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14

중동 이슬람 선교 저널 - 이븐 알-아라비 : 창조에 대해서

중동 이슬람 선교 저널 Korean Edition of 'St. Francis Magazine': 이븐 알-아라비 : 창조에 대해서


중동 이슬람 선교 저널 Korean Edition of 'St. Francis Magazine'


이 블로그는 www.stfrancismagazine.info 의 글들을 선별하여 한국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2009년 7월 28일 화요일

이븐 알-아라비 : 창조에 대해서


원제: 
REFLECTIONS ON THE CONCEPT OF CREATION 
IN MUHYI’AD-DĪN IBN AL-‛ARABĪ1

Phil Bour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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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소피아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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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소위 ‘범신론’이라고 불리는 이븐 알-아라비의 사상은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 신학자들 모두에게 많은 비판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1] 따라서 이 주제를 다시 살펴본다는 것은 오래된 논란들을 끄집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일수도 있다. 따라서 본문을 통해 필자가 의도하는 것은, 이븐 알-아라비의 사상에 대한 찬반론을 검토하는 것보다는, 오늘날 수피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븐 알-아라비의 위치를 고려해 볼 때, 실재 reality 에 대한 근본적인 가정들을 함께 재검토해 봄으로써 오늘날 수피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방법을 묻고 싶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븐 알-아라비의 사상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작업은 성경이 제시하는 실재에 대한 견해가 신비주의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그러한 차이가 창조에 대한 의미와 목적에 대한 다른 관점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할 것이다.

이븐 알-아라비의 사상은 오늘날의 수피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사상 전부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신비주의의 탐색은 그가 제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창조의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다.

좀 더 이븐 아라비에게 동정적인 저술가들은 그가 신비주의가 진정 무엇인가에 대해 종교간의 이해를 돕는데 기여하였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이븐 알-아라비는 살아 생전에 수피즘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제시하였고, 이는 동서양 간에 이전에는 있을 수 없었던 방법으로 친밀감을 가져다 주었다. 이 바탕위에 무언가를 세워보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바탕이 반석같이 견고한 것인지 아니면 모래 위에 세우는 것인지를 먼저 질문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창조

그렇다면 이븐 알-아라비가 말한 창조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매우 방대한 주제이고 따라서 이 짧은 글에 모든 것을 다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글들은 그 본질적인 부분들을 설명할 것이며, 이븐 알-아라비가 어떻게 창조를 이해했고,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였는지 알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이븐 알-아라비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에서 1165년 (1165AD/560AH)에 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그는 광범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젊을 때에 이미 수피즘을 향한 길에 들어섰다. 그는 스페인과 북아프리카를 돌아다니면서 지식을 추구하고, 경건과 지식에 명성을 얻었다. 1201년(598AH)에 비전을 보고 그는 서구를 떠나 동양으로 여행하기로 결심한 후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의 첫 목표는 메카였다. 거기에서 그는 몇 번의 매우 중요한 영적인 만남을 가지고, 그의 영적 탐색에 한 층 깊은 이해를 갖게 된다. 카바를 순회하면서 신비주의적 경험을 한 결과로 그는 광범위한 지식을 담은 al-Futū}hāt al-Makkiyyah[2]를 저술하기 시작하는데 그가 주장하기는 그것이 어떤 변증론이나 당대 학문을 요약한 것이 아니라, 계시에 가까운 것이라고 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하나님이 나의 증언자이시며, 나는 다음과 같이 맹세한다. 나는 신이 명하신 것 이외에는 단 한 글자도 적지 않았으며, 깊은 심중에서 일어나는 숭고한 영감만을 기록하였다. 내 심중에 있는 신의 영으로부터 온 영감에서 오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3]

메카를 떠난 후에 그는 중동의 여러곳을 방문하면서 종종 1207/604년과, 1210/607년, 1214/611년에 다시 메카로 돌아오곳 했다. 결국 그는 1223/620년에 다마스커스에 자리를 잡고 1240/638년에 생을 마감했다.

