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echa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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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reactions:22崔明淑, 이동해 and 20 others
Taechang Kim
日本 未来共創新聞社 山本恭司社長이 특별히 찾아서 우송
해준 책이 어제 오후에 배달되어 받아 보았다. 당장 읽기 시
작했는데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도 時中의 묘합을 실
감한다.
이찬수박사의 역작인 《다르지만 조화한다》에서 한국인학자가 기독교와 불교
의 연계를 한일공관적 입장에서 심층분석 비교해명한 것과 맞무려서
의 연계를 한일공관적 입장에서 심층분석 비교해명한 것과 맞무려서
일본인 원로학자 (2차례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음) 가네코 하루오 선생의
기독교와 일본불교와의 대화를 영성의 측면에서 비교해명한 것하고
공명공진하는 바가 많고 의미깊게 느껴져서 이다.
이찬수박사의 저서에 접할 수 있었기에 가네코 하루오씨의 동서 영성론의 핵심이해가 한일철학대화를 계속하고있는 나 자신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고 많다.
기독교 신학자, 목회자이면서 화엄철학과 선불교를 공부한 저자가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며 내면에서 상통하는 종교적 본질을 밝힌 책. 불교적 언어가 불자에게 주는 의미와 기독교적 언어가 기독교인에게 주는 의미의 정도가 다르지 않음을 말하면서 서로를 통해 자신에게 더 깊어지는 종교 공부와 수행을 이끌어 내고, 신앙의 거룩함을 일깨운다.
불교와 기독교가 표면상 외형상 전혀 다른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심층에서 서로 통하는 면이 더 크고 깊다는 사실을 해명한다. 기독교가 절대유의 차원에 서 있다면 불교는 절대무의 차원에 서 있으나, 절대는 절대로 통하는 법이다. 불교와 기독교의 종착점은 결국 동등한 체험의 깊이를 나타내며, 붓다와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세계도 결국 동등하다는 것이다.
목차
1부_ 깨달음의 길에 서다
01 인연에 따르다 : 불교의 인간론
02 믿음과 용기, 그리고 깨달음 : 지눌의 신심론과 틸리히의 신앙론
2부_ 불교와 기독교 서로 만나다
03 법신불 일원상과 범재신론 : 원불교의 일원주의와 세계주의
04 모두 절대무 안에 있다 : 니시다의 철학과 기독교
05 창조적 만남과 궁극적 일치 : 길희성과 타나베의 신학과 철학
06 두 종교를 동시에 살아가다 : 불교적 그리스도인 니터의 고백
07 신학을 불교화하다 : 야기의 불교적 신학
08 불교를 수용하며, 신학을 변호하다 : 발덴펠스의 자기 비움의 신학
3부_ 두 세계를 다시 보다
09 종교는 해석이다 : 스힐레벡스의 신학적 해석학: 모든 종교는 해석이다
10 오늘 우리의 구원과 해탈 : 어느 불교적 신학자의 구원관
11 비종교적인 그러나 종교적인 : 비종교인 리영희가 보는 기독교와 불교
12 90점 불교와 70점 기독교 : 두 종교에 대한 애정어린 요청과 희망
책속에서
P. 37지눌 선사상에서 믿음과 앎은 깨달음, 즉 돈오와 다르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지눌이 믿음과 앎의 해석에도 깊은 주의를 기울였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지눌은 『신화엄경론』과 만나는 체험 후에 원돈신해문, 즉 원돈교에서의 믿음과 앎으로 들어가는 문을 상세히 밝혔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으로 선에서 강조하던 돈오를 믿음과 앎이라는 언어로... 더보기
P. 69법신불은 구체적 “상징” 또는 “나타낸 바”의 차원과 단순히 동일시할 수 없다. 법신불은, 경험적으로는 불타에게서 알려졌으되, 논리적으로는 그 불타 및 다양한 불보살들의 존재론적 근거로, 또는 다양한 불들을 정말 불이게 해 주는 원천으로 상상된 개념이다. 상상되었다고 해서 그저 허구라는 뜻은 아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 더보기
P. 151한국인은 기독교인이기 이전에 다양한 종교 사상들을 녹여 내고 있는 한국 안에서 한국인으로 살아왔고, 여전히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 종교 사상들을 매개로 해서 기독교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 안에 녹아들어 가 있는 한국의 종교가 한국의 기독교를 기독교되게 해 준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한국 종교가 이미 온전히 담아 왔던 그리스도성이 기독교 안에서 자기부정적으로 고스란히 살아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종교는 그저 기독교를 토착시켜 주는 단순한 매체나 고리가 아니라, 기독교가 말하려고 했던 것을 이미 충분히 말해 주는 한국적 매개가 된다. 물론 기독교 역시 한국 종교가 말하려고 했던 것을 이미 충분히 말해 주는 또 다른 매개가 된다. 이들 간의 차이는 도리어 서로에게 생명력을 부여해 주는 ‘절대매개’로 작용하는 것이다. 접기
P. 186(일본의 신학자) 야기는 이러한 불교와의 만남에서 인간은 성서와 십자가의 직접적 도움 없이도 본래성을 획득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아무리 죄 없는 사람(=예수)이라 해도 한 인간이 타인의 죄를 짊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략) 십자가는 본래적 실존으로 이끄는 매개이고 성서는 실존의 근저의 표현이다. 따라서 인간은 “선교의 말씀 안에서만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근저에서도 그분을 만난다.”고 야기는 말한다. 그러한 신념으로 야기는 실존의 근저, 통합에의 규정의 장을 제시하면서, 장의 신학을 세웠다. 모든 개체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관계하고 조화한다는 불교적 가르침을 야기는 장이라는 개념을 빌려 신학적으로 전개했다. 접기
P. 254차별적으로 존재하는 듯한 불교와 기독교의 개개 ‘형식’ 내지 ‘제도’를 벗기고그 내면으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불교와 기독교란 따로 없다. ‘너’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원천적 삶에는 종파가 따로 없는 것이다.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하는 원천적 사실에 종파 간, 성별 간, 지역 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미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있는 인간의 원천적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이미 깨달아 있어 부처와 하나 되어 있는 원천적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이미 천주를 모시고 있어(侍天主) 있는 그대로 하늘과 같은 존재인 인간(人乃天)의 원천적 실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찬수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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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사상과 문화, 동아시아의 종교와 평화 연구자.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거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일본의 철학자 니시타니 케이지와 독일의 신학자 칼 라너의 사상을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 교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일본)코세이 가쿠린 객원교수, (일본)중앙학술연구소 객원연구원, (일본)난잔대학 객원연구원, 성공회대 대우교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일본정신』,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교토학파와 그리스도교』, 『다르지만 조화한다』, 『평화와 평화들』, 『사회는 왜 아픈가』, 『아시아평화공동체』(편저), 『평화의 여러가지 얼굴』(공편저), 『근대 한국과 일본의 공공성 구상』(공저), 『北東アジア·市民社会·キリスト教から観た平和』(공저), 「비전(非戰), 반군국주의, 비핵화로서의 평화: 일본 평화개념사의 핵심」, 「平和はどのように成り立つのか」, 「北朝鮮の民間信仰」 등 80여 권의 단행본(공저서, 번역서 포함)과 90여 편의 논문을 출판했다.
