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6

타고르와 일본, 그리고 우리 ▒일본불교사공부방▒ 김호성|

Everyday 공부방 42 --- 타고르와 일본, 그리고 우리 --- 附 : 비슈바바라티 대학의 일본학과 --- - ▒일본불교사공부방▒ - 일본불교사공부방(일본 불교사 독서회)



Everyday 공부방 42 
--- 타고르와 일본, 그리고 우리
 --- 附 : 비슈바바라티 대학의 일본학과 
--- 작성자김호성|
작성시간10.11.07


동서회통(東西會通)의 길


명색 '인도철학'과 교수로 십수년, '인도철학'의 학인(學人)으로 삼십여년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를 별로 읽지 않았다. 속된 말로 해서 "필이 꽂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철학'을 하고, 그는 내게 '시인'으로만 알려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근현대 인도사상가들의 경우에는 중요하게 다가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지금까지 내가 논문을 쓴 오로빈도(Aurobindo Ghose, 1872-1950) 틸락(B.G.Tilak, 1856-1920), 그리고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 같은 인물들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아는 상식(?)에서는 철학적으로 타고르가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철학'과 '문학'을 너무나 별다른 것으로 여기는 풍조 속에서 자란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1998년도에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 1933 - )의 책 『살아있는 인도』(청림출판)를 읽지 않았더라면, 이런 내 상식과 무식이 더 오래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센은 우리에게 타고르의 진면목과 의미를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그 자신 타고르가 세운 산티니케탄(SAntiniketan)에서, 우리로 말하면 초등 1년부터 고등 3년(이 기간의 학교를 'Patha Bhavana/파타바반'이라 말한다.)까지 공부를 했다. 어쩌면 타고르에 대해서 가장 적확한 정보를 그 이상 더 잘 갖고 있는 사람도 드물 듯하다. 그의 이름조차 타고르가 지어주었다 하니 말이다.

그가 그려준 타고르 상(像)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시대상황 안에서 타고르가 맛보았을 '고독'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영국 제국주의 아래에서 거의 모든 선각자들은 민족주의의 틀 안에서 저항하였다. 틸락, 오로빈도, 그리고 간디가 다 마찬가지였다.(물론 간디에게는 그의 책 『힌두스와라지』에서 보는 것처럼, 민족주의적 측면을 넘어서는 문명비판의 입장에 서서 영국에 저항한다는 입장 역시 없지는 않다. 그러나 타고르와는 다소 다른 점도 있는 것같다) 그런데 타고르는 영국 제국주의 지배의 부당성에 명확한 저항의 목소리를 내면서도, 서양 문화에 대해서는 '개방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아예 민족주의적 틀 안에서 문화적으로도 국수주의적 관점에 서버린다면, 덜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허물을 명백히 보면서도 동시에 서양문화의 장점을 보고서, 배울 것은 배우겠다는 자세를 취하기는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그가 인도문화의 가치를 외면해 버리고 서구문화만을 추종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그는 또 민족주의자의 비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1950년대말, 산티니케탄의 미술대학(깔라 바반) 출신으로서 칸과 베니스영화제에서 입상한 영화감독 사트야짓트 레이(Satyajit Ray, 1921-1992) 역시 인도문화나 동아시아(중국과 일본)문화를 배운 것은 이 산티니케탄에서였다고 한다. 이렇게 동양과 서양의 만남 ---- 우리 동양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영원한 '화두'일 수밖에 없는 --- 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타고르는 분명하게 '동서회통(東西會通)의 길'을 가리키고, 걸어간다. 동과 서는 실로 둘이 아니다. 동양 안에 서양이 있고, 서양 안에서 동양이 발견될 수 있다는 점 역시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점을 일깨울 수 있는 교육시스템을 만들었고, 그를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점에서 나는 그에게 고개를 숙이게 된다.

