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6

Sejin Pak | Facebook [외조부 이종만] (1939)

(6) Sejin Pak | Facebook: [외조부 이종만] (1939) 

— 내 고향은 경남 울산군 대현면 용잠리이다. 농어촌으로 조그만 동네이다. 경치는 그다지 훌륭하지는 못하나, 꽤 아름다운 촌(村)이다. 어려서 글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머리를 깎고 대현학교에 들어갔다. 그 대현학교가 지금 제2공립보통학교가 되었는데, 나는 그 모교를 기념하기 위하여 최근에 15,000원을 들여 설립했다. 그리고 내 고향을 기념하기 위하여 십만원의 경비로 자작(自作) 농촌을 만들기로 하였다. 

내 집은 크게 부유하지는 못했으나, 자작농으로 백여 석 추수를 하여 그다지 궁색함은 없었고 평화하고 행복스런 가정이었다. 나는 일곱 남매중 셋째 아들로 이십 세가 지나서 어떤 꿈을 품고 고향을 등지고 부산으로 가서 무역상이니 어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보기 좋게 실패하였다. 더구나 고기잡이 하는데, 그 고기들이 푹푹 썩어지는 것이 보기 싫고, 어부들이 술 먹고 북 치고 춤 추는 것이 보시 싫어 어업을 중지하였다. 그래서 손해가 상당히 많아져서 따을 팔아 그 때 엽전으로 빚을 갚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 잘못으로 집안 살림은 어렵게 되고, 농사를 지으려니 땅이 없어 부모형제의 가슴 아파하시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비상한 결심이 생겼으니, 그것은 어떻게든지 이 쓰러진 가정과 재산을 회복시키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나는 눈물과 한숨을 고향산천에 뿌리고 분연히 떠나서 경성으로 올라와 다시 강원도로, 함경도로 개간 사업을 하느라고 거의 십 년 동안 쏘다녔다. 그러나 성공이 되지 못하여 그때 비로소 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그러나 자본이 없어 망설이다가 금강산 구경을 떠났다. 

온정리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나 그이 도움으로 회양, 양구, 춘천 등지에서 금광을 하였다. 그러나 모두 실패하고 다시 경성으로 올라와서 농림주식회사라는 것을 조직하였다. 그것은 광대한 국유림을 불하하여 경영하겠다는 것인데, 가능성이 충분히 있고 잘 진행되었으나 인물이 없어 와해가 되고 말았다. 나는 다시 개간사업으로 들어붙어 함경도 북청 등지에서 시작했는데 결국은 부자 좋은 일만 시키고 이익은 그 부자가 차지하게 되어 홧김에 다시 서울로 뛰쳐 올라왔다. 

 그때는 돈 버는 것보다 사회사업을 하겠다 생각하고 고학당(苦學堂)이라는 것을 만들어 고학생을 공부시켰다. 학교 건물이 움막 같지만 학생은 3백여 명이나 되는데 경비가 없어서 그때 선생인 이준열 씨와 나는 신문배달도 하고 석탄 구루마를 끌기도 하였다. 
학생 가르치는 것은 이준열 씨가 맡고 학생 먹이는 것은 내가 맡았는데, 그때 고생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때 고학을 같이 하던 이준열 씨는 지금 대동광업주식회사의 전무이다. 그때 여름 장마 때나 겨울 추운 때 여러 백 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고생을 하던 때를 생각하면 실로 감개가 무량하다.

내가 교육사업을 지금도 하고, 장래도 하려는 것은 그때 그 고생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고학당의 부채가 5,6천원이나 되어 할 수 없이 정리하고 문을 닫는 비운에 빠졌다. 도회를 떠나 이상농촌을 건설하자는 포부를 가지고 김여식, 김창준 씨의 후원으로 영흥군에 갔었다. 그때 사금(沙金) 파는 데를 홍수로 실패하게 되어 그 책임감으로 다시 금광을 시작하게 되었다. 함남 하원천 명태동이라는 데서 남의 광산을 누구와 둘이서 동업을 했는데, 성적이 퍽 양호하였으나 그 이익은 동업하던 사람이 다 먹고, 겨우 17전을 가지고 그곳을 떠나오게 되었다. 그때의 비분강개는 필설로 다 할 수 없다. 