이븐 아라비가 이해한 실재, 즉 창조는 전통있는 하디스 H}adīth al-Qudsī 인 ‘나는 숨겨진 보물이다. 나는 알려지기를 갈망한다. 나는 알려지기 위해 창조를 했다. I was a hidden Treasure and I yearned to be known. Then I created creatures in order to be known by them’에서 시작된다.[4] 하나님의 슬픔(pathos)과 스스로를 계시하고자 하는 원함이 창조의 동기가 되며 그 중요성을 가늠하게 한다. 하나님의 한숨이 구름을 만들어냈으며 그로부터 다른 창조물들이 생겨났다. 이븐 알-아라비의 작품은 당시의 지배적인 과학적 파라다임에 있어서 플라톤주의와 꾸란의 유산에 각각 동등한 무게를 둔다. 10세기 지중해 세계의 과학과 대부분의 다른 지식들은 플라톤주의가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이븐 러쉬드 Ibn Rushd 의 영양으로 인해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d. 1274)의 작품에서 유럽의 기독교세계에 반영된 운동이다. 유럽의 기독교세계는 라틴어로 번역된 아랍어 작품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븐 알-아라비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수피즘의 철학적 기초를 제공하려는 자신의 목적에 맞지 않을것을 곧바로 인식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영적인 만남이 실제로 초자연적인 것들과의 실재 만남이 되는 신비주의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영혼 soul’의 개념을 지성의 근본적인 요소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반면에 플라톤주의는 어떤 자연적 과정으로 인해 우주가 발산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창조해내었다고 가정하고 있었다. 이븐 알-아라비의 궁극적 의지 ultimate will 와 하나님의 원함에 대한 이해는 여기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창조는 하나님의 원함 즉, 그의 창조물과 함께 느끼는 공감 sympathy이 표현된 것이 되는 것이다. 이 함께 하는 감정은 창조물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되도록 하며, 그 사랑은 그의 창조물들이 그의 신적 존재를 반영하도록 함으로써 다시 한 번 표현된다.

그러나 이는 그 그림의 일부일 뿐이다. 이븐 알-아라비 역시 하나님 즉, 신의 본질을 전혀 다른 것으로 보았다. 아무도 표현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보고 있다. 정통 이슬람이 지적하듯이, 그의 창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을 알수도 없고, 그를 기술할 수도 없다. 그는 그의 창조물 어느 것과도 다른 분이시다. 그러나 이슬람 학자들이 ‘하나님은 어떤 어떤 분이 아니시다’라는 진술을 넘어서는 더 나아갈 수 없도록 스스로 제한한 한편, 이븐 알-아라비의 플라톤주의는 그가 그 딜레마를 넘어설 수 있도록 도왔다. 창조는 저편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즉, 신적 존재[5]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신과 창조된 세계 사이에는 일련의 신의 자기 계시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계시는 플라톤주의에서 말하듯 일련의 발산[6], 즉 존재의 확장이라기 보다는 일련의 신의 현현이다. 즉, 신의 본질의 어떤 부분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이 깊이 생각하고 신으로써 숭배하는 것은 신의 본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의 이미지대로 창조된 것들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신적 존재의 일면이다. 그것이 바로 신의 이름들이다. 이런 식으로 이븐 알-아라비는 정통 이슬람내에 머물면서 그 한계를 뛰어 넘어 우리가 하나님을 알수는 없지만 그의 이름들을 통해서 그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역설적으로 보는 것의 바탕위에 신에 대한 신비주의적 경험이 실재가 되는 수피즘의 이론이 서 있는 것이다.

