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7

최현민 연구실 > 그리스도교 연구 1 - 영성생활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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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생활의 함정
2015-06-21
최현민

영성생활은 거창한데 있지 않다. 신학적 철학적으로 아리송한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건 영성생활과는 그리 관계있어 보이지 않는다. 초월이니 내재니 하는 말들은 실제로 영성생활을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의미있게 다가오는가?  현실에 발딛지 않은 말들은 그저 空華 곧 ‘허공의 꽃’일 뿐이다.

  영성생활을 살려는 이들의 일상 속에는 많은 함정들이 숨겨져 있다. 오늘 아침 일이다. 

주방장 수녀님께서는 어머님께서 병환이셔서 토요일 저녁식사 당번을 내게 부탁하셨다. 아니 일요일 식사당번인 내가 하루 댕겨 당번을 하는 것뿐이다. 오늘 큰 문제가 없는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문제는 공교롭게도 오늘 토요일이 내 기도당번날인 것이다. 그래서 깍둑이-기도당번이 없을 때 대신 해주는 역할로 공동체에서 결정된- 수녀님께 기도주도를 부탁 드렸다. 사실 그 수녀님도 병원에서 퇴원한지 얼마 안 되어 기도를 주도하긴 어렵지 않을까 생각은 했다. 짐작대로 수녀님은 어려워 하셨고 그래서 다른 수녀님께 부탁했다. 그러나 그 수녀님도 이유를 잘은 모르지만 아무튼 부탁을 들어주기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얼마 전에 어느 수녀님이 찾아와 속상해 하며 했던 말도 오늘 내가  느낀 것과 유사한 것이었다. 살다보면 예기치 못했던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자기 것만을 챙기려 한다면 같이 사는 게 팍팍해지고 그래서 힘도 빠지게 된다. 일상 안에서 부닥치는 상황들에 우린 늘 자기는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는 이유를 갖고 있다. 사실 우리는 쉽게 자기 합리화를 해가며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러한 자기합리화가 자신의 영성생활을 좀먹고 결국 구멍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일상 안에서 내게 다가오는 작은 도전들 앞에 ‘예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사실 그것은 자기포기없이는 불가능하다. 자기포기는 거창한 데 있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부닥치는 상황들 속에서 우리에게 도전으로 다가온다.

 가면 갈수록 우린 점점 더 시간에 인색해져간다.  그래서 다른 이에게 시간을 내주기가 점점 어려워져간다. 그러나 그러한 인색함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힘 빠지게 만들고 결국 자신의 영성생활에도 구멍을 숭숭 만들고 만다.
토마스 머튼이 말했던가. “우리는 포기하는 것만을 얻는다”고. 이기심은 자신 안에 분열을 가져오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분열을 조장한다. 그 분열은 자기포기를 통한 사랑에 의해서만 다시 봉합가능하다. 

어제 모처럼의 기회가 주어져 대학로 내여페 극장에서 뮤지컬 ‘서울할망 정난주’를 보았다.  평범했던 조선 여인 정난주는 천주쟁이 황사영의 아내라는 이유로 사대부부인에서 노비로 전락해서 5대독자 젖먹이 아들과도 떨어져 제주도에서 참혹한 일생을 살았다. 천주 위해 목숨을 바친 남편, 몰락한 집안, 죄인으로 제주도 땅을 밟은 자신, 어디 사는지 조차 알길 없는아들을 그리워하며 가혹한 현실을 끌어안고 평생을 살아가야만 했던 정난주. 그녀는 결코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운명을 받아 안고 일생을 견디어낸 이 시대의 또 다른 형태의 순교자가 아닐까.

뮤지컬 중 그 여인이 품어내는 깊은 신음소리는 그 공간에 함께 있던 나에게도 그대로 그 절절한 쓰라림이 전해졌다. 제주도 바람만큼이나 모진 시련을 신앙과 인내로 이겨낸, 한 평범한 여인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순교였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순교는 어떤 식으로 다가오나, 신앙 때문에 남편이나 아이를 잃을 위험이 우리에겐 주어지지는 않지만 대신 우리에겐 일상 안에서 자기를 포기해야 할 순간들과 직면하며 살아간다. 오늘 내게 주어진 이 도전 앞에 과감히(?) 자기포기를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린 영성생활 그 언저리에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2015.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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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모상
(본고는 운주사에서 출간된 <불교와 그리스도교, 영성으로 만나다, 최현민 저> 
제5강 ‘하느님의 모상과 불성‘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최  현  민


1) 그리스도교 전통신학에서의 하느님의 모상

대승불교에서는 인간의 본래성인 ‘자성은 청정하다’고 본다는 점에서 절대 긍정적 인간관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전통 그리스도교 교의신학은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이면서 동시에 죄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본래성을 단순히 긍정적인 측면으로만 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이면서 동시에 죄인으로 볼 때, 하느님의 형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그리스도교 신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신학에서는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피조된 존재”로 이해해 왔는데, 이는 P문서에 나오는 창조 기사인 창세기 1장 26-27절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구절에서 두 가지 개념을 도출했습니다. 

