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 옥성호 - 교보문고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옥성호의 부족한 기독교 3부작 시리즈 1
옥성호 저자(글)
부흥과개혁사 · 2007년 04월 10일
5.5
(10개의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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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보
저자(글) 옥성호
인물정보
기독교인
지은이 옥성호는 크리스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으나 20대 후반 어느 시점에 '기독교는 코미디'라는 결론을 내리고 기독교에 대해 관심 자체를 끊었다. 그러나 가정적 환경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 교회 출석은 빠지지 않았으며 겉으로는 기독교인으로 행세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2006년 1월 로이드 존스 목사의 <교리 강좌 시리즈>를 읽던 중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크리스천이 되었다.
목차
감사의 말
추천의 글
저자 머리말
글을 열며
1. 심리학은 과학인가, 종교인가
2. 기독교 심리학은 존재하는가
3. 왜 심리학은 반기독교적인가
4. 심리학이 쓴 세 개의 가면
5. 성경은 참으로 충분한가
글을 닫으며
부록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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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ISBN 9788960920088
발행(출시)일자 2007년 04월 10일
쪽수 349쪽
크기
153 * 224 mm판형알림
총권수 1권
시리즈명
옥성호의 부족한 기독교 3부작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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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je****|2007.06.15|신고/차단
도서명 :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저자 : 옥성호 출판사 : 부흥과 개혁사많은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돕기 위한 순수한 마음으로 상담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어한다. 대학원에서 '청소년지도'를 공부하면서 상담심리학, 가족치료, 집단상담 등을 배울 수 있었는데, 그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많은 상담이론과 기법으로 사람들의 정서적, 심리적 상처를 진단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지만, 아주 깊은 곳 근본적인 치유가 어렵기 때문에, 많은 상담기법들이 종교적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교수들마저도 전혀 거리낌 없이 뉴에이지적 사상에 깊이 물든 상담프로그램을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최근 출간되어 뜨거운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는, 교회 안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심리학적 요소들을 지적하고 그로 인해 어떻게 기독교적 정신이 훼손되고 있는지 분석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반기독교적이다. 심리학의 중심에는 프로이드와 융의 사상이 있는데, 이들의 사상은 철저히 반기독교적이다. 게다가 심리학은 궁극적으로 인간 중심이다. 따라서 그 기초 위에 성경구절 몇개 덧붙인다고 해서 기독교적 심리학이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프로이드나 스키너, 융과 같은 심리학자들의 반기독교적인 성향에 대해서는 많은 크리스천 상담가들도 인정하는 것이다. 다만 인간에 대한 이해를 촉진시키는 심리학의 많은 유익한 것들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응용하여 좀 더 신앙적, 인격적으로 성숙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것이 기독교 심리학의 관점이다. 더 나아가 내면 깊은 곳에 뿌리박혀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정서적, 관계적 문제와 상처를 해결하도록 돕는 것이 '내적치유'라고 할 수 있겠다.저자 옥성호는 성경말씀 자체보다 이러한 '심리학적 프로그램'에 더 의존하는 현대 교회의 모습을 실랄하게 꼬집고 있다. 그 이상으로 심리학 자체가 기독교 내부로 스며드는 것 자체를 경계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기독교심리학의 대부라 할 수 있는 게리 콜린스나 우리나라 주서택 목사등의 내적치유 프로그램도 부분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이 출간된 후 찬,반의 논리가 다소 뜨겁게 전개되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기독교내부로 심리학의 요소가 스며들고 있고 성경말씀 자체보다 이러한 프로그램이나 기법들이 더 설득력있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면이 없지 않아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크리스천들이 균형있는 시각으로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사람의 내적인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시는 능력이 있으며 때로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저자가 책을 쓰기 위해 공부도 많이 하였고, 용기있게 문제제기한 면은 있으나, 심리학의 비기독교적인 측면을 설득하기 위하여 약간 무리한 논리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며, '영성'에 대해서 좀 더 많이 경험하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큰 의미를 두는 것은 교회내에 깊숙히 스며들어 큰 영향을 미치는 심리학의 가면에 대해서 잘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폐해로 자기사랑, 긍정적 사고방식, 성공의 법칙 이렇게 세가지를 들고 있다. 이것을 가면이라 부르는 이유는, 교회 내에서 그럴듯한 논리로 포장되어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그중에서도 '긍정적 사고 방식'에 가장 많이 공감할 수 있었는데,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100만부 이상 팔린 '긍정의 힘'의 저자 조엘 오스틴을 비롯한 긍정적 사고방식 전파자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긍정적 사고를 갖는 것이 나쁠리야 없다. 문제는 긍정적 사고를 하면서 믿는대로 된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우리 삶의 생사화복은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에 전적으로 달려있다는 주장과 같다. 또한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시어 단련시키기도 하시는데,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고난을 겪는 사람은 믿음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편리할대로 복음을 심하게 왜곡하는 것이다.책으 후반부에는 조엘 오스틴이 래리 킹이 진행하는 TV 프로그램에 나와서 인터뷰하는 내용이 실려있는데, 그 부분을 읽다보면 오스틴이 과연 진정한 크리스천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는 3부작으로 심리학 편에 이어 엔터테인먼트와 마켓팅 편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사실 그 후속편이 더 기대가 된다.부디 나를 비롯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으며, 또한 전심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랑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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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me******|2008.05.22|신고/차단
[북멘토] 오래동안 망설이고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책을 읽어 보고서 내용을 다 다루고 싶지만 난 먼저 왜 이런책이 기독교에 대해서 지금 변혁을 요구하는 시대에 이성적으로 판단 기준이 연약한, 젊은이들에게 상술을 가장한 도서가 나오게 되었는가 하는 점에 맞추어 보았다. 책 핵심 내용들을 읽어 나가다 보면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긍정의 힘에 대한 내용들을 보면서 이해가 안되는 점을 발견하여 본다. 그러나 이 책은 부분적으로 흐름이 끊어지는 짜깁기 된 내용전개와 그리고 열악한 출판사의 작업이 옥에 티로 도처에 많이 남아 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점은 본문에 나오는 긍정의 힘(조엘오스틴 지음)에 대한 녹취된 내용을 다룬 것들은 과연 저작권 문제에 충분히 조엘 오스틴 목사측에 허락을 받았는지 궁금하면서 , 오히려 이책을 쓴 옥성호 집사님과 함께 제가 아는 미국에 많은 지인들이 오히려 사랑의 교회 원로목사님의 목회적 방식에 대해서 비판하는 분들도 상당히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감추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진실을 들추어 낸다. 또한 이책이 그동안에 건강한 상담학을 전공한 이관직 교수님 같은 분들에 인격과 학문성까지도 평범한 신앙인이 지나칠 정도로 그분에 사랑하는 마음에 권고 내용을 무시하고서 책이 다루어 졌다는 것이다. 부흥과 개혁사 출판사도 마케팅을 포장한 것을 보면 책에다 주고 받은 메일을 올려 놓았을까? 그런 것은 작가의 의도가 아니더라도 이후에 2,3권에서 다루어질 책에 내용에 대한 신선미를 출판사 측에서 오히려 추락시킨 인본주의적 행위라고 볼수 있다. 옥한흠 목사님 아들이라고 꼭 들어가야 했을까? 목회자이면서 한국교회 부흥과 개혁을 외친 분이 혹여 근본주의 신학적인 잣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것이 아닐런지, 합리화 시킬수 없으나 긍정의 힘에 대해서 비평하였던 필자도 시간이 흐르면서 정말 번영의 신학(긍정의 힘 작가, 로버트 슐러등)이 한국교회와 강단과 개인의 신앙에 침투하는 현실을 경계해본다.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고 이중표목사님 같은 별세신학론을 외치면서 , 생애를 모세와 같이 잘 마무리하며, 청지기로서 생애를 잘 정리한 종이 한국교회에는 몇분이나 있는가? 이런 모든 한국교회 상황들을 충분히 연구하면서 본서가 다루어 졌다면 어떨까 하는 심정으로 이 책 부족한 기독교 중에서 "심리학에 물든 기독교"에 대해서 논해 보기로 한다. 옥성호 집사가 출판한 [부족한 기독교 / 부흥과 개혁사간 ] 책은 교회안에 파고든 심리학을 사용한 목회 유린에 대한 일침이며 하나님없이 인간문제를 풀려는 고민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파고들어 자리잡은 것에 대한 경계를 세우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대형교회를 담임하시는 목회자의 자제로서 지근거리에서 고통스러워 하며 사색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누가 만일 이 책에 대하여 어떤 시각을 가지고 비평하려면 그의 고뇌에 못지 않은 또 다른 고뇌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책의 문제점을 드러내려면 또다른 종류의 심리학적 잣대나 구구한 변론이 아닌 성경신학적 문제점[옥성호씨의 기독교 세계관이 건강한 세계관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접근해야 할것이다. 