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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의 창] / 최현민 수녀
발행일 : 2015-01-04 [제2926호, 23면]
최근 들어 행복에 대한 담론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삶의 여유가 더 생기면서 행복에 대한 관심도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일까? 행복은 다분히 주관적이라 논하기가 쉽지 않다. 이렇듯 개인의 행복도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데, 국가별로 행복을 비교한다는 건 어불성설인 면도 있지만, OECD 주요국의 행복지수 비교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7위라는 하위권에 머물고 있음이 드러났다.(2013년기준)
전보다 경제적으로 더 풍요로워졌지만 행복지수는 그에 못 미친다는 말이다. 왜일까?
한국인의 낮은 행복감은 우리의 욕구 변인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연구가 있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 교수에 따르면 한국인의 정신세계는 혈연중심의 친족주의와 현세적 복락을 추구하는 현세 기복주의와 배상주의가 상호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앞의 두 가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면이나 배상주의는 좀 새로운 개념인 듯 싶다. 이는 현대와 같이 과열경쟁 사회에서 자신이 체험한 삶의 고난에 대해 대가를 되돌려 받기를 갈망하는 심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인의 심성에 내재된 혈연 지연 학연의 관계주의나 현세기복주의, 배상주의가 한국인이 지닌 지복의식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한국인의 지복의식이 지극히 세속적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명절인사에서의 ‘복’이 의미하는 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이 염원하는 복은 재산이나 명예, 권력과 같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행운과도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는 게 김 교수의 해석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속적 행복의 가치는 한국사회와 같이 과열된 경쟁사회, 악성 서열주의 문화 속에서는 점점 더 채워지기 어렵다. 그러기에 한국인의 행복감이 낮다고 드러난 게 아닐까?
우리 역시 그리스도교인이기 전에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한국인이 지니는 기복적 행복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행복관이 기복적 차원에만 머무른다면, 자칫 우리는 삶에 드리운 고통이나 어려움의 의미를 놓치기가 쉽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고통을 ‘신비’라 표현한다. 그만큼 고통은 우리 삶을 더 풍요롭고 의미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리라.사실 불행이나 고통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과 불행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삶에 드리운 어려움과 고통을 담담히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 그 것이야말로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는 비결이지 싶다.행복과 불행이 공존한다는 것을 우린 이미 삶을 통해 알고 있다.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도 있고,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음을….이렇듯 행복과 불행이 씨줄 날줄로 엮어져 있는 게 우리네 인생이기에 ‘인생만사(人生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지 않던가. 좋은 일이든 불행한 일이든 그 어떤 상황도 담담히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로 새해를 열고 싶다.
코헬렛이 말하듯 우리에게 다가올 그 모든 다양한 ‘때’를 있는 그대로 담담히 받아들일 마음으로 이 한해를 시작하고 싶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주어진 것 안에 하느님의 섭리가 숨어 있다고 믿으며, 그 순간들에 충실한, 그런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기를 하느님께 간절히 청해보며 2015년 을미년을 맞이한다.
최현민 수녀(씨튼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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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를 산다는 건>
하늘에 떠 있는 다양한 구름들, 나뭇가지 사이로 비추어드는 눈부신 햇살. 감나무에 달린 익어가는 감들, 오늘 아침에 눈앞에 펼쳐진 이 풍경들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아,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그래, 우리는 가끔 자연에서 태초의 그 무엇을 힐끗 보고 느낄 때가 있다.
숲은 가로누워 쉬고 있고 개울물은 급히 흐른다.
바위는 묵묵히 그렇게 서있고 비가 촉촉이 내린다.
들녘의 논밭은 기다리고
샘물이 솟는다.
바람은 잔잔히 불고
축복이 은은하게 가득하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노래한 시다.
보통 서양 철학에서는 기분이나 감정은 세계와 사물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데 방해가 된다고들 말하지만 하이데거는 인간은 늘 어떤 기분 속에 살아가지 기분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자연의 경이로움을 위 시에서처럼 읊을 수 있었던 것도 자연을 바라보며 느낀 자신의 감정 때문이리라.
성녀 힐데가르트는 자연은 우리에게 녹색생명력을 준다고 했는데 자연속에 머물다보면 이 말이 참임을 느낄 때가 있다. 나는 자연을 통해 비리디타스viriditas 곧 생명을 유지시키는 힘을 받곤 한다.
가끔씩 감성이 예민해지면 우리 주위에 자명하게 존재해온 것들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할 때가 있지 않나?
이런 경이의 기분이 들 때 종전에 보지 못했던 광채를 느끼기도 하는데 아마 이게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빛’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것들에서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은 거기에서 존재의 신비를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존재의 신비를 접하는 것은 내가 온전히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이리라.
지금 여기에 온전히 머물게 되면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게 된다. 다시 말해 존재의 실상이 지닌 경이로움에 눈뜨게 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이런 경이로움을 갖게 될 때 우리는 우울이나 허무감에서, 고독감이나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안에는 이미 허무나 고독, 무력감을 극복할 잠재적 능력이 깃들여 있음을 의미한다. 다만 그것이 잠들어 있을뿐. 그 잠들어 있는 존재의 빛이 드러나도록 내가 마음을 열기만 하면 그 빛이 나와 너를 비추게 된다.
하이데거는 지금 여기를 사는 자를 ‘현존재’라 했다. 불가에서는 이를 깨달은 자 곧 각자(覺者)라고 하고 장자는 진인(眞人)이라고 한다. 그렇다! 깨달음은 지금 여기에 눈뜨고 지금 여기에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들에서 자유로와져 여기에 마음을 다해 살 때 우리는 존재의 경이로움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런 자는 사도바울이 말한 “늘 감사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감사하며 산다는 것은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간다는 의미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