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 - 주자학에서 본 선악의 실체성
| AKS 인문총서 35
김철호 (지은이)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202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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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가치 개념인 선과 악을 주자학의 관점에서 고찰한 책이다. 성리학의 도덕추론과 선악론 연구에 천착해온 저자는 이 책에서 선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본래 선한가, 악은 왜 선보다 강한가, 악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악에도 존재 이유가 있는가와 같은 실존적 질문 뒤에 감춰진 우리 시대의 절망과 탄식을 읽어내고, 오늘날의 선악 문제에 주자학이 제시할 수 있는 해법은 무엇인지, 그 제안은 유효성이 있는지에 대해 논증을 펼친다.
목차
책머리에
서언 선악을 생각하는 이유
1. 오늘날 선악을 생각하는 이유
2. 주희 선악론의 탐구 이유와 가능성
1장 선진유학의 선악 개념
1. 선악 개념의 출현
2. 공자:악은 선하지 않은 것[不善]이다
3. 맹자: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
4. 순자:이기심이 공동선을 만든다
2장 한당유학의 선악 개념
1. 동중서: 선은 아직 완전하지 않은 선[未善]을 완성하는 것이다
2. 양웅: 본성은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다
3. 한유: 선악은 타고난 본성의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4. 이고:악은 본래 있던 것은 아니다[邪本無有]
3장 대립: 선악에 대한 주희의 문제의식
1. 대립의 두 양상: 상관대립과 모순대립
2. 대립의 실태: 악은 선보다 강하다
3. 대립의 해소: 통합적 이론을 향하여
4장 선의 근원: 리
1. 성즉리: 도덕형이상학의 건립
2. 성즉리의 의미
5장 선의 의미와 종류: 주희와 호남학파의 성선 논쟁
1. 논쟁의 배경
2. 호남학에서 ‘성선의 선’과 ‘선악의 선’
3. 주자학에서 ‘성선의 선’과 ‘선악의 선’
4. 주희와 호굉의 성선 해석 비교
6장 악의 근원: 기질
1.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
2. 기질과 근본악
7장 선악 대립의 역설적 통합: 기질지성
1.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대립
2. 역설적 사유에 의한 통합
3. 기질지성의 재해석
8장 악의 위상: 악한 리도 있는가
1. 선악개천리: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
2. 이유선악: 악한 리는 없다
9장 악의 의미와 존재 이유(리)
1. 악의 의미: 악은 선의 결핍이다
2. 악에도 존재 이유(리)가 있는가
10장 통합적 구도
1. 선진유학에서 한당유학에 이르는 선악 개념의 변화 양상
2. 구도의 통합: 이원론적 일원론
11장 아우구스티누스 선악론과의 비교
1. 이원론의 계보: 조로아스터교·마니교·기독교
2.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원론적 일원론
3. 주희와 아우구스티누스의 비교
결언 주희 선악론의 의미
1. 주희 철학의 현대적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2. 문제: 악으로부터 정의되는 현대 사회의 선
3. 노자의 해법: 선악을 잊어버리자
4. 주희의 해법:악은 선으로부터 정의되어야 한다
접기
책속에서
P. 280 융의 경우에는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그런 식으로 비판했다. ˝실제적인 차원에서 보면, 선의 결핍 교리는 도덕적으로 위험하다. 그것은 악을 작아 보이게 하고, 실감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선의 결핍 교리는 선마저 약화시키는데, 이는 그것이 악에게서 그 필연적인 대극을 쫓아버리기 때문이다. 흑이 없으면 백도 없고, 왼쪽이 없으면 오른쪽도 없고, 아래가 없으면 위도 없고, 추위가 없으면 더위도 없고, 어둠이 없으면 빛도 없다. 악이 환상이라면, 필연적으로 선도 환상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나는 선의 결핍 교리가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하고, 난센스라고 생각한다.˝ 이 비판은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주희의 해석에 대한 제자들의 비판을 연상시킨다(주자어류 95:42). 차라리 기질을 악의 근원으로 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제자들의 반문에는 융과 마찬가지로 악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죄 없는 사람들의 고통이 뉴스를 가득 채우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고 신에게 면죄부를 주는데 더 관심이 있었던 기독교인일 뿐이었을까? 세상의 선과 악을 더 정확히 읽었던 것은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와 주희를 비난했던 사람들이었을까?(280쪽) 접기 - 마르셀루
P. 281 그러나 융이 생각한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가 악의 실재성을 무효화하고 악을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인간의 정서에 맞지 않는 것으로 만들려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부정하고자 했던 것은 악의 독립적 실체성(substantiality)이지 악의 실재성(reality)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유념할 필요가 있다. 주희의 불선과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선의 결핍은 악이 비존재 내지는 비실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에 혼란이 없다는 말도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 부정이 아닌 특정하고 상대적인 부족으로서, 있어야할 질서와 가치가 없는 구체적 현상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벽의 구멍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벽이 없는 상태일 뿐이다. 벽을 설계하면서 구멍을 포함시키지는 않는 것처럼, 선의 결핍 또한 선을 설계할 때부터 포함되어 있던 것이 아니다.(281쪽) 접기 - 마르셀루
P. 299 바디우는 오늘날 윤리에서의 판단의 궁극적 원리란, ‘선험적으로 식별 가능한 악에 대항하여 명시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선이라는 원리’라고 규정했다. 같은 책, 21쪽.
‘선험적으로 식별 가능한 악’이란 그 자체로 악한 실체적 악을 가리킨다. 이에 ‘명시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윤리의 원리’라는 것은 악을 제거하기 위해 폭력(악)을 행사하는 것을 윤리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자기기만적 태도를 비판한 표현이다. 그는 이러한 윤리가 표면적으로는 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현실은 그러한 명분과 대조적으로 이기주의의 광란과 해방적 정치의 소멸, 또는 극단적 불안정성, 민족적 폭력의 증가, 그리고 고삐 풀린 경쟁의 보편성이 지배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같은 책, 9-10쪽.
