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1

希修 무아와 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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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아와 윤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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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단계: 내 삶의 주체로서의 '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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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업에 의한 윤회를 전제한다. 이승의 모든 디테일들이 세세하게 다 예정되어 있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고, 건강, 적성, 부모 등 삶의 큰 윤곽을 결정하는 요소들을 타고나는 것. 그러나, 마치 어떤 방송국에서 TV 연속극 제작을 시작할 때는 대충의 플롯만 있고 스토리의 디테일은 시청자 반응을 보면서 전개해 가는 것처럼, 삶의 구체성은 매순간 자유의지로 내리는 선택 (생각, 말, 행동)과 노력에 의해 스스로 완성해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그 삶의 윤곽 자체가, 삶을 특정한 방향으로 흐르게끔 하는 모멘텀을 이미 갖고 있기는 하며, 그걸 바꾸는 게 쉽지도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모멘텀을 바꾸지 못 한다는 전제 하에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바로 점성술이라고 나는 생각.) 나의 현재 행동 (생각과 말 포함)이 얼마나 skillful 혹은 wholesome한가?, 즉 어떤 貪瞋痴가 얼마나 많이/적게 들어 있나?에 따라, 이것이 새로운 업으로서, 전생/과거 업과 상호작용을 계속하면서 나의 삶을 확정해 나간다. (삶에 '저항' 않고 '분별' 없이 무조건 '수용'하는 것이 '영성'이라고 착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건 그야말로 운명/팔자의 노예로 살겠다는 얘기. 저런 수용적 태도는 최선을 다 해도 바뀌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만 적용해야 하는 태도.)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신의 쾌락/이익만 좇는 이기적인 사람은 내세에 고통스러운 곳으로 윤회하고, 바른 과정/방법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내세에 행복한 곳으로 윤회한다는 내용을 초기불교에서는 mundane right view라고 부른다. 암튼 이 삶의 책임( ≠탓)은 오로지 '나'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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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단계: '나'에 집착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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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영원불변하는 그런 영혼을 불교에선 인정하지 않는다. One and the same 영혼이 옷을 갈아입듯 몸을 바꾸는 것이 힌두교의 윤회 (reincarnation)이고, 한 양초의 불로써 다른 양초에 불을 붙이듯 그렇게 불=업이 다음 양초=생으로 넘어간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윤회 (rebirth). 힌두교의 윤회와 다른 점은, 불교의 윤회에서는 이전 양초의 불과 이후 양초의 불이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말하기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전생의 A가 남긴 업이 물질을 끌어 와 B라는 이승의 육체를 형성한다. 이 때, A의 업 덕분에(?) 몸을 받는 B는 A의 업도 상속받는다. (마치, 부모님의 사업체 상속시 채무도 함께 상속되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나는 이해한다.) 그리고 상속받은 업을 요리할 책임은 B에게 있고, 그 요리의 결과가, B의 미래 and/or B의 업을 상속할 내세의 C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어떤 업이 이승의 B 자신에게 결과를 가져오고 어떤 업이 내세의 C에게 갈지 알 수 없기에, B로서는 그저 요리에 최선을 다 할 밖에. 이것이 불교에서의 윤회이며, 해탈로써 정지시키지 않는 한, 이 과정은 영원히 무한히 반복된다. 겉모습으로만 A-B-C의 '세 사람'인 것이지 업은 그렇게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이 셋이 100% 동일한 인물인 것도 아니며 ("전생의 나" 같은 표현은 편의상의 표현), 한 생 안에서도 새로운 업에 의해 매 순간 계속 만들어져 가는 B를 딱히 규정할 방법도 없다. 