이븐 알-아라비는 실재를 일반적인 사물에 자리잡고 있는 것들로 그리고 있으며, 신과 그의 창조물 사이에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본다. 그가 이 구조를 그리고 있는 방법이 모든 자세한 사항들에 있어서 항상 일관적이지는 않으며, 반드시 그럴 필요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의 원함은 ‘이름들’을 발산해 냈고, 각 이름은 서로 다른 독특한 신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름들’ 역시 알려지기를 원하고 있고, 이 원함은 더 나아가 일련의 사물들 즉, 존재하는 단계에 있는 것들에 신의 현현으로 나타난다. 이 이름들에 더하여, 이 사물들은 영들의 천사와도 같은 세계, 각 영혼의 세계, 아이디어와, 이미지와,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물질 세계에 속한 세계이다.[7]

이러한 접근은 신의 본질과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 세계 사이에 여전히 거리가 존재하는 이점이 있다.(수피즘은 범신론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확실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역자주) 또한 플라톤주의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구별 즉, 영과 혼은 물질 세계보다 월등하다는 구별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또한, 꿈과 정신 이미지의 심리 세계를 설명해 준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들은 아이디어의 세계에서 실재로 존재한다. 그래서 신비주의자들의 비전은 실재이고 단순한 공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한 비전을 추구하는 것은 신의 본질에 있는 우리의 진정한 기원origin으로 가까이가고, 그곳으로 돌아가는 과정의 일부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비주의의 핵심을 보게 된다. 신비주의자의 목적은 창조의 깊이와 높이를 헤아려보는 것이고, 그 모든 것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과 목표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있는 하디스 (H}adīth al-Qudsī)로 돌아가서 시작했다. 신이 알려지기를 원한다면, 신은 어떻게 그것을 이룰 것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좀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긴 했지만, 신은 그의 제자들이 신에 대해 알고있는 지식만큼 스스로를 안다. 제자들은 신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수 없다: 신의 본질은 알려지지 않은 채 있다. 사실 그런 지식은 심지어 가장 위대한 신비주의자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각각은 그가 창조된 신의 이름에 계시된 신의 측면에 대해서만큼은 알고 있다.

이는 모든 것이 신이라는 범신론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븐 알-아라비는 신비주의 경험을 서술할 때 창조자와 창조물, 즉 주인 the Lord 과 그의 종 his vassal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항상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일반적인 친교, 즉 신과 그의 제자 disciple 사이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창조물에 합당한 역할이 있고, 신에 합당한 역할이 있다. 제자는 신의 자기 계시를 통해서 신을 알고, 신은 제자가 신의 그 자기 계시에 반응하는 것을 통해 스스로를 안다. 이는 존재론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주인과 그의 종 사이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게 된다.

이는 매우 중요한데 우리가 Corbin이 ‘신이 현현하는 기도의 방법 Method of Theophanic Prayer’[8]이라는 장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는 신비주의적 헌신/기도(devotion)의 정점에 이를 때 더욱 그러하다. 이 기도를 수라 화타하 장에 기초하여 반응하는 하나의 기도문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제자는 기도하고 신은 반응한다; 각각은 상대방의 기도에 반응하는 것이다. 또한 각각은 리더와 응답자의 역할을 취한다. 창조 질서와 반대되는 방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븐 알-아라비는 ‘기도하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 이라는 두 가지 뜻을 모두 가지고 있는 ‘알-무쌀리’라는 단어의 뜻을 깊이 음미하고서 이 놀라운 결과에 이른다.[9]