옥성호씨는 다양한 분야의 독서는 적지않게 많이 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나 그가 개혁주의적인 조직신학이나 기독교 세계관을 제대로 연구하였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교회에 심리학의 침투는 차제하고라도 제대로 된 신학이나 세계관 없이 우리손에 들려진 성경만으로 세상을 재단한다 할 때에는 지극히 위험한 독소가 거기 또 있는 것이다. 이를 테면 약을 제조할 때 세균을 이용한 백신을 제조하여 투약함으로서 면역을 증가 시키기도 하지만 그 세균에 감염되어 죽기도 하는 것을 보게된다. 독이 약이 되기도 하고 약이 독이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것 처럼 성경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불변의 진리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단은 성경을 더욱 열심히 공부하는 집단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성경해석이 인간존재를 넘어서서 이루어 지는 일이 아니기에 신학적 미완성이나 계시사상을 드러내는 일의 불완전함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신학연구 과정이 생략되거나 수많은 계시 해석자들의 산물인 성경주석과 기독교 세계관 이해 없는 독단적인 오직 성경의 고집은 설득되기를 포기한 이단들도 강력하게 주장하는 일들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그렇고, 신천지 00 성전 이단이 그렇다. 요즈음 성경 점쟁이들은 얼마나 많은가? 성경구절을 가감없이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여자적 해석과 주문 암기식으로 성경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나는 이전에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동역을 시도했다가 가슴아픈 고통을 감내해야 하였다. 또한 내 친구 목사가 들려준 이야기를 여기에 적어본다. 그에 동기인 정00 [96년 당시 00대 교육학과 동기]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묵상하고 자칭 구원의 완성자라고 하며 메시아를 지칭하는 '이0희[신0지 교주]'의 제자가 되어 지금 부산지역 신천지의 책임자가 되지 않았는가? 친구 목사는 1992년 그분의 집을 방문하였던 바 있다. 그때그는 이만희의 책을 연구하며 책을 다른이들이 보이기 원치 않았는지 책을 뒤집어 꼽아놓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진리를 추구하는 이에게 그런 당당함이 없었을까? 어떤이들은 성경을 많이 읽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이야기 하는데 성경많이 읽은 성경다독 신비주의자 앞에서는 꼼짝없이 묶여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성경을 많이 읽으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문제가 해결이 안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성장하게 되는것이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둘다 놓칠수 없는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이 정확히 세워지려면 신학을 반드시 해야 한다. 온전한 교회생활을 통하여서도 건강한 신앙을 실천 할 수 있는 신학의 테두리는 세워 질 것이다. 그러나 치열하고도 피흘림이 없는 신학 과정이 없이 지도자로 나설때 그가 가진 기독교 세계관으로는 거의 확실하게 이설과 이단을 만들 수 밖에 없다. 나는 옥성호 집사의 책에서 또 다른 무서움을 보았다. 한국교회가 영적 침체에 빠져 허우적 거리며 이땅을 책임지지 못한채 사회적 지탄을 받아온 문제가 어디있을까? 그것이 심리학의 해악으로 부터일까? 하나님의 진리를 교리와 신학의 카테고리에 얽어매어 이 세상을 내집이 아니라고 외치는 근본주의 신학에 대한 반성은 필요 없을까? 장차 망할 이 세상에 살면서 마치 자신은 하늘에서 출장나온 사람처럼 신령하게 보일찌라도 우리는 이 땅에 발붙히고 살고 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의와 타협하며 죄와 협력하지 않고 세운 하나님의 나라가 다시오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나라와 전혀 관계가 없을까? 우리는 통전적 안목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세상과 세속을 구별하지 못한채 교회만의 천국을 외쳤던 지난날을 반성한 적은 있는가? 나는 신학 만능이나 교리 만능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날에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추구해 왔던 세계관이 건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할 수 있는 것보다 할수 없는 것이 머리속에 가득 차 죄책감과 얽매임만 더욱 심어주는 극단주의 신앙의 오류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예수 믿으면 할 수 있는 일들이 더욱 많다. 모든인간은 타락의 결과 유전적으로 계속되는 죄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전적 무능력의 존재가 되었다. 선한것을 도모할수도 없게 되었다. 우리는 벌레와 티끌이 되었다. 존재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상황적으로도 우리는 죄인 중에 괴수이다.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이 예수를 외통수로 만나면 그 순간부터 죄인중에 괴수가 된다. 다 맞고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끝인가? 괴수그 이상은 없는가? 예수를 믿으면 괴수에서 거룩한 성도가 된다.상황적으로는 여전히 죄의 영향력을 100%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성령의 내주함과 그분의 탄식으로 인해 거룩과 성화를 향하여 행진하는 신령한 성도가 된다. 도덕보다 기준이 높은 성결의 사람이 되어 인간에게 본래 부여 하였던 하나님스러운 거룩한 성품이 회복된다.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죄짓는일 빼고는 무슨일이든지 할수 있는 거룩한 자유와 진리의 가운데를 걸을수 있는 자유인이 된다. 이것이 어찌 심리학이며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매도당하여야 하는가?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한다.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라면 주안에서, 주님의 능력안에서 그렇게 될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 해야 한다. 그 위대함이 구 훌륭함이 그 시대의 타락한 시대정신과 세상에 진리의 외침이 되고 있는가? 진리의 깃발이 되고 있는가? 그 당대를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위대한 주님의 사상인가? 소위 진검승부는 일어나고 있다.지금도 어느 한 곳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의 개혁과 부흥의 불길이 이 땅에 참 진리의 진검승부를 한판 벌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예수 패밀리인 성도들이 분연히 일어나 지성과 정서 그리고 몸에 밴 진리를 구현하는 삶을 통하여 이 땅에 진리의 깃발을 높이 들고 행진하는 거룩한 일이 여기서 부터 일어날 것이다. 부족한 기독교라는 책에 나타난 비성경적 요소를 찾아내는 일은 목회자들이 할 일이다. 심리학을 비판하다가 하나님의 진리를 비판해서는 안된다. 만일 목회자의 입장에서 심리학을 변호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옥성호 집사의 책의 자기 사랑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100% 부정하는 입장은 성경적으로 50%정도만 맞는다고 볼수 밖에 없다. 자기사랑의 반대는 무엇인가? 자기 부정이다. 자기 부정은 무엇일까? 우선 우리는 자기의 존재를 부정할수 없다. 자기의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을 부정할수 없다. 거룩한 성령에 이끌려 살려는 열정을 부인할수 없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자기 부정은 죄와 세속성을 향하는 죄된 마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존재가 되도록 자신을 보양해야 한다. 자기 심리와 그 상태도 복음과 성령으로 잘돌봐야 한다. 성경적 심리학까지 부정하면 어찌하자는 말인가? 이 건강한 자기 사랑이 성경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자기를 보양하는것이 예수님이 교회를 보양하는 것처럼 self ministry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비판적 책읽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조차 비판적 칼날을 드리댄다면 이는 독서철폐를 주장하는 단순주장이 될 것이다. 성경 지상주의는 기름부으심이 있는 책들 조차도 읽는 일에 소극적이게 만들고 있을 뿐 아니라 비평적 책읽기도 거부감을 갖게 함으로서 교회가 다시금 근본주의로 돌아가게 하는 역 부흥의 현상을 부채질 할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성도들이 제발 책을 읽기를 권하고 있다. 성경을 붙잡고 있으면 천국에 간사람처럼 이땅에 무관심한 사람으로 변질되가는 이땅의 기독교 인들에게 권한다. 제발 책을 읽자고..... 우리는 성경을 읽어서 하나님을 변화 시키거나 성경을 변화 시키려고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아니다. 사람을 변화 시키기 위하여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무슨생각을 하며 무슨 일을 도모하는지 알아야 할 것아닌가? 심리학의 동향도 알아야 하고 철학의 동향도 알아야 할 것이다? 경영과 마케팅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야 할것아닌가? 상대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씨름판에서 삿바와 씨름하는가? 상대를 알아야 나를 훈련해갈수 있는 것 아닌가? 옥집사님의 지나친 근본주의 잣대로 글을 전개하면서 쓸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역사에 사랑의 교회와 기성 교인들에 모습을 통해서 무엇이 부족한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서, 명확한 방향을 제시한다면 부족한 기독교는 넉넉하고 풍성할 것이다. 바라기는 다음에 나오는 책은 더욱 균형이 있는 책이 나오길 바래본다. [한국양서보급중앙회 북멘토&북코치클럽] http://blog.naver.com/mentorpark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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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ke*****|2011.02.27|신고/차단
우선 옥성호 씨의 오류는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1. 개신교인과 비개신교을 개신교 근본주의에 의해 선과 악으로 나누었다는 점
(상식적으로 세계 3대 기독교는 가톨릭, 동방정교, 개신교 순이다.)
