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echang Kim
只今(2023.4.6.木曜日、15:
11) 著者のイテゴン先生からご著書《私は親ブック座派です:親BOOK座派イテゴンの世間話し:イテゴン随筆集》(図書出版スピルIN、初版1刷2022年12月12日)郵送されたのが配達され受け取った. 予想外の嬉しいプレゼントである. 多謝感謝.
冒頭の <私の随筆美学> のなかの次の文言に惹かれて即座で一読.
"社会参加としての物書きは、社会に対する新たな解釈でありながら、同時に希望としての未來を夢見る. 私はそのような文章を書きたい. それが私の随筆美学である."( 19頁 )何故か
著者と読者の一人であるわたくし自身との呼吸が合うような気がしながら、終わりの <脱真実の時代> と<幸福なシーシュポス>では共感共鳴の意識融合を実感した.
나는 친북좌파다 - 親BOOK 座派 이태곤의 세상 이야기
이태곤 (지은이)수필in2022-12-12
272쪽
책소개
친북(親BOOK) 좌파(座派) 이태곤의 세상 이야기. 1부 '이건 뭐냐?', 2부 '호랑이가 물러나자 늑대가 나타났다', 3부 '푸코를 꿰매다', 4부 '영등포의 빛과 어둠'으로 구성되었다.
목차
서문-나의 수필 미학 4
1. 이건 뭐냐?
등 따시고 배부른 게 최고야 16
사돈의 농막 21
삶의 태도 26
생활의 현장에서 알아가는 것들 31
생후 50일의 기념사진 36
술 당기는 날 42
아내와 전복요리 47
어머니의 빈자리 52
이건 뭐냐? 56
자연과 함께 하는 힐링의 공간 61
코로나 시대의 막내딸 결혼식 67
팔당대교를 다녀오다! 71
풀뿌리 민주주의 76
2. 호랑이가 물러나자 늑대가 나타났다
30년 된 소파 83
개혁의 어려움 88
공동체 몰락의 징조 93
공장 사람들 98
나는 ‘친북좌파’다 103
눈뜨고 코 베어가는 세상 108
당위가 우리의 덫이다 112
도시 텃밭의 경계 116
돈이 중심인 세상 120
민주화! 아직도 진행 중이다 125
보수의 텃밭에서 130
사공이 많으면 배가 어디로 갈까? 134
학자도 학자 나름인 세상 139
호랑이가 물러나자 늑대가 나타났다 144
3. 푸코를 꿰매다
리좀적 사고 150
동물농장과 푸코 153
민족 통일국가의 꿈 158
비곗덩어리 164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171
에밀 졸라 “나는 고발한다” 177
예술계의 무서운 힘 181
올드 보이는 ‘오이디푸스 누아르’인가? 186
포퓰리즘 세상 191
푸코를 꿰매다 196
4. 영등포의 빛과 어둠
같은 소비, 또 다른 얼굴 202
권력과 성 209
나의 내면에 있는 화성인 216
마음이 아픈 사람들 221
시를 쓰는 여인 226
아내와 엄마 232
영등포의 빛과 어둠 237
인명은 재천인가? 242
자살을 방조하는 사회 250
착각 속에 사는 인생 258
탈 진실의 시대 262
행복한 시시포스 268
접기
책속에서
오늘도 차로 딸과 사위의 출근을 도와주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라디오를 털어놓았는데, “나는 종북좌파다”라고 도발적인 말을 하는 어떤 스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스님의 이야기는 기발했다. 절에는 종과 북이 많고, 자신은 종과 북을 가까이 두고 지내기에 ‘종북’에 가깝다고 한다. 또한 수도승이기에 하루 종일 앉아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았기에 ‘좌파’라는 이야기이다. 그 순간 나도 ‘친북좌파’ 정도는 되겠다고 생각했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엉뚱한 생각들이 나의 머리를 휘젓고 다녔다. 막내딸을 시집보내고 나서 나는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온종일 앉아서 책을 본다. 개인 사무실이 있기는 하지만 귀찮아서 잘 나가지 않는다. 사무실에 있든, 집에 있든 주로 앉아서 생활하니 나도 좌파이다. 나는 종과 북은 가까이하지 않는다. 하지만 절에 있는 북이 아니라 서점에 있는 책은 좋아한다. 책은 Book이다. 책을 좋아한다는 의미에서 나는‘친북’에 가깝다. 그 둘을 합하면 나는 ‘친북좌파’이다. 이런 내 생각을 친구들 카톡방에 올렸다. 