이는 우리의 존재가 신과 합체된다는 뜻은 아니다. 신과 우리의 존재는 별개의 것이다. 그러나 신의 역할과 제자의 역할이 혼동될 수는 있다. 즉, 제자가 신의 역할을 취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만큼이나, 신도 제자의 역할을 취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Corbin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처럼 신이 무살리 ‘기도하는 사람’ 과 ‘마지막에 오는’ 자가 될 때, 신은 ‘마지막’ 즉 ‘계시된 분’ 이라는 그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그 자신을 나타내 보인다. 신의 현현은 그가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그 신실한 자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즉, 그 신실한 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신이 자신을 나타내 보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 역자주) ‘우리를 향해 기도하는 신’이란 다시 말해 우리 앞에 현현한 신이다… 그 신은 그 신실한 자가 묵상이나 깊은 숙고를 통해서든지, 그가 확신하고 굳게 붙드는 특별한 신앙에 의해서 자기 마음에 만들어낸 신이다. 따라서 그 신은 ‘신자의 마음에 만들어내진 신’ 즉, 결정하고, 수용자의 역량에 따라 개별화된 신이며, 그의 혼은 신이 현현한 것이고, 그는 이런 저런 이름을 가질 수 있다. (이슬람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비, 공의, 능력 등등의 99가지로 정하고 있다 – 역자주). 이런 의미에서 ‘우리를 향해 기도하는 신’은 ‘우리의 존재’ 이후의 것이다. 즉, 우리의 존재 다음에 오는 것이고, 우리의 존재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 신은 우리의 신의 현현이 신으로 확립한 신이다. 왜냐하면 숭배받는 자는 숭배하는 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고, 숭배받는 자는 숭배하는 자에게 자신을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마지막’이고, ‘계시된 분’이다. 이렇게 볼 때 ‘처음’ 이라는 신의 이름과, ‘숨겨진 자’라는 신의 이름은 신실하게 신을 좇는 사람들에게도 적당한 이름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는 자’가 될 때, ‘마지막’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도 어울리는 이름이다. 우리는 신의 다음에 온 자들이고, 신 이후의 사람들이다. 이 경우에 우리는 신이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사람들이 된다. (왜냐하면 ‘숨겨진 보물’인 신은 알려지기를 원하고, 사물 안에 그 자신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신은 우리보다 속행하는 신이고, ‘처음’ 이다. 그러나 이 모든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숨겨진 보물’(즉, 신 – 역자주)이 신비의 세계로부터 무한한 신의 이름들의 다양성 안에서 여러 믿음의 형태로 실재하는 존재들에게 나타내 보이는 그것들이다. 그 분은 숨겨진 분이고, 계시된 분이고, 처음이고, 마지막이다.[10]

이런 의미에서 각각은 창조자가 되고, 창조물이 된다. 각각은 창조하고, 신의 현현의 차원에서 이해된다. 종은 그 자신의 이미지 안에 주님 즉, 신앙의 신, 그 자신의 개인적인 주를 창조하고, 이는 바꾸어 말하면, 신이 그를 창조했던 바로 그 형태이다. 이는 신의 형태를 실재화하는 것이고 따라서, 신은 제자 안에서 그리고 제가가 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 안에서 신 스스로를 알 수 있다.

위에서 인용한 이븐 알-아라비의 글은 그가 ‘신의 현현으로서의 창조’에서 그가 의미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중요한 것은 창조된 형태가 아니라, 창조는 신의 본질의 계시이고, 그 계시 안에서 신의 본질은 스스로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식으로 신은 그의 목적을 이루어 낸다. 즉, 제자를 통해서 그 자신을 알고, 창조의 싸이클을 완성시킨다. 즉, 신은 그가 제자 안에서 그리고 제자를 통해서 그 자신을 안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이것이 모든 신비주의 경험의 목적이고 목표가 된다. 즉, 유일한 신적 존재에 대한 진정한 숭배로 표현되는 그의 창조물을 향한 신의 목적(objective)을 이해하는 것이 목표(goal)요 목적(purpose)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수피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까? 나는 할 말이 많다고 생각한다. 나는 최근들어 Tom Wright의 책 ‘희망에 놀라다’를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창조의 물질적인 상태를 다시 강조하고 부활후에 유사하지만 변형된 물질의 존재에 대해 말한다. 많은 부분에서 그는 서구 기독교가 플라톤의 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는 것에 비판을 가한다. 서구 기독교는 미래에 우리는 육체를 가지지 않은 존재가 될 것이고, 우리의 존재의 본질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혼’이라고 말했던 것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직 우리의 혼만이 죽음에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Wright는 신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는 신약의 많은 부분에서 구속의 의미와 중요성이 ‘육체의 구속’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고 보고(로마서 8:23), 또한, 육체의 부활을 새로운 삶으로 보고 있다고 본다(에베소서 4:30). 여기서 부활은 물론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어떤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의 현재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다름아닌 육체인 것이다. 계시의 마지막 드라마에서 우리는 하늘로 들려올라가지 않고, 오히려 하늘이 내려와서 하나님의 임재가 사람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계시록21장을 보라.) 그리스도인들이 공중에서 그들의 주님과 만나는 장면은 단지 환영 인사일 뿐이다. 예수는 이 땅으로 다시 오고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오신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 여기서 Wrights의 주장을 다시 되풀이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나는 그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잘 지적하고 있다고 본다.