오늘날의 선에 대한 주장들이란 모두 특정 계층의 이익을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바디우는 2015년 발생한 11ㆍ13 파리 테러를 고찰한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2016)에서도 현대인의 악에 관한 의식의 오만함을 비판했다. 민주주의의 기본가치인 관용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그 가치를 신봉하던 선진국 사람들이었다.(299쪽) 접기 - 마르셀루
P. 301 악마화는 비인간화(Dehumanization)의 극단적 표현이고, 비인간화는 혐오의 극단적 형태이다. 직접적으로 악마화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선악의 이분법적 사고, 악의 실체화를 반영하는 표현들까지 포함시킨다면 우리사회에서 악마화의 경향이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을 구체적인 동식물에 비유하는 것은 비인간화의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다. 나치와 일본인들이 제2차 대전 당시 벌인 인종 학살이나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벌어졌던 인종학살에서 단순한 이름붙이기가 대규모 학살의 방아쇠 역할을 하였다. 희생자들은 바퀴벌레나 쥐로 묘사되었으며, 이를 통해 이들은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는 해로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한 개인을 무가치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만드는 이러한 종류의 표현들을 포함시킨다면, 우리사회에서 악마화의 빈도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오늘날 혐오표현이라 불리는 것들 중에도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많다. 우리사회에서 사용되는 대표적인 혐오표현은 OO충이다. 인종학살에서 사용되었던 비인간화의 대표적 표현이 오늘날 다시 부활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은 ‘진지충’이 된다. 성실하게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교수님은 ‘설명충’으로 불린다. 그럼으로써 존재와 행위의 가치가 상실된다. 평생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소명으로 여겨왔던 선생님이 더 이상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아이와 엄마는 다른 아이들의 집단적인 혐오표현에 시달리는 것이 무서워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회 전반으로 이런 현상들이 확산되고 있다. 갈라치기(2022년 829건), 이분법(2022년 614건), 내로남불(5,305건)과 관련된 기사들이 급증한 것도 우리사회에 나타나는 혐오와 비인간화, 악마화의 추이를 보여준다. 선험적으로 악을 담지한 타자, 나와는 본성 자체가 다른 타자가 있다는 생각이 인터넷을 지배하고 있다.(301-302쪽) 접기 - 마르셀루
P. 274 칸트는 인간이 선한 행위의 준칙과 악한 행위의 준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타고 났다고 보았다. 비록 근본악이 그 선택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칠지라도, 선하거나 악한 준칙을 채택하는 자유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다. 자유를 중시하는 칸트의 전기 도덕철학과 후기의 근본악 개념은 모순이 아니다. 칸트가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원죄의 유전을 인정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체의 의사선택의 자유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윤리적 선악 판단이 정당하게 내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는 오히려 외견상 충돌하는 것 같은 근본악과 자유를 통해 인간의 악함을 증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악으로의 자연적 성향은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된 자유, 즉 선택의지의 자유와 하나로 엮어져 있다. 이로부터 근본악이 인간 본성에 자리 잡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게 된다. 도덕법칙보다 자기애를 우선시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선택 능력을 모든 인간이 본성으로 지녔다면, 이것과 하나로 엮여 있는 악으로의 성향 또한 인간의 본성이나 다름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본성에 대한 이런 규정을 근거로 칸트는 모든 인간은 본성에서 악하다고 주장하였다. 근본악은 자유를 제약하기도 하지만 자유 속에서 작동한다. 이 때문에 스스로 죄를 초래한 주체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으며, 근본악의 극복 가능성도 열려있게 된다. 접기 - 제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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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철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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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성리학의 도덕추론과 선악론을 주제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년부터 경인교육대학교에 재직하며 성리학의 경(敬)과 불교의 마음챙김 등 동양윤리 가운데 교육 현장에 직접 적용할 수 있는 분야로 연구를 확대해왔다. ‘철학과 심리학을 통해 보는 우리시대 선과 악’의 문제에 관심이 많아 이를 주제로 한 강좌와 집필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대표 논저는 『도덕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공저), 「악의 리는 없다-정호의 리유선악에 대한 주희의 해석」, 「혐오사회에서 노자철학의 의미」, 「도덕적 명상으로서의 경(敬)」 등이며, 역서로는 『마음챙김명상교육』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2022 개정 교육과정과 초등 도덕과교육>,<도덕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 … 총 8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악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주자학의 오랜 논쟁과 해법
□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는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가치 개념인 선과 악을 주자학의 관점에서 고찰한 신간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 주자학에서 본 선악의 실체성』(김철호 저)을 펴냈다. 경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이자 성리학의 도덕추론과 선악론 연구에 천착해온 저자는 이 책에서 선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본래 선한가, 악은 왜 선보다 강한가, 악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악에도 존재 이유가 있는가와 같은 실존적 질문 뒤에 감춰진 우리 시대의 절망과 탄식을 읽어내고, 오늘날의 선악 문제에 주자학이 제시할 수 있는 해법은 무엇인지, 그 제안은 유효성이 있는지에 대해 논증을 펼친다.
□ 주자학의 모든 개념을 연결하는 구심점은 선과 악이다
유학의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 물으면 대부분 인의예지(仁義禮智)라고 답하지, 선(善)이라고 답하지는 않는다. 기존 연구를 보아도 이기론, 심성론, 수양론을 주제로 삼을 뿐 선악을 별도의 연구 주제로 다룬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저자는 주희(朱熹, 1130~1200)의 저작에 선악에 대한 언설이 상당히 많이 나오고, 그의 글 곳곳에서 선과 악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이기(理氣)·음양·성(性)·태극·인의예지 같은 유학의 핵심 개념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주자학의 중심부에 있는 이기, 심성, 격물(格物), 성의(誠意) 등의 개념은 각기 고유한 의미를 지니지만 선악이 빠지면 구심점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이를테면 리(理)는 절대선을 정립하기 위해 도입되었고, 기(氣)는 뿌리 깊은 악의 원인을 해명하기 위해 동원되었으며, 격물이나 성의는 뿌리 깊은 악을 극복하기 위해 재해석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도·태극·음양 같은 다른 개념들도 마찬가지이며, 주자학의 모든 개념을 연결하는 공통의 문제의식이 있다면 바로 선과 악의 문제라고 말한다.?
□ 현실에서, 악은 늘 선보다 강하다
주희의 스승은 31세의 주희에 대해 “선을 즐거워하고 의로움을 좋아하는 것이 그와 견줄 만한 인물이 드물다”고 평한 바 있다. 주희의 이러한 선에 대한 열망은 어쩌면 악이 넘쳐나는 현실에 대한 반증일 수 있다. 주희가 살았던 12세기 남송은 이전 어느 시기보다 생산력이 증대되어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지만, 권세를 가진 자들의 탐욕과 착취로 인해 백성들이 기본적인 생활조차 영위하기 어려웠던 시대다. 주희가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던, 선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이익에만 몰두하는 당시의 세태는 오늘날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이 세계가 악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탄식은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라는 칸트의 말처럼, 악하기는 쉽지만 선하기는 어려우며, 현실에서 악은 늘 선보다 강하다. 그런데도 주자학은 극구 선이 인간의 본질이고, 악은 선이 아닌 무엇일 뿐 실체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주자학은, 선하면서 악한 인간의 이중성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악을 제거하고 선을 실현할 가능성을 입증해야 한다. 여기에는 형이상학적 타당성과 현실적인 적용 가능성이 모두 요구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저자는 공자로부터 맹자, 순자, 한당유학, 북송유학을 거쳐 주희에 이르는 선악 개념의 변화와 특징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 선으로부터 악을 정의해야 하는 이유