더 이상 우리는 타고를 '시인'으로만 생각해서는 아니된다. 노벨문학상은 『기탄잘리』의 시인으로서 받은 것이지만, 시만이 아니라 무용, 연극, 음악, 소설 등의 종합예술가였다 또한 그 이상으로 그는 실천적 교육자였으면, 한 사람의 사상가였던 셈이다. 우리가 새롭게 그를 읽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일본과의 인연


민족주의의 초극 내지는 동서회통의 길을 개척하였다는 타고르의 얼굴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테마는 역시 '일본'에 대해서일 것이다. 타고르는 1916년 일본을 처음으로 방문한다. 여기서 그는 깊은 인상을 받는다. 이에 대해서 하진희 선생은 그녀의 책 『산티니케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타고르는 1916년 일본을 방문하고 정치여건을 불신하였으나 일본인의 생활모

습에는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인도에서는 보기 힘든 질서, 규범, 예절 등

에 나타난 분위기에 사로잡혔다. 그는 그러한 분위기가 불교의 영향 때문이라

는 일본인들의 설명을 듣고 약간 수치심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불교

의 발생지 인도의 무질서와 게으름, 순화되지 않은 기질을 어떻게 정화시킬 수

있을지 고심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을 여행하고 나서 동양문화에 접목된 불교

와 예술을 새롭게 인식하였으며 예술활동에도 많은 영감을 얻었다.(여름언덕,

166-167.쪽)



인도에서는 불교가 사라졌지만, 중국과 한국을 통해서 전해진 일본의 불교에는 '인도불교'의 모습만으로는 다 설명될 수 없는 기품과 질서, 그리고 아취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중심이 되어서, 일본의 불교는 사찰의 일주문 밖으로까지 나와서 일본의 문화를 독특한 것으로 만들어 왔던 것이다. 이렇게 근대 인도에서 불교가 없음으로 인해서 아쉬운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는 진단은 타고르만 한 것이 아니다. 비베카난다(S.Vivekananda, 1863-1902) 역시 그렇게 하고 있다. 거지가 많은 이유, 남의 나라에 지배당하고 있는 현실이 불교와 힌두교의 분리에서 시작되었다고 그는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Buddha and His Message", Advaita Ashrama, p.48)

이렇게 타고르는 일본의 문화에 대해서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그의 방일 5년 후가 되는 1921년에는 산티니케탄에 일본학과(Nippon Bhavana)를 세운다. 이 일본학과는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당시에 타고와 깊은 교분을 나눈 인사가, 야마오리 테츠오(山折哲郞)에 의해서 "일본의 근대를 대표하는 인물"(『타고르와 간디 재발견』, 法藏館, 47쪽)이라 평가받은 오카쿠라 텐싱(岡倉天心, 1862-1913)이다. 그의 추천으로 최초의 일본인 유학생 호리가 산티니케탄으로 온다.(1920년부터 30년동안 미술대학/깔라 바반의 책임을 맡았던 화가 난다랄 보세/Nandalal Bose, 1882-1966, 역시 오카쿠라를 통해서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의 그림 중에는 일본 여인을 그린 작품도 있다. 바로 난다랄 보세가 학장으로 재직할 당시, 사트야짓트 레이가 미술대학을 다녔고, 인도문화 및 중국과 일본의 동아시아 문화에 대해서 지도를 받는다.)

이후, 가르치기 위하여 또 배우기 위하여 많은 일본인들이 이곳 산티니케탄을 오고 간다. 그래서일까, 심지어 "중국집(Chinese Stall)"의 주인마저 일본어를 구사하며 일본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일본제국주의 비판





한편, 타고르는 배워야 할, 혹은 받아들이거나 교류해야 할 일본의 문화와 비판하거나 거부해야 할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해서 칼같이 구별한다. 이에 대해서 아마르티아 센이 드는 예는 두 가지다.