하나님은 4차원의 시공연속체인 이 세상과,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 언제가 없애버리려고 그러신 것이 아니라, 아마도 그 분의 목적은 더욱 풍성한 결실이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 목적의 일부는 땅에 사람이 살게 하는 것이었고, 그 사람들은 창조의 과정에서 그와 함께 할 사람들이었다. 진실로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은 알려지기를 원하시는 분이고 또한 동시에 알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가 창조물과 맺으시는 관계는 스스로가 알려지기 원해서 생겨난 단순한 부산물이 아니다. 우리는 사실 창조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는 이븐 알-아라비가 ‘목표’로 세워놓은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븐 알-아라비에게 있어서 종말은 미래에 일어날 일련의 사건들 중에 하나가 아니다. 그에게 그것은 ‘항상 존재하는, 신이 미리 짜 놓은 구조이고 상황이며, ‘이 낮은 세상’에서 인간의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고 궁극적인 영적 운명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삶을 인식해 본다면 그것은 인간이 깨달음을 얻어 그 자신의 원초적인 실재로 온전히 돌아가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11]

다시 말해서 그가 제시하고 있는 것은 영원한 돌아감에 대한 신화의 한 종류에 불과한 것이다. 한 개인으로서 우리의 목적은 우리의 주님과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신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것은 그분에게로 되돌아 간다.”(꾸란11) 그것을 안다면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분에게 돌아가라. 이를 피할 길이 없으며 반드시 그 분에게로 돌아가야만 한다.’[12] 이 돌아감은 존재론적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헌신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안에 있는 우리의 목적을 완성한다. 요즘 말로 하자면, 우리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븐 알-아라비에 의하면 영적 단계에 높이 올라간 수피들에게는 죽음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들은 이미 영원에서 궁극적으로 이루게 될 신과의 합일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꾸란이 부활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오직 이 삶에서 아직 신의 역량에 미치지 못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무함마드와 연계되거나 혹은 그들이 무슨 신을 섬겼던 그 신과 연계되는 것을 통해 보상을 받게 된다. 이는 낙원이라고 불리는 ‘장소’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의 육체를 통해 그들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에 익숙한 자들에게 얼마만큼 그것이 끌리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 든다. 이븐 알-아라비는 이 문제를 하킴 알-티르미디의 일흔 한번째 질문인 ‘모든 개인이 그의 주님과 함께 나누는 것은 그가 어느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고, 신앙의 계열과, 그 차이, 그 적고 많음 가운데에서 그가 무엇을 믿느냐에 달려있다.’[13]에 대한 응답에서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일 뿐이고, 또 그렇게 남을 것이다.


