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12

페미니즘, 생명·전환 운동의 최전선 – 다른백년

페미니즘, 생명·전환 운동의 최전선 – 다른백년


주요섭의 [다시 생/명]
페미니즘, 생명·전환 운동의 최전선주요섭 2022.01.14 0 COMMENTS


대전환기란 무엇보다 사상적 대전환기이다. 그러나 사상의 전환은 신체의 전환보다 느릴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의 자기생산을 겨우겨우 뒤쫓아가는 신체와 그 신체를 뒤따르지 못하는 정신의 괴리가 치명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포와 불안과 죽음정치로 이어진다. 자각은 고사하고, 가벼운 질문조차 내뱉기 어렵다. 그러나, 몸은 알고 있다. 불편하다. 불쾌하다. 고통스럽다. 그리고, 2022년 1월 대선판에서의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적 공격에서 그것을 절감한다.



오늘날 페미니즘-운동은 이론과 실천의 최전선이다. 이슈, 행동, 활력, 영향력, 대중적 참여 등 모든 면에서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생명-문화적 현상이다. 지난 수년간 목격했던 치열한 전투의 현장들이 떠오른다. 광화문 퀴어페스티벌, SNS에서의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 강남역·대학로 여성 혐오 규탄집회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사실은 가정, 학교, 기업, 골목길 등 모든 삶의 현장이 페미니즘-운동의 전선이다. 오늘날 페미니즘은 대전환시대의 가장 치열한 사상적, 실천적 전위다.



또 다른 생명운동들이 온다

대전환은 무엇보다 신체적이다. 실제적이고 실존적이다. 코로나19의 대전염병과 기후재난은 직접적인 고통의 원인이 된다. 디지털기술과 인공지능은 우리의 신체를 재-지배하고 재-구성한다.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몸은 모바일과 디지털 기기에 길들여진다. 사회적으로도, 예컨대 사랑과 가족과 노동에 대한 기존의 믿음을 뒤흔든다. 적응하기에 바쁘다. 거꾸로 길들어짐에 무감각하다. 사회·경제·문화적 이중화(dualization)는 우리의 실존을 두 개의 차원으로 갈라놓았다. 디스토피아 영화들이 묘사하듯이 혹 천국과 지옥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칼끝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아수라장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세계가 출현할 수도 있다.

이에 대응하는 사회적 움직임도 매우 분주하다. 생명운동들도 여기에 응답하려 한다(생명의 움직임이라는 의미에서 ‘생명-운동’이라는 표현이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생명운동은 항상 생명운동들이었다. 이미 수많은 또 다른 생명운동들이 나름의 몸짓과 감각과 언어로 활동을 전개해왔다. 수많은 실험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구글 검색과 유튜브 검색에서 만날 수 있는 생명운동들은 주로 기독교 생명운동과 가톨릭 생명운동이다. 그리고 가끔 새마을운동중앙회의 생명살림운동이다. 적어도 구글 검색과 유튜브에서는 한살림의 생명운동도 없고, 인드라망생명공동체나 생명평화결사의 생명운동도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생명운동은 낙태반대운동, 동성애반대운동 등 이미 보수 기독교운동에 의해 전유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또 다른 생명운동들이 출현하고 있다. 새로운 생명운동들은 또 다른 삶의 형식을 함께 만들어가는 ‘구성적’ 생명운동이며, 보이지 않는 생명의 흐름을 알아차리는 ‘정동적’ 생명운동이며, 매 순간 자신을 또 다른 차원으로 변신시키는 ‘트랜스’ 생명운동이다. ‘몸-생/명’의 관점으로 말하면, 감응 체험을 바탕으로 또 다른 사회적 경험의 형식을 창조하는 ‘감응’과 ‘우형’의 생명운동들이다. 절망(絶望)과 선망(羨望) 사이, 희망(希望)의 사건을 만들어낸다. 예컨대, 페미니즘-운동이 그것이다.



새로운 지평을 여는 페미니즘–운동

페미니즘-운동은 각비(覺非)의 사유를 실천한다. 치열하게 저항하되, 대안을 특정하지 않는다. 오늘날 페미니즘-운동은 이를테면, 생명의 원초적 저항이다. 매 순간 일상화된 신체적 위협에 대처해야 하고, 구조화된 신체적 위협에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 아울러, 페미니즘 고유의 생명 감각을 ‘생명의 사유’로 발전시키고 사회적 실천을 생산한다. 수천 년 고착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리고 결혼·가족 제도를 균열시키고 있다. 켜켜이 쌓인 고통만큼이나 내공도 단단하다.

페미니즘은 정신의 운동이 아니라, 무엇보다 신체의 운동이다. 몸의 감각을 바탕으로 하는 ‘몸의 운동’이다. 살아있는 몸 안에서 저항의 생명력이 폭발한다. 페미니즘-운동에서 몸은 사유와 실천의 원천이다. 또한 ‘몸-생/명’의 그것처럼, ‘표층의 몸’과 함께 ‘심층의 몸’에 대해서도 탐구하고 체험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진보적 사회운동이 ‘생각의 운동’이거나 ‘재현적 모델의 운동’이라면 페미니즘은 ‘느낌의 운동’, ‘살아있는 삶의 운동’이다. 이념의 운동이 아니라, 경험의 운동이다.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인간을 체험케 하는 운동이다.

또한 진보적 대안운동은 투명하지만, 페미니즘 운동은 불투명하다. 혼란스럽고 분열적이고 우발적으로 경험된다. 또한 페미니즘은 쉽사리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경계를 넘나들고 경계 너머를 상상하고 실험한다. 페미니즘 운동은 ‘대안’을 만드는 운동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지평’을 여는 운동이다. 사상, 이론, 방법, 에너지, 조직 등등 모든 면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다.