경상도가 고향인 60대 중반인 내 친구들에게 “나는 친북좌파다”라는 외침은 미친놈의 헛소리임이 분명했다. 폭탄을 가슴에 안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든 격이었다. 나는 곧이어 여기에서 ‘친북좌파’는 책을 좋아하고 앉아서 생활한다는 의미를 가진 새로운 개념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친구들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긴 거나 진배없었다. 반전의 즐거움이다. 접기
언어의 유희는 다양하다. 어느 작가가 페이스북에 집을 나간 영감님을 기다리는 글을 올렸다. 제목만 읽고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할머니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영감님이 집을 나갔을까?”, “할아버지가 가출하기 전에 좀 잘하지!” 선입견은 사람을 시각장애인으로 만든다. 여기에도 반전이 있었다. 그 글에서의 영감님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inspiration이다. 영감! 발음은 같지만, 의미는 다르다. 뮤즈의 여신을 기다리는 마음을 집 나간 영감님을 기다린다고 표현했다. 플라톤에 의하면 시인은 뮤즈 여신의 영감을 받아서 시를 쓴다. 그 글을 쓴 작가는 뮤즈의 여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상상의 날개는 배를 산으로도 올려놓는다. 나는 집 나간 영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멀뚱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문뜩 거울 앞에서 화장하는 그런 모습이다. 예쁘게 꽃단장하면 집 나간 할아버지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간절함도 함께 그려 보았다. 벌은 향기로운 꽃향기를 찾아 날아온다. 집 나간 영감님도 아내의 향기에 취해 다시 집으로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뮤즈의 여신도 수동적인 기다림은 싫어하고 무언가 미친 듯이 열중하는 사람을 즐겨 찾을지도 모른다. 집 나간 영감님을 찾는 글 속에는 단순한 말장난 이상의 것이 내포되어 있었다. 접기
“노년의 사랑에서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는 낡아빠진 헌신이 아니라 연민의 정을 담은 헌신의 자세이어야 한다.” 이것 역시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언어의 유희이다. 전자의 헌신은 낡은 신발이며, 후자의 헌신은 영어로 devotion이다. 헌신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몸과 마음 바쳐 있는 힘을 다함이다. 어느 심리학자의 이론에 따르면 사랑하는 관계에는 열정, 친밀감, 헌신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사랑은 첫눈에 반해 매일 만나는 열정에서 시작하여 중반기에 접어들면서 서로에 대한 친밀감에서 사랑이 성숙해 간다. 하지만 말년의 사랑은 상호존중과 배려의 의미가 담겨 있는 헌신으로 무르익는다. 열정과 친밀감, 그리고 헌신이 어우러지면서 사랑은 완벽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간혹 주변에 열정이 식어버려 상대방을 헌신 버리듯이 내팽개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낡아서 버려지는 헌신과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의미가 담긴 헌신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크고 깊다. 이와 같은 언어의 유희에서도 또 다른 의미를 담아본다. 노년의 사랑에서는 낡은 신발이라는 사물적인 사고보다는 존중과 배려라는 공감적 사고를 해야 한다.
