자민 조베트) 비판을 받았다. 비판적 재구성의 대상이 된 것은 모하메드나 붓다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생애였다.

종교에 대한 계몽주의 입장은 주목할만한 지역적 편차를 보였다-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지역적 요소를 반영하면서, 이런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경건주의인데 영국과 미국적 형태로 메소디스트(감리교파)라 알려져 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 운동은 종교의 경험적 측면을 특히 강조했다.- 일례로 존 웨슬리의 실험적 종교 개념을 보라. 이러한 종교적 경험에 대한 관심으로 기독교는 대중의 종교적 상황과 근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는 (대중과 무관한 듯이 보인) 루터교회 정통주의의 지성우위적 태도와 크게 대조적이었다. 경건주의는 기독교 신앙과 경험간의 고리를 공고히 했으며 기독교를 정신뿐만 아니라 가슴에 속한 것으로 만들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 336-337쪽)

   

먼저 17세기 동안 스코틀랜드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수준에서 보수적 영향력을 행사해온 '교회'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가 엘리자베스 여왕을 승계한 이래로, 교회는 런던으로 이주한 왕실을 대신하여 고도의 자치권을 가지고 스코틀랜드의 내정을 주도하였다. 원래부터 강성 칼비니즘으로 무장하였던 교회는, 크롬웰 정부 하에서 잠시 은둔해 있던 지도부가 스튜어트 왕정복고(1660)와 함께 복귀하면서 스코틀랜드를 이후 수십년간 암흑시대로 이끌었다. 그 결과 16세기에는 파리를 지식 수도로 삼았을 만큼 개방적이었던 스코틀랜드 지성계는 17세기 후반에는 유럽의 나머지 지역으로부터 고립된 명실상부한 유럽의 변방으로 전락하였고, 편협한 지역주의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명예혁명 이후로 점차 개선되었다. '광교회'처럼 자유사상과 과학적 사고를 결합한 국교회 노선이 유입되었음은 물론, 라이덴, 옥스포트, 캠브리지, 파리, 제네바 등지에서 자연과학의 새로운 문화적 충격을 소화한 젊은 신학자들이 에딘버러와 그래스고우로 집결하였다. (이종흡, 181-182쪽)

   

⑵ 이신론. 자유주의 신학

   

'계몽'의 근본 성향이 전통적인 권위로부터의 인간해방으로서 이해된다면, 18세기의 유럽 및 독일의 계몽주의는 독특한 역사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럴 것이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보면 과거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할 수 있는 정신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제한된 의미에서의 치적 능력을 지닌 유일한 계층은 시민계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민계급이 벗어나야 할 굴레로서의 권위집단은 유럽의 중세이래 봉건사회의 몰락까지 자신들의 힘과 권위로써, 정신적, 정치적, 사회적 질서를 유지해온 귀족과 승려계급이었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18세기의 유럽의 계몽주의는 봉건귀족과 기독교의 승려들이 구심점을 이룬 낡은 체제로부터의 해방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해방운동의 표어는 귀족들의 통치가 없어도 국가(사회)의 유지가 가능하며, 교회의 가르침이 없어도, 즉 성서와 신의 계시가 없어도, 인간의 내면적 양심에 따른 도덕율의 생성과 유지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18세기의 계몽주의는 시민계급의 홀로서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당시의 모든 계몽철학이 이러한 홀로서기를 이념적으로 준비하기 위한 시도들임은 물론이다. (김수용, 116쪽)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을 이룩하기 위해 계몽주의자들이 뛰어넘어야 할 가장 큰 장애물은 비이성적인 교회의 신앙이었다. 특히 ‘기적’은 계몽주의자들이 극복해야 할 가장 비합리적인 신앙 현상이었다. 기적은 그 정의상 신의 법과 영원한 이성의 법에 위반하여 일어나는 일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신론자들이 볼 때 성서에 기록되어 있고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기적은 인간 능력의 발휘를 저해하고, 이성을 미성숙 상태에 빠뜨리는 가장 큰 문제거리였다. 기계론적인 세계 속에서 기적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교회는 외적이고 부당한 권력을 가지고 비합리적인 기적을 옹호하며, 인간들을 정신적 노예상태에 가둬둔다. 그렇기 때문에 이신론자들은 기적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하였고, 이 비판은 부당한 권위로 사람들의 계몽을 저해하는 종교 권력, 즉 교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김진혁, 18쪽)

   

이신론자들이 보기에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비합리성과 왜곡의 근본 원인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이원화된 구조 있었다. 성직자들은 부당한 권위를 사용하여 평신도들에게 비합리적인 신앙을 강조하고, 기적을 믿으라고 부추김으로써 그들을 미신 상태에 가둬둔다. 성직자들은 신이 인간에게 본래적으로 수여한 이성의 발전을 저해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의 순수한 이성적 가르침을 오염시킨 자들이다. 이성이 신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에도, 성직자들은 설교를 통해 이성을 부패시키고 있다. “절정에 이른 웅변은 이성이나 반성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고 전적으로 상상과 감성으로 흐르며, 청중을 사로잡아 그들의 판단을 흐린다.”(김진혁, 20쪽)

   

⑶ 이성 존중

   

철학운동으로서 계몽주의의 확산은 자연과 인간사회에 대한 다양한 과학적, 합리적 탐구를 촉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계몽사상가들이 핵심적으로 다루었던 가치들은 다음과 같다(Hall and Gieben, 1992).

① 이성: 계몽사상가들은 지식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경험과 실험으로 단련된 이성과 합리성의 일치성을 강조했다. 이들은 경험과 무관하게 자명하고 생득적인 관념에 기반한 합리적 사고과정으로 이성을 간주하는 ‘합리주의적 이성’ 개념을 이어받아, 이를 경험주의 전통과 결합시켰다.

② 경험주의: 자연과 사회에 대한 일체의 사상과 지식은 인간 존재의 감각기관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경험적 사실과 대상에 기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③ 과학: 17세기 과학혁명에서 발전된 실험적 방법에 기반한 과학적 지식이 모든 인간지식을 확장시키는 열쇠로 간주되었다.

④ 보편주의: 과학은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으며, 그 원리는 모든 상황에서 동일하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⑤ 진보: 인간 존재의 자연적, 사회적 조건은 과학과 이성의 적용을 통해 개선될 수 있으며 행복과 복지수준을 부단히 향상시키게 된다고 보았다.

⑥ 개인주의: 개인은 모든 지식과 행위의 출발점이며, 개인적 이성은 좀더 높은 권위에 종속될 수 있음이 주목되었다.

⑦ 관용: 모든 인간존재는 종교적, 도덕적 믿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다른 인종이나 문명의 믿음이 유럽인의 기독교적 정신보다 본래적으로 열등하지 않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⑧ 자유: 믿음, 교환, 의사소통, 사회적 상호작용, 성과 재산소유에 대한 봉건적, 전통적 통제와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추구하였고 또한 구현하고자 했다.

⑨ 인간본성의 단일성: 인간본성의 주요 특징은 항상,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다고 간주되었다.

⑩ 세속주의: 종교적 정통에서 자유로운 세속적 지식의 필요성을 강조했다.(조명래, 164쪽)

   

계몽주의의 3세대는 칸트(1723∼1804), 스미스(1723∼1790), 튀르고(1727∼1781), 퍼거슨 (1723∼1816) 등으로 대표된다. 동프로이센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의 소시민 가정에서 장성한 칸트는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 계몽적 시민육성책의 혜택을 받았으며, 이를 배경으로 1781년에 집필한 『순수이성비판』은 뉴턴의 수학적 자연과학에 의한 인식구조에의 철저한 반성을 통해 종래의 신 중심적 색채가 남아 있던 형이상학의 중심개념을 인간 중심적인 것으로 바꾸어 서유럽 근대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하였다.

스코틀랜드 출신 스미스는 글래스고우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이었지만, 1764∼1766년 사이 청년 공작 바클루의 개인교사로 프랑스 여행에 동행 하면서 볼테르, 퀘네, 튀르고 등을 알게 되었다. 그는 특히 퀘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귀국 후 집필한 『국부론』은 근대경제학의 효시가 되었다. 스코틀랜드 퍼스셔 출신의 퍼거슨은 에든버러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사회의 본질과 기원의 탐구를 철학의 중심 과제로 생각하고, 인간 천성의 사회적 성격을 도덕적 행동의 원천으로 간주하는 『도덕학과 정치과학의 제 원리』를 집필하여 사회과학의 정립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3세대에 걸쳐 계몽사상가들이 다양한 영역에서 이룩한 성과는 계몽주의세계관을 인식론, 경제학, 사회학, 정치경제학, 법률개혁과 같은 전문화된 분과로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되었다. 근대 사회과학의 등장과 분화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미국의 역사학자 크레인 브린튼(Crane Brinton)이 ‘……18세기 말에 지적인 에너지가 역사상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한층 더 사회 속의 인간문제에 투여되었다’고 주장했던 것은 인간사회에 관한 과학적 탐구와 이해가 이 시대에서부터 본격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조명래, 168-169쪽)

   

종교에 대한 독일 계몽철학의 비판적 검증은 처음부터 하나의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고 있었다. 즉 계시를 세계의 정신적 질서의 마지막 근원으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계몽철학자인 크리스티안 볼프가 격렬한 논란을 불러 일으킨 할레 대학에서의 강의에서 인간이 신의 계시 없이도 도덕을 발전시키고 이를 따름으로서 해옥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강조한 배경에는, 인간이 오로지 자신의 정신적 도덕적 능력을 통해서, 다시 말하면 신의 은총 없이도, 죄악의 나락이나 혼돈에 빠지지 않고 공동체안에서 질서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적 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수용, 120-121쪽)

   

이처럼 이성이 목적의 의미에 대한 성찰을 포기하면, 그리고 사유를 단지 효율성의 창출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면, 그래서 합리성이 오로지 목적과 수단의 효율적인 연결로서 이해되면, 이러한 이성은 좋은 목적에도 그리고 나쁜 목적에도, 선과 진리에도, 그리고 악과 거짓에도 봉사할 수 있다. 때로는 정당한 방법으로, 때로는 부당한 수단으로, 중요한 것은 수단의 정당함과 부당함의 여부가 아니라 효율성이기 때문이다. (김수용, 137쪽)

   

계몽주의자들이 보기에 자연종교 혹은 합리적 그리스도교는 보편적인 자연법을 가지고 있기에 관용의 정신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계시종교인 그리스도교는 계시의 유일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독단적이고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레싱(Gotthold Lessing)은 “현자 나탄”에서 반지의 비유를 들어 계시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며, 타종교를 인정하는 종교적 관용의 미덕을 강조한다.(김진혁, 24쪽)

   

‘이성’과 ‘자연’의 계몽주의 사고의 세 번째 원리인 ‘자율’의 길을 열어 놓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시대에는 자율적인 인간이 진리와 행동의 결정권자가 되어 외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교회가 가르침의 직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논리에 호소한다든지, 이것은 성경 말씀이니까 또는 이것은 기독교의 교리니까라는 식으로 호소하는 것이 신앙이나 행위를 부추기는 수긍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한 것이 되지 못한다. 이제는 개인이 권위에 대한 그런 종류의 모든 외적 주장들을 시험해 보려 들기 때문이다. (스탠리 그랜츠․로저 올슨, 26쪽)

   

고전 역학 및 그 자연관은 영국의 초기 계몽주의를 포함하여 이후 계몽주의 철학의 전개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한다. 무엇보다 언급된 고전 역학의 에피스테몰로기적 출발전제 즉 인식주체와 인식객체의 이분법은 계몽주의철학에서의 ‘과학적’ 지식에 대한 고찰 곧 에피스테몰로기를, 인식에서의 주체와 객체의 일치문제나 과학의 실제적 한계문제 등에 대한 연구프로그램 곧 인식론으로 조직한다. 이 때 인식주체와 인식객체의 이분법에서 출발하는 이 인식론적 연구는 특히 인간의 특수한 자연적 본성, 곧 자연의 한 부분인 인간을 인식주체로서 인식객체인 타 자연과 구분하는 그 특수한 자연적 본성에 대한 물음으로 전개된다. 계몽주의철학에서 인간의 특수한 자연적 본성에 대한 물음은 인식의 선험적인 조건에 대한 탐구라는 인식론적인 차원에만 제한되어 전개되지 않는다. 인간의 특수한 자연적 본성이라는 문제제기와 이에 대한 답변은, 고전 역학적인 자연관의 수용 및 고전 역학적 방법론을 ‘과학성’의 표본으로 간주하는 드물지 않은 경향과 함께, 계몽주의, 특히 영국의 초기 계몽주의의 ‘과학적’ 사회형성론의 근거를 이룬다.