또한 종교개혁 이후의 칼뱅의 개신교는 유대자본과(엄밀히 말하면 고대 가나안인과 바벨론에서 비롯된
짝퉁유대 세계정부) 결탁하여 자본주의를 만들었다는 점을 간과했다.
세계정부가 종교로 택한 유대교와 칼뱅의 청교도의 공통점은 자본주의의 발판을 만드는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선민사상과 예정설, 즉 야훼께 지정선택된 자들만 구원얻는다는 폐쇄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중세 가톨릭보다 더 폐쇄적일 정도의 교리를 갖고 출발했다.
2. 심리학 도입에 대해선 비약적인 부분이 다분했다. 개신교 근본주의 특유의 이분법(이원론)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노만 빈센트 필로부터 시작된 적극적 사고로부터 현재의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나 각종 마케팅 대형교회에 대한
지적은 설득력이 있으나 초대 기독교 위주의 시선으로 좀 더 거시적이고 세계사적인 방향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은사주의나 각종 초대교회에 나타났던 사례들을 깔아 뭉갬으로서 개신교 근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본능적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옥성호 씨는 한국 대형교회의 대표적인 패악성, 즉 물량주의, 십일조, 목사 중심의 제사장주의와 권위주의,
자본주의와 청교도와의 관계, 강남 중심의 대형교회 문제, 설교의 유무의미성 등을 절대 거론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시무하던 사랑의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여러 문제점
(강해설교, 제자훈련을 통한 목사 중심의 중앙집중식 기득권적 교회, 강남의 7,80년대식 선구자적 대형교회 문제) 들을 교묘하게 피해나갔다.
또한 개신교 근본주의적 배타성을 마틴 로이드 존스 사례를 들먹이면서
교리 중심의 원론적 기독교라고 과대 포장하는 기만술을 보여주는 헛점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설교라는 것이 정녕 필요하고 목사라는 직업이 정녕 필요한가에 대해서 의심을 가진 적은 없었는지 궁금했다.
즉 기독교 비판에 있어 모든 인류에게 적용될 수 있도록 거시적이고 중립적인 모습을 전혀 갖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 많은 모순들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의 가장 큰 문제는
칼뱅식 지정 선민사상을 기반으로 한 개신교(특히 장로교) 근본주의의 틀에서 절대 벗어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버지를 잘 만나서(?) 생긴 자연적인 오류일 것이다. 그가 만약에 비장로교 집안의 중산층 이하 집안에서 성장했다면???
즉 칼뱅식 선민사상인 소명설 중심의 개신교인들만을 위한 (여타 사람들은 어찌되든 관계없이) 지침서로만 볼수 있는 저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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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현 개신교의 유래와 오류 : 자본+적극적 사고+다원 신비주의 기독교를 개독교화시킨 방법은 크게 두가지가 있습니다.자본에 의한 잠식과 인간변혁 프로그램에 의한 잠식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1. 자본에 의한 잠식
과거 중세시대에는 로마제국이나 교황청의 정치화와 유럽의 십자군 등 제국주의를 통하여 기독교를 잠식해 왔다면
종교개혁 이후에는 17세기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 과정에서 자본에 의하여 잠식되었다고 봅니다.
즉 자본주의는 세계정부와 청교도의 합작품인 셈입니다.
유럽은 중세 암흑기 이후 크게 독일의 종교개혁에 의한 신구교간 30년전쟁, 그리고 영국의 '명예혁명' 사건이 터집니다.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 이후,
대부분의 유대인은 신교의 해방구였던 네덜란드에서 둥지를 틀고 암스테르담을 거점으로 은행을 만들면서 경제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이들은 앞서 스페인에서 거주하다가 쫒겨나면서 그 자본력이 네덜란드에 모이게 된 것입니다.네덜란드는 유대 자본을 바탕으로 무역에 뛰어들면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1602년에는 세계 최초로 증권거래소를 만들어서 투기를 시작했습니다.
30년전쟁은 1600년대 초반 독일의 신구교간 싸움에서 일어났고 그 후 독일 인구의 2/3가 줄어듭니다.그당시 프랑스는 가톨릭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와 적대적이어서 신교에 합세할 정도로 기나긴 싸움이었습니다.그동안 유대인을 괴롭혀왔던 신구교인들은 이 싸움으로 인해 유대인들의 고리대금 전쟁자금과 용병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미 칼뱅은 청부론에 입각하여 유대인의 5%이자율 한도 내에서 대부업을 허용했습니다.그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서 독일은 신구교의 종교자유를 허락하고
이 종교자유를 원인으로 유대인은 본격적 득세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영국에서는 왕당파와 의회파 간의 암투가 있었으며 그 와중에 크롬웰은 의회파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힘을 입어구테타에 성공하여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청교도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네덜란드 유대인들의 입국을 허용하면서 이들은 영국에서 본격적 득세를 합니다.
즉 영란은행을 설립하여 영국 화폐를 주조할 권리를 갖게 됩니다.
