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15

3] 이달호- 민족자본가 이종만 선생의 대동사상 실천운동

 민족자본가 이종만 선생의 대동사상 실천운동

이달호 소장 수원화성연구소(

Ⅰ 서언

Ⅱ ‘대동(大同)’의 의미와 인간 이종만

1. ‘대동 의’ 의미    2. 인간 이종만 Ⅲ ‘대동공동체’의 창설    1. 대동광업주식회사의 설립

2. 대동광산중앙조합    3. ‘대동공동체’의 해체

Ⅳ 이종만선생의 농촌이상향 건설과 계몽운동

   1. 농촌이상향 건설    2. 민족교육운동과 출판활동

Ⅴ 이종만선생의 교유관계

1. 허헌

2. 이준열

3. 김창준

4. 대동과 함께한 사람들 


Ⅵ 북에서의 활동

1. 조국통일운동

2. 지하자원개발의 선구적 역할 


Ⅶ 결언


===


I. 서 언

남호(南湖) 이종만(李鍾萬,1885.1.14.­1977.1.17, 월성 선생에)) 대한 지칭은 광산왕, 기부왕, 자선사업가 사회활동가 평양, ,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민족자본가 등 실로 다양하다 그를.  단순히 친일파로 규정지을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남쪽에서는 일제 말 기의 ‘친일 행적 이’ 문제되기도 하였다. ) 

 

 한 인물을 평가할 때 그의 생애의 일부분만 떼어내 그 부분만 초점을 맞춰 강조하거 나 미화한다면 이는 매우 일면적이고 편파적 평가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인물에 대 한 평가는 전 생애를 대상으로 해야 하며 특히 인생 말년 삶의 궤적, 즉 관 뚜껑을 덮는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본고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지점은 대동사상과 이를 바탕으로 한 농촌이상향 건설과 민족교육운동 그리고 민족자본가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그가 말년에 선택한 북행과 관련하여 이 행위가 결코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그동안 쌓아왔던 교유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종만선생의 인생을 크게 세시기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태어나 1932年 이전까지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는 시기 즉 28전 29기의 시기, 둘째 영평광산을 매각하면서 1937년 새롭게 대동광업 주 을( ) 설립하고 그가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대동사회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시기 세,  번째는 1945년 이후 활동과 북으로 올라가 새사회 건설과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한 시기이다. 

  

이종만선생의 대동사상에 기반한 자주적 실천 활동에 대한 조명은 방기중교수에 의해 연구된 바 있다. ) 

 

이종만선생의 일제시기의 여러 사업체 대동광업 주( ), 대동광산중앙조합 주식회사대동, 출판사 대동, 농촌사 대동공전,  등을 통칭 ‘대동콘체른’, ‘대동사업체’로 부르고 있으나 본고에서는 ‘대동공동체’라고 칭하겠다. 왜냐하면 위 사업체와 기관 중 이익을 창출하 는 곳은 오직 대동광업 주( )뿐이었다 이종만선생이.  언급한대로 돈을 벌기위해 대동광 업 주 을( ) 창설한 것이 아니라 광업에서의 공동체 건설과 자영광의 창설, 농촌에서의 자작농 실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학교 건립과 출판활동 등이 최종 목적이었기 때 문이다. 

  

그리하여 본고에서는 일제시기 대동광업 주 을( ) 근간으로 벌인 광산조합 설립, 농촌이 상향 건설, 공업과 농업발전을 위한 청년교육운동 공업과,  농업발전을 위한 출판운동 을 벌이다가 북으로 올라가 조국통일운동과 지하자원개발과 채취공업에 초석을 놓은 민족자본가 이종만선생의 일생을 살펴보고자 한다. 

  

주요자료는 일제시기에 신문 전면에 ‘대동공동체’에 대해 기사화한 『매일신보』 1937 년 6월 12일자, 19일자 자료와 1939년도 6월 1일에 발행한 잡지 『삼천리 의』 「이종만 씨 사업관 에서」 그의 사상 사업관 계, , 획 등을 참고하였다 그리고.  ‘대동공동체’의 설 립 과정에 대해서는 전무이사 이준열의 자서전 『송강소사 가』 있고 당시 신문 『동아일 보』 『, 조선일보』 등이 참고가 된다. 

 

북에서의 활동은 이종만선생이 서거한지 7년이 지난 후인 1984년 『로동신문』 전면에 그의 일생이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를 소재로 한 백보흠의 소설「천암산 이」 참고 된다 다만.  90세인 1974년 본인이 쓴 수기는 찾지 못하였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일제 강점기는 물론 해방이후의 활동과 입북 후 조국통일운 동과 자주적 새사회 건설에 이바지한 행적까지 조명해야 인간 이종만선생의 대동사상 과 그의 실천운동에 대한 온전한 연구의 완결성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Ⅱ. ‘대동(大同)’의 의미와 인간 이종만

  

 1. ‘대동 의’ 의미

  

대동(大同)이라는 것은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네 의견을 경사가 따르고 서민이 따르면 이를 대동이라고 하니 자신은 안락해지고 자손은 좋은 일을 만날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禹) 임금이 천하를 아홉 가지 원칙으로 다스린 결과 온 나라가 화합하게 되는 것을 가르킨다.3)

  

공자는 예(禮)를 잘 운용하면 대동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즉, 천하 사람들이 자 기 집안만을 위하므로 각자 자기 친족만을 친하게 대하고, 자기 자식만을 사랑하며, 재화는 자신의 소유로 삼고, 역역(力役)은 남의 힘을 빌리며, 성곽과 해자로 견고하게 지키고 있는 사회보다는 대문을 열고 놓고 닫지 않는 사회를 ‘대동사회 라고’ 한 것이 다. 

 

공자는 주역의 13번째에 ‘천화동인(天火同人)괘를, 14번째에 ‘화천대유(火天大有)’괘를 놓았다. 이는 새로운 역사를 여는 것이 동인(同人)이요, 대유(大有)로서 대동(大同)하 는 것이라고 하였다 대유. , 즉 내 소유가 사회의 소유이며 화합과 평등을 이루는 공 동의 대유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선한.  사람이 모여 안심하고 고루 잘 사는 사회를 대 동사회(大同社會)라고 한 것이다.4) 그리하여 조선시대 ‘대동법’(大同法)도 ‘모두 고르게 하려는 뜻“이라는 의미에서 붙인 

 

3) 『정조실록 정조』 즉위년 5월 24일 ; 24년 1월 1일.

4) 대산 김석진 대산주역강의, 『 』1, 한길사, 1999.

명칭이다. 1,000여 명이 숙청된 1589년 선조( 22) 기축옥사에서 역적으로 죽임을 당한 정여립도 그가 조직한 단체를 ’대동계‘(大同契)라 했는데 따라서 ”대동 이’ 란 의미는 불온한 생각을 가진 불, 온한 단체라는 의미로 전화되었다. 

1945년 8.15 이후에 발표된 것으로 보이는 「대동교학회 취지서 에서」 대동사상의 전 모를 살필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대동주의 표어 

1. ‘나 라고’ 말자 오직 ‘우리 라고’ 하자 1. 일하면서 가르치고 배우면서 일하자. 

1. 사람이 되면서 일을 하고 일을 하면서 사람이 되자,

1. 내가 만든 물건은 동포가 쓸 물건.

1. 살고자 하는 일인가 일하고자. 사는 목숨이지.

대동교학회 세령

1. 원융화합한 인류사회의 건설을 기함.

2. 교육제도 산업제도를 혁신하여 교장 즉 직장, 직장 즉 교장으로 하야  실물교육의 실현.   

3. 종교와 과학을 조화하여 과학으로 하여금 인류의 진보와 원융화합을 해하는 일이 없게 하기. 

4. 인류의 생활을 극치로 향상시켜 평등해지게 하기를 기함.

여기서 주목할 단어들은 1. ‘원융화합한 인류사회의 건설’, 3. ‘종교와 과학을 조화하 여 과학으로 인류의 진보’, 4. ‘인류의 생활을 극치로 향상시켜 평등해지게’ 등이다. 

 

이는 이종만선생이 추구했던 불타의 자비(慈悲), 공자의 인의(仁義), 야소 기( 독교 의) 박애(博愛), 이 셋을 인류평화의 요체로 보고 오직 이 원리의 실천만이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고 본 것이다.       

2. 인간 이종만 

“제 고향은 울산군 대현면 용잠리라는 반농반어의 포구입니다.”

“옛날 병사가 있어 그들의 전횡이란 실로 언어도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그 저 그들은 특수한 소위 양반이라는 초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억울한 삶을 계속하고 있 었습니다.”

“매일같이 무도한 행동과 언사를 보고 들으며 서당에서 공자왈 맹자왈을 찾던 저의 가슴에는 차츰 어떻게 하면 고향 식구들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게 할까 하는 분 노와 이상이 싹트고 용솟음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위에 비극 참극한 농촌생활에서 그 저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철없는 젊은 심장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서울 에 가자 거기에 가면 훌륭한 삶이 될 수 있다는 막연한 동경이 싹트기 시작하여 가산 

일부를 팔아 여비를 겨우 장만 목선을 타고 상경한 것이 스무살 되던 겨울이었습니 다.”5)

 

20세의 나이에 고향 울산을 떠나게 된 계기는 해안지방의 수병사로 추정되는 관리의 가렴주구에 대한 분노로 시작된다 그의.  언급대로 ‘언어도단’의 학정에 분개하고 어떻 게 하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인가가 서울로 오게 된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그는 1912년 일제가 ‘토지조사령’을 공포한 직후에 ‘농림주식회사 라는’ 것을 세웠고 1919년 3.1운동에도 참가하였다. 

