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이커 350년
하워드 브린튼,마가렛 베이컨 (지은이),함석헌,퀘이커 서울모임 (옮긴이)퀘이커서울출판부2018-03-01원제 : Friends for 300 years
359쪽
책소개
퀘이커는 전 세계적으로 평화와 화해를 위한 활동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기독교 소수 종파로서, 300여 년의 역사를 통해 전쟁에 반대하고 폭력에 저항하는 사회활동으로 미국과 영국의 퀘이커 친우봉사회가 노벨평화상(1947)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책의 구성은 크게 17세기 중엽 이후 300년 동안 친우회(퀘이커)의 역사를 담은 ‘퀘이커 300년’과 20세기 중.후반부터 21세기 초엽까지를 기록한 ‘그 후 50년’으로 나뉜다.
목차
「퀘이커 350년」 한국판 서문 5
「퀘이커 300년」 한국판 서문 8
퀘이커 300년
1. 주님을 우러러보기 위해 12
2. 속의 빛의 체험 33
3. 사상으로서 속의 빛 56
4. 예배 모임 96
5. 감화 130
6. 결의에 이르기까지 152
7. 모임 공동체 178
8. 모임과 세계 214
9. 퀘이커 역사와 종교형식 256
10. 퀘이커 사상과 현대 291
그 후 50년
그 후 50년 317
부 록
「퀘이커 300년」을 지은이의 말 336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하워드 브린튼 (Howard Haines Brinton) (지은이)
미국 물리학자이면서 역사학자, 퀘이 커 사상가. 『퀘이커 300년』은 그가 남긴 많은 저서 가운데 가장 명저로 꼽히고 있다. 부인인 안나 브린 튼(Anna Brinton)과 퀘이커 명상기관인 <펜들 힐> 의 초석을 다지는 데 공헌한다.
최근작 : <퀘이커 350년>
마가렛 베이컨 (Margaret Hope Bacon) (지은이)
미국 작가, 퀘이커 역사학자. 평생 여성과 소수자를 위한 인권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필라델피아 인권상’ 등을 수상한다.
최근작 : <퀘이커 350년>
함석헌 (옮긴이)
일제하의 민족 운동가, 그리고 이후 민주주의 인권 운동가이자 종교·평화 사상가로서 끝없는 실천의 인생을 산 함석헌(咸錫憲)은 아버지 함형택(咸亨澤)과 어머니 김형도(金亨道) 사이에서 5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6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의사로서의 진로를 결정,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갈 생각으로 평양의 관립인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다. 2학년이던 1917년 8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이웃 마을에 살던 황득순(黃得順)과 결혼을 한다(슬하에 2남 5녀). 3학년이 되던 1919년에 당시 숭실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친척 형 함석은이 찾아와 평안남북도 학생 운동의 책임을 그에게 맡기고 역사적인 3·1 운동을 직접 경험하게 되면서 의사를 꿈꾸던 함석헌의 생애는 크게 바뀌게 된다.
3·1 운동 참여 이후 학교를 자퇴하게 된 함석헌은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거나 수리조합에서 조합원 일을 하며 2년 간 방황하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일단 학업을 이어 나가기 위해 경성으로 가게 된다. 신학기 시작을 놓쳐 입학할 학교를 찾지 못했던 그는 함석규 목사의 추천을 받아 1921년 정주의 오산중학교 3학년으로 입학한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유학길에 오른 함석헌은 고심 끝에 교육자로서의 진로를 정하고 이듬해 도쿄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甲組)에 입학하게 되었으나, 당시 일본식 국가주의로 무장된 직업 교사 양성을 목표로 하는 학교의 수업 과정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평생 친구가 되는 김교신(金敎臣)과 친분을 가지게 되고 이어 그가 나가고 있던 우치무라 간조의 성경 연구 모임에 같이 참여하게 되면서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김교신을 포함해 여기서 만난 조선인 친구들(유석동, 송두용, 정상훈, 양인성) 6명은 별도의 모임을 만들어 성서 연구를 지속하면서 1927년 7월 동인지 성격의 ≪성서조선(聖書朝鮮)≫을 도쿄에서 창간한다. 창간호(국판 44쪽)에 발표된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활자화된 함석헌의 첫 번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1928년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귀국 후 오산학교에 부임해 역사와 수신(修身)을 가르친다. 한편으로는 ≪성서조선≫을 발행하면서 ‘성서조선 독자회’를 열고 다수의 글을 발표하는 등 사회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지만 그의 무교회주의 방식의 신앙 운동은 기존 기독교인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한다.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종교 사상을 개척해 나가던 함석헌은 1933년 12월 30일부터 이듬해 1월 5일까지 송두용의 집(서울 오류동)에서 가진 성서 모임에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 초고를 발표하고 토론을 거친 뒤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성서조선≫에 연재한다. 일제에 의한 조선의 역사 왜곡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우리의 역사를 바로 보고자 하는 이 글은 그의 대표작으로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방 이후 이 글은 일제 당시 검열로 삭제되었던 부분을 포함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1950. 3. 28), 이후에는 ‘성서적 입장’을 빼고 대폭 수정해 ≪뜻으로 본 한국 역사≫(1962)로 제목을 변경·출간했는데 민중의 고난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씨? 사관’을 보여 주는 그의 중요한 저술이다.
