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9

알라딘: 한국 기독교 형성사

알라딘: 한국 기독교 형성사


한국 기독교 형성사   
옥성득 (지은이)새물결플러스2020-02-27
양장본768쪽

책소개

본서는 방대한 사진, 그림, 지도, 도표 등 희귀 자료를 곁들여가며 한국에 기독교(개신교)가 전파되던 당시 첫 세대 한국 기독교가 어떤 과정을 거쳐 골격을 형성했는지를 심도 있게 탐구한다. 한국 초기 기독교의 역사와 이를 통한 교훈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필독서다.

목차
머리말
감사의 글
약어표
이미지(사진, 그림, 지도 표, 도표) 목록
서론: 경쟁하는 담론들
제1장 하나님 용어 문제와 신조어 하??님의 채택
제2장 구세주 정감록 예언과 십자가 파자 풀이
제3장 성령 무교의 신령과 기독교 축귀
제4장 조상 유교 제사와 기독교 추도회
제5장 예배당 근대성과 토착성의 조화
제6장 서적 한문 문서와 한글 번역
제7장 부흥 평양의 선도와 새벽기도
결론 한국적 기독교의 토착화
참고문헌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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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세 개의 결정적인 발견으로 북미 선교사들은 한국 종교와 성에 대한 이해를 수정하게 되었다. 선교 사업의 첫 10년(1884-93년) 동안 그들은 한국인의 다층적 종교 정체성(multiple religious identity)을 발견했다. 이 다원성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은 한국 종교를 더 깊이 연구했다. 두 번째 10년(1894-1903년) 동안 그들은 한국인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단군신화에서 한국의 원시 유일신 신앙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하??님을 기독교와 기독교 항일민족주의의 하나님으로 채택했다. 일부 선교사들은 한국 샤머니즘을 심도 있게 연구했다. 세 번째 10년(1904-13년) 동안 내한 선교사들은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인의 심오한 잠재력을 깨달았다. 선교사들은 한국인이 서양인과 다르고, 한국인은 더 높은 영적·윤리적 삶을 영위할 수 없으며, 한국인은 독립 국가와 민주주의 사회를 운영할 수 없다는 기본적인 가정을 버렸다. 1904-07년에 한국 정치 지도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출현하자, 그들은 문화 제국주의에 기초한 입국 당시의 전제와 가정이 잘못되었고 왜곡되었음을 깨닫고 수정된 담론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_서론  접기

하나님에 대한 공인된 이름인 하??님은 단군신화의 삼위일체적 성격의 신화적 근거와 원시 유일신론의 역사적 근거에 입각하여 채택되었다. 한국어 용어 하??님은 중국어 용어 上帝와 일본어 용어かみ와 비교하여 볼 때 순수한 유일신 삼위일체론과 양립할 수 있는 견고한 신학적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한국교회가 삼일 신관을 가진 타종교와 대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제공했다.
한편 용어 하??님은 그 형성 과정에서 일부 부정적인 함의들을 극복하지 못했다. 하??님은 서북의 지역주의, 유교의 이성주의와 가부장주의, 무교의 혼합주의 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서북 기독교인들은 1900년대 와 1930년대 두 차례에 걸친 한 철자법 개정 때 서북 방언을 유지하기 위해 아래 아(ㆍ)를 없애는 간소화에 반대했는데, 자연히 하??님을 하나님이나 하느님으로 표기하는 안에 저항했다. 서북 기독교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채택된 하??님은 신학적 성찰보다 여론과 다수결을 따라간 면이 있었다. 초자연적 원리와 자연적 과정 사이의 상응이라는 유교의 형이상학적 개념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내재적이고 개인적인 이해를 방해했다. 하??님이 가진 가부장적인 인상은 부분적으로는 긴 수염을 가진 단군 할아버지의 이미지나 산신 초상에서 왔고, 부분적으로는 상제의 유교적 이해에서 왔다. 무교적 혼합주의는 기독교 신자들과 여성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에게 하??님은 물질적 번영이나 육체적 건강을 위한 묘약을 주는 도깨비 방망이에 불과했다. 하??님 용어의 역사에서 드러난 대중의 신학적 보수주의, 혼합주의, 가부장주의는 한국 개신교가 여전히 직면하고 있는 신학적 과제들이다.