달리 말해, 인간의 특수한 자연적 본성까지 포괄하는 ‘자연’이야말로 계몽주의, 특히 영국의 초기 계몽주의 철학 및 그 사회형성론이‘과학적으로’ 정초되는 근거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 어떤 권위와 억압에 대해서도 반대하며, 인간의 특수한 자연적 본성으로서의 ‘이성’등을 포함하는 ‘자연’에 근거하여 ‘과학적’ 사회를 형성하고자 하는 초기 계몽주의의 사회형성기획은 동시에 혁명적이며 해방적인 기획이다. 그러나, 후술되듯이, 이 초기 계몽주의에서 그들의 사회이론은 자연에 대한 특정한 전제 또는 특정한 자연법칙에서 환원론적으로 도출된다. 이런 의미에서 초기 계몽주의의 사회형성론은, ‘자연’을 어떠한 형태에서건 역사나 문화 등을 망라하는 모든 현상의 근거(Grund)이자 규준(Norm)으로 설명하는 이론적 정초방식 (Gawlick, 1984,517쪽 참조), 곧 자연주의라는 근본전제에 입각해 있다. 그러나, 특히 4절에서 논의될 것처럼, 초기 계몽주의의 사회형성론은 바로 이 자연주의적 문제틀에 의해 이론내재적으로 제약된다.(권정임, 125-126쪽)

   

종합해 볼 때, 홉스의 사회형성론은 특정하게 전제된 인간의 자연적 본성 및 외적 자연으로부터 환원론적으로 도출되는 자연주의적인 문제틀에 기초한다. 이 때 이 자연주의적인 문제틀은 동시에 스토아철학과 고전 역학에 공통적인 결정론과 비역사성 및 사회가 인간개인의 자연적 본성, 또는 기껏해야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매개로 하는 두 개인의 관계로 환원되어 파악된다는 의미에서 방법론적 개인주의(이하 개인주의로 명명)에 의해 구조화된다. 또한 비록 일관되게 관철된다고는 할 수 없으나, 경험주의 역시 홉스 철학의 한 근본전제라 할 수 있다. 결국 홉스의 사회형성론의 철학적 기초는 이 자연주의적 문제틀 및 언급한 자연지배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권정임, 134쪽)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로크의 “시민사회”란 그에 의해 “자연적인 것”으로 경험주의적으로 수용된, 당대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재산소유자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의 영역이다. 나아가 이 시민사회가 그에게서 실제로는 정치조직에 의해 안전하게 유지되는 이상적인 “자연상태”임을 고려할 때, 시민사회는 그에게서 자연적이고 이상적인, 정치조직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영역으로 간주 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정치조직에는 이 시민사회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자율성을 보장하는 역할만이 할당됨으로써, 정치조직은 시민사회에 상대적으로 종속된다. 즉 경제적 자유방임주의가 철학적으로 예비된다. 나아가 이 시민사회의 자율적 자기운영은 그에게서 “인류공동의 자산”증대와 동일시되는 사유재산의 축적을 야기한다는 의미에서, 또한 사회의 진보를 결과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Locke, 1690, § 37 참조).(권정임, 136쪽)

   

그러므로 이성의 원리란 우주 전체의 바탕을 이루는 근본 질서가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가리켰던 말이다. 이러한 우주의 객관적 합리성 때문에 자연의 법칙이 인식될 수 있었고 또 그 결과 이 세상은 인간의 활동을 통하여 개조되고 정복될 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합리적 세계와 인간이성의 활동이 일치한다는 사실은 비판적인 이성을 발휘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이성의 원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 두 번째 원리인 ‘자연’이다. 이 원리는 ‘물질의 본질’에 내재되어 있고 그 본질로부터 발생하는 것에 대하여 강조한다. 계몽주의자들은 우주를 내재적으로 자연의 법칙을 가지고 있는 질서 정연한 체계라고 간주했다. 그러므로 자연과 자연법이라는 말들은 지적 추구에서 표어가 되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물질의 본질’속에서 발견되는 질서는 자연을 고안한 위대한 디자이너의 활동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신념 때문에 계몽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발견하기 위하여 모든 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펼쳐져 있는 ‘자연의 책’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이 ‘자연법’의 보편적 유용성 때문에 자연은 모든 싸움을 판가름하는 중재자로서 소청 심사의 일반 재판소가 되었다. 또 인간의 지적 노력의 목표는 이성을 통하여 발견한 자연의 법칙에 삶을 순응시키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주체적 이성은 객체적 이성에 대한 정확한 이해나 자리매김이 없이 스스로 객체적 이성화함으로써 오늘날 이성의 위기가 도래되었다. 이 말은 주체적 이성이 자기 주위의 존재자 일반에 대한 진리 파악도 없이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고 전제함으로써 암묵적으로 객체적 이성이 자신의 주체적 이성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양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적 이성은 스스로 객체적 이성이 되었으며 이제 더 이상 객체적 이성에 대한 탐구는 필요 없는 것으로 선언함으로써 스스로 더 이상의 이성적 정당화를 가능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체적 이성은 지난 천년동안의 계몽 과정 속에서 신화와 미신을 물리치는 당연한 것 또는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럼으로써 이성은 이제 자기 정당화속에서 인간적 삶의 신성함과 정의를 주체와 이성 개념 자체로 전도하였다. 이것을 중세적 세계관의 해명에 따라 해석한다면 주체적 이성은 이제 그것 자체가 모든 것의 기초가 된 것이며, 이것에 따라 모든 사유가 가능하게 된바이다.하지만 이 모든 것은 주체적 이성이 객체적 이성을 분리한 계기가 성공함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서 주체적 이성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명확한 증명을 생략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이익의 입장에 따라서만 판단하는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며 전체주의의 위험을 낳게 된 작인이 되었다.

호르크하이머는 주체적 이성의 객체적 이성화를 철학사적으로 논하고 있다. 그는 이것이 데이비드 흄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그는 흄이 객관적이고 표준적인 것에 대한 사고를 통해 사고의 가능성을 그저 자연적인 것에 둔 데 만족하였다고 비판한다. 물론 흄이 인상과 관념의 개념을 통해 자신의 인식론 체계를 형성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흄은 인간의 선천적인 추리 능력인 이성이 감관의모든 명증으로부터 독립되어 추상적인 과학 예를 들어 수학적인 진리 등을 가능하게 하는 바 이것은 모든 경험과는 별도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한상륜, 34-35쪽)

   

   

⑷ 자기 보존 욕구로서 움직이는 시민들의 자율사회

   

코젤렉의 말처럼, 계몽주의의 역사적 의미를 '사적인 내부를 공적인 영역으로 확장한'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면, 영국의 사회계약론의 전통은 자기보존이며 사유재산같은 사적 요소를 공적 영역으로 편입함으로써, 계몽주의의 중요한 목표를 실천한 주역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사회계약론은 사람들 사이의 자발적인 계약과 그 계약하에서 영위되는 개개인과 사회생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개개인의 역할, 즉 시민의 권리와 의무에 초점을 맞추었다. 공적 질서는 사회적 관계 그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계약의 산물인 국가와 공권력에 의해서만 정립되고 영속된다.(이종흡, 176쪽)

   

하이에크는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바로 그의 자생질서론의 핵심이라고 본다. 인간 사회에서 개인들의 다양한 사적 이익의 추구가 결국에는 공적 이익에 부합하는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낳는다는 스미스의 주장은 공적 이익의 증진을 위한 그 어떤 기획도 그리고 정부의 간섭도 필요하지 않다는 하이에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스미스는 분명히 초기 자본주의 사회인 상업사회의 도래로 나타나는 사회적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손이 필요하다는 점도 언명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조승래, 320쪽)

   

큉이 주장하는 인간의 가치와 그것을 평가하는 척도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는 세계윤리만이 아니라 바로 현재 제2의 계몽주의 논리에도 필수적 요소다. 이와 반대의 경우 즉 인간의 능력과 가치, 미래 사회에서 계몽주의의 역할에 대한 최대의 합의, 바꿔 말하면 그것에 대한 정치하고 많은 조건들을 찾는다면 그 내용들은 풍부해질 수 있지만 문제는 그에 반비례해서 소수의 사람들만의 합의를 이끌어 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실현성은 떨어진다. 이처럼 제2의 계몽주의 담론이 실현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최대의 합의를 위한 최소의 조건이 중요하다. 본고에서 독일문학을 통해 제시한 제2의 계몽주의 담론의 문학적 구체화 가능성 역시 그 최소의 조건이라는 요구를 충족시켜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고는 다른 문학적 가능성도 열어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이를 오히려 적극 지지한다. 본고의 고찰은 이런 점에서 하나의 시도이자 제안일 뿐 결코 완결된 작업이 아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제2의 계몽주의의 담론이 보여주는 새로운 계몽주의의 논리가 인간의 평화적 공존과 인간 사회의 존립을 위한 진지한 노력으로 발전해야 할 것이다.(조우호, 97쪽)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에 따르면 계몽은 자기 보존의 충동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 충동이 이성을 억압적 지배와 결합해 있는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시킨다. 만약 계몽에 의해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전락을 무효화하고 이성을 회복하는 것도 해결의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하버마스). “‘계몽의 변증법’에서 그 부정성이 폭로된 ‘도구적 이성’에 대립하여 다른 유형의 이성을 제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이에 대한 대안도 다양하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도구적 이성의 폭압으로부터 벗어날 어떠한 가능성도 열어놓지 않으며,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본다. 비록 ‘전락’이라는 말이 도구적 이성 이전의 어떤 본래적인 이성의 개념을 암시하기는 하지만, 이 이성이 만약 호르크하이머가 말하는 ‘객관적 이성’과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계몽이 종교적-형이상학적 세계관을 해체할 때 그 세계관과 함께 해체되어 버렸으며, 종교적-형이상학적 세계관이 회복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객관적 이성도 복구될 수 없다는 것이다.(정태창, 178쪽)

- 자기 보존 욕구는 자기 중심적인 타락으로 쏠릴 위험을 갖고 있다.