저자는 주희를 중심으로 유학의 선악 개념을 소개하고 아우구스티누스 선악론과의 비교를 통해 그 보편성을 확장한다. 무엇보다도 주자학의 선악 개념을 우리 사회의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는 사유 문법으로 다듬어 제시하고자 시도한다. 그 핵심은 악의 실체를 부정하고 선으로부터 악을 정의하는 방향성에 있다. 오늘날 대중 매체에 넘쳐나는 타자를 악마화하고 그들을 비난함으로써 손쉽게 선한 사람이 되거나, 명시적인 악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자기기만적 태도가 악으로부터 선을 정의하는 역방향성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한다. 주자학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지만 동시에 악을 유발하는 기질을 지녔다고 본다. 따라서 악은 제거하고, 악인은 변화시켜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기원이 분명치 않은 격언은 인류가 오랫동안 악(죄)과 악인(죄인)을 구별해서 다루어왔음을 보여주며, 동서고금의 현인들이 공통적으로 도달한 결론이기도 하다. 이 책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악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악을 알아차리고 선을 깨닫는 과정을 지속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주자어류』에는 주희가 제자에게 ‘물의 비유’가 본성의 선과 악을 설명하는 데 미흡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최선의 비유라고 강조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이 탁해지듯 본성은 악으로 향하기 마련이지만 처음부터 맑지 않았던 것은 아니며, 비록 탁하더라도 맑게 할 수 있는 것은 물과 사람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물의 시작점에 깨끗한 물이 있었듯이 인간의 본성에도 선한 본성만 있다. 그렇기에 선에 무지하거나 악을 행하는 것의 책임을 인간에게 물어야 하고, 지독한 악인에게도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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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으로부터 선을 정의할 것인가, 선으로 부터 악을 정의할 것인가
선과 악을 정의하는 방향에 특히 주목하는 책이다. 인간이 선악의 판단을 내리는 한, 선과 악 중 어느 하나를 먼저 생각하고 이를 기준으로 나머지 항을 정의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제목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주희에게서 발견되는 그러한 정의 방향을 표현한 것이다. 저자는 우리사회에서의 선악의 정의방향은 이와 반대라고 말한다. "우리사회는 어떤가? 한국은 테러가 문제가 되는 사회도 아니고, 인종 문제가 심각한 사회도 아니다. 그렇지만 악마화는 우리사회에서도 점차 기승을 부리고 있다. 타자를 악마화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만들기 위한 혐오 표현이 그것이다. 이를 사회가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기적 현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손을 대기 어려울 정도로 갈등의 골이 깊어만 보인다. 양쪽 진영 모두가 자신은 선이고 상대방은 악이라고 규탄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모두 악으로부터 선을 정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또 한편으로 인터넷 기사의 댓글들에는 선한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공격 대상이 넘치는 인터넷에서 적대화, 악마화를 통해 누구나 손쉽게 선한 사람이 되고 있다. 그러나 누가 선을 알겠는가."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선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누구도 선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로 오늘날의 인터넷 댓글들을 보면 악을 비난하지만 선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겠는가, 내로남불이 유행어가 된 사회는 무엇을 말하는가? 악을 지적하기는 쉽지만, 그것이 사회에 도움이 되겠는가? 저자는 이러한 작업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줄 지언정, 사회를 개선하는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모습을 주희를 통해 돌어봐야 하는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내면을 성창하고, 선이 무엇인지를 고민할 때 이 상황을 조금이나마 개선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칸트는 인간이 선한 행위의 준칙과 악한 행위의 준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타고 났다고 보았다. 비록 근본악이 그 선택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칠지라도, 선하거나 악한 준칙을 채택하는 자유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다. 자유를 중시하는 칸트의 전기 도덕철학과 후기의 근본악 개념은 모순이 아니다. 칸트가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원죄의 유전을 인정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체의 의사선택의 자유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윤리적 선악 판단이 정당하게 내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는 오히려 외견상 충돌하는 것 같은 근본악과 자유를 통해 인간의 악함을 증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악으로의 자연적 성향은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된 자유, 즉 선택의지의 자유와 하나로 엮어져 있다. 이로부터 근본악이 인간 본성에 자리 잡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게 된다. 도덕법칙보다 자기애를 우선시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선택 능력을 모든 인간이 본성으로 지녔다면, 이것과 하나로 엮여 있는 악으로의 성향 또한 인간의 본성이나 다름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본성에 대한 이런 규정을 근거로 칸트는 모든 인간은 본성에서 악하다고 주장하였다. 근본악은 자유를 제약하기도 하지만 자유 속에서 작동한다. 이 때문에 스스로 죄를 초래한 주체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으며, 근본악의 극복 가능성도 열려있게 된다. - P274
이 책은 주희를 중심으로 유학에서의 선악 개념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공자에서부터 맹자, 순자, 한당유학, 북송유학을 거쳐 주희에 이르는 선악 개념의 변화와 특징을 탐구하였다. 이들은 선의 위상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을 지녔던 데 비해 악에 대해서는 거의 동일한 입장을 보였다. 악은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악은 단독으로 정의되지 않고 언제나 선이 아닌 무언가로 정의되었다. 오늘날의 선악 판단이 악으로부터 선을 정립하는 패턴을 지니는데 비해 선으로부터 악을 정의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악은 늘 선으로부터 시작되며, 그렇기에 악은 세상 속에 실재하지만 그 기원을 갖지 못하는 기묘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반대로 악으로부터 선을 정의한다면 악으로 규정된 존재는 제거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된다. 이슬람교도나 히잡을 벗어던진 여인이나 학교폭력을 저지른 중학생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선으로부터 악을 정의한다면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변화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노자에게 선악은 대립적 기호이면서, 의미론적․존재론적 측면에서 새끼줄처럼 꼬여 있다. 선과 악은 서로에 대한 이물질이면서 서로의 분비물이기도 하다. 선이 없이 악이 만들어질 수 없고, 악이 없이는 선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선의 확장은 곧 악의 확장을 초래하며, 악의 제거는 선 자신의 축소를 가져온다. 어떤 파괴 행위도 자신은 온전하게 놓아둔 채 타자만을 파괴할 수는 없다. 노자가 도덕경 2장의 전반부에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가치(미 또는 선)에 쏠리면 오히려 세상은 추하게 될 뿐이라고 말한 것은 이런 맥락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 <3장 대립: 선악에 대한 주희의 문제의식> 중에서 - P96
악은 어떤 표준을 기준으로 지나침, 뒤집어짐, 한쪽으로 치우침, 어긋남, 빼앗김, 멀어짐, 가로막힘이 발생한 상태이다. 표준이 없다면 지나치거나 어긋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표준이 있고 악이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뒤틀림이라면 현실의 악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기질이 매우 근본적이고 은미한 순간부터 우리의 의지를 악으로 향하게 유혹한다 해도[幾有善惡], 악은 ‘실체(substance)’, ‘고유명사’, ‘대상이 지닌 고유한 속성’, ‘이미 존재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악은 악으로부터 정의될 수 없다. 악은 선으로부터 정의될 뿐이다.
- <9장 악의 의미와 존재 이유(리)> 중에서 - P231
p. 314
주희는 어느 제자처럼, 마니교처럼, 부시나 트럼프처럼, 우리사회의 뉴스기사와 댓글들처럼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외적이고 실체적인 악에 대한 투쟁에 있다고 보지 않고, 경(敬)이나 격물(格物)을 통해 우리 내면의 악을 알아차리고 선을 깨닫는 과정을 게을리 하지 않는데 있다고 강조한다. 누구도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려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질의 간섭으로 우리의 마음은 매순간 이기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마치 훈제된 고기에서 냄새를 완전히 빼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한순간 나와 타자의 연결성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현실 속에서 우리의 욕망은 이내 다시 꿈틀댈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이로 인해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악한 사람만이 아니라 선한 사람 또한 예외적이다. 악은 평범하다. 기질지성을 지닌 인간이기에 언제든지 악에 물들 수 있고, 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매번 자신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나가야 한다. 그렇기에 모든 과정 속에서 충실성 또는 계속함(誠)의 윤리가 필요하다.