크롬웰의 철권정치에 신물이 난 영국백성들은 크롬웰이 죽자 찰스 2세, 또 그 동생 제임스 2세가 왕당파의 부활을 맞이했으나
왕의 사위 윌리엄3세와 의회파의 합작으로 권리장전과 명예혁명이 일어났습니다.그는 유대 자본의 후원 하에 영국왕이 되었고 그 답례로 영국 중앙은행을 유대인에게 넘겨줍니다.결국 유대인은 영국 화폐제조와 중앙은행을 장악하게 되는 것입니다.자본주의 역사는 유대 자본과 청교도 의회파들의 공동 합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2. 인간변혁 프로그램에 의한 잠식
세계정부의 케네디 암살 사후 린든 존슨은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였는데,이미 세계정부는 '질질 끄는 베트남전'을 기획하였고반면에 반전운동을 기획하였습니다.이간질은 세계정부의 주특기요 위선은 이들의 대표적 전술입니다.마약이라는 매개체는 이미 과거 로스차일드 가문과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조부 등을 비롯한구미 상인들이 중국에 아편을 가지고 들어와 아편전쟁이라는 과거 중국 점령의 일환으로 사용하였으며, 베트남전의 배후에 CIA 등 세계정부 산하 정보기관이 미국인 가축화를 위해 많이 써먹던 방법입니다.베트남전은 한국전쟁처럼 냉전 기획의 일환으로 사용되었지만
당시 골든트라이앵글(황금의 삼각지대)인 라오스,태국,미얀마의 삼림지대로부터미국 국내로 마약을 가져오기 위한 CIA의 기민한 정보전도 작용했습니다.
이 때부터 반전운동과 함께 마약, 히피문화, 비틀즈로부터 이어지는 록큰롤, 점성술, UFO, 3S정책,
채널링 혹은 신지학, 아쉬케나짐 세계정부에 의한 헐리웃산업 등의 뉴에이지 문화혁명과여러 사상들이 대중에 유입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문란한 성생활, 낙태, 총기난사사건, 표현의 자유가 유행되기 시작했습니다.특히 기독교에는 기독교 분열 시스템인 타비스톡 연구소의 '적극적 사고'와 함께 힌두이즘 계급적 체념정신과 환생설이 불교와 함께 왜곡 범벅되여 각종 신비주의와 '인간변혁 프로그램' 이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이들은 차후의 시대는 물병자리 시대이므로 그 시대에 맞게 모든 것을 변혁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과거 아인쉬타인의 양자물리학을 기발하게 응용하여 기독교에 도입시켜 야훼가 주체가 아닌 '나'가 주체, '나를 중심으로 끌어당김' '내가 생각한대로 이루어짐'등의 마약의 효과가 있는 인간변혁 프로그램이 목회에 도입되면서
후에 대형교회라는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대형교회라고 해서 나쁜 것인가? 시각에 따라서 달라질수 있다고 봅니다.다만 대형교회의 근원적 원류를 파악해 보면 교리니 사상이니를 떠나서 궁극적으로 물량, 돈이 주체인 것으로써 시작부터 잘못된 체제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기한 긍정주의, 낙관주의는 잘만 이용하면 약이 될 수도 있겠지만 세계정부의 밀턴프리드먼식 화폐주의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현 시점에서는 굉장히 위험한 독이 되는게 다반사입니다. 애초의 세계정부의 발명품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거 박정희 시대에 '하면 된다'라는 기치를 내걸었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에 적합한 구조였고 신자유주의가 아직 한반도에 뿌리내리지 않았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아무개나 영력이나 카리스마(은사)라고는 전무하면서도
생각한 대로 이루어진다는 둥 남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국 청교도 혁명 자체가 브루주아지 즉 자본가와 의회파에 의한 혁명이며세계정부가 합작한 것이기에 자본은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였으므로 십일조나 물량주의, 건물지상주의는 자연스럽게 확산되었습니다.
계몽주의의 산물이라며 왕정과 귀족 몰아낸 민중 혁명이라고 호도하는 무식하기 이를데 없었던 프랑스혁명 역시
근원은 세계정부가 배후에서 조종하고 시민 자본가인 브루주아지들이 주체가 된 혁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가지 잠식효과가 현재 기독교에서 어떤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을까요?
미국 최초 대형교회는 로버트 슐러의 수정교회이며 현재 수정교회는 미국의 대형교회 부자세습의 원조격이라 할수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에는 두가지 대형교회 유형으로
하나는
노만 빈센트 필 --> 로버트 슐러 --> 빌리 그래함으로 이어지는 무분별한 '적극적 사고방식'을 유용하게 써먹은 조용기 목사의 순복음교회 유형으로서 현재까지 사기꾼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 류로 명맥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노만 빈센트 필 목사의 '적극적 사고방식'은 로버터 슐러에게 이어졌는데실제로 필은 죽은 자의 혼령과 대화를 나누는 신비주의 목사였습니다.그의 자서전을 보면 실제 그의 부모나 죽은 그의 동생의 혼령과 대화를 나누는장면이 그려져 있으나 그의 귀신론을 한국 목회에 적용한다면 문제될게 뻔하므로한국 대형교회의 그의 제자목사들 사이에서는 금기시된 것입니다.한국교회는 귀신얘기만 나오면 뻘쩍 뛰는데 귀신 얘기하면 이단 운운할께 뻔하므로그들의 관심은 영력보다는 오직 물량주의에만 쏠려있기 때문입니다.
빌리 그래함 역시 힌두교와 불교에 심취했으며대표적인 힌두이즘식 신비주의 영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기도 중에 흔히 말하는 전생퇴행이나 최면치료를 많이 행해왔으나실제 목회에서는 적극적 사고와 물량주의 기법에만 천착하며 대형교회 기법으로대중을 장악한 케이스입니다.
우둔한 한국교회는 귀신론이니 신비주의 얘기만 나오면 무조건 이단낙인 찍으려 하는과거 선교사들의 이상한 가르침에서 못벗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오리엔탈리즘으로 한국의 성황당식 기복신앙을 비하시켜 버림 셈입니다.물론 말도 안되는 전생퇴행이나 UFO 등은 구분할줄 알아야겠지만 초대교회는 애초에영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기사와 이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야훼로부터 내려오는 은사주의와 그렇지 않은 다원 신비주의를 구별해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문제는 이들이 야훼의 영력을 뒤로 한체 적극적사고와 물량주의만을 도입했다는 부분입니다.
또 하나는
기독교 근본주의에서는 이단으로 낙인찍힌 김기동 성락교회의 귀신론으로 유명한 '베뢰아'라는 교단이었습니다.이 베뢰아로부터 한국의 대형교회 중 반 이상은 베뢰아 제자들이 목사가 되어이루어진 것입니다.사실 기독 근본주의자들이 귀신론을 들어서 이 교단을 매도하지만 귀신론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나 사적으로 다른 교리를 집어넣은 것 중에서 문제될 것들이 다분합니다.
한국 대형교회의 원조라 하면 지금은 신앙촌으로 전락한 박태선의 마포전도관인데,1950년대말 3만명이나 모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능력은 탁월했으나 이를 끌고 나갈 교리를 만들지 못하여 신앙촌 간장공장으로 전락한 것입니다.대체로 대형교회의 원조는 기독 근본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단출신들입니다.게 중 베뢰아 성락교회의 김기동 목사가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는데
명성교회 김삼환, 주안교회 나겸일, 온누리교회 하용조, 연세중앙교회 윤석전,대전중문교회 장경동, 예루살렘교회 이초석 목사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김기동 목사의 영력은 출중하여 멀쩡한 목사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귀신을 뽑아낼 정도였다 합니다.야훼의 영력이건 귀신의 영력이건 자신의 영력이건 영력을 개발하면 인간은 얼마든지기적과 이사를 행할수 있습니다.
최근 일산 한소망교회 유영모 목사나 신길교회의 이신웅 목사, 과천 하베스트샬롬교회 등은 부흥회 중에 이빨을 금니빨로 둔갑시키거나 금가루가 내리게 하는 걸로 유명합니다.
이 모든 것이 야훼의 능력임은 맞습니다.
이것은 체험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시각이 극과 극일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세계정부의 기독교 지배로 인하여 모든 야훼의 능력을 목사들을 통해 대형교회와 물량주의로 개독교화시켰음에 있습니다.
이들의 한사코 공통된 특징은 궁극적으로 또는 노골적으로 돈과 물량을 밝힌다는 것입니다.