3 아름다움과 불완전함 beauty and brokenness

이븐 알-아라비가 보는 하나님은 아름다운신 분이고, 아름다움 가운데 계시된다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중요한 영적 일면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al-futūh}āt al-makkīyah 에서 Corbin이 철학적 시라고 표현했던 그 부분일 것이다.[14] 열렬한 소망의 설명자 the Interpreter of Ardent Desires 라고 제목이 붙은 이 시는 이븐 알-아라비가 메카에 머무는 동안 환영을 받았던 집 주인 자히르 이븐 루스탐의 딸인 니잠에게 느꼈던 감정을 반영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시는 단순한 사랑의 시인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고 당시의 사람들 중에도 그렇게 본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 이븐 알-아라비가 이 시의 구절들에 대해 쓴 주석에서 그는 그것을 하나님을 향한 그의 소망의 기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그 소녀에 대해 느꼈던 자연스러운 감정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녀는 그가 영적 탐색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이 되었다. 코빈은 신비주의에서 사랑이란 일반적으로 느끼는 자연적인 사랑과 영적 사랑의 합일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 소녀의 역할을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베아트리체에 비교한다.[15] 육체적인 갈망의 대상이 신을 향한 문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븐 알-아라비는 Fas}ūs} al-H}ikam의 마지막 장에서 이를 확실히 하고 있다: “신비주의자는 여성의 이미지를 통해 가장 고차원적인 신의 비전을 얻게 된다. 창조된 여성‘Creative Feminine’ 은 창조물로서 신의 가장 고차원적인 표현 즉, 창조적인 신성 creative divinity 을 숙고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16]

이러한 사고는 기독교 수도자들을 분개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에 깜짝 놀라서 외떨어진 사막의 암자로 달려가는 수도자들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영적인 사랑과 일반적인 사랑 사이의 조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성경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의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The Fas}ūs} al-H}ikam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모든 것에서 선한 것, 본질적으로 오직 선한 것만을 사랑하도록 통찰력을 주신다.’[17]고 말한다. 하지만 기독교적 시각에서도 이것이 맞는 말일까? 창조가 오직 선하고 오직 아름다운 것이기만 할까? 이 문제는 우리가 악과 불완전한 것의 기원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그가 창조하신 물질적인 것들이 ‘좋았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불완전한 것의 기원은 영적인 것, 사단의 반항에서 찾아야 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가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선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악한 영이 패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이슬람이 성경이 의미하는 창조의 개념을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 과거의 어떤 때에 어떤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 이슬람은 ‘타락’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현존하는 것들의 불완전한 모습을 설명할 수가 없다. 보통 이슬람은 이러한 불완전함을 부주의함 혹은 무지의 탓으로 돌린다. 이븐 알-아라비는 플라톤적 사고방식에 기인하여 그러한 불완전함을 신적 존재에서 멀어졌기에 생기는 일로 보았다. 비록 이븐 알-아라비가 사탄의 존재를 인정하고, 특히 이슬람 법학자들인 울라마 ulamā’와 관련하여 사탄의 계략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기는 하지만,[18] 단순한 천사의 활동들이 신의 목적에 어떤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이 보이지는 않는다. 결국에는 저절로 해결될 문제들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불완전함의 근원이 물질적 세계에 있지 않기 때문에, ‘천국’을 다시 얻기 위해서 궂이 창조된 상태를 없애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곳은 현실에서 유리된 채 ‘천국’이라고 불리는 어떤 곳, 신이 사실 우리에게 뜻했던 어떤 영적 존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현재 세계를 다시 정비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Tom Wright 의 의견이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한다. 땅으로 내려온 하늘, 사람이 있는 곳(땅)에 하나님도 계시게(하늘) 되는 그런 식으로 땅으로 내려온 하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매우 물질적인 것이다. 이 경우에 하나님의 목적안에서 우리가 할 일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 그러한 현실적인 새로와짐이 이루어지도록 일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어떤 영적인 상태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구속을 위한 우리의 활동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것을 바로 잡는 것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많은 수피 신비주의자들이 그러한 개념을 놓치고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증거는 Tom Wright 가 여러번 강조하듯이, 우리 미래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에 있다.

어떤 면에서 이 글은 밑그림에 불과하다. 이븐 알-아라비의 저술과 같이 너무나 방대한 글을 평하고, 다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단지 그가 다룬 주제들을 더 늘려놓았을 뿐, 영어로 된 그의 작품의 적은 양도 다 소화해내지 못했다. 다만 그의 저술이 제시하는 논의점들을 다루기 시작했을 뿐이다. 이븐 알-아라비의 창조에 대한 관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저술의 아름다움이나 그의 사고의 깊이에 감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아름다움과 깊이가 진정한 지식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참고서적

Titus Burckhardt, The Wisdom of the Prophets (Beshara Publications,
1975). An English translation, by Angela Culme-Seymour, of Burkhardt’s
French translation of some sections of Ibn al-Arabī’s fas}ūs} alh}
ikam.
Henry Corbin, Alone with the Alone: Creative Imagination of the Sūfism
of Ibn ‛Arabī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1997). This is based on
lectures originally given in French in 1955 and 1956.