 

경남 울산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나 그 후 가세는 영락하여 그가 경험한 직업 은 어업, 농업 무, 역상 학교,  교원 등 “세상 각양(各樣) 직업은 아니한 것이 별로 없 다 고” 회고하고 있다. 즉 7전 8기 또는 28전 29기의 인생 등이 이종만 선생 앞에 붙 는 상징어인 것이다.   

 

1923년에 세운 중등과정 비인가 고학생을 위한 ‘고학당’을 운영할 때 고학생들과 함 께 석탄을 배달하고 석탄 값을 지불치 못하면 부인의 패물을 차압당하는 일이 비일비 재하였는데 부인은 이를 참고 내조하였다는 일화 광부에, 게 임금을 주려고 꾼 돈으로 50원에 팔려가는 15세 소녀를 70원을 주고 구출한 일화 등 몸소 실천하고 불의를 보 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광산을 운영할 때 광부를 만나면 먼저 “안녕하십니까 얼마나 수고하십니까”라고 정중 히 인사하고 항상, “갱도에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까, 갱부 자신에게 어떤 괴로움이나 생기지 아니 하였나”, “종업원 전체의 가정에 무슨 불만 불화나,  있지 아니한가 하는” 것 등에 노심초사하였다.  

  

경성부 누하정 17번지 집은 대광주의 집 같지 않아 두옥문전이고 기차를 탈 때 2등 표를 사주면 부인이나 소아나 노인 또는 병자를 자기 자리에 앉히는 일6) 등 질소검 박한 생활과 약한자를 위한 실천활동이 비일비재하였다. 

 

5) 『동아일보』 1940년 4월 3일.  

6) 『매일신보』 1937년 6월 19일. 

“일하는 사람이 많아야 세상은 발달된다 일하는.  사람에게는 일하는 만큼 보수가 있 어야 한다 그. 래서 각인의 능률을 있는 대로 발휘하여야 한다 는.” 신념을 갖고 있었

다. 당시 신문에 기사화된 이종만선생의 성격은 중후인자(重厚仁慈)로 표현되고 있다. ‘중 은’ 담력과 신념을 말하고, ‘후’란 인고포용의 덕을 지닌 인자한 성격이라는 것이 다.7)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불경과 성경을 탐독하여 감화 받았다고 하며 “농촌의 무지와 

빈곤”을 타파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기로 하였다고 한다.8)   

 

다음은 대동광업 주( ), 대동농촌사장, 대동공전교주인 이종만의 사업관과 인생철학에 대해 『삼천리 에서』 인터뷰한 1939년 장문의 자료기사이다.

 

“남들은 李鍾萬씨를 마치 朝鮮의 로스차일드요, 카-네기라고 부르며 엇든 이는 천만 장자의 몸이면서 다 찌저진 양복에 각반을 치고 손소 굴속에 드러가 坑夫들과 괭이 잡고 일도 하며 어떤 때는 5전 짜리 전차를 타고 동대문 밧 貧民窟에 나타나 100원 도 주고 1,000원도 주고 도라온다 하여 「海王星」에 나타나는 몬테 크리스트 백작 모 양으로 상상하는 이도 있다.”

백만장자 천만장자인,  그의 소박한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인상은 “관후유복(寬厚裕福)한 장자풍(長者風)의 거인(巨人)”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실제.  체격도 장대하고 생김새도 후덕한 인상이었던 것이다.  기자가 광업을 택한 이유를 묻자 

“지하에 뭇긴 보물을 즉 하느님이 주신 보물을 그렇게 악착한 수단, 말하자면 제도만 잘 꾸민다면 광부를 착취(搾取)하지 않고라도 악을 쓰지 않고라도 파내일 수 있으며 그 파내인 것은 국가 사회에 둘도 없는 보물이 되어 선용(善用)만 한다면 온 인류의 행복에 바칠 수 있는 것이니까 나의 이상과 성격에 가장 마저요.……나는 단언(斷言) 합니다. 돈을 위하여 이 이상 더 추구하지 않겠어요 나의.  염원(念願)은 「로스차일드」 나 카네기 되는 데에 있지 않어요.” 그의 이상은 돈을 위하여 백만장자 되는데 있지 않다고 단언하고 있다.  

기자가 

“장안(長安) 부자 처노코 처첩(妻妾) 거느리지 않은 이 드물고 또 부자 소리 듯는 이 면 의례 阿房宮 같은 호화로운 저택을 짓고 그리고는 美衣美食하는 것이 통례인데 

 

7) 『매일신보』1940년 6월 25일. 

8) 『매일신보』1940년 6월 25일.

선생만은 불과 수천원 되는 조고만한 집에 게시고 寵妾햇단 말 못 들었고 남들처럼 

美酒美衣하시지도 않으니 선생의 인생의 樂은 어데에 있음니까.” 라고 질문하자

 

“나의 樂 道은 를 닥는 데 있소이다 라고.” 답하며 “좋은 經典을 十讀 百讀 하는 사이 에 옛 성현의 교훈이 저절로 알려저요 그분들의.  하신 자최의 萬分一이라도 닥거볼려 고 생각하는 점이외다 나의.  書架에는 經書가 노여있어요 그것은.  녯 성현의 이것을,  기회있는 대로 보면서 吾日三省吾身 하는 부즈런으로 이 세상에 아못조록 도음되는 몸으로서 지내려 생각하여요.……釋迦께서는 환락의 王城과 고귀한 왕자의 지위를 버 리고 人世의 번뇌를 해결코저 중생을 구제하시려 몸소 그 艱難의 修道를 하시지 안 엇슴니까. 저도 이 세상의 슲음과 쓰라림을 다만 조곰이라도 구하는 몸이 되어지이다 하고 염원하는 길에 섯슴니다.……성인은 다 숭배 함니다 기. 독께서는 제 손소 십자가 에 못 박히시면서까지 저의 원수까지 용서하실 것을 말슴하였서요 나도.  내 몸이 낫 즌 것을 常時 생각하여 아모조록 또 어떠한 경우에든지 남을 용서하고 같이 잘 사라 갈 길을 찻는 使徒가 되려해요.……論語도 깊이 읽슴니다. 孔夫子께서 늙으실 때까지 

轍環天下하시며 세상에 道를 펴시기에 애쓰신 그 정신과 노력을 본받으려고 애씀니

다 라.” 며 

 다 같이 잘 살 길을 찾자는 일 이외에는 없다고 마무리 한다. 즉 불교 기, 독교 유교, 등을 모두 아우르는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더나아가 장래 철같은 조직체가 완성되면 “돈 버는 일에서 아주 떠나서 교육사업같은 人世의 英材를 양육하는 일에 일생의 힘을 다 바치려 한다”며 미래의 꿈은 공과대학, 농과대학 광산과대학, 등 종합대학을 설립하겠다는 포부를 말하고 있다. 9)

이종만선생은 1945년 8.15 후에는 조선산업건설협의회 위원장으로 있었으며 『독립신 보 를』 운영하다가 강제 폐간된 후 강원도 일대의 지하자원 개발을 권고하는 이승만의 권고를 거절하였다. 

 

더 나아가 미군이 실시한 ‘적산불하 는’ 산업파괴라며 “독립정부수립이 되지 못하여 산 업보호정책이 확립되지 못한 것이 중대 원인이다 라” 며 8.15 후 직장을 사수하여온 종 업원 근로자 대중의 복리를 위한 시책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며 협동조합 국가를 지향‘10)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9) 『삼천리 제 권』 1 제 호7 「이종만씨 사업관」, 1939년 6월 1일.

10) 『공업신문』 1947년 5월 6일자.

Ⅲ. ‘대동공동체 의’ 창설

 1. 대동광업주식회사의 설립

1934년 영평광산을 본격적으로 개발하면서 1936년에 이르러 상당한 영업이익을 올리 고 그해에 조선 최고의 장진광산 개발권을 확보했다 영평광산에는.  광부가 650명 직, 원은 경성고공 출신 7명을 포함하여 모두 62명이었으며 광구면적은 5백만 평이었다. 이 영평광산을 일본인이 경영하고 있는 동조선광업주식회사에 155만원을 받고 매각했 다.  

 

마침 전무 송강 이준열도 7년의 형기를 마치고 1937년 3월에 만기 출소한 시점이었 다 송강은.  대동광업 주 에( ) 참여하게 된 사연을 그의 자전적 글 『송강소사 에서』 다음 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당시 중외일보 사장이었던 몽양 여운형 선생이 경영난을 겪고 있으니 신문사 이사로 취임해 함께 어려움을 이겨나가자고 하였다. 그렇지만 정중히 거절하였다. ……며칠 

뒤 남호 이종만 선생이 찾아와 영평광산에서 요양할 것을 권하며 함께 일할 것을 제

안하였다.”11)

이종만 자신이 도장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동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대동광업 주 는( ) 1937년 6월 6일 천향원 별장에서 창립총회를 완료하고 장진광산개발 을 주목적으로 기타 일반 광업관계 업무 경영을 목적으로 자본금 300만원으로 창립 되었다.

 

장진광산은 구한국 당시 보성학교 창립자인 이용익 등이 경영하던 국영광산이었는데 등록 출원구는 400여개, 4억여평에 달하였다. 특히 종업원에게도 공로에 의해 주식을 분양할 계획이었다.

 

사장은 이종만 전무,  이준열 상무,  겸 장진사업소장 이영조 상무, 겸 경리과장 정현모, 총무과정 이성환 광무과장,  민정기 상임,  감사역 허헌, 이훈구 등이었다.12)

 

본점 주소는 경성부 견지정 111이고 주식수 60,000, 주주수 114명, 대주주는 이종만

(48,371), 이영조(5,000) 이준열(1,000) 등이었다.13) 

  

 

11) 『송강소사』 59쪽.