첫째, 인도독립운동가들의 친일 내지 일본과의 연대 --- 일본측에서는 철저히 '이용' 하는 것이었다 --- 에 대해서 분명한 반대입장을 개진하고 있다. 일본측의 공작에 의해서 열리게 된 방콕회의에서 인도독립연맹의 의장으로 활동하는 라쉬 베하리 보세(Rash Behari Bose)와 베하리 보세 이후 일본에 의해서 인도국민군(Indian National Army)을 움직이는 '손'으로서 환영받았던 수바쉬 찬드라 보세(Subash Chandra Bose)의 친일활동을 타고르는 비판한다. 베하리 보세가 일본에 머물 때, 타고르에게 편지를 보내서 일본과 연대하려는 그의 활동에 지지를 호소한 적이 있다. 이에 타고르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만다.



일본의 새로운 힘이 다른 나라의 이익에 맞서서 아시아의 문화를 보호하는

데 모아지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떠오르는 희망을 배신하였으며, 일본

의 훌륭함 속에서, 우리에게는 상징적이고 계몽적인 것으로서 의미있게 보이는

모든 것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방어능력이 없는 아시아의 사람들에 대해

서 그 스스로 더 나쁜 위협이 되었다.(Amartya Sen, The Argumentative

Indian, p.110. 재인용)



타고르는 진심으로 일본의 문화가 서양문화와는 다른 가치를 보호해 주길 바랐으나 --- 여기까지는 아시아가 뭉쳐서 서양에 대응하려는 '아시아주의자'들의 논리와 흡사한 듯이 보인다 ---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힘없는 아시아국가를 침략하는 현실에 눈을 감지 않는다. 바로 그 점에서 '서양 대 동양'의 논리 속에서 '동양'의 대표로서 스스로를 자임하고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동양의 다른 나라를 침략해도 좋다는 인식을 갖는 침략'적 아시아주의의 논리적 허구성과 타고르의 입장이 같을 수는 없다. 이런 맥락에서, 인도국민군의 지도자로서 일본과 연합하였던 수바쉬 찬드라 보세에 대해서도 타고르가 만약 그때까지 살아있었다면 타고르가 한때 헌신적이고 분파주의적이지 않은 투사로서 그를 찬탄하였으나, 분명 길을 달리했으리라고 센 교수는 말한다.

두번째 사례는 일본의 시인이자 타고르의 친구인 노구치 요네(Yone Noguchi)가 타고르의 일본관을 바꾸어달라는 요청을 해왔을 때의 일이다. 이때의 답변 요지는 다음과 같다.



다른 아시아의 나라들을 겁주어서 당신의 정부정책에 줄세우려 하는 일본의

확실한 권리에 대한 당신의 신념에 나는 함께 할 수 없으므로, 우리 둘 중 누

구도 다른 사람을 믿게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무익한 일로 내게는 보입니다.(센,

앞의 책, 111쪽)



이렇게 일본제국주의의 정체성에 대한 타고르의 인식은 보다 직접적으로는 반(反)제국주의의 투쟁을 통해서 영국으로부터 인도독립을 추구하는 독립운동가들의 그것보다 더 분명하고,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약소국을 지배하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없이, 어떻게 스스로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독립할 생각을 다 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만큼 인도독립에만 신경 쓰느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말일까? 인도에서는 이들의 오류가 그저 인도독립운동의 과정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문제시되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 지 알 수 없다. 타고르의 높은 안목을 높이 평가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베하리 보세나 수바쉬 찬드라 보세와 같은 사람들)의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이 있어야 할 것이다.





타고르와 우리






타고르는 1929년 일본을 지날 때 한국을 방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일정상 그럴 수 없자, 짧은 시 한 편(4행)을 적어준다. 이것이 종래 「동방의 등불」로 널리 알려진 시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솔직히 말해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타고르의 분명한 입장을 알지 못했을 당시, 내 느낌은 “이거, 그냥 '립서비스'가 아닐까” 하는 의혹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아마르티아 센 교수 덕분에, 타고르의 진정성을 알게 된 만큼 그런 불신은 지워버버릴 수 있게 된다. 이 시에 대해서 영어 원문의 상태라든가, 번역의 부정확 등 여러가지 문제가 지적되고 있는데(류주환, 「타고르와 동방의 등불문제」, http://kanji.cnu.ac.kr/juhwan/tagore-2008.htm), 그