Michael Chodkiewicz, The Meccan Revelations, Two volumes originally
published by Rothko Chapel, 1988 and reprinted by Pir Press in 2002 and
2004. These are translations by William Chittick, James Morris, Cyrille
Chodkiewicz and Denis Gil of selected passages. The second volume
contains a translation of Michael Chodkiewicz’s introduction to the
French translation of al-Futūh,āt al-Makkiyya.

Michael Chodkiewicz, Seal of the Saints: Prophethood and Sainthood in
the Doctrine of Ibn ‛Arabī, English translation of the French Original by
the Islamic Texts Society (Cambridge, 1993).

Tom Wright, Surprised by Hope (SPCK, 2007).

[1] 예를 들어 Ah}mad Sirhindi는 분명하게 이븐 알-아라비의 ‘존재 Being’ 개념을 거부한다. 참고. Muhammad Abdul Haq Ansari, Sufism and Shari‛ah (Leicester: Islamic Foundation, 1986). Sirhindi는 wah}dah al-wajūd 라는 용어를 문제 삼은 것 같다. 하지만 이븐 알-아라비 자신은 그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Ibn Taymīya (d 728/1328) 는 대대적으로 성자 숭배를 배척하였는데 이는 이븐 알-아라비의 성자 개념 sainthood에 대한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오늘날까지 개혁운동이라고 할만한 많은 운동들의 특징이 되고 있다. 참조. Michael Chodkiewicz, The Meccan Revelations (Pir Press, 1988, 2002 and 2004), pp. 8ff.

[2] al-Futū}hāt al-Makkiyyah는 보통 ‘메카에서 받은 계시 The Meccan Revelations’로 번역되는데 종종 다른 번역이 제시되기도 한다. Corbin은 Jāmī의 영향을 받아 ‘메카에서 영적으로 얻게 된 것 The Spiritual Conquests of Mecca’이라고 번역한다. 참고. Henry Corbin, Alone with the Alone: Creative Imagination of the Sūfism of Ibn ‛Arabī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 199), p. 357
footnote 1.

[3] Ibn al-‛Arabī, al-futūh}āt al-makkiyya: III:101 cited Meccan Revelations II:6, 또한 이는 이러한 종류의 유일한 진술이 아니다. 사실 이븐 알-아라비는 그 자신의 저술의 무질서한 순서를 꾸란에 비유한다. 꾸란의 내용은 계시될 때마다 그 의미가 통하든 통하지 않든 지정된 장소에 끼워 넣도록 되어 있었다. 순서적으로는 좀 맞지 않을 수 있지만, 더 깊은 세계로 이끌 수도 있을 것이다. (첫 자료는 1329AH/1911AD에 발간된 네 권의 아랍어로된 카이로 텍스트에서 따온 것이고, 두 번째 자료는 Chodkiewicz의 두 권의 번역 및 주석서에서 따온 것이다.)