12) 『매일신보』1937년 6월 9일.

13)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1939년판 동아경제시보사), .

이후 자료에는 광무과장에 김용암과 검사역에 김진우가 보이는데 김용암은 당시 사회 주의자로 이준열전무의 경성고공 후배였다. 

 

한편 평북 자성군 이평면 장토면 자성면, ,  소재 850,700평에 광업권을 설정하였고 ) 금광은 전 조선에 수십 처에 있었고 철광 매장량 1억만 톤짜리가 평안북도에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년산 1억 원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 

2. 대동광산중앙조합

대동광업 주 가( ) 여타 다른 기업체와는 전혀 다른 점은 광주와 광산노동자가 이익을 공 동으로 분배한다는 목표였다. 또한 일하는 사람에게는 보수를 풍부하게 할 계획이었 다.   

 

이러한 정신에 기초하여 노자협조의 표본이 될 만한 이익공동분배의 기관을 조직하였 으니 이것이 대동광산중앙조합과 그 하부조직인 지방조합이다 지방조합은.  함평조합, 초산조합, 태천조합 등이었고 계획 중인 조합으로는 자성조합 의성조합 동, , 흥조합 등 이었다. 즉 대동광산중앙조합이 그 산하에 각 지방 조합을 나누어 조직한다는 방침이 었다. 이 조합에서 군소광산에 대한 융자를 행하여 이로부터 수입의 일부를 기금에 충당하여 다시 조합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대동광산중앙조합의 이사진은 이사장 이종만 상무이사,  이준열 이성환 이사, ,  정현모, 이영조 민정기 이종찬 상무감사, , ,  허헌, 감사 이훈구 등이었다. 

 

조합원은 광주와 일반종업원, 노동자가 모두 포함된 것이 특징이고 이익분배도 자본 가와 노동자가 고루 한다는 것이 특색이었다 자영광.  창설정신은 노동자 종업원,  자체 가 직접 광산의 경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근본정신은 

1. 인간은 자주적 정신에 의하여 각자가 서로 모범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1. 사업과 일체가 되어 일하면 인간 이상의 최고 능률을 발휘할 수 있다.

1.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자에게는 하늘이 보수를 준 것이니 어떤 개인이 사취할 것 이 아니라……실제에 형성하고 조직하고 실천하는데 있다. 

특히 중요한 점은 1.종업원이 주식을 가질 수 있고 2. 종업원간 이외에는 매매 양도 입질을 못하고 3. 공로 있는 자에게는 퇴직 후에도 주식을 소지할 수 있으며 4. 특별 한 공로 종업원의 상속인이 아니면 상속 증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16) 정리하면 광 주와 광부들이 모두 조합원이 될 수 있다는 획기적 사회주의적 ‘공동체’실험이라고 보 여 지는 것이다.  

 

3. ‘대동공동체 의’ 해체

대동공동체가 해체될 시점의 상황을 보면 조선을,  강점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리나 라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군대, 헌병 경, 찰, 감옥과 같은 폭압기구들을 대대적으로 증 강하여 우리 인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으며 조선을 자기들의 식량과 원료 공급지 로 대, 륙침략을 위한 군사기지로 전변시켰다. 

민족자본가란 외래독점자본과 결탁하지 않고 그와 모순관계에 있으며 자기 경리의 자 유로운 발전을 지향하는 토착자본가 식민지,  및 반식민지 나라들에서 민족자본가들은 자본가의 절대다수를 이룬다. 

 

식민지예속국가들에서 민족 자본가들은 외래제국주의자들의 억제정책이 여러 가지 형 태로 감행되는 조건에서 자기 자본에 기초한 경리의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특성은 그들의 사회경제적 처지와 관련된다. 민족자본가들은 외래독점자본가 들 때문에 우선 경제의 중요부문에 자본을 투자하지 못하며 원료원천과 상품판매시장 을 빼앗긴다 그들은.  예속자본가들과는 달리 식민지통치당국이 강요하는 무거운 세금 부담을 져야 하며 여러 가지 경제적 압력과 통제를 받게 된다 경영. 규모로 보아도 그 절대다수는 중소기업을 대표하며 부차적인 경제분야에서 밖에 활동하지 못하고 언제 나 파산 당할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종만 선생이 본격적으로 기업 활동을 시작한 1930년대 일제침략자들은 1920년대 말~1930년대 초에 이르러 이른바 ‘문화통치 의’ 간판마저 던져버리고 공공연한 파쇼적 폭압을 감행하는 데로 넘어갔다 그것은.  이 시기 일제가 동아시아의 ‘맹주 가’ 되려는 야망 밑에 대륙침략계획을 추진하게 된 것과 직접 관련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가 심각한 경제공황의 늪으로 빠져든 시기였다. 특히 일본군 국주의 세력은 1931년 9월에 무력으로 중국 동북지방을 강점했다 심각한.  농업공황을 동반한 1929~1933년 세계경제공황은 식민지 조선에도 대지주로의 토지집중과 농민 몰락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로부터 1930년대 전반기 조선에서 일제의 군수산업정책은 기본적으로 군수산업의 기초를 닦는 데로 집중되었다 조선에서.  일제의 군수산업정책 실시의 두 번째 단계는 1937년 7월 중일전쟁 도발 후부터 태평양전쟁을 거쳐 1945년 8월 패망까지이다. 일제는 이 시기 조선에서 산업부문을 중요성에 따라 1, 2, 3부류로 나누고 설비와 자 금을 투자하도록 하였다.

 

1940년에 조선에서 새로 설립된 회사의 총수는 253개였는데 그중 조선인회사는 102 개(40.3%), 일본인회사는 125개(49.4%)였다. ‘기업허가령’이 적용된 이후인 1942년에 설립된 회사의 총수는 213개였는데 그중 조선인회사는 75개(35.2%), 일본인회사는 

131개(61.5%)였다. 

 

같은 기간에 새로 설립된 회사들의 자본금 규모를 보면 1940년에 전체 량 3,699만 8,000원 중 조선인회사의 자본금이 566만 1,000원(15.3%), 일본인회사의 자본금이 2,930만 6,000원(79.2%)이었다. 그러나 1942년에 새로 설립된 회사들의 총자본금 8,181만 8,000원 중 조선인회사의 자본금은 606만 7,000원(7.4%), 일본인회사의 자 본금 7,209만원(88.1%)이었다.

  

그러니까 300만원의 자본금으로 설립된 대동광업 주 은( ) 조선인회사와 비교해서는 큰 규모였지만 일본인회사와 비교하면 소규모에 불과하였다.   

 

1939년 말에 겸이포제철소에서 일본인 노동자에게는 하루 2원 13전의 임금을 주었다 면 조선인 노동자에게는 65전을 지불하였다. 이것은 6명의 식구가 좁쌀죽을 먹으며 겨우 목숨을 유지할 정도의 것이었다.

 

더군다나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확대되면서 산금정책이 종언을 고했고 산금정책 폐지는 ‘대동공동체’의 해체로 귀결되었다. 해체 시기는 1942년 9월경으로 추정한

다. ) 따라서 ‘대동공동체’는 식민지상황, 군국주의 일제에 대한 국제정세나 본질에 대한 과학적 분석의 미흡 등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대동공동체’는 자본과 노동자의 노자협조적 관점이 아니라 기업단위의 대동사회를 위 한 협동 공동체 실현을 위한 실험이었으며 북에서의 활동 역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 기 위한 연장선으로 이해해야 하며 특히,  식민지라는 특수성 속에서 애국적 민족자본 가라는 관점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Ⅳ. 이종만선생의 농촌이상향 건설과 계몽운동 1. 농촌이상향 건설 재단법인 대동농촌사의 사업계획 발표식이 1937년 6월 16일 부민관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발표된 계획을 보면 

이종만씨 기부에 의한 50만원으로 재단법인 대동농촌사 설립 남중북서,  각지에 적당 한 장소를 선택하여 집단농지를 구입하여 본 재단의 기본재산을 구성함. 2. 본 재단 법인이 소유하는 집단농지는 그 경작자에게 영구히 경작케 함 

3. 본 재단법인은 경작자로부터 년 수익의 3할에 당하는 대동농촌건설 의무금을 납입 시켜서 순차적으로 집단농지를 구입하고 자급 및 기타 대동농촌건설에 필요한 자금에 충당함. 단 의무금 부담은 30개년 이내로 하고 완전한 자작농이 되게 함과 동시에 본 재단법인의 조직체에 참여케 함 그리하여. 경직지의 소유 명의는 영구히 본 재단법인 이 보유하여 매매 저당 등에 인한 토지겸병의 폐해를 방지하여 자작농의 생활 안정을 영구히 보장함.

당시 임원은 이사장 이종만 전무이사,  이훈구 상무이사,  정현모 이사,  이성환 이영조, , 감사 허헌, 김창준, 김여식 등이었다. 또한 산하 농촌으로 대동울산농촌, 대동문산농

촌, 대동평원농촌, 대동영흥농촌, 대동농사원 등을 계획하고 있었다. (매일신보 

37.06.19) 

 

집단농장 내에는 자치적 조직을 통하여 식량의 충실 부, 채의 정리 가계의,  합리화 자, 작자급, 협동공조 문화진, 흥, 위생교통의 시설 조성정비 등으로 모범농촌의 구체적 현 실화를 기하고자 하였다.18)

 

또한 이종만 개인 소유 토지 157만평에 대해서도 당년부터 단연 소작료를 3할씩만 증수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  자세한 내용은 연천에 25만평으로 53호 평남,  평원군에 

24만평 소작인수 41호 함남,   영흥군에 108만평, 153호 합계 157만평에 254인 이었

다. 매명(賣名)적 동기가 아니라 이론적 근거는 “최근 조선농촌의 우울상은  소작료의 과중한 부담에 있다. 따라서 소작인들은 자기의 경작지에 애착을 갖지 못하고 생산활 동을 저하시켜 토지가 피폐해 진 것 다는” 것이다.  