박수무당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작금의
대형교회라 일컬어지는 직접적 근원은 대체로 노만 빈센트 필의 적극적 사고와김기동 목사의 제자들로 인한,
두 갈래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독교라고 해서 정말 못된 것일까요?그렇지 않습니다. 이를 잘못된 면만 부각시켜 목사들이 이용해 먹다 보니부정적으로 각인된 것입니다.
사실 예수 사후 313년 로마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이전까지의 초대 기독교의 공동체는 은사주의였습니다. 즉 공동체 내에서 물량주의를 차단하고 십일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연보라는 형식을 사용했고,다락방 같은 곳에서 각종 기사와 이적이 끊이지 않은 형태의 순전한 기독교였습니다.현 기독 근본주의자들이 은사주의를 이단이라 비난하면서성경 원리주의에만 사람들을 옭아매어 권위주의 제사장 중심으로 기득권자들만의 사교장으로서만 작동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전도를 도대체 왜 하는 건가요? 전도는 금지해야 합니다. 성서에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말씀 하나 가지고 전도라는 방식을 이용했으나모두 불순한 목적이었고 잘못된 오용 투성이었습니다.
성경 문자주의와 원리주의가 낳은 수많은 불량품 중 하나입니다. 불량품은 안하면 됩니다.
가톨릭 전도의 근원격인 예수회조차도 유럽 제국주의나 오리엔탈리즘의 앞잡이가 실체였습니다.모세 5경을 토라로 제시한 유대교의 탁월한 점은 물론 선민사상이라는 폐쇄성 때문이기는 하지만절대 전도를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따라서 유대교는 그다지 비난받지 않는 반면 오히려 교육적으로 권장되는 측면이 있습니다.전도하면서 노상방뇨 버러지 취급당하는 것이 과연 청교도 정신일까요?
로마 국교 이후 이들이 순수 은사주의 형태로서 유지를 시켜왔다면 진정한 기독교의 모습을 잘 발전시켜세계정부의 대 인류 붕괴정책에 잘 맞설수 있었을 것입니다.그러나 중세까지는 로마나 유럽 중심 제국주의의 일환으로, 근대 종교개혁 이후에는 자본주의의 일환으로,현재는 은사주의에 각종 인간변혁 프로그램과 성장 위주의 무분별한 적극적 사고,돈을 중심으로 한 물량주의만를 도입시켜 인류에게도 버림받고 세계정부에도 버림받는 개독교로 성장시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방식은 저 무지몽매한 기독교 비난자(비판이 아닌 집단최면적 비난)들 조차도적극적 긍정적 사고, 인생뭐있어 류의 낙관 낙천주의자들 투성이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세계정부의 인간가축화 전략 자체가,
애초에 상기한 인간변혁 프로그램에 의해 무뇌화시킨 다음에 서서히 서서히 착고를 채우는 형식입니다.
고로 이들 낙관주의자들은 공부나 분석을 할 필요없이 인간변혁 프로그램에만 몰두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방식을 쓰면 꼭두각시에 불과한 역사적 독재자나 지도자, 대통령들처럼
정신없이 우왕좌왕 돌팔매질 당하며 막판에 쑈를 벌일 필요없이
커튼 뒤의 세계정부 지도자들은 뒷짐지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각국의 백성들을 농락할수 있습니다.
또한
기독 근본주의자들은 다원 긍정주의로 변형된 복음주의적 대형교회나 은사주의를 비난한답시고
마틴 로이드 존스 들먹이며 먹고 살기 힘들어지는 중생들에게 제자훈련, 강해설교를 강조하여 옭아매면서
교회를 영력이 없는 권위주의 중앙집권체제 하에서 기득권들만의 사교장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뒤로는 자본을 그러모으면서 과거 중세 가톨릭 식의 교리와 형식 중심의 권력집중과 배타성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세계정부의 당수인 존 록펠러를 비롯하여 노만 빈센트 필, 로버트 슐러, 빌리 그래함처럼
마틴 로이드 존스 역시 세계정부가 사주한 인물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런 대부분의 교회들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대부분 지역적 기득권 지역인 강남 3구에 밀집해 있습니다.
장로교나 침례교로 탈바꿈하여 상기 1번의 세계정부와 청교도의 합작품인 자본에 의한 잠식을 철처히 따르는 종교라 하겠습니다.
유대교나 애초의 칼뱅식 장로교의 공통점은 청부사상이요 선민사상이나 예정설로 인한 배타성입니다.
즉 지정 선택된 자만 구원얻는다는 논리입니다.
칼뱅이 기독교를 유대교와 같은 청부사상의 반열에 올린 것은 업적이라 할 만 하나,선민사상과 별다름없는 예정설로 인해 가식 위선적인 경건주의로 중생들을 중세 가톨릭보다 더 율법주의적으로 옭아매고
예수의 복음의 핵심인 전인류 구원교리를 도로아미타불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이들은 종교통합을 무분별하게 비난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종교통합과 종교일치는 천지의 차이입니다.
무분별한 종교통합 다원주의는 최악이라면 날카로우면서도 포용적인 종교일치는 최선입니다.
게다가
대형교회를 비판한답시고 유럽식 좌파 변증신학 한다는 자들은
한국 특유의 어용좌파(친북이나 친어용민주당식)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변증 철학들은 잘도 끌어대는데 야훼로부터 내려오는 은사주의는 아예 내리깔아 버립니다.
유물사관에만 집착함으로 영력의 기독교를 그리스 철학식 인본주의 종교로 전락시켰습니다.
세계정부가 좌파 우파를 이용해 정치후진국을 잠식해 간다는 점에서는 이들이 제일 한심한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정용섭, 조헌정 목사나 한복입고 전통사물극으로 목회를 한다는 사기꾼등 다방면입니다.
세계정부는 이렇듯 기만술에 능하고 선동적이고 위선적입니다.이것이 바로 기독교 분열시스템, 궁극의 인류 분열시스템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이미 우리는 그들의 인간 가축화로 인하여 동물농장에서 살고 있습니다.포탈, 블로그 시스템에 접속한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물론 이용해서 즐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체로 영원히 헤어나오지 못하는 단일시스템 구조입니다. 몸에 칩 박지 않는다고 해서 안심할 일이 아닌것이 이미 베리칩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단지 갖고 다니는게 불편하냐 아니냐에 따라 어찌 될지 모를 일일 뿐입니다.언론과 대중성이라는 세계정부의 매트릭스 시스템 속에서 로마 기독교 이후 그간 은밀하게 명맥을 유지해 온 소수의 훌륭한 은사주의 기독교 시스템이나 각종 훌륭한 영적 신비주의조차 사라져가는 대신공장에서 찍어내듯 대중에 입맛에 맞는 가시적이고 공학적인 시스템들과 짜맞춰진 인간모양새들과 복합적이지 않은 획일화된 인간형만 성장 발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과거 세계정부의 미국인 가축화로 인해 단순 무식해진 미국의 국민성이
현재 전세계에 얼마나 파급되어졌는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 잘 먹히는 바보 이미지로 인한 대중장악, 나쁜남자 신드롬, 아이돌 지상주의,
세계정부의 모략으로 인한 지도자나 정치 약점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토크쇼와 예능 강국으로의 매스컴 장악과 대중의 환기,
이들의 특징은 공부나 분석을 혐오하거나 샤프함을 평가절하하는 대신 궤변이나 현학에 몰입한다는 점입니다.
즉 인간기계화와 인간가축화는 현재진행형입니다.
피똥인지 고추장인지도 모르고 악다구니쓰는 피해의식 분출구로서만의
오르가즘식 막무가내식 기독교 비난이
실상은 세계정부의 총알받이이자 유년 유아기적 떼쓰기 발상이며
촌철살인같은 기독교 비판과 개혁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 대목에서 다시 각인됩니다.