현재 인권평화연구원 공동원장으로 일하면서 가톨릭대에서 평화학을 강의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메이지의 그늘>,<보훈과 교육>,<보훈, 평화로의 길> … 총 6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기독교 신학자, 목회자이면서 화엄철학과 선(禪)불교를 공부한 저자가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며 내면에서 상통하는 종교적 본질을 밝힌 책이다. 이 책은 불교적 언어가 불자에게 주는 의미와 기독교적 언어가 기독교인에게 주는 의미의 정도가 다르지 않음을 말하면서 서로를 통해 자신에게 더 깊어지는 종교 공부와 수행을 이끌어 내고, 그리고 신앙의 거룩함을 일깨운다.
■ 출판사 서평
깨달음에서 서로를 경유하여 다시 자신에게로
이 책은 ‘세계적 차원의 종교들이 균질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도 대립과 조화 사이를 오가는 기이한 종교 왕국’인 한국에서 태어난 한 신학자의 자기 고백과 그에 관한 부연이다;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출발했다. 나는 나 자신이 한국인임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임을 그만두지 않은 채 한 사람의 불자가 되어서 돌아왔다.” 인도의 신학자 파니카의 말을 빌려 표현한 대로 불교와 기독교가 궁극적 차원에서는 만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저자는 신학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소통하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과정에서 고립되고 배척당하는 고난을 겪기도 했으나 그의 신학 역정과 신앙 모색은 멈추질 않았다.
다르지만 조화한다, 불교와 기독교의 심층
이 책은 불교와 기독교가 표면상 외형상 전혀 다른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심층에서 서로 통하는 면이 더 크고 깊다는 사실을 해명한다. 불교와 기독교의 종착점, 가령 공(空)과 하느님, 열반과 하느님 나라, 그리스도와 보살, 기도와 염불 등은 결국 동등한 체험의 깊이를 나타내며, 붓다와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세계도 결국 동등하다는 것이다. ‘다르지만 조화한다’라는 말은 “군자는 상대와 조화하면서 차이도 인정한다(君子和而不同)”는 공자의 말씀을 염두에 둔 것으로, 언어와 관념을 넘어서는 근원의 세계, 궁극의 세계를 이야기한다. 기독교가 절대유의 차원에 서 있다면, 불교는 절대무의 차원에 서 있으나, 절대는 절대로 통하는 법이다.
불교적 그리스도인, 폴 니터의 불교
저자는 두 종교 사이를 넘나들며 스스로를 완성시키는 신학자로 미국의 신학자 폴 니터(Paul F. Knitter, 1939- )를 예로 든다. 니터 또한 불교를 창조적으로 소화해낸 대표적 신학자이다. 니터는 신학자로서 불교 언어를 치열하게 소화해, 신학적 양심에 솔직하게 녹여내어 고백하는 데에 독보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저자는 태생이 기독교인이고 일급 신학자이지만, 두 종교를 단순 병렬식으로가 아니라, 하나로 녹여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웅변적이고 체험적으로 보여준 니터를 종교다원주의 신학자이자 불교학자라고 명명한다. 그 밖에도 원불교 사상과 기독교, 쿄토학파와 기독교, 한국의 길희성과 타나베 비교 등을 통해서도 이점을 구명한다.
90점의 불교와 70점의 기독교
저자는 종교의 깊이와 넓이를 수치화해서 불교가 90%쯤 완성된 종교라면, 기독교는 70%쯤 완성된 종교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세속적 수치를 넘어서서 불교가 정말로 깊고 넓다면 ‘밖’의 것을 소화해 받아들이는 태도를 좀더 확연히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밖을 받아들이려면 관심을 갖고 공부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모자라는 30%를 채우려는 기독교인의 노력 이상으로 공부를 심화하여 부족한 10%를 채워야 한다. 기독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다 보면, 종국에는 딱히 ‘성인이랄 것도 따로 없는 확연무성(廓然無聖)의 진리’를 공유하며 인류 정신계를 선도할 수 있는 공동의 길에 나설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