토지의 피폐는 소작인의 피폐로 될 뿐만 아니라 지주의 손실로 더 나아가 사회의 중 대손실로 보아야 한다 토. 질을 향상하는 의미에서도 소작료를 내릴 필요가 있다 소. 작 료를 3할 받는 것은 수지상으로 보아서도 지주에게 손실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대부분은 5할이 기준이다. 조선인끼리 서로 돕고 살아가지 못할 것이 있는가. 나는 30년 동안 3할 씩 소작료를 징수하다가 30년 후에는 토지를 소작인에게 전부 돌려주

기로 결심하였다 소유. 권도 양여할 예정이다.”19)

 

그는 3 7․ 제 실행 후 30년 후 무상분배를 확언하고 있다.    

 

18) 『매일신보』 1937년 6월 12일.

19) 『동아일보』 1937년 8월 16일.

일제강점기에서도 농민들은 봉건적 착취구조에 얽매어 있었다. 이 ‘병작반수 제도의’ 타파는 지식인나 일반 농민들이 엄두도 내지 못할 ‘불문율’이었다. 

지주와 소작농간의 생산량 분배방식 봉건조선에서도 병작반수 제도가 일반적이었고 세금문제까지 논구해 보면 6:4까지 올라가는 열악한 구조였다 대동. 농촌사의 3 7․ 제의 시행은 해방 후 북에서의 1945년 가을에 전국적으로 벌인 3 7․ 제 투쟁보다 시기적으 로도 앞서고 지주가 앞장섰다는 데서 매우 선진적이고 혁명적 실천이었다는데 그 의 미가 크다 더.  나아가 30년 후 농토를 농민들에게 무상분배 하겠다는 구상은 북에서 

1946년 3월에 이루어진 ‘무상몰수 무상분배’ 토지개혁과 같은 수준의 획기적인 조치 였다.    

   

더 나아가 3할의 소작료로 타 지방의 땅을 매입하여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여 제2, 제 3의 낙원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는 농토의 집단농지화와 30년 후에는 경작자에게 경작권을 부여하려는 이상농촌건설이라는 사회주의적 실험이었다고 보여 진다.   

 

2. 민족교육운동과 출판활동 1) 민족교육운동

이종만선생의 기본 방침은 교육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농촌의 중견청년을 양 성하기 위한 대동농사원의 설립, 광산에는 광부 자제를 위한 교육시설을 세워 ‘직장 

즉 교실 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20) 

 

소작인의 소작료 30%를 기금으로 농장 교장 시험장을 가진 대동농사원을 설립하고 

청년들을 선발하여 농도의 수련과 기술교육을 실시하여 농촌지도자로 양성한다는 것 이다.21)

이종만선생은 고향을 위하여 1만 5천원으로 보통학교설립, 1만원으로 울산갑종농업학

교 설립, 2천원을 대현면에 기부하였다.22)

 

함남 정평군 문산읍 문흥리에 있던 영평금광을 매각한 이후에도 이 지역에 노동야학 교를  설치하고 평강에는 사설학교를 문산면에,  또다시 영평학교를 설치하여 지난 26 일 낙성식을 거행하였는데 동 면민일동의 발기로 이종만선생의 송덕비를 세우고 제막

식에는 1만 명이 참가하였다고 한다.23) 

 

 

20) 『매일신보』1940년 6월 25일.

21) 『조선일보』1937년 6월 17일. 22) 『동아일보』1937년 7월 25일. 23) 『매일신보』1937년 10월 3일.

이러한 미담이 세상에 전해지자 진주의 하영진씨가 20만원의 토지권리증을 갖고 찾아 와 적당한 교육기관을 만들 것을 이종만에게 위촉, ‘남우학원 을’ 설립하고 하영진씨가 의뢰한 소학교 6학년 정도의 2년제 직업학교를 설립해 목공, 이발, 기계 등에 관한 

기술과목과 실습을 위한 수업을 진행하기로 하고 동 학원 전속으로 위생기관을 만들 기도 하였다. ) 

 

이외에도 장진의 삼포(三浦)의 인구가 약 5천명인데 아동교육기관이 없어 대지 3,000 여 평과 현금 1만원으로 소학교를 설립하였으며   ) 남우학원 재단 10만원을 경성 광 희문 배화여학교에 기부하였다.26)

 제대로 된 학교 건립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된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인수였다. 

 

평양 숭실학교 인수에 120만원을 출자하여 교명을 대동공업전문학교로 바꾸고 학과, 는 문과와 농과를 폐지하고 광산과와,  기계과 2과를 설치하고, 3년제로 학생을 모집 하여 1938년 4월 1일 각과 40명 합 80명을 모집하여 7월 초에 개교했다.27)

 

평남 성천군 사가면 장림리 이면균씨는 대동공업전문학교를 만든 이종만씨의 여러 가 지 사회사업에 감동되어 그의 소유 금은광 대덕광산 경영을 이종만선생에게 증여하였 다 이종만선생은.  이를 경영해 25만원을 마련, 그 반을 성천중학교기성회에 이면균씨 명의로 기부하였다. ) 2) 출판활동

이종만선생은 대동출판사를 설립하여 월간 『농업조선 과』 『광업조선 의』 2대 잡지를 간 행하였다 광산과.  농촌에 배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여기에는.  이원조 주간과 홍기무 등 유능한 사람들이 모였고 한, 편으로는 인쇄소를 설립하여 각종 인쇄물 신문 서적, ,  등 수 만권을 매입 출판하였다.     

 

대동출판사 주 는( ) 1937년 9월 15일 대표자 이종만으로 도서의 출판 및 판매, 기타 도 서 인쇄에 관련된 모든 사업을 위해 자본금 10만원으로 본점은 경성부 종로 3정목 47-1에서 설립되었다. 

 

중역 이사로는 이성환 이준열 정현모 이관구, , , 감사 임영호 한 장경 등이었다. ) 대 동출판사 1대 사장에는 이종만, 2대에 송강 이준열 감사는, 허헌 등이었다.

 

관련 인물도 시기별로 변화를 보이는데 주식회사 대동출판사의 취체역으로 이관구, 주간대리 이원조, 출판부장 김용규 등이 관여하였으며 이원조(1909-1955) )는 경북 안동 출신으로 이육사의 동생이다. 

 

『농업조선 은』 월간지로 1938년 1월 1일에 창간호를 발간하였으며   ) 주간은 이성환, 편집은 장원준이었으며 1942년 등기에는 이준렬, 정현모 이관구 이성환 김, , , 창하 김, 창준 등이 이사로 관여하였다.32)

Ⅴ. 이종만 선생의 교유관계

  

1. 허헌(1885.7.6-1951.8.17)

허헌선생은 이종만선생과의 교유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종만 선생과 나이도 같을 뿐만 아니라 대동광업주식회사 상근 감사로 대동공공체의 경영을 위해 동고동락한 동지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종만 선생이 일제시기 민족적 양심과 애국 적 지조를 지킨 업적에 대하여 김일성주석에게 소개한 바 있었던 것이다. 

 

이종만선생이 허헌선생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가족과 함께 사글셋방을 전전하던 시기 우연히 허헌 변호사 집 사랑채에 사글세로 들어간 것이다. 당시 허헌선생은 중 견변호사 겸 보성전문학교 교장이었다. 집세가 밀려도 독촉하거나 나가라거나 불쾌한 기색도 않았다고 하며 오히려 이종만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고 한다.33)

허헌선생은 정치활동가, 법률가 교, 육자로서 동경 명치대학에 입학하여 고학으로 변호 사 공부를 마치고 서울에서 보성학교 교원, 변호사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있었다. 

3.1운동 지도자들의 변호사로 나섰으며, 그때부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27년 일 본에 의하여 이른바 ‘제1차 공산당사건’에 기소된 공산당원들을 변호하였으며 이때부 터 그는 조선에서 진보적인 민주주의자로 명망이 높아졌다. 

김책(1903-1951) )을 비롯한 조선의 혁명가들과 애국적 인민들을 자진하여 무료로 변호하면서 일제의 조선강점을 단죄하고 우리 인민의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법정투쟁을 벌렸다.

 

1927년 《신간회》 조직사업에 참가하였으며 그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되어   조선의 혁명가들과 민족주의자들의  통일전선을 이룩하고 반일애국역량을 단합시키기 위해 노 력하였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 주석이 직접 지도한 항일무장투쟁 세력의 보천보전투에서 커 다란 고무를 받고 김일성주석이  조직 영도한 항일무장투쟁 자료들을 수 집하여 인민들 에게 소개 선전하였으며 국내 여러 지역에서 애국적인 지하운동을 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에게 여러 번 체포 투옥되었으며 변호사자격을 박탈당했다. 

 

8.15후 김일성주석의  친서와 접견을 받은 후 남조선신민당,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등의 직책을 지니고 조국통일방 침을 관철하기 위하여 투쟁했다. 

1948년 9월부터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의 장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단 성원의 중임을 맡고 새 조국 건설과 조국의 자주적통일, 민족의 융성번영과 후대교육을 위하여 헌신분투하였다. 1990년 8월 15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으로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묘는 애국렬사릉에 있다.

