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09

사무량심 수행이란 무엇인가?

사무량심 수행이란 무엇인가? : 네이버 블로그

사무량심 수행이란 무엇인가?

불교 수행과 우리 삶을 질적으로, 구체적으로 바꿔줄 수 있는 수행이 사무량심(四無量心) 수행입니다.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개발하는 수행이지요. 초기불교뿐만 아니라 대승, 티베트 불교에서
도 여러 수행법을 통해 구체화하고 있는 이 사무량심이란 무엇일까요?

빨리어로 ‘아빠만냐(appamañña)’라고 하는 사무량심은 ‘한계 없는, 테두리가 없는 무량한 마음’입니다. 자(慈)·비(悲)·희(喜)·사(捨), 이 네 가지 마음입니다.

불자로서 가꾸어가야 할 네 가지 덕목이지요.

첫 번째, ‘자’는 자애와 사랑의 마음입니다. 빨리어로 ‘메따(mettā)’입니다. 요즘은 빨리어 불교용어도 많이 보편화되어서, ‘당신에게 메따를 보냅니다.’ 이런 인사들도 자주 하지요. 이 메따가 바로 자애입니다. 중생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입니다.

두 번째, ‘비’는 연민과 보살핌의 마음으로 ‘까루나(karuṇā)’라고 합니다.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려는 마음이죠.

세 번째, ‘희’는 중생의 기쁨을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 ‘무디따(mudita)’입니다.

네 번째, ‘사’는 수용과 평정의 마음으로 ‘우뻬까(upekkhā)’입니다. 한자로 버릴 ‘사(捨)’자를 썼다고 하여 ‘내다 버림’이라고 직역하면 안 됩니다. 이 마음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여 좋고 나쁨에 휘 둘리지 않는 마음, 즉 평정심입니다.

‘자’는 사랑과 자애의 마음, 늘 고맙고 존경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비’는 같이 슬퍼함입니다. 힘들고 고통 받는 존재에게 늘 마음을 나누어주고 보살펴주고 고통을 나누려는 마음자세입니다.

그래서 자와 비를 ‘자비’라는 한 단어로 통용하기도 합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자와 비를 확연히 나
누어서 수행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자비관이라 부르는데, 자애에 토대를 둔 초기불교의 수행방법은 어디까지나 자애관입니다. 함께 슬퍼하는 연민의 마음에 토대를 둔 수행은 비관(悲觀)이지요.

 ‘희’는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사촌이 논을 사도 배가 안 아프고 기쁜 마음을 늘 유지하는 것이 희관 수행입니다. 사실 실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이번 승진 정말 축하한다.” 하더라도 속으로는 ‘그 사람이 승진하는 바람에 내가 승진 못한 거야.’라는 마음이 생길 수 있겠지요? 그런 미묘한 마음이 생길 때 그걸 관찰하고 내려놓는 것이 희관입니다.

네 번째 ‘사관(捨觀)’은 ‘우뻬까’라는 원어를 꼭 살펴보고 넘어가야 합니다. ‘버릴 사(捨)’ 로 번역했기 때문에 조금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버린다, 포기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많은 것을 놓칩니다. 우뻬까의 어원을 따져보면, ‘우뻐’는 접두어로 ‘가까이’라는 뜻이고, 에까는 ‘이까’라는 동사 원형에서 나온 말로서, ‘보다(look)’라는 뜻입니다.

‘가까이서 본다’는 뜻인데, 무엇을 가까이 본다는 뜻일까요? 바로 존재현상을 있는 그대로 가까이에서 보는 겁니다. 그러면 존재현상은 늘 무상·고·무아, 삼법인의 법칙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명료히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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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량심 수행은 지혜 수행, 삼매 수행 둘 중에서 어느 것일까요?

많이들 지혜 수행 쪽이라고 착각하는데, 이 수행은 삼매 수행의 하나입니다. 주석문헌의 성격을 띤 《청정도론》에 보면 삼매 수행으로 명확히 분류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빠사나 수행이 아니고 사마타 수행이지요. 위빠사나 수행은 통찰지를 개발하는 수행인데, 사무량심 수행은 마음을 집중하여 삼매를 얻는 사마타 수행에 속합니다. 이 사무량심 수행 중에 자·비·희까지는 쉽게 성취할 수 있지만, 가장 맑고 고요하며 깊이 있는 제4선은 오직 ‘우뻬카(평정심) 수행’을 해야만 성취할 수 있습니다. 사무량심 수행을 ‘평정심’까지 제대로 수행하면 바로 4선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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