_‘나는 친북좌파다’ 중에서 접기
추천글
이태곤 선생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텍스트들에서 글감을 건져 올린다. 어떤 것은 쉽게 접근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지만, 다른 것은 오랜 독서와 사색을 요구하는 것들도 있다. 이런 글감들을 요리하는 선생의 글은 맛깔스럽고 재미가 있으며, 비판이 있고, 성찰이 있고, 이론적인 탐구와 사색을 유도한다. 선생의 글을 읽다 보면 그가 지향하는 수필 미학이 결코 낯설거나 오르기 힘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이종철
저자 및 역자소개
이태곤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1958년 7월 마산 소방서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한동안 울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김천 소방서장으로 발령이 나면서 김천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 김천중앙초등학교, 김천중학교, 김천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아버님의 힘으로 한 해 일찍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 1976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집안이 기울었다.
(무일푼 신세로 전락)
• 방황과 함께 삶과 사회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1982년 뒤늦게 충북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학문에 뜻을 가졌으나 삶이 허락하지 않음)
• 1986년 한독약품에 입사하여 병원 영업을 시작하였다.
2008년 퇴사 이후 다양한 사업으로 삶을 꾸려가다가 대학 시절 꾸었던 강단의 꿈을 지금은 친북좌파로 달래고 있다.
• 2017년 [에세이스트]에서 수필가로 등단하였다.
2020년 [더 수필] 올해의 수필가 60 선정되었다.
2021년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수상하였다. 접기
최근작 : <나는 친북좌파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親BOOK 座派,
이태곤의 세상 이야기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정하는 데에 많은 망설임이 있었다. “나는 친북좌파다.” 너무 과격하지 않을까? 지나치게 선동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그 선언의 내용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책의 제목을 그렇게 정하기로 하였다. 나의 선언은 책을 좋아하고(친북親BOOK), 매일 책상 앞에 앉아서(좌파座派) 생활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낯설게 하기이다. 더 나아가서 개념에 불과한 것이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면 국민을 분열시킬 수 있다는 철학도 함께 담고 있다. 나의 글쓰기의 바탕에는 철학과 미학이 깔려있다. 나의 철학과 미학은 다분히 사회적이다. 문학과는 거리가 멀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새로운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시작을 내가 생각하는 수필의 미학으로 시작하려고 한다.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은 해석자가 자신의 견해를 투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100% 객관적인 해석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비어즐리에게는 작품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을 드러내는 작업이고, 마골리스에게는 외적인 내용을 부과하는 작업이다. 나의 생각은 어쩌면 마골리스의 생각과 유사할지도 모른다. 바르트나 데리다에 있어서도 예술작품의 해석은 참이나 거짓, 혹은 타당성과 부당성의 문제가 아니라 불확정적이거나 미결정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들에게 예술작품의 해석은 미결정적인 것을 채워주는 새로운 창조에 가깝다. 바르트는 텍스트의 의미를 부여하는 권한이 저자에게 없다는 의미에서 저자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텍스트의 의미는 끝없이 생산된다고 보았다. 데리다는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자유로운 유희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단어의 의미는 다른 단어들과의 차이에서 생기며, 이 차이는 무한하게 변화한다고 보았다. 예술작품의 해석에 유일한 하나의 해석이 없다고 보는 입장에서 예술작품의 해석에는 참과 거짓이 없고 해석자의 유희만 있을 뿐이라는 입장에 공감한다.
예술작품의 근본적인 가치는
우리의 정신 능력을 확장시키고,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
우리가 예술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작품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작품의 평가에도 하나의 기준이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현대 미학자들은 그러한 견해에 회의적이다. 이들은 예술 전반에 걸쳐 적용될 평가기준은 없으며, 만일 있다고 해도 그 기준은 단지 주관적이거나 사회계급이 주입한 개념의 결과물이라고 본다. 만약 예술작품 속에는 미적 속성이 있으며, 그러한 미적 속성을 밝힘으로 해서 작품이 평가되어야 한다면 이상적인 비평가의 존재도 가능하다. 이상적인 비평가는 예술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편견 없는 자세, 미적 가치를 알아채는 정서적 감수성을 두루 갖춘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셰익스피어의 문학이 진부하다고 했다. 톨스토이는 이상적인 비평가인가? 괴테는 낭만주의 문학을 병든 문학이라고 했다. 괴테는 이상적인 비평가인가? 예술작품의 근본적인 가치는 우리의 정신 능력을 확장시키고,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에 있다고 본다. 그러한 가치 때문에 우리는 작품에 몰입할 수 있다. 우리의 정신을 몰입시킬 수 있는 작품이 훌륭한 예술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몰입도 어쩌면 우리와 취미를 같이 공유하는 사람들끼리의 몰입이기도 하다. 예술작품의 해석을 유희로 보는 태도와 유사하게, 예술작품의 평가 역시 같은 사물에 대한 취미나 감상을 공유함으로써 유대감을 높이려는 사람들끼리의 유희라고 보는 견해에 공감한다.