그의 딸 허정숙(1908.7.16.-1991.6.5.)은 1927년 일본에 유학 후 『동아일보 기자로』 일한 1929년부터 반일지하투쟁에 참가한 후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해방 후 1948년 9월 문화선전상, 1957년 1월 사법상, 1946년 8월부터 당 중앙위원, 1948 년 9월부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1978.8-1991.6)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이종만선생의 북행과 김일성주석과의 만남은 허헌선생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2. 송강 이준열(1896∼1982) 1) 남호 이종만선생과의 인연 

남호 이종만선생과의 인연은 1923년 개교한 고학당(苦學堂) 시절부터 시작된다 고학. 당은 교명에 명시되어 있듯이 고학생들을 위한 배움의 전당이라는 의미에서 지은 명 칭이다. 고학당의 교장은 송강 이준열이었고 이종만선생은 고학당의 후원회 간사로 

 

재을 주도하였고 김일성을 항일 빨치산 지도자로 추대하였다 조선. 인민군의 최고 지휘관의 한사람이 었고 내각 산업상 민족보위성,  부상 외무성,  부상 등을 역임하였다. 혁명열사릉에 묻혀있다.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송강 이준열은 소위 ‘조선공산당 5차사건 당’ 수로 1929년 6월 체포되어 1936 년 12월 출옥했다. 근 7년 6개월의 만기 출옥이었다. 몸은 엉망이 되었고 집에서 쉬 고 있을 때 남호 이종만선생과 고학당 1회 졸업생 이학종(李學鐘)35)이 찾아와 송강에 게 함께 일할 것을 권유하였다.   

“며칠 후 남호선생이 와서 영평행 영평광산 을( ) 또 말하고 양복을 사주며……그분 애정 과 성의에 탄복하여 금산으로 같이 갔다. 금광 구경은 나로서는 처음이었다. 건강이 많이 나아져 오후에 서로 술도 들고 낮에는 산보도 하면서 10일간 있는 동안에 남호 선생과 같이 한방을 쓰면서 지냈다 남호선생은.  진정으로 광산을 팔어 돈이 입수되면 내가 혼자 쓰지 않고 생활비 제하고는 사업기금 전부를 송강선생에게 드릴테니 무슨 사업이든지 생각대로 하자고 아침저녁으로 되풀이 말하였다. 10일 후에 서울 집에 가 서 좀 생각하여 보고 대답하기로 하였다. ……총독부에서 못하는 민족적 사업을 하자 고 남호 선생의 승낙을 얻어 정현모씨와 동반하여 어느 회사 상무와 연락이 되어 일 사분란하게 매도가 완결되었다.”36)

150만원의 매도금액을 종자로 대동광업주식회사 설립이 급속히 추진되면서 남호 이종 만선생과 송강 이준열은 의기투합하여 구상하였던 ‘대동공동체’사업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1937년 5월 12일 경성 남산정 남산동( ) 천진루 여관에서 열린 대동광업 주( ) 창립기자 회견 후 신문에 실린 송강 이준열에 대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전문고문단’ 이준열은 전무요 광산조합의 상무이사이다 사실에.  있어서 모든 계획의 종합정리와 모든 기능의 유도향상을 도모하는 기술적 존재, 각종사업의 이상과 실제 를 잘 조화시키는 지도자이다 경성공업학교에서.  배우고 이종만씨와 함께 경성 동대 문 밖에서 고학생을 위하여 고학당을 경영 중국으로,  도망, 영어의 몸으로 활동 중지. 그가 활동의 무대로 다시 등장.”37)

위 글은 대동광업주식회사가 설립되는 날 『매일신보 에』 난 이준열 전무에 대한 인물 평이다 모. 든 계획의 종합 정리와 구상의 실제 기획자라는 내용이다. 

2) 3 1․ 운동 주도

 

35) 1928년 고학당을 우등으로 졸업 고학당. 학생 정관진 김태, 래 등과 1928년 (조선학생) 혁명당을 조직, 후에 학생전위동맹으로 개칭, 1931년에 징역 4년 언도 동아일보. ( , 1931.5.12.) 36) 『송강소사』 60쪽. 

37) 『매일신보』 1937.06.12.

이준열의 원적은 충남 아산군 탕정면 갈산리 157번지로 서울에서 독립운동 당시 주 소는 경성부 숭인동 176번지였다 마을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온양보통학교를 거쳐 서울로 와 관립 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경성고등보통학교 후에( 경기고 등학교 로) 개명하였는데 1914년 10회로 졸업하였다 그.  후 1916년 경성공업전문학교 (후에 서울공대) 응용화학과에 입학하였다.

  

이준열은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 시 경성공업전문학교 응용화학과 3학년생으 로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준열은.  2월 28일 공업전문학교 실습실에서 경성공업전문학 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전수학교, 보성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 학교 등 6개 학교가 동시에 동맹휴학하기로 하였다는 것과 3 1․ 운동 거사 계획을 후배 들에게 알리고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 1, 2학년 학생들을 비밀리에 조직 동원하였다.

  

이후 이준열은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도피하여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중국에서의.  활동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1921 년 9월 텐진(天津)총영사대리가 외무대신에게 보낸 ‘불령선인의 행동에 관한 건 2’에 의하면 잡지 발간과 독립운동자금 모집 등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3) 5년제 중학교 과정 ‘고학당 설립’ 

고학당은 이준열에 의해서 1923년 5월 1일 설립되어 1931년 7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될 때가지 8년간 존속하였다 교. 명 ‘고학당(苦學堂)’은 고학생을 위한 배움의 전 당이라는 뜻이다 고학. 당은 당시 학비가 없어 진학을 못하는 고학생들을 위한 비인가 5년제 중등학교였다 학비는.  무료였으며 남녀공학제를 실시하고 학생자치체에 의해서 재학생들이 서무 교무 이발소 기, , , 숙사 식, 당, 인쇄소 등 제반 업무를 관장하였다 이. 준열은 교장으로 학교를 총괄하였고 선생으로서 동경유학생과 공전 동창생들이 결합 하였으며 무보수로 봉사하였다. 교과목으로는 우리역사를 가르치고 독립운동의 필요 성을 고취시키는 내용이었다. 파격적인 ‘대안학교 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천도교의 권동진 )선생의 배려로 천도교당 구내에 있는 사무실에서 시작하 였지만 1925년에는 숭인동에 약 300평 규모의 학교부지도 마련하였다 이.  당시 이종 만 선생 김, 창준 목사 등이 함께 난관을 풀어나갔고 이들은 후에 ‘대동공동체’의 구성 으로 함께 일하게 된 것이다. 착공한지 1년 만에 완성된 교사에는 4개의 교실, 3개의 기숙사 이발소 사무실 인, , , 쇄소 취사장,  등이 완비되었으며 약 300명의 학생이 재학 하였다.

 

이 학교 학생들은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 시위가 서울지역으로 확산하는 과정에 서 가교역할을 하였다 고학. 당 내에 결성된 ‘학생전위동맹’ 구성원들이 그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이다.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면서 고학당을 중심으로 한 조선학생전위동맹 의 실체가 폭로되고 고학당의 재학생들이 대거 구속되었다. 이후 고학당을 중심으로 ‘제2차 전위동맹’을 결성하여 일제로부터 해방을 목표로 투쟁하였으나 이들도 1930년 3월에 검거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고학당’은 일제에 의해 1931년 7월 강제 폐쇄 당했다. 

4) 신간회 활동 및  서울파 ‘조선공산당 후계조직’ 사건으로 8년간 투옥  

  

이준열은 1924년 조선노동교육회 집행위원을 역임하였고 조선을 일제로부터 독립시 키고자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27년 우리나라 최초의 좌우합작 단체 인 ‘신간회 경성지회’  활동을 계속하면서 민족해방 투쟁에 헌신하였다. 

 

서울파‘ 조선공산당’후계조직을 1919년 1월 결성하여 책임비서가 되고 1929년 6월 12일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1931년 징역 7년이 확정 판결되어 대전감옥으 로 이송되어 1936년 12월 만기 출소하였다. 

5) 해방 후  활동

이준열은 1936년 대전감옥을 출소하면서 ‘고학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광산업에 종사 하던 이종만선생의 보살핌으로 함경도 영평에서 요양한 후, 이종만선생의 권유로 대 동광업주식회사 전무, 대동출판사 이사 등으로 활약하면서 당시 독립운동과 관련된 인물들에게 자금 제공은 물론 학비 및 생활비 등을 제공하였다. 

  

이후 1945년 8 15․ 해방 후인 8월 25일에는 당시 공업기술 관계 단체를 총망라하여 공업기술연맹 이사장직을 역임하여 해방된 조국의 공업기술 발전에 매진하게 되었다. 계속해서 10월 결성된 조선전재기술자협회의 고문, 10월 5일 결성된 조선광업회 위원 장, 1946년 10월 19일 건국공업박람회 회장, 1947년 3월 15일 조선문화협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새 조국의 공업기술 발전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8.15 후 그가 바라본 국내 정세는 첫 번째 “자주독립국가의 득”에 있다고 보고 급한 것은 “공장 광산,  등 중요한 기관을 자주 경영하는 것” )이었다.  그는 조선공업기술 연맹 이사장으로 공업신문사,  주필은 김용암이었다 모. 두 ‘대동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이준열과 가장 가까운 인물은 이영(1889.4.1.-1960.8.13)으로 서울파의 영수였다 일. 제시기 속칭 서울공산당 사건으로 4년간 투옥 후 1932년 출옥하였다.40) 역시 북으로 올라가 1953년 12월부터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  사업하였으며 1957년 9월부터는 조 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단성원으로 사업하였다. 묘는 애국렬사릉에 있다.

