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도 성폭력 신부에 천주교 솜방망이 처벌 논란
중앙일보
입력 2018.02.25
천주교 성폭력 신부, 사제복 벗을까 아프리카 선교지에서 한국인 여성 신도를 대상으로 수차례에 걸쳐 성폭력을 행사한 천주교 수원교구 소속의 한 모 신부에 대한 징계 수위를 놓고 ‘솜방망이 처벌’이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에 불거진 '미투 운동' 현장에서 한 시민이 종이에 성폭력 반대 글을 적어 시위하고 있다. [중앙포토]
수원교구는 23일 한 모 신부의 주임신부직을 박탈하고, 미사 집전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정지시켰다. 25일에는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의 명의로 ‘수원교구민에게 보내는 교구장 특별 사목 서한’을 발표했다.
이 주교는 서한에서 “교구 사제의 성추문으로 인한 언론보도를 접하고, 수원교구와 한국천주교회 그리고 많은 국민들이 큰 충격 속에 휩싸여 있다”고 운을 뗀 뒤 “그동안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온 피해 자매님과 가족들 그리고 교구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라고 밝혔다.
이어서 이 주교는 “여성의 존엄과 하느님께서 선사하신 고귀한 여성의 품위를 파괴하는 이러한 그릇된 행위는 교회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며 “여성 인권과 품위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고, 그에 걸맞은 합당한 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하며, 모든 사제들이 이 교육에 의무적으로 참여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제를 대상으로 한 일종의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하겠다는 말이다.
한 모 신부가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돌아와 주임신부로 일했던 수원교구의 성당. 최모란 기자
천주교는 철저한 교구 중심 체제다. 교구의 일에 대해서는 교구장이 전권을 행사한다. 추기경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담당하는 교구가 아닌 타 교구의 일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주교의 서한 어디에도 징계위원회를 연다거나 가해자인 한 모 신부의 사제직 박탈 등 추가 징계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다. 또 피해자 김 모씨가 요구한 교구 내 성폭력 피해 전수 조사에 대해서도 아무런 답을 내놓지 않았다. 23일 이후 천주교 수원교구의 인터넷 홈페이지는 의견을 개진하는 게시판 기능이 아예 폐쇄된 상태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것은 2011년 11월18일이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고(故) 이태석 신부가 자신의 암 투병 와중에도 선교의 열정을 불사른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신부의 후임으로 부임한 한 모 신부는 한밤중에 선교 봉사 활동을 온 한국인 여대생 신자의 방문 열쇠를 강제로 열고 들어가 성폭력을 행사했다.
'미투 운동'의 일환으로 한 여성이 꽃을 들고서 성폭력 반대 운동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튿날 그 사실을 선교지에 있던 후배 신부들에게 말했는데도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동료 신부들에 의해서도 성폭력 사건에 대한 묵인과 암묵적 방조가 이루어진 셈이다. 지금껏 동료 신부들 중 누구도 이에 대해 사과를 하거나 입장을 밝힌 사람은 없다.
천주교 내부에서는 “‘울지마 톤즈’로 힘겹게 쌓아 올린 천주교 해외선교의 희생과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 모 신부는 아프리카 남수단의 선교 경험을 담아 『큰 비 신부님』이란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아프리카 현지인이 남수단에 오랫동안 가뭄이 들었는데 한 모 신부가 부임하자 큰 비가 내렸다는 말을 듣고 책 제목을 ‘큰 비 신부님’이라고 정했다고 한다.
고(故) 이태석 신부가 아프리카 남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고 있다. 암투병 와중에도 헌신적 삶을 살았던 이 신부의 노고가 선교지 수단에서 한 모 신부가 저지른 성폭력으로 인해 타격을 받고 있다. [중앙포토]
===
한 모 신부는 정의구현사제단 회원이다. 운영위원회에서 직무를 맡을 만큼 핵심 멤버다. 성폭력 사건이 보도되자 정의구현사제단에서 자진 탈퇴했다.
성범죄의 형법상 공소시효는 10년이다. 한 모 신부의 경우 아직 공소시효가 남아 있다.‘피해자가 고소 등 처벌 의사를 표현해야만 성범죄를 처벌할 수 있다’는 성범죄 친고죄 조항은 2013년 6월에 폐지됐다. 그 이전에 발생한 성범죄 사건은 피해자가 고소를 해야만 처벌이 가능하지만, 그 이후에 발생한 사건은 고소 여부와 상관없이 검찰 수사와 처벌이 가능하다. 그런데 상습적인 성범죄는 2013년 6월 이전이라 하더라도 친고죄 적용을 받지 않는다. 한 모 신부는 2011년 11월부터 이듬해 피해자가 귀국하기 전까지 11개월 동안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수차례에 걸쳐 상습적 성폭력을 행사했다.
아프리카 선교에서 돌아온 한 모 신부가 최근까지 주임신부로 일했던 천주교 수원교구의 성당. 최모란 기자천주교 수원교구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성폭력 가해자인 한 모 신부의 사제직을 박탈할지, 아니면 주임신부직만 내려놓는 선에서 ‘솜방망이 처벌’에 그칠지 주목된다.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