_1장  접기
신유교가 왕조 이념으로서의 헤게모니를 상실하자, 한국에서는 네가지 종교적 메시아 사상?동학의 후천 개벽설, 개신교의 전천년왕국설, 개신교의 후천년왕국설, 일본의 신도 제국주의의 문명론?이 서로 경쟁 했다.165 수직적으로, 두 종교의 천년왕국 종말론인 미국의 세대주의와 한국의 민간 메시아 사상이 1894-1905년 전쟁기에 교회 마당에 세워진 붉은 십자기(예수기)에서 만나 통합되었다. 수평적으로는 두 개의 정치문화 이상인 기독교 후천년왕국설과 계몽 운동이 1890년대-1900년대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해 통합되면서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국가적 이상은 1905년부터 동아시아를 문명화하고 식민지화하려는 일본 제국의 동아시아주의(pan-Asianism)에 의해서 왜곡되었다. 다양한 메시아주의적 민족주의 파벌 간의 경쟁에서 정감록과 십자가의 형상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천국을 상상하고 건설하도록 하는 핵심적인 촉매제가 되었다.  접기
신학적인 측면에서, 능력 대결 과정에서 일부 한국인들은 그리스도를 영매이면서 동시에 신령인 강력한 무당으로 인식했고, 선교사와 전도부인은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라고 이해했다. 서구 기독교의 합리주의와 한국 샤머니즘의 신령 사상 간의 상호작용은 두 세계관이 종교적으로 서로 접목되는 결과를 낳았다. 20세기로 접어드는 시점에 개신교 선교회는 영혼을 위한 복음 선교와 육체를 위한 의료 선교를 통합했다. 비록 육체의 구원이 영혼 구원의 한 수단으로 인식되기는 했지만, 영혼 구원의 우선성은 육체의 구원을 포함했다. 선교회가 세운 병원과 진료소에서 의사와 간호사는 ‘위대한 의사’인 예수의 대리인으로서 신체의 치유를 통한 전인적인 구원을 위해서 노력했다. 한센병 환자 사역은 기독교가 인간을 전인적으로 접근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육체는 과학으로, 영혼은 종교로”라는 근대 서구의 이원론 체계는 이들에게 양자택일의 난제가 아니었다. 귀신들림을 믿음으로 치유한 사례들은 의료 선교사와 복음 선교사 모두에게 이런 세속적 이분법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다.

_3장  접기
상례는 전통 의례에 기독교 의례가 접목되면서 정리(??)에 따른 통상의례들은 수용했으나 비기독교적 요소는 배제했다. 상례 장소는 예배당을 추가하여 가정 입관식, 교회 출관식(장례식), 묘지 하관식 순서로 거행했다. 유교식 혹은 전통적인 상복, 상여, 상여 행렬 등은 그대로 허용했으나, 기독교를 상징하는 십자가 문양이 상여, 상복, 행렬 곳곳에 추가되었다. 행렬 중의 곡과 상여가는 찬송가로 대체했다. 묘지는 선산 매장을 인정했고 교회 묘지는 별도로 만들지 않았으나 음택 풍수는 금했다. 한식 청명 절기에 묘지 관리 차원의 성묘는 인정했으나 술과 음식을 바치고 절하는 것은 금지했다.
추도회도 조상들의 매년 기일을 인정했고, 신주 대신 정을 모시게 했으며, 유교 제사와 접한 관계에 있던 족보를 유지하게 했다.145 1주기 인 소상과 2주기인 대상때는 특별히 교인들을 가정에 초대하여 추도회를 드렸다. 가정 추도회에는 제사가 드려지던 시간과 장소, 일부 형식은 그대로 둔 채 교인들도 초청하여 찬송, 기도, 성경 읽기 등의 간단한 예배를 드리고 음식을 나누며 돌아가신 분을 추억하는 형식이 추가되었다. 또한 조상 기념의 방법으로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유지 받들기와 자선사업 기부를 강조했다. 이는 조상에 대한 의존을 그리스도 안에서 조상과의 영적 교제로 변형시키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일부 교인들은 여전히 추도회 때 믿지 않고 죽은 조상과 부모를 위한 기도를 계속했다.