3. 김창준(1890∼1959)

 

‘대동공동체’의 하나인 대동출판사 주 에( ) 이영조 등과 함께 이사로 이름이 올라있다. 대동출판사 주 는( ) 사장이 이종만선생으로 자본금 10만원을 출자하여 출판업을 전문으 로 하는 인쇄업종으로 경성부 서울( ) 견지정(견지동) 111번지에 소재하고 있었다.     

김창준은 평양부 대찰리 106번지가 본적지이고 평양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졸 업하고 중국 상해에 있는 그리스도교 아시아총회의 조선그리스도교감리회 대표 서울,  종로중앙교회 목사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3 1․ 운동 때에는 독립선언서를 발기한 33 인중 한사람으로서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간 감옥 생활을 하였 다. 

1924년 5월 미국 일리노이주 에반스톤가렛트 선교학원에 유학하였다. 

 

8. 15후 서울장안의 종교인들로 국제교화협회를 조직하고 민주세력을 규합하는 운동 에 나섰다. 1947년 2월 그리스도교내 애국적 양심을 가진 600여명의 교인들과 함께 

서울의 천도교당에서 남조선그리스도교민주동맹을 결성하고 그 위원장으로 선출되었 다. 

 

1948년 4월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초청장을 받고 평양에 도착했으 며 김일성위원장과 상봉하였다. 그 후 평안남북도 일대의 그리스도 교인들을 그리스 도교도 연맹에 묶어세우는 사업을 잘하여 그 80%이상의 교인들을 동맹에 망라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49년 2월 내각직속 간부학교를 졸업한 후 남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협의회 부서기장으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초대 서기국장으로 의장으로,  사업하였으며 전쟁시기와 전후시기에는 세계평화대회에 조선대표로 참가하였다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었으며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상임위원회 위원이었다 그는.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위한 사업에 기여한 공로로 조국통일상을 수 여받았다. 묘는 애국열사릉에 있다. 

 

4. 대동과 함께한 사람들

       

대동광업 주 상무 대동( ) , 농촌사 상무이사 대동, 출판사 이사였던 정현모는 경북안동 지 주의 아들로  일찍이 조대 법과에서 배우고, 각종 회사를 조직 운영, 언론기관에도 종사, 신간회안동지회 부회장 )을 역임하였으며 귀공자 타입으로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1948년 10월에 이승만 정권에서 경북도지사에 임명되었 다.42) 

 

이훈구 박사는 동경에서 다년간 농학을 전공 농학사로 아메리카로 건너가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미군정기인 1946년 1월 농무국장에 취임하였다. ) 

이관구(李寬求)는 대동광업 주 감사 대동( ) , 농촌사 전무이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일. 제시기 상공업과 협동조합운동의 저명 인사였다. 그가 강연한 내용들은 “빈농본위의 협동조합운동과 지도자 훈련기관의 설치” ), “신간회의 역사적 사명” ), “조선상공업 의 추세” ), “미곡경제와 농촌경제”  ) 등이었고 해방 후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지냈 다. 

대동광업 주( ) 광무과장이었던 민정기(閔正基)는 공학을 전공하고 총독부에 기사로 다 년간 활약하다가 관계에서 나와 한때 평북 신연금산을 통해 능률을 발휘하여 자영광 산도 경영하였다 그는.  대동광업 주 에서( ) 유일한 기술적 최고 기획가였다.48)

대동광업 주( )  총무과장 주식회사,  대동출판사 이사였던 이성환은 『농업조선 의』 주간 이었다 대동. 농촌사에도 관여했다. 1920년대에는 조선농촌문제의 태두라고 불렸고 전 국을 돌며 순회강연을 했다. ) 이성환은 1930년대 초반에는 조선농민사 중앙이사장으 로 활동하면서 농촌문제의 대가였다. 

 1940년대에 적극적 친일 행위를 벌여 “지원병일색-청년아 분기하라” 등의 글이 있 으며 조선임전보국단에 가입하였다. ) 해방 후 반민특위에 친일파로 체포되었으나 4 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  

Ⅵ. 북에서의 활동52) 1. 조국통일운동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는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건설, 나라의 통일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된 열사들과 당 및 국가 무, 력부문의 일꾼들과 과학 교, 육, 보건, 문 학예술, 출판보도부문 등 여러 부문의 공로 있는 일꾼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애국렬사릉 입구에는 ‘애국렬사릉’이라고 쓴 현판이 있는 대문이 웅장하게 세워져있으 며 대문을 지나서 묘비구역 안에는 추모비가 있다.

추모비에는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건설, 나라의 통일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 생된 애국렬사들의 위훈은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1986년 9월 17일 이라는” 글발이 부각되어 있다.

묘비구역 안에는 애국렬사별로 묘비를 세웠으며 묘비에는 돌사진을 새겨 붙였다.

남쪽 민족문제연구소에서 2000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에 올라있는 이종만(1885∼ 1977) 선생은 1885년생으로 해방 후 1949년 6월에 북으로 올라가 활동하다 지금 현 재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종만 선생의 묘비에 적힌 대로 ‘조국전 선 의장 에’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보여 진다.  

 

북행 후 그의 행적 중 동판에 새겨진 ‘사회주의 건설’과 ‘나라의 통일위업 을’ 위해 투 쟁한 것이 바로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가장 큰 이유인 것이다. 이종만 선생이 북으로 올라간 날짜는 1949년 6월이었다. 64세의 노구의 몸이었다.  

남북조선 71개 정당 사회단체 참석 하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가 1949년 6 월 25일 평양 모란봉극장 회의실에서 개막되었다. 704명이 참석한 대회에서는 정각 오후 3시 시작된 대회는 김일성 김, 두봉, 허헌, 박헌영 김, 책, 홍명희 최용, 건, 김달현 등을 비롯하여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이 입장하였다 다음은.  당시의 일 화이다.

그런데 갑자기 김일성주석은 참가자들을 살피면서 이종만 선생을 주석단으로 올라 올 것을 요청하였다. 누구도 일어서는 사람이 없자 김일성주석은 큰소리로 “남조선에서 들어온 대표들 가운데 이종만 선생이 왔으면 주석단으로 올라오십시오 라고” 말했다. 순간 얼결에 몸을 일으킨 이종만 선생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러다가 옆 사람의 재촉을 받고서야 그는 주석단으로 나오게 되었다. 

김일성주석은 회의참가자들에게 이종만 선생을 소개하고 자신의 곁에 앉도록 배려하 였다. 결성 준비위원장 김두봉의 사회로 주석단으로 41명이 선출되었다. 

그 중에는 남조선노동당을 대표하여 허헌, 조선산업 건설협의회 위원장 이종만 남조, 선기독교도련맹 위원장 김창준도 선출되었는데 이들은 일제시기 대동광업주식회사 시 기의 동료였다.

이종만 선생은 27명의 중앙 상무위원회 위원으로도 선거되었다.54) 뿐만 아니라 김일 성주석은 이종만선생과 특별히 개별 면담을 하고 담화하였다 그.  내용은 살펴보면,

“남조선실업계에서 명망 있는 이종만 선생을 이렇게 만나니 대단히 반갑습니다 연로. 한 몸으로 38선을 넘어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선생이 남조선의 산업 건설협의회 대표로 평양에 와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참가한 데 대하여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선생이.  이번에 ‘미제와 이승만 괴뢰 도당’의 온갖 방해 책동 을 물리치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참가한 것은 훌륭한 애국적 거사입니 다. 

나는 오늘 선생을 처음 만나지만 허헌 선생을 통해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지난. 날 선생은 많은 재산을 가진 기업가였지만 일제와, 담을 쌓고 민족적 양심과 애국적 지조를 지켜왔습니다. 선생은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나라의 지하자원 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거액의 자금을 투자하여 후대 교육사업과 계몽사업에 기 여해왔습니다.

오늘 공화국 북반부에는 수많은 애국적 기업가들이 우리의 건국노선을 적극 받들고 민족 산업의 발전과 나라의 완전 자주독립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 사업에 적극 참여하기 바라며 앞으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서 책임적인 임무를 맡아주었으면 합니다. ……55)

이종만 선생은 통일애국의 기치아래 민족대단결을 실현한 역사적인 민족적 회합이었 던 1948년 4월에 열린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대표자들의 연석회의에 참가하라고 보 낸 초청장을 받고도 평양으로 걸음을 옮기지 못했었다. 4월 남북 연석회의에는 자주 통일을 지향하는 북과 남의 56개 정당, 사회단체(북 15개 남,  40개 해외,  1개) 1,000 여만 명의 성원을 대표하는 695명의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그런데.  이 연석회의에 참 가하였던 김구 선생의 간곡한 권유로 북행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북행뿐만 아니라 북에 그대로 남아 활동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는 북에서 

 

54) 『로동신문』, 1949. 6.29.

55) 1949년 6월 25일 「이종만과 한 담화」 『, 김일성 전집 권』9 .

강조하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라는” 구호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가족들을.  남에 두고 단신으로 북행한 것은 “가족의 행복이나 안위의 소아보다 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라는 대아 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해방 후 북에서는 일부 일꾼들은 해방 전에 공부한 기술자들을 새조국건설에 적극 참 가시킬 대신 유산계급이라느니 일제에, 게 복무하였다느니 하면서 그들을 친일파, 민족 반역자와 같이 취급하였다. 그리고 어떤 지방에서는 국영공장, 기업소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는 기술자들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내보내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이에 대하여 김일성 위원장은 서울에 있던 자연과학부문의 지식인들과 사회과학부문 의 지식인 수십 명에게 위촉장을 보내어 북으로 들어오게 한 바 있었다.

