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목사 at 그소망교회, Studied 신학 at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Studied 사회학 at 고려대학교
그리스도인의 부활이 미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과거에 이미 부활했다. 아니 역사상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유일한데 어떻게 우리가 부활했다는 건가? 더구나 우리는 죽지도 않았는데 부활은 무슨 부활? 그런데 바울은 골 3:3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죽었고...”, 여기서 '죽었다'가 과거시제다(정확히는 아오리스트). NIV 영어성경에도 ‘you died’라고 되어 있다. 우리가 장례식도 치른 적이 없는데 언제 죽었다는 걸까? 골 2:1에서 바울은 “너희가 세례받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되었다”고 했다. 단지 죽은 게 아니라 장사되어 이미 땅에 묻혔다는 것이다(buried)’. 세례 함부로 받을 게 아니다. 세례는 내가 죽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 세례받아 죽었다는 우리는 왜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가? 바울은 골 3:1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 우리가 세례받을 때 죽어서 땅에 묻혔지곧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것이다. 만,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부활의 몸으로 살고 있다(“You have been raised with the Messiah”- NIV, 현재완료).
물론 여기서 우리의 죽음과 부활은 모두 상징이다. 즉, 앞으로 우리가 죽을 것도 실제이고 마지막 때 부활할 것도 실제이지만, 우리는 지금 미래의 부활의 삶을 상징적으로 살고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미래의 실제적 부활보다 현재의 상징적 부활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바울도 우리가 장차 마지막 때 부활 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보다, 지금 어떻게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늘 초점을 맞춘다. 이는 우리가 마지막 때에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완성될 것을 믿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나라가 이미 현실 속에 이루어진 줄로 믿고(상징) 오늘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실제로 부활한 것이 아니지만, 실제로 부활한 것처럼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 예수님처럼 벽을 뚫고 지나가라는 게 아니다. 바울은 ‘위의 것’을 찾으라고 말한다(골 3:1a). 위의 것? 그런데 2절에는 ‘땅의 것’이 나온다. 그러면 ‘땅의 것’은 또 무엇인가? 바울은 골로새서 3장 5절부터 4장 6절에 걸쳐, ‘위의 것’과 ‘땅의 것’의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다. 가령, ‘위의 것’은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서, 사랑, 평강, 말씀, 감사, 찬양 등이고(12-17), ‘땅의 것’은 우상숭배로 대표되는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등이다(5).
그러나 무엇이 위의 것이고 무엇이 땅의 것인지 구분하는 목록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또 그것이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때로는 ‘땅의 것’인 ‘거짓말’이 ‘위의 것’이 될 수도 있다. 홀로코스트 당시 유대인의 은신처를 묻는 나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땅의 것'이라고 해야 할까? 또 나치처럼 불의한 권력에 분노하지 않고 '감사'한다면 그 감사는 오히려 '땅의 것'이 되지 않겠나? 따라서 위의 것과 땅의 것의 문자적 목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우리가 위의 것을 찾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가? 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골 3:1b).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저 높고 높은 하늘 위 어딘가에 하나님 보좌가 있고, 바로 그 옆에 예수님이 앉아 계신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나라를 받아, 당신이 친히 그 나라를 통치하신다는 그림 언어다. 다른 말로 하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왜 위의 것을 찾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아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시대, 즉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기 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 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위의 것을 찾아야지, 땅의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 나라는 우리가 죽은 뒤에나 들어가는 저세상의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받고 예수를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으로써 이미 그 나라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이미 부활의 몸을 입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는 우리의 몰골이 왜 이 모양일까? 아직은 모든 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골 3:3). 즉 세례를 통해 과거의 우리가 죽었고, 새로운 부활의 새 생명의 몸을 상징적으로 입기는 했지만, 그 실체는 아직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작은 씨앗 안에 큰 나무가 감추어져 있는 것과 같다. 예수님도 겨자씨의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다. 작은 씨앗의 형태만 보고 우리가 큰 나무의 실체를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다(그러나 다들 부활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감추어진 비밀의 실체가 드러나는 때는 언제일까? 우리 생명이신 예수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 그때 우리가 지금 상징으로 입고 있었던 우리의 부활의 몸이 온전히 드러날 것이다(골 3:4). 그날을 바라보며 현재를 고난을 이겨내는 우리는, “나중에 그때가 되면...”이 아니라, 바로 지금부터, 이전 시대에 속한 땅의 것이 아닌 새 시대, 새로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위의 것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이 땅에 하나님 정의를 세우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부활의 새로운 창조의 삶을 살아가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