_4장  접기

추천글
이 획기적인 연구는 한국 기독교의 발전을 다룬 책 중에서 가장 좋은 책이다. 옥 교수는 개신교 선교사와 한국 종교 간의 초기 만남을 추적하고, 세계 기독교 연구를 새롭고 더 깊은 방향으로 인도한다. 이 책은 필독서다. - Dana L. Robert 

이 놀라운 책을 통해 옥 교수는 내한 선교사에 대한 전형적인 이해를 초월하고, 개신교가 한국의 전통 종교와 어떻게 의미 있게 만났는지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나는 이 책을 한국 기독교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한국적 성, 전통 종교, 종교 간의 대화에 관심을 가진 학자와 학생들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 노영찬 (미국 조지 메이슨 대학교 종교학 교수) 

이 책은 지난 한 세대 동안 등장한 한국 개신교에 관한 연구 중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중요한 기여다. 옥 교수는 1세대 한국 기독교인에 대한 기존의 학문적인 담론에 도전하고, 초기 한국 개신 교인들이 문화적 만남의 과정에서 직면하는 신학과 종교적 실천의 복잡한 논쟁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스스로 발견하기 위해서 어떻게 노력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앞으로 오랫동안 한국 교회사에서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 James H. Grayson (쉐필드 대학교 명예교수) 

한국 기독교사에 대한 통찰력 있는 이 탁월한 연구서는 한국 근대사, 다문화 간 상호작용, 세계 기독교 연구에 관심을 가진 자에게 필독서다. - Joseph Tse-Hei Lee (뉴욕페이스 대학교 교수) 
“개신교와 한국 종교 문화 간의 초기 만남에 대한 역사는 문화 제국주의를 넘어 문화 교류의 관점에서 쓰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옥 교수는 그런 작업의 모델을 한국 사례에서 제시하지만, 이는 지난 150년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기독교가 획기적으로 성장한 것에 대한 역사적 관점만 이 아니라 지난 2000년간 교회사를 보는 관점에 대한 모델이기도 하다. 곧 우리가 아주 다른 상황에서 반복해서 발견하는 “수직적 초월인 기독교의 보편성 원리와 수평적 적응인 문화화 원리의 창조적 조화”가 그것이다. - John Wilson (Books & Culture 편집장) 