- <결언 주희 선악론의 의미> 중에서
- P314
- 접기
제스퍼 2023-12-19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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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선의 결핍이다
"21세기 언제부터인가 악마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매악체에 등장하고 있다. 중세 시대의 마녀사냥에서나 나올 법한 단어가 현대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가장 유명한 사례 혹은 시작점은 2002년 부시(George W. Bush)가 특정 국가들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일이었다.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2020년 11월, 대통령 당선 연설에서 바이든은 “미국의 암울한 악마화(demonization)의 시간을 여기에서 끝내자”라고 역설했다." -297쪽-
이 책은 동서고금에 걸쳐 가장 일반적인 가치 개념으로 쓰여 왔던 선과 악을 되돌아보고 있다. 이를 위해 공자부터 맹자, 순자, 한당유학, 북송유학을 거쳐 주희에 이르는 선악 개념의 변화와 특징을 탐구했다. 특히 중국 남송(송나라 후기)의 유학자 주희를 중심으로 유학에서의 선악을 살펴보았다.
나아가 이 책에서 필자는 선과 악의 내용만이 아니라, 선과 악을 정의하는 방향에 특히 주목했으며, 가능한 주희를 현대와 연결 지으면서 오늘날에도 통용될 수 있는 선악에 대한 보편적인 사유 문법을 발굴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책의 제목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주희에서 발견되는 그러한 정의 방향을 표현한 것이다,
저자는 1990년부터 2022년까지 주요 일간지에 보도된 악마화 관련 기사가 총 2,372건에 달하며 매년 증가하고 있다고 전했다(’91년 3건, ’01년 9건, ’11년 25건, ’15년 134건, ’21년 477건, ’22년 514건 / 한국언론진흥재단 빅카인즈 사이트 검색).
또한 갈라치기(’22년 829건), 이분법(’22년 614건), 내로남불(’22년 5,305건)과 관련된 기사들이 급증한 것도 우리 사회의 혐오와 비인간화, 악마화의 추이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저자는 훈제된 고기에서 냄새를 완전히 빼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인간은 언제든지 악에 물들 수 있고 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매번 자신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악의 시선에서 선을 정의하면 악으로 규정된 존재를 제거의 대상으로 여기지만 선의 시선에서 악을 정의하면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변화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고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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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경우에는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그런 식으로 비판했다. "실제적인 차원에서 보면, 선의 결핍 교리는 도덕적으로 위험하다. 그것은 악을 작아 보이게 하고, 실감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선의 결핍 교리는 선마저 약화시키는데, 이는 그것이 악에게서 그 필연적인 대극을 쫓아버리기 때문이다. 흑이 없으면 백도 없고, 왼쪽이 없으면 오른쪽도 없고, 아래가 없으면 위도 없고, 추위가 없으면 더위도 없고, 어둠이 없으면 빛도 없다. 악이 환상이라면, 필연적으로 선도 환상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나는 선의 결핍 교리가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하고, 난센스라고 생각한다." 이 비판은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주희의 해석에 대한 제자들의 비판을 연상시킨다(주자어류 95:42). 차라리 기질을 악의 근원으로 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제자들의 반문에는 융과 마찬가지로 악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죄 없는 사람들의 고통이 뉴스를 가득 채우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고 신에게 면죄부를 주는데 더 관심이 있었던 기독교인일 뿐이었을까? 세상의 선과 악을 더 정확히 읽었던 것은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와 주희를 비난했던 사람들이었을까?(280쪽) - P280
그러나 융이 생각한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가 악의 실재성을 무효화하고 악을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인간의 정서에 맞지 않는 것으로 만들려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부정하고자 했던 것은 악의 독립적 실체성(substantiality)이지 악의 실재성(reality)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유념할 필요가 있다. 주희의 불선과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선의 결핍은 악이 비존재 내지는 비실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에 혼란이 없다는 말도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 부정이 아닌 특정하고 상대적인 부족으로서, 있어야할 질서와 가치가 없는 구체적 현상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벽의 구멍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벽이 없는 상태일 뿐이다. 벽을 설계하면서 구멍을 포함시키지는 않는 것처럼, 선의 결핍 또한 선을 설계할 때부터 포함되어 있던 것이 아니다.(281쪽) - P281
바디우는 오늘날 윤리에서의 판단의 궁극적 원리란, ‘선험적으로 식별 가능한 악에 대항하여 명시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선이라는 원리’라고 규정했다. 같은 책, 21쪽.
‘선험적으로 식별 가능한 악’이란 그 자체로 악한 실체적 악을 가리킨다. 이에 ‘명시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윤리의 원리’라는 것은 악을 제거하기 위해 폭력(악)을 행사하는 것을 윤리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자기기만적 태도를 비판한 표현이다. 그는 이러한 윤리가 표면적으로는 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현실은 그러한 명분과 대조적으로 이기주의의 광란과 해방적 정치의 소멸, 또는 극단적 불안정성, 민족적 폭력의 증가, 그리고 고삐 풀린 경쟁의 보편성이 지배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같은 책, 9-10쪽.
오늘날의 선에 대한 주장들이란 모두 특정 계층의 이익을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바디우는 2015년 발생한 11ㆍ13 파리 테러를 고찰한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2016)에서도 현대인의 악에 관한 의식의 오만함을 비판했다. 민주주의의 기본가치인 관용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그 가치를 신봉하던 선진국 사람들이었다.(299쪽) - P299
악마화는 비인간화(Dehumanization)의 극단적 표현이고, 비인간화는 혐오의 극단적 형태이다. 직접적으로 악마화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선악의 이분법적 사고, 악의 실체화를 반영하는 표현들까지 포함시킨다면 우리사회에서 악마화의 경향이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을 구체적인 동식물에 비유하는 것은 비인간화의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다. 나치와 일본인들이 제2차 대전 당시 벌인 인종 학살이나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벌어졌던 인종학살에서 단순한 이름붙이기가 대규모 학살의 방아쇠 역할을 하였다. 희생자들은 바퀴벌레나 쥐로 묘사되었으며, 이를 통해 이들은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는 해로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한 개인을 무가치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만드는 이러한 종류의 표현들을 포함시킨다면, 우리사회에서 악마화의 빈도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오늘날 혐오표현이라 불리는 것들 중에도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많다. 우리사회에서 사용되는 대표적인 혐오표현은 OO충이다. 인종학살에서 사용되었던 비인간화의 대표적 표현이 오늘날 다시 부활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은 ‘진지충’이 된다. 성실하게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교수님은 ‘설명충’으로 불린다. 그럼으로써 존재와 행위의 가치가 상실된다. 평생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소명으로 여겨왔던 선생님이 더 이상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아이와 엄마는 다른 아이들의 집단적인 혐오표현에 시달리는 것이 무서워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회 전반으로 이런 현상들이 확산되고 있다. 갈라치기(2022년 829건), 이분법(2022년 614건), 내로남불(5,305건)과 관련된 기사들이 급증한 것도 우리사회에 나타나는 혐오와 비인간화, 악마화의 추이를 보여준다. 선험적으로 악을 담지한 타자, 나와는 본성 자체가 다른 타자가 있다는 생각이 인터넷을 지배하고 있다.(301-302쪽)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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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루 2023-12-13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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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호 (지은이)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202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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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가치 개념인 선과 악을 주자학의 관점에서 고찰한 책이다. 성리학의 도덕추론과 선악론 연구에 천착해온 저자는 이 책에서 선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본래 선한가, 악은 왜 선보다 강한가, 악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악에도 존재 이유가 있는가와 같은 실존적 질문 뒤에 감춰진 우리 시대의 절망과 탄식을 읽어내고, 오늘날의 선악 문제에 주자학이 제시할 수 있는 해법은 무엇인지, 그 제안은 유효성이 있는지에 대해 논증을 펼친다.