   

특히 기독교주의와 그리스 헬레니즘에 근거한 이성적 인간상의 붕괴는 오늘날의 나르시시즘 경향을 통해 쉽게 목격된다. 라쉬는 현대인의 나르시시즘을 강력한 자기 사랑(selflove)이라기보다 공격적 충동에 대한 방어로 파악한다(Lasch, 1989: 50~53). 나르시시즘은 타인에 대한 의존의 두려움과 결합된 타인들이 제공하는 대리적 온정에의 의존, 내면적 공허, 무수히 억압된 분노, 그리고 충족되지 않은 구강의 갈망과 함께 위장된 자기통찰, 계산적인 유혹, 신경적이고 자기 경시적인 유머라는 제2의 특징도 함께 갖는다. 이러한 특징들은 노령과 죽음에 대한 극심한 공포, 시대에의 변화감, 명성에 대한 매혹, 경쟁의 두려움, 유희 정신의 퇴조, 남녀관계의 악화라는 사회현상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이러한 현대인의 나르시시즘은 도구적 합리성의 극단화가 부른 감성세계의 황폐화와 외로움의 병이 전면화된 결과이다.(윤명희, 55쪽)

   

   

2-5. 아시아 계몽주의

   

⑴ 민중신학은 외형상 아르미니우스주의나 펠라기우스주의 처럼 자기 안의 神性을 말하나, 샤머니즘에 기초된 것으로 합리주의사고와는 물과 기름처럼 다르다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인간의 본성은 리이다(性卽理)’라는 사상은 성리학의 본지적인 명제이다. 그런데 이병헌은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마음의 본질을 性理 즉 본성의 理로 보지 않고, 神 개념으로 설명한다. 만일 성리학자들처럼 마음을 리․기라고 한다면 마음이 神明과 主宰의 실체라고 말할 수 없다.(중략) 이 영혼은 불가측성의 측면에서 이름부친 신과 동일하며, 이 지각과 기운을 밝게 수양하면 입신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박미라, 140-141쪽)

   

(이능화 서술)

한편 이러한 다 종교들을 서로 회통시키기 위하여 세계의 고대 종교 사상에서 공히 발견된다고 믿는 하늘의 문제를 크게 제기하였다. 하늘이야말로 제종교를 총합하는 중요한 회통의 준거가 된다고 보았으며, 더불어 하늘의 천제에서 비롯되는 우리의 역사도 영원한 하늘의 근원성과 보편성에 통합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여기에는 종교간의 갈등을 넘어서고 망국의 상황에서 자존감을 되살리려는 그의 시대적 고심이 깊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의 안목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요청되는 현재진행형이라 이를 만 하다.

이러한 일제의 논리는 당시 일본인의 연구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1910년대 도리이류조의 무격조사는 주로 일선동조론의 관점을 보여준다. 그의 연구는 타일러의 잔존 개념을 활용하여 조선의 무속을 일본 원시신도의 잔존형태로 자리매김하려 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는 한국의 종교를 유교와 불교 두 종교에 의해서 성립된 것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인류학적 관점에서 보면 유교와 불교는 고유종교의 외피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한국의 고유한 종교는 샤머니즘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그는 조선의 고유종교를 샤머니즘으로 보면서, 조선의 무속에는 일본의 원시신도적인 요소, 나아가 일본 민족의 기원을 찾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과 일본이 같은 근원을 가진다고 확신하고, 이 사실을 연구하고 알리는 조사기구를 총독부 안에 설치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용범,111쪽)

   

비록 유교적인 맥락에서 정의된 종교로서의 유교지만, 이제 유교는 민족 자치의 근본으로 정립된다. 이항로와 같은 보수적 도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는 유교 또는 도보다 하위의 위상을 갖는다. 근본주의 도학자들은 국가가 없어도 종교가 있을 수 있으며 종교가 제대로 있으면 언젠가 국가도 회복된다고 본다. 이러한 입장은 국가의 존망과 무관하게 영원한 가치를 갖는 도의 존재를 전제한다.하지만 국권 위기의 시대에 유교는 민족 자치라는 시대적인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통로로서 새롭게 규정된다.

조선왕조를 벗어나 근대적인 민족국가를 지향한 대한제국시기에도 국가는 예절․음악․형벌․정치 등 문물과 제도는 여전히 유교를 기본 요소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국가의 운명에 책임을 지고 있는 지식인은 유교가 아득하여 알 수 없는 초이성적인 서양의 종교와 다르다고 본다. 다시 말해 사적인 개인이 절대자와 맺는 초이성적인 관계가 중심인 근대 서양종교와 달리 유교는 철저히 국가의 공적인 제도와 문물의 차원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다. (임부연, 67쪽)

   

<답> 至氣라 함은 천지간 지극한 氣를 두고 이름이니 그 氣는 至虛至靈하고 無事不涉하며 無事不命하여 사람도 그 氣로써 生하고 만물도 그 氣로서 生하나, 형용코자 하여도 형용할 수 없고, 듣고자 하여도 들을 수 없고 보고자 하여도 볼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曰 渾然一氣라고 하는 것이며, 금지라 함은 이 도에 드는 자는 반드시 지기로써 나고 지기로써 사는 것임을 알라 함이요, 원위대강이라 함은 내게 있는 그 기와 우주 사이에 있는 그 기가 서로 합하여 크게 화함을 원하는 뜻이며, 시천주라 함은 다 안으로 그 영이 있어 살고 밖으로 그 기가 있어 사는 것이다. 그것을 한울님으로 알라는 말이며, 조화라 함은 무위이화라 함이니 그 기가 능히 사람이 생하고 능히 사람이 사는데 있어 능히 화하는 자나, 그 되어도 되는 바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니 무위이화, 그것을 일러 왈 한울님이라고, 조화라고 하는 바이며, 정이라 함은 무위이화로서 된 영과 무위이화로서 된 기를 잘 가져 그 덕에 합하고 그 마음을 전한다 함이니 이는 道 닦는 자로 하여금 저 한울을 믿지 말고 내게 있는 한울을 믿으라는 말이며, 영세라 함은 우리 일평생을 두고 이름이요 불망이라 함은 우리가 무위이화하는 그 기로써 살고 그 영으로서 살아감을 일평생 두고 잊지 말라는 뜻이니, (오지영, 24-25쪽)

   

조소앙은 이미 일본 유학 시절 부터 종교에 관심이 많았는데, 1915년경 국내외 동포의 대동단결과 세계종교의 통일을 위해 '육성교'를 제창하였다.

조소앙은 인류사에서 종교상의 6대성인으로 ① 단군 ② 부처(석가모니) ③ 공자 ④ 예수 그리스도 ⑤ 소크라테스 ⑥ 마호메트 를 들었다.

조소앙에 의하면, 6대 성인의 가르침 속에는 서로 상합하는 것이 있다. 六聖相合之場에 해당하는 것을 '一神'이라고 할 수 있다. 조소앙은 위의 육성과 상합하여 관통하는 일신의 가르침을 교화하면, 모든 독립·자유·평등·행복을 정신적으로 얻을 수 있으며,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설명하고 육성교를 제창하였다. (신용하, 13쪽)

   

   

신화적 정의관이 서서히 한계를 드러낸 것은 90년대 중 후반이후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부터이다. 민주화를 언제부터 잡느냐는 여전히 논쟁거리이지만, 빠르게는 80년대 중반까지 저항운동의 지도자였던 김영삼이 정권을 잡은 90년대 초반, 늦어도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90년대 후반을 그 시작으로 놓을 수 있다. 민주화를 이끌어 왔던 측이 집권하여 현실적으로 정책을 주도하게 되면서 그들이 내세웠던 비전은 그 실현에 예상보다 훨씬 긴 시간과 인내, 심지어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졌다. 그들은 한국 사회를 많은 부분 크게 변화시켰지만, 그러나 그 변화는 또한 그들 스스로가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만큼은 아니었으며, 급속한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의 개선을 바랬던 사람을 만족시키지도 못했다. 더욱이 이들의 정책비전은 그 실현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다른 문제들을 낳기도 하였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정의에 대한 부풀려진 기대감, 즉 정의로운 이들의 손에 권력이 넘어갈 때 제반 사회경제적 문제들도 동시에 빠르게 개선되리라는 전망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정의로운 지도자가 반드시 현명한 지도자는 아니라는 인식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특히 90년대 후반의 경제위기는 오로지 전문가에 의해서만 이해되고 해결될 수 있는 어떤 특수한 영역으로서의 ‘경제’가 존재하며, 정의, 자유, 인권, 평등 따위의 가치는 아무런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의를 일의적 목표로 들고 나오는 지도자는 가치에 매몰된 우인이며 무능한 정치지도자일 수 있다는 의심이 자리를 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정의라는 가치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이 퍼진 것은 적어도 사회언설차원에서 본다면 이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신화적 정의관의 영향력이 세고 뿌리가 깊었던 만큼 그 반동 역시 모두에게 놀라우리만큼 급속하였다. 기존 사고체계의 균열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 내에 급속히 피어나온 속류 실용주의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 길게 재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윤비, 202-203쪽)

   

⑵ 동북아 지식인들의 전통문화 비판

   

계몽주의 사조가 왜 중국에서 성장하기 어려운 지에 대해 노신의 “전제주의가 영원히 성장한다면, 소생은 쉽지 않다”(집외집 보편⋅「월탁」 간행사 集外集補編⋅「越鐸」 出世辭ꠗ)는 대답은 매우 정확하다 할 것이다. 전제주의의 분위기로 가득 찬 문화적 배경 앞에서 어떻게 독립된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각 의식이 생겨날 수 있으며, 어떻게 자신의 인격적 가치와 역량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 이는 분명 쉽게 할수 있는 일은 아니다. 중국에서 계몽주의를 실현하는 어려움은 공교롭게도 사람들이 이러한 전제주의의 숨결을 지탱하는 전통 문화의 속박을 보편적이면서도 심각하게 받고 있다는 데 있다. 중국 전통 문화에서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기부터 성장하기 시작한 ‘데모크라시’라는 의식은 결핍된 것이었고, 오히려 이러한 “영원히 성장하는” 전제주의의 질서가 오랜 기간 지속됨으로써 사람들에게 있어 정신의 개화와 소생은 당연히 말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노신의 인식은 확실히 매우 정확한 것이라 할 수 있다.(방준호, 752쪽)

   

루쉰은 20년대의 사상적 탐색 과정에서 국민성을 개조하려는 문제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관심 갖는 모든 문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성을 개혁하는 것으로, 만주족을 배척하는 최초의 개혁은 쉽게 달성할 수 있지만, 국민이 자신들의 나쁜 근성을 개혁해야 하는 두 번째 개혁은 수긍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앞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성을 개혁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전제(專制)가 됐건 공화(共和)가 됐던 무엇이 됐건 간판은 비록 바뀌지만 물건은 예전 그대로라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다”(『양지서⋅8 兩地書⋅八』)라고 여겼다. 청 왕조의 봉건 전제주의 정부를 전복시킨 후, “공화”의 간판을 내건 모든 과정을 “국민성을 개혁하는 것”보다 더욱 쉽게 보고 있으니, 이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관점이며, 따라서 모든 사회와 정치의 영역 안에서 진정으로 “공화”의 본성을 체현하려면, 이는 반드시 “국민성”의 “나쁜 근성”을 개혁하고 전체 국민의 사상적⋅문화적 소양을 제고시키는 문제를 해결한 후에야 비로소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전체 국민이 노예주의라는 “나쁜 근성”의 속박을 여전히 받는다면, 어떻게 간판”을 바꾼다 해도 전제주의의 실질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며, 그렇다면 자연히 다소간의 변화가 있다 해도 “모두 쓸모없는 것”이다.(林 非 原, 506쪽)

   

마루야마는 『문명론의 개략』에서 번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일본의 학자라는 것은 옆으로 된 글자를 읽고, 그것을 일본에 소개했을 뿐으로, 가로로 된 것을 세로로 만든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전통 속에서 자라난 문화를 이식하는 작업이다. 고대의 문명도입의 문제와 메이지 초기의 문제는 아주 비슷하여, 가로로 된 것을 어떻게 자기 품안의 것으로 받아들여 세로로 만들었는가, 거기에 사상의 독창성이 있었던 것이다. 의식적인 의역이란, 일본의 풍토에 부응해서 원래의 뜻을 살리고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는 것으로, 의식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원전의 왜곡을 행하는 것이다. 후쿠자와는 선구적인 사상가 중의 하나로 그런 일의 대가이다.’고 한다.