예를 들어, B가 사고로 팔 하나를 잃어도 심지어 식물인간이 되어도 그는 D나 E 아닌 여전히 B다. 이런 식으로 하나씩 살피다 보면, B가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근거로 삼을 만한 본질적/필수적 부분/요소를 단 한 가지도 확정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 B의 타고난 성격은 A의 업의 결과이니, B의 뜻대로 컨트롤이 잘 안 될 밖에. 이런 내용들을 한 마디로 간단히 표현한 것이 바로 無我. (그런데 이걸 글자 그대로 '내가 없다'고 과잉 단순화하는 데에서 온갖 문제가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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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하지만 무아에 집착하면, 종교에 중독된 좀비 혹은 道士입네 하는 사이비가 된다. 어떤 사무라이가 적을 죽이면서 "오늘 내가 너의 목을 베는 것은 내 자신의 목을 베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이 하나일 뿐 너도 따로 없고 나도 따로 없는데, 누가 누구를 죽인다는 말인가? 선과 악조차 둘이 아니라 하나이거늘 무엇이 죄란 말인가?"라고 했다는 일화처럼. 온갖 비리와 탐욕에 절어 사는 스님들도 전부 이런 '논리'를 자기합리화로 악용하면서 선악, 피아의 이분법을 초월한 체한다. 그러나, 글자 그대로 '나'도 없고 '너'도 없다면, 모든 것이 완전히 空하다면, 내가 너를, 혹은 네가 나를 죽이면 안 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이 딜레마는, 無我와 空의 해석에 매우 섬세해야 함을 시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생각은 내가 아니다" 류도 지나친 단순화. 집착하지 말으라는 얘기일 뿐, 생각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나에게 있다. 부처님이라고 해서 배고플 때 남의 입에 밥숟갈 넣지 않으셨다. 나와 남을 구분 못/안 하는 게 무아인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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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불교는 윤회와 무아를 말하는데, 내가 없다면 대체 무엇이 윤회한다는 말인가? 이 둘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라며 많은 이들이 헷갈려 한다. (윤회 방편설이 등장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닐런지.) 하지만 부처님은 "니 몸도 니 마음도 100% 통제 못 하면서 '나'라는 것에 집착하는 일에 어떤 의의가 있느냐? 몸/감정/생각 등을 '나'라고 동일시하여 집착하지 마라"면서 지나친 애착/집착을 경계하거나, "self라는 관점에서도 not-self라는 관점에서도, existence의 관점에서도 non-existence의 관점에서도 생각하지 마라"고 하셨을 뿐이다. 사실 부처님은 "'나'라는 것이 있습니까?", "무엇이 윤회하는 것입니까?" 등의 질문에 대답을 아예 거부하셨다. 또, "너의 현재를 보면 너의 과거도 미래도 알 수 있으니 그런 걱정하지 말고 현재의 네 자신이나 들여다 봐라"고도 하셨다. 하지만 이건, 질문자가 무엇이 윤회하는가?, 영혼이 있는가?, 나라는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가? 등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촛점을 두었기 때문일 뿐, 윤회 자체를 부정하셔서가 아니었다. 부처님은 개인도 우주도 '과정'으로 파악할 뿐 '대상'/'객체'로 파악하지 말고 이런 생각 자체를 아예 말으라고 하셨다. 그런 '본질'에 대한 문제보다, 당장 발등의 불과도 같은 苦의 해결에나 집중하라는 메세지이며, 만물에 내재한, 영원불변하는, 형이상학적 본질이라는 것은 없으니 무엇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뜻에서 空과 無我를 말씀하신 것. Self에도 not-self에도 집착하면 안 되는 것이지만, 인간의 자기집착이 너무 강하기에 그래서 not-self를 주로 강조하는 것이고, 그래서 타니사로 스님은 무아를 절대적 진리 아닌 'strategy'라고 표현하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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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ikkhu Bodhi on Brahman / Atman / Oneness / Fullness (Brahmanism) vs. Emptiness (Early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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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ikkhu Bodhi on 'not self' or 'no 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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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94: What is Emptiness?