러한 문제는 그것대로 중요하지만, 적어도 이 시가 당시 조선민중들에게는 적지 않은 힘이 되었음에는 틀림없는 것같다. 만약 당시 식민지 지배하의 조선을 타고르가 방문할 수 있었다면, 그 체험은 그가 방문한 다른 나라들(아르헨티나, 이태리, 러시아, 영국, 일본 등)과도 다른 인식을 가져다 주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삶과 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나 개인적으로 하나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나도 '일본'을 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불교사연구소'까지 세웠다. 타고르의 일본관과 나의 일본관이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싶어서다. 비판할 것은 비판하되, 알 것은 알고, 배울 것은 배우자는 것. 우리 자신의 소중함을 알면서, 문호를 열어놓고 상대를 수용하자는 것. 그래서 나와 상대의 문화가 하나일 수 있음을 믿는 것. 그럼으로써 진정한 샨티(평화)가 가능하다는 것. 우리 사는 이 세상을 '샨티니케탄'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 바로 여기서 나는 타고르와 공명(共鳴)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2010. 2. 20. 산티니케탄)





附 : 비슈바 바라티 대학(Visva Bharati University)의 일본학과



산티니케탄의 비슈바 바라티 대학에는 중국학과(Cheena Bhavana)와 일본학과가 있다. 이 중에, 우리는 특별히 '일본학과'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우리와 '일본'의 인연이 깊기 때문이었고, 타고르와 '일본'의 인연 역시 옅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본학과의 위치는 '중앙도서관(Central Library)' 앞을 지나서 '리피카(Lipika, 영화 상영 등을 할 수 있는 강당)'를 지나서 한참 걷다가 우회전한다. 오른쪽으로 큰 공터를 끼고서 직진하다가 왼쪽에 있다. 외벽에 "Nippon Bhavana"이라는 큰 간판이 붙어있다. 큰 글씨 밑에 작은 글씨로 "Center for Indo-Japanese Studies"라고 쓰여져 있는 것 아닌가. 우리는 "일본학과"라고만 하거나, "일본학연구소"라고 하면서, 그 안에 '한국'을 위치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본'이 문제되는 것은 '인도와의 관계' 속에서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들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인도철학과'(금년부터는 아예 학부에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는 '한국-인도철학과'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한국이 들어가는 인도철학이 되어야 했으리라.

여기는 학과 단위로, 혹은 크게는 단과대학 단위로, 하나의 단독건물을 제공하고 있다. 땅이 넓어서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마당에 석비가 하나 놓여있다. 일본-인도친선기념비, 라고나 할까.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벵골어와 일본어로 뭔가를 써놓았다. 일본어에 따르면, 타고르가 일본의 화가 아라이 칸포우(荒井寬方, 1878-1945, 저서로 『阿弥陀院雑記』)에게 준 시가 번역되어 있다. 번역은 "타고르와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벵골어로 쓴 타고르 전문가 아즈마 카즈오(我妻和男) 선생의 솜씨다.

역시 시인이다! 짧은 글이지만, 그 정이 깊이 묻어 있다.



    荒井寛方氏へ              ロビンドラナト タゴール

(Rabindranath Tagore) 

                          大正7年(1918)5月8日

   愛する    

       友よ

  ある日 君は客人のように

   私の部屋に来たった

  今日 君は別れのときに

   私の心の内奥に来た



             我妻和男 訳(타고르가 벵갈어로 쓴 것을 일어로 번역)    

*我妻和男(1931년 도치키 현 출생, 日-印度타골협회 사무국장,

제2회 타골문학상수상, 駒沢大명예교수)







  아라이 칸포우에게



사랑하는

친구여

  어느날 그대 손님인 것처럼                     

 우리 집에 왔지

  오늘 그대 헤어질 때에

  내 마음 깊은 곳으로 왔지



아마도 아라이 칸포우는 호류지 금당 벽화의 모사에 참여한 그 화가같다. 인도를 가서 아잔타 벽화를 모사하였다 하니, 배를 타고 다녔을 그 시대에 대단했던 것같다. 대정7년(1918년) 이전부터 타고르와 교류를 가져왔는가 싶다. 그 인과관계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타고르가 처음 일본으로 간 1916년에 그는 인도로 갔다 한다.