저자 및 역자소개
옥성득 (지은이)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에서 신학 수업을 이어나갔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신학교(신학석사)와 보스턴 대학교 신학대학원(신학박사)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현재 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임동순·임미자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 근대사와 한국 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대한성서공회사』(전 3권), 『첫 사건으로 본 초대 한국교회사』(도서출판 짓다),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새물결플러스) 등이 있고, 편역서로는 『언더우드 자료집』(전 5권), 『대한성서공회사 자료집』(전 3권), 『목판화로 대조한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생애』(새물결플러스), 『마포삼열 자료집』(전 4권, 새물결플러스)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조선예수교장로회 50주년 역사 화보>,<한국 기독교 형성사>,<마포삼열 자료집 4> … 총 14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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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통적으로 한국 초기 기독교사에 대한 연구는 서구 선교사들이 주도한 선교의 역사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본서는 책 제목이 말하듯이 영미 선교사들이 주체가 되어 한국을 대상으로 삼고 선교한 선교의 역사가 아닌, 한국인과 선교사들이 협력하여 만든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 대한 서술이다. 나아가 교회의 발달을 기술하는 교회사를 넘어 한국 종교사와 세계 기독교사의 일부인 한국 ‘기독교’ 역사의 서술을 지향한다. 또한 본서는 근대가 가진 식민성, 다층성, 혼종성을 탐구하지만, 동시에 창출된 한국 기독교의 기독교적 보편성과 한국적 독특성에 관심을 기울인다.
본서는 저자가 35년 동안 심도 있게 연구한 초기 한국 기독교사 연구의 결정판으로, 1910년까지 한국 개신교를 형성한 영국, 미국, 중국, 한국의 다양한 요소가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된 지형을 제시한다. 그가 시추해 들어가는 한국 기독교의 지층에는 태평양을 건너 전파된 영미 기독교, 황해와 만주를 통해 전래된 중국 기독교, 그리고 한국의 여러 종교들과 유기적으로 만나 형성된 한국적 기독교가 여러 층으로 쌓여 있으며, 이들을 융합시키는 촉매제가 된 혁명과 전쟁과 역병과 기근 등 시대 상황이 그 광맥을 관통하고 있다. 이 책은 개신교와 한국 종교가 만났을 때 발생한 갈등점과 접촉점을 확인하면서, 선교사와 한국 기독교인들이 만든 종교 담론과 토착화된 ‘한국 기독교’라는 오래되고 신선한 심층 지하수를 퍼 올린다.
본서는 2013년 캘빈 대학교 네이걸세계기독교연구소의 세계기독교연구시리즈 제1권으로 출판된 영문 학술서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베일러대학교출판부, 2013, 411쪽)를 저자가 직접 번역하면서, 지난 6년간 추가 연구를 통해 대폭 수정?보완한 개정판(768쪽)이다. 미국 기독교 서평지 Books and Culture의 편집장은 본서를 최우수작인 ‘올해의 책’으로 뽑았고, 선교학 잡지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 Research는 “2013년의 탁월한 선교학 저서 15권”의 한 권으로 선정했다. 탈서구 세계 기독교 시대에 맞는 한국 기독교사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연구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초기 한국 기독교의 성장, 부흥, 민족주의 운동과 달리, 현재 한국 개신교에 요구되는 타종교에 대한 유연한 태도와 담론은 별로 연구되지 않았다. 반면 한국 기독교의 저층에 살아 있는 유산을 발굴한 본서는 1세대 북미 선교사들과 한국 기독교인들이 전통 종교를 파괴한 십자군이요 문화 제국주의자였다는 고정 관념에 도전한다. 본서는 영미 기독교와 중국 기독교와 한국 종교의 삼중 통합의 조합 양상을 추적한다.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초기 내한 북미 선교사들은 엄격한 청교도형 보수주의자나 전투적 근본주의자가 아니라 온건한 복음주의자들로서, 한국 종교를 파괴하고 기독교로 대체하려던 태도를 점차 버리고 그 안에 있는 선한 요소를 수용하고 이를 기독교로 완성해 나가는 성취론적 태도를 취했다. 즉 개신교를 한국인의 영적 열망과 예언적 갈망을 성취하는 종교로 제시했다. 둘째, 초기 한국 개신교는 중국 기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이 한중 기독교 사이의 언어-신학적 연속성은 일본의 다신론적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유일신론적 민족주의 형성에 기여했다. 초기 한국 개신교의 신학의 주류(主流)는 영미의 온건한 복음주의였으며, 진보적인 중국 개신교가 저류(低流)로 흐르면서, 1910년 이후 등장한 신류(新流)인 자유주의 일본 신학과 대결했다. 셋째, 북미 복음주의와 중국 개신교는 한국 종교에 있는 접촉점을 수용하고 삼중적 융합을 이루면서, 국가 이데올로기의 지위를 상실한 유교의 대안 신종교로 자립했다.
기독교는 한 문화권에서 다른 문화권으로 번역되는 번역성과 함께 특정 종교와 문화를 변화시키는 변혁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그 문화권에 뿌리를 내리는 토착성을 가진다. 한국적 독특성과 세계적 보편성이 만나고,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창조적이 된다. 이를 성경적 이미지로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다. 1) 한 겨리의 소: 밭을 일구는 한 겨리의 소처럼 기독교는 전통 종교와 함께 멍에(마태 11:29)를 메는 동반자가 되어 한국인의 영성을 쟁기질했다. 2) 접목: 한국 종교의 대목(臺木 stock)에 기독교라는 접수(?穗 scion)가 접목(로마 11:17)되어 뿌리의 진액인 유일신론으로 살아나면서 개량 신품종인 한국 기독교가 만들어졌다.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은 뉴욕, 시카고, 내쉬빌, 토론토에서 자란 과목을 화분에 담아서 기선에 싣고 태평양을 건너 한국 땅에 이식하거나, 뉴잉글랜드에서 수확한 복음의 씨를 서울 거리에 마구 뿌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중국 한문 문화권에서 잘 적응된 앵글로색슨-중국 기독교의 나무에서 좋은 접수를 갖고 와서 한국 종교라는 대목에 접목했고, 그 결과 한국 기독교라는 좋은 나무가 성장했다. 3) 봄날의 아름다운 나무: 유교와 기독교의 상호의존적 표리관계는 밝은 봄날의 아름다운 나무와 같다. 햇빛이 있어야 나무가 무성해지지만, 나무가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전통 종교에 있는 메마른 가지는 전지를 해서 제거해야 하지만, 유교라는 나무가 있어야 봄의 광채가 반영되듯이, 유교와 기독교는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다. 4) 목걸이: 한국 개신교는 한국 종교에 흩어져 있는 보석들을 모아서 하??님이라는 유일신 황금 줄로 일이관지하여 아름다운 목걸이(창 41:42, 단 5:29, 아 4:9)를 만들어 한국인의 목에 걸어 주었다. 5) 물동이를 버린 사마리아 여인: 남편 다섯이 있던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요한복음 4장)처럼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한국인에게는 참 종교가 없었으나 기독교를 통해 메시아인 예수를 만나면서 마르지 않는 샘물을 마시게 되었다. 6) 마른 뼈들이 살아나 군대가 됨: 에스겔이 환상에서 본 계곡의 마른 뼈들처럼 생기를 잃었던 한국인의 종교성과 영적 갈망이 기독교의 거룩한 예언의 바람이 불자 살과 근육이 붙고 살아나 종말 공동체인 큰 군대(겔 37:10)가 되었다.
본서는 서론과 7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은 경쟁하는 종교 담론과 선교사들의 한국 종교 이해를 다룬다. 1부에 해당하는 1-3장은 신학(삼위일체)의 한국화 과정, 곧 신론(하나님 용어 형성을 통해 본 한국적 하나님론), 메시아론(종말론), 성령론(귀신론)을 토론한다. 4장은 1부와 2부를 이어주는 조상론(제사론)이다. 2부에 해당하는 5-7장은 교회론으로 예배당(공간론), 성서와 서적(번역론), 부흥 운동(의례론)을 분석한다. 토론하는 종교는 유교, 불교, 도교(선도), 동학(천도교), 민간 종교로서의 정감록 신앙과 풍수신앙 등이다. 서술 방법은 1) 1960년 이후 기존 해석에 대한 비판, 2) 그런 담론을 만든 여러 자료의 정리, 3) 저자의 논지를 입증하기 위해 논쟁과 토론 과정에서 생성된 1차 자료 정리, 4) 결론적으로 포용적 성취론적 해결 과정을 드러냄으로써 한국 기독교의 자기 신학화(self-theologizing)의 사례와 잠재성을 강조했다. 책에는 사진 87장, 그림 17장, 지도 5장, 표 9개, 도표 3개 등 총 121개의 이미지가 포함되어 가독성과 이해력을 높인다. 표지 그림처럼 삶이나 신앙은 순례다. 한국 기독교의 순례와 그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독교(개신교)가 한국 종교와 사회와 동행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서로를 풍성하게 만들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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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과 설교에서의 가장 기본적인 뼈대는 이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본문이 기록된 당시의 정황(context) 가운데 본문(text)은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으며, 그 메시지를 현재의 정황(context)에서 우리는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본문이 기록된 당대의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대 근동과 이스라엘의 역사와 문화, 정치, 문학 등을 연구한다. 우리 삶의 터전을 이해하고 현재의 정황에서 우리 삶에 적실하게 본문의 메시지를 적용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삶의 맥락을 분석한다. 