1957년 8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제 기대의원선거가2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최고인민 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때 그는 73살이었다 지난. 날 백만장자이던 남조선 출 신의 민족자본가가 대의원이 된 것은 김일성 주석의 특별한 배려였으며 신임이었다. 그는 90세인 1974 봄에 쓴 「수기 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가슴속에 조선민족의 더운 피가 맥박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민족의 태야이시 며 전설적 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따라야한다 나는.  이 길이야말로 나라의 통일독 립을 위한 길이고 민족의 번영을 위한 길이며 또 이 길에 개인의 행복도 영예도 있다 는 가장 고귀한 진리를 깨달았다 이것이.  나의 어제와 오늘이 그것을 실증해주고 있 다.”56)

그는 조국전선 의장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해방 45돌을 기념하는 1990년에 조국통일 상을 수상하였다. 

2. 지하자원 개발의 선구적 역할

1977년 1월 18일 이종만 선생의 서거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리종만선생은 참 좋은 분이었습니다 그는. 애국적 지조가 매우 높았습니다 해방. 전 리종만선생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큰 기업가였으나 일본놈과는 담을 쌓고 있었 으며 민족과 량심과 지조를 지켜왔습니다 해방. 직후에도 리종만선생은 남조선에서 미 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과 민족분열책동을 반대하는 투쟁에 헌신하였습니다 리종만선. 생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나라의 지하자원개발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라고 평가하고 장례는 사회장으로 정무원에서 맡아하도록 하고 모든 장례비용은 국가비용으로 하였다. 

 

56) 『노동신문 민족대』, 단합의 길에서, 1984. 12.10.      

그는 1949년 6월에 북으로 온 뒤 김일성 위원장과도 만나 지하자원 개발에 대한 간 곡한 기여를 부탁받았다. 

“…… 선생은 민족경제를 부흥 발전시키는 사업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은 우리나라 지하자원에 대한 조예가 깊고 광산을 운영해본 경험도 있는 만큼 우 리나라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은.  새로운 광맥을 찾아 내고 광산들을 개발하는 사업에 힘써주어야 하겠습니다. “57)

그렇지만 1950년 전쟁으로 사업에 매진하지는 못하였다. 3년 전쟁은 1953년 7월 27 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중단됐다 전. 쟁 과정에서 모든 공업시설과 농지가 폐허가 되었다 정전협정.  체결 다음날인 7월 28일 김일성 수상은 라디오 연설에서 “모든 것 을 민주기지 강화를 위한 전후 인민경제 복구 발전에로!”란 구호를 전후복구의 원칙 으로 제시하였다. 

전쟁 시기 김일석 주석의 특별한 배려로 중국 길림성에 피해있던 이종만 선생은 1954년 정초에 평양으로 복귀하였다. 1954년 2월 중순 어느 날 김일성주석은 승용차 를 보내어 그를 초대하였다. 책상위에 지도를 펼쳐놓고 

“전후복구건설과 관련하여 의논할 것이 있어서 오시라고 하였습니다 전후. 복구건설을 하자니 동이 많이 요구됩니다 일본. 놈들이 도망가면서 좀 있던 공장과 광산을 다 마 사버렸습니다 해방.  후 우리 로동계급이 건설해 놓은 것도 미국놈들이 또 마사버렸습 니다 자재와.  원료가 필요합니다 그중에서.  동이 필요합니다.”

이종만 선생은 “장군님 문제없습니다 동도.  많고 금도 많습니다 라고” 답하고 해방 전 대동광업주식회사를 경영할 때 북부일대의 정형과 학성산 일대에 20만 톤의 동광석이 매장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김일성주석은 중공업성 지질탐사관리국의 한 일 군을 불러 오늘부터 리종만선생을 중공업성 고문으로 임명하니 주택과 의복 그리고 보살필 식모, 승용차 등을 잘 준비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4월에 일이 벌어졌다 학성산.  조사결과 거의 가망이 없었다 이종만선생은.  뜻 밖의 결과에 번민하기 시작했다 함께.  갔던 기술자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정부 에서는 나를 과연 어떻게 보겠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4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김일성주석은.  이종만선생과 같이 학성산에 갔다온 지질탐사 관리국의 책임일군으로부터 학성산 조사결과를 받았다. 김일성주석은 방안을 거닐면

 

57) 「이종만과 한 담화」 『, 김일성 전집 권』9 , 1949년 6월 25일.

서 “학성산에 동광석이 20만 톤이 없다. …없단 말이지…”하고 되뇌었다 그리고는.  

“학성산에 동광석이 20만 톤이 없다고 해도 동무들이 리종만 선생에 대하여 절대로 다르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리종만.  선생은 학성산의 20만 톤을 위해서 필요한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리종만 선생을 믿은 것은 학성산의 동광석 때문이 아니라 그 선 생의 애국적인 지조와 민족적인 양심입니다. …그 선생을 적극 도와주어야 하겠습니 다. … 우리나라의 광산과 유용광물의 분포상태를 다 찾아내겠다고 하는데  그 선생 에게 젊은 기술자들을 붙여서 그 사업을 추진시켜야 하겠습니다.”

위와 같은 실화에 바탕하여 북에서는 2009년 ‘김일성동지’탄생 100돌을 기념하는 단 편소설집 『거창한 흐름 을』 발간하였는데 그 중 이종만선생을 실제 소재로 한 단편이 백보흠 )의 「천암산 이다」 . 이종만선생의 오류와 실패,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김 일성 수상의 믿음 김일성수상의,  마음은 이득이 있으면 사람을 써먹고 이득이 없으면 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적 양심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건 손잡고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신념에 바탕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종만 선생이 지목했던 학성산에서는 구리 광맥을 찾지 못하고 우여곡절 끝 에 그 주변 지역에서 결국 구리광맥을 찾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3월 5일 청년광산’ 이다 이곳에서는.  구리, 금뿐만 아니라 스테인리스나 베어링 등 특수강을 만들 때 쓰 이는 몰리브덴도 많이 매장되어 있었다 대부분.  노천광 형태여서 이용가치가 아주 높 았다. 2010년 9월 초 김정일 위원장은 이 광산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여기는 선군시

대에 태어난 인민의 무릉도원이고 공산주의 선경이며 리상촌”이라고 최상의 만족을 

표하였다. )  

이러한 그는 어느 날 내각청사에 찾아가 한 책임일군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품속에 깊이 간수했던 한 장의 문서를 내놓았다 그것은.  그가 지난날에 경영하던 대 동광업주식회사 청사를 공화국정부에 넘겨준다는 ‘양도증서’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이종만 선생은 몸과 마음이 한결 젊어진 듯 열정에 넘쳐 사업 에 더욱 힘썼다 그는.  젊은 기술자들을 이끌고 북방의 추위와 눈길도 헤치고 비바람 과 무더위도 이겨가며 답사의 길을 이어갔다 그리하여.  이종만선생은 해방 전에 탐사 한 흔적을 남겨둔 곳을 죄다 답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 그는 여러 전망성 있는 유 용광물매장지들을 찾아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개발이 되고 채굴이 되는 경우에 투 자를 적게 하고 수송을 헐하게 할 수 있는 조사 자료까지 만들어냈다. 그는 광업성 고문으로 계속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Ⅶ. 결언

1937년에 설립한 대동공동체는 대동광업 주( ), 대동광산조합, 대동농촌사, 대동출판사 (주), 대동공전 등이었다 여기에서.  이익을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기업은 대동광업 주( ) 뿐이었다. 물론 대동광업조합은 지금까지의 자본과 노동이 만난 자본주의적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 즉 조합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역사 이래 식민지 조선에서 처 음으로 실험해 본 방식이었다. 

또한 대동농촌사 역시 유상으로 매입한 농토를 소작인에게 분배하여 3 7․ 제로 소작료 를 받고 30년 후에는 무상 분배계획을 갖고 있었다 물론.  소유는 30년 동안 개인소유 로 돌리지 않고 대동농촌사에 두었다 이러한.  3 7․ 제의 시행은 5천 년 역사에서 처음 시행해 본 실험으로 이 방식이 오히려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고취시켜 생산력을 증대 시킨다는 취지였다. 이러한 실험은 3할의 소작료만으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이종 만선생과 간부들의 새로운 방식의 농촌이상향 건설을 위한 사업이었다.  

조합 내에 조합원들과 자제를 위한 교육시설을 둔 것은 민족교육운동 역시 새로운 인 재를 키우고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배우고 동고동락의 기풍 속에서 기업을 키우겠다 는 ‘대동사상 의’ 발현이었다. 숭실전문을 인수하여 대동공전을 설립한 것 역시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새로운 젊은 인재들을 육성하겠다는 원대한 꿈의 발로였다. 

그렇지만 ‘대동공동체’의 실험은 5-6년에 그쳤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이 차별 하에 있 는 일제의 식민지라는 특수한 조건과 새로운 침략과 전쟁이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산 금정책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특수한 조건이 아니라도 일제는 이러한 이 상적 기업과 농촌이상향 건설을 그대로 수수방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와 같은 활동과 운동이 가능했던 조건은 이종만 선생이 평소 지니고 있던 애국적이 고 민족적 사고에도 기인하고 있지만 함께한 대동사람들에 의한 것이다 이종만.  선생 이 교유한 인물의 주요한 특징은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기, , 독교계 과학기술자, 까지 아우르는 특별한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유교 불교 기, , 독교를 아우르는 이타적 삶을 지향하였다. 