목차
책머리에
서언 선악을 생각하는 이유
1. 오늘날 선악을 생각하는 이유
2. 주희 선악론의 탐구 이유와 가능성
1장 선진유학의 선악 개념
1. 선악 개념의 출현
2. 공자:악은 선하지 않은 것[不善]이다
3. 맹자: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
4. 순자:이기심이 공동선을 만든다
2장 한당유학의 선악 개념
1. 동중서: 선은 아직 완전하지 않은 선[未善]을 완성하는 것이다
2. 양웅: 본성은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다
3. 한유: 선악은 타고난 본성의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4. 이고:악은 본래 있던 것은 아니다[邪本無有]
3장 대립: 선악에 대한 주희의 문제의식
1. 대립의 두 양상: 상관대립과 모순대립
2. 대립의 실태: 악은 선보다 강하다
3. 대립의 해소: 통합적 이론을 향하여
4장 선의 근원: 리
1. 성즉리: 도덕형이상학의 건립
2. 성즉리의 의미
5장 선의 의미와 종류: 주희와 호남학파의 성선 논쟁
1. 논쟁의 배경
2. 호남학에서 ‘성선의 선’과 ‘선악의 선’
3. 주자학에서 ‘성선의 선’과 ‘선악의 선’
4. 주희와 호굉의 성선 해석 비교
6장 악의 근원: 기질
1.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
2. 기질과 근본악
7장 선악 대립의 역설적 통합: 기질지성
1.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대립
2. 역설적 사유에 의한 통합
3. 기질지성의 재해석
8장 악의 위상: 악한 리도 있는가
1. 선악개천리: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
2. 이유선악: 악한 리는 없다
9장 악의 의미와 존재 이유(리)
1. 악의 의미: 악은 선의 결핍이다
2. 악에도 존재 이유(리)가 있는가
10장 통합적 구도
1. 선진유학에서 한당유학에 이르는 선악 개념의 변화 양상
2. 구도의 통합: 이원론적 일원론
11장 아우구스티누스 선악론과의 비교
1. 이원론의 계보: 조로아스터교·마니교·기독교
2.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원론적 일원론
3. 주희와 아우구스티누스의 비교
결언 주희 선악론의 의미
1. 주희 철학의 현대적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2. 문제: 악으로부터 정의되는 현대 사회의 선
3. 노자의 해법: 선악을 잊어버리자
4. 주희의 해법:악은 선으로부터 정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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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280 융의 경우에는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그런 식으로 비판했다. ˝실제적인 차원에서 보면, 선의 결핍 교리는 도덕적으로 위험하다. 그것은 악을 작아 보이게 하고, 실감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선의 결핍 교리는 선마저 약화시키는데, 이는 그것이 악에게서 그 필연적인 대극을 쫓아버리기 때문이다. 흑이 없으면 백도 없고, 왼쪽이 없으면 오른쪽도 없고, 아래가 없으면 위도 없고, 추위가 없으면 더위도 없고, 어둠이 없으면 빛도 없다. 악이 환상이라면, 필연적으로 선도 환상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나는 선의 결핍 교리가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하고, 난센스라고 생각한다.˝ 이 비판은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주희의 해석에 대한 제자들의 비판을 연상시킨다(주자어류 95:42). 차라리 기질을 악의 근원으로 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제자들의 반문에는 융과 마찬가지로 악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죄 없는 사람들의 고통이 뉴스를 가득 채우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고 신에게 면죄부를 주는데 더 관심이 있었던 기독교인일 뿐이었을까? 세상의 선과 악을 더 정확히 읽었던 것은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와 주희를 비난했던 사람들이었을까?(280쪽) 접기 - 마르셀루
P. 281 그러나 융이 생각한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가 악의 실재성을 무효화하고 악을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인간의 정서에 맞지 않는 것으로 만들려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부정하고자 했던 것은 악의 독립적 실체성(substantiality)이지 악의 실재성(reality)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유념할 필요가 있다. 주희의 불선과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선의 결핍은 악이 비존재 내지는 비실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에 혼란이 없다는 말도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 부정이 아닌 특정하고 상대적인 부족으로서, 있어야할 질서와 가치가 없는 구체적 현상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벽의 구멍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벽이 없는 상태일 뿐이다. 벽을 설계하면서 구멍을 포함시키지는 않는 것처럼, 선의 결핍 또한 선을 설계할 때부터 포함되어 있던 것이 아니다.(281쪽) 접기 - 마르셀루
P. 299 바디우는 오늘날 윤리에서의 판단의 궁극적 원리란, ‘선험적으로 식별 가능한 악에 대항하여 명시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선이라는 원리’라고 규정했다. 같은 책, 21쪽.
‘선험적으로 식별 가능한 악’이란 그 자체로 악한 실체적 악을 가리킨다. 이에 ‘명시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윤리의 원리’라는 것은 악을 제거하기 위해 폭력(악)을 행사하는 것을 윤리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자기기만적 태도를 비판한 표현이다. 그는 이러한 윤리가 표면적으로는 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현실은 그러한 명분과 대조적으로 이기주의의 광란과 해방적 정치의 소멸, 또는 극단적 불안정성, 민족적 폭력의 증가, 그리고 고삐 풀린 경쟁의 보편성이 지배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같은 책, 9-10쪽.