#95~101. No-Self? No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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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단계: 'Who' 아닌 'Thinking/Talking/Doing What'에 촛점을 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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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그럼 self나 existence 말고 어떤 관점에서 생각해야 하느냐? '너', '나', 이렇게 패키지로서의 사람 (1단계에서의 주체)에 중점을 두지 말고 (그러다 보면 그 패키지에 대한 이미지에 집착하게 되기에), 그 패키지를 구성하는 요소인 낱낱의 생각/말/행동에 집중하라는 것. 마치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 찍을 때 portrait 모드로 찍으면 주인공 얼굴만 또렷이 나오고 그 외에는 흐릿하게 나오듯이,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은 '나'라는 대상/주어에 모든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데, 그러지 말고 촛점을 과정/술어에 두고서 매사를 '나의 이익/즐거움/소망'의 관점이 아닌 오직 '인과'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라는 것이 불교의 무아라고 나는 표현하고 싶다. 'not selfish/arrogant'는 이런 전환의 결과일 뿐 무아의 목적은 아닌 것이고. 초기불교에서는 이런 시각을 transcendent right view라고 부른다. 이승에서의 '나'라는 것도 이렇듯 매순간 내가 선택하는 행동에 의해 구축하고 변화시켜 가는 것이기에, Thanissaro 스님은 '나'라는 것은 process라고 말씀하신다. 똑같은 의미에서, Bodhi 스님은 '나'를 a series of events라고 표현하신다. 이런 impersonal한 노력이 칸트의 보편적 입법원리와 통하지 않나 나는 늘 생각해 왔는데, 실제로 Vimalaramsi 스님의 경우 무아는 impersonalization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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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주어/대상 아닌 술어/과정에 집중하며 산다면, 자존심, 체면, 열등감, 자괴감, 우월감, 내로남불 등이 모두 차차 사라질 것이다. 정치인들 여럿을 우리는 자살로 잃었다. 자신이 평생 쌓아 온 self-image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 같을 때, 지금 이 순간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가장 skillful 혹은 wholesome 한지 오로지 이 하나만을 impersonal 하게 생각해라, self-image의 문제에 휘둘리지 마라, '너', '나' 이런 패키지의 차원이 아닌 낱낱의 행동 차원에서 생각해라, 후회나 자책으로 괴로와하지 말고, 잘못을 인정하고 반복 않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하는 그 선택을 매 순간 갱신함으로써 자긍심을 쌓아라.. 부처님의 이런 말씀들을 누군가 그들에게 해 주었다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와 처벌을 감수하는, 그런 용기있고 책임있는 훌륭한 모델을 우린 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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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단계: 모든 것을 초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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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을 하려면, 八正道의 8요소 모두를 만랩으로 계발하고 균형을 이룬 후, 모든 생각과 관념과 노력을 놓아야 한다고 초기불교는 가르친다. 그리고 이 생각/관념에는 '나', '수행', '해탈' 등이 모두 포함된다. "相/想에 집착하지 마라", "모든 생각과 노력을 내려 놓아라" 등의 얘기가 전부 이런 의미이며, 이것을 초기불교에서는 final right view라고 부른다. 다만 중요한 건, 훈련으로서의 생각 중단 연습은 종종 필요하지만, 해탈 직전 단계 이전에는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할 가치/목적'은 아니라는 것. 실제로 배에서 내리는 건 윤회라는 강의 건너편에 도달이나 하고 난 후 할 일. 그러니, 강의 건너편에 도달도 못 했으면서 심오한 척하느라 4단계의 얘기를 주문처럼 읊조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integrity에 주의해야 하고, 2단계의 과잉단순화된 무아에 취해 있는 사람은 3단계의 skillful vs. unskillful 사고를 수준 낮은 이분법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영성에 관심있는 이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도 바로 과잉단순화된 무아나 oneness/nonduality에 대한 집착인데, 초기불교는 이 oneness/nonduality마저 거쳐 가는 명상 단계일 뿐 truth/reality는 아니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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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 4 단계는 초기불교에 이미 있는 것이고, 1단계에서 3단계로 넘어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제가 2단계를 중간에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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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윤회를 믿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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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해탈하실 때 3가지를 보셨다.
(a) 본인의 윤회. 수십만 번에 걸치는 윤회동안 어떤 생에서 어떤 음식을 먹었었는지까지 자세히.
(b) 인간들의 윤회 패턴. 어떤 행동을 하면 결과가 어떻게 되고 그 결과가 언제 찾아오고 등등.