하여간 어딜 가나 이념분열 조장하는 놈들이나 종교분열 조장하는 놈들이 말썽입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려면 기독교 안에서보다는 기독교 밖에서 비판해야
부처님 손바닥 보듯이 할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 있으면서도 충분히 기독교 밖에 있듯이 비판할수 있다면
더욱 정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
이 나라에서는 아직 그런 사람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정부와 줄다리기를 벌이는 사람들은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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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hy****|2009.11.05|신고/차단
1. 도입
대학교 1학년때 우연히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감도 독특한 말이었지
만 왠지 모를 궁금증에 국회도서관에서 주제어 검색을 하여 8권 정도의 책을 찾았었다. 학교에는
몇 권되지 않았는데 그 책들을 다 빌려서 쌓아놓고 읽다가... 당시 내 지식 수준으론 넘 어려운
이야기들에 도로 다 반납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그 정의이다. 모더니즘이 과거로부터의 "변화"를 꿈꾸는 것이었다
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그 변화의 기준이 되는 틀 조차 바뀌어져 버린 것이라고.
오늘날 사회의 모습이 그렇다. 더 이상의 절대적인 기준들은 모두 사라지고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따른 기준들이 가치판단의 근거가 되어진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에교회나 그리스도인 들은 사실
상 철저히 말씀에 근거하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영악하게 그 흐름을 따라가지도 못하고 있어
보인다. 세상이 그저 이전과 다르게만 흘러가는 것이라면 성경의 잣대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이
야기 할 텐데, 이제는 그 기준의 틀에 대해서 시비를 걸게 되니...
2. 책에 대한 찬사
이 책의 탁월한 점은 작가의 지적이다. 사실 목사님 아들로 30년 넘게 교회에서 이른바 "신앙생
활"을 해온 작가는 교회가 돌아가는 흐름들을 잘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에 근거한 작가의 지적은 정말로 탁월하다.
교회 내에 도입된 여러 심리학적 기법들, 마케팅 기법들. 사실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데 유익한 것
이라면 나 개인적으로는 가치 중립적인 방법들에 대해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늘 교회 공동체에는 영적인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 공동체의 리더가 아무 생각없이 좋은
뜻으로 한 말 한 마디라도 그 의미와 진정성이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 말을 들은 다른 사람들은 그
생각에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철저히 하나님 말씀과 복음에 기초하지 않은 교회,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죄와
함께 할 수 없으시기에 예수님을 보내어 우리의 죄의 댓가를 감당하게 하신 사랑,그 예수님을 통
해 창조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그 진정한 교제의 장에 나아가기 위해서 거쳐야
할 회개와 돌이킴을 빼 놓는다면 사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그 의미가 희석될 수 밖에 없는 것
이다.
하나님의 관점은 분명히 사람을 향한 사랑이다. 하지만 지금 이 땅 위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인본주의적 사고가 아니라 다 함께 하나님께 돌아가기위한 탕
자의 옷을 찢는 돌이킴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심리학적인 기법으로 희석시키는
것은 오늘날 하나님보다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세대 교회의 큰 문제이다.
작가의 이러한 관점은 정말 탁월한 지적이다.
3. 유감스러운 그늘들
1) "심리학"이 교회에 필요하게 된 이유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특히 시스템에 도입된 모든 제도는 그 것이 요구된 "상황"이 있다. 현
대 교회에 "심리학" 기법이 들어와 있는 것은 그저 이유없는 사단의 장난질로 말미암은 것이 아
니다. 그 이유를 찾아 그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작가의 이야기는 그저 현상에 대한 비판
만 될 것이다.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는 "필요"에 대한 온전한 정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필립얀시와 달라스 윌라드와 같은 작가들의 글을 좋지 못하다고 평가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은 달라스 윌라드이다. "하나님의 모략", "마음의 혁신"등의 책을
쓴 분 인데 이 분은 신학자이시면서 인문학자이다. 그렇기에 "사람"에 대한 이해가 일반 신학자
에 비해 탁월하다. 이 분의 책들은 미국의 보수적인 신학교에서도 사전교재로 인정되는 상황이
고. 이 작가가 이 분의 글을 배척한 것은 아마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인본주의적인 관점을
담고 있다고 본 것 같다(작가가 책을 반대하는 정확한 설명이 없어서 이 것은 그저 나의 추측이
다).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사람"은 의외로 참 복잡한 존재라는 것이다. 작가가 문제 삼은 심리학
이란 것도 결국은 이런 사람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는 학문이다. 또한 과거의 권위주의 사회를 거
치면서 우리들은 "사람"의 존재(sein)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제도와 조직에 의해 무언가를 하여
야 한다(sollen)에 관심을 두어서 이것들을 강요해 왔다.
"종교"라는 형태로 "기독교"라는 타이틀을 가진 우리 교회도 특히 이런 모습에 익숙하다. 무언가
를 하여야 한다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이후 자신의 모습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된다. 바
울의 고백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를 외치며 마음을 따르지 않는 육신을 한탄하며.여
기에서 우리는 "성화"를 말한다. 주님을 닮아가야 하는 우리의 인생에 대하여. 하지만 교회는 그
에 대한 방법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저 기도하고 말씀보라는 이야기 뿐. 사실 이게 정답이다.
기도 안에, 말씀 속에 우리 영혼이 주님을 깊이 만나면 모든 것이 회복된다. 그.러.나.. 그게 그렇
게 쉽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판을 가지고 사람과 하나님을 바라본다. 거창하게 "세계관"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문제는 이미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판이 참 많이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상처치유건 상담이건, 무언가 공동체에서 이렇게 뒤틀려진 우리의 마음판을 바로 잡아주는 시도
가 없다면 사람들은 심리학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들이라도 취하려 할 것이다.
예수님 목마릅니다.. 를 외치며.
2) 과연 심리학은 과학이 아닌가?
작가는 과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결과가 반복될 수 있는 것". 그렇
기에 다양한 사람의 특성으로 인하여 동일한 결과가 나올 수 없는 상황을 연구하는 심리학은 과
학이 아니라고... 우리의 신앙에서 과학적인 것은 수용이 가능하나 과학적인 것은 수용이 불가능
하므로 심리학은 신앙에서 수용될 수 없다고..
사실 위의 생각은 논리적인 결론이 아니라 심리학을 배척하기 위한 임의적인 논리 전개라고 생각
된다. 잘못된 심리학 기법들을 교회의 가르침에서 배척하여야 할 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두 손
들어 찬성한다. 작가의 지적은 정확하다. 그러나 자연과학에서 이야기하는 "과학"의 정의를 인문
과학에 가져와서 "심리학"은 과학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면 개인적으로는 참 황당하고 억지스럽
다고 생각된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모든 심리학도들에 대한 결례가 아닐지..
작가의 말대로 심리학은 과학이 아니라고 하자. 그렇다면 심리학은 "학문"도 아닌가? 심리학에서
나온 모든 이론들은 정말로 "쓰레기"인가?.. 나는 심리학 전공자는 아니지만 심리학 책들을 통해
사람의 본성에 대한 많은 이해를 갖게 되었다. 물론 작가가 지적한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에 문제
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심리학의 모든 것이 정신분석기법은 아니지 않나?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심리학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작가의 단언은 사실 너무 무모하
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3) 너무도 거친 말투들
책을 읽으면서 계속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계속 비추어 지는 작가의 분노어린 말들이었다. "표현
에서부터 매우 권위적이고 형식적인 뉘앙스가 강하게 풍긴다(P70)" 등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
부터 지나친 비약에 의한 비꼼들.. 작가의 현상에 대한 분노는 이해하지만 그러한 거칠고 정돈되
지 않은 표현들이 사람을 감정적으로(내용에 찬성하던 부정하던) 불편함을 느끼게 하여 책이 가
진 좋은 내용을 퇴색시키는 건 정말 아쉬운 일이다. 촌철살인..까지는 아니어도 조금만 감정이 배
제되었다면 독자가 훨씬 편했을 텐데.. 독자를 배려못한 작가의 생각이 아쉽다.