오늘날의 선에 대한 주장들이란 모두 특정 계층의 이익을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바디우는 2015년 발생한 11ㆍ13 파리 테러를 고찰한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2016)에서도 현대인의 악에 관한 의식의 오만함을 비판했다. 민주주의의 기본가치인 관용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그 가치를 신봉하던 선진국 사람들이었다.(299쪽) 접기 - 마르셀루
P. 301 악마화는 비인간화(Dehumanization)의 극단적 표현이고, 비인간화는 혐오의 극단적 형태이다. 직접적으로 악마화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선악의 이분법적 사고, 악의 실체화를 반영하는 표현들까지 포함시킨다면 우리사회에서 악마화의 경향이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을 구체적인 동식물에 비유하는 것은 비인간화의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다. 나치와 일본인들이 제2차 대전 당시 벌인 인종 학살이나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벌어졌던 인종학살에서 단순한 이름붙이기가 대규모 학살의 방아쇠 역할을 하였다. 희생자들은 바퀴벌레나 쥐로 묘사되었으며, 이를 통해 이들은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는 해로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한 개인을 무가치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만드는 이러한 종류의 표현들을 포함시킨다면, 우리사회에서 악마화의 빈도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오늘날 혐오표현이라 불리는 것들 중에도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많다. 우리사회에서 사용되는 대표적인 혐오표현은 OO충이다. 인종학살에서 사용되었던 비인간화의 대표적 표현이 오늘날 다시 부활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은 ‘진지충’이 된다. 성실하게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교수님은 ‘설명충’으로 불린다. 그럼으로써 존재와 행위의 가치가 상실된다. 평생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소명으로 여겨왔던 선생님이 더 이상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아이와 엄마는 다른 아이들의 집단적인 혐오표현에 시달리는 것이 무서워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회 전반으로 이런 현상들이 확산되고 있다. 갈라치기(2022년 829건), 이분법(2022년 614건), 내로남불(5,305건)과 관련된 기사들이 급증한 것도 우리사회에 나타나는 혐오와 비인간화, 악마화의 추이를 보여준다. 선험적으로 악을 담지한 타자, 나와는 본성 자체가 다른 타자가 있다는 생각이 인터넷을 지배하고 있다.(301-302쪽) 접기 - 마르셀루
P. 274 칸트는 인간이 선한 행위의 준칙과 악한 행위의 준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타고 났다고 보았다. 비록 근본악이 그 선택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칠지라도, 선하거나 악한 준칙을 채택하는 자유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다. 자유를 중시하는 칸트의 전기 도덕철학과 후기의 근본악 개념은 모순이 아니다. 칸트가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원죄의 유전을 인정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체의 의사선택의 자유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윤리적 선악 판단이 정당하게 내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는 오히려 외견상 충돌하는 것 같은 근본악과 자유를 통해 인간의 악함을 증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악으로의 자연적 성향은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된 자유, 즉 선택의지의 자유와 하나로 엮어져 있다. 이로부터 근본악이 인간 본성에 자리 잡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게 된다. 도덕법칙보다 자기애를 우선시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선택 능력을 모든 인간이 본성으로 지녔다면, 이것과 하나로 엮여 있는 악으로의 성향 또한 인간의 본성이나 다름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본성에 대한 이런 규정을 근거로 칸트는 모든 인간은 본성에서 악하다고 주장하였다. 근본악은 자유를 제약하기도 하지만 자유 속에서 작동한다. 이 때문에 스스로 죄를 초래한 주체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으며, 근본악의 극복 가능성도 열려있게 된다. 접기 - 제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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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철호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경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성리학의 도덕추론과 선악론을 주제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년부터 경인교육대학교에 재직하며 성리학의 경(敬)과 불교의 마음챙김 등 동양윤리 가운데 교육 현장에 직접 적용할 수 있는 분야로 연구를 확대해왔다. ‘철학과 심리학을 통해 보는 우리시대 선과 악’의 문제에 관심이 많아 이를 주제로 한 강좌와 집필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대표 논저는 『도덕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공저), 「악의 리는 없다-정호의 리유선악에 대한 주희의 해석」, 「혐오사회에서 노자철학의 의미」, 「도덕적 명상으로서의 경(敬)」 등이며, 역서로는 『마음챙김명상교육』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2022 개정 교육과정과 초등 도덕과교육>,<도덕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 … 총 8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악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주자학의 오랜 논쟁과 해법
□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는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가치 개념인 선과 악을 주자학의 관점에서 고찰한 신간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 주자학에서 본 선악의 실체성』(김철호 저)을 펴냈다. 경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이자 성리학의 도덕추론과 선악론 연구에 천착해온 저자는 이 책에서 선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본래 선한가, 악은 왜 선보다 강한가, 악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악에도 존재 이유가 있는가와 같은 실존적 질문 뒤에 감춰진 우리 시대의 절망과 탄식을 읽어내고, 오늘날의 선악 문제에 주자학이 제시할 수 있는 해법은 무엇인지, 그 제안은 유효성이 있는지에 대해 논증을 펼친다.
□ 주자학의 모든 개념을 연결하는 구심점은 선과 악이다
유학의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 물으면 대부분 인의예지(仁義禮智)라고 답하지, 선(善)이라고 답하지는 않는다. 기존 연구를 보아도 이기론, 심성론, 수양론을 주제로 삼을 뿐 선악을 별도의 연구 주제로 다룬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저자는 주희(朱熹, 1130~1200)의 저작에 선악에 대한 언설이 상당히 많이 나오고, 그의 글 곳곳에서 선과 악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이기(理氣)·음양·성(性)·태극·인의예지 같은 유학의 핵심 개념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주자학의 중심부에 있는 이기, 심성, 격물(格物), 성의(誠意) 등의 개념은 각기 고유한 의미를 지니지만 선악이 빠지면 구심점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이를테면 리(理)는 절대선을 정립하기 위해 도입되었고, 기(氣)는 뿌리 깊은 악의 원인을 해명하기 위해 동원되었으며, 격물이나 성의는 뿌리 깊은 악을 극복하기 위해 재해석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도·태극·음양 같은 다른 개념들도 마찬가지이며, 주자학의 모든 개념을 연결하는 공통의 문제의식이 있다면 바로 선과 악의 문제라고 말한다.?
□ 현실에서, 악은 늘 선보다 강하다
주희의 스승은 31세의 주희에 대해 “선을 즐거워하고 의로움을 좋아하는 것이 그와 견줄 만한 인물이 드물다”고 평한 바 있다. 주희의 이러한 선에 대한 열망은 어쩌면 악이 넘쳐나는 현실에 대한 반증일 수 있다. 주희가 살았던 12세기 남송은 이전 어느 시기보다 생산력이 증대되어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지만, 권세를 가진 자들의 탐욕과 착취로 인해 백성들이 기본적인 생활조차 영위하기 어려웠던 시대다. 주희가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던, 선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이익에만 몰두하는 당시의 세태는 오늘날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이 세계가 악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탄식은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라는 칸트의 말처럼, 악하기는 쉽지만 선하기는 어려우며, 현실에서 악은 늘 선보다 강하다. 그런데도 주자학은 극구 선이 인간의 본질이고, 악은 선이 아닌 무엇일 뿐 실체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주자학은, 선하면서 악한 인간의 이중성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악을 제거하고 선을 실현할 가능성을 입증해야 한다. 여기에는 형이상학적 타당성과 현실적인 적용 가능성이 모두 요구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저자는 공자로부터 맹자, 순자, 한당유학, 북송유학을 거쳐 주희에 이르는 선악 개념의 변화와 특징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 선으로부터 악을 정의해야 하는 이유