또 건물 입구의 외벽에 둥글게 원이 있고, 그 속에 하이쿠(徘句) 한 수가 들어있다. 번역해 본다.



  천축이어라. 天竺や

  달님은 東쪽으로 月は東に

  햇님은 西로 日は西に  



천축은 옛날 인도를 이르던 말이다. 누구 작품인가? 누가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까? 시인의 이름이 없다. 일본학과에 다니는 인도학생에게 물었다. 잠깐 어디가서 물어보고 오더니, "깔리 바반(미술대학)에 유학온 일본학생의 작품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중에 귀국해서 알아보니, 에도시대의 하이쿠 시인 요사부손/與謝蕪村, 1716-1783에게 “菜の花や 月は東に日は西に, 유채꽃이여 달님은 東쪽으로 햇님은 西로”라는 작품이 있다 한다. 그러니, 누군가 이 요사부손의 하이쿠에서 앞 구절 菜の花や를 天竺や로 재치있게 바꾼 것같다. 그만 하기도 쉽지는 않다.)   

이 인도학생과 이야기를 하다보니, 일본에는 문화교류차 2개월 가본 일이 전부라는데 일본어가 놀랍다. 3학년 학생이라는데 완벽하다. 세마나실(SEminar Hall)에서는 일본의 인기그룹 SMAP의 노래 "世界の中카で一つだけの花(세계 속에서 오직 하나뿐인 꽃)"이 흐르고, 그에 맞추어 학생들이 춤을 추고 있다.

도서관에 가보니, 일본의 신문, 잡지, 헌책, 구인광고지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만 있다. 헌책 먼지가 숨가쁘다. 얼른 나온다. 학생들이 여기저기 앉아서 공부를 하고, 어떤 학생들은 일본인 교수님인지, 일어로 '유학상담'을 하고 있다.

아내는 무엇보다 화장실이 있어서 좋단다! 깔라 바반 쪽은, 도무지 여학생들은 화장실도 안 가는지 불편하였다. 파타바반(초등학교1~12학년의 고3까지)을 포함해서 그 많은 학생들은 화장실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해결하고 사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깔라바반 학생에게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무척이나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한참 후에 "타고르 뮤지엄(라빈드라 바반) 쪽에 가면, 유료 화장실이 있다"고 했다. 참, 신기한 일이다!

의자에 잠시 앉아 있자니, 서글픈 생각도 든다. 나라 밖에서 '한국'의 존재는 아직 이렇다. 중국이나 일본만큼 대접받지 못한다. 타고르를 전공하고, '타고르 전도사'를 자임하였던 김양식(金良植) 시인이 "한국학과" 신설을 위하여 노력했다고 하는데(하진희, 『산티니케탄』, 여름 언덕), 어찌 민간인 한 두 사람만의 노력으로 될 일이겠는가. (물론 그러한 노력은 성패 여부를 떠나서 인정하고, 높이 평가해야 할 임임에는 틀림없다.) 정부와 민간의 합력은 물론, 오랜 시간을 두고 우리문화의 자주성과 독창성, 그리고 그것이 인도문화나 세계문화 발전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산티니케탄까지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나 말할 지 모르겠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힘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중국과 일본은 산티니케탄'까지' 신경쓰고, 투자할 수 있는데 말이다.(일본인들의 투자는 정말로 긴 시간에 걸쳐서 굉장하였다 한다. 물론 이 '투자'가 반드시 경제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전에 여기 음대/상키트 바반을 나온 일본의 젊은 연주자 두 사람 'Yo and Waka'의 연주회가 깔라바반에서 열렸다. 인도 전통의 현악기의 하나인 시타르와 전통 타악기의 하나인 타블로의 합주였다.) 비슈바 바라티(전세계)를 커버하고도 남을 만큼의 힘을 우리는 아직 갖고 있지 못한 셈이다.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이리라.



(2010. 2. 22. 산티니케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