[4] Corbin, Alone with the Alone, p. 114. H}adīth Qudsī는 무함마드에게서 온 전통으로,
무함마드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학자들은 이 하디스가 믿을 만한 것인지를 놓고 논쟁의 벌이기도 하는데, 이는 다른 일반 하디스 모음에서는 나오지 않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피들은 이 구절을 매우 자주 인용하기 때문에 그 진실성 여부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5] 여기서 논의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븐 알-아라비가 신의 존재를 어떻게 나누고 있는지를 말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븐 알-아라비는 신의 존재를 필연적인 존재와, 잠재적인 존재, 그리고 존재가 불가능한 존재로 나누었다. 유일하게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존재는 신 그 자신으로서 신의 본질이며, 존재가 불가능한 존재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잠재적인 존재는 바로 창조된 세계로써, 이는 하나님의 한 분의 원함과 활동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 덧붙여야 할 것은, 이븐 알-아라비는 계속되는 창조를 믿었다는 것이다. 전 우주는 계속해서 순간 순간 하나님의 의지와 원함에 의해 창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순간과 다음 순간 사이에 연속성이 없으며, 잠재적으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혹은 한 순간에서 다른 순간이로 순간 이동이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이는 꿈과, 비전과, 경험의 영역에 있어서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을 수 있게 하였다.

[6] 이븐 알-아라비는 아랍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전문 용어인, 발산 emanate 이라는 의미의 Fayyad 혹은 sadar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기피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계시라는 의미인 tajallī 를 더 선호한다.

[7] Corbin, Alone with the Alone, p. 224를 보라. 메카에서 받은 계시에서 이븐 알-아라비는 신의 단계를 포함하는 다섯가지 존재의 단계를 말한다. Chodkiewicz, The Meccan Revelations I, p. 128ff을 보라.

[8] Corbin, Alone with the Alone, p. 246.

[9] 모호성은 신비주의에서 늘 있기 마련인 것 같다. 친구 라는 뜻의 왈리 walī 라는 용어 차제가 모호하다. 꾸란 45:19에서는 신의 이름을 뜻하기도 하고, 신비주의자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유사 용어를 찾아보려면 Michael Chodkiewicz, Seal of the Saints: Prophethood and Sainthood in the Doctrine of Ibn ‛Arabī (Cambridge, 1993), pp. 21ff을 보라.

[10] Corbin, Alone with the Alone, pp. 265ff.
[11] James Morris in Meccan Revelations I, p. 94.
[12] Ibn al-‛Arabī, al-futūh}āt al-makkiyyah: II, p. 86 lines 19-21, translation in Meccan Revelations I, p. 124.
[13] Ibn al-‛Arabī, al-futūh}āt al-makkiyyah: III:223 from lines 8-10, translation in Meccan Revelations I, p. 105.
[14] Corbin, Alone with the Alone, pp. 136ff.
[15] 위의 책, p. 52. Chodkiewicz는 Miguel Asin Palacios가 그의 논문에서 단테가 이븐 알-아라비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부분을 미심쩍게 생각한다. 코빈은 그 논문에 동의하지만, 그 관계는 현상학적일 뿐 ‘실제적’으로 빌려온 것은 없다고 본다. 코빈의 아름다운 문구를 읽을 때는 좀 조심하는 것이 좋다. 무엇이 이븐 알-아라비가 하는 말인지, 아니면 코빈이 이븐 알-아라비에 근거한 추론을 말하는 것인지가 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가 수피들에 대해 Fedeli d’amore 라는 용어를 계속해서 사용할 때 좀 혼란스럽다. 그 용어는 단테와 그의 친구들이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6] Corbin, Alone with the Alone, p. 159 Fas}ūs} al-H}ikma I, p. 217 에서 인용. Titus Burckhardt 에 있는 마지막 장의 번역의 일부인 ‘선지자들의 지혜’를 보라. (Beshara Publications, 1975), pp. 116ff, 거기에서 이븐 알-아라비는 무함마드의 향수와, 여자, 기도에 대한 사랑에 대해 말한다. 코빈이 말하는 창조된 여성 Creative Feminine’ 은 창조에 대한 또 다른 면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이 면에 있어서 코빈은 칼 융 Carl Jung 의 저술에서 지나치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칼 융의 정신 Psyche 에 대한 개념은 요즘에는 다소 구시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7] Burkhardt, Wisdom of the Prophets, p. 126.
[18] Ibn al-‛Arabī, al-futūh}āt al-makkiyya: III:67-71, in Meccan Revelations II:77ff.

hklee 시간: 오전 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