저자는 주희를 중심으로 유학의 선악 개념을 소개하고 아우구스티누스 선악론과의 비교를 통해 그 보편성을 확장한다. 무엇보다도 주자학의 선악 개념을 우리 사회의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는 사유 문법으로 다듬어 제시하고자 시도한다. 그 핵심은 악의 실체를 부정하고 선으로부터 악을 정의하는 방향성에 있다. 오늘날 대중 매체에 넘쳐나는 타자를 악마화하고 그들을 비난함으로써 손쉽게 선한 사람이 되거나, 명시적인 악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자기기만적 태도가 악으로부터 선을 정의하는 역방향성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한다. 주자학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지만 동시에 악을 유발하는 기질을 지녔다고 본다. 따라서 악은 제거하고, 악인은 변화시켜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기원이 분명치 않은 격언은 인류가 오랫동안 악(죄)과 악인(죄인)을 구별해서 다루어왔음을 보여주며, 동서고금의 현인들이 공통적으로 도달한 결론이기도 하다. 이 책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악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악을 알아차리고 선을 깨닫는 과정을 지속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주자어류』에는 주희가 제자에게 ‘물의 비유’가 본성의 선과 악을 설명하는 데 미흡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최선의 비유라고 강조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이 탁해지듯 본성은 악으로 향하기 마련이지만 처음부터 맑지 않았던 것은 아니며, 비록 탁하더라도 맑게 할 수 있는 것은 물과 사람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물의 시작점에 깨끗한 물이 있었듯이 인간의 본성에도 선한 본성만 있다. 그렇기에 선에 무지하거나 악을 행하는 것의 책임을 인간에게 물어야 하고, 지독한 악인에게도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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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으로부터 선을 정의할 것인가, 선으로 부터 악을 정의할 것인가
선과 악을 정의하는 방향에 특히 주목하는 책이다. 인간이 선악의 판단을 내리는 한, 선과 악 중 어느 하나를 먼저 생각하고 이를 기준으로 나머지 항을 정의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제목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주희에게서 발견되는 그러한 정의 방향을 표현한 것이다. 저자는 우리사회에서의 선악의 정의방향은 이와 반대라고 말한다. "우리사회는 어떤가? 한국은 테러가 문제가 되는 사회도 아니고, 인종 문제가 심각한 사회도 아니다. 그렇지만 악마화는 우리사회에서도 점차 기승을 부리고 있다. 타자를 악마화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만들기 위한 혐오 표현이 그것이다. 이를 사회가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기적 현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손을 대기 어려울 정도로 갈등의 골이 깊어만 보인다. 양쪽 진영 모두가 자신은 선이고 상대방은 악이라고 규탄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모두 악으로부터 선을 정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또 한편으로 인터넷 기사의 댓글들에는 선한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공격 대상이 넘치는 인터넷에서 적대화, 악마화를 통해 누구나 손쉽게 선한 사람이 되고 있다. 그러나 누가 선을 알겠는가."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선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누구도 선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로 오늘날의 인터넷 댓글들을 보면 악을 비난하지만 선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겠는가, 내로남불이 유행어가 된 사회는 무엇을 말하는가? 악을 지적하기는 쉽지만, 그것이 사회에 도움이 되겠는가? 저자는 이러한 작업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줄 지언정, 사회를 개선하는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모습을 주희를 통해 돌어봐야 하는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내면을 성창하고, 선이 무엇인지를 고민할 때 이 상황을 조금이나마 개선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칸트는 인간이 선한 행위의 준칙과 악한 행위의 준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타고 났다고 보았다. 비록 근본악이 그 선택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칠지라도, 선하거나 악한 준칙을 채택하는 자유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다. 자유를 중시하는 칸트의 전기 도덕철학과 후기의 근본악 개념은 모순이 아니다. 칸트가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원죄의 유전을 인정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체의 의사선택의 자유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윤리적 선악 판단이 정당하게 내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는 오히려 외견상 충돌하는 것 같은 근본악과 자유를 통해 인간의 악함을 증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악으로의 자연적 성향은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된 자유, 즉 선택의지의 자유와 하나로 엮어져 있다. 이로부터 근본악이 인간 본성에 자리 잡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게 된다. 도덕법칙보다 자기애를 우선시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선택 능력을 모든 인간이 본성으로 지녔다면, 이것과 하나로 엮여 있는 악으로의 성향 또한 인간의 본성이나 다름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본성에 대한 이런 규정을 근거로 칸트는 모든 인간은 본성에서 악하다고 주장하였다. 근본악은 자유를 제약하기도 하지만 자유 속에서 작동한다. 이 때문에 스스로 죄를 초래한 주체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으며, 근본악의 극복 가능성도 열려있게 된다. - P274
이 책은 주희를 중심으로 유학에서의 선악 개념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공자에서부터 맹자, 순자, 한당유학, 북송유학을 거쳐 주희에 이르는 선악 개념의 변화와 특징을 탐구하였다. 이들은 선의 위상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을 지녔던 데 비해 악에 대해서는 거의 동일한 입장을 보였다. 악은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악은 단독으로 정의되지 않고 언제나 선이 아닌 무언가로 정의되었다. 오늘날의 선악 판단이 악으로부터 선을 정립하는 패턴을 지니는데 비해 선으로부터 악을 정의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악은 늘 선으로부터 시작되며, 그렇기에 악은 세상 속에 실재하지만 그 기원을 갖지 못하는 기묘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반대로 악으로부터 선을 정의한다면 악으로 규정된 존재는 제거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된다. 이슬람교도나 히잡을 벗어던진 여인이나 학교폭력을 저지른 중학생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선으로부터 악을 정의한다면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변화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노자에게 선악은 대립적 기호이면서, 의미론적․존재론적 측면에서 새끼줄처럼 꼬여 있다. 선과 악은 서로에 대한 이물질이면서 서로의 분비물이기도 하다. 선이 없이 악이 만들어질 수 없고, 악이 없이는 선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선의 확장은 곧 악의 확장을 초래하며, 악의 제거는 선 자신의 축소를 가져온다. 어떤 파괴 행위도 자신은 온전하게 놓아둔 채 타자만을 파괴할 수는 없다. 노자가 도덕경 2장의 전반부에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가치(미 또는 선)에 쏠리면 오히려 세상은 추하게 될 뿐이라고 말한 것은 이런 맥락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 <3장 대립: 선악에 대한 주희의 문제의식> 중에서 - P96
악은 어떤 표준을 기준으로 지나침, 뒤집어짐, 한쪽으로 치우침, 어긋남, 빼앗김, 멀어짐, 가로막힘이 발생한 상태이다. 표준이 없다면 지나치거나 어긋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표준이 있고 악이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뒤틀림이라면 현실의 악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기질이 매우 근본적이고 은미한 순간부터 우리의 의지를 악으로 향하게 유혹한다 해도[幾有善惡], 악은 ‘실체(substance)’, ‘고유명사’, ‘대상이 지닌 고유한 속성’, ‘이미 존재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악은 악으로부터 정의될 수 없다. 악은 선으로부터 정의될 뿐이다.
- <9장 악의 의미와 존재 이유(리)> 중에서 - P231
p. 314
주희는 어느 제자처럼, 마니교처럼, 부시나 트럼프처럼, 우리사회의 뉴스기사와 댓글들처럼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외적이고 실체적인 악에 대한 투쟁에 있다고 보지 않고, 경(敬)이나 격물(格物)을 통해 우리 내면의 악을 알아차리고 선을 깨닫는 과정을 게을리 하지 않는데 있다고 강조한다. 누구도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려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질의 간섭으로 우리의 마음은 매순간 이기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마치 훈제된 고기에서 냄새를 완전히 빼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한순간 나와 타자의 연결성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현실 속에서 우리의 욕망은 이내 다시 꿈틀댈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이로 인해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악한 사람만이 아니라 선한 사람 또한 예외적이다. 악은 평범하다. 기질지성을 지닌 인간이기에 언제든지 악에 물들 수 있고, 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매번 자신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나가야 한다. 그렇기에 모든 과정 속에서 충실성 또는 계속함(誠)의 윤리가 필요하다.