페미니즘은 인식론적 장애물을 넘기 위해 몸부림친다. 구성적 사유를 한다. 젠더는 물론이거니와 개념과 제도, 그리고 신체와 자아마저도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또 다른 개념과 제도와 자아를 발명하고 창조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페미니즘은 권력과 정치를 회피하지 않는다. 집단적 결정과 권력의 역동에 영향을 주고받는다. 물론 역동의 근거와 실제는 몸이다. 정동이다. 제도와 법을 바꾸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명절 때마다 집안에서 보이지 않는 변화를 만들어간다. 대화를 나눌 때와 호칭과 대화에서, 결혼을 고민할 때, 매 순간이 정치다.

페미니즘은 생태적이다. 굳이 에코-페미니즘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좋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가 여성에 대한 가부장제적 억압과 계급적 착취와 깊게 관련되었음을 몸으로 알아차린다. 연민의 감각으로 지구-생명공동체를 재창조한다. 나아가 우주-생명공동체를 상상한다.



페미니즘은 ‘다시 개벽’ 운동이다

페미니즘-운동은 페미니즘 운동들이다. 수많은 다양한 페미니즘 운동들이 다양한 사상과 활동으로 기존의 생명운동과 사회운동을 자극한다. 새로운 지평을 열도록 충격한다. 기존의 생명운동은, 이를테면 개체 중심적 생명운동이었다. 생명의 세계관은 관계와 연결을 강조했으나 그것은 개체적, 유기체적 생명 이미지를 바탕에 두고 있었다. 『생명의 그물』이라는 프리초프 카프라의 책 제목이나 ‘인드라망의 그물’ 은유도 개체와 개체의 연결을 중심으로 하는 개체적 생명관을 반영한다. 그런데 페미니즘, 특히 정동이론을 수용하는 페미니즘 운동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젠더’라는 관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 비-유기체적 생명에 대한 사유를 통해 사회/자연의 경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유기체라는 생명형식은 분명 실제적이지만, 동시에 유기체 역시 하나의 구성적 생명형식인 것이다. 페미니즘 운동은 개체적 자아를 전제로 하는 유아론(唯我論)적 감각을 훌쩍 넘어서려 하고 있다. ‘탈아(脫我)’의 체험을 사회화하려 한다. 페미니즘의 생명 이해는 생명의 개체성을 전체로 하는 ‘생명권-재산권’ 개념과 ‘생명의 존엄’이라는 관념을 넘어서 인간과 사회와 생명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개체 중심의 민주주의 담론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트랜스’의 관점으로 인간과 생명을 다시 보도록 자극하고 있다. 영성과 우주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무엇보다 페미니즘은 문명전환운동이다. 150년 전 오만 년 옛 질서를 급진적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동학의 ‘다시 개벽’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지점이 중요하다. 페미니즘-운동으로 인해 ‘문명전환’이라는 거대담론이 고담준론에 머물지 않고 생활 속에서부터 변혁적 힘을 얻게 되었다. 전통적인 남자의 일과 여자의 일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성애적 사랑만을 고집하는 것은 옛 이야기가 되었다. 가족제도도 바뀌고 결혼문화도 변화하고 있다. 부계 가족문화는 더 이상 힘을 쓸 수가 없다. 그리고 공동체의 형식과 돌봄체계가 재구성되고 있다.

그렇다. 문명사적 대전환기, 페미니즘-운동으로부터 배운다. 19세기 중반 동학의 교조 수운 최제우는 ‘다시개벽’이라고 말했고, 그의 후계자 해월 최시형은 ‘후천개벽’이라고 고쳐 말했다. 그리고 20세기 벽두에 또 다른 방식으로 동학의 계승을 자처했던 강증산은 ‘양(陽) 개벽’에 빗대어 ‘음(陰) 개벽’을 주장하며 또 다른 인류사적 서사를 발명했다. 21세기 페미니즘은 기존의 질서에 격렬히 저항하면서도, 동시에 ‘다시 개벽’의 새로운 서사를 만들며 새로운 질서를 추동하고 있다. 팬데믹과 기후재난의 자연-인류사적 대전환기 속 ‘인간 이후’의 지구-우주적 비전으로 나아가고 있다.



자기구원의 사상

그런데, 페미니즘 운동이 정말 놀라운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자기생산’의 역량이다.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자기가 자기를 생산하고 또 재-생산한다. 일상화된 공포와 불안과 불합리에 치열하게 맞서면서, 또한 국가권력과 거대기업 같은 거대 권력에 대해 저항하면서 새로운 감각, 새로운 언어를 생산해낸다. 활동과정에서 수많은 또 다른 삶의 형식들을 발견하고, 발명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스스로를 새로운 생명으로 재-창조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자기해방-자기구원’ 운동이다. 수운 최제우는 깨달음 체험을 한 후, 집에 있던 여종 둘을 해방한다. 한 명은 며느리로 또 한 명은 수양딸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노비들에게 그것은 이를테면, ‘타력 해방’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페미니즘은 ‘자력 해방’이다. 자기가 자기를 해방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다. 페미니즘은 ‘자기구원-의 사상’이다. 그리고 ‘자기구원의 세계들’을 발명하고 있다.
주요섭

주요섭(사발지몽). 생명과 전환을 화두로 오랫동안 정읍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해왔으며, 최근에는 (사)밝은마을_생명사상연구소를 중심으로 감응(感應)과 우형(又形)을 키워드로 하는 ‘또 다른’ 생명사상·생명운동의 태동을 탐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