번역자에게 문화의 전통에 대한 이해와 의식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을 마루야마는 지적한다. 또 고자카 이도시아키(小坂井敏晶)는『민족은 없다』에서 ‘일본에서 외래문화의 수용이 쉬웠던 것은, 일본사회가 전통적인 가치관을 거스르는 외래요소 가운데, 이질적인 부분을 떼어내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전통적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파괴당하지 않으면서도, 신속한 수용에 성공했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일본이, 이 문화의 수용을 촉진하였던 요인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들고 있다.(원연희, 29쪽)

   

일본인은 본질적으로 내쇼날리즘에 대처하는 방법이 미숙하였다고 말하며, 극장국가 특유의 불완전 정통성이라고 하는 것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스스로 자신감을 상실했다고 그는 분석했다. 그 불완전 정통성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 사회 운영의 시나리오를 아무리 자신의 것으로 소화를 시켰다하더라도, 저쪽과 비교 했을 때, 언제나 불완전한 것으로 밖에 인식하지 않는 의식에서 생기는 현상으로 볼 수가 있다.

그리고 그는 ‘극장국가란 정치지상주의라는 속성을 그 특징으로 하며, 모든 것은 정치로 집약되었고, 명치시대의 일본은 전형적인 극장 국가’였다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쿠보 도시미치나, 이또 히로부미같은 훌륭한 연출가를 탄생시킬 수가 있었고, 문명개화는 정치적 각본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토라는 인물은 시나리오를 외국에서 차용해, 일본 식민지를 통치했기에 극장국가로서의 근대 일본의 훌륭한 연출가였다고 그는 보았다.

‘1882년에 후쿠자와가 쓴 「제실론」이라는 평론이 있다. 이글은 제2기 극장국가의 이론가인 후쿠자와가 천황제를 어떻게 부각시키려고 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천황제는 체제 측의 상징으로서 뿐만 아니라,반체제적 존재에게까지도 안도감을 줄 수 있는 기능을 내포하고 있다는 취지로서, 극장국가인 일본에서의 천황은 불가결한 존재인 것이다. 제사의 지배자로서, 혹은 「극장」의 주인으로서 천황은 극장국가의 핵심적인 존재이다.’고 분석한다. 일본형 극장국가의 경우, 일본사회에 산재하는 모든 장에서의 모범적 중심은 천황으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일본은 극장국가이라서, 시나리오를 밖으로부터 차용해온다. 하지만 어느 사이에 이것은 일본화되며 풍토화되어 간다. 시나리오의 내용이 처음에 어떠했는가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일본은 모든 것을 일본화 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특징적인 것은 시나리오를 일본식으로 변용한다는 사실이라고 한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일본 이외의 곳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일본 고유의 정통 이론이 어느 틈엔가 형성되는 것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국민 모두가 공감해서 연출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일본적인 생활 감각, 생활양식에 입각한 시나리오여야 하며, 일본의 보수주의는 극장국가의 시나리오와 결합하여 성립한다는 것이다.(원연희, 84쪽)

   

- 유교지식인 (한국)

   

유교 개혁을 주장하고 국권을 상실한 뒤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박은식의 눈에 서양종교나 동학은 도의보다 허위와 연관되어 번성되는 해로운 종교였다. 국가의 굳건한 기초는 여전히 공자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백암에게 종교는 삼강오륜의 인륜이며 삼강오륜의 종교는 국가의 기초가 되는 국가의 紀綱이다. ‘도덕은 종교의 학문’이라고 하지 않고 ‘종교는 도덕의 학문’이라고 한데서 알 수 있듯이, 공적인 도덕은 사실상 종교를 포괄하는 위상을 갖는다. 여기서 ‘학문’은 체계적인 지식인 과학의 학문이 아니라 성현의 도덕적인 가르침을 배우는 학문이다.(임부연, 69쪽)

   

유길준은 조선이 개항 전까지 전통 유학교육을 받다가 개항 후 최초로 일본과 미국에 정식 유학생으로 근대교육을 받고 돌아와 한국사회에 서구문명을 소개한 선구적 지식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1894~1896년 간에 추진되었던 갑오개혁에서 군국기무처 의원, 내각총서 내무대신 등 요직을 차지하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 전 분야에 걸쳐 근대적 개혁의 주역을 담당한 정치가였다. 특히 그는 대표작 『서유견문』에서 조선의 개화사상을 집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 담론을 본격적으로 제시하여 한국근대의 출발을 표상하는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다.『서유견문』에 나타난 세계인식의 새로운 틀과 서구 근대의 제도와 법에 대한 서술은 그 논리적 치밀함이나 체계성에서 동시대인의 다른 텍스트들을 능가한다.

유길준의 개화사상의 특징은 전통의 윤리는 보존하면서 서구의 문명을 적극 받아들여 더 나은 보편문명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근대 서구문명을 무조건 거부하거나 일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선택적으로 수용하여 전통과 근대를 조화 또는 복합화하면서 조선적인 근대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안용환, 59쪽)

   

또, 일본 국학자들은 조선에서 큰 영향을 받고 유학연구를 진행해 왔다. 후쿠자와와 유길준의 학문적 기본인 유학을 비교해서, 양국의 사회가 전근대가 근대로 이동할 때 유교가 어떤 기능을 했는지 보고자 하다. 물론 그 주자학은 일본, 조선을 크게 변화시키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 만큼 서양의 충격 자체가 나라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던 큰 충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길준과 후쿠자와가 배웠던 유교 사상 안에서도 서양 문명의 첫걸음을 볼 수 있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일본, 조선에서는 사회변동을 일으킬 수 없었다는 것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서양 학문을 수용할 때에 있어서 그런 준비단계가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논문에서는 서양문명의 수용 준비 정도는 나라마다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생각하면서 분석하려고 한다.

그런 유교 사회적인 배경은 후쿠자와와 유길준 사상의 전환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즉, 그들은 서양문명을 그대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일본, 조선의 현실에 맞춰서 더 새로운 사상을 등장시켰다. 사상적 전환기 이후에는 후쿠자와와 유길준 사상은 표면적으로는 다른 길을 간다. 즉, 후쿠자와는 유교적 이성보다 일본의 현실을 중요시했고, 유길준은 조선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오히려 더욱 유교적 이성을 중요시했다. 그러나 이 배경에는 유길준의 사상이 서양의 약육강식에의 대항과 같은 맥락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이시바시 토모미, 9쪽)

   

위에서 봤듯이 조선과 일본에서는 주자학의 사회적인 의의(意義)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외국 학문을 배울때의 일본과 조선의 태도 차이다. 일본에서는 필요한 것을 자신에 맞는 이론을 만들어 이용해 왔다. 반면, 조선에서는 주자학을 자세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시 되었다. 학문에 절대성을 이해하고, 지키는 것에 강점을 놓는 이해 방식이다. 즉, 조선에서는 주자학에 대한 비판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리고, 주자학의 도덕성과 왕조의 도덕성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해서 주자학을 의심하는 것은 왕조의 정체를 의심하는 것에 연결되어 주자학을 비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체의 정당성이 주자학 위에 있던 조선에 비해, 일본은 학문을 막부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의한 도구적인 학문에 불과했다. 그러한 배경은 후쿠자와와 유길준의 학문을 수용할 때도 차이를 보여준다. 후쿠자와에는 학문을 수용할 때 도구적으로 유연성을 갖고 학문을 이해하려고 한 태도를 볼 수 있다. 그러한 유연성은 에도시대부터 이어지는 일본의 주자학과 같은 왜국 사상에 대한 수용의 태도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이시바시 토모미, 16쪽)

   

조선의 동도서기론은 동양에만 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교의 도(道) 는 절대적인 선이었다. 먼저 후쿠자와는 주자학의 도의 절대성을 부정했다. 동시에 서양의 도덕의 절대성도 부정했다. 후쿠자와는 동양의 도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과 동시에 서양의 도덕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걸로 전면적 아니지만 서양의 도덕도 인정해서 서양과 동양의 도를 연결시키려고 했다. 서양의 도덕을 일부만 인정했기 때문에 서양 문명의 수용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즉, 동도서기론에서 어려웠던 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논리를 후쿠자와는 준비했다.(이시바시 토모미, 20쪽)

   

- 중국 지식인

   

유람의 여정을 맺는 단계에서 량 치차오는 샌프란시코 화교사회를 대상으로 중국의 族民성을 제기했다. 먼저, 미국의 지방주의는 공화정의 기반이 될 수 있엇던 데 비해 중국의 그것은 왜 불가능한지를 물은 후, 그 이유에 대해 미국의 자치 정신은 '市制의 자치'이나 중국의 그것은 '族制의 자치'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중국인은 족민의 자격은 있어도 시민의 자격은 없다는 것, 즉 량치차오는 미국의 지방자치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중국 지방주의의 본질을 종족주의에서 찾았고 종족주의는 절대로 국가수립의 기초가 될 수 없다고 믿었다. 하물며 지방주의를 기초로 삼아온 미국조차 오늘날 노골적으로 촌락사상을 없애자며 중앙으로의 권력 집중을 강조하고 있는 지금에랴. 인구수가 고작 2만여에 불과한 샌프란시스코 화교사회가 수십개의 회관, 단체, 족제, 비밀결사들로 과분되어 툭하면 혈전 난투극을 벌이는 상황을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하면서, 그는 중국의 고질적 병통으로서 족민성을 끌어낸다. 물론 이는 중국의 국민성 일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종족주의를 토대로 삼았던 혁명파 진영을 겨냥한 것이었다. (백지운, 26-27쪽)

   