일제 말기 점점 노골화되던 식민지 교육 정책 속에서 창씨개명과 일본어 교육이 강조되자 더 이상 선생직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함석헌은 1938년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과수원을 경영하기도 했는데 이해에 자식 둘을 홍역으로 잃는다. 1940년 평양 송산리의 송산(松山)농사학원을 인수해 거처를 옮긴다. 하지만 전 주인이었던 김두혁(金斗赫)이 도쿄로 유학 가서 도쿄농과대학 조선인 졸업생들과 만든 소위 ‘계우회(鷄友會)’ 모임 사건으로 구속되었는데, 함석헌도 연루자로 검거되어 1년 여 동안 평양의 대동경찰서에 수감되었다. 결국 농사학원은 폐원되었고, 아버지는 옥살이 중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1942년 3월 ≪성서조선≫에 김교신이 쓴 권두언을 문제 삼은 일제의 폐간 조치와 더불어 함석헌 역시 연루자로 지목되면서 다시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한다. 출소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중 오랜 벗이자 스승의 관계였던 김교신의 사망으로 인한 큰 충격과 슬픔 속에서 해방을 맞게 된다.
해방 공간에서 여러 자리에 불려 다니며 평안북도 임시 자치 위원회 문교부장을 맡기도 하였으나, 반소(反蘇)?반공(反共) 시위인 ‘신의주 학생 사건’에 연루되어 소련군 사령부에 의해 체포되어 평안북도 경찰부 유치장에 또다시 50여 일을 감금당하고 만다.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산학교에 뿌려진 반정부 전단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또다시 투옥된다. 별다른 용의점이 없어 한 달 만에 석방되었으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땅 때문에 당시 내려진 ‘지주 숙청령’의 대상이 되었고 이를 피하기 위해 결국 1947년 월남을 감행한다. 1년여 후 아내와 자식 일부도 월남했으나, 어머니는 내려오지 못하고 이산가족이 된다.
월남 직후 오류동 노연태의 집에서 지내면서 YMCA 강당에서 일요 종교 집회를 시작하고, 유영모 선생 등과 함께 모임을 가지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대구, 김해 등지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 이때 가진 한 성서집회에서 그간의 무교회주의와 결별하는 신앙적 변화를 겪게 된다. 퀘이커(Quaker)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즈음으로 여긴다. 휴전 이후 다시 서울에 올라와 강연 활동과 양계장을 하며 어렵게 삶에 정착해 나가는 가운데 ≪말씀≫, ≪편지≫ 등의 신앙 잡지에 여러 글을 발표한다. 그중 1956년 ≪사상계≫ 1월호에 발표한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글에서 그는 기독교의 타락상과 계급화를 비판했는데, 이 글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후에도 함석헌은 ≪사상계≫에 영향력이 큰 글들을 발표하면서 장준하와 함께 군사 독재와 치열하게 싸우는 길을 걷게 된다. 한편으로는 언제나 꿈꾸어 왔던 ‘이상촌’을 위해 기증(정만수 장로)받은 천안(봉명동)의 땅에서 교육과 농사를 함께하는 공동체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곳의 이름을 ‘씨?농장’이라고 했는데, 후일에 직접 번역해 책으로 출간한 간디의 자서전을 읽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1958년 8월호 ≪사상계≫에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20여 일간 구금되는, 이승만 정권 시기 대표적인 필화 사건을 겪는다. 함석헌의 첫 번째 정치 평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글로 인한 필화 사건 이후 함석헌은 오히려 왕성하게 글들을 발표하면서, ‘씨?농장’에서 시국을 참회하는 단식 투쟁을 전개하는 등 사회적인 목소리를 높여 간다. 1961년 ≪사상계≫ 7월호에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게 된 당시 군부 정권을 비판하는 글 <5·16을 어떻게 볼까>로 인해 사장이었던 장준하와 취재부장이 중앙정보부에 체포되기도 했으나 당시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력 때문이었는지 정작 함석헌을 체포하지는 못했다.