현재 삶의 정황을 분석할 때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자신이 속한 나라의 초기 기독교 역사일 것이다. 그 역사를 이해해야 이스라엘의 종교에서 그 나라의 종교로 어떠한 토착화의 과정을 거쳤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공상태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며, 현재에도 우리의 의식과 세계관 한가운데 여전히 우리나라 고유의 정신과 정서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초기 기독교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 아주 귀한 책이 출간되었다. 새물결플러스에서 나온 『한국 기독교 형성사』는 부제에서 드러나듯 1876년부터 1910년까지 한국의 종교와 개신교의 만남 가운데 어떠한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했는지를 말해준다.

머리말에서 저자가 밝히듯 이 책의 1장에서 3장은 삼위일체의 한국적 이해를 다룬다. 1장은 하나님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정착해갔는지, 2장은 한국인이 이해한 십자가의 이미지를 통해 발전해 나간 메시아상과 천년왕국상을 조사한다. 3장은 한국 개신교에서 샤머니즘과의 관계를 분석하고 그것의 갈등과 협상을 토론한다.

4장에서 7장은 더욱 세부적인 사건들을 다룬다. 4장은 제사 문제, 5장은 한국 교회의 예배당의 특징과 발전 과정, 6장은 한문 문서와 한글 번역, 7장은 평양의 부흥 사건을 해석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미국과 중국, 그리고 한국의 종교와 문화 가운데에서 발생한 독특한 한국 기독교의 발생과 형성 과정을 서술한다.  

이 책의 특징은 역사적 사건들의 객관적 서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다채로운 정황과 입체적인 해석을 곁들이고 있다는 데 있다. 즉 한 사건의 원인과 그 과정, 그에 따른 영향력 등을 상세하게 기술하며, 그 사건을 신학적이고 교회론적이며 정치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 다른 특징은 풍부한 원자료들을 배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에 접하지 못했던 초기 한국 기독교의 풍부한 자료들을 직접 대할 수 있다. 이는 독자들이 함께 공동 해석 작업에 동참하여 당대의 분위기와 맥락 등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초기 한국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책은 특히 초기 한국 기독교의 형성 과정에서 선교사들의 세계관과 신학의 형성과 변화의 과정을 알 수 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그릇된 정보들로 인해 그동안 잘못 이해하고 있었거나 대충 알았던 사실들에 대해 정확하게 교정할 수 있다.