3. 앞으로의 과제
1)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찌니..
철저한 복음으로의 복귀.. 사람의 힘으로 무언가를 얻으려고 했던 노력은 기독교 역사상 끊임없
이 계속되어온 이단의 노력이었다. 이단이라는 특별한 세력이 계속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본성이 원래 빚지고는 못 사니.. 무언가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 이루었다는 이야기 하고 싶은게 본
마음이니.. 그렇기에 2% 부족한 복음을 이야기하게 되고.. 여기가 인본주의가 비집고 들어갈 가
장 절묘한 공간이 된다. 하지만 주님은 철저히 이것을 배척하신다. 근본이 죄인인 우리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 하다못해 새로 시행되는 교통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해서도 공부할 게 생기고.. 버스 한번 지하철 한번 타기도 쉽지 않은 것이 이 세상이
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식을 쌓기를 갈망하고 이 지식으로 우리를 구원시키려 한다. 죄가 아닌 죄
책감으로부터, 영적인 목마름을 육신의 목마름으로 착각하며 그 처방을 내린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는 주님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말고는 도
저히 정답이 없다. 심리학이든 과학이던 어떤 최첨담 학문을 가지고도 절대로 이를 수 없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어긋나는 길을 교회에서 이야기한다면 상처치유건 무엇이건 그건 잘못된 가
르침 일 것이다. 세상이 복잡해 질 수록 순수한 복음이 정답이 되었던 우리 교회의 역사에서 우리
는 분명 이것을 다시 배워야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처녀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황당
무게한 가르침을 이야기한다는 손가락 질을 받더라도 우리가 아는 복음을 정확히말하여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그 주님이 오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삶에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
해야 한다..
2) 너희가 사람을 알아?..
인본주의에 대적하여 살아야 할 우리에게..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주님의 관심은 오직 사람이었
다. 물론, 당연히 사람을 모든 것의 궁극적인 해답으로 바라보는 인본주의와 달리 주님은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말씀하신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람"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작가는 심리학을 과학도 아닌 가치없는 것으로 단정하였지만 내가 심리학에 조금의 의미를 두는
것은 그것이 사람을 알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지식들을 쌓아 왔다는 이유이다.
사람은 참으로 신비하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도 그렇지만 실체 없어 보이는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단지 "뇌"라는 기관(organ)속에서 벌어지는 화학물질의 전달 작용이상의 것들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그런 사람의 마음을 공부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나는 사람의 존재를 신과 같이 경배(?)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본따 지어진 사람 자체의
의미는 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우리는 사람에게 당위만을 강요하며 가르
쳐왔지 교회 내에서 각 개인의 마음을 만져주는 일은 드물었다. 심지어 현대 교회는 교회조직을
하나의 회사집단과 같이 여겨 효율성과 성과를 따지니..
우리는 사람에 대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사람의 죄성을 연구하자는 것이 아니라, 한 명 한 명
을 소중히 여기고 가치를 발견하기 위한 공부말이다.
성경은 사람에 대해 참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저 타락하고 구원되어야 할 객체가 아니라 하
나님의 형상(image)를 본딴 존재로서.
작가가 비판한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것이 교회 내에 이러한 사람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결과 등
장한 기형아가 아닐까?.. 심리, 즉 마음 이상의 영적인 존재로서의 사람에 대한 연구와 정리가 나
온다면 가장 정확한 인간에 대한 보고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곤고해하
는 내 마음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4. 마지막 단상들..
이 책을 읽는동안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같이 보게 되었다. 하나 느낀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은
그 자신의 배경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책의 저자나 무신론자 도킨스나.. 생각해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만 플라톤이 말했던 극장
의 우상처럼.. 우리가 책을 읽을 때 우리는 글자화 된 내용을 맹신하게 되지 않는가? 저자의 글을
발전적으로 비판하며 읽는 능력이 참으로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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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mo*****|2013.11.07|신고/차단
지금 우리나라 교회에 적지않은 영향력과 관심을 받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은 상담일 것이다. 단순히 목회상담이나 상담실만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교회사역에 스며들어 있다. 여러 형태의 성격분석, 심리문제 등을 다루는 기법들이 등장하고 있고 상담과정이라는 이름하에 사설 과정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심지어는 설교에 있어서도 상담적 접근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기본적으로 목회가 사람을 상대한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사람에 대한 이해는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이 상담적 접근엔 기본적으로 심리학적 이해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성격 및 심리분석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반과 모든 기법들이 과연 성경적인가하는 점은 거의 검토되지 않고 있다. 내자신 목회함에 있어 상담의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종종 그 방법론적 측면에서는 의문이 되는 부분들을 보곤 한다. 예컨대 죄라고 인정해야 할 부분에 있어서 그저 성격에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는 식의 해석은 분명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죄를 말함은 종종 율법주의자와 사랑이 없는 편협함이라고 치부되는 경향이 있지만 죄에 대한 지적은 정죄와 처벌이 목적이 아니라 진정한 치유를 위한 인간의 상태에대한 정확한 인식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런 점에서 죄에 대한 일부 상담학의 시선은 문제가 있다. 목회자가 성도의 필요라는 이름하에 무분별하게 상담과 그 근간이 되는 심리학을 수용하는 것은 분명 바른 방법이라고 말할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 자체를 꺼내는 것 자체가 상당한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미 상당한 메인 스트림으로 자리잡은 상황에서 이것이 틀렸고 상당한 문제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않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옥성호씨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속칭 ‘삼부기’시리즈의 첫 번째 저서인 이 책은 심리학의 기반이 비성경적이며 성경과 합일될 수 없다고 말한다. 심리학 자체가 과학이라 말할수 없다고 주장하며 그 중심을 이루는 프로이드나 칼 융의 주관적 논리, 그리고 교계에 강하게 자리한 자존감, 긍정적 사고의 문제와 그 중심을 이루는 인물들의 문제와 뉴에이지 등을 비판한다.
저자가 심리학에 대한 비전공자라는 문제와 심리학에 대한 일부 편협되게 느껴지는 비판은 문제가 있는 듯 하지만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또 대중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수용하는 잘못된 교계의 흐름에 대해 강하게 브레이크를 걸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읽어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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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ji*******|2011.02.19|신고/차단
거짓과 왜곡에서 시작된 책!
이 책은 솔직히 별1개도 주기 힘든 책이다.
솔직히 안 나오는게 더 현명했을 법한 책이다.
옥성호씨가 쓴 이 책은 수필이나 소실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논문에 가까운 딱딱한 내용의 책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각주까지 써가면서
자신이 하고있는 말이 사실임을 증명해 가는 논리적인 글이다.
이런 글의 가장 중요한 점은 사실임을 증명해 가는 것이기에
그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글들을 인용하고
그 글에 대한 각주를 표시한다.
이러한 글은 각주를 표시하기에 절대로 거짓을 표기하면 안된다.
그것은 글쓴이의 76페이지에 있는 31번의 각주는 솔직히 말하면
거짓이다.
게리 콜린스라는 인물을 깎아내리기 위해 억지로 갖다 붙힌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원래 과학적이라는 상담 요법이 무분별하게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는 내용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인다고 밑에 부분을 잘라버린 것이다.
글쓴이의 양심을 속인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것이 일반 심리학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공격하지만,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학문이 완벽하길 바라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그것을 바라는 것은 태어난지 얼마 안된 아기가 발로 걷고, 뛰고 마음대로 먹고
어른과 똑같이 되길 바라는 것이다.