이는 중국 전통 문화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유가학설이 혈연관계로 연결된 종법 등급 제도라는 사회적 기초 위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며, 부계 가장 제도가 세습되고 확대되며 봉건통치를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國’)는 ‘집’(‘家’)의 확장이며, ‘충’(‘忠’)은 당연히 ‘효’의 연장으로 백성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곧 봉건 전제주의 통치자의 자녀가 되었다. 예기⋅악기 禮記⋅樂記에서 말한 “성인은 부자와 군신의 관계로써 기강을 삼는다”(“聖人作爲父子君臣以爲紀綱”)는 한대(漢代)의 유가학술이 존중을 받게 된 후, 모든 봉건주의 사회에서 이 원칙은 바꿀 수 없는 윤리적 기준이 되었다. 군황(君皇)과 엄부(嚴父)의 명령, 존엄한 자와 귀한 자의 의도가 황당하다 하여도 결코 거역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존비와 귀천을 엄격히 구분하는 이러한 원칙이야말로 전제주의 통치를 공고하게 하고, 과학적 이성주의의 발전을 배척하게 만든 원인으로, 이는 중국 전통 문화 가운데 독단성이 만들어낸 노예주의라는 무거운 분위기에 자양분을 주고 있었다. 따라서 전제주의와 노예주의가 뒤섞여 공존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중국 전통 문화의 전반적 추세는 중국 민족 사이에 독단⋅편협함⋅길들여짐⋅맹목적 문화 성격을 만들어냈고, 개척적⋅창조적⋅독립적 사고 및 풍부한 사상을 추구하는 문화 성격을 소멸시켰다. 이렇듯 중국의 전통 유교문화는 폐쇄적⋅보수적이며 경직된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수많은 성현들이 휘황찬란하다고 칭송했던 중국 전통 문화는 오히려 수많은 중국인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세계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방준호, 750쪽)

   

대중들은 전제주의의 문화 분위기에 억눌린 심리 구조의 변화를 갖지 못하고 ‘인간’의 자각의식이 완전히 확립되기 전에는, 그리고 정권의 형식을 바꾸는 일회성의 혁명으로 인해 신속하게 승리를 했지만 결과적으로 민족의 노예주의 심리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면, 실제로 그 자신은 실패하게 될 뿐이라는 명확한 사실은 신해혁명이후의 무수한 사실들 속에서 이미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손중산이 계몽주의와 혁명 실천이라는 양자를 명확히 구분 짓지 못하는 것을 노신은 오히려 합당하게 구분하고 있다. 정권 형식의 변화 문제에 관해 그는 “전제주의가 가혹하게 되면 유혈 혁명을 통해 일시에 공화정의 모습으로 나아가는 예를 역사에서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집외집습유보편⋅중국지질약론 集外集拾遺補編⋅中國地質略論ꠗ)고 여겼다. 이는 분명히 정권 형식의 변화를 비교적 쉽게 보고 있는 것이지만, 반면 민족의 기형적 심리 구조를 변화시키고 ‘인간’의 자각의식을 확립시키는 문제에까지 생각한다면, ‘인간에 근본을 둔’ 그의 주장은 ‘근원이 깊어 쉽게 보기 어렵다’(무덤⋅문화편향론 墳⋅文化偏至論ꠗ). 신해혁명 이후 그는 또한 ‘국민의 소리가 적막하고, 군중의뜻은 고요하니’, 곧 ‘전제주의가 영원히 자라나 소생이 쉽지 않다’고 지적하며, ‘공화정의 진행을 재촉하는’ 동시에 줄곧 ‘사회의 몽매함을 일깨워야’(집외집습유보편⋅「월탁」의 창간사 集外集拾遺補編⋅『越鐸』出世辭ꠗ)한다고 주장하면서 계몽주의의 지난함에 대해 분명하고 정확하게 파악하였다.(방준호, 756쪽)

   

인간”에 대한 외침과 마찬가지로, 루쉰의 “국민성” 문제에 관한 사유 역시 중국근대 계몽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이러한 사조 가운데에서 극히 중요한 현상을 이루고 있다. 중국 근대 사상계의 “국민성” 문제에 대한 관심은 이미 신해혁명 이전에 시작된 것이다. 당시 일본 동경에 운집해있던 중국 부르주아 혁명파와 유신파는 모두 현지 학술계에서 유행하던 “국민성” 학설(이는 사실 “인간”의 자각적 의식의 사조와 마찬가지로 서구에서 전파돼 온 근대 문화 사조이다)에 매우 주목했으며, 이러한 사상을 자신의 학술적 견해 속에서 용해시키려 하였는데, 그 목적은 온 민족의 각성을 더 온전히 추동시키려는 것이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기치 아래 서서 그들이 제기한 정치적 목표에 따라 적극적으로 분투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또한 사상 문화 계몽의 최종 목표는 봉건 전제주의 정치 체제의 극히 불합리한 구조를 바꾸는 것이었는데, 서구 계몽주의 사상의 총체적 추세가 바로 이것이었으니, 정통 유가의 문화적 전통인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영향을 받은 중국 계몽주의자들은 당연히 이러한 경로를 따라 나아간 것이었다.(林 非 原, 497쪽)

   

지금 여기에서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동란을 회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서구근대질서(Westphalia System)에 직면하여 중화사상中華思想을 핵심으로 한 중화세계제국中華世界帝國의 주인은 그 자긍심을 잃어버리고 자조적으로 ‘동아시아의 병자(东亚的病夫)’를 자칭하기까지 폄하되었다. 이런 상황 아래 중국의 지식인들은 국가의 멸망을 진지하게 걱정하면서 내우외한의 우여곡절 속에서 부흥의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주목할 것은 역시 1919년의 5‧4운동 이후 전개된 ‘근대화’와 ‘전통문화’를 둘러싼 논쟁이다. 서양근대가 창조한 신新문화체계에서 당시의 지식인들이 특히 흥미를 가졌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민주’와 ‘과학’이었다. 이 민주와 과학이 5‧4운동의 슬로건으로서 반복적으로 강조될 때, ‘덕선생德先生’(德謨克拉西: Deomcracy), ‘새선생賽先生’(賽恩斯: Science)만이 홀로 앞서나가고 구문화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은 전부 압박받는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유교에 대한 공격은 특히 심해서 ‘타도공자점打倒孔子店’은 또 다른 하나의 표어로 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問題와 主意’, ‘科學과 玄學’ 등의 논쟁을 통하여 후일 중국현대사상사에서 말해지는 ‘삼정립三鼎立’의 중심이 거의 갖추어진다. 즉 진독수陳獨秀(Chén dúxiù, 1879~1942)와 이대조李大釗(Li dàzhāo, 1889~1927)의 계통을 잇는 마르크스주의파, 호적胡適(Hú shì,1891~1962)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적 서구파, 그리고 이들 전통문화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론자들과 격렬한 논쟁을 전개한 ‘현대신유가(Contemporary Neoconfucianis)’였다.(사토 코예츠, 37-38쪽)

   

- 일본지식인

   

정통의 변혁은 국체의 존망과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의 형식은 여러 가지로 변화하고 또 여러 번 변화할 망정 자기나라의 국민의 정치의 주체가 되는 한에서 국체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 합중 정치를 했던 네덜란드는 오늘날 군주정치로 전환하고, 근자에 프랑스가 100년 동안에 십여 차례에 걸쳐 정치의 양상을 달리 해 왔지만 그 국체는 예전과 다름 없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국체를 보전하는 한계점은 오직 다른 나라의 사람에게 정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데 있다. 미 합중국의 경우, 반드시 자기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것도 자기 나라의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나라의 정치를 담당케 하려는 심정에서 비롯된 것이리라(후쿠자와 유키치, 45-46쪽)

   

이 시점에 처하여 일본인의 의무는 오직 국체 보전이라는 한가지 뿐이다. 국체를 보전한다는 것은 제 나라의 정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데 정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국민의 지력을 발달시켜야 한다.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지력 발달에서 가장 급하고 필요한 것은 낡은 관습에서 빠져 있는데서 벗어나 서양문명의 정신을 섭취하는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지, 49-50쪽)

   

문화나 사상의 측면에서 ‘문명개화文明開化’(福沢諭吉의 󰡔西洋事情󰡕外篇에 처음으로 등장한다)라고도 불리는 이 시기의 변혁운동은 자본주의의 육성, 보다 정확하게는 부국강병富國强兵과 식산흥업殖産興業을 기저로 한다. 국민의 적극적인 경제생활이 그대로 국가의 발전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자각이 무엇보다도 우선시되어, 구미歐美의 사상과 문화 및 정치‧경제제도를 수입하는 것에 주안을 두었다. 여기에서 유교에 의해 배양된 의식형태를 포함하여 뿌리 채 제거할 것을 주장하는 일종의 계몽운동이 배경이 되어, 유교는 불교‧신도와 더불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872년의 학제발포學制發布의 결과, 사숙私塾‧사자옥寺子屋‧번교藩校 등은 폐교되거나 폐쇄되어 덕천막번체제德川幕藩體制를 지탱해온 일본유교는 여기에서 일단 막을 내리게 된다(1880년대에 자유민권운동自由民權運動이 강해지자 범람하는 자유주의에 위기의식을 느낀 메이지 정부와 지식인들의 주장에 의해 1890년 「교육칙어敎育勅語」가 발포되어 형식적으로는 부활하였다).(사토 코예츠, 40쪽)

   

그의 정치와 외교에 대한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탈아론脫亞論」으로 제목을 붙인 작은 논고일 것이다. “우리들은 진심으로 아세아동방亞細亞東方 의 악우惡友를 거절한다.”(동방의 악우는 淸朝의 중국, 李朝의 한반도를 말한다)고 하는 상당히 자극적인 결어에 의해 오늘날에도 일본 국내는 물론 중국과 한국의 연구자들로부터 오해되고 있다. 즉, 정치‧경제나 사상‧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아시아’로부터 이탈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오해의 중심이 된다. 그러나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약간의 사례를 들어보자면, 󰡔학문의 권장[學問のすすめ]󰡕 제15편 「사물을 의심하여 취사取捨를 결정하는 일」에서 ‘개화선생開化先生’ 즉 경박한 서구주의자를 통렬하게 야유하고 있다.