특히 이종만 선생을 비롯해서 허헌, 김창준 등 그와 ‘대동공동체’를 이끌었던 인물들 은 해방 후 북으로 가서 북의 새 사회 건설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당시 남쪽의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우리민족이 살길은 미군정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반민족적 적산불하 등이 아니며 이승만 정권의 ‘단독정 부 수립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토론문>

“민족자본가 이종만 선생의 대동사상 실천운동에” 대한 토론문

신수식 남( 북경협국민운동본부 사무처장) 

안녕하십니까? 남호 이종만 선생 기념사업회 추모포럼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 드리 며 포럼 토론자로 초청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남호(南湖) 이종만(李鍾萬,1885.1.14.­1977.1.17., 월성 선생은)) 발제문에서 기술하고 있듯이 엄혹한 일제 강점기에 광산왕, 기부왕, 자선사업가 사회활동가, , 평양 애국열 사릉에 묻힌 유일한 민족자본가, 친일파 등 보는 관점에 따라 실로 다양하게 평가받 고 있는 인물입니다 물론.  어떤 한 인물을 평가할 때 그의 생애 전부를 대상으로 해 야 하며 어느 특정한 일부분만을 떼어내 그 부분만 초점을 맞춰 강조하거나 미화해서 는 매우 일면적이고 편파적인 평가에 빠져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합니 다. 

본 발제문은 대동사상과 이를 바탕으로 한 농촌이상향 건설, 민족교육운동 그리고,  민 족자본가로서 이종만 선생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는 점은 이종만 선생이 말년에 선택한 월북행위와 이와 관련하여 이 행위가 결코 우연의 결과 가 아니라 그동안 쌓아왔던 교유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종만 선생의 인생을 크게 세시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태어나 1932年 이전까지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는 시기, 즉 28전 29기의 시기, 둘째, 영평광산을 매각하면서 1937년 새롭게 대동광업 주 을( ) 설립하고 그가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대동사회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시기, 셋째, 1945년 이후 활동과 북으 로 올라가 새로운 사회 건설과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한 시기 등입니다. 

본문에서 이종만 선생의 대동사상에 기반한 자주적 실천 활동에 대한 조명은 연세대 학교 방기중 교수의 연구, 즉 1937년 6월 창립되어 1943년경까지 합법적 공간에서 전개된 대동사업체의 경제자립운동과 사상을 검토하면서 이 운동이 1920, 30년대 비타협적 민중적 성향의 사회교육운동이나 농민적 입장의 경제자립운동을 주도한 경험이 있는 진보적 민족주의 자와 일부 사회주의자가 결집하여 전개한 목적의식적 실천 활동이며 또한 해방 후 좌우합작과 통일 민주국가 건설을 지향한 사회민주주의 내지 수정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지향한 중간파 경제사상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종만 선생의 일제강점기 여러 사업체인 대동광업 (주), 대동광산중앙조합, 주식회사 대동출판사, 대동농촌사, 대동공전 등은 ‘대동공동 체’이며 그 이유는 이 사업체와 기관 가운데 이익을 창출하는 곳은 오직 대동광업 주( ) 뿐이었고 이종만 선생이 언급한대로 돈을 벌기위해 대동광업 주 을( ) 창설한 것이 아니 라 광업에서의 공동체 건설과 자영광의 창설, 농촌에서의 자작농 실현 이를,  뒷받침하 기 위한 학교 건립과 출판활동 등이 최종 목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발제자가 강조하고 있는 이종만 선생의 민족자본가로서 가졌던 대동사상과 그 실천을 위한 대동공동체 실현에 대한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본 토 론자는 역사적 사실을 통한 이종만 선생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 대해 일부 동의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자본가 남호 이종만 선생이라는 관점에서 그의 일생을 통한 평가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에 대해 보다 분명한 정의가 필요하 다고 생각됩니다.

첫째, 본 발제문에서 주요 자료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 친일잡지 삼천리 동아일보 조선일보, , 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 토론자는 이러한 자료들이 과연 객관적인 관점에서 민족자본가로서 이종만 선생에 대한 평가로 강조한다고 해서 의혹과 비판적인 관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둘째, 민족자본가로서 평가하는 부분입니다.

민족자본은 민족경제, 즉 민족주의의 기초이자 민족적 생활을 위한 경제적 기초에 자 신의 기반을 갖는 자본이다. 따라서 민족경제를 파괴하려는 제국주의 자본이나 그 대 행자인 매판자본과 이해가 대립되는 자본으로 규정되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 자본의 정치적 자세에 따라 민족자본, 예속자본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제는 당시 일제 강점기에 강력하게 조선의 민족자본 생성 성장을,  방해하고 저지했습니다 조선. 에 민족자본이 진보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려면 독자적인 경제영역(원료조달 제, 품판매, 금융 등 을) 확보하고 경제적 자유를 지향하는 경쟁적 산업자본이어야 하며 소규모 이 하의 자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큰 규모의 대동광업 주 가( ) 과연 일제의 비호 없이 성장할 수 있었으며 민족자본으로서의 이러한 조건에 부합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대동공동체와 내선일체 이종만 선생에 대한 평가는 크게 민족자본가의 긍정적 인 측면과 친일반민족 행위자의 측면으로 나뉩니다 물론.  인간의 세상사에서는 악과 선의 양분으로 분리해서 전적으로 어느 한쪽 편의 평가를 하기는 사실상 어렵다고 할 것입니다. 1930년대 이후 일제 강점기 당시 일제가 조선을 식민통치하기 위해 내놓은 민족말살정책 중 하나이자 일제 강점기의 표어인 내선일체와 연관성입니다. 즉, 이종 만 선생이 일제 강점기 때에 친일행위를 여러 영역에서 했다는 사실에서 그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종만 선생의 친일행위 관련 주요 내용입니다.

1) 친일단체활동에 대한 기록들로 ①1939년 4월 '조선산금협의회 위원이'  된다 조선. 총독부가 전시 총동원 체제를 위해 만든 단체다. ②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으로 임명됐다. 총독부가 친일 유( 림) 인사들을 동원해 만든 단체다. ③1940년에 는 '대화숙야'( 마토주쿠)이라는 친일교화책에 가입했다. 대화숙은 내선일체를 강화하 고 사상과,  사건 관계자를 선도한다는 취지로 운영됐다. ④1941년 9월엔 조선임전보 국단 발기인, 10월에는 이 단체의 이사가 됐다 조선인을.  수탈해 전쟁을 지원하는 데 힘을 보탰다.

2) 친일언론활동에 대한 기록들로 ①1939년 1월 1일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 보 에> '축전첩신년, 기무운장구' 시국 광고에 참여했다. '기무운장구 는' "무운이 오래 되기를 기원한다 는" 의미다 일제의.  승전을 축원하는 것이다. ②1940년 7월에는 잡지 <삼천리 에> 지원병 격려 글 지원병과- 혈한애의 인 을- 기고했다. 조선인들에게 '천황 을 위해 전장으로 나가 싸울 것 을' 독려했다. "지금 대아시아의 신질서건설의 성업에 조선 청소년이 참가하는 것을 참으로 높게 평가한다 이.  거룩한 사업에 우리 조선 청 소년이 진심으로 지원병을 희망하여 몸을 위에 바치는 모양에 감사를 금할 길이 없

다 조선. 청소년 제군은 혈과 한과 애의 인이 되라."  

3)창시개명, 月城鍾萬(츠키시로 쇼마)

4)일본군의 전쟁을 위해 헌금지원 ①1930년대 중반부터 일본군에 위문품 등을 보냈 다. ②1937년 7월 북지 황( 군) 위문품대로 1,000원을 기탁했다. ③1938년 10월 정주경 찰서에 황군위문금 1,000원 기부했다. ④1939년 7월 위문대에 1,000원을 기부했다. 이에 대해 이종만 선생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담보적 개념이며 농업발전을 위한 출 판운동, 청년교육운동 등에 훨씬 더 많은 돈을 지출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본.  토론자 는 자료를 분석하면서 이종만 선생께서 진정으로 대동사상의 대동공동체를 실천해 보 겠다는 것이었는지 그렇지 않은 것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넷째, 북한에서의 활동에 대한 평가의 문제입니다 북한에서.  이종만 선생의 활동에 대 해서도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선생의 주요활동을 조국통일운동, 지하자원개발의 선구적 역할에서 대동사상과 그의 실천운 동에 대한 온전한 연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북한 정권은 항일영웅, 광산 기술자 필요성이 있었고 또 해방 이후 북한의 주요 인물들과 과거 교유관계가 강했다 는 사실에서 북한에서의 입지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발제자의 보는 시각이 북한에서 인정받았기에 우리도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는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모. 든 것이 차별하에 있는 일제의 식민지라는 특수한 조건과 새로 운 침략, 전쟁이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일제의 이상적 기업과 농촌이상향 건설을 방해 하고 저지하는 상황에서 대동사람들과 함께 이종만 선생의 애국적이고 민족적 사고에 기인한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종만.  사상을 유교 기, 독교 불교를,  아우르는 이타 적 삶에서 찾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렇다면 민족주의자로서 북한 사회주의사회 건 설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는 점을 어떻게 평가해야 합니까 특히?  이종만 선생은 1974년 수기에서 북한의 독재자며 신적 존재인 영도자 김일성을 극찬했다는 사실에 서 민족주의자 대동사상 대동공동, , 체 구성 그,  실천자로서 진정한 의미를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토론자는 이종만 선생에 대한 연구는 위에서 제기한 문제들에 대 해 정의될 수 있도록 보다 더 많은 시간과 자료를 바탕으로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 한다. 감사합니다.

<신수식 박사 프로필>

모스크바대학교 정치학 박사 전 경희대학교) 외래교수     전주대학교 객원교수     광주여자대학교 외래교수     KC대학교 외래교수 등 현 남북경협국민운동본부) 사무처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리스트     해외동포언론사협회 사무총장 

<발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