(c) 심리적 윤회. 어떤 마음을 먹으면 그 결과로 내 생각이 어떻게 되고 어떤 경험이 찾아오고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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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b와 c를 관통하는 공통된 법칙을 찾으셨는데 그게 12연기=인과이다. 그러니까 b는 12연기가 거시적 레벨 (생과 생 사이)에서 작용하는 것이고 c는 미시적 레벨 (한 개인의 한 순간의 의식과 다음 순간의 의식 사이)에서 작용하는 것인 셈. 윤회는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자기 마음의 변화는 직접 확인할 수 있고 어차피 미시적 차원에서의 원리와 거시적 차원에서의 원리는 동일하기에, 윤회가 믿기지 않는다면 안 믿어도 상관은 없다. 미시적 차원에서의 연기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면, 윤회가 있을 경우 좋은 곳으로 윤회할 것이고, 설사 윤회가 없다 한들 이미 이승에서 마음 수행의 효용을 보았으니 억울할 이유가 없는 것. 하지만 누가 죽을 때마다 제자들이 부처님에게 그 사람은 어디로 윤회했느냐고 묻고 이에 대해 부처님이 대답하시거나, 어떤 행동은 이승에서 그 결과가 오고 어떤 행동은 다음 생에서 그 결과가 오며 또 어떤 행동은 몇 생 후에 결과가 온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얘기들이 초기경전에 줄줄이 나온다. 해석과 의견은 물론 각자의 자유이지만, 적어도 초기불교에서 윤회는 논쟁거리조차 되지 않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명백한 사실로 전제된다. '윤회를 빼놓은 불교'라는 것은 '세모난 동그라미' 같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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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無我之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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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만 추가로 언급하고 맺으려고 한다. 예술 작품/활동에 푸욱 빠져 잠시나마 '나'를 완전히 망각할 때 무아지경이라는 표현을 쓰고, 이걸 바람직한 상태로 오해하기에 그래서 심지어는 섹스를 '수행'으로 삼는 탄트라라는 것도 생긴 것이지만, 이런 해석은 초기경전의 관점과는 전혀! 무관하다. 초기불교는 섹스, 도박, 권력, 쇼핑, 예술, 여행, 우정/사랑, 심지어 학문마저도 모두 감각적 즐거움을 위한 feeding이라 간주한다. 물론 도박보다는 예술이 건전하고 인간관계보다는 자연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건강하지만, 가장 이상적인 즐거움은 명상을 통해 자가발전하는 것이라고. 또, 예술이든 뭐든 그런 외부 자극에 distract되지 않기 위해 일상생활 중에도 늘상 "자신의 호흡에 대한 관조를 자기 마음/의식의 anchor로 삼으라"고 (바로 이것이 'centered'의 의미) 초기불교는 가르친다. 그러니 외부의 무언가에 빠져 잠시나마 자신을 망각/상실하는 의미의,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아/무아지경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완전히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 What an ir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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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와 기타 영적 전통들 간의 차이 #3. 판단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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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대한 오해 #5. 무조건 남을 내 위에/앞에 두는 것이 무아/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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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대한 오해 #3. 나와 남 사이의 경계를 없애는 것이 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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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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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동체의 화합!을 원한다면 비판!을 잘 하고 또 잘 받아 들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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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단계는 자기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상태이겠네요.. 인간의 행복감을 느끼는 상태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과문하여 글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네요.ㅜㅜ 그래서 좋습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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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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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希修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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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어를 삭제한 채 술어만 들여다 보고 impersonal하게 판단하는 것. 불교의 '무아'를 바르게 이해하는 방법.
    "박원순을 빼고 봐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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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운동 동지가 박원순을 보내는 방법 - 시사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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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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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해를 돕기 위해 선생님이 추가하신 2단계가 굉장히 값지네요 ^^ 이렇게 공짜로 봐도 되는건지 살짝 죄송스러움이 느꺼질 정도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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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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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njin Kang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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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mage may contain: text that says "Master Gotama? Is the one who acts the same one who experiences (the results of the act)?" "The one "(Το say,) brahman, one who acts is the same one who experiences, is one extreme." "Then, Master Gotama, is the one who acts someone other than the who experiences?" "(Το say,) brahman, The one who acts is someone other than the one who experiences, is the second extreme. Avoiding both of these extremes, the Tathagata teaches the Dhamma via the middle: "From ignorance as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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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mage may contain: text that says "requisiteconditioncome condition come fabrications...." SN 12:46 S 12. "Whatever brahmans and contemplatives, teachers of kamma, who declare that pleasure and pain are self-made, even that is dependent on contact. Whatever brahmans and contemplatives, teachers of kamma who declare that pleasure and pain are other-made... self-made and other-made... neither selfmade nor other-made, but arise spontaneously, even that is dependent on cont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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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타 불문, 주어/대상 아닌 술어/과정에 집중하는 것이 '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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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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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남보다 위'라는 생각뿐 아니라 '내가 남보다 아래'라는 생각 역시 conceit (자만. self-image 집착)이라고 아비담마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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