후쿠자와가 주장하는 구화(歐化: 문명개화)는 그 정신성에 속하는 영역까지도 포함하여 일본을 전부 그가 인정한 바의 구미적歐美的인 것으로 환골탈태하는,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일본을 구미에 비견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어서 독립을 유지한다고 하는 목적달성을 위한 방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문명론지개략文明論之槪略󰡕(1875)의 제2장 「서양문명西洋文明을 목적目的으로 하는 일」(󰡔福澤諭吉全集󰡕제4권, 16~37쪽)에서 개진된 논지는 서양문명은 만전萬全일 수 없는 것으로, 서양문명을 ‘당면의 목적’으로 근대화를 진행하는 이외에 일본을 존속시킬 방법은 없다고 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런 해석이 아니라면, 이 책에서 후쿠자와가 “그런 까닭에 국가의 독립은 목적이고, 국민의 문명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책이다.”(207쪽)라고 명언하고 있는 주지主旨와도 모순하기 때문이다.(사토 코예츠, 42쪽)

   

후쿠자와 연구의 대가인 마루야마의 해석에 따르면, 후쿠자와의 사상에는 국권주의·반유교주의·문명개화주의는 필연적 연관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문명개화주의에 있어서 반유교주의를 지향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의 유교 비판의 초점이 주로 가치판단의 상대성이라는 사유방법에 반하는 절대적 가치의 고정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점에 맞추어진다고 지적하였다. 철저한 상대주의 가치판단의 입장에 서 있는 후쿠자와는 성리하겡서 말하는 所以然之理와 같은 선천적으로 내재하는 가치를 상정하고, 그러한 내재적인 가치로부터 역으로 인간의 관계에 적응해 가는 사회규범의ㅏ 형태에 대해 비판을 가하였다. (이근송, 175쪽)

   

이와 같이, 후쿠자와는 전통적 개념에 있어서 빈곤을 구조하고 문맹을 교육하는 자인 어진사람이나 군자가 이타적이라는 일반론을 부정하고, 형제의 안락을 팔아서 정신의 쾌락을 중시하는 날 인류의 행복을 볼 수 있다는 후쿠자와의 견해는 유교비판의 맥락에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선명해진다. 그는 유교의 도학주의나 불교의 선가를 비판하고 있다. 즉, 고원한 정신주의적 자세가 형체의 안락 즉 실제적인 문명발달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실학정신을 배양시키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근송, 183쪽)

   

개항이후 조선사회는 새로운 문물의 접촉으로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80년대 초에는 조선사회에 개화와 자강이라는 말이 풍미하고 이에 대응하는 위정척사운동이 그 어느 시기보다 강하게 일어나 개화와 척사의 갈등은 격렬했으나 1882년 임오군란을 고비로 척사는 고개를 숙이고 대신 정부정책은 개화로 급격히 전환하고 있었다.

우선 개화의 개념에 대해 중국 고전 『禮記』와 『易經』을 인용하면 개화란 開物成務하고 化民成俗하는 것이라 하여 開物과 化民은 넓은 의미에서 문명화의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곧 만물의 뜻을 열어 통하여 천하의 일을 힘써서 성취하고 백성을 교화하여 훌륭한 풍속을 이룬다는 뜻이다.(안용환, 54쪽)

   

⑶ 일본 민권파

   

한편, 당시의 신문과 잡지에도 국약헌법을 주장하는 논설이 자주 실렸다. 위에서 살펴본 건백서만큼 상세한 것은 아니지만 몇 개의 예를 들어보면, 다카하시 기이치(高橋基一)의 「국헌편성론」은 각지의 공선 대리인에 의해 구성된 내셔널 컨벤션 즉, ‘국민협회’에서 정부 기초의 헌법안을 심의해 천황의 허가를 받아 국헌으로 삼아야 한다고 논하고 있다. 누마 모리카즈(沼間守一)는「널리 준걸(俊傑)을 소집해 국헌을 제정해야 한다」는 논설에서“조야(朝野)의 취지를 모아 국헌을 만들것”을 주장했다.23) 아오키 다다시(靑木匡)는「국헌 편성의 순서」에서‘국민의회’에서 헌법안을 작성해 정부의 재가를 받을 것을 주장했다. 헌법안을 국민의회에 위임해야 하는 이유로서는 당시의 정부는 아직 헌법에 의하지 않은‘특재정부(特裁政府)’라는 점, 정부가 기초한 헌법안은 정부에 유리한 내용이 될 위험성이 있다는 점,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을 기초할 권리를 갖는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는“국헌을 기초하는 권력을 갖는 자는 오로지 국가의 주권자, 즉 전국 인민이 아니고 누구란 말이냐”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국민주권에 기초해 헌법제정을 요구한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인민을‘하등사회의 우민(愚民)’으로 보고 당분간 선거권을 상등, 중등사회의 사람들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방광석, 108쪽)

   

자유민권파를 중심으로 한 민간의 헌법구상은 대부분 정부 측의‘대일본제국헌법’구상과는 입장을 달리했다. 국약헌법, 상세한 인민규정, 미약한 군주권, 입법부의 우위를 규정한 헌법구상이 많았고 연방제, 인민주권, 군주제의 폐지 가능, 혁명권을 보장하는 헌법구상도 있었다. 공화제를 포함해 다양한 국가체제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모색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아직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확립되지 않아 사상적 자유가 허용되던 메이지 초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1880년을 전후해 다양한 헌법인식과 헌법구상이 제시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870년대 이후 추진된 문명개화정책에 따른 신분제의 해체로 그동안‘객분(客分)’으로서의 사고에 머물러 있던 평민 층이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기 시작했고 지배층에서 대량으로 축출된 사족집단, 도시 인텔리겐챠를 중심으로 한 신지식인 계층의 등장으로 정치적 담론이 활발해지고 정치세력의 조직화가 진행되었다는 상황이 작용했다. 아울러 구미의 헌법전과 입헌정치에 관한 서적이 상당수 번역되어 기본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다양한 신문과 잡지의 발행 등 매스미디어가 발달한 것도 정치세력의 조직화와 정치적 담론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자유민권파를 중심으로 민간에서 입헌제의 원리를 깊숙이 이해하고 독자적인 헌법구상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방광석, 113쪽)

   

   

2-6. 민주화·통일운동

   

⑴ 민중신학이란

   

'하느님의 선교' 신학이 한국 교회 차원에서 최초로 논의된 것은 한국기독교 연합회가 1969년 1월 27알 주최한 제2회 전국 교회지도자 협의회에서였다. 오늘의 한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선교를 주제로 열린 이 협의회는 근대화에 수반되는 상황의 변화와 선교대상의 변모에 따라 교회의 구조도 변형되어야 하며, 교회의 이념적 개방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결의했다. 1968년 5월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로 취임한 김관석 목사는 자신의 선교신학적 기치를 분명하게 하느님의 선교로 정했고, 이는 70년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활동의 신학적 기반이기도 했다. 한국교회 진보진영은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파생하는 도시화와 농촌의 붕괴에 대응하기 위해, 하나님의 선교 신학을 근거로, 개발독재가 추진한 근대화의 그늘에서 고난받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을 중심으로 농촌 개발과 도시산업선교를 전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의 실현을 지향하는 하느님의 선교 신학은 선교의 지평을 무한으로 확대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의식과 역사참여의식을 고취했음에도 부룩하고, 개인의 영적 관심을 충족시키는데는 상대적으로 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복음은 인간과 세계를 총체적이고 통전적으로 구원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해방에 앞선 관심이 영혼의 구원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채수일, 17-18쪽)

   

또한 민중신학은 한국교회가 경제적 고도성장과 이에 따른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빈부의 격차 속에서 탄생하였다. 1960년대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세 차례 거듭되는 과정에서 한국경제는 고도의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 발전단계에서 빚어지는 경제, 사회적 소외현상이 심화되어 갔다. 1960년대 산업화는 다수의 노동자계층과 대도시에 도시빈민계층을 양산하였고, 동시에 그들의 궁핍화를 야기하였다. 그리하여 1960년대 후반 경제위기가 발생하자, 잠재된 계층간의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초 전태일의 분신 사건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한국 민중의 생존권 투쟁은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에게 커다란 자극과 반성의 계기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신학자들은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들의 고통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이것을 성서적 근거와 연결하여 우리 역사 속에서 억압받고, 억눌리고, 소외되고, 수탈당하여 온 소위 민중들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논리에서 민중신학을 창출하였다. (김명배, 346-347쪽)

   

1974년에 KNCC는“인권선언”(The Declaration of Human Rights in Korea)과“양심선언”(The Declaration of Conscience)을 선포했다. 66명의 신학교-교회지도자들도“한국 기독교인의 신학적 입장”(The Theological Statement of Korean Christians)이란 선언문에 서명했다. 또한 12명의 교회지도자들도“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선언”(The Declaration for the Restoration of Democracy)에 서명했다. 1970년대의 이러한 선언들은 군사독재정부에 의해 억압받았던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위한 한국 교회의 노력들을 반영한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1970년대 초 한국의 신학자들은 바르트의 사회-정치신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특히 민중신학자들은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정치적으로 군사독재에 의해 억압받았던 저임금 근로자들의 인권을 변호하며 박정희정권에 저항했다. 민중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저항운동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바르트의 사회-정치신학을 활용했다. 또한 바르트의 사회-정치신학에 의해 큰 영향을 받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김영관, 78쪽)

   

⑵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

   

80년대에 와서는 남한 사회의 변혁이 민족통일의 과업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는 인식과 함께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추진하는 주체가 누구냐 하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이 문제가 제기된 것은 분단 이후 통일에 대한 모든 논의를 정부가 독점해 왔고 이를 정략으로 이용해 왔던 것에 대한 반발과 관련된 것이었다. 몇몇 신학자들은 통일논의의 민주화를 주장하면서 민중을 통일운동의 주체로 보았다. 민중을 통일운동의 주체로 파악하는 이러한 관점은 한국교회에서 '민중적 민족주의'가 싹트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1980년대 초반부터 남한 기독교의 진보세력 속에 널리 확산되어 갔다. 앞서 언급한대로 남한 사회변혁과 통일의 성취가 별개의 것이 아닌 인식 그리고 통일운동의 주체로서의 민간 또는 민중에 대한 인식의 확산은 1980년대에 진행된 통일 논의의 새로운 차원일 뿐만 아니라 남한 교회가 산출해 낸 통일논의의 귀중한 결실이었다.(김흥수, 107-108쪽)

   

1976년의 3ㆍ1 민주구국선언 역시 장준하가 못 다한 일을 하리라고 했던 일 중의 하나였다. 민주구국선언문의 내용을 통해 또한 신학적인 입장에서가 아닌 문익환의 첫 통일론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76년 3ㆍ1민주구국선언을 기초할 때부터 그에게서 통일이란 남과 북으로 갈려 있는 국토의 지리적인 통일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 갈라져 반목질시하며 원수가 되어 있는 민족의 통일이었다. 지리적인 통일만으로는 이질화되어 있는 민족의 통일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둘 중에 본질적인 것은 지리적인 통일이 아니라 사회학적인 통일, 즉 국토통일과 민족통일 중에 본질적인 것은 민족통일이라고 보았다. 그 선언의 골자는 ①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②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부조리를 시정하여 ③ 민족통일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때의 그의 관심은남과 북으로 갈라진 국토가 아니라 민족이었다. 그 후로 민주냐 통일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이 둘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문익환에게 있어서 바로 민족이라는 개념이었다. 이렇듯 문익환은 열렬한 민족주의자라고 볼 수 있고, 그는 통일은 단순한 국토의 통일만이 아닌 민족통일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이유나, 184쪽)

   

문익환은 ‘민족통일의 실체’라는 강연에서 분단의 원인으로서, “분단은 우리 민족의 뜻을 짓밟은 외세의 짓”이라며 외부적인 요인을 들었다. 다음으로 “외세의 분단정책에 동조한 좌익세력과 이승만 독재세력”이라며, 내부적인 요인도 간과하지 않았다.