학문이라는 것은 긴 시간 속에서 성숙해가고
다듬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덜 다듬어진 부분이 있기에 많은 학자들이 다듬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있겠는가?
그리고 책의 중요한 것은 글을 쓰는 관점이 일정해야 한다.
즉 한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으면 한 가지 주제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기독교 심리학자나 상담학자도 아닌 로버트 슐러나, 조엘 오스틴을 이 책에 끌어들여와
비판을 하는가?
그 부분은 따로 때야 하는 것 아니지 않는가?
그들은 상담학자도 심리학자도 아니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 책에서 풀면 맞는 주제에 속할 것인가?
그들이 긍정적인 마인드를 심어준다고 그것이 기독교 심리학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인가?
거의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들의 신학 노선이 그런 것이다.
기독교 심리학과는 엄밀히 말하면 별개인 것이다.
암튼 이 책을 읽은 후에 부흥과 개혁사와 옥성호 씨라는 분한테 큰 실망을 했다.
자기의 주장을 주장하기 위해 거짓을 사실인양 쓴 것을 보고
양심적이지 않는 저자라는 것을 알고 앞으로 이 분의 책은 사서 보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왜냐면, 앞으로도 이 분은 자신의 주장을 위해 어떤 자료를 왜곡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 이 책을 사서 볼 사람이라면
차라리 게리 콜린스의 크리스천 심리학이라는 책을 사서보길 바란다
그 책이 훨씬 양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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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ma********|2011.01.01|신고/차단
음..............
충격이담..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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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ha*****|2008.08.15|신고/차단
솔직히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를 모르겠다.
아버지의 후광때문?
내 입맛에 안맞으니 포스트모던이란다. 문제가 있단다.
그러는 저자는 문제가 없는지...
책값이 아깝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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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hu*******|2008.01.15|신고/차단
언젠가 토요일 강남역에서 약속이 있었다. 약속시간 보다 좀 일찍 나가서 교보문고에 들렀다. 서점을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눈에 띄는 책 집어들고선 읽어보는 취미를 오랫만에 즐겨보기 위함이었다.
뜻하지 않게 귀한 책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이 취미의 가장 큰 핵심이다.
그때 그 토요일에도 그러한 즐거움이 있었다.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 옥성호 저
'부족한 기독교'라는 큰 글자에 눈이 먼저 갔다.
차례를 대충 읽고 중간에 아무데나 펴서 읽고 있는데, 대뜸, 이 저자가 내가 예전에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부분을 제대로 비판하고 있었다.
그 외의 책을 몇 권 더 사서 조용한 곳에 가서 만날 사람 기다리면서 이 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또 한번 놀라게 되었다.
"하나님이 나에게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신 것들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 날 셈해야 할 몫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보여주신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나의 책임이자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부담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알릴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것은 글을 쓰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
저자에게 있어서 이 책을 쓰는 것은 그의 소명의 한 부분이었던 셈이다. 소명...
직장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가외의 소명을 붙잡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겠건만, 그는 성실하고
꿋꿋하게 붙잡고 나아간 듯 하다.
저자는 다섯 단계로 자신의 논의를 나누어서 진행한다.
첫 단계에서 그는 심리학이 과연 '과학'인가 하는 점을 조명하면서 심리학이 실험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부분들로 인해 '과학'이라기 보다는 믿음의 체계라는 점을 들면서 '종교'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린다.
물론 일반 자연과학조차 패러다임이라 흔히 불리는 신념의 체계에 지배를 받는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심리학과 같이 '종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저자는 그 점을 드러내고 있다.
두번째 단계에서 저자는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분야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성경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는 점을 나름대로 논증하고 있다.
세번째 단계에서 심리학이 결국 인간이 선하다는 전제로 출발하며, 인간 중심적일 수 밖에 없음을 드러내어, 심리학의 반 기독교적 측면을 드러낸다.
네번째 단계에서 저자는 현대의 대중 심리학이 보이는 세가지 가면을 하나하나 열거한다. 그 첫째는 자기 사랑이고, 둘째는 긍정적 사고방식, 세째는 성공의 법칙이다. 얼핏 보면 성경하고도 잘 맞는 것 같고, 마치 비슷한 성경구절을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이기도 하지만,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너무나 반성경적인 이러한 논리들이 기독교에 침투해 들어와서 수많은 주일 설교 교단에서 울려퍼지고 있는 현실이 새삼 소름끼치기 조차 한다.
다섯번째 단계에서 저자는 성경으로 이미 우리는 충분하다고 강조한다. 반성경적인 세상의 가르침을 굳이 들여오는 것은 성경을 부끄러워 하는 모습에 다름이 아니라고 외친다.
저자는 기독교 문화를 오랫동안 접해왔지만, 진심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지는 아직 1년반 정도 밖에 안된 듯 하다. 그가 기독교의 밖에 있을 때 접하고 익혀왔던 세상적인 지식들의 모습, 그 자기 중심의 논리, 인간 중심의 논리가 기독교 안에 들어왔을 때 교회에서도 똑같은 모습으로 발견되는 모습을 보고서 저자는 충격을 받고, 이러한 책을 집필하게 되었던 것 같다.
개인적인 느낌에 저자는 글을 많이 써본 경험이 없는 듯 하다. 독서량은 엄청나지만 말이다. 책을 읽다가 보면, 여기저기 논리적 비약이 보이기도 하고, 감정적으로 조금 지나치게 고양되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책을 읽다가 말고 쉽게 던져버릴 수도 있겠다. 이러한 부분 때문에 평점 5는 좀 무리인 듯 하다.
하지만, 그러한 부분들이 책 전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왜곡하거나 잘못 전하게 하지는 않는 듯 하다. 도리어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하고 이렇게 한 권의 책을 써낼 수 있는 뚝심과 그 열정이 도리어 놀라울 뿐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복음의 순수성에 대해서도 철저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바울과도 같이 잘못된 가르침에도 역시 민감해질 수 밖에 없게 되겠지.
이 책의 저자는 나의 안일한 신앙생활에 일침을 가해서 내 맘 깊은 곳의 뭔가를 깨어나게 했다.
이 책의 저자는 이 책의 내용을 통해 내 신앙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준 듯 하다. 정말 순수한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했다.
이 책의 저자는 그래서 내 앞으로의 신앙 생활의 방향까지도 새롭게 생각하게 했다.
이 책은 오늘날의 복음주의 기독교가 처한 가장 큰 위협중의 하나가 무엇인지 또한 깨닫게 한다. 놀랍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것은 바울이 그의 시대에 큰 위협으로 느꼈던 것과 성격상 동일하다.
역사는 반복된다.
***
이 책의 중간에 '긍정의 힘 (Your Best Life Now)'의 저자 조엘 오스틴 목사와 래리 킹의 인터뷰 전문이 한글 번역으로, 책의 뒷편엔 영어 원문으로 올라와 있다. 2005년 여름과 2006년 겨울에 이루어진 두 번의 인터뷰를 읽다보면, 기가 막히다. 말하는 내용이 목사님이 아니라 무슨 초신자 같다
***
개인적으로 스캇 펙의 책을 참 좋아한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란 책의 페이지 페이지마다 넘치는 깊은 통찰에 감탄을 하고, 심리학자이자 정신치료자인 그 분이 결국 기독교인으로서 회심할 수 밖에 없게된 과정을 보는 것 또한 기쁨이다.
심리학이 가지는 한계는 있을지라도, 현대 사회에서 처한 인간의 영적 상황을 통찰하는 귀중한 도구로서의 유용성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도구는 도구일 뿐이다.
***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때 선언한 세가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Sola Fide,Sola Scriptura,Sola Gratia
이 책은 그 중 하나에 관한 책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