우리는 풍성한 자료와 상세한 설명, 다양한 해석 등을 통해 초기 한국 기독교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이야기 곳곳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덤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얼마나 큰 수고와 노력을 했는지를 알 수 있고, 앞으로 많은 목회자와 신학생, 성도들이 그 배려 가운데 큰 도움을 받을 것 같다. 

한국에는 종교가 없다˝는 말은 한국인에게 종교라는 인식이나 개념 자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오래된 종교들이 쇠퇴해서 사람들을 사로잡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선교사들의 눈에는 종교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이 점을 의도적으로 강조했는데 이는 한국은 무종교 상황이므로 기독교 선교가 정당하다는 주장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P60

이 논쟁은 한문 용어 대 한글 용어의 대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울의 교회연합 정신을 가진 보다 포용적인 집단과 평양에 중심을 둔 개신교의 정체성을 강조하려는 ‘극단적 개신교‘ 집단 간의 갈등이었다- P136

스코트 부인은 한국 개신교의 놀라운 성장의 원인을 한국인의 내면에 자리 잡은 유일신론으로 보았다. 한국인이 그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다면 결코 일본의 물질주의나 다신교인 신도(神道)에 만족할 수 없었다. 한국인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한국의 역사와 언어와 영성에 밀착되기를 원했다. 기독교의 하나님 신앙은 일본의 군국주의와 물질주의에 맞선 한국의 민족주의와 영성주의에 연결되었다- P177

1903-08년 부흥운동이 개신교회를 휩쓸 때, 교회의 십자가와 십자기는 다양한 의미- 구속의 장소, 난민의 피난처,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요새, 선교사의 치외법권으로 보호 받는 정치적인 힘, 메시아 도래를 예견한 전통 예언의 성취, 서구 과학과 기술, 한국의 민족주의-를 지녔으며, 이들은 상호 보완적으로 공존했다- P274

서양 의학이 콜레라균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은 한국인 회심자들의 마음에 안정을 주었는데, 이는 더 이상 신령에게 벌을 받거나 질병 앞에 무기력하다고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령에 대한 두려움은 사탄 마귀에 대한 두려움으로 대체되었고, 세균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이길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P295

북미 선교사는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지만 동시에 한국의 종교문화적 환경, 특히 샤머니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선교사들이 일종의 세계관적 회심을 경험했다고 하겠다. 귀신들림 현상에 관한 선교사들의 증언은 종교 개념과 사고방식 사이의 상호작용을 집약적으로 보여주었다- P334

유교의 제사가 족벌•계급•성을 차별하는 기제로 작동했다면, 기독교의 예배는 한 하나님 앞에서 평등함을 드러내는 계급 철폐의 상징이었다.- P382

한국교회는 유교의 오륜과 수신의 법도를 기독교 윤리로 수용하고 실천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죽은 조상의 영혼 대신 살아 있는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강조했다. 죽은 조상에게 드리는 죽은 제사 대신 살아 계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산 제사‘로 불렀다. 한국교회는 부모 생전에 효도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유교도들의 박해와 반대를 다소 경감시키고 한국인의 도덕성에 호소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제사를 십계명의 제1, 제2계명 측면에서만 검토한 것이 아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의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그것은 성경에 근거한 효도의 의무였다-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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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찌모찌 2020-04-18 공감(1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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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산 기독교의 형성

1.