또한, 분단의 결과 어떠한 상황을 초래했는지에 대해서는 첫째, 분단은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었음을 강조했다. 남북이 무력경쟁을 함으로써 남북의 경제력을 탕진시켜 가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분단으로 인해 남북의 자연자원의 교류가 막히고, 그것이 우리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어 왔다고 보았다. 둘째, 분단은 우리 문화 창조의 힘인 정신생활을 변질시켰다고 보았다. 즉 사회에 미움과 불신 풍조가 만연해 있는데, 이것은 분단 때문임을 강조했다. 셋째, 분단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했음을 들었다. 6ㆍ25뿐만이 아니라, 현재도 남에선 남대로, 북에선 북대로 민족을 유린하고 참혹하게 제 동족을 죽이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분단은 민족반역이며, 경제적, 문화적으로 큰 손실이며, 무엇보다도 평화와 반대되는 개념인 동족상잔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그의 민족주의, 평화주의를 살펴볼 수 있다. 문익환은 이후에도 여러 많은 글에서 ‘평화’주의를 매우 강조하는데, 이러한 ‘평화’의식은 기본적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문익환에게서 ‘평화’는 전쟁과 반대되는 개념이기도 했지만, ‘폭력’과 반대되는 개념이기도 했다.(문익환, 187-188쪽)

   

신학자이면서, 신구약공동성서 번역작업에 몰두하던 문익환은 1975년 8월 장준하의 죽음 이후 장준하의 뒤를 이어 민중이 주도하는 조국 통일을 이루겠다는 신념으로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이미 1970년에 민주화운동에 뜻을 두었지만, 본격적인 활동은 장준하의 죽음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민주화가 곧 통일의 초석임을 자각하고 장준하의 통일론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을 주도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시작된 문익환의 첫 번째 수감생활에서는 사도바울을 통해 감옥 안에서 그는 신앙의 본질은 ‘기쁨’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첫 번째 감옥시기에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고난 받는 민중과 이 민족과 나라를 위한 예언자 예레미야처럼, 맑은 눈을 가지고 정의를 외치고, 하나님의 애타고 뜨거운 사랑으로 실천적인 삶을 살고자하였다. 1978년 10월부터 1979년 12월까지 두 번째 감옥생활에서는 감옥생활을 통해 다시 태어날 수 있었고, 민중 속에서 민중과 함께 살아간 예수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결국 그는 첫 번째 감옥에서는 기쁨’의 신학을 깨달았다면 두 번째 감옥에서는 죄수들의 밝지 않은 기쁨이 없는 얼굴 속에서 오히려죄스러움을 느끼면서 신앙의, 삶의 본질은 개인의 슬픔, 민족의 비애와 같은 ‘슬픔’임을 경험하게 되었다. 세 번째 감옥에서는 슬픔과 기쁨은 하나이며, 특히 그는 1980년 5월부터 1982년 12월까지 공주교도소에서의 세 번째 감옥생활에서 민주화도 통일도 민족화해이자, 평화운동이며, 기독교의 복음또한 평화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익환은 이때의 민족화해는 “민족의 비극 앞에서 가슴을치며 다 같이 슬퍼하는 일에서 이룩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 일의 깊은 뜻과 내용이 예수의 십자가를 보고 깨달았음을 강조하였다. 문익환은 방북 후 1990년대에 이르러 화해신학을 평화에 이르는 과정신학이자 실천신학으로 보면서 통일신학이 화해신학으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화해라는 민주적인 과정을 거쳐 다다른 통일은 우리의 평화일 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 나아가서 세계평화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보았다. 문익환은 성경적 관점에서 민주와 통일을 에스겔서 37장 말씀을 근거로 민주화는 민중의 부활이며, 민족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였다.

통일은 관 뿐만 아니라 민이 주도해 나가야 한다고 보았던 그는 방북을 통해 정치인들이 통일문제를 푸는데 돌파구를 마련해주고 그리스도교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분단에 안주해 온 과거를 참회하면서, 선교적 사명을 지고 방북하여 김 주석과 두 차례의 회담과정을 거쳐 4.2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이유나 1, 60-61쪽)

   

⑶ 에큐메니칼인가, 통일전선인가?

   

민주화운동세력은 ‘유화 국면’을 맞아 민주화투쟁을 더욱 더 확장 시켜 나갔다. 이미 1983년 9월에는 학생운동을 마감하고 사회에 진출한 청년들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를 결성하여 청년운동의 새장을 열었으며, 이어 1984년 6월 14일에는 정치규제법에 묶여 합법적인 정치활동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던 야당 정치인들은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였다. 또한 1983년에 ‘해직교수협의회’(12.20), 1984년에 한국노동자 복지협의회(3.10),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3.24), 민주언론운동협의회(12.19), 민중문화운동협의회(4.10), 전국학생총연맹(11.20) 등 운동단체들이 결성되어 운동력을 회복, 활성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각 지역에서도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를 필두로 인천지역 사회운동연합, 전남민주청년협의회 등 지역 공동체들이 속속 건설되어 그 동안 서울중심으로 진행되던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나타냈다.

이처럼 각 부문 지역운동이 활성화됨에 따라 부문 간 혹은 전국적 규모의 연대운동이 모색되었다. 이에 따라 1984년 6월 29일에는 청년, 노동자, 농민, 재야 종교계 등 각 사회운동세력이 모여 민중민주운동협의회를 결성하였다. 민중민주운동협의회는 1970년대의 국민연합 이후 와해되었던 민주화운동을 복구하여 80년대 통일운동의 새로운 토대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개인중심이 아닌 조직 단위 가입원칙, 대중 노선의 강화 등 중요한 진전을 보여주었다. 이외에도 명망인사를 중심으로 민주통일국민회의가 결성되었는데, 1985년 3월 29일에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민주통일국민회의가 통합하여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창립됨으로써 민주화운동세력은 외세와 군부독재정권에 맞설 수 있는 단일전선을 구축하였다. (김명배, 244-245쪽)

   

예장(통합) 청년들도 77년 1월 대전 선교 대회를 기점으로 하여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 선교대회에서 청년들은 지금까지 예장(통합) 청년들이 사회적 불의와 부조리에 대해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을 통감하며,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자, 농어민, 도시빈민 등 억눌린 민중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해방시키는 선교활동에 참여해야 할 것, 근본주의적이고 샤머니즘적인 경쟁 속에서 분열과 도피적이고 자기 안일주의적인 병폐에 빠져 있는 한국교회를 갱신할 것과 이 땅에 하루 빨리 진정한 민주주의가 사회정의가 실현되도록 하는 데 헌신할 것 등을 선언하였다. 감리교 청년들도 78년 1월 서울에서의 청년선교대회를 통하여 감리교 운동을 반성하고 사회정의와 교회갱신에 매진할 것을 천명하고 나섰다.(김명배, 164쪽)

   

1979년에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하여 양심범 가족 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주청년인권협의회 등은 각자의 문제를 중심으로 고감한 활동을 계속 하면서 유신체제의 극복을 위한 민주화운동의 큰 물줄기를 형성하여 갔다. (김명배, 146-147쪽)

   

그후 ‘민주주의 국민연합’은 8월 14일 현정권은 더 이상 국민을 통치할 능력도 정당성도 없다고 선언하는 1978년 8.15 선언을 발표하고, 9월 8일에는 ‘한국인권운동협의회’와 공동으로 박정권의 독재 및 외교적 실패를 통박하고 민주체제 확립을 위해 자진 퇴진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어 10월 13일에는 윤보선, 함석헌, 문익환 등을 각계인사 420명이 서명한 78년 10월 17일 국민선언을 발표하고, 국민들의 동조서명을 호소함으로써 민주화운동에 마지막 박차를 가하였다. 민주주의 국민연합은 기존의 협의체가 지니는 수평적 협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으며, 양대 선거를 맞이하여 보다 본격적인 반 독재 투쟁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한편 1978년 ‘민주주의 국민연합’의 결성과 더불어 틀을 잡아 가기 시작한 연합운동은 79년 3월 1일 민주주의 국민연합의 활동을 계승발전시키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평화적으로 재건 확립하고 나악 민족 통일의 역사적 대업을 민주적으로 이룩하기 위한 자발적이며 초당적인 전체 국민의 조직을 지향하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공동의장 :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을 탄생시켰다. 이 국민연합은 이날 발표한 3.1운동 60주년에 즈음한 민주구국선언을 통하여 성장하고 있는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유신체제의 철폐와 1인의 영구집권의 종식, 그리고 민주정부의 수립이라는 우리의 당면목표의 성취를 위하여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투쟁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보수진영의 ‘국가조찬기도회’와 ‘민족복음화운동’은 종종 진보진영의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복음화운동은 복음의 본질을 인간 내면의 영적 구원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자연히 현실 역사의 부조리와 부정의, 눌린자와 가난한 자의 인권문제나 민주주의 확립에 관심이 없거나 이를 외면했다는 것이요, 국가조찬기도회는 정교 분리 입장을 견지하면서 집권세력에 대해서는 체제 유지 및 지지노선을 취하면서 반공안보논리적 신앙 노선을 더욱 강화하고 군사정권의 정치적 지지세력으로 작동하였다는 것이다. (김명배, 196쪽)

   

그런데 한국의 민주화 및 산업화 과정에서 줄기차게 민주화 및 인권운동을 전개하던 그룹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들은 그 걸림돌이 바로 반공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민주화 및 인권운동이 걸핏하면 용공으로 둔갑되었고, 민주화 및 인권운동가들은 용공분자 내지 친북인사로 낙인찍히기 일수였다. 실제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1974)을 비롯해 정부당국에 의해 조작된 사건들로 인해, 민주화 및 인권운동 그룹들은 온갖 탄압과 박해를 당해야 했다. 그런 비참한 상황들은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특수성이 있기에 가능했다. 분단의 상황이 그들에 대한 정부당국의 탄압과 박해를 정당화시켜주었던 것이다. (중략) 여기서 NCCK를 비롯한 진보적인 기독교 진영의 반공 알레르기 내지 반공혐오증이 생겨나게 되었고, 마침내 반미성향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80년 5월 18일에 일어났던 광주민주화운동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혀명섭, 97쪽)

   

⑷ 신앙의 보수-진보 분열

   

북한 당국과 개신교의 이러한 갈등이 첨예화 된 배경에는 1946년 3월에 실시된 토지개혁이 있었다. 당시 토지개혁에서 몰수 대상이 되었던 토지는 일본 국가 및 일본인 소유지와 민족반역자의 소유지, 5정보 이상의 토지를 가진 지주가 전부 또는 대부분을 소작에게 맡기고 있던 토지였다.