예술작품에 대한 비평은 해석과 평가를 함께 하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바대로 작품의 해석과 평가가 유희에 불과하다는 입장에서는, 비평가의 비평 역시 하나의 유희일 뿐일 것이다. 멋있는 비평도 있다. 새로운 창작물로서의 비평이다. 그런 비평은 작품에 충분히 몰입하고, 작품을 진정으로 사랑할 경우에 탄생한다. 수전 손택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예술작품의 등급을 매기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내게 감탄을 주지 못하는 예술작품들에 관해 글을 쓰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열렬한 팬이자 지지자로서 글을 쓴다.” 이런 자세가 진정한 비평가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수필 미학을 정립하고자 하는 몸부림
나의 글쓰기에는 수필이 하나의 창작물로서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해석되기 위해서 어떠한 글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깔려있다. 이 글은 나의 수필 미학을 정립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예술적인 글쓰기를 한마디로 정의하기 쉽지 않다. 예술이란 가족 유사성이란 용어로 정의하기도 하고, 또한 미술관에 걸린 그림만 예술작품이라고 정의 내리기도 한다. 예술은 인간이 행하는 의식적 행위이지만, 그 속에 작가의 의도, 수용자의 효과, 사물과의 관계, 가치 등 다양한 관점을 포함한다. 그 모든 것이 예술이다. 타타르키비츠는 예술이 다른 것과 구별되는 특징을 여섯 가지로 설명한다. 간단하게 옮기면 다음과 같다. 미를 산출한다. 실재를 재현한다. 형식의 창조다. 표현이다. 미적 경험을 낳는다. 충격을 낳는다. 이 중 어느 하나만 진정한 예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이런 예술을 추구한다”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예술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그래서 아방가르드,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장르들이 등장한다. 예술적인 글쓰기에 있어서의 새로움이란 무엇일까? 특히 수필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답을 찾기가 쉬운 질문은 아니다.
누군가는 글쓰기가 깃발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신문이 황색 저널리즘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글쓰기도 깃발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칼라스 사건을 재조명한 볼테르의 용기가 깃발일 수는 없다. 뒤레프스 사건에 대해 ‘나는 고발한다’를 외친 에밀 졸라가 무슨 깃발을 흔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식인의 사회참여일 뿐이다. 예술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술로서의 글쓰기도 다양할 수 있다. 그 다양함 속에서 나는 사회참여로서의 글쓰기를 추구한다. 사회참여도 예술이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인간이 만든 예술 작품 역시 우리의 현실을 떠날 수 없다. 타타르키비츠가 이야기하는 충격은 결국 낯설게 하기와 접목된다. 글은 새로운 충격을 안겨줄 수 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은폐되어 있는 그 무엇을 밝히려는 시도로써의 글이 수필의 장점이기도 하다. 권력과 기득권의 횡포를 들추어내고, 전체주의로의 진행을 막고자 하는 것은 깃발이 아니다. 사회참여로서의 글쓰기는 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면서, 동시에 희망으로서의 미래를 꿈꾼다. 나는 그런 글을 쓰고자 한다. 그것이 나의 수필 미학이다.
-저자 이태곤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