한국의 무교회주의자이자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겠다며 <성서조선>지를 창간하였던 김교신은 '조선산 기독교'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해외의 선교사들로부터 이식된 개신교가 아니라 조선인의 주체성이 담보되며 "김치와 된장 냄새가 나는" 기독교이다(그럼 루터의 신학에서는 독일산 맥주의 냄새가 나나?). 요는 서구의 종교인 개신교를 조선의 문화와 풍토 등에 맞춰 주체적으로 수용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1960년대에 더 강화되어 초기 개신교 선교를 "사상적 식민지적 예속"이라 부르며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거나 해방신학,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에 영향을 받아 윤성범이나 민중신학의 안병무 등으로 이어진다. 최근에도, 이만열과 덴버신학대의 정성욱도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교"가 연상되는 주장을 한다(자세한 내용은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III권 참조). 한국 고유의 토착 신학과 토착 기독교를 주장한다는 것은, 뒤집어 생각해보면, 아직까지 한국의 개신교는 서구에서 들여온 외래 종교이며 더 나아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이식된 종교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여담으로, '이식된 기독교 담론'이 과거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해방 이후 미군정에 의해 이식되었다는 과거의 인식과도 묘하게 닮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서남동/안병무 등의 민중신학과 80년대 이후 고조된 반미주의는 '한국 고유의 기독교의 결여'를 더욱 강화하였고 초기 선교사들을 "보수적(49p)", "근본주의적(49p)", "배타주의적(46p)", "오리엔탈리즘적(51p)"이라고 규정하는 데에 일조했다. 

2.

그러나 옥성득은 이만열, 민경배, 이덕주, 류대영, 박용규 등 기존의 한국 기독교사 연구가들이 초기 선교사들을 근본주의자, 보수주의자로 규정하며 초기 한국 기독교를 '선교사들의 의해 이식된 미국 기독교'로 보는 담론을 비판한다. 옥성득의 <한국 기독교 형성사>는 "미국-중국 기독교와 한국 종교 문화 속에 있던 친화적인 요소들 사이의 융합을 통한 토착적 한국 개신교의 창출사"에 관심을 두고, "성취론으로 기독교 토착화의 길을 연 온건 복음주의자"와 "1세대 한국 기독교인의 다층적인 신학과 신앙"의 역동적이며 창조적인 역사를 밝히고 이를 입체적으로 증명하려 노력한다. 특히 그 과정에서 그가 염두에 둔 것은 "미중한의 삼중 요소의 통합"으로, 조선 선교 이전에 쌓인 중국 선교 경험이 어떻게 조선 선교에 영향을 주었는지 보여준다. 

3.

그에 따르면, 분명 초기 선교사들에게 오리엔탈리즘적 요소가 발견된다. 알렌은 선교 초창기 보고서에서 "한국인들에게는 종교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록하였고, 아펜젤러는 "유교를 종교가 아닌 윤리학 체계로 분류"하며 "불교 승려는 문명의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한국은 무종교의 나라(이는 기존 종교가 사회적으로 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라는 "성급하고 피상적인 평가가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 방향을 결정했다. 초기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무종교, 혹은 그릇된 종교들의 땅에 진정한 종교를 심는 사람들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생활하는 기간과 한국에 대한 학문적 지식이 늘어나고, 한국인 성도들이 늘면서 선교사들의 평가도 바뀌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국인의 다층적 종교 정체성을 발견했다." Korean Repository의 창간, 동학농민운동, 하나님 용어 논쟁,한국인 지도자들의 성취론적 한국 종교 이해, 미국 ASV 역, 대부흥운동 등  일련의 6가지 사건들을 경험하며 선교사들은 초기에 가졌던 편견들 수정하고 한국인의 종교 전통과 기독교 신학을 조화시키기 시작했다. 이처럼 선교사들의 수정된 시각과 관점을 바탕으로 이 책의 각 장의 내용이 전개된다. 1장은 히브리어로 엘로힘, 헬라어로 데우스가 "하나님"(원래는 '나'는 아래아를 쓰지만, 불가피하게 하나님으로)으로 번역된 과정을 설명한다. 2장은 정감록 예언을 활용하여 한국인에게 십자가의 이미지를 이해시키고 메시아 신앙으로 발전시킨 과정을, 3장은 초기 선교사들이 조선 무당의 축귀 등 샤머니즘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다룬다. 1~3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한국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다룬다. 4~7장은 유교의 제사, 서양과 조선 상황이 예배당 건축 발전에 미친 영향, 성취론적 입장의 한문 전도 소책자와 양반 지식인의 회심, 길선주 등 도교적 신앙을 가졌던 인물들이 새벽기도와 부흥회와 가지는 상관관계를 분석한다.