나는 그 뒤로 탐광(探鑛)을 하려 산을 헤매었다. 겨울 깊은 산 속에 얼음과 눈 속으로 광맥을 찾으러 다녔다. 그때 빠진 발톱이 지금껏 낫지 않고 지금도 여름이면 몹시 가렵다. 신흥에서 현승진 씨의 후원으로 금광을 하였는데 20만원이나 벌었다가 다시 실패하였다.
그 후 나는 정평 고산면 함평광산을 자본 없이 단독으로 경영하다가 영평광산을 450원에 사서 4년동안 채광을 하였다. 나는 그곳에서도 자작자급(自作自給의 정신 밑에서 광산을 경영하였다. 의외에 성적이 양호하여 그것을 연전에 150만원에 매각하여 대동농촌사에 50만원을 내놓았다. 그리고 내 자랑 같지만은 그때 종업원에게 25만원으로 분배해주고, 기타 몇 십만 원도 은인들에게 분배하였다. 
현재 사업으로는, 대동공업전문학교에 150만원, 대동광업주식회사에 300만원, 광업조합에 15만원, 대동출판사에 10만원, 이렇게 투자해서 경영하는 중이다.

광구(鑛區)로 말하면, 장진 것이 연산액 3천만 원으로 가장 크고, 280 구가 되며, 초산에 140 구, 자성에 300 구, 여기 저기 합하면 1,000 구가 넘는다. 최근 발견된 철광이 있는데 1억만 톤은 있다고 하니 시가로 수억 원은 될 것으로 장래를 퍽 기대하며 기뻐하는 바이다. 

이 모든 재산은 내가 조금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요. 이 것은 내 재산이 아니요, 사회의 것이며, 조선의 것이라는 것으로 숨김없이 말하며, 서로 기뻐하자는 것 뿐이다. 나는 장차 생기는 재산으로 종합대학도 설립하고 싶고, 과학연구관도 지으려는 것이다. 평양에는 공업학교, 남선(南鮮)에는 농업학교, 경성에는 문과, 이과 같은 것을 두고 싶다. 나는 이것을 꼭 실현할 줄 믿고, 또 하늘에 비는 것이다. 그리고 농촌사업 자작농 실시를 회사 조직으로 해서 광범위로 하려는 것이다.

나의 좌우명은 ‘직장교장(職場敎場), 노사협조, 농촌 이상화’ 이 세 가지요, 이것을 목표로 해서 진행한다. 나는 이 모든 사업이 착수되면 각 기관을 다 그 적임자에게 맡기고 나 개인은 책임없이 떨치고 나서서 광산으로  가면 광부로, 농촌으로 가면 농부로 자유스럽게 또는 한가롭게 여생을 보내자는 프로그램이다. 이것이 내 정해진 사업이요,  내 인생관이다

유위(有爲)한 인재를 외국에도 유학시키는 것으로 지금부터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경영하는 회사는 어느 것이나 이윤이 남으면 반은 갈라서 사원과 직공에게 분배한다. 그것이 언뜻 손해 같으나 실은 성적이 나고 피차에 도움이 되는 까닭이다.

내가 지금 이만한 수확이 있는 것은 금광으로 일조일석에 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남이 모를 피와 땀이 있는 것이요, 누구나 노력 없이 졸부가 되겠다는 것은 망상이다.
그러나 돈은 어디나 굴러있는 것으로 아무나 노력하면 그것을 붙잡을 수 있다. 정부나 금융기관도 돈을 만들어 놓고 달라고 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셈이다. 그 돈을 잡지 못하는 것은 방식이 틀렸고, 노력 없이 생산 없이 그대로 가지려 하니 안 되는 것이다.
첫째가 신용이다. 사람이 신임하도록 되고, 또 신이 신임하도록 되면 그에게는 불능이 없는 것이다. 
신이 우주만물을 창조해서 우리에게 다 주셨는데, 돈인들 우리가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내게 잘못이 있고, 신이 미워하고 사람이 미워하는 까닭이다. 정성과 노력이 있고 신용만 철저히 있다면 황금은 자연히 그에게 끌려가고야 마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다. 그리고 모르는 것도 많다. 나는 종교 방면, 과학 방면, 기타 만반의 지식을 선생에게 학생에게 배우기를 게을리 아니 하여 내 수양을 쌓아가는 것이 또한 큰 일이다. 
나는 책을 읽고 눈을 감고 명상하는 것을 유일의 낙으로 삼는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참다운 인간으로 살아볼까?” 하는 것이다. 또한 만사를 선해(善解)하고 기쁘게 생각한다.

- <학우구락부> 제1권 제1호(1939. 7)
세진: 10년후인 1949년에 이종만은 가족에게 설명하지 않고 북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게 되었는데, 이 글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