하나는 “형상(imago)”이고, 다른 하나는 모양(similitudo)이라는 겁니다.
이 두 개념의 대한 논쟁은 초대교회의 교부 시대부터 있어 왔습니다. 클레멘스Clemens와 오리게네스Origenes는 하느님의 형상이 인간의 영혼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본 반면, 이레네우스Irenaeus와 테르툴리안Tertullian은 하느님의 형상을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와도 결합되어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형상과 모양’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 하느님의 ‘모양’은 상실되었으나 하느님의 ‘형상’은 상실되지 않았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유는 중세 스콜라 신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형상’을 인간이 타락한 후에도 남아 있는 이성, 의지의 자유로 보았고 ‘모양’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잃어버린 ‘본래적인 의’로 해석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후에 에밀 브룬너에게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형식적 하느님의 형상(formale imago Dei)과 실질적 하느님의 형상(materiale image Dei)을 구분했습니다. 형식적 하느님의 형상은 인간의 언어 능력과 책임성, 자유, 양심, 이성으로 남아 있는데 반해, 실질적 하느님의 형상은 죄로 인하여 상실되어 하느님과의 관계를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종교 개혁자들은 하느님의 형상을 첫 인간에게 주어진 ‘본래적인 의’의 근거로 보지 않고 실제적인 하느님과의 관계로 보았습니다. 즉 그들은 하느님의 형상이 현실적인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 사이에서도 하느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에 현저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루터(M. Luther)는 원죄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의 모양뿐 아니라 하느님의 형상까지도 완전히 상실했다고 보았습니다. 즉 인간은 타락함으로써 하느님의 형상과 모양까지 완전히 상실했다는 겁니다. 그는 형상과 모양을 구분할 수 있는 근거는 성서 어디에도 없으며, 인간은 타락한 후에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반해 칼빈(J. Calvin)은 타락한 인간에게도 하느님의 형상의 파편이 남아 있어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구별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칼빈은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한 하느님의 형상과 모양을 구분하는 이론을 수용했던 겁니다.

19세기 변증법적 신학자인 칼 바르트K. Barth는 루터의 전통을 이어받아 하느님의 모상성이 인간의 고유한 성품과 연관이 있다고 보는 모든 견해를 반박했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타락했기에 하느님께서 지으신 하느님의 형상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은 인간 편에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만(sola gratia)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와 같이 바르트는 하느님의 모상성은 인간이 소유했다가 상실할 수 있는 것

이렇게 볼 때 하느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에는 크게 다음과 같은 두 흐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해버렸다고 보는 견해(M. Luther-K. Barth)이고, 
다른 하나는 모양과 형상으로 구분하여 모양은 상실했으나 (완전하지는 않지만) 형상은 남아 있다고 보는 흐름입니다(초대교부, J. Calvin, E. Brunner 등). 

이렇게 하느님의 모상에 대한 이해는 서로 달랐지만, 하느님께서 창조한 최초에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성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뭔가 상실되었다는 건 상실 이전에 있었던 상태를 전제합니다. 다시 말해 죄로 인해 그 상태를 잃어버렸다는 건 그 시초가 완전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의 모상성은 최초에 한 번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원죄로 인한 타락 이전이라고 보는 것이 전통 그리스도교 신학의 관점입니다. 그러나 태초에 완전한 상태가 죄로 인해 상실되었다고 할 때, 구체적으로 잃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교파 간에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간략히 살펴본 교부 시대부터 중세를 거쳐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형상에 대한 견해는 현대신학에 와서 어떻게 자리매김해 왔는지 판넨베르크의 사상을 통해 살펴보기로 합시다.

2) 하느님의 모상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견해

전통신학에서는 신을 전제하여 인간을 이해해 왔기에, 다른 학문(생물학, 사회학 심리학 등)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것과는 차별화되어 왔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이에 문제의식을 느껴 타 학문의 인간 이해를 수용하여 인간을 새롭게 이해하고자 시도했습니다. 현대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려 듦으로써 세계를 넘어선 존재가 되어버렸기에 종래 그리스 철학에서처럼 우주 질서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막스 쉘러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대상세계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벗어나기도 하고 그 세계로부터 자신을 돌본다는 점에서 인간의 특성을 ‘세계 개방성’으로 보았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막스 쉘러의 영향을 받아 ‘신개방성’을 인간의 본성적 특징으로 언급했습니다. 즉 인간은 세계를 향해 자신을 실현코자 하는 세계 개방성을 지녔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신을 향한 개방성으로 나아간다는 겁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판넨베르크에게 신개방성은 ‘하느님의 모상’의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가 하느님의 모상을 신개방성으로 이해하게 된 데에는 쉘러와 함께 헤르더(Johann Gottfried von Herder)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입니다. 헤르더는 전통신학자들이 가르쳐 왔듯이 ‘원래 인간은 완전한 하느님의 형상 속에서 창조되었으나 타락에 의해 완전성을 상실했다’는 주장을 부정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인간은 원래 완전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가는 인간성을 지녔다고 봅니다. 따라서 인간은 점점 하느님을 닮아간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모상’을 인간 실현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판넨베르크는 헤르더의 이러한 주장을 수용함으로써 하느님의 형상을 완성되어 가야 할 삶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와 같이 판넨베르크는 인간의 특성을 쉘러의 ‘세계 개방성’과 헤르더의 하느님의 형상을 향한 목표를 지닌 존재로 본 것입니다.
한편 그는 인간은 신개방성이라는 자기 본성에 모순되게, 자기중심에 갇혀 살아가는 경향을 띤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와 같이 세계와 신을 향해 자기를 폐쇄하는 것을 판넨베르크는 ‘죄’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판넨베르크는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인 신개방성과 함께 자기 폐쇄성을 지닌 존재이며 이러한 양면의 긴장관계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전통 신학적 관점에서 벗어나 쉘러가 말한 세계 개방성과 헤르더의 하느님 형상을 결합시켜 ‘신개방성’으로 하느님의 형상을 해석한 판넨베르크의 관점은 신학적인 인간 이해를 넘어 종교의 보편적 관점에서 인간을 묻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