- <결언 주희 선악론의 의미> 중에서
-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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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스퍼 2023-12-19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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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선의 결핍이다
"21세기 언제부터인가 악마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매악체에 등장하고 있다. 중세 시대의 마녀사냥에서나 나올 법한 단어가 현대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가장 유명한 사례 혹은 시작점은 2002년 부시(George W. Bush)가 특정 국가들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일이었다.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2020년 11월, 대통령 당선 연설에서 바이든은 “미국의 암울한 악마화(demonization)의 시간을 여기에서 끝내자”라고 역설했다." -297쪽-
이 책은 동서고금에 걸쳐 가장 일반적인 가치 개념으로 쓰여 왔던 선과 악을 되돌아보고 있다. 이를 위해 공자부터 맹자, 순자, 한당유학, 북송유학을 거쳐 주희에 이르는 선악 개념의 변화와 특징을 탐구했다. 특히 중국 남송(송나라 후기)의 유학자 주희를 중심으로 유학에서의 선악을 살펴보았다.
나아가 이 책에서 필자는 선과 악의 내용만이 아니라, 선과 악을 정의하는 방향에 특히 주목했으며, 가능한 주희를 현대와 연결 지으면서 오늘날에도 통용될 수 있는 선악에 대한 보편적인 사유 문법을 발굴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책의 제목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주희에서 발견되는 그러한 정의 방향을 표현한 것이다,
저자는 1990년부터 2022년까지 주요 일간지에 보도된 악마화 관련 기사가 총 2,372건에 달하며 매년 증가하고 있다고 전했다(’91년 3건, ’01년 9건, ’11년 25건, ’15년 134건, ’21년 477건, ’22년 514건 / 한국언론진흥재단 빅카인즈 사이트 검색).
또한 갈라치기(’22년 829건), 이분법(’22년 614건), 내로남불(’22년 5,305건)과 관련된 기사들이 급증한 것도 우리 사회의 혐오와 비인간화, 악마화의 추이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저자는 훈제된 고기에서 냄새를 완전히 빼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인간은 언제든지 악에 물들 수 있고 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매번 자신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악의 시선에서 선을 정의하면 악으로 규정된 존재를 제거의 대상으로 여기지만 선의 시선에서 악을 정의하면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변화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고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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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경우에는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그런 식으로 비판했다. "실제적인 차원에서 보면, 선의 결핍 교리는 도덕적으로 위험하다. 그것은 악을 작아 보이게 하고, 실감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선의 결핍 교리는 선마저 약화시키는데, 이는 그것이 악에게서 그 필연적인 대극을 쫓아버리기 때문이다. 흑이 없으면 백도 없고, 왼쪽이 없으면 오른쪽도 없고, 아래가 없으면 위도 없고, 추위가 없으면 더위도 없고, 어둠이 없으면 빛도 없다. 악이 환상이라면, 필연적으로 선도 환상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나는 선의 결핍 교리가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하고, 난센스라고 생각한다." 이 비판은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주희의 해석에 대한 제자들의 비판을 연상시킨다(주자어류 95:42). 차라리 기질을 악의 근원으로 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제자들의 반문에는 융과 마찬가지로 악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죄 없는 사람들의 고통이 뉴스를 가득 채우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고 신에게 면죄부를 주는데 더 관심이 있었던 기독교인일 뿐이었을까? 세상의 선과 악을 더 정확히 읽었던 것은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와 주희를 비난했던 사람들이었을까?(280쪽) - P280
그러나 융이 생각한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가 악의 실재성을 무효화하고 악을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인간의 정서에 맞지 않는 것으로 만들려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부정하고자 했던 것은 악의 독립적 실체성(substantiality)이지 악의 실재성(reality)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유념할 필요가 있다. 주희의 불선과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선의 결핍은 악이 비존재 내지는 비실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에 혼란이 없다는 말도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 부정이 아닌 특정하고 상대적인 부족으로서, 있어야할 질서와 가치가 없는 구체적 현상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벽의 구멍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벽이 없는 상태일 뿐이다. 벽을 설계하면서 구멍을 포함시키지는 않는 것처럼, 선의 결핍 또한 선을 설계할 때부터 포함되어 있던 것이 아니다.(281쪽) - P281
바디우는 오늘날 윤리에서의 판단의 궁극적 원리란, ‘선험적으로 식별 가능한 악에 대항하여 명시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선이라는 원리’라고 규정했다. 같은 책, 21쪽.
‘선험적으로 식별 가능한 악’이란 그 자체로 악한 실체적 악을 가리킨다. 이에 ‘명시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윤리의 원리’라는 것은 악을 제거하기 위해 폭력(악)을 행사하는 것을 윤리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자기기만적 태도를 비판한 표현이다. 그는 이러한 윤리가 표면적으로는 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현실은 그러한 명분과 대조적으로 이기주의의 광란과 해방적 정치의 소멸, 또는 극단적 불안정성, 민족적 폭력의 증가, 그리고 고삐 풀린 경쟁의 보편성이 지배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같은 책, 9-10쪽.
오늘날의 선에 대한 주장들이란 모두 특정 계층의 이익을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바디우는 2015년 발생한 11ㆍ13 파리 테러를 고찰한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2016)에서도 현대인의 악에 관한 의식의 오만함을 비판했다. 민주주의의 기본가치인 관용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그 가치를 신봉하던 선진국 사람들이었다.(299쪽) - P299
악마화는 비인간화(Dehumanization)의 극단적 표현이고, 비인간화는 혐오의 극단적 형태이다. 직접적으로 악마화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선악의 이분법적 사고, 악의 실체화를 반영하는 표현들까지 포함시킨다면 우리사회에서 악마화의 경향이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을 구체적인 동식물에 비유하는 것은 비인간화의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다. 나치와 일본인들이 제2차 대전 당시 벌인 인종 학살이나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벌어졌던 인종학살에서 단순한 이름붙이기가 대규모 학살의 방아쇠 역할을 하였다. 희생자들은 바퀴벌레나 쥐로 묘사되었으며, 이를 통해 이들은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는 해로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한 개인을 무가치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만드는 이러한 종류의 표현들을 포함시킨다면, 우리사회에서 악마화의 빈도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오늘날 혐오표현이라 불리는 것들 중에도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많다. 우리사회에서 사용되는 대표적인 혐오표현은 OO충이다. 인종학살에서 사용되었던 비인간화의 대표적 표현이 오늘날 다시 부활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은 ‘진지충’이 된다. 성실하게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교수님은 ‘설명충’으로 불린다. 그럼으로써 존재와 행위의 가치가 상실된다. 평생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소명으로 여겨왔던 선생님이 더 이상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아이와 엄마는 다른 아이들의 집단적인 혐오표현에 시달리는 것이 무서워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회 전반으로 이런 현상들이 확산되고 있다. 갈라치기(2022년 829건), 이분법(2022년 614건), 내로남불(5,305건)과 관련된 기사들이 급증한 것도 우리사회에 나타나는 혐오와 비인간화, 악마화의 추이를 보여준다. 선험적으로 악을 담지한 타자, 나와는 본성 자체가 다른 타자가 있다는 생각이 인터넷을 지배하고 있다.(301-302쪽)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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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루 2023-12-13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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