여기에 보태어 성당, 사찰, 종교단체의 5정보를 넘는 소유지 등도 포함되었다. 당시 북한 인구의 80%가 농민이었고 농가호수의 4%인 지주가 총경지면적의 58.2%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토지개혁은 농민과 노동자들에게는 환영받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 개혁에서 수혜자가 아닌 피해자였다. 종교인의 토지는 5정보미만이라도 ‘不勞地主’ 또는 ‘민족반역자’라는 구실하에 우선적으로 박탈되었을 뿐 아니라, 당시 개신교인들 중 다수가 계급적으로 중산계급의 중소지주층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악질적인 장로, 목사로서 땅이 없던 자는 거의 없고 이들은 이때까지 놀고먹기만 하였기 때문에 우리에게 불평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김일성의 발언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피해를 본 기독교인의 수는 적지 않았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남하하는 길을 택했다. 이후 토지개혁을 둘러싼 북한당국에 대한 기독교계의 불만은 커져갔고 교계 내부에서는 “공산당을 공공연하게 욕할수록 능력 있는 설교가요, 순교자적 목사로 찬미”하면서 정권과 대결하는 분위기가 팽배해갔다.(이지영, 38-39쪽)

   

결과적으로 NCCK는 88선언문을 통해 반공혐오증을 분명히 드러냈다. 물론 88선언문이 이후 한국교회 보수복음주의 진영이 통일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도록 일깨워주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88선언문은 NCCK의 쇠퇴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88선언문을 통해 NCCK의 민주화 및 인권운동을 지원하던 보수복음주의 진영은 NCCK의 행보에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고, 이는 1989년 12월 28일 한기총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한기총의 창립에는 36개 교단과 6개 단체가 참여했다. 이후 한기총은 한국교회의 반공과 우미를 견인하는 중심이 되었고, 그에 함께 하는 교단과 단체를 회원으로 영입하여 확장을 거듭해 왔다. (허명섭, 101쪽)

   

정의와 평화 그리고 생명을 크게 노래하는 NCCK가 북한주민의 인권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NCCK는 북한주민의 인권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NCCK는 그동안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인권탄압을 받았던 인사들에 대해서는 목소리가 크다. 예를 들어, NCCK의 인권선언문에서 빠지지 않는 내용이 국가보안법폐기와 양심수 석방이다. 하지만 북한정권하의 인권에 대해서는 마치 그들이 정의와 평화와 생명을 주는 지상낙원이나 되는 것처럼 잠잠하고 있다. 동일한 문제를 동일한 시선에서 바라볼 때, 인권의 문제는 진정한 의미에서 설득력을 갖는 것이 아닌가?(허명섭, 117쪽)

   

3. 바르트는 중도였나?

   

(1) 복음에 조명된 시민사회 일부로서 교회라는 고백교회의식이, 파시즘과 양차 대전 사이의 공간에서 드러나는 특수성에서 분명히 사회주의 옹호를 표시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의 신앙 특성상 그것은 바르트 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바르트 추종을 하며 예수 추종을 안한다는 전제로서 생각하면, 바르트를 끌어서 사회주의 정당화로서 바르트를 논함은 타당하다.

   

여기서부터 매우 인상적인 일종의 포기가 일어난다. 즉 우리는 성서가 아닌 모든 것을 단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서를 언제나 설교의 유일한 원천으로, 설교라는 불가능한 일의 유일한 정당화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시사적인 문제들과 현대의 사건들에 대한 염려는 결코 설교의 출발점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르트가 설교한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가를 확인해보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설교는 결코 사건들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웅변가의 강연이 아니다. 설교자의 유일한 염려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즉 이 영원하신 말씀과 따라서 언제나 현실적인 그 말씀에 대한 염려이다. 그리고 그럴 때, 단지 그럴 때만이 그 결과로서 현대의 사건들이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조명되고, 비판적으로 분석되며, 설교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여기서 “예언자적”이라는 용어를 다시 살펴본다면, 구약성서에서 예언자는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시대 속에서 그의 시대의 사회와 정치적 사건들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결과들을 가지고 매우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다. 마치 영혼만을 문제삼는 것 같은 경건주의와는 관계가 없다. 그것이 노리는 것은 온전한 사람, 즉 인간의 모든 근원들과 그것의 구체적이고 물질적이며 역사적이고 집단적인 伸長들과 함께 사람을 문제시한다는 것이다. (조르즈 까잘리, 73쪽)

   

바르트는 사회주의는 하나님 나라의 전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1919년 탐바하(Tambach)의 강연에서 “사회 속의 그리스도 인”(Der Christinder Gesellschaft)에서 더욱 이러한 바르트 신학의 변증법적 구조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로마서 강해』제 1판에서 바르트는 인간 이성의 무능과 죄악성을 언급하면서도, 동시에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성령이 거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하나님의 동역자로 하나님 나라 건설의 일꾼으로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폐기될 수 있는 한낱 도구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곳에서 활동하시기를 원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잠정적으로 나타내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행동의 절대적 우위성과 사회주의 운동의 상대적 가치성을 인정하고 있다.(구종모, 15쪽)

   

⑵ 그러나, 현실적으로 세계교회 연대라는 신앙에도 불구하고, 세세하게 문명을 넘어서는 세부현실을 사실상 알기 어렵고, 그리고 예수 따름이라면서도 교파교회가 본부에 추종하듯 세계교회협의회라는 별개의 교파 권력자의 의도가 관철되는 경우가 드러날 수 있다. 그런 측면으로서 남한 사회의 좌익세력에 도움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바르트의 편들음이 부르주와적 사회질서의 사적 자본주의에 명백히 저항하는 것이라면,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경직된 사회주의에도 저항한다. 여기서 말하는 경직된 사회주의란 자기 자신의 출발점에 거슬러 불의를 당하는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일방적이고도 결정적인 편들음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사회주의를 의미한다. 소위 낮다고 하는 자들이 오래전부터 높은 자들이 되고, 낮은 곳에 있는 그들의 겸손이 악취나는 교만이 되고, 문제점이 우상이 되고, 갈기갈기 분열됨이 최근의 유행신학이 되고, 프롤레타리아가 조잡한 경멸용어가 되고, 세계의 문화에 대한 혐오가 아무런 이유도 없는 변덕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프롤레타리아가 높은 자, 새로운 독재의 구실이 되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새로운 경멸과 억압만을 낳는 볼세비키적 폭정이 되어선 아니된다. 사회주의적 경제질서와 사회질서는 아래에 있는 자들과의 연대라는 그 원칙에 엄격히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 사회주의는 사회질서를 부정하고 긍정하면서 모든 종류의 사회억압에 맞선 저항을 조직과 기구 속에서 구현해 나가야 한다. (울리히 단네만, 122-123쪽)

   

바르트는 철저한 사회주의를 하느님의 입각점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혁명적 사회민주주의가 개혁정당으로 변질되는 것은 동시에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철저한 혁명적 희망은 정치적 희망이 아니라 결국은 신학적 희망이다. : “프롤레타리아의 희망을 도움(잡지)의 신봉자들의 희망과 분리하는 것은 종교적 차이이다. 이 종교적 차이를 나우만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이 차이를 단지 정치적인 것으로 천박화한다. ” 자본주의, 민족주의 및 군국주의를 갖는 이 세계의 “현실”에 맞선 혁명적 사회주의의 철저한 반대는 하나님이 진지하게 여겨진다는 보증이다. 진정한 타자성, 포괄적인 새로움과 다름의 사상, 다시 말하면 옛것과 새것, 인간과 하느님의 철저한 비연속성의 사상은 바르트의 철저한 사회주의의 개념에서 포기할 수 없는 요소이다. (울리히 단네만, 33쪽)

   

이제 더 나아가 우리가 그렇게 이해된 하느님의 혁명의 정치적 함의들에 관해 묻는다면, 먼저 긍정적인 하느님 관계의 회복이 인간의 실존에 미치는 일반적 귀결들을 지적해야 한다. 부정적인 하느님 관계의 지양의 역사로서 그것은 1. 소외의 지양(다시 말하면 하느님, 이웃 및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인간의 소외의 지양)의 역사, 2. 인간의 우상생산의 지양의 역사, 3. 물화와 주인 없는 권세들의 인간 지배의 지양의 역사, 그리고 그 모든 것들 속에서의, 4, 인간의 하느님 관계와 세계관의 소유 구조의 지양의 역사이다. 로마서 주석 제1판에 따르면 인간의 하느님 관계와 사회의 하느님 관계의 합치의 토대 위에서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정치적 귀결들이 그것으로부터 파생된다. 하느님의 혁명은 소외된 사회의 다양한 형태화에 대항하는 반대운동으로써 첫째, 사적 소유의 징발, 즉 경제적․정치적 소유의 철폐를 일으킨다. 이로 인해 이루어진 물질적 소유의 주물화의 제거와 더불어 둘째, 가능한 한 많이 소유하기 위한 투쟁은 그 의미를 잃는다. 그리고 셋째,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부자와 빈자로 나누어진 사회의 구별, 그리고 온갖 계급 사회와 그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제도들과 도구들이 다 함께 사라진다. (울리히 단네만, 77쪽)

   

로마서 주석 제2판에서 바르트는 하느님의 혁명에 대한 그의 이해를 하느님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의 이론과 결합시켰고, 이를 통해 이를 종교개혁자들의 은총론과 매개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혁명에 관한 진술은 하느님에게만 독점된다. 혁명적인 것은 배타적으로 하느님의 행동 뿐이다. 물론 우리 밖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혁명은 우리를 위해 일어나지만, 로마서 주석 제1판에서와는 달리 더 이상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우리에 맞서서 일어난다. 인간은 더 이상 하느님의 혁명의 협력자로서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여기서 혁명에 관한 진술을 하느님에게 독점시키는 의도는 옛 세계로부터 새 세계로 나아가는 전환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철저화하려는 것이다. 이 독점화는 하느님의 행동의 새로움과 인간의 행동의 낡음간의 대립을 강조한다. 옛 세계의 폐기는 엄격한 의미에서 혁명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옛 인간과 세계의 단순히 양적인 개혁으로 이해되어선 아니된다.(울리히 단네만, 115-116쪽)

   

사회부정이 사회긍정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은 바르트에 따르면 정치적 실천에 매우 분명한 방향을 제공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와 행동에서 중요한 것은 요지부동한 것은 전제된 사회의 “현실”을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실은 사회의 “현실”을 변혁한다는 인식이다. 사회와 더불어 행해지는 하느님의 역사의 현실은 그 “현실”을 역사적 현실로 만든다. “현실”의 현실성은 그것이 하느님을 통해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식은 두 가지의 귀결을 포함한다. “현실”은 더 이상 절대화되고 그래서 呪物化되어서는 안된다. 현실은 더 이상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변화될 수 없는 것으로 경험되어서는 안된다. 2. 그러나 “현실”은 그 스스로에 의해 변혁되지는 않는다. 그것에 대한 변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하느님의 총체성과 초월성과 맺는 관계가 생각될 때 뿐이다. 이 관계를 통해 “현실”의 총체성은 변혁될 수 있다.

바르트는 스위스의 종교사회주의 신학에 의존하여 사회의 “현실”을 변혁하는 하느님의 행동을 하느님 나라의 ‘혁명’이라고 정의했다. 하느님의 혁명은 사회적 총체성을 갱신한다. 그것은 사회 안에서 지배하는 모든 관계들의 철저한 역전이다. 사회에 대한 하느님의 혁명적 실천은 ‘현실’을 변혁하고,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을 상대화한다. 하느님의 혁명적 과정 안에서 현실은 이미 여기서 그리고 지금 영향 받고 조형되고 변혁될 수 있다. (울리히 단네만, 47쪽)

   

바르트에 의하면, 구원은 “존재 이상의 것”이다. 구원은 성취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존재의 최상의, 충분한, 명확한 파괴될 수 없는 성취”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존재 동참이므로, 구원은 창조된 존재 자체에게 내재하지 않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에게 온다. 바르트는 창조된 존재 자체는 구원을 필요로 하지만, 구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창조된 존재 자체는 구원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구원과 성취와 완전한 존재는 창조된 존재가 자체로 가지지 않는 것인데, “하나님의 존재 동참”을 의미한다. 따라서 구원이 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하나님의 구속적 은혜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을 위해 결정한 것은 하나님의 원래 의지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내재하지 않은 이런 위엄으로 사람을 덮으시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하는 자로 창조하셨다.(서벤쟈민,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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