4.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를 끌었던 주제는 유교 제사문제였다.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 선교사들도 초기에는 제사 문제에 대해 엄격한 자세를 취했다. 그 이유는 1) 죽은 영혼에 대한 제사는 우상숭배라는 점, 2) 근대 문명 개화 시세에 맞지 않다는 점, 3) 천주교 연옥교리 및 미사와의 유사성, 4) 유교 제사가 조선의 후진성의 원흉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두번째와 네번째 이유는 다분히 선교사들의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을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고, 특히 4번째 이유는 일제의 정체성론과도 유사하다. 이는 "제사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제사 금지 정책이 시행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890년대, 진보적 선교사들은 성취론의 관점으로 이러한 제사-우상숭배론을 비판하였고, 종국에는 "조상 숭배에는 적절한 공경의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예배의 뜻도 있으므로, 제사 대신 중국인의 관점의 근접하는 추도회로 드리되 제사의 장점을" 살리는 쪽으로 선교 방향이 잡혔다. 이와 거의 동시기에 일부 한국 선교사도 제사 금지 신중론의 태도를 보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지도를 받은 한국교인들이 제사 의례의 기독교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인의 다층적 종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시왕이 죽은이의 혼(魂)의 운명을 결정하며 자손의 제사와 무관하다고 믿는 한국인들의 제사는 우상숭배와 거리가 있고 정성들인 제사와 하나님의 복을 연결지어 제사가 선교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한국교회는 제사 금지 정책을 수용하면서도 이와는 다른 논리를 펼쳤다. 즉, "기독교가 유교의 약점을 보완"한다며, 한문소책자에 근거하여 "이 큰 道는 한 나라에 한정되지 않고 동서고금에 통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더 나아가 조선 유교의 天도 "전통적 하나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인격신 요소"가 유지되고 있다며 결과적으로 "만물의 근본인 하나님 예배의 회복은 유교의 완성"이라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른다. 노병선의 기독론적 조건부 보편 구원론, 길선주의 포괄주의는 위와 같은 성취론적 유교-제사 이해의 대표적 주장들이다. 결국, 선교사들은 제사가 지니는 긍정적 가치를 "기독교적으로 영구화시킬" 방안을 궁리했고, 그 결과로 '세례받은 제사'가 탄생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과 유교의 효 사상을 접목하여 효도 신학이 적극 소개되었고, "인류의 천부인 성부 하나님은 평등한 믿음 공동체, 효자의 모범이신 성자 예수님은 속죄와 화해의 사랑 공동체, 효도의 영인 성령은 거룩한 제의 공동체와 성례 공동체"라는 삼위일체적 차원에서 이해되었다. 효도신학의 배경에서, 오늘날의 기독교식 상례와 거의 유사한 절차의 상례와, 간단한 예배와 교제와 함께 조상에게 묵도하는 기독교적 추도회가 마련되었다. 

5. 

헬무트 리처드 니버는 기독교와 세속문화와의 관계를 논하면서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죄로 물든 세상의 잘못된 문화를 복음에 맞추어 그리스도교적으로 변혁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국의 제사 사례는 세상변혁적 신앙의 한 예시라고 생각한다. 선교사들은 초기에는 편견 가득한 눈으로 제사를 정죄하고 금지하여 제사와 대립하였다. 그러나 중국 선교회의 경험과 한국의 현실과 한국인의 영성을 이해하면서 그들은 입장을 온건하게 바꾸었다. 그 덕분에 제사는 효도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의 세례를 받았고, "제사의 문화적, 윤리적 전통은 유지하되 우상숭배 요소는 배제하고 대신 기독교적 요소로 대체"된 한국교회만의 기독교적 제사(추도회)가 등장할 수 있었다. 특히 한국에 맞게 제사의 대안을 고민한 목회적 모습에서는 배타주의나 문화적 제국주의의 면모 보다는 일면 포용적 면모가 돋보인다. 또한, 그 과정에서 길선주 등 한국 개신교회 초기 성도들도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여러가지를 시사한다. 이와 같은 저자의 논리는 1~7장까지 일관적이다. 기존의 연구자들이 인식하는 것과 같은 '문화배타주의적/근본주의적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이식되고 한국인은 배제된 한국 기독교'는 없다. 오히려 앞에서 본 제사의 사례, 뿐만 아니라 "하나님 용어"의 사용, 새벽기도회, 정감록 예언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한국인에게 이해시킨 사례처럼 초기 한국 기독교가 만들어져 가던 역사는 선교사들이 조선의 다층적 종교 위에서 개신교를 결합시킨 혼합주의의 역사였다. 선교사들은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전도하지 않았으며, 한국인도 수동적으로 이를 받아들이지만은 않았다. 김교신이 그토록 이야기했던 "조선산 기독교"는 이미 한국교회의 형성기부터 내재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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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우 2020-07-05 공감(3)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