1962년 2월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3개월 예정 방미 길에 오른다. 귀국한 직후 7월에 오산학교 강당에서 귀국 강연회(오산학교 동창 주최)를, 이어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사상계≫주최의 시국 강연회를 연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미처 입장하지 못한 시민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기마 경관대까지 출동한 이 강연회를 함석헌은 스스로 ‘사회 참여의 시작’으로 보았는데, 이후 장준하와 더불어 활발한 강연을 통해 군사 정권의 잘못을 꾸짖는 한편 굴욕적인 한일 협정의 비준을 반대하는 활동을 한다. 1965년에는 이를 위해 각 분야 인사 30여 명이 결성한 조국 수호 국민 협의회의 상임 대표로 선출되기도 한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을 위한 개헌을 앞두고 반대 시위에 앞장서는 한편, 1970년에는 4·19혁명 10주년에 맞추어 개인 잡지 성격의 월간지 ≪씨의 소리≫를 창간하지만 두 달 만에 폐간 조치를 당하게 된다. 이후 법정 투쟁 끝에 승소해 이듬해 8월에야 복간호로 3호를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71년에는 이후 1988년까지 지속된 ≪노자≫와 ≪장자≫ 접기
최근작 : <함석헌 수필선집 (큰글씨책)>,<함석헌 수필선집>,<들사람 얼> … 총 57종 (모두보기)
퀘이커 서울모임 (옮긴이)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의 구성은 크게 17세기 중엽 이후 300년 동안 친우회(퀘이커)의 역사를 담은 ‘퀘이커 300년’과 20세기 중.후반부터 21세기 초엽까지를 기록한 ‘그 후 50년’으로 나뉜다. 전반부를 저술한 하워드 브린튼(Howard Haines Brinton, 1884∼1973)과 후반부를 쓴 마가렛 베이컨(Margaret Hope Bacon, 1921∼2011)은 모두 퀘이커리즘(Quakerism)에 정통한 역사학자로서 그 자신들 역시 퀘이커였다. 특히 브린튼 선생은 1950년대 후반 방한 등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분이었다.
『퀘이커 300년(원제, ‘Friends for 300 years’)』은 1960년대 초반 함석헌(咸錫憲, 1901~1989) 선생이 이미 한국어로 번역을 마쳤으나 출간하는 데 어려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500권을 내는 데 500불이 필요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브린튼 선생은 <필라델피아 연회의 체이스 펀드(Chase Fund of Philadelphia Yearly Meeting)>에 요청하여 500불의 출판기금을 주선해주었다. 이와 함께 미국에 거주하던 이행우 친우에게 당신의 사진과 서문, 서명을 건네주시며 한국판 출간의 권한을 서울모임에 맡겼다. 저자 서명은 모두 세 개를 주셨는데 이행우 친우로 하여금 “가장 보기 좋은 것으로 골라 쓰라”는 당부가 있었다. 그것은 당시 “너무 연로하여 점자를 쓰면 안 될 정도로 선생의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퀘이커 300년』 한국판이 우여곡절 끝에 빛을 본 지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지나갔다. 서울모임은 2014년 12월 28일 ‘퀘이커 신앙을 한국 사회에 올바로 알리고 친우회의 내적 성숙’을 기하기 위한 목적으로 『퀘이커 350년』 출간 계획을 수립했다. 이 날은 친우회가 한국 땅에서 공식적인 첫 예배모임을 가진 지 1만 9천 7백 34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이는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진작부터 계획한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역사의 필연성 위에 이미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1953년 6.25전쟁의 폐허 위에 미국과 영국의 친우들이 도착했던 때, 그때부터였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친우회는 일찍이 노예제도, 아동에 의한 노동과 착취, 소수자에 대한 차별, 전쟁과 테러, 총포와 화약을 비롯한 무기사업 등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폭력에 저항해오면서 사회책임을 실현해왔다. 21세기에 들어 친우회는 자연과 환경, 특히 핵 문제에 대한 깊은 우려 속에서 이를 새로운 실천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이들에 대한 어떠한 임무도, 지침도, 교리도 명시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이 책에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비추고 계시는 빛 즉, 우리 안에서 발현하고 있는 ‘속 빛(inner light)’이다. 우리 친우회에는 수세기가 넘는 고요예배와 집단명상 가운데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의제가 있다. 그것은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후세에 전승시켜 왔던 퀘이커들의 방향성이었다. 그리고 그 방향성은 다름 아닌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해왔던 ‘평화’라는 진리로 향하는 길이었다.
평화! 그것은 우리 퀘이커들에게 가능해도 가야 할 길이었지만 불가능해도 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특히 한반도와 같이 좌.우로 갈라진 이념과 남.북으로 분단된 특수한 현실 속에서도, 평화! 그것은 한국 퀘이커가 지향하는 가장 높은 이상이었다. 우리는 세상에 우리가 하는 일을 어떠한 경우에도 내세우지 않고 가장 고요하고, 가장 평화로운 방법을 찾아 실천해왔다. 이러한 취지를 확산시키는 데 이 책을 출간하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 분께서 주관하시는 일이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어나니(요한복음 1장 9절)”....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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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는 전 세계적으로 평화와 화해를 위한 활동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기독교 소수 종파로서, 300여 년의 역사를 통해 전쟁에 반대하고 폭력에 저항하는 사회활동으로 미국과 영국의 퀘이커 친우봉사회가 노벨평화상(1947)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에는 